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리스의 용병군주-57화 (57/195)

<-- 역적 토벌 -->

008

요크 성의 내곽 지역만을 남겨두고서 일시적인 소강 상태에 들어섰다.

일부러 과장스럽게 야심한 시각이 되면 각 진지에 불을 환하게 밝히고 수많은 병력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일부러 크게 소리를 내지르며 대군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수성전에 돌입될 병력은 소수이고, 공성전을 펼칠 병력은 다수라는 점을 적에게 알려주기 위함이다. 가장 뻔한 수법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자주 사용되는 기초적인 전략이라 할 수 있었다.

적의 심리를 조종하고 위압을 준다.

공성 병기를 전진배치를 하면서 곧이어 공성전을 펼칠 것이라는 제스처를 보냈다.

"의외로 쉽게 흘러가네요."

아서가 내게 다가오며 물었다.

세피아색의 공주님은 총총걸음으로 다가와서는 나와 팔짱을 꼈다.

그 모습이 자연스럽다. 힐끗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자 새하얀 뺨에 홍조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아서의 옆에는 베디비어가 호위기사처럼 서있었다. 마치 아서에게 허튼 짓을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모습처럼 보인다. 브리틍의 진정한 정통성을 사생아 공주님을 베디비어는 성심성의껏 모시고 있었다.

아서를 위해서 브리튼 왕실의 기사단장직까지 단숨에 버릴 정도로 충성심이 대단하다. 그녀는 혈통을 중시했고, 진정한 브리튼의 군주로 아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나에게 칼날을 들이대는 것도 서스럼 없이 행하겠지. 그런 여인이다. 지독스러울 정도로 군인다운 모습이라고 할까.

기사도를 철저히 지키는 정의의 여기사.

백금발의 여인은 곱게 머리카락을 정리하고서 반듯한 모습으로 시립하고 있었다.

"희망과 미래가 없는 군주를 따를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애초에 귀족과 병사들은 자신의 권력과 소유권에 따라서 군주를 결정하고 헌신을 바쳐. 그 헌신에 따른 보답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 군주는 곧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겠지. 세상은 원래 그래."

"철저히 물질적인 것에 치중된다는 것이군요."

"그렇지. 군주가 과연 어떤 이권을 주느냐에 따라서 부하들의 충성심도 깊어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상을 남발하라는 건 아냐. 포상은 조금, 그리고 처벌은 가혹하게. 그게 정치의 기본이야."

".....예."

정치적인 입장에서 보면 나의 가장 큰 라이벌은 아서 펜드래건이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내정의 기본에서부터 사람들을 다루는 용인술까지. 그 기본 원칙을 가르쳐주면서 동시에 그녀에게 부하들의 관리 방법에 대해서도 각인시켜 주었다.

그 뒤에서 듣고 있던 베디비어의 얼굴이 굳었다.

내가 말하는 논리들은 기사도와는 전혀 상반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오로지 군신 관계는 철저히 계약에 따른 물질적인 보상으로 움직이고 유지된다는 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기사도에서 논해지는 '봉사'와 '헌신' '충성' 따위는 결코 입에 담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은 그리 현명한 동물이 아니다.

그 근본은 짐승과도 같다.

애완견에게 먹음직스러운 고깃덩이를 주면서 매서운 훈련을 가하면 그 애완견은 몸을 혹사하면서도 자신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는 주인을 총애하고 충성을 다한다. 하지만 반대로 먹을 것조차 주지 않으면서 매서운 훈련을 가해버리면 애완견은 서서히 주인을 물어버리는 사냥개로 변하고 만다.

그 차이점이 무엇일까.

충견이 되느냐, 아니면 주인을 죽이는 번견이 되느냐의 차이는 바로 '충성의 대가'였다. 귀족과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던져주면서 굴리면 곧잘 따라한다. 그리고 그 먹이를 줄 수 있는 군주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주면 귀족과 병사들은 목숨을 바치는 걸 주저하지 않는 불사의 군대로 재탄생된다.

그것이 바로 정치의 기본이자, 국정의 기본 원칙이다.

포상과 함께 이루어지는 처벌. 먹음직스러운 포상과 가혹하고 매서운 처벌. 적당히 공포라는 감정을 이용하면 한 명의 군주가 수만 명의 백성을 다루는 용인술이 만들어진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어렵지만, 헷갈리는 것도 있고, 반박하고 싶은 내용도 있습니다."

"그래? 그럴 거야. 나도 내 말을 곧이 곧대로 따라하는 건 아냐. 네 마음대로,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만큼 오라버니를 좋아합니다. 현명하시고 언제나 완벽하신 오라버니이시니까요."

"고마워."

