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들의 집결 -->
005
가이세리크는 게르만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영웅 중의 한 명이다.
서로마 제국을 구성하던 게르만 부족들 중에 중심부에 오르지 못하고 변방을 떠돌던 부족들을 모아서 결집.
거친 성향의 게르만족을 복종시키는 것만으로도 수 년의 세월이 걸렸고, 또 그들에게 브리튼 정벌을 진행시키는 데만 또다시 수 년이 걸렸다. 애초에 북방의 초원을 내달리던 기마민족에게 섬나라를 정복하자고 주장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무리한 일이었다.
하지만 초로의 노장이 가진 생각은 달랐다.
여전히 강대국으로 보이는 서로마 제국은 서서히 멸망의 기로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갈리아 지역은 프랑크족의 점령을 받고 있었고, 히스파니아는 서고트족에게, 그리고 북아프리카도 빼앗겼다. 이미 서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강력한 공격을 받고 있었을 뿐더러 사방에서 야만족들이 들끓었으므로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그에 서로마 제국 산하의 군벌이었던 가이세리크는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왕국을 꾸릴 것을 고안해낸다. 적어도 서로마 제국에 아직도 가능성이 있다면서 매달리는 머저리들보다야 현명했다. 자신의 모든 밑천을 쏟아부어서 왕국을 건설한다. 이미 다 늙어버린 가이세리크는 이번 사업에 모든 사활을 내건 것이다.
"지금 당장 공격하여 저들의 재산을 모두 약탈해야 합니다!"
"군비가 부족하면, 저들의 것을 빼앗으면 됩니다."
"우리가 뭐가 무서워 브리튼인들과 동등해져야 하는 겁니까?!"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가장 큰 요소가 된 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각 부족간의 불협화음과 시기, 도저히 통합되지 않는 여론이라고 해야겠지. 게르만인들에게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 수많은 수단을 써보았음에도 부족들간의 화합인 이루어지지 못했다. 로마를 쳐부수고 서로마 제국을 세웠으나 그것은 여전히 불가능했는데, 결국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게 생겼다.
매서운 추위가 다가오는 북방의 초원을 떠돌다가 겨우 로마를 멸망시키고 서로마 제국을 세웠는데, 그 따위의 불협화음 때문에 또다시 초원으로 쫓겨나게 생겼다.
초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추운 고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또다시 궁핍하고 초라한 생활을 보내라는 건가.
"우리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지금은 결코 비세리온 왕을 이길 수 없다!"
가이세리크는 불가론을 들면서 직접적인 전쟁에 반대.
게르만 본진에서는 약탈을 위한 전쟁을 주장하는 부족장들과, 전쟁에 반대하는 가이세리크와 그를 따르는 심복들 간의 말싸움이 이어졌다. 잠시뒤면 칼이 겨누어질 듯이 치열해질 양상을 띄었다.
결국 그런 상황에까지 치닫자, 결국 가이세리크의 심복들이 한 발자국 물러서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했다. 부족장들은 브리튼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서 너무 들떠 있었다. 브리튼을 점령하면서 그들은 오만하게 굴었다. 누구 덕분에 브리튼을 점령할 수 있었는지 까맣게 잊어버린 듯하다.
"전하. 이대로는 부족장들을 막을 수가 없어집니다."
"우선은 저들에게 전투를 명령하시죠. 쓴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족속들입니다."
결국 가이세리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락함으로서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가이세리크는 직접 나서진 않았다.
본군에서 운용하고 있는 주술사들의 말에 따르면 적의 사역마가 감지되었다고 한다. 그것도 평균적인 수량을 초과한 대량의 사역마가. 분명 아군의 움직임을 과다하게 감지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고, 표면적으로는 아군의 공격을 경계하여 수비로만 일관할 거라는 제스처이기도 하다.
이상하지 않은가.
적어도 비세리온은 고스란히 자신의 움직임을 노출시킬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오히려 군략의 기재라고 불리는 지휘관이다. 그런 작자가 대체 뭘 꾸미려는 걸까. 모든 것들이 함정처럼 보였다.
명령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부족장들 때문일까. 노련한 머리가 돌아가지를 않는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마땅한 대안이 생각나질 않았다.
