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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45화 (45/195)

<-- 아발론의 붉은 마녀 -->

002

카멜롯의 모든 전권에 대해서는 아그라베인에게 맡겼다.

서열상 가웨인에게 맡겨야 할 터였지만, 아직까지는 조금 의문이 든다. 가웨인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게도 눈과 귀라는 게 있었고, 팔라메데스를 비롯해서 다른 민족과 이교도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드러내는 그녀에게 나라의 모든 정사를 맡긴다는 것에 대해서 망설임이 생겼다.

설마 내게 없는 부재중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겨우 사흘 정도를 비우는 데다가 이미 해둘 일을 모두 해두었으니 딱히 상관은 없으려나. 코찔찔이 애들한테 집을 맡기는 것도 아니고, 그녀들에게 업무를 맡기고 떠나는 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겠지.

아니, 애초에 이런 고민을 하는 것 자체가 무슨 트러블이 일어날 징조라고 생각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고개를 내밀며 나를 바라보는 모르간의 새빨간 눈동자가 보였다.

울퉁불퉁한 오솔길을 내달리는 마차.

마차는 정확히 카멜롯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모르간이 잡은 목적지는 북쪽에 있는 모양이다. 모르간에게 물으니 목적지는 루이스 백작령이라고 한다. 루이스는 현재 내 관할의 영토이면서, 게르만족과도 충돌하지 않은 안전지대라 할 수 있었다.

목적지로 잡은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거기에 드래곤이 나온다고 해."

"그래서?"

"잡아야지. 귀중한 샘플이니까."

"무분별한 사냥은 생태계의 파괴를 불러 일으킨다고."

굳이 드래곤을 잡아야 할 필요성이 있나.

그에 대해서 묻자, 모르간은 발끈 화를 내면서 드래곤은 마법사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심장을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드래곤이라는 환상종 자체가 워낙에 희귀한 부류였고, 막대한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드래곤의 심장은 마법사들에게는 그야말로 지고의 재료라고 한다. 그것을 달여먹으면 막대한 마력을 가질 수 있을 테니까.

웅담 먹으려고 곰을 학살하는 격이군.

웅담 그 자체에는 그다지 효용성이 없지만 불로불사의 영약처럼 복용하려는 인간들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지. 그것과 같은 맥락의 문제가 아닐까.

루이스 백작령에 도착한 것은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카멜롯에서 꽤나 가까운 곳이라서 금방 도착했다. 루이스 백작령은 한적한 시골 벽지였고, 그 시골에 등장한 모르간 르 페이는 그야말로 눈에 띄는 보석과도 같았다.

청초한 아름다움을 가진 마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둘러보기에 바빴고, 나는 그녀의 호위기사처럼 허리에 엑스칼리버를 차고서 모르간에게 찝쩍거리는 놈팽이들을 구해주었다.

우선 그 놈팽이들을 반죽을 때까지 팬다.

그리고 모르간이 그 녀석들을 죽이려고 하면 온몸을 던져서 그것을 막아냈다. 이 녀석들은 세금을 생산하는 원동력이다. 건장한 남자들을 죽여버리면 그만큼 일손이 사라지는 격이 아닌가.

"빨리 따라와!"

"어이, 왕을 시종 다루듯이 하다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솔길을 걷는 모르간.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녀는 매우 신이 난 듯하다. 드래곤을 사냥하는 것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은가? 거참 무자비한 소녀로군. 겉모습을 보면 사디스트적인 성향이 느껴지긴 하지. 가차없이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될 것을....'이라고 말할 것 같다고 할까. 오만한 자태가 엿보이는 여왕님처럼 보인다.

붉은 고깔모자에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녀는 구두소리를 내면서 오솔길을 걸었고, 그 뒤를 따르면서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간혹 목격되는 산짐승 뿐이다. 이렇다고 할 징조도 없다.

정말 이런 곳에 드래곤이 있다는 건가.

기독교의 영향으로 악의 상징이 되어버린 드래곤. 그다지 인간 세계와는 교류가 없는 드래곤은 한적한 곳에 똬리를 틀고 지낸다. 딱히 인간에게 유해한 것도 아니기에 예전이라면 내버려 뒀겠지만, 그 놈의 기독교가 뭔지 괜한 생물을 괴물로 만들어서는 용사들에게 퇴치당하도록 그 빌미를 제공했다.

"나는 드래곤을 죽이는 데 반대란 말이지."

"또 그 소리야? 언제부터 동물 애호가였다고."

뒷머리를 매만지면서 꺼리는 듯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면서 모르간이 타박을 놓았다.

이 녀석은 아마 동물을 사랑하는 방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내 이상형은 동물과 교감을 나누거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밀크티를 우아하게 마시는 귀족 아가씨란 말이지. 모르간의 어머니이자 장모님인 이그레인처럼. 가장 정숙한 귀부인으로 유명한 이그레인이 사실 이상형이다.