나에 대해서라면 맹목적인 충성과 존경을 보내는 아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진심으로 나를 따르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아서를 군에 합류시켰고, 자연스럽게 상하 관계가 만들어졌다. 수많은 병사들은 아서 펜드래건과 그녀 휘하의 기사들이 내 부하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브리튼 백성들도 그렇게 생각했다.

내가 일부러 여론이 그 쪽으로 흘러가도록 유도했기 때문이다.

점차 연합 작전을 여러 번이고 계획하면서 아서 펜드래건이라는 소녀를 이용한다. 브리튼의 정통 계승자라는 이미지에서 나를 따르는 충복으로 변화시킨다. 그녀를 제거하기에는 이용가치가 깊었다. 아서 펜드래건은 기마병 부대를 지휘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고, 대규모 작전에서도 눈에 띄는 전공을 보여주었다.

아서는 내게 있어서 최고의 조커였다.

어째서 멀린이 아서 펜드래건을 왕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정보다도 군사 쪽에서 관심을 크게 보이는 정복 군주였고, 군주로서의 자질을 가진 소녀를 부하로 만들려고 했다. 물론 그 과정은 어렵고 난감하겠지만 아서를 이용하면 로마 제국과도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우선 보두앵을 죽이는 게 먼저겠네."

"예, 오라버니!"

"내일은 대대적으로 공성전에 돌입할 거야."

"이대로 항복을 기다리는 게 아닌가요?"

아서의 말에 거부를 표시했다.

항복한 기사에게서 듣기로는 요크 성의 내곽에는 수많은 식량과 식수들로 가득하다고 한다. 보두앵은 자신의 보신을 가장 위하는 성격으로, 그렇기에 물자들의 대부분을 내성에 집중시켰다.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 중에서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정예병을 육성했다. 오로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하지만 그의 불행은 내성을 지키고 있는 병력의 열세였다. 고작해야 8백 명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반해서 이쪽의 군세는 1만 5천. 보두앵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병력들까지 편입시킨다면 기존 병력에서 더 크게 늘어난다. 내성에서도 분명 보두앵을 배반하려는 요인들이 있을 터이니 우선은 그들에게 과격한 방법을 펼쳐서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게 필수였다.

"내일은 나와 내기 할래?"

"내기요?"

"그래. 누가 보두앵을 먼저 잡는지, 승부를 하자는 거지."

"좋아요."

아서는 재밌겠다면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009

아서와 헤어진 다음에는 곧바로 니무에를 불렀다.

요즘 들어서 이 인공 요정님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나마 니무에를 볼 때는 모르간과 함께 만나고 있을 때였다. 니무에는 이번에도 모르간의 품에 안겨있었고, 금발 금안의 요정은 눈망울을 반짝이면서 나를 반겼다.

"비세리온. 무슨 일?"

"내일은 일 좀 해줘야겠는데."

"상관 없어."

"고마워."

사무적인 대화를 나누는 나와 니무에를 보면서 모르간이 입술을 삐죽였다. 기껏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무미건조한 전쟁 이야기를 하니 토라져버린 것이다. 니무에가 보는 앞에서 모르간의 뺨에 입술을 맞추면서 웃음을 지어주었고, 모르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디으면서도 희미하게 웃음을 보였다.

니무에와 함께 있으니 마치 일반적인 가족을 보는 것 같았다. 금발 금안의 소녀는 나와 모르간을 번갈아서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니무에가 내 목에 두 팔을 두르면서 폭탄 발언을 했다.

"나도, 비세리온과. 하고 싶어."

"뭐, 뭘?"

"성교. 모르간과, 이미 했어. 성교를."

그 말에 모르간의 얼굴이 새빨개진 것은 물론이고, 로리콘이라는 의혹을 받은 나는 모르간의 불덩이 공격을 피해냈다. 이제는 피하는 게 자연스럽다. 언제 모르간의 퓨즈가 끊어지지는지 파악이 가능했고, 이미 반사적으로 그녀의 공격을 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발직하게도 금안 금안의 어린 소녀가 나를 올려다보면서 자신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외견 연령이 고작 10대 초중반이라는 걸 알고는 있는 걸까. 여전히 무표정을 고수하면서도 나를 올려다보는 니무에. 그녀는 자신의 몸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했다.

"나도, 성교 가능해. 안 돼?"

"그 전에 내가 죽어버릴 것 같은데."

특히 나를 노려보고 있는 애엄마한테.

나는 억울하다. 딱히 니무에한테 호감도를 쌓을만한 행위를 한 적도 없고, 지금까지 단것을 잔뜩 먹였을 뿐이다. 설마 니무에가 애완견도 아니고 먹을 것만 줬다고 자연스레 호감도가 오를 리가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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