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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53화 (53/195)

<-- 역적 토벌 -->

003

보두앵은 자신이 총애하는 근위병과 함께 내성에 머물고 있으며, 사람을 만날 때도 항상 의심을 보낸다고 한다. 요크 성에 내통하고 있는 첩자에 대해서 들은 내용이다. 이미 권력을 잃은 위정자에게는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제 멸망을 기다릴 뿐이건만 발악이라도 하듯이 방어전을 이어나갔다.

그는 아예 나가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북방의 픽트족을 막을 요새로 세우고 있던 요크 성에 칩거해버렸다. 요크 성은 픽트족의 대군을 막아내기 위해서 축조된 방어적 거점이었기에 설령 병력의 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공성전을 쉽게 펼칠 수 없었다. 그것을 보두앵은 알고 있었기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카멜롯에서 약탈한 수많은 재물과 재산들을 가지고 있던 그는 식량을 구매하는데 일부분을 써버렸고, 그 때문에 요크 성에는 식량이 끊길 일은 없었다. 포위 공격을 통해서 굶겨죽일 작정이라면 단단히 실패한 것이다. 왜냐하면 요크 성의 식량이 떨어지기 전에 1만 5천의 군세를 가진 연합군이 먼저 굶게 될 테니까.

"식량 끊는 것도 안 되고. 그렇다고 공성전을 펼치는 것도 안 되는 건가. 귀찮은데....."

요크 성에서 첩자들이 전해온 정보들을 유추하면서 현 전황이 아군에게 그리 유효하게 흘러가지는 않음을 확인했다.

성벽은 지나칠 정도로 견고할 뿐더러 높았고, 성벽의 중심부마다 망루가 세워져 있었기에 접근하기만 하면 곧바로 들킬 확률이 높았다. 기습 공격조차 통하지 않는다. 완벽한 요새를 바라보며 어째서 신중한 성격의 보두앵이 요크를 피신처로 고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선 한 번 정도는 공격하는 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가웨인이 말했다.

하지만 오크니의 공주기사가 말한 방안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통하지도 않을 방법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동원하고 싶지 않았다. 애꿎은 아군의 목숨만 사라질 뿐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아군의 피해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지만, 그 목숨이 덧없이 사라지게 둘 수는 없었다.

"적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것은 어떤가요?"

"보두앵이 받아 들이겠습니까. 자기가 죽을 목숨이라는 걸 알 텐데."

팔라메데스와 제레인트가 대화를 나눴지만 그다지 경청할 정도의 내용은 아니다.

보두앵에게 항복을 요청한다라. 항복 서한을 가지러 간 사신이 죽을 확률이 높다. 애초에 그 역적을 살려둘 목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을 보두앵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성에 틀어박혀서는 결사항전을 주장하고 있겠지. 그런 놈이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놈이다.

지금운 우선 요크 성을 지켜보기로 하는 방식으로 사태의 추이를 볼 예정이었는데, 은밀하게 요크 성 이외의 거점에서 방어전을 벌이고 있던 보두앵의 부하들이 일제히 항복하기 시작했다. 요크 성을 제외하고는 함락하기가 어렵지 않았고,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그들은 자신의 신변 안전을 요구하면서 너무도 쉽게 항복을 요청했고, 물론 그것을 받아들였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로 하여금 요크 성에 항복을 요구하도록 명령한다면 분명 이변이 발생할 것이다. 요크 성에 있는 병력들 중에서 진심으로 역적에게 충성을 할 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선 지금은 지구전으로 나가기로 했다.

회의를 끝내고서 나오자 무언가 의문에 섞인 웃음을 짓는 멀린을 볼 수 있었다.

"뭐야. 기분 나쁘게."

"비세리온 군은 의심이 많네~~ 조금은 누나를 믿어줘도 좋을 텐데. 오호호호호!"

수상하다.

수상쩍기 그지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아무리 봐도 수상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평소에도 충분히 삼류 영화에 등장할 법한 악역을 보이는데, 지금은 일류 영화에 등장할 것 같은 악역으로 보였다. 가장 악당스러운 모습이라고 할까. 눈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그 안에 숨은 흑심을 간파하지 못할 내가 아니다. 분명 무언가 노리는 수가 있다.

멀린에게 지급된 막사로 들어갔다.

뒤에서 내 접근을 말리는 멀린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황혼의 마법사가 나를 막아선다는 것은 분명 나에게 무언가 찔리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무조건 이 두 눈으로 봐야겠다.

막사로 들어서자 보글보글 끓기 시작하는 마법 시약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포션을 만들려는 건가. 전투에서는 부상을 당하는 병사들이 많아질 터이니 분명 그를 대비해서 만드는 거겠지. 황혼의 마법사가 만드는 시약이라면 분명 어떠한 상처에 부어도 멀쩡하게 재생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애초에 멀린은 병사들을 배려해서 시약을 만들 정도로 기특한 녀석이 아니다!'

그렇다.

멀린은 장난꾸러기 같은 성격에, 주변인들을 괴롭히는 재미로 살아가는 악당 중의 악당이다. 겉으로는 순진무구한 웃음과 함께 에로한 몸매로 남성을 괴롭히면서도, 그 속내는 주변인을 얄궂게도 괴롭히는 장난으로 득실거린다.

"이거 대체 뭐야."

마법 시약이 든 비커를 찰랑찰랑거리면서 물었다.