물론 모르간에게 그 사실을 들키면 죽는다.

다짜고짜 그녀한테 '사실 네 어머니가 내 취향이야. 장모님 만세!'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죽어버리겠지.

"사람을 죽이는 건 괜찮아. 매번 죽여왔으니까. 하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거든. 죽여본 적이 드물어. 딱히 동물이 나한테 위협이 되는 것도 아니니까. 동물은 적어도 은혜를 베풀면 은혜가 뭔지는 알아. 그것이 인간하고는 다르지. 인간은 은혜를 베풀어도 지랄 맞게 이빨을 들이대는 것을 서슴치 않게 범하거든."

잡소리가 길어졌다.

모르간은 내 말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홱하고 돌려버렸다.

고작해야 마법 재료를 구하고자 드래곤을 죽이려는 것에 대해서 회한을 느끼는 걸까. 조금은 반성을 했으면 싶다. 모든 동물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라는 박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골에 조용히 살고 있는 환상종을 죽이고 싶지는 않다.

기독교 문화권에 알려진 것처럼 드래곤은 악의 생명체가 아니다.

인간 세계로 뛰어들어서 공주를 납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가에 나타나서 공물을 바치라며 불을 지르는 것도 아니다. 그건 빌어쳐먹을 기독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일 뿐이다. 실제로는 한적한 생활을 즐기는 족속에 가깝다.

"알았어. 그러면 드래곤의 존재를 확인만 하고 돌아갈게."

"그래. 우리 모르간 참 착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모르간은 살포시 웃음을 지으면서 내 팔을 맞잡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와 손을 맞잡으면서 오솔길을 걸었다. 아무것도 없는 숲길이었지만 이렇게 손을 잡으니 마치 데이트 코스를 걷는 것 같았다. 모르간은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그녀의 모습이 어떠한 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직접 보지는 않아도 그녀가 얼굴을 붉히면서 웃음을 짓고 있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뭔가가 앞에 있어."

걸음을 멈추고서 말했다.

허리벨트의 홀스더에 매여져 있는 엑스칼리버.

청백색을 띄는 검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호수의 요정 비비안이 내게 하사한 성검이 떨려온다. 무언가가 있다.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풀숲을 지나치며 오솔길의 끝에 도달하자 보이는 것은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짐승이다. 물이 흐르는 계곡에서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는 드래곤. 두 뿔과 거대한 날개가 돋보이는 짐승은 고개를 밑으로 쳐박고서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이 허탈감을 느낄 정도로 아주 편안하게 잠이나 자고 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릴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그 드래곤의 앞에는 우리보다 먼저 발걸음을 향한 선객이 있었다.

두 명의 소녀였다. 그 중의 한 명은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서로 구면이다. 모르간에 필적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주황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면서 손을 높이며 힘껏 흔들었다.

"비세리온 군! 오랜만이야, 그 동안에 질 지냈으려나?"

"멀린이냐."

"그렇지! 그 옆에는 발랑까진 제자가 보이는 걸?"

뒤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고화력의 열기.

나는 급하게 옆으로 몸을 내던졌고, 내 뒤에서 쏘아진 화염구들이 일제히 멀린에게 쏘아진다. 그 표적이 된 멀린은 태연자약하게 우두커니 서있었고, 그 화염구들을 막아낸 것은 그녀의 옆에 서있던 공주 기사였다.

세피아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세련된 움직임을 구사하며 발검.

군더더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검격으로 모르간이 전개한 화염구들을 일제히 베어냈다. 그리고 그 화염구들은 검격에 파쇄당하자 무력하게 한 줌의 불씨로 소멸되었다. 칼날이 마력의 흐름을 끊어냈다. 그것도 완벽에 가까운 실력으로.

적어도 나 이상의 검술을 가진 소녀인 것은 분명하다.

세피아처럼 옅은 흑발을 가진 소녀는 나와 모르간을 힐끗 보더니 무표정한 모습을 보였다. 아그라베인과 많이 겹쳐보인다.

"멀린. 이 사람들은?"

"우리 아서가 보고 싶어했던 비세리온 펜드래건! 브리튼의 섭정왕이시지!"

"진짜?"

무표정을 고수하던 아서라는 이름의 소녀가 나를 바라본다.

무채색의 인상을 가지고 있던 얼굴에 수려한 웃음이 걸린다. 마치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당혹스럽다는 웃음을 지으면서도 내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세피아 눈동자를 반짝이며 내게 다급히 물었다.

"브리튼의 영웅이신 비세리온 오라버니이십니까?"

"뭐?"

나는 너처럼 귀여운 여동생을 둔 적은 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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