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86화 (86/195)

<-- 왕좌의 주인 -->

006

"그 동안에 별고는 없으셨습니까, 오라버니?"

세피아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웨일즈에서부터 강행군을 하여 수도 카멜롯으로 입성한 아서는 전에 보았을 때보다 훌쩍 자라 있었다. 발육 상태도 조금은 나아졌다. 납작하던 가슴도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모르간보다 작았던 체격도 어느 정도는 자랐다. 모르간과 비교해도 체격이 작지는 않아 보일 정도였다.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일이나 있을까? 그보다 당장 사라져, 꼬맹이."

"모르간, 언니이시군요."

"누가 언니야!"

친하게 호칭부터 바꿔서 부르는 아서의 말에 모르간이 노골적인 불쾌함을 내비쳤다. 아서에게  조금은 친절하게 굴면 좋을 텐데. 모르간은 나와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할 때만큼은 기사왕을 자극하지는 않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정작 아서를 보자마자 독설부터 날렸다.

그렇게나 싫은 건가.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운 세피아 색의 미녀가 보일 뿐인데. 물론 사람마다 시선의 격차가 있겠지만.

"어머니가 같지 않습니까."

"시끄러, 애초에 너라는 존재 자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적의를 드러내는 모르간의 머리를 짓눌렀다.

어린애도 아니고 격렬한 감정을 발산하는 소녀를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 보면 니무에보다 더 어려보인다니까. 붉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헤집는 내 손길에 모르간은 입을 다물고서 아서를 노려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버렸다. 모르간은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할 뿐, 그 다음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난 가볼거야."

모르간은 곧바로 등을 돌리고는 자리를 피했다.

아서 펜드래건을 보면 또다시 분노를 드러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애초에 이 자리에 있던 것 자체가 웨일즈에서 온 손님을 카멜롯의 왕비로서 환영 인사를 하기 위함이었는데, 환영 인사는커녕 대놓고 무례를 범해버렸다. 모르간의 심정에 대해서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카멜롯의 왕비님으로서는 조금 가벼운 행동이었다고 할까.

"우선 우서 왕에게로 갈까?"

"예, 부탁해요."

왕궁 복도를 거닐었다.

나와 아서는 동시에 우서 왕이 있는 병실로 향하기로 하였고, 아서를 따라서 웨일즈에서 온 베디비어와 케이는 왕실 기사단을 이끌고서 객실에 머물렀다. 원래라면 케이가 호위역으로 아서와 함께할 예정이었는데 아서 쪽에서 먼저 그 호위를 거절했다. 나와 단 둘 뿐인 시간을 일부러 만들었다.

아서가 말했다.

"처음 뵙는 아버지네요."

"그런가?"

"오라버니에게 있어서도 아버지이시잖아요."

"......"

그런 방식으로 접근할 줄이야.

그저 브리튼 왕실의 정통성을 빼앗기 위해서 족보를 고친 것에 불과한 협잡이라서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다.

단 한 번도 표면적인 국왕인 우서를 내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고, 양아버지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그저 정치적인 면에서 극심한 차이를 보이는 늙은이라고 할까. 그저 애물단지에 불과한 늙은이라고 여겼다. 애초에 내가 그런 녀석을 아버지라고 여기면서 섬기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이다.

내게 있어서 우서 펜드래건은 적대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고지식한 사고 방식에 혈통과 신분을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성격까지. 어느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는 모든 권력을 상실하고서 그 누구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고립무원의 위정자였고, 그런 낙오자에게 줄 정은 없었다. 정을 주더라도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그의 존재는 내게 방해만 될 뿐이지, 그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으리라.

그래서인지 그가 달갑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 같이 아버지를 뵈러 가요."

"그래."

아서가 밝은 웃음을 지으면서 내 손을 맞잡았다.

내 손을 당기면서 아서가 먼저 앞장을 섰다. 몇 발자국을 걷던 아서가 베시시 웃음기를 띄면서 말했다.

"그, 그런데 아버지게 계신 곳은 어디죠?"

"....안내해줄게."

카멜롯 왕궁의 사정에 어두운 녀석이 무슨 길안내를 한다고. 그녀의 당황스러운 얼굴에 피식 웃음을 지으면서 내 쪽에서 안내역을 맡았다. 부드러운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서 복도를 거닐었다.

아서는 나와 손을 맞잡고서 행복하다는 미소를 보였다.

