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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48화 (48/195)

<-- 아발론의 붉은 마녀 -->

005

"결국 드래곤 사냥은 쫑이 나버렸군."

루이스 백작령의 한적한 별장을 하나 빌려서 그 곳에서 거주했다.

과거 어느 몰락 귀족의 소유였다고 하는 별장은 우거진 숲이 한 번에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역시 귀족의 소유였던 별장답게 매우 쾌적한 환경을 자랑했다. 모르간이 미리 알아봐둔 곳이라고 한다.

루이스 백작령은 콘월 공작과도 친분이 있는 영토라고 하니, 모르간도 이쪽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과거 몇 번 정도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왜 댁들이 여기까지 따라온 건데?!"

모르간이 소리쳤다.

빌린 별장에서 나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고 여러 준비를 하였건만, 정작 아서와 멀린이라는 군식구까지 끼어들어서 무드가 깨져버렸다. 힐끔하고 바라보는 호기심 깊은 여성들이 있었으니 분위기가 살 리가 없다. 나는 어쨌거나 모르간과의 애정 행각을 다른 사람에게 노출시키면서 그것을 즐기는 취미는 없었다.

멀린이 아하하 웃음을 지었다.

"당연히 훼방을 놓기 위해서지! 재밌잖아?"

"망할 할망구....."

"할망구 아니라니까? 언니라고. 언. 니."

"언니는 개뿔."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신을 연상의 언니라고 자칭하는 멀린.

내가 생각해도 뻔뻔스럽다고 밖에 말할 길이 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자그마치 반세기 동안이나 그 유구한 세월을 보내신 대마법사께서 드디어 노망이 나셨나. 어쩌면 아서는 멀린을 고려장시키기 위해서 루이스 백작령을 찾은 걸지도 모른다.

아서가 내 옷깃을 당기며 물었다.

"저희가 방해되었나요, 오라버니?"

"아니, 딱히 그렇지는...."

내 대답을 들은 모르간이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

당장 이 망할 여편네들을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쫓아내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는 백 번 쯤은 더 죽었겠군. 멀린은 1만 번 정도 죽었으려나. 사랑이 깨져서 슬픔에 잠긴 마녀의 원한에 서슬퍼런 살기가 맴돈다.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하는데.

아서와 멀린이라는 존재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한 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일단 만남을 가졌으니까 적어도 일에 관련되서 묻고 싶은 게 많아."

"좋아, 우리 비세리온 군이 원하는 대로 해볼까?"

역시 내 예상대로 정치적인 이야기에 대해서는 멀린과 머리를 맞대고 시간을 보낼 것 같았다. 아직 아서는 어린 소녀였기에 가르침이 필요한 문하생과 같았고, 아서 펜드래건에게 검술은 물론 제왕학과 군략, 정치학 등 모든 분야에 대해서 가르치는 선생 역할을 하고 있는 멀린이 멘토나 마찬가지였다.

모르간은 퉁명스러운 얼굴을 하면서도 이쪽을 향해 고개를 기웃거렸고, 아서는 멀린과 함께 자리를 나란히 하고서 나와 마주했다.

"우선 너희는 나오지 마. 웨일즈에서."

"아하하. 예상은 했지만 정말 비세리온 군은 가차 없네~"

황혼의 마법사가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농담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물론 기본적인 성격은 장난이 조금 심한 편이지만 이런 자리에서까지 농담을 하진 않는다.

현재 웨일즈의 군주는 아서 펜드래건.

혈통을 중요시하게 여기는 구식적인 귀족들이 많았기에 웨일즈인들은 아서를 주인으로 받들고 있었다. 알베르와 그 잔당들을 토벌하면서 폭정의 악순환을 끊어버린 것이 아서였기에 선정의 검을 뽑은 기사왕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좋다.

웨일즈의 시골 벽지에서 왕을 자칭하겠다면 그를 용인할 수 있었다. 웨일즈는 적지 않은 영토였지만 교통이 불편하고 바깥 세상과의 소식이 닿지 않는 시골 벽지였으니까. 적어도 소국의 왕이 되겠다면 그를 막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서가 브리튼 왕국으로 진출할 경우에는 말이 달라진다.

그것은 곧 브리튼 왕실의 뒤를 이을 후계자가 무대로 등장한다는 말이고, 정통성이 부족한 내 입지를 흔들 수 있는 사건이 된다. 적어도 아직까지 브리튼 왕실에 충성하는 귀족들이 있었고, 그들은 아서가 성장한 모습을 보면 분명 그녀의 편으로 돌아서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나를 가장 존경하고 경외한다고 말한 순진무구한 소녀와 적대하지 않는 선에서 끝내고 싶었다. 기회에 따라서는 칼날을 뽑아들겠지만 무익한 일에는 쉽사리 뽑아서는 안 된다. 상대는 브리튼 왕실의 정통성을 가진 왕의 사생아였기 때문이다.