녹색의 빛을 띄고 있다. 무슨 독극물 같은 건가. 그 시약의 효능이 궁금해서 당장에 마셔보고 싶지만 독극물처럼 보인다. 독이든 약이든 멀린이 만든 것이라면 그 효능이 엄청나겠지. 대체 무슨 약이고, 무슨 효능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뭐야, 이거."

"영양제."

"마셔 봐."

"내가 마시려고 만드는 게 아닌 걸?"

그러면 대체 누구 먹이려고 만드는 거냐.

멀린에게 질책하듯이 시선을 쏘아보내자 주황색의 아가씨가 휘파람을 어색하게 불면서 시선을 돌렸다. 독이냐. 악당 중의 악당인 멀린이 만든 시약이라서 그런지 사약처럼 보인다. 역시 사람은 이래서 이미지가 중요하다. 멀린이 시약을 만드니까 더욱 의문이 든다.

"이 멀린의 이름으로 맹세할게. 결코 비세리온 군에게 해가 될 것은 없는 약이야."

"네가 네 이름으로 맹세를 하던지, 아니면 아서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던지.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야. 왜나하면 나는 너를 결코 믿지 않으니까."

간결하게 멀린의 맹세를 짓밟아버렸다.

믿을 사람이 없어서 멀가년의 말을 믿을까. 차라리 가웨인이 동생이고, 가레스가 언니였다는 사실을 믿겠어. 나는 결코 멀린을 믿지 않았고, 그녀가 직접 만든 시약을 복용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약을 아무렇게나 먹을 정도로 나는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린의 시약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시약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만 맡아도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았다. 약간의 현기증이 난다. 그를 보고서 멀린이 희미하게 웃음을 지은 것을 보면서 뭔가 그녀의 속셈대로 잘못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독에 대한 내성이 없다.

아서처럼 독특한 혈통을 가지고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엑스칼리버를 소유하고 있다는 하나 평범한 인간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독에 대해서도 그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평소에는 시녀들에게 먹는 음식과 물을 먼저 먹어보게 하는 쪽으로 독에 대한 대처를 해왔다.

멀린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에 아서가 찾던 걸? 가보는 게 좋을 거야. 아서라면 분명 저쪽 막사에 혼. 자 머무르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여기에 있다간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짓누르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약 냄새가 코를 찌르는 마약 공장 같은 곳에 머무르고 싶지도 않았다. 가까이에서 시약의 냄새를 맡은 것이 화근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멍청하게도 멀린이 만든 약의 냄새를 맡아버리다니. 복용하는 것은 물론 냄새를 맡는 것도 의심에 의심을 해야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럼 간다."

"응! 잘해 봐."

뭘 잘하라는 거냐.

멀린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휘파람을 불기만 할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004

아서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비세리온을 보며 멀린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각했던 대로 조심성이 많은 비세리온은 마법 시약을 마시지 않았다.

마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시약에 코를 대고서 냄새를 맡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약의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이미 약에 중독이 되었을 테니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하복부에 힘이 몰리기 시작하면서 젖가슴이 달린 여성을 강제로 덮치고 싶을 정도로 성욕이 끓어오르는 발정제. 남자에게는 최고의 효과를 발휘하는 드루이드의 특제 미약이다. 원래라면 여성에게 사용하는 일이 많은데, 이번 경우에는 특이성이 있었기 때문에 비세리온에게 노림수로 사용했다.

"이걸로 비세리온 군과 아서는 뜨거운 밤을 보내고 있겠지~"

멀린은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은 너무 천재라고 생각했다.

역시 브리튼의 대마법사. 왕실의 궁정 마법사로서 오늘도 여김없이 한 명의 인간을 속여넘겼다. 비세리온과 아서의 동침으로 브리튼의 역사가 변할지도 모른다.

아서를 브리튼의 왕으로 옹립시킨다는 것이 멀린의 계획이었지만, 그 옆에 비세리온이 있는 것 정도는 용인할 수 있었다.

제자인 모르간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그것은 추후에 아서를 정실 부인으로 만들면 될 뿐이다. 부부가 함께 공동 국왕으로서 왕국을 다스리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적당히 흉계를 펼쳐서 비세리온과 아서의 공둥 국왕 체계로 만들려고 했다.

어찌되었든 비세리온은 왕으로서도, 지휘관으로서 매우 유능했고, 그의 힘과 지략은 브리튼에 없어서는 안 될 재능이다. 게다가 능력이 좋으니 기사왕 아서와도 잘 어울린다. 평생 아서를 홀몸으로 둘 수도 없었으니, 지금이라도 적당한 남자와 짝을 지어줘야겠지. 그게 비세리온이다.

조금 인성에는 문제가 많아 보이지만 기사왕의 짝으로는 합격점이다.

모르간보다야 아서 쪽이 혈통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뛰어난 여성이니 정실 부인으로 만드는 것 쯤은 일도 아니겠지.

한참 동안이나 망상에 젖은 멀린은 자신의 막사로 다가오는 남성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멀린은 결국 짐승처럼 사납게 울음소리를 내는 비세리온이 지척으로 다가온 것을 보고서야 그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어, 어라....?"

묘하게도 비세리온의 하복부에 엄청난 텐트를 그리고 있었다.

드루이드 특제 미약의 영향으로 당장에 여성을 덮치려고 하는 성욕에 휩싸인 비세리온. 분명 아서의 막사로 보냈을 텐데, 돌연 다시 되돌아왔다.

멀린은 뭔가 잘못 흘러라고 있음을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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