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106화 (106/195)

<-- 로마 쟁란 -->

005

갈리아 지역의 북부에 위치한 아르플뢰르 항은 그야말로 지옥의 화장터와 같았다.

강물의 흐름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전선들을 서로 사슬이나 밧줄로 연결하여 놓았는데, 그것이  로마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패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시뻘건 화염들이 수백 척에 달하는 로마의 전함들을 불태워버리고 있었다. 그 화염을 제공한 것은 누구도 아닌 황혼의 마법사 멀린이다. 멀린은 직접 허공을 떠다니면서 시뻘건 화염구를 흔들거리는 강물에 떠다니는 전함들에 떨구었다.

"브리튼의 악마다! 마법사들은 당장 마법사 계집을 떨궈라!"

"궁수들은 뭘 하는가!"

"어서 쏴!"

하지만 로마 병력의 공격은 결코 브리튼 최고의 마법사에게 닿지 않는다.

그 어떤 공격도 방어 마법으로 무효화시키니 멀린에게 치명상을 입힐 방법이 없었다. 한편 빠른 속도로 무역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아르플뢰르 항에 상륙한 브리튼군이 백병전을 펼치면서 전황은 브리튼 측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일으키다니, 이거 참을 수가 없군!"

"처자식도 없어서 딱히 걱정해 줄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좋을 줄이야."

겁도 없이 대제국 로마의 속국으로 취급받는 갈리아 지역으로 상륙한 브리튼군은 겨우 8천에 불과했다.

극소수에 불과한 병사들은 모두 정예병들이었고, 무엇보다 로마와의 전쟁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성격이다. 사나이로서 대제국에 싸움 한 번 걸어보고 싶다는 호탕아들이었고, 그들은 비세리온과 함께 도버 해협을 건너 아르플뢰르에 상륙하였다.

고작해야 8천.

그러나 브리튼에는 최고의 마법사라 불리는 멀린이 붙어 있었다.

그녀가 로마 전함이 화염을 붙여버리자 항구 일대는 큰 혼란에 빠져들었고, 불길에 휩싸여 언뜻 보이는 브리튼 병력은 실제보다 많아 보였다. 로마군은 후퇴하기 바빴고, 아르플뢰르 항에 저장하고 있던 모든 보급품들이 털렸다.

시커멓게 타오르는 전함. 항구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전함들이 모조리 불타버리면서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우선 기습 작전은 성공했다. 전투에서 붙잡은 로마 병사가 밝히길 갈리아 총독 프롤은 브리튼군이 상륙한다면 칼레 항이 될 것이라 여기고 그쪽에 병력을 주둔시켰다고 한다.

분명 그 목적은 브리튼군의 상륙 저지였겠지.

하지만 비세리온은 이전의 계획을 모두 철회하고 그 목표를 칼레에서 아르플뢰르로 돌렸다. 개인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첩자에게 아르플뢰르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로마 전함의 대부분이 주둔하고 있는 항구를 불태워버린다, 그것이 노림수였다.

로마 병사들을 사정없이 베어가르고 피칠갑을 하고 있던 가레스가 물었다.

"전하, 그런데 이제 어쩌죠? 적진에 둘러싸인 형국이예요."

강을 거슬러 올라가 아르플로리 항을 점령.

지금 브리튼군 8천이 버티고 있는 곳은 적진의 중심과도 같았다. 그 어디에도 브리튼에 호의적인 도시는 없었고, 칼레에서 멀뚱멀뚱 수평선만 노려보고 있을 갈리아 총독이 이제 곧 소식을 듣고서 추격을 감행하리라.

가레스는 이제 곧 자신의 군주가 브리튼으로 귀환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항구에서 로마군이 사용하던 물자를 대량으로 노획했지만 장기간 버틸 수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 적국의 중심에서 사투를 벌인다는 것은 위험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해로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퇴각로조차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가레스의 예상과는 달리 뱃머리를 당장에 돌리진 않았다.

"해군 병력은 그대로 서쪽으로 물길을 잡고 푸아티에로 가라."

"예에에? 푸아티에는 갈리아 서쪽 지방.... 브리튼 쪽이 아니라고요!"

