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83화 (83/195)

<-- 왕좌의 주인 -->

003

"차라리 우서를 죽여버리자."

모르간이 말했다.

아그라베인이 정치적인 이유에서 우서 왕을 죽이자고 제안을 하였다면, 나의 아내 같은 경우에는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면서 그를 죽이자고 내게 속삭였다. 귓가에 속삭이면서 독살, 교살 등의 가혹한 살해 방법을 제안한다. 그녀의 말은 마치 인간을 파멸로 빠트리는 악마의 속삭임처럼 들렸다.

나는 악마의 새하얀 뺨이 입을 맞추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이용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용가치?"

"브리튼의 최종적인 왕위 계승권. 우서 펜드래건이 나의 정통성에 대해서 인정을 해버리면 그 누구도 나의 왕좌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지 못할 거야."

"그렇네. 독약을 먹여서 중독 상태로 만들고, 그 다음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리자."

내 말에 모르간이 사특한 웃음을 흘렸다.

당장이라도 늙은 왕에게 독약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웨인도, 아그라베인도 당장에 우서 왕을 죽인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겠지만 모르간에게는 그러한 결점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하고, 나 또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때로는 무섭다. 그 어떤 행위던지 간에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다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저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사람을 강하게 만들지만, 다시 말해서 사람을 한없이 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 아내는 원래부터 악한 이미지의 마녀였지만, 사악해졌다고 할까. 딸아이 니무에한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모습이구만.

게다가 모르간은 우서 왕에게 개인적인 증오가 있었다.

바로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아버지인 틴타젤의 모습을 변한 우서가 물방울의 귀부인 이그레인과 동침을 해버린 것이다. 모습을 숨기고 귀부인과 동침을 해버렸다. 왜냐하면 이그레인의 우수한 태반에서 기사왕 아서 펜드래건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멀린에게서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르간은 대마법사 멀린에 대해서도 악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우서와 멀린이 불륜을 조장하여 이그레인을 임신시키면서, 훗날 브리튼의 왕위를 물려줄 아서 펜드래건을 태어나게 만든 것이다. 미래의 운명을 엿보고서 일부러 한 생명을 잉태시켰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모르간이 우서와 멀린을 증오하는 심정은 품은 데는 이해가 된다.

물론 과격한 행위까지는 용납할 수 없었지만.

우서 왕을 심려해서 하는 생각은 아니고, 아직 그에게는 이용가치가 있다. 그를 죽이는 것은 그 가치과 효용성이 다 한 다음에 죽여도 늦지 않으리라. 적어도 모르간에게는 우서를 언젠가 죽이겠다고 약속을 맺었다.

새끼 손가락을 맞잡고서 말하자 모르간이 새하얀 얼굴에 홍조를 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 왕을 죽이자고 제안을 하면서 약속을 하는 것 치고는 달콤한 무드가 느껴졌다. 여기서 달콤한 무드가 느껴지기에는 조금 거리가 먼 약속인 것 같은데.

"모르간, 우서를 증오하는 건 알겠지만 우선 내 말을 따라주겠어?"

"알았어. 하지만 언제 터질 지 몰라."

"그래 그래. 우리 아내가 성급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힘낼게. 약속까지 했잖아."

"당신을 믿고 있어."

모르간은 그 뒤로 니무에와 함께 놀기로 했다면서 나에게 인사를 하고는 모습을 감추었고, 홀로 집무실에 남아서 업무를 시작했다.

양피지를 뒤적거리면서 펜대를 굴린다. 요즘 들어서 펜대를 굴리는 실력만 늘어버린 것 같아서 고민이 든다. 칼레도니아 정벌 이후에는 전쟁도 뜸해졌고, 성검 엑스칼리버는 장식용 검처럼 한 켠에 기대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전쟁이 없다는 것은 브리튼 왕국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전쟁이 길어지고 늘어나봤자 직접적인 고통을 겪는 것은 백성들이다. 그들의 노고를 생각해서라도 전쟁을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오랜 전화로 황폐화된 황무지를 농토로 개간하고, 농업을 포함한 상업과 기타 기술을 진흥시킴으로서 나라 경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게 바로 내정이라고 한다.

아그라베인을 포함해서 관료로 등용된 여러 학자들이 내정 사업을 펼치고 있었고, 합리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곧바로 통과시켰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서 브리튼을 위한 일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가레스입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전하?"

"이미 들어오지 않았나."

문을 열고서 귀여운 용모를 빼꼼 내보이는 가레스를 보며 말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빛나는 금발을 붉은색 리본으로 트윈테일로 만든 소녀는 총총걸음으로 걸어오더니 여전히 서류더미에 쌓여있는 나를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매번 쌓여 있네요. 혹시 매번 땡땡이를 치시는 건가요?"

