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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87화 (87/195)

<-- 왕좌의 주인 -->

007

아서와는 저녁 만찬을 가지기로 하였다.

당연히 카멜롯의 군주와 웨일즈의 군주가 단 둘이서 동석을 하는 자리이니만큼 단순히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모르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만찬회가 열리는 자리에는 나와 아서, 그리고 음식을 나르는 사용인들만이 참석한다. 물론 사용인들은 일절 말을 할 수 없으므로 단 두 명의 사람만이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무채색의 메이드복을 입은 시녀들이 길다란 테이블에 여러 음식을 두고서 가지란한 손길로 세팅을 시작했다. 아서는 조금씩 오리고기를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고, 나 또한 나이프와 포크를 이용해서 고기를 먹었다. 나와 아서, 둘 다 먹성이 좋은 체질은 아니었기에 식사는 딱히 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작게 자른 고기를 한 점 자르면서 맞은편에 앉은 아서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서 왕, 아니 아버님과는 무슨 대화를 나눈 건데?"

"그, 그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내 말에 아서가 말을 더듬었다.

분명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은 확실한데.

얼굴을 붉히면서 애써 익숙하지도 못한 거짓말을 하는 아서를 바라보았다. 세피아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우서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긴 나눈 모양이다. 그다지 궁금하진 않다. 언젠가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아서의 성격에 내게 불리한 행동을 할 리도 없었고.

"아버지하고 만나서 좋았어요."

"다행이네."

"오라버니는 아버님과 별다른 이야기를 하신 적은 없나요?"

"내 얼굴을 보면 쌍욕부터 날리시기 바쁜 분이신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겠냐. 오히려 칼이나 안 맞으면 다행일 거다."

내 말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우서 왕은 왕위 찬탈자로 여기고 있는 나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었고, 자신의 딸이 마땅히 차지했어야만 하였던 왕위를 빼앗은 도둑놈이었다.

우서는 분명 자신의 후계를 잇는 것은 딸인 아서 펜드래건이 될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가 굳게 믿었던 그 예언은 끊어졌다. 콘월에서 출발하여 카멜롯의 군주에까지 올라버린 나에 의해서. 우서가 생각하기에 나라는 존재는 시골에서 상경해서 벼락출세를 해버린 근본 없는 놈일 것이다.

그런 관계인데 어떻게 사이가 좋아질 수 있겠는가.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 나도 바라지 않는다. 그런 늙은이의 수발을 드는 것 자체가 싫었다. 어차피 피가 이어진 아버지도 아니었으니까.

"오라버니를 높게 평가하고 계셨어요."

"구리치지 마."

"진짜예요. 제가 게르만족과 칼레도니아 정벌까지 말씀을 드리니 오라버니를 높게 평가하신 것 같아요."

"믿기 힘들어."

우서 왕의 이미지는 혈통을 따지는 구시대적인 남성이었다.

채찍을 들고 다니면서 송아지 구이가 덜 익혀졌다면서 요리를 쥐어짜낼 것처럼 생긴 결벽증 성격이라고 할까. 시골 귀족가문에서 자라서 그다지 귀족다운 품위가 부족한 나에게 있어서는 그저 거만할 뿐인 밥맛으로 보일 뿐이다.

그런 녀석이 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라.

아무리 생각해도 믿기 어렵다. 아서가 나와 우서의 사이를 원만하게 하려는 작은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내 말에 아서가 키득키득 웃음을 지었다.

우서에 대해서 의문을 드러내는 내 모습이 재밌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서를 여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우서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혹시, 오라버니."

"왜?"

"저와의 혼담, 어떻게 생각하세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아서가 말했다.

자기가 말한 대사였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었는지 얼굴이 터지기 직전이다.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처럼 보이는 얼굴이었고, 이성 경험이 전혀 없는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사랑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숫처녀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겠군. 모르간이 보았다면 쌍심지를 켜고서 달려들었을 모습이 아닌가. 지금 모르간이 이 자리에 없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러신가요? 저, 저를 마음에 들어하시나요?"

"어, 너는 매력적인 여성이니까. 조금만 더 성숙해지면 분명 엄청난 미녀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건 내 진심이다.

