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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용병군주-33화 (33/195)

<-- 호수의 요정 비비안 -->

003

모르간이 나를 불렀다.

마침 서류업무가 모두 끝난 뒤였고, 어느 정도는 시급한 사안들까지도 마무리를 해두었다. 설마 그것을 알고서 나를 부른 걸까. 물론 그런 세심함을 기대하기 힘든 성격을 가진 마녀에게 배려심을 기대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점이 또 귀엽지. 나도 이미 콩깍지가 낀 모양이다.

"어디로 가는 건데?"

"시끄럽고 따라 오기나 해."

수상쩍을 정도로 모르간이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고, 나는 그녀를 따라가면서도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걷고 있는 곳은 카멜롯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숲이었기 때문이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서 왕성을 빠져나온 것은 좋은데, 이렇게 외딴 지역에서는 로맨스는커녕 호러 분위기만 자아내고 있었다. 설마 데이트 장소로 잡은 곳이 여기인가. 아니면 나를 몰래 살해하기 위해서 나를 꼬신 건가.

나를 꼬신 것치고는 너무 제멋대로 구는 것 같다만.

한 세력을 책임지고 있는 왕치고는 지조가 없다. 사랑하는 여인에게서 부름을 받자마자 의심도 하지 않고 이런 외곽 지역까지 와버리다니.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했나. 이야기의 전개가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뭐야, 그 멍청한 얼굴은?"

"갑자기 집무실에 쳐들어와서는 '나랑 같이 가!'라고 따지듯이 말하면서 나를 질질 끌고 왔잖아. 그런 상황에 놓이면 대부분의 인간은 나와 똑같은 표정을 지을 거라고 생각해."

특히 모르간의 대사를 따라할 때는 그녀의 목소리에 최대한 비슷하게 성대모사를 했다.

그러자 모르간의 표정이 썩어 들어간다. 물론 그런 얼굴도 귀엽지만, 이렇게 대놓고 성대모사를 부정당할 줄이야. 남성의 걸걸한 목소리로 꾀꼬리가 우는 것처럼 아리따운 모르간의 음성을 흉내낼 수는 없었지만.

"당신에게 불리한 일은 아냐."

"그건 알아. 네가 나한테 불리한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마, 말은 잘 한다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고개를 돌리는 모르간.

이미 얼굴은 물론 귀까지 붉어진 상태였다. 돌발적으로 말하는 것에 약한 모양이다. 어쨌거나 모르간은 스스로 앞장 서면서 숲을 걸어나갔고, 나는 그를 따라갔다. 대체 무슨 일인 걸까. 설마하니----

"데이트? 아니면 이런 풀숲에서 밀회를 즐기고 싶은 거냐? 왕궁의 뒤뜰에서 즐기면 될 텐데. 다른 사람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그 짜릿한 스릴과 쾌감을 느끼고 싶다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닥치지 못 해?!"

사납게 소리치는 모르간.

그녀의 여전한 반응을 웃음을 터트렸다. 붉은 마녀는 자신이 놀림감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머리 위에 쓰고 있던 고깔모자를 눌러 썼다. 나를 상대해주기도 귀찮다는 제스처였다.

"따라오기나 해!"

"그래 그래."

그녀가 나를 안내한 곳은 외딴 숲에 숨겨진 작은 호수였다.

호수라고 할까. 꽤나 큰 규모의 호수였지만 적막감으로 가득한 호수에서는 물안개만 흘러나올 뿐이었다. 너무 조용해서 수상하다고 할까.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는 호수를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침 지금 시각은 새벽넠이었고, 새벽 하늘에서 내리쬐는 달빛에 반사되는 호광(湖光)이 눈부시다.

그리고 호수에 서 있는 것은 한 여인이다.

속살이 다 비치는 옷감을 두르고 있을 뿐인 나신의 여인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기를 수 초. 여인이 먼저 반응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으앗, 놀래라. 우선 눈호강은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합장을 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꽤나 큼지막한 거유를 보아서 운이 좋다. 옆에 서있던 모르간은 나를 질린듯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고, 무방비하게 나신과 비슷한 수준으로 피부를 드러낸 여성은 익숙하지 않은 나를 보더니 파르르 떨더가도 이내 허리를 펴면서 대화를 시작했다.

"이 호수에는 무슨 용건으로.... 모르간? 모르간이네요!"

호수의 수면 위에 서있는 기적을 경험하고 계시던 여인은 활짝 얼굴을 펴더니 총총걸음으로 물결을 걸으며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에게 다가섰다. 아무래도 모르간의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는 몰라도 수면 위를 걸을 수 있는 여성은 모르간의 지인이다. 역시 둘 다 괴짜라서 친한 걸까.

모르간이 호수의 여인에게 말했다.

