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좌의 주인 -->
002
우서 펜드래건의 부활.
그 소식이 카멜롯을 강타하면서 갑작스럽게 민중의 여론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명목상이긴 하지만 브리튼 왕국의 최종적인 정통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표면적으로는 브리튼의 군주였다. 과거 폭군 보티건을 몰아내고서 왕국을 재건하였다는 전적은 브리튼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남아있었다.
당연히 콘월에서 진출하여 카멜롯을 장악하고 있는 신세력과 우서 펜드래건을 과거에 지지하였던 왕당파 세력들. 물론 왕당파라고 해봤자 매우 미비한 세력이었기 때문에 대립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브리튼 백성들 또한 게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신세력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전하께서 일어나셨다고?"
"전하는 섭정왕 전하이시잖아?"
"하지만 펜드래건의 정통 후계자는 우서 님이시지."
"그러면 뭘 해? 보두앵 같은 간신에게 놀아났는데!"
간신 보두앵에게 전권을 맡기면서 왕국의 내정을 거나하게 말아먹은 우서 펜드래건의 말년 치세를 떠올린 많은 백성들이 노골적인 비판을 제시했다. 그럭저럭 나라 운영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말년에 너무 말아먹었다.
보두앵의 폭정과 사치에 의해서 높은 세율을 바쳐야만 했던 백성들로서는 우서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하층 계급을 이루는 평민들이 왕국의 정통성을 따질 리가 없다. 정통성을 따지는 것은 귀족과 기사 계급들 뿐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여론은 섭정왕을 따라주고 있었다.
"그래서 왕위는 어쩌실 겁니까."
아직은 침상에 누워만 있는 우서에게 물었다.
우서는 새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에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네였다. 그의 모습에서는 그저 노쇠함만이 보일 뿐, 이렇다고 할 영민함은 없다. 왕위를 지키기는커녕 거동을 하는 것조차도 어려워 보인다. 늙은 왕은 내게 있어서 그저 시대에 뒤쳐진 잔재에 불과했다.
"왕위는 내 딸.... 아서의 것이다."
"지금은 제 것이죠."
"왕위 찬탈자가 어디서 감히! 네놈은 근본도 모르는 하급귀족이라고 들었다!"
"하하하. 역적에게 나라 빼앗기고 골골대던 영감이 입을 멀쩡하네."
우서를 대하고서 몇 번 대화를 나눈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 인간은 전형적인 구시대에 속한 귀족이자, 새로운 시대의 앞날조차 분별하지 못하는 '꼰대'였다. 젊은이들 세력과 그 계급을 부정하고 기존의 귀족들만을 위한 정치를 하려는 양반.
적어도 혁신성을 위주로 내정을 형성하고 있었던 나와는 반대 노선을 걷는 자였다. 안타깝게도 입이 가벼운 시녀들 때문에 우서가 병석에서 일어섰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입지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냥 귀찮다는 정도? 마치 늙은 닭처럼 가볍게 목을 부러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권력이 없는 위정자는 없는 것과 같다.
위정자를 위정자로 만드는 것은 권력이며, 권력이야말로 위정자가 될 수 있는 가장 큰 요소였다. 나는 브리튼의 모든 권력을 빼앗았고, 카멜롯의 모든 권력은 나에게 있었다.
"그래서, 당신의 뭘 할 수 있습니까? 당신네 딸내미는 촌구석 웨일즈에 있고, 브리튼의 모든 기사들은 내게 충성 서약서까지 작성해버렸는데."
기사들에게 있어 맹약은 그 어떤 경우에도 준수되어야 할 약속이다.
브리튼의 시골 기사들에게까지 이미 봉토를 하사하면서 그들의 충성을 얻어냈다. 그 어떤 브리튼의 왕도 시골 기사에게는 봉토를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일부러 일정한 봉토를 하사함으로서 그들의 마음을 얻어냈다. 중앙 귀족들을 대거 숙청하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병력과 영토들을 흡수하였고, 그 과정에서 얻은 영토들을 기사 계급에게 주었다.
봉건 시대에 있어 가장 큰 힘은 기사 계급에서 나온다.
펜드래건 성씨가 아닌 하급귀족 출신이라고 해서 나를 무시하던 기사들은 모두 숙청하거나 회유. 그를 통해서 내게만 충성하는 지지층을 만들어냈다. 그들에게 영토와 재물을 하사하고, 전쟁에 종군하거나 승전을 거둘 경우에는 추가적으로 포상을 지급한다.
기사와 병사들의 마음을 얻는 데 별다른 방법이 있는 게 아니다.
