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발론의 붉은 마녀 -->
003
아서 펜드래건과 멀린을 루이스 백작령에서 볼 거라고는 예상하지도 못했다.
멀린과 재회를 하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웨일즈에서 왕을 자칭한 아서를 여기서 볼 줄이야. 세피아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말아올려서 간결하게 정리한 소녀는 풋풋한 귀여움을 가진 미인으로 점차 성장하면 모르간에 필적할 미녀가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직은 어리다는 티가 물씬 풍기는 소녀였고, 색기보다도 귀여움이 느껴졌다.
아서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섭정왕 오라버니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저기, 일단 정리부터 하고 가자. 내가 왜 네 오라버니라는 호적이 되는 거지?"
"제 아버지... 우서 펜드래건의 양자가 되셨잖아요? 그러니까 제 오라버니, 같은 아버지를 두고 있는 사이라고 할까요."
흠. 그렇게도 따져볼 수 있는 문제였나.
꽤나 다채로운 성격을 가지고 있는 아서의 신랄한 발언에 빠르게 머리 회전을 시작했다. 개막장 수준의 개족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튼 왕실 계보를 정리하자.
우선 현재의 국왕은 표면적으로 우서 펜드래건이었고, 실질적으로 왕좌에 오른 나는 브리튼 정통성과 함께 펜드래건 성씨를 물려받기 위해서 우서 펜드래건의 양자가 되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우서 펜드래건의 양자였고, 왕의 사생아인 아서 펜드래건은 나보다 한참 어리니 내 여동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러 우서 펜드래건의 양자가 된 것이기에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나를 깍듯하게 오라버니라 부르며 쫄래쫄래 내 옆으로 다가선 아서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였는데."
"혈연은 관계 없습니다. 마음으로 연결된 사이라면 의남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끼리 언제 마음이 연결된 거냐. 나는 방금 전에서야 네 얼굴을 처음으로 봤다만."
순진한 건지, 뻔뻔한 건지.
아직 미성숙한 소녀티가 물씬 풍기는 아서를 힐끗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려서 멀린과 모르간의 대치 상황을 바라보았다.
주황색 머리카락의 미인은 아하하, 웃으면서 모르간을 어린아이 대하듯이 하고 있었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반인반마의 웃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모르간은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분노를 터트렸다.
"비세리온 군과 같이 여행? 모르간, 안 본 사이에 많이 대담해졌구나. 오늘이야말로 처녀 딱지를 땔 생각이겠지만 그건 무리야. 왜냐하면 나처럼 아리따운 미인이 있으니 비세리온 군의 야수 같은 욕망은 나에게 향할 테니까."
"이이익!! 다 늙은 할망구가!"
"할망구라니. 너보다 가슴도 크고 허리가 날씬한 미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네."
멀린은 절세미녀라고 불리는 모르간보다도 우월한 매력을 한껏 뽐내면서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부각시켰다. 사람을 홀리는 것으로 유명한 몽마 인큐버스의 후예이기 때문일까. 아발론의 붉은 마녀보다도 빼어난 아리따움을 가진 멀린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못된 멀가년 같으니라고.
내 마누라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는 건가. 분노를 터트리면서도 두 눈망울에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는 모르간을 보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카멜롯에서는 천하제일의 미녀라고 칭송을 받았지만 멀린을 만나는 순간 그 만고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아름다움에서 패배했다.
한 눈에 보더라도 멀린의 뒤에서 후광이 뿜어지고 있는 듯하다.
코를 찌르는 달콤한 암컷 페로몬 냄새와 함께 이성을 매료시키는 마력이 느껴졌다. 젠장할, 아주 대놓고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시려는구만.
멀린이 진심으로 이성을 유혹하려고 든다면 나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푸른색의 비늘을 가진 드래곤이 누워서 곤히 자고 있는 계곡으로 다가가서 차가운 물로 얼굴을 씻었다. 적당한 차가움이 이성을 유지해주었다.
뺨을 타고서 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그 물은 붉은색을 띄고 있었다. 멀린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라인을 보니 자연스레 코에서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과다출혈로 죽을 지도.
"오라버니, 여기 손수건이요."
"고마워."
아서가 건네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내고는, 그녀에게 루이스 백작령으로 온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루이스 백작령은 내 관할의 영토로서, 아서의 웨일즈와는 딱히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왕을 자칭하고 있는 신분으로 자유롭게 들락날라거릴 정도로 달가운 관계는 아니다. 아서에게는 분명 왕을 지칭할 수 있는 명분과 정통성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섭정왕인 나에게 있어서는 부족한 정통성을 부각시키는 역린과도 같았다.