금발의 유녀가 새하얀 얼굴이 질려서는 비세리온의 두 어깨를 홱홱 흔들었다. 무례라는 것은 알지만 자신의 군주가 말하는 명령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지 않은가. 당장에 돌아가도 모자랄 마당에 유일한 퇴각로로 작용할 함선들을 갈리아 서쪽 지역으로 이동시킨다니. 아군에게서 퇴각로를 위해서라도 해군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그 해군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겠다고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아직 로마를 더 두들겨야지. 이 정도로는 부족해. 적들의 시선을 브리튼에서, 갈리아를 헤집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동시켜야 한다고. 게다가... 이미 도버 해협에는 로마 군함들로 쫙 깔렸을 테니까. 우리가 귀환을 선택하면 가장 먼저 로마의 대선단과 싸워야 할 거고. 물론 해전이 벌어지면 아군이 승리할 확률인 조금도 없어."

비세리온은 갈리아 총독이 아군 거점이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칼레 항에 있는 군함들을 모조리 동원하여 도버 해협에 깔아놓을 것이라 확신했다. 적어도 프롤이라는 총독에게 일반인의 지능이라도 있다면 브리튼군의 퇴각로를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도버 해협의 수로를 막아버릴 것이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실제로 프롤은 브리튼의 공세를 듣자마자 해군 병력을 총동원하여 도버 해협을 막아버렸다. 만약에 아르플뢰르 항에서 함선을 이용해 퇴각을 결정하였다면, 로마 함선의 공격을 받아서 모조리 바다에 수장 되었으리라.

"우리도 푸아티에로 간다. 갈리아의 모든 농토를 불태우고 철저히 파괴한다. 건방지고 오만한 로마인들에게 브리튼은 역마에 가까운 놈들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자!"

성검 엑스칼리버를 치켜들면서 외치는 카멜롯 군주의 명령에 모든 병사들이 환호했다.

로마와의 첫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기에 그만큼 사기가 드높다. 대륙의 최강국을 자칭하는 로마가 철저히 패배했다. 그 사실만으로 브리튼 병사들의 가슴 속에 자긍심이 깃들었다. 분명 소식을 들었을 로마 황제는 울화통을 터트리고 있을 것이다.

가웨인아 멀린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의 고생길이 열린 것 같네요, 멀린 님."

"아하하하! 뭐, 이 멀린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말이야. 우리들은 역시 골치 아픈 남자를 정인으로 두고 있는 것 같아."

멀린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답하였다.

그 말에 가웨인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대제국 로마를 상대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용맹스러운 군주에게 변함없는 연심을 품었다. 무모하고 위태롭지만 결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역적 보두앵과 싸울 때도 그러했다. 고작해야 변경 지역인 콘월 공작령만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브리튼 전역의 귀족들과 싸워서 승리했다.

분명 모든 전술가들이 고개를 저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기 속에서도 승리한다. 분명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전투에서도 승리한다.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 부르지만, 그 기적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는 승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요소는 분명 비세리온일 것이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대제국을 상대로 싸움을 내걸겠는가.

태양의 기사라 불리는 그녀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브리튼에 비해서 대제국 로마는 너무도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최강국이었기 때문이다. 로마가 마음만 먹는다면 20만 대군으로 브리튼을 쓸어갈길 수 있었다.

"푸아티에로 가자!"

"지나가는 촌락을 모두 파괴하고 약탈하라!"

"다 죽여라! 로마에 제대로 엿을 먹여보자!"

칼레 항에서 브리튼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해서 밀집되었던 로마 병력들이 일제히 남하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빨리 아르플뢰르를 공격한 브리튼군 8천이 서진을 개시하였다. 근처에 보이는 도시와 촌락들을 모두 파괴하고 약탈을 저질렀다.

갈리아의 서부 지역은 모두 곡창지대였는데,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던 밀밭에 불을 질러버리고 군마로 짓밟아버리면서 황폐화로 만들어버렸다. 기사도를 섬기는 자로서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만 이것은 전략의 일부다. 가웨인은 분명 비세리온에게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라 믿고서 그 악행들을 모두 용인했다.

당연히 갈리아를 철저히 파괴하고 약탈하는 브리튼군의 방식에 대해서 갈리아 총독 프롤은 머리꼭지가 제대로 돌아버렸다.

기사도를 망각하고 일반 백성에게까지 그 피해를 전가시키는 브리튼의 행동에 분노, 갈리아 군단을 이끄는 모든 지휘관에게 명령하여 무슨 수단을 동원해도 좋으니 서둘러 추격하여 브리튼군의 후미를 공격하라고 했다. 이대로 브리튼군의 악행을 방관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건 대제국 로마의 위신이 달린 문제였다.

"당장 비세리온을 체포하여 죽여라!"

칼레 항에서 출발한 로마군 3만 여명의 군사들이 일제히 서진을 개시. 푸아티에로 향하고 있을 브리튼군의 뒤를 추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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