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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40화 (40/195)

<-- 왕들의 집결 -->

004

아이시스 강에서 양군이 대치.

일기토에서 승리를 거둔 브리튼군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게르만군도 마찬가지였다. 물안개가 솟아오르는 아이시스 강의 적막감만이 흘러나왔다. 성격이 괄괄한 게르만족이라면 분명 강을 일제히 도하하여 수적인 우세를 앞세우면서 돌격을 감행해야 했겠지만 가이세리크라는 인물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신중하고 매사에 사려가 깊다.

7천 대 2만이라는 수적인 우세에도 결코 가볍게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이제 내일이면 일전이 펼쳐지는군요!"

어수룩해진 밤.

강 건너편에 좌우로 이어진 적의 진지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가웨인이 물었다. 밤공기가 그녀의 수려한 금발을 간질거리고 있었다. 백색 계열의 갑옷을 차려입은 그녀는 동화책에 등장할 법한 공주기사처럼 아리따웠다.

푸른 벽안으로 적 진지를 가득 담고 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오크니의 공주님을 향해 말했다.

"일전은 무슨 일전? 우리가 싸우러 온 줄 아나?"

"예?"

가웨인이 내 말에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한숨을 내쉬었다. 군략에 재능이 깊다고는 하지만 아직 상대방의 움직임까지 파악할 정도는 아닌가. 돌격형 지휘관에 가까운 가웨인의 대답에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까지는 내가 친정을 하는 방식으로 매번 군단을 지휘해야 할 듯 싶었다. 카멜롯 진영에는 대규모 군단을 지휘할 수 있는 인재는 없었다.

그녀에게 찬찬히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보다 상황이 더 최악인 게 지금의 게르만이야. 대륙을 건너 론디니움을 점령하고 그 일대를 평정. 동부의 브리튼인들을 복속시키는 것은 수십 년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할 사업이지. 애초에 브리튼인의 뼛속까지 게르만족을 거부하는 사상이 가득 할 테니까."

"예. 그러면 지금의 게르만은 본거지도 위태로운 상황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건 우리도 다를 바는 없어. 적어도 게르만 녀석들보다야 수월하겠지만.

브리튼군 7천 명은 꽤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는 형편이다.

군비 쪽에 대해서는 콘월 측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었기에 무리는 없지만, 대부분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는 지방 귀족들이 과거 보두앵의 부하들이었고, 그들은 보두앵이 패망하자 내 편으로 돌아섰지만 충성도 면에서는 딱히 이렇다고 할 확신이 없었다.

언제 배신해도 이상하지 않을 군사들이라고 할까.

야만인들인 게르만족에 쉽게 항복할 귀족은 없어 보이지만 그 확률이 100%인 것은 아니다. 전쟁은 정치가들의 도박이라고는 하지만, 그 도박에 성공 확률이 현저히 낮다면 판돈을 걸어서는 안 되겠지.

솔직히 말해서 이번 전쟁은 그저 '보여주기식'일 뿐이다.

브리튼인들에게 이민족을 막아내기 위해서 출전하는 카멜롯군의 위풍당당한 모습. 직접적인 전투가 없을 지라도 극악무도한 이미지를 가진 게르만족을 격퇴하기 위해서 출전한 카멜롯군의 모습은 수많은 브리튼인들의 눈과 귀로 흘러들어 갔으리라.

"그냥 여기서 뻐긴다. 그게 전략이야."

"적들이 몰려 오면요?"

"막아야지. 바보냐?"

"제,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만!"

한심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가웨인이 크아아, 소리를 질렀다. 점점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내 행동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현재 아이시스 강을 중심으로 모든 지류에 사역마들을 보내어 그를 관리하고 있다. 니무에와 모르간. 우리 진영의 가장 우수한 마법사들을 동원해서 감시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고, 만약 게르만군이 일제히 도하를 시작한다고 하더라도 공격계 마법 폭격을 해버리면 그만이다. 우리에게 공격도 수비도 나쁠 건 없다.

가웨인이 물었다.

"이모님과 니무에로 공격을 감행하면요?"

"마법사가 군단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냐. 우리 군은 어디까지나 소수인 점을 감안하자, 오크니의 공주님."

"노, 놀리지 마세요!"

"그래 그래. 그냥 무지한 공주님에게 가르침을 주려는 거지."

전쟁은 물리적으로 부딪친다고 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대치를 함으로서 유리해지는 것은 브리튼이다. 브리튼인들이 가진 반게르만적인 성향을 이용해서 결속력을 올리고, 나아가 신 왕실의 지배력을 공고히 다진다. 게르만이 이렇게 론디니움을 출병하여 대치 상황을 맞물리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다. 이건 내가 구상한 시나리오였으니까.

"팔라메데스."

"예, 주군."

