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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94화 (9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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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루키우스 티베리우스(Lucius Tiberius)는 동로마의 황제인 유스티아누스 1세의 조카딸이면서, 나아가 갈리아 지방을 석권하고 서로마 제국의 잔적을 소멸시키고 있는 당대의 영웅이었다.

게르만족의 남하를 통해서 세워진 서로마 제국의 멸망. 분명 그 부분에는 그리스, 아프리카, 히스파니아, 이집트 왕 판도라스, 바빌로니아의 패망과도 연관이 되어 있겠지만 동로마 제국의 군사를 이끌고서 서로마 병력을 궤멸시킨 루키우스의 전공도 실로 막대한 수준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는 장군직에서 물러나고 동로마 국세청의 재무관으로 활약하고 있는 은발의 미녀는 당장에 브리튼에 조공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녀의 제안을 듣고 있는 정복 황제는 턱을 괴고서 자신의 조카딸을 내려다 보았다.

대체 누가 데려갈 지, 전쟁에 대해서 너무 관심을 가지고 여성으로서 조신한 모습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들판을 누비는 사나운 맹수라고 할까. 로마를 세운 시조 로물루스의 핏줄을 가장 짙게 물려받았다는 평가는 역시 허풍이 아닌 모양이다.

"고작해야 소국 따위에 조공을 내라고 할 필요가 있겠느냐?"

"하지만 숙부 폐하, 과거에 혼란기를 겪었던 브리튼은 점차 안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국에 조공을 보낼 여력도 충분할 터이고, 더욱이 대륙의 게르만족을 연이어 막아내고 있는 브리튼을 견제하고 길들이기 위해서라도 조공 제안은 매우 합리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아...."

딱히 섬나라 소국 따위에게서 뜯어낼 수 있는 조공이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생각한 황제였지만 당돌하게도 소국을 상대로 진지하게 일임하는 루키우스를 보며 한숨을 토해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서 패주하기 시작한 게르만족의 패잔병들 중 일부가 브리튼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들은 로마 황제는 분명 패망하기 직전인 브리튼이 멸망할 거라고 생각하였는데, 오히려 게르만족을 밀어붙이면서 백중지세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브리튼의 군주가 상당한 군략을 가진 사령관이라 들었다. 그런 자가 게르만족의 패잔병 세력을 약화시켜 준다면야 자신으로서도 바라는 바였다.

게르만이라는 족속들은 언제나 로마의 불만감을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지금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각 로마 군단들을 모두 출병시킴으로서 서로마 제국이 가지고 있던 영토들을 대부분 탈환. 과거 멸망하기 이전의 통일 로마를 이룩하겠다는 꿈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시금 로마의 부활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바로 황제가 꿈꾸는 야망이자 원대한 꿈이었다. 그를 위해서 조카딸을 군단장으로 임명하여 각지에서 전투를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여러 명장들을 육성하여 그녀를 뒷받침 해주었다.

지금의 로마를 만들어낸 데는 명장 루키우스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분명 과거 로마는 브리튼을 속국으로 삼았고, 조공을 받아왔다. 과거의 로마를 재현하고자 하는 황제로서는 조카딸의 의견을 마냥 거부할 수만은 없었다.

"망할 조카딸아, 생각을 해봐라. 아직 게르만족에게서 영토를 모두 탈환하지도 못 했다. 그런데 또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것이냐."

"전쟁은 군인의 기본 원칙입니다."

"군인에게는 그렇지만 황제에게 있어 전쟁은 무엇보다 기피해야 할 대상이다. 조카딸아, 너는 너무 전쟁을 좋아해. 만약에 네가 황제가 된다면 로마는 몇 년도 가지 못할 게다."

"악담입니다. 루키우스는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습니다."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견 연령을 가지고 있는 은발의 미녀는 뾰루퉁한 표정을 지으면서 숙부의 의견에 반대했다.

나는 언젠가 훌륭한 황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며 자신의 전쟁 주장론을 굽히지 않았다. 전쟁을 삶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전쟁광에게 있어 새로운 전쟁은 언제나 받아들여야 할 숙명과도 같았다. 자신의 휘하에는 수많은 명장들이 자리를 지켜주고 있었고, 아프리카의 사막을 누빈 백전불패의 군단도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와 아프리카 등 각지에서 속국왕들에게 병력을 차출하여 군단을 편성한다면 족히 10만에 가까운 대군으로 불어날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선단을 타고 바다를 건너서 브리튼을 공격한다면 족히 반 년 이내에는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지금 이 시기에 전쟁을 주장하다니,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큼성큼 걸으면서 황제의 알현실에 들어온 것은 황후 테오도라였다.