물질적으로 그들에게 원하는 포상을 수여하고 사기를 끌어올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거만해지지 않도록 적당히 굴려주면서 전장에 집어넣는다. 별다를 건 없다. 자신의 재산과 봉토를 나누어주기 아까워하는 왕과 중앙 귀족들은 결코 그를 지키지는 않았지만.
"왕위를 찬탈한 셈이더냐."
"이미 왕위는 나의 것이고, 댁의 목숨 또한 내게 달려있는데 어디 한 번 그 늙은 입을 어디까지 지껄일 수 있나 볼까?"
"네놈!"
"잘 들어, 할배. 언제나 왕위는 그에 걸맞는 사람에게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어. 단 하나 밖에 없는 왕좌. 그건 가장 강한 사람이 가져야 해. 어중간하게 강한 놈이 가져버리면 분란이 그치질 않을 테니까."
나는 쥐고 있는 왕좌를 누구에게 양도하거나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이야말로 왕위에 가장 적합한 인간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맹신이 아닌, 확신에 가까운 믿음. 내가 카멜롯의 군주가 되면서 브리튼 왕국은 살기 좋아졌다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위를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도 이 늙은이에게는 결코 넘기지 않겠다.
"우선 침대에 누워서 잘 생각해보쇼."
그렇게 말을 마치고서 병실을 빠져나왔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우서가 병상에서 일어났다는 소문을 함부로 퍼뜨린 시녀에 한해서는 극형에 처해버렸고, 우서 펜드래건의 수발을 드는 시녀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카멜롯의 군주가 누구인지를 확신하게 각인시켰다. 적어도 시녀들은 우서에게 유리하도록 일을 조장하지는 않으리라.
하필이면 이런 상황에 우서가 깨어날 줄이야.
슬슬 병력들을 소집시킨 다음에 게르만족 정벌에 나서려고 했는데. 자칫 정벌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웨일즈에 있는 아서와 괜한 마찰이 발생할 수도 있었고, 복종시킨 브리튼 귀족들 사이에서도 불협화음이 조장될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귀족들에게서도 충성 서약을 받아냈지만, 그 서약이 영원할 것이라는 맹신은 들지 않는다.
내게 가웨인이 다가왔다.
"우서 왕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전하?"
"몰라. 우선은 탑에 유폐시킬 거야."
"그, 그렇군요."
금발의 여기사는 우서 펜드래건의 처우에 대해서 조금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나를 절대로 배반하지는 않겠지만, 우서를 뒤에서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아그라베인 같은 급진파는 아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브리튼 국왕인 우서 펜드래건을 최소한적으로 존중만큼은 해주는 온건파에 가깝다.
우서의 등장으로 카멜롯은 급진파와 온건파, 이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정확히 말하면 파벌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나뉘었다고 보는 게 옳겠지. 주로 간신 보두앵에게 탄압을 받고 역적의 횡포를 막아내지 못한 우서의 무능을 증오하는 하급귀족들과 시골기사들이 급진파에 속했고, 온건파는 중앙귀족과 카멜롯 출신의 기사들이 주로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브리튼 왕실에 충성을 다하는 만큼, 우서에게도 권위가 있지 않냐는 주장이다.
나로서는 온건파의 주장이 성가시게 느껴졌다.
이미 왕좌의 주인이 바뀐 지가 언제인데 전 국왕인 우서의 편을 든단 말인가. 이미 우서가 복귀할 수 있는 자리는 없다. 브리튼 왕실을 섬기던 충신들은 모두 시골로 쫓겨나버렸고, 새로운 왕실에 충성하는 젊은 기사들을 수도로 불러들여 중임을 맡겼다.
과거의 망령 따위가 돌아오는 것은 용납하지 못한다.
이미 정치에서 패배한 위정자는 민심을 잃었고, 우서 펜드래건의 복귀는 브리튼의 백성들이 결코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 그러니까 우서 왕을 제거하는 쪽은 좀....."
"아그라베인의 말에 조금 과격하다고?"
"예. 적어도 우서 왕은 펜드래건의 적통입니다. 족보상으로는 전하의 양부이기도 하시고요. 이런 상황에서 그를 제거한다는 것은....."
"패륜이지. 웨일즈의 아서와의 관계도 최악으로 뒤틀릴 거고."
"예."
가웨인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우서가 죽어버린다면 분명 그에 의혹을 품는 여론이 강하게 생길 것이다. 이대로 우서를 정치적인 자리에서 배제시키고서 외딴 탑에 유폐에 가까운 노후생활을 보내게 하는 쪽이 택하고 싶다. 그가 정치적으로 나서지만 않는다면 그 목숨을 빼앗을 것까지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괘씸하군. 내 말이면 다 따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죄송합니다....."
"오늘 밤에는 네 침실로 가도 되겠지?"
내 말에 작게 어깨를 떠는 가웨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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