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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91화 (9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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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멜롯 왕궁에서의 연회.

한창 귀족과 귀부인들의 사교댄스가 이루어지고 있을 축제와 사치의 현장이겠지만 정작 개최자 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군주인 나는 연회장에 나서지 않았다. 애초에 얼굴을 들이밀 필요가 없다고 할까. 최소한적인 대외 관계라면 충분히 유지하고 있었고, 귀족들과의 사이도 원만하다. 그들에게 필요한 재산과 지위를 지불해주고, 나는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군사권과 지휘 명령권을 얻는다.

애초에 이 시대에 있어서 군주와 귀족들은 물질적인 이점을 두고서 그 관계를 가지지, 기사도에 의한 정의감이나 충성 따위에 의존한 관계가 아니다. 그들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것은 폭군이나 하는 짓이고, 막연하게 기대를 가지는 것은 망군이나 하는 짓이다.

"솔즈베리 철 광산은 그 주변 귀족들에게, 그리고 발견된 금 광산에 한해서는...."

새로 발견된 광산에 대해서는 그 지역에 먼저 우선권을 주고, 그 다음에는 광산에 투자하는 금액에 따라서 귀족들마다 차등제를 둔다. 물론 수익금의 일부는 왕실에 넘겨줘야 하겠지만 그것은 지극히 일부였고, 나머지는 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했다.

철저한 군신 관계의 확립.

어느 쪽으로도 치우쳐지지 않았지만 미묘하게 왕권 측면이 강화된 체계를 이룬다.

그게 카메롯의 현 상황이다.

정치의 중심을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방면에서만 초점을 맞춘 단계. 적어도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중요시하게 여기는 아서에게는 맞지 않는 정치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순진무구한 기사왕의 관점에서는 그저 속물들의 정치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군주가 다수의 귀족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제압하고 지배하는 방법이다.

강압적인 칼날보다는 빛나고 탐욕스러운 황금으로 다스린다.

그 어떤 세력의 군주보다도 눈부신 황금을 내려주면서, 한편으로는 결코 거스를 수 없도록 위압적인 칼날을 항상 준비한다. 황금과 칼날. 그것을 가장 균등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다루는 것이 군주로서 가장 적덜한 덕목이리라.

"전하,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허리까지 내려오는 푸른 머리카락을 머리핀으로 정리한 미녀가 드레스 차림으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평소 차림도 무척 아름답다고 자부하지만 역시 여성이니만큼 여자력이 가장 잘 표현되는 드레스를 입으니 그 아름다움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타고난 미녀라고 할까.

옷걸이가 예쁘니 뭘 입어도 예쁘군. 카멜롯의 귀족들은 물론 웨일즈 귀족도 모이는 대연회라서 그런지 아그라베인도 오늘만큼은 드레스 차림새였다. 평소에는 간소한 사복 밖에 입지 않는 그녀치고는 꽤나 대담한 옷차림이다.

"누가 나를 기다리는데? 나를 딱히 기다릴 사람도 없을 걸?"

"모르간 님이십니다."

"그런 거짓말이 통하겠냐. 애초에 모르간이 인파가 많은 연회장에 출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 이야기잖아."

모르간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불신한다는 쪽이 정확하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둘 뿐, 그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배척해버린다. 자신에게 이로울 것도 없으며, 자신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은 경멸에 가까운 눈빛으로 바라본다. 괄괄한 성격의 마누라님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까. 애초에 우리가 연애할 때부터 그랬다. 특히 첫 인상은 갈수록 최악이었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욕부터 날렸던 그녀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녀와 사귈 수 있었는 지부터가 궁금해진다.

아무리 생각해고 내 자신이 대단하다고 할까. 아발론의 붉은 마녀님을 함락시킨 내 자신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었다.

"들켰, 습니까."

"적어도 가웨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신빙성이 있었을 텐데 아쉽네. 물론 가웨인한테는 연회에 불참석할 것 같다고 미리 통보를 넣었지만."

"모르간 님만큼이나 전하께서도 사람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부부는 닮는다고도 해. 모르간의 말버릇처럼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인간을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부질 없는 것도 없다고도 하지. 모르간이 옳았을지도 몰라. 매번 옥좌에 앉아서는 달갑지도 않은 녀석들과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지."

내 말에 아그라베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그에 대합 정답을 도출해냈다.

