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들의 집결 -->
002
브리튼 왕국에 세 명의 왕이 난립.
웨일즈의 아서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입담이 거친 호사가들은 강제적으로 론디니움을 점령해버린 비천한 게르만족 따위를 왕으로 칭하기는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온 브리튼 왕국은 북방의 야만인들을 천하게 여기는 풍토가 강했고, 당연히 북방의 초원을 떠돌던 게르만 일족을 동등한 선상에서 브리튼인과 같은 취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가축 정도라고 할까.
털가죽을 덮고 기마나 타는 유목 민족. 말의 젖이나 먹고 자란다는 말이 있다.
지금은 로마를 멸망시키고 그 빈자리를 이어서 서로마 제국으로 발전한 지식인들이라지만 과거의 야만인스러운 인상이 강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는 브리튼인들에게 있어 그저 사납고 이질적인 야만인에 지나지 않았다.
"흐음..... 이건 뜻밖인데. 가이세리크가 이렇게나 빨리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왕 집무실의 바로 오른편에 있는 서고 보관실에서 서책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당연히 군략 측면이었고, 어느 누군가가 가지런히 정리한 덕분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재 브리튼의 군세들은 모두 동쪽의 야만족과 대립하고 있었고, 각 지방 귀족들에게도 소집령을 내려두었다. 적어도 야먄안이 그 상대라면 분열 되어있는 브리튼도 조금은 단결력이라는 걸 발휘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은 내 희망사항이다.
지금의 브리튼이 과연 하나로 뭉칠까. 만약 사태가 악화된다면 웨일즈에서 왕을 자칭한 기사왕 아서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부디 그러한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가이세리크.
올해로 일흔에 달한 노장이었음에도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진 게르만족의 족장은 왕을 칭하기에는 충분한 인덕까지도 겸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한 나라의 왕이 되기에 충분한 인재. 지금까지 그의 대군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적극적으로 그의 상륙을 저지하였기 때문이다.
평야전에서 그와 대적할 경우 100%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없다. 적어도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에 계실 겁니까, 전하?"
"그렇지. 오늘 하루만큼은 서책에 둘러싸여서 군략에만 전념할 거야. 내 버릇 같은 거라고 할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날짜를 골라서 그 날만큼은 군략서의 필독에만 전념한다. 일종의 내 버릇이라고 할까. 적어도 군략서를 보지도 않고 맹탕처럼 빈머리만 들고 나가는 것보다야 낫겠지. 적어도 머리에 지식이라는 걸 가득 채우고 가자.
서고 보관실에는 내 시중을 들어주려는 듯이 가웨인이 새하얀 기사예복을 입고서 마주 서있었다. 미려하게 빛나는 금발을 하얀 머리끈으로 가지런하게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은 가웨인이 내게 말했다.
"그 많은 서책을 오늘 중으로 다 읽으실 생각입니까?"
"어."
"조금 많으신 듯한데요."
두 손으로 가득 받치고 있는 서책들을 보며 가웨인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아무래도 서책의 양이 상당히 많았던 모양이다. 나로서는 딱 하루치 분량이라고 생각하는데. 전쟁에 나서는 지휘관이 그 전날에 서책을 손에 잡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서책에 얼굴을 파묻고서 군략을 다시 한 번 점검한다. 마치 하나의 예술품을 만드려는 세공사처럼.
전쟁은 하나의 예술이며, 예술의 일환에 속한다.
지휘관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자신의 방식대로 전황을 잘 이끌어나가고, 그를 조율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전투의 승패가 결정된다. 전쟁을 예술이라 치부한다면, 그것은 완벽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미학에 가까우리라.
"우앗!"
가웨인이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나를 도와서 두 손 가득 서책더미를 들고 있었던 그녀는 시야가 자유롭지를 못했고,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하지 않을 실수를 범했다. 바닥에 있는 양피지를 밟고는 중심을 잃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내 쪽으로.
"괘, 괜찮으세요..... 전하?"
"어. 괜찮으니까 그 가슴 좀 치워주지 않을래? 모르간이 이 모습을 보면 질투의 화신이 되어서는 내 목줄을 죄여올 것 같거든."
내 시야를 가득 메우는 것은 가웨인의 커다란 가슴이다.
부드러운 감촉과 함께 향긋한 여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결코 피하고 싶지 않은 호사이긴 하지만, 내 곁에는 질투의 마녀님이 계시니 지금의 상황이 실로 두렵다. 나를 향해 쓰러져서는 커다란 가슴으로 내 얼굴을 짓누르고 계신 태양의 기사.