"저는, 도움이 되지 않나요? 저라면 오라버니의 도움이 될 수 있어요! 지금은 부족하지만.... 힘낼게요!"

애처로워 보일 정도로 아서가 절박한 어조로 말했다.

두 손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면서 자신이 내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어필하는 모습을 보며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내 도움이 되려고 노력하는 걸까. 적어도 그녀의 행동에는 조금의 거짓도 없다. 진심으로 나를 돕고자 자신을 써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나를 존경하는 것일까.

그 존경의 대상이 된 나로서는 자신을 믿어달라며 간청하는 아서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런 적은 진짜 처음이다. 아서는 가웨인처럼 나를 평소부터 존경하고 있었고, 기꺼이 나의 기사가 되어줄 수 있다면서 합류를 요청했다.

"진짜?"

"예! 저는 진심입니다. 이 몸과 마음까지, 모두 오라버니에게....!"

몸과 마음을 전부 나에게 준다니.

이건 듣기에 따라서는 매우 난감한 주제가 될 수도 있다. 어이쿠, 모르간의 눈빛이 점점 사나워진다. 별장 안의 온도가 점점 상승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기분 탓이 아니겠지.

"뜨겁네 뜨거워, 우리 아서는."

마치 귀여운 여동생의 기특한 모습을 보는 것처럼 멀린이 흐뭇하다는 미소를 짓는다. 모르간은 새로운 연적의 등장에 질투심을 불태우면서 나와 멀린, 아서 사이에 있는 테이블을 번쩍 들어서는 그대로 밥상처럼 뒤엎어버렸다.

역시 진지한 분위기를 뒤엎는 데는 와장창만한 것이 없지.

모르간의 분노가 별장 안을 뒤덮는다. 아발론의 붉은 마녀가 날뛰기 시작하면서 별장에서 이루어진 간소한 회담은 종료. 나는 아직까지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않은 채로 흐지부지한 답변만 내놓았다.

"우리가 어떻게 너처럼 속이 시커먼 할망구를 믿겠어! 당신, 어서 말해! 어서 꺼지라고 해!"

내 어깨를 뒤흔들며 모르간이 외쳤다.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그냥 아서와 멀린이 꼴보기 싫다는 이유인 것 같은데. 우리 마누라는 공적인 문제를 너무 사적으로 다룬다. 아서와 멀린을 사납게 노려보며 붉은 마녀가 견제에 들어섰다. 어서 꺼져! 그게 바로 모르간의 주장이다. 이미 기사왕과 황혼의 마법사는 한 부부의 혼전 여행을 파탄으로 내몰았다.

"어머머... 우리 모르간은 아직도 모르는 모양이네. 귀여운 아서와 농염한 나의 매력에 이미 비세리온 군이 빠져버렸다는 걸. 여기서 나가야하는 건 우리 제자가 아닐까? 제자만 없으면 나와 아서가 비세리온 군의 허리에 힘이 다 빠질 때까지 즐길 수 있는데."

이건 고문이다.

멀린이 속삭이는 야한 농담에 무반응으로 대꾸해야 한다니. 나는 어째서 이런 상황에 놓여진 건가. 현실도피에 가까운 사람이라면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4P를 제안하겠지만, 그건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런 짓을 저지르면 모르간에게 죽는다. 정실 부인에게 죽고 싶지는 않다.

내가 멍청하니 서있자 모르간이 그렁그렁 눈물을 드러낸다.

"이익.... 거, 거짓말이지? 저 할망구의 말은 거짓말이지?!"

"당연하지."

아서와 멀린이 보는 앞에서 모르간을 강하게 껴안았다.

모르간이 내 허리에 두 팔을 두르면서 살포시 힘을 더했다. 나와 모르간을 보며 멀린이 큭큭 웃음을 지었다. 또 모르간을 놀리고 있었군. 멀린으로서는 나와 모르간의 사이를 일부러 방해하기보다는 오히려 도와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게 우리 둘만의 시간을 주면 좋을 텐데.

그건 또 싫은 모양이다. 장난질을 하는 게 멀린의 취미였으니까.

"오라버니, 저도 안아주세요!"

"꺼져, 망할 기사왕. 지금 분위기 좋은 거 안 보여?"

굳이 이 사이에 끼어들려는 아서.

세피아색의 기사왕 아가씨는 까치발을 하면서 나와 포옹을 하려고 했고, 모르간이 그를 바디태클로 막아냈다. 우선 동복 자매라고 할 수 있는 아서와 모르간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무엇이든지!"

내 말에 사랑하는 주인의 부름을 받은 강아지처럼 두 눈빛을 빛내면서 고개를 들어올리는 아서. 만약 꼬리가 있었다면 홱홱 좌우로 흔들리고 있겠지. 드디어 나에게서 명령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에 아서는 굉장히 기쁜 웃음을 띄고 있었다.

"보두앵을 처단할 거야. 종군에 함께 해줬으면 하는데."

"알겠습니다, 오라버니!"

아서가 당차게도 곧바로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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