"비비안. 네가 말했던 왕을 데려왔어."

"왕? 저 음흉한 시선으로 저를 훑어보듯이 바라보는 사람이 왕이라고요? 제가 생각하던 왕의 이미지와는 너무 다른데요? 좀 더 고결하고 기품이 넘치는.... 그런 이미지를 생각했는데."

비비안이라는 여성이 왕에 대해서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에 부합하는 남자라고 생각하는데.

잘생긴 마스크와 균형 잡힌 몸이라면 나도 지지 않는다. 옷도 꽤나 화려한 연미복을 입었고, 헤어스타일도 얼마 전에 정리해서 딱히 흠잡을 곳은 없다. 대체 내가 어느 점에서 왕에 실격이라는 거지. 이미 브리튼 왕국에서 섭정왕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는 나에게. 당장에 이 호수를 파내버릴까.

사악하게 웃으며 비비안을 바라보았다.

"당장에 이 호수를 파내버려야겠어. 내 명령으로 이 호수의 모든 물을 파버리겠다!"

"그만 둬! 그만 두란 말이야!"

"내 얼굴을 보면 알겠지? 나는 한다고 하면 하는 인간이야. 내게 최소한의 인간성도 바라지 말라고!"

그 말에 비비안이 벌벌 떨었다.

내 명령 한 번이면 수천 명에 달하는 병력이 소집된다. 수천 명이 동시에 호수를 파버린다면 이 호수는 물 한 모금조차 존재하지 않는 폐허가 되어버리겠지. 비비안에게서 느껴지는 성스러운 마력을 보아하니 이 호수를 관리하는 요정과 비슷한 존재로 보인다. 니무에한테서 느껴지는 기운과 비슷하다.

"뭐하는 거야.... 둘 다."

"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저 망할 요정에게 본때를 보여주겠어! 나는 한다면 하는 인간이야!"

"그런데 왜 바지춤을 움켜쥐는 건데?!"

나와 비비안은 서로 대치중이었다.

비비안은 벌벌 떨고 있었고, 나는 그녀를 향해서 바지춤을 잡고 있었다. 남자의 진정한 무기는 하복부에 있다. 대여성용 병기이기도 하며, 때에 따라서는 대남성용으로도 사용된다. 물론 나는 남성에게 사용한 적은 없다.

"모르간! 저 건방진 인간은 결코 왕으로 인정할 수 없어요! 왕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실격이잖아요!"

"잘도 말하셨겠다? 이 호수에 소변이라도 눠버리겠어! 안 그래도 장거리를 걸어서 슬슬 뇨의를 느끼기 시작했으니까."

"제발 그만해!"

결국 우리 둘을 중재한 것은 모르간이었다.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짓는 모르간. 나와 비비안을 강제로 멀리 떨어트리면서 못 다했던 '대화'라는 것을 시작했다. 어째서 비비안이 브리튼의 왕을 보고자 하였는지, 그리고 모르간이 나를 왜 이 곳으로 데려왔는지. 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비비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선 본재로 돌아올게요... 하아, 이런 분이 브리튼의 왕일 줄이야. 우서 펜드래건의 뒤를 이어서 브리튼의 왕이 되신 분. 혹시 성함을 물을 수 있을까요?"

"비세리온 도체스터. 이제 곧 비세리온 펜드래건이 되겠지만."

"예... 그러면 저는 비세리온 펜드래건으로 부를게요."

비비안이라는 이름의 호수의 요정은 나를 브리튼의 새로운 왕으로 인정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모르간에게 나를 데리고 와달라고 말했고, 직접 내 얼굴을 보고서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있었지만 적어도 왕이라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비비안은 이 호수에서 브리튼의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오랜 기다림의 끝에 나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비비안이 말했다.

"브리튼의 오랜 전란을 평정하고 왕국을 재건하실 운명을 받은 왕인 당신에게 말할게요. 솔직히 내 예상과는 다른 형태의 왕이지만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거라고 할까요. 동쪽에서는 '새로운 왕'이 느껴지지만 당신도 그 왕격에 전혀 뒤쳐지지 않는 분이예요. 인간적인 면모는 큰 문제이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아슬아슬하게 합격일까요. 하아, 곁에 있을 모르간이 불쌍해요."

꽤나 길게 나에 대한 불평 및 불만을 쏟아낸 비비안은 내게 줄 것이 있다고 말했다.

호수의 요정 비비안. 그녀는 자신이 수 세기에 걸쳐서 보관하고 있던 어느 성검을 나에게 맡기고자 하였다. 브리튼의 새로운 왕에게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라 말하는 것을 덧붙였고, 이제서야 자신이 지고 있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며 회한에 잠긴 한숨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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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기한: 2018/0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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