그녀는 두 팔로 쓰러진 자신의 신체를 일으키면서도 나와 시선을 마주하면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서고 보관실에 있는 것은 남녀 둘 뿐.
게다가 서로 육체를 밀접하고 있는 상태. 상대방의 숨소리까지도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몸을 좁히고 있었다. 가웨인과 얼굴을 가까이 마주하면서 느낀 생각은 '아름답다' 였다.
수려한 금발의 미인은 나이스 바디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고, 헐렁한 기사예복을 입었음에도 가슴은 부각되어 보였다. 얼마나 큰 거냐. 모르간으로서도 기대하기 어려운 사이즈로군.
물론 지금의 상황을 마누라에게 들키면 나는 죽는다.
카멜롯의 중앙 광장에서 오체분시를 당할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아발론으로 승천하겠지.
"......"
가웨인이 나를 무언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
서로 간의 움직임이 멈춰버렸다.
나는 가웨인이 내 위에서 비키기를 기다렸고,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가웨인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비키는 것을 멈췄다. 그녀의 평소 행동이라면 분명 여자아이 같은 비명을 내지르면서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처녀스러운 모습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 상황을 기회라고 여기는 걸까.
그 청순하던 처녀가 어느샌가 남자를 원하게 된 거로군.
이래서 시골 처녀가 수도로 오면 발랑까진 아이가 된다. 물론 가웨인의 동생은 이미 발랑까진 녀석이지만.
"비켜줄래?"
"아, 옛! 알겠습니다.... 전하!"
내 말에 가웨인이 빛의 속도로 뒤로 물러섰다.
잔영을 그리면서 물러서는 태양의 기사. 그 움직임은 순식간에 뒤로 물러서버렸다. 역시 최우의 기사라고 불리는 가웨인답게 인외 수준에 달하는 신체 능력이다.
금발의 처녀는 내 곁에서 떨어지고서도 달콤한 기류를 흘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조건적으로 들킬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고 할까.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게 매우 서툰 가웨인이니까. 얼굴을 붉히면서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젠장, 나한테는 마누라 밖에 없는데.
서책을 가득 안고서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독서 삼매경.
수십 권에 달하는 책을 테이블 위에 쌓아두고서 그것을 한참동안이나 읽었다. 점심과 저녁을 모두 무시하고서 책만 읽었다. 빼곡하게 글자가 적힌 페이지를 넘기면서 수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읽었다.
내 곁에서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인 가웨인이 어느 순간 질린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군략서를 뒤적거리면서 간단하게 필기를 하거나, 다시 독서를 시작하는 내 모습이 지루하게 느껴질 만도 하겠지.
"주, 준비를 엄청나게 많이 하시네요."
"뭐..... 그렇지. 이 준비 덕분에 아까운 병사들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면야."
"예."
도체스터에 주둔하고 있던 용병 기사단은 카멜롯으로 귀환중.
브리튼 왕국의 동부 일대는 게르만족에게 모조리 빼앗겨버렸다. 왕국은 현 상황에서도 매우 혼란스러웠기에 첩보부를 따로 운용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적군의 동태를 알아보기 위해서 수색대를 계속 파견하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첩보부를 운영한 적이 없었다.
국왕인 우서 펜드래건과 재상 보두앵까지.
브리튼 왕국을 다스렸던 최고 위정자들은 '첩보부'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파악하지 못했고, 이를 운영하지 않았다. 그게 패착이다. 브리튼 왕국은 눈 먼 장님마냥 대륙에서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서 브리튼 왕국에 상륙해버린 게르만족 대군을 막지 못했다.
현재 가이세리크는 론디니움을 수도로 삼고 스스로 왕에 올랐다.
차라리 그가 점령한 동부의 땅에서 약탈이나 저지르면서 야만인처럼 굴면 좋았겠지만, 오히려 이민족의 왕은 브리튼인과 게르만인을 융화시키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에는 브리튼인들의 반란과 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지만, 수십 년이 경과한다면 융화 정책이 그 빛을 발하리라.
물론 그 빛이 발하기 전에 녀석의 숨통을 끊어야겠지만.
적어도 브리튼 왕국은 켈트인의 후예인 브리튼인이 세운 왕국으로 남아야 한다. 민족우월주의, 민족순혈주의를 지향할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북방의 초원에서 기마민족으로 지낸 게르만족 따위를 이 섬나라에 용납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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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노래 님, 쿠폰 20장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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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품이든 상관 ㄴㄴ
PS. 신개념 자본주의 작가.
자낳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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