애초에 아서 펜드래건이라는 존재 자체가 내 정통성을 부정하는 요인이라 할 수 있겠지. 지금 아서를 죽여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서와 멀린. 아서는 나를 상회하는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멀린은 모르간을 실질적으로 가르친 스승이다. 모르간이 말하길 자신의 실력으로도 반인반마를 이기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했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는 아서와 멀린이 우리 둘을 제거하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저희는 드래곤을 사냥하러 왔는데.... 저렇게 곤히 자고 있는 상대방을 공격하는 것은 기사도에 어긋나는 행동이잖아요. 깰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요."
"깨어나면 죽을 셈이냐. 성실한 기사 같으면서도 기사라고 자칭하기에는 부끄러운 행동이다만."
드래곤의 입장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주길 바란다.
어느 소녀가 자신이 깨어나면 죽이려고 옆에 기다려서 살해를 준비하고 있다니.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아서에게 우리가 온 목적에 대해서 밝히면서도, 한편으로는 드래곤을 죽이지 않겠다고 다짐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다.
그를 유심히 경청하던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드래곤도 하나의 생명으로 여겨주시는 오라버니의 자상함에 이 어리석은 여동생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역시 오라버니는 대단하시군요."
그 오라버니 소리가 꽤나 귀에 간지럽다.
누구에게서도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받아본 적이 없다. 과거에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가문이 몰락하면서 죽었다. 그래서인지 동생이 갑작스럽게 생겼다는 것에 대해서는 면역이 없었다. 그것도 귀여운 여동생이 생겼다는 것은 머리가 충분히 아파올 법한 일이다.
"멀린. 그러니까 주름 가리는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서 드래곤의 심장을 적출하려는 건 그만두죠."
아서의 외침에 모르간의 입가에 씨익하고 올라갔다.
드디어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구실이 잡혔다.
"아하하하하! 멀린, 이 할망구! 나이를 먹으니 주름도 어쩔 수 없지? 나는 아직 탱탱하거든. 젊으니까!"
"그, 그 주제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될까?"
"당연히 거절이야!"
이번에는 모르간의 매도에 멀린이 당하기 시작했다.
할머니 뻘에 속하는 고령의 미녀가 자신의 제자에게 실컷 당하고 있었다. 물론 매도의 주제는 멀린의 높디 높은 연령에 대해서였다.
폭군 보티건, 우서 펜드래건 등의 왕을 잇달아서 섬긴 멀린은 꽤나 깊은 역사를 가진 여성이다. 2대에 걸쳐서 왕들을 섬긴 멀린은 궁정 마법사로서 활동했고, 그 시간을 합치면 족히 수십 년을 상회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진짜 할망구로구만.
할머니 속성을 가진 미녀라. 너무 허들이 높다.
"어린애도 아니고."
멀린의 꼬투리를 잡고서 실컷 놀리기 시작하는 모르간을 보았다.
내 맞은편에서 모르간을 바라보던 아서가 물었다.
"누구신가요?"
"모르간 르 페이. 내 아내."
"결혼하셨어요? 오라버니가?"
"그렇지."
나도 나이가 있으니 말이지.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분위기상 부부 관계가 성립되었다고 할까. 콘월에 있을 적부터 이미 여러 번이고 혼담이 오고 갔고, 지금에 와서는 서로 간의 관계를 인정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 둘이서 여행까지 오게 된 것이고. 물론 아서와 멀린을 만나면서 달콤한 혼전 여행은 완벽하게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지만.
아서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저는 인정 못해요! 원래 피 안 섞인 남매가 서로 이어지는 전개가 연애 소설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인기 높은 스토리잖아요. 저는 이렇게 만난 것을 하나의 인연이라 생각합니다."
대체 무엇을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내가 여성의 마음에 대해서는 우둔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아서를 포함해서 주변에 있는 여성들의 발언과 주장에 대해서는 무지할 때가 많았다.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니면 그녀들이 정상 궤도를 벗어난 외계인이라서 그런 갈까.
우선 나는 19금 드립으로 유명한 가레스를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선 인간 소녀의 몸으로 잠입해서 브리튼 왕국을 살펴보고 있었지만, 이제 곧 조사가 끝나면 외계인 친구들을 불러서 지구를 점령하려고 들겠지.
아서가 외쳤다.
"오라버니께서 저와 혼인을 해주시면 브리튼도 완벽하게 하나로 통합. 그리고 야만인들을 다시 대륙으로 몰아내고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요!"
기사왕의 말과 함께 저편에서 뜨거운 열량을 가진 화염구들이 포탄처럼 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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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폰을 보낸 시각과 갯수는 뜨는데 정작 아이디가 안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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