갈색 피부의 여기사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다.

오늘 있었던 일기토의 활약 덕분에 사라센 출신인 팔라메데스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적어도 이민족이라고 해서 차별적이던 시선이 달라졌고, 앞으로는 팔라메데스에게 중책을 맡길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녀에게는 1천의 군사를 맡기면서 아이시스 강의 상류에 매복.

매복이라고 할 것도 없다. 어차피 살육에 굶주린 게르만족의 공격을 막아내기만 하면 될 뿐이니까. 분명 가이세리크는 이번 전쟁에 반대하고 있을 것이며, 그의 의중을 모르는 다혈질의 게르만 족장들이 그를 채근하겠지.

고작 7천 뿐이라고는 해도 옥스퍼드는 이쪽의 홈그라운드.

우리에게 유리하다. 나아가 가레스가 이끄는 1천의 병력이 출격하여 론디니움 하단에 위치한 서직스를 공격하고 있다. 이제 곧 저쪽에 그 소식이 전해질 테지. 정보력에 있어서는 완전히 적지에 고립된 상황인 게르만보다야 뛰어나다. 저쪽도 따로 운용하고 있는 첩보는 없을 테니까.

"제레인트."

"예, 전하."

듬직한 체격을 가진 청년 기사에게는 병력을 따로 내어 아이시스 강 중류에 배치. 게르만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이대로 힘으로 막아선다.

도하를 시도하는 적에게는 따로 사용할 계책도 없다. 중무장한 기사들을 전진으로 배치시키고, 웨일즈 출신의 장궁병들에게 탄막을 명령한다. 전형적인 잉글랜드식 방어 진형을 구성하면 아이시스 강이라는 자연적 이점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방어전을 펼치면 된다.

엄지 손톱을 깨물면서 바닥에 돌무더기 위에 주저 앉았다.

의복이 더러워진다면서 주변 기사들이 만류했지만 그것은 과도한 친절이다.

야전 사령관에게 있어 의복을 더럽히지 말라는 것은 그냥 전쟁에서 패배하고 적장의 앞으로 나아가 목숨 구걸이나 하라는 뜻과 같다. 전쟁에 고귀함 따위는 없다. 그렇기에 일국의 왕으로서 보일 체면도, 그리고 명예도 없다. 그저 전쟁에서 이긴다. 야전 사령관이 가장 지켜야 할 것은 의복도 명예도 아닌, 단 하나의 승리였다.

"이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어?"

"8할 정도는."

모르간의 물음에 그리 답했다.

돌무더기에 앉아서는 생각에 잠겼다.

짙게 어둠이 깔린 밤하늘을 타고 바람이 불어온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이 지배하는 전장. 손톱을 깨물면서 앞으로의 판도를 예상해 보았다. 서직스 지방을 공격하고 있는 가레스의 움직임에 게르만은 대응하지 못한다.

불의의 습격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은 게르만족의 익숙한 약점이다. 그들은 하나의 명령 체계를 받지 못하고, 각 부족들이 나누어서 움직이니까.

서로마 제국을 세운 게르만족의 일파에서 비롯된 것이 가이세리크라고는 하지만, 그는 완벽하게 모든 게르만 부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브리튼 왕국의 영토를 분할한다는 조건으로 각 부족장들과 합의를 보았을 것이고, 이미 브리튼 동부를 지배하였으니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부족장들도 존재할 것이다.

"사역마들에게서 이변은?"

"없어. 당신이 말한대로 게르만 본진에서 시끌벅적한 잡음이 들린다는 것을 빼면. 적들의 소리까지 감청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의 본진에 다수의 주술사들이 있어. 이쪽이 사역마를 이용해서 움직임을 감지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아차렸을 거야.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그래, 우리 마누라."

"어째서 일부러 적이 우리 사역마의 움직임을 들키도록 유도하라는 거야?"

모르간과 니무에의 실력이라면 적 주술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사역마를 다룰 수 있었다. 매우 세심하게 다루어야 할 이야기였지만, 이미 탑클래스에 해당되는 모르간과 니무에한테는 무리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들에게는 비둘기라던지 다른 동물을 이용한 사역마를 일부러 노출시키도록 유도했다. 사역마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은신시킬 수 있는 대마법사의 존재를 숨기기 위함이며, 나아가 우리가 완벽하게 수비로 일관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앞으로 이런 상황이 사흘 정도는 지속될 거라고 봐."

"그 다음에는?"

"공세에 나서야지. 더러운 이민족을 그냥 보내서야 우리 체면도 말이 아니지. 오랜만에 만난 호적수의 얼굴에 똥칠이라도 해서 보낼 생각이야."

아직까지 수십 개의 부족들을 모두 통합하지 못한 가이세리크.

그 늙은이의 추례한 낯짝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꼴을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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