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주님이 누구에게 -->
001
8백 여명의 증원군을 이끌고 온 알베르는 '이민족에게 콘월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내세우면서 콘월의 중요 지부들마다 병력을 배치했다.
중장갑으로 무장한 중장보병들은 중앙군 소속의 정예병이었고, 유약한 콘월 공작은 카멜롯의 1인자인 보두앵의 사촌인 알베르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는 형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반 중앙정부의 기치를 세우기 시작한 콘월 출신의 기사들이 서로 집결하는 양상을 낳아버렸고, 알베르를 향한 반대 여론은 급상승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거 완전 FUCK 같은 상황이구만."
발코니에 기대어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내 반대편에서 하염없이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인 덧없는 느낌의 마녀가 대답했다.
"내 고향을 찬탈하려는 도둑놈이 또 나타날 줄은 몰랐어."
"또라니. 그 전에도 있었단 말이야?"
"내 앞에 있어."
모르간 르 페이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녀의 주변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나 뿐이다. 이상하군, 나 밖에 없는데. 과연 제 1의 찬탈자는 누구를 말하는 걸까.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나는 순수한 호의로서 콘월을 도와주려는 것이다. 결코 다른 이유는 없다. 이번 기회를 잡아서 콘월의 제 3왕녀인 모르간과 어떻게 해보려는 수작은 없다고.
물론 조금의 흑심은 있었지만.
콘월을 빼앗으려는 무뢰한을 제거하고 그 용사에게 사랑에 빠진 공주님과 알콩달콩 사랑의 전개를 나눈다, 라는 줄거리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하기만 하고, 시궁창에 가깝다. 그런 형편 좋은 일이 단숨에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네 고향 콘월을 빼앗을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지금 떠나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알베르를 상대하기 벅찬 네 아버지를 도와서 그 망할 놈팽이를 내쫓으려고 하는 거야."
"....당신을 어떻게 믿고?"
"어이 어이. 네 어머니를 도와주는 나의 신사적인 모습을 못 본 모양인데. 지금 콘월 기사들은 나를 엄청 좋아하거든? 솔직히 말해서 내 취향은 이그레인 님이지, 네가 아냐."
"이이익!!"
무언가가 불만이었는지 바다를 바라보고만 있던 모르간이 고개를 홱하고 돌리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대체 내 말에 어떤 점이 어폐가 있었던 걸까. 적어도 아발론의 붉은 마녀라고 불리는 모르간 르 페이 님에게 이렇다고 할 무례는 없을 텐데.
아무튼 지금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미 콘월 출신의 기사들에게서 알베르는 '영토 찬탈자'라고 불리오고 있었고, 온갖 악성 여론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녀석이 만약 관심종자를 목표로 하는 녀석이었다면 굉장히 성공을 한 셈이다. 콘월 공작 산하에 있는 귀족들을 뭉치게 만든 장본인이니까. 콘월인들은 서로 모이기만 하면 알베르라는 빌어먹을 꼬맹이의 욕설부터 시작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이 무슨 어그로.
만약 이 시대에 검색 웹사이트가 있었다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을 텐데. 자신의 숙부만 믿고서 깝죽거리는 소인배는 콘월을 자신의 영지로 삼고자 했고, 일부러 숙부에게 정예병 8백 명을 빌려서는 콘월까지 쳐들어왔다.
비록 무기를 겨누지는 않았지만 워낙 노골적인 입장으로 나왔기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콘월 공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서 애새끼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애써 참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브리튼의 재상인 보두앵의 심기를 건드릴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콘월 공작이었다면 곧바로 반란을 일으켜버렸을 것이다. 애초에 먼저 심기를 건드린 것은 알베르다. 적어도 칼을 직접 들이대진 않더라도 1대 1 결투를 신청하는 방식으로 저 애새끼의 목을 따버렸겠지.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뭔데, 그게?"
"어허. 방금 전까지 나더러 찬탈자라고 말했잖아. 그런 찬탈자에게 대안 방법을 듣고 싶으신가 우리 모르간 르 페이 양은."