"그럴 리가 없잖아. 하루마다 배달되니까 양이 줄어들 리가 없지. 마치 무한의 궤도 같다고 할까. 아무리 일을 해도 줄어들 생각을 안 해. 하지만 어쩌겠어. 그만큼 나랏일이 바쁘다는 건데. 나라가 바쁘다는 건 적어도 잘 굴러가고 있다는 거겠지."

"역시 브리튼의 현왕(賢王)이라 불리시는 전하다운 말씀이시네요."

나는 언제부터인가 브리튼 백성들에게서 현왕이라 불리고 있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과분한 이명이라고 할까. 물론 그러한 이명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가 브리튼에 있어서 무한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라고 할까. 적어도 현 정권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요소로 흘러갈 것이다.

중세 시대에 있어서도 이미지 선전은 매우 중요하다.

현 정권이 브리튼 백성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민생에 대해서 전의 정권보다 우수하고 진실된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보여줄 필요가 있다.

게다가 전 정권은 간신 보두앵과 그와 어울린 귀족들의 농단으로 인해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전 영토를 파탄내버렸으니 현 정권에 대해서 백성들의 마음이 더 크게 향할 수밖에 없다. 현 정권이 계속해서 선정을 펼치고 나라를 풍요롭게 만들어버린다면 백성들은 더욱 현 정권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역적들이 들끓었던 전 정권에 대한 반발심이 더욱 커지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노리는 있는 바였다.

우서 왕은 우리들에게 부정적인 면으로만 작용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정치적으로 개입하려고 들면 들수록 과거 정권의 무능과 실태에 대해서 부각시키는 꼴이 될 것이다. 브리튼 백성들은 결코 과거의 일을 잊지 않는다. 두 배, 세 배로 세율을 인상시키면서 백성들의 피땀을 쥐어짜냈던 간신들의 악행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악감정은 간신들의 등장과 독주를 막지 못했던 우서 왕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겠지.

가장 훌륭한 시나리오가 아닌가.

설령 내가 우서 왕을 죽이지 않더라도 늙은 왕의 존재는 이미 브리튼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도 어느 백성들의 마음 속에서는 능지처참을 당하고 있으리라.

그를 생각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온다.

지금 쯤이면 자신의 딸을 브리튼의 군주로 만들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을 늙은 왕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는 결코 아군이 되어줄 자가 없을 것이다.

그의 병수발을 드는 시녀들부터가 이미 내게 충성을 바치고 있는 자들이었고, 설령 돈으로 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곧바로 내게 보고가 이루어지면서 매수된 시녀의 자리는 그 다음날에 다음 사람으로 교체가 되어 있으리라. 그리고 왕궁의 주변 연못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시체가 발견될 것이고.

"저기요, 전하? 꽤나 음흉한 미소를 짓고 계신데요?"

"그런가. 내가 설령 늙은 닭의 목을 직접 부러뜨리지 않는다고 해도, 누군가가 그 목을 대신 부러뜨려줄 생각을 하니 유쾌해져서 그만."

"전하는 왕이 아니었다면 악당이 되었을 것 같아요. 예쁜 여기사를 레이프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릴 오크처럼요. 자신의 수중에 놓인 여성 포로들을 씨받이, 육변기로 만들어버리실 분이죠."

"어이, 네가 생각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그런 파렴치한이냐."

나의 딴죽거림에 가레스가 킥킥 웃음을 지었다.

요망한 매력을 가진 금발의 유녀 기사는 내게 다가오더니 한쪽 팔을 안으면서 자신의 납작한 가슴에 가져갔다. 조금은 부풀어오른 것 같지만 모르간이나 가웨인에 비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아그라베인보다도 작다. 물론 가레스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한 사이즈겠지.

"제 가슴은 어때요?"

"작아."

"즉답이시네요! 적어도 레이디의 가슴을 만지셨는데 감상이 겨우 그거예요? 부드럽다거나, 따스하다거나. 적어도 가슴의 고동소리가 손을 타고 전해진다.... 그런 사랑스런 발언을 기대했는데요!"

"작은 걸 작다고 하지, 뭐라고 말하냐."

사실을 말해도 짜증을 부리는구만.

이 유녀기사는. 어깨도 왜소하고 키도 작은 녀석이지만 그걸 상쇄할 정도의 귀여움과 뇌쇄적인 색기를 가지고 있었다.

촉촉하게 색기어린 시선을 내게 향하면 나도 참지 못할 때가 많다. 물론 지금은 참고 있었지만. 딸아이라 생각하고 있는 니무에와 동급인 수준으로 작은 유녀를 범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양심에 찔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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