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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43화 (43/195)

<-- 왕들의 집결 -->

007

전쟁의 초반부는 브리튼의 승리.

야습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서 공격에 참전한 브리튼군이 다시 자신의 진영으로 귀환했다. 그리고 태세를 정비한 게르만군이 추격을 개시하면서 아이시스 강을 건넜으나, 마침 아이시스 강을 메우고 있던 얼음들이 녹아서 모조리 무너져내리며 게르만 측에 큰 피해를 낳았다. 무턱대고 대군을 투입시켰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부작용이 되고 말았다.

"이겼다!!"

"게르만 놈들도 별것 없잖아?"

"하하핫! 내가 한 번 쏘아보니까 아주 꽁지가 빠지도록 도망치더라고."

"네 얼굴이 못생긴 탓이잖냐."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승리의 달콤함에 취한 브리튼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야만인들 중에서 가장 흉폭하기로 유명한 게르만족이 그 상대라고 해서 꽤나 겁을 집어먹었지만 결국 전투에서 승리했다. 수많은 페이크를 내걸면서 적을 혼란스럽게 유도한 뒤에 총전력을 다해서 공격. 야심한 시각에 이렇게나 체계적으로 정비된 브리튼 기사들에 의해 공격당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게르만의 패배였다.

심지어 야습을 감행한 적군의 응전조차 실패한 게르만군은 큰 혼란을 빚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큰 이점을 가지고 갈 것이 분명했다. 현재 옥스퍼드 인근의 거점은 모두 브리튼군에 넘어왔고, 게르만군은 론디니움에서 갓 출병하여 아직 현지의 사정조차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흐음."

비세리온은 승리의 함성을 내지르는 브리튼군 중심에 서있었음에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모르간과 니무에는 이미 마력 고갈로 리타이어. 가웨인만이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금발의 수려한 미인은 자신의 왕에게 달라 붙으려고 하는 사라센 계집을 물리치고서 왕의 옆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전하?"

조금은 승리에 참작한 공헌을 생각해서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면 좋을 텐데.

가웨인은 자칫 무례한 요구라고도 할 수 있는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처했다.

물론 그녀 자신이 그렇게 생각할 뿐, 흠칫흠칫 비세리온을 보면서 새하얀 뺨을 붉히고 있어서 태연한 자세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반응이다.

"언제 아군을 퇴각시킬지를 생각했어."

"퇴각이라고 하셨습니까? 저희 군은 이미 승기를 잡았는데요?"

"그렇게 보이나."

또다시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비세리온.

그의 태도에 가웨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뭘까. 내 언행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왕의 저 태도는 분명 자신의 언행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왕의 생각과는 이반될 때에 나오는 결과였다. 조금이라도 왕의 총애를 받고 싶어하는 가웨인으로서는 왕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마땅히 무언가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뭐야! 뭐야! 뭐야아아!'

푸쉬쉬쉬.....

금발의 미인은 머리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오를 것처럼 고민했지만 왕이 만족할 대안은 없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에 젖은 가웨인의 이성이 수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비세리온이 입을 열었다.

"이번 전투로 느낀 게 없나? 야습 공격 작전에 선두로 보낸 병력들 중에서 적지 않은 숫자가 전공을 탐해서 무리하게 파고들었다가 게르만 전사들에게 도륙이 나버렸지. 경미한 피해라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완벽을 추구해야만 하는 지휘관으로서는 꽤나 치명적인 결과야. 내 완벽한 작전에 오물을 뿌려버린 격이라고 할까."

아아. 그것이었습니까.

가웨인은 왕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직시하면서, 자신이 직접 목격한 브리튼 기사들을 떠올렸다. 만용을 부리는 것처럼 적진 깊숙한 곳으로 돌격하던 기사들. 딴에는 적 지휘관의 숨통을 끊으려고 한 것이겠지만, 전장의 흐름으로 봤을 때는 그저 아군의 승리에 먹칠을 하는 피해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들은 아군 지휘관, 그러니까 섭정왕의 경고를 무시하고서 공헌과 전공에만 집착하느라 무리하게 돌격을 감행하였고, 궁지에 몰린 쥐에게 물어뜯겨 죽었다. 2만 병력에 달하는 적진에서 용감무쌍한 전사들이 있는 것은 당연히 생각해볼 수 있는 예측이다. 게르만 전사들은 불의의 야습에도 침착하게 대응하면서 브리튼 병력이 중앙으로 파고들 수 있는 길목을 차단하고 이를 봉쇄했다.

게르만 전사들이 없었다면 게르만군은 천문학적인 피해를 내고는 패주하고 말았겠지. 하지만 그들의 용맹 덕분에 괴멸은 피했다. 물론 지금도 큰 피해를 안고 있을 테지만.