대부분 귀족 가문에서 황후를 배출하는 것이 황실의 일반사인데 반해서, 테오도라는 곰을 사육하는 아버지의 밑에서 자란 서커스의 배우 출신이었다. 풍만한 몸매를 과장하듯이 음란한 춤을 길거리에서 추기도 했고, 입과 음부, 항문에 이르기까지 모든 매춘업을 했던 천민이었지만 타고난 재주와 수완을 알아본 황제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황후에 올랐다.

로마 역사상 처음으로 매춘부가 황후가 되었고, 그녀는 공동 황제처럼 남편을 도와서 로마의 국정을 이끌고 있었다. 나라의 국고와 경제를 가장 신경 쓰는 성격인 터라 과거 로마가 확장시킨 영토를 모두 탈환하겠다는 야심을 가진 남편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전쟁관 티베리우스와는 껄끄러운 관계였다.

"....수, 숙모님...."

"루키우스! 또 당신인가요, 정말이지 망아지처럼 큰 처녀가 되었으면 남편감이나 물색하세요!"

"루, 루키우스는 절대 혼인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전쟁에서 말을 몰고 칼을 휘두르고, 함성을 지르면서 전우들과 싸움에만 매진할 테니까요."

"그 전우들은 무슨 잘못인가요. 무책임한 딸내미를 만나서 가정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전장터에서 무리하게 싸우다가 죽겠군요."

쌍심지를 켜면서 으르렁거리는 황후의 모습을 본 은발의 소녀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로마 황제의 조카딸이면서 대군단을 지휘하는 사령관이었지만 유독 자신을 어릴 적부터 키워준 황후에게만은 약했다. 그녀를 진심으로 어머니라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매춘부 출신의 천한 황후라고 대중들이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루키우스만큼은 어머니와도 같은 황후를 사랑했다. 그렇기에 황후가 음란한 창녀라 욕하는 대중들의 손가락을 모조리 잘라버리는 광기 어린 행동까지 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황후가 매춘부를 하던 시절에 나체쇼를 벌이는 것을 구경한 시민들을 모두 잡아다가 그 두 눈알을 뽑아버리기 했으니 황후를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으리라. 지나치게 과격한 조카딸의 모습에 황후로서는 근심만 더해질 뿐이지만.

"설마, 그 비세리온 펜드래건이라는 자와 싸우고 싶어서 일부러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건 아니겠죠?"

".....아니야."

은연중에 숨기고 있던 비밀에 대해서 들켜버리자 은발의 소녀가 비교적 크게 움찔거렸다.

그를 놓칠 리가 없는 황후의 아리따운 얼굴이 일그러진다. 두 주먹으로 티베리우스의 관자놀이를 사정없이 짓누르면서 소리쳤다. 역시 과거에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천민 황후답게 그 주먹이 매섭다. 굳은 살이 박혀있는 주먹은 심각하게도 아팠고, 티베리우스는 양쪽 관자놀이를 짓눌리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악! 티, 티베리우스의 머리가 터져! 아파아아!"

"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겠다고요?! 이 멍청한 딸내미가!"

그 모습을 옥좌에서 바라보던 황제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다시면서 시선을 피해버렸다.

과거부터 적국에서 명장으로 이름 높은 장수를 발견하면 죽자 살자고 달려드는 조카딸다운 모습이다.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걸까. 적어도 로마와 속국 관계에 속한 나라의 장수에 대해서는 그나마 수용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타고난 호승심이라고 할까. 이 세상에서 누구 가장 강한 지를 두고서 매번 다투는 입장을 보이니 그녀의 군주인 황제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의 양대 명장인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와도 묘하게 경쟁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던가. 물론 티베리우스를 딸처럼 여기고 있는 중년 사령관들은 그에 대꾸를 해주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티베리우스는 이번에 다 늙은 중년 남자가 아니라 자신 또래라 할 수 있는 연령의 청년이 전쟁 군주로서 게르만족을 연패시키고 그 무명을 떨쳤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에 열광하고 있었다.

브리튼을 싫어하는 것도, 비세리온 왕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싸워서 이기고 싶다. 누가 더 강한지를 당당하게 입증시키고 싶다. 그런 무리한 생각이 바로 루키우스 티베리우스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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