"쪼, 쪼잔해!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방금 전에 말한 발언에 대해서 그대로 갚아주자,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가 물러섰다.
"괜찮아. 정신연령은 충분히 어리니까. 뇌가 동안이지."
나보다 어린 연하녀에게 말싸움에서는 지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 혀를 놀리면서 살아온 세월이 얼마라고 생각하는 거냐.
적어도 귀족으로서 정치에 필요한 언변은 갖추고 있다고 자부한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먼저 가져야 할 덕목이 바로 타인을 속이는 언변이다. 그렇기에 어릴 적부터 이 언변을 조기교육으로 배워왔다. 다시 말해서 정치인은 민중을 속이는 사기꾼인 셈이다.
"아무튼 지금 콘월성에는 진짜 찬탈자.... 그러니까 내 얘기가 아냐. 알베르라는 애새끼가 와서 분탕질을 치고 있는 형편이니 적어도 지금은 힘을 합치자,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라고."
"힘을? 누구와?"
"너와 나. 나빌레라.... 아니, 이건 아니고, 어찌 되었든 알베르에게 콘월을 빼앗기면 물론 너는 곤란해질 거고, 나도 입맛이 개운하지 않아. 어쨌거나 내가 지킨 콘월인데 그런 녀석에게 넘어가는 건 불쾌하다고 생각해."
"흐응."
모르간이 콧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혈류석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한다.
이 녀석을 과연 믿어도 될까, 라는 듯란 의문을 무언으로 던지고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이 소녀에게 신뢰성이 없는 건가. 적어도 그녀에게 밉보인 적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중앙군 8백 명을 앞세우고서 콘월을 정복하려는 찬탈자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모르간 밖에 없다. 나는 직접적으로 1백 명의 기마대를 이끌고 있었고, 콘월의 지지층이라 할 수 있는 기사 계급들의 여론을 등에 업고 있다. 또한 모르간 르 페이는 콘월 공작의 셋째 딸이면서 후계자로서 그 명분을 쥐고 있었다.
우리 두 명이 힘을 합치면 지지층과 명분을 모두 얻게 되는 것이고, 그저 찬탈자에 불과한 알베르를 축출하는 데 큰 요소로 작용할 것이다.
"그래서 아까 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방안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흠. 우선 콧대가 높아서 꺾일 줄을 모르는 애송이 자식의 자존심을 긁어내야지. 대전사 결투, 그러니까 서로 간의 대리자를 앞세워서 결투를 신청하는 거야. 귀족들 간에는 마찰이 발생할 경우 매번 대전사 결투로 그 시시비비가 가려졌으니 못할 이유는 없지."
"대전사? 하지만 그건 기사 서임을 받은 사람끼리의 이야기잖아. 나는 기사가 아닌 걸. 그리고 콘월 출신의 기사들 중에서는 중앙군 기사들처럼 유능한 녀석이 없어."
모르간은 시원스럽게도 콘월 출신의 기사들은 검술 실력이 잼병이야, 라고 말했다.
본인 고향의 기사를 저렇게나 신랄하게 까내릴 수 있다니 참으로 놀랍다. 그것이 분한 모르간은 자신이 기사 서임식을 거친 적이 없는 귀족 영애라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우선 대전사 결투에 있어서는 콘월이 밀린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 대놓고 영토를 찬탈하려는 중앙 귀족에 대한 적대감 또한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다면 그 대전사 결투에는 내가 나서면 되겠지? 나는 기사 서임식을 받은 귀족이고, 당연히 대전사 결투의 참전자로서는 그 자격이 충분할 테니까."
"흐응..... 당신 따위는 연극에서 무참히 쓰러지는 악당B로 충분하지만 알베르라는 녀석이 내세울 기사를 이길 수 있을지가 의문이야."
"어이,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
"악당B라고 여긴 것만으로도 과대평가라고 생각해."
"....."
이 녀석을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설마 고작해야 귀족 자제 출신의 기사에게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적어도 기사 수 명과 붙어도 거뜬히 이길 수 있거늘, 정작 나를 신뢰해야할 녀석은 나를 가장 불신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내 실력을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