"모든 병력들이 내 마음 대로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지. 손을 봐야겠어."

"하지만 아군의 사기가 높습니다."

"사기가 높으면 뭐하나. 아직까지 내 명령을 우습게 아는 놈들이 많은데."

야습 전투를 기점으로 또다른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중심에 아이시스 강을 경계로 두고서 대치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게르만군 측에서도 전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빗발칠 것이 뻔했지만, 그것은 브리튼군으로서도 마찬가지였다. 게르만 병사들을 살육하면서 그 맛이 들려버린 브리튼 기사들이 그 주축이 되어 있었다.

명예와 긍지를 요구하는 브리튼 기사들은 딴에는 자신들이 용감해서 이긴 것처럼 선전하고 다녔다. 물론 그들의 협력이 전투 승리의 주축이 된 것은 당연하지만, 그 승리의 대부분은 비세리온이 군략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만할 정도로 승리에 취한 기사들의 반응에 비세리온의 침음은 깊어져 갈 뿐이다.

기사들의 주전 여론을 반대하고서 대치 상황을 1주일 정도 이어나가자 이번에는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한 모르간이 니무에를 대동하고서 비세리온을 찾았다. 마치 마누라가 딸아이와 함께 남편을 구박하러 가는 듯한 모습이다.

"어떻게 할 거야, 그래서."

"흐음. 지금 눈치 싸움을 하고 있거든."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모르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략에 대해서는 잼병인 그녀로서는 비세리온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비세리온은 당연하게 그 말뜻을 그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이를 해주었다.

"지금 가이세리크와 치킨 레이스를 하고 있다고. 누가 먼저 전장에서 발을 빼느냐, 그걸 두고서 기싸움을 펼치고 있다고 하면 이해가 되나."

"대강은. 그러면 우리가 먼저 퇴각해도 되잖아? 이제 슬슬 군량도 없고, 보급 시일도 늦어지고 있어. 카멜롯의 어느 놈팽이들이 슬슬 당신의 부재에 눈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딴생각이 생겼다는 뜻이겠지."

"맞아. 카멜롯으로 귀환하면 좀 큰 판을 벌여서 손을 봐야겠어."

비세리온도 귀환을 크게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그것을 차마 결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브리튼 기사들의 여론이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브리튼 왕국에서 기사 계급은 큰 영향력을 띄고 있다. 애초에 이 왕국은 기사들에 의해 세워졌다.

로마 제국을 따르던 브리튼인 출신의 기사들이 모여서 세워진 왕국이었고, 왕국은 기사 계급들을 크게 중용하고 있었다. 그런 형편에 게르만족에게 등을 돌리고서 철군을 결행해버리면 기사 계급의 반발이 예상되고, 전투의 승리와는 무색하게 섭정왕을 향한 비판론이 재기될지도 모른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그 뒤처리가 곤란하다.

이게 모두 신 왕실이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통성 자체가 빈약하기에 일어난 상황이다. 차라리 웨일즈에서 기사왕을 자칭하고 있는 아서 펜드래건이 군을 지휘했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혼수 상태에 빠져 병석에 누워있는 우서 펜드래건의 양아들로 들어가면서 그 성씨를 펜드래건으로 개명하였음에도 아직까지도 정통성이 약하다. 적어도 기사왕이 브리튼 왕국으로 귀환한다면 그녀를 따를 기사 세력이 상당할 것이다. 기사는 결국 명예와 긍지대로 움직인다. 당연히 우서 펜드래건의 사생아인 아서를 따르게 되겠지.

"하아..... 저 늙은이, 빨리 좀 돌아가지. 우리한테 야단을 맞았으면 질질 짜면서 자기네 집으로 돌아갈 일이지 뭐가 좋아서 여기 있는 건데?!"

비세리온이 스트레스를 부리듯이 짜증스런 목소리를 토해냈다.

적 진지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음. 그렇다고 다른 게릴라 작전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혼란스러운 지휘체계의 상황은 저쪽도 마찬가지다. 처음으로 브리튼에 상륙하여 그 영토를 점령한 게르만도 혼란스럽기는 매한가지였고, 당연히 이번 전투의 지속은 그들로서도 바라는 게 아니다.

양측 지휘관이 모두 퇴각을 속내에 두고 있었지만 그를 행동에 옮기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자존심' 대결이기 때문이다. 군량이 바닥나고 보급품이 도착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였음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이시스 강을 중심으로 대치하면서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았다.

퇴각이 시작된 것은 양측에 전령을 보내어 '퇴각'의 날을 약속하고서 이를 승인한 뒤였다. 양 군세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정확히 회군을 하면서 우스꽝스러운 결말을 맞이한 짧은 전투가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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