"모르간 님과 전하.... 두 분 모두 갱년이라도 오신 겁니까? 갱년기에서 비롯된 인간 불신과 대인 기피. 과연 그런 이유라면 납득이 충분히 갑니다.":

"누가 갱년기라는 거야. 나도 모르간도 아직 쌩쌩한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고. 내 애를 보기 전까지는 늙을 수 없지."

요즘 모르간에게 넌지시 임신의 가능성을 물었지만 고개를 도래도래 저을 뿐이다. 설마 내가 무정자증도 아니고서야 그렇게나 성관계를 했는데도 소식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맙소사 설마 내게 문제가 있는 건가. 모르간을 제외하더라도 다른 여성들에게서도 소식이 없으니 나 자신에게 의심이 점점 들기 시작한다.

아니면 멀린이 준 그 특제 미약의 영향인가.

과도한 약의 의존성은 몸을 해롭게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설마 이런 현상이 일어난 건 아니겠지. 매번 하반신이 불끈불끈 서는 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면, 빛 좋은 개살구라고 할까.

물론 여성들을 충분히 만족시켜는 주고 있으니 불만은 없지만서도. 나도 이제 나이도 점점 들기 시작하는 터라 내 아이를 보고 싶다. 흔히들 중년 남성들이 생각할 법한 목표가 아닌가.

"저에게 실험을 해보시면 적어도 3개월 이내에는 어떤 소식을 볼 것도 같습니다만."

"아서를 왕비로 들이는 것도 전쟁통 수준이었는데, 이 시기에 또 너를 안으라고? 진짜 모르간에게 죽어버릴지도 몰라."

"예, 모르간 님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전하와 함께 숯덩이가 된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하는 저는 이상한 걸까요?"

"너는 첫 인상부터가 이상했잖아."

그 말에 아그라베인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이상함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는 분위기다.

뭐냐, 이 녀석. 진짜 자신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그런데 왜 개과천선할 생각이 없지? 지금 생각해보면 콘월 출신의 공주님들은 모두 그 성격이 이상하다.

가웨인. 가레스. 아그라베인. 모르간. 그리고 모르간의 어머님인 이그레인까지. 그녀들 모두가 성격에 한두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는 것을 가정하면 아직까지도 보지 못한 공주님들도 이상할 가능성이 높았다. 가령 모르간의 언니인 모르가즈와 일레인이라던가. 분명 이상한 성격일 것이다.

"적어도, 아서 님께서도 참석하시는 데 가보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외교적인 문제러도 마찰을 빚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아예 참석하지 않을 건 아냐. 나도 외교적인 관례에 대해서는 숙지하고 있으니까. 다른 귀족들의 이목도 조금 신경 쓰이고. 웨일즈에서 수많은 빈객들을 맞이하고 있는만큼 그 체면에 맞춰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 말씀은?"

"나중에 갈 거야. 나중에. 연회가 슬슬 폐막을 맺을 분위기가 되면은."

"알겠습니다."

아그라베인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를 보채지 않고 스스로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자리를 떠나고나서 왕실 재단사들이 미리 준비한 예복으로 갈아입을 생각이다.

군주에 어울리는 화려한 예복을 입고서 우리의 원숭이처럼 대충 수십 분 정도 얼굴을 비춘 다음에 사라져야지. 솔직히 말해서 군주로서의 관례에 대해서는 매우 귀찮게 생각하고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냐. 사람이 참석하고 불참석하고는 개인의 마음인 것을, 그것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지는 꼴이라니. 군주도 형식에 박힌 틀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모양이다.

아그라베인이 떠나고서,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문이 아니라 발코니로 등장하는 것을 즐기기 시작한 아내님이 창문을 열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장미를 연상시키는 짙은 진홍색의 드레스를 입은 모르간이 뾰루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에는 새하얀 실크 장갑과 새빨간 구두를 신고 있었다. 가녀린 목덜미에는 루비 목걸이를, 그리고 귀에도 작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달았다. 평소의 그녀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외모에 신경을 썼다.

여느 귀부인들처럼 각종 장신구와 화려한 드레스로 완전 무장한 그녀의 모습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고 할까. 촉촉하게 젖은 선홍빛 입술과 오밀조밀하게 세련된 이목구비까지. 그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미의 여신이 질투를 무심코 해버릴 정도로 아리따운 여성이 말했다.

"연회장에는 안 갈 거야?"

"설마 기다리고 있었던 거냐....."

"당연하지. 아무리 나라도 사교장에서는 레이디가 남성의 에스코트를 받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

어이쿠. 내게 그 에스코트를 해달라는 건가.

이거 황송스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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