"샬로트!"
"예, 할아버님."
가이세리크가 부른 것은 자신의 손녀딸이자 게르만 최고의 전사라고 불리는 샬로트였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당돌한 발걸음으로 가이세리크의 앞으로 나아가 부복했다. 체격이 다른 민족에 비해서 크기로 유명한 게르만인이었음에도 팔다리가 가늘고 어깨가 왜소하다. 여인이라고 하기에도 조금 체격이 작았지만 창술에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맹장이었기에 게르만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무예에는 잼병인 할아버지와는 달리 그 손녀딸은 말 한 필과 창 한 자루를 들면 적 군대를 격파해버리는 용맹과 무용을 가지고 있었다. 단점은 수영을 전혀 못하는 맥주병이라고 할까. 그 때문에 매번 브리튼 상륙작전에서는 제외당해야 했다.
"이번에야말로 비겁한 비세리온의 목을 따오겠습니다!"
자신이 맥주병이라는 비밀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비세리온은 게르만의 상륙작전을 저지할 때마다 자신이 타고 있는 군선을 가장 집요스럽게 노렸다. 수영조차 못하는 샬로트는 기가 질려서는 상륙을 포기. 그 트라우마는 흑역사로 남았다.
"그러면 강을 건너야 한다."
"아, 그건 무리입니다."
당장에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단언한 샬로트였지만 눈앞에 펼쳐진 아이시스 강이 넘실거리는 모습을 보며 단숨에 그 의지를 꺾어내렸다. 일기당천, 만무부당에 해당되는 맹장이라고 할지라도 약점은 존재한다. 그리고 샬로트의 약점이 바로 수중전이다. 자신의 약점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그것을 포기했다.
우선 샬로트를 아군 진영의 선두에 세우려고 했다.
가이세리크는 고작 7천 밖에 되지 않는 소규모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비세리온이 공격을 감행할 거라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대는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이다.
기상천외한 방법을 전쟁에 동원하는 천재는 그 자가 밖에 없겠지. 노련한 자신을 궁지에 내몰 수 있는 인간은 그 놈 밖에 없다.
"전하! 서직스가 공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한 족장이 서둘러 가이세리크에게 다가서며 외쳤다.
서직스는 론디니움의 남단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그 지역이 뚫리면 곧바로 론디니움으로 직결된다. 현재 가레스가 이끄는 병력이 서직스를 공격하고 있었고, 게르만 부족들이 응전했지만 서로 연합되지 않는 특성 때문인지 브리튼 병력보다도 두 배는 더 많은 병력을 가졌음에도 각개격파 당하면서 상당한 손실을 내고 있었다.
"서직스가 공격을 받고 있다라. 비세리온은 우리를 다시 돌려보낼 생각이다. 적의 목적은 서직스의 점령이 아닐 터."
서직스는 게르만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영토였고, 카멜롯과는 거리가 매우 먼 변경이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점령이 어려울 뿐더러, 장기간의 주둔조차도 불가능하다. 서직스에는 다수의 브리튼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민심을 고려한다면 약탈조차 불가능할 것이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는 빈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땅을 공격했다는 것은 게르만인들을 자극시키기 위함이며, 나아가 게르만인들에게 복속된 브리튼인들의 참전을 촉구하는 간접적인 요인을 위한 행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활한 놈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전쟁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고도의 정치적인 이유가 들어 있었다.
"할아버님, 저는 이만 선두로 가보겠습니다."
"그래. 비세리온이 공격을 걸어올 수도 있으니 주의하거라."
"강을 스스로 건너서 온다면 제가 모조리 죽여버리겠습니다."
그녀가 붉은색의 장창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병장기라고 하기에는 그 형태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다. 뾰족한 가시가 수십 개나 튀어나온 붉은 창은 일반적인 장창처럼 찌르기가 목적이 아니다. 상대방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데만 특화된 흉기였고, 그 붉은 창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살해하고 그 원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침, 선두에 있던 전령들이 일제히 본진으로 달려왔다.
무슨 수를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빠른 시간에 아이시스 강을 도하해버린 브리튼 기사단이 게르만 진영을 도륙내고 있다는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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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낳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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