귀여운 여동생이 생긴 것 같다고 할까.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가장 큰 라이벌일텐데도 아서는 나를 진심으로 연상의 오라버니라고 여겼다. 그 웃음에는 결코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 어떠한 것도 기사왕의 새하얀 마음을 더럽히진 못할 테니까.

그리고 우서에게 도착했다.

우서는 세피아 색의 소녀를 보자마자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서는 처음으로 보는 아버지가 많이 노쇠한 모습이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그렁그렁 매달린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보고서 나는 곧바로 병실을 벗어났다.

내게 있을 공간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나는 저 부녀 사이에 끼어들 명분도, 목적도 없다. 나는 그저 족보를 임의적으로 고쳐서 우서 펜드래건의 양자가 되었을 뿐이지 그와 어떤 혈연 관계를 맺은 건 아니었다.

흐음. 나와 우서는 둘 다 귀부인 이그레인의 보지에 페니스를 넣은 경험이 있군.

구멍 동서인가. 구멍 동서에다가 족보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인 관계라니 미쳐버렸군.이런 농담을 이그레인의 딸인 모르간에게 한다면 나는 죽는다. 이보다 더한 능욕도 없을 테니까. 내가 생각해도 최악의 농담이 아닌가. 결코 발설해서는 안 될 농담이다.

"뭐냐, 꼬맹이냐."

"누가 꼬맹이야. 망할 왕님아."

탁한 금발을 어깨까지 지른 유녀가 성큼성큼 어울리지도 않는 걸음으로 내 앞에 다가섰다. 아서와는 의붓 자매를 맺은 케이였다. 브리튼의 기사인 엑터의 딸이며, 웨일즈의 모든 내정을 맡고 있는 내정관이기도 했다. 그녀의 뛰어난 수완은 카멜롯에서도 유명할 정도였다. 그녀는 귀여운 디자인으로 꾸민 고스로리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탁한 금발과 새카만 드레스가 잘 어울렸다.

유녀에 관심이 많은 남정네라면 분명 케이를 보자마자 군침을 흘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로리콘이 아니라서 딱히 아무런 감정도 없다. 애초에 이런 꼬맹이한테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변태라는 뜻이 아닐까.

"아서는 어딨어?"

"처음 보는 아버지하고 감동의 재회를 하는 중이지."

눈짓으로 등 뒤에 있는 병실의 문을 가리켰다.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던 케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대충 저 문 너머에서 어떤 광경에 펼쳐지고 있는지는 대충 유추가 가능했으리라.

케이가 말했다.

"그으, 나는 내 귀여운 여동생을 왕님 따위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아."

".....나도 안다만. 너는 아서를 보통 이상으로 귀여워하고 있는 팔불출 언니잖아."

"시끄러."

그 사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는지 케이가 얼굴을 붉혔다.

브리튼의 내정관은 헛기침을 하면서 목을 가다듬은 다음에 웨일즈에서 확산되기 있는 여론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나와 아서, 이 두 명의 왕이 혼인을 하여 완전한 브리튼의 통일을 이룩하자--- 그런 주장이 강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물론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정작 카멜롯에서도 그러한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카멜롯의 왕비는 정확히 콘월의 공주님인 모르간 르 페이였지만, 웨일즈의 기사왕에 비하면 그 혈통이 조금 뒤쳐질 수밖에 없다.

콘월 출신의 기사들은 모두 모르간을 왕비로 지지하고 있었지만, 카멜롯 출신의 기사들은 모두 아서를 왕비로 섬기자고 주장했다. 콘월 출신의 시골 계집애보다는 우서 펜드래건의 정식 후계자인 아서 펜드래건을 왕비로 들이자고 말했고, 나와 아서 사이에서 태어날 아이야말로 가장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최고의 혈통이 될 거라고 떠들었다.

물론 나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모두 무시해버렸다.

카멜롯의 왕비는 영원히 모르간 르 페이가 될 것이고, 나 또한 그녀의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정실부인의 자리는 하나였고, 그 자리는 언제나 모르간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말하고 싶은 것에 대한 요점은 뭔데?"

"아서와 혼인해줄 수는 없어? 잘 어울리잖아. 카멜롯의 섭정왕과 웨일즈의 기사왕. 서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생각하는데. 솔직히 나는 왕님처럼 난동꾼에다가 여자를 후리기에 적합한 가벼운 하반신을 경멸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아서도 왕님을 좋아하고 있고."

"거절이다. 아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아냐. 내게는 이미 부인이 있어."

"알아. 쉽게 승낙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어. 오히려 조강지처를 버리고 아서를 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경멸했으려나."

케이는 내 거절에 이미 예상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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