아서 펜드래건이라는 여성은 눈부신 미녀였고, 풋풋한 순수함을 가진 가련한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추후에 미녀가 될 것이라는 말은 누구나가 인정하겠지.

"하지만 내게는 모르간이 있어."

"저는 첩도 괜찮은....."

"왕실의 정통성을 가진 공주님이 첩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

필사적인 아서의 구애를 거부했다.

그녀를 첩으로 들여버리면 분명 브리튼 왕실에 충성하는 극소의 귀족 세력과 웨일즈에서 할거하고 있는 아서의 부하들에게 큰 반발을 가져올 수가 있다.

고귀한 공주님을 첩으로 들이는 것은 오히려 그녀의 명예와 긍지를 더럽히는 결과가 될 것이다. 분명 그 누구도 용납하지 못할 것이고, 베디비어와 케이를 비롯한 여러 부하 기사들이 거센 저항을 시작하리라. 가웨인의 경우와는 차원이 다르다. 가웨인은 오크니라는 칼레도니아의 작은 소국가의 공주님이었고, 그에 반해 아서는 브리튼 왕실의 공주님이시다. 그 신분의 격차부터가 크게 벌어진다.

"그러면 저는 실격이라는 뜻이네요."

"실격이라는 말은 적당하지 않아. 너는 내게 있어서 그 어떠한 점도 부적격하지 않은 사유가 없는 완벽한 여성이니까."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건 알지만요.... 만약 모르간 언니보다 오라버니를 먼저 만났으면, 좋았을 텐데."

아서가 낯빛을 어둡게 흐리면서 말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말하고 있었고, 그리고 진심으로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나를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을. 그리고 자신보다도 먼저 모르간이 내 아내가 되어버린 것을. 그리고 내 마음 속에 머무를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것을.

"미안해요. 괜한 것을 물었네요."

"아니. 성가시게 생각하진 않아."

"소녀의 프로포즈를 차셔놓고는 너무 퉁명스러운 말이예요. 물론 그게 오라버니다운 모습이지만."

나는 여심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애초에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그리 깊은 성격도 아니다. 모르간과 가웨인에 한해서는 친절한 남성으로 변모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오로지 이용가치로 그 무게를 재단하는 지독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내가 삐뚤어진 성격이라는 건 잘 안다.

하지만 이런 비틀린 성격이 아니라면 한 국가를 책임지는 위정자로서 활동할 수 없다. 뒤틀린 사람이기에 왕좌의 무게를 견뎌낼 수 있는 것이리라.

"카멜롯을 구경시켜 주시겠어요?"

"알았어. 내일을 기대해."

"감사해요, 오라버니."

아서는 내게 연이어 구애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매달리듯이 애정을 갈구해버리면 내가 불편하게 여길 거라고 여겼기에 그만둔 것이겠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뺨을 보아하니 분명 속마음을 참고서 억지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소녀는 진심으로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나는 그녀의 고백을 단번에 차버렸다.

"모르간 언니에게 져버렸네요."

"그러게."

"그러게, 가 아니라고요! 저를 좀 더 다독여줄 수는 없나요? 저의 약해진 모습을 보고서 두근두근한 감정을 느끼실 오라버니를 제가 곧바로 낚아채려고 했는데...."

피식 웃으면서 아서가 말했다.

애써 이런 상황에서 농담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쓴웃음이 지어졌다. 처음으로 이성에게 고백하는 기사왕의 구애를 무시하는 것은 정말이지 가혹한 결정이었다.

모르간과 아서, 이 두 명의 소녀를 모두 왕비로 들인다는 선택지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위험성이 크다. 두 소녀를 모두 왕비로 들이려다가 그녀들을 지지하고 있는 세력과 마찰을 빚을 위험이 있었다.

모르간을 지지하는 콘월 세력.

아서를 지지하는 웨일즈, 브리튼 세력.

분명 그 지지 세력의 규모를 놓고 보자면 모르간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아서를 왕비로 들이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해서 모르간을 버릴 생각은 없다. 이미 카멜롯의 왕비는 모르간이었고, 나 또한 그것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 아서는 모든 정치적 입장을 포기해서라도 나를 선택해주겠지만,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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