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콘월의 기사 -->
003
모르간 르 페이.
아발론의 붉은 마녀 등으로 불리는 천재 마법사에 대한 소문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다. 브리튼 최고의 마법사인 멀린의 제자라고 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콘월 공작과 이그레인 사이에서 태어난 셋째 딸이었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았다. 브리튼 전역에 소문이 퍼질 정도로 대단하신 마법사가 그녀였을 줄이야.
붉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아가씨는 성난 고양이처럼 눈꼬리를 올리며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이 콘월에서 무슨 수작을 부릴 셈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네 아버지의 부탁을 받아서 노르만족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으로 지원을 왔을 뿐이야."
"그걸 믿으라고?"
아무래도 이 소녀는 나에게 큰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가 콘월을 빼앗을 거라고 여기는 걸까. 콘월 출신의 기사들이 내 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하고 있었고, 틴타젤 공에게 충성을 맹세한 귀족들까지도 점점 나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 동안 골칫거리였던 노르만족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외부인 귀족이면서도 점차 콘월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당신이 콘월 공작령을 가로채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어. 나로서는 외부인인 당신이 설치는 모습이 꼴사납게 보일 뿐이야."
"어이, 적어도 노르만족으로부터 콘월을 구해준 사람인데 그런 말투는 좀 그렇지 않냐. 은혜를 모르시는구만."
"시끄러, 닥쳐."
앙칼진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 무슨 귀여운 소녀인 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멀린보다야 훨씬 매력적이다. 감정이 풍부하다는 게 귀엽다고 할까. 특히 앙칼진 모습이 너무 귀엽다. 내게 그러한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지만 적어도 모르간 르 페이라는 소녀에 대해서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반응이야 어찌되었든, 모르간은 내가 피식 웃음을 짓자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이라고 여겼는지 더욱 분노를 발산했다. 이거, 레이디에게 실례를 범해버렸군.
"뭐가 웃겨?"
"아니. 우선 본론으로 넘어가자. 네 말은 내가 콘월 공작령을 강탈할 지 우려가 된다는 거잖아? 그러면 이번 노르만 군세를 격퇴하면 도체스터로 돌아가도록 할게. 그러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텐데."
"조, 좋아."
붉은 머리카락의 아가씨는 내가 순순히 콘월에서 물러나겠다고 그 의사를 밝히자 오히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콘월 공작령은 브리튼 왕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유한 지역이다. 노르만족의 약탈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다른 이민족의 공격을 받고 있는 영토보다는 평화로운 편이다. 적어도 론디니움과 도체스터보다는 평온할 것이다.
풍부한 해산물과 여러 특산물, 그리고 지하자원이 매장된 콘월 공작령은 재상 보두앵조차 넘보고 있을 정도로 풍요로운 영지였다. 그 콘월 공작령을 알아서 포기하고 물러나겠다는 내 말은 모르간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이대로 콘월에 죽치고만 있어도 콘월의 귀족과 기사들이 알아서 공작의 직인을 가져올 것이 뻔한데, 나는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의사를 밝혀버린 것이다.
"나는 이미 도체스터 영지가 있어. 내 영지를 포기할 생각도 없어. 게다가 내가 자리를 오래 비우면 게르만족이 공격해올 테니까 나로서는 콘월 공작령을 가질 이유는 없지. 콘월은 여전히 틴타젤 공의 영토일 것이고, 훗날에는 네 영토가 되겠지. 콘월 공작령의 사정에는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알았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모르간 르 페이에게는 타인이 내뱉는 말에 거짓의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편리한 능력이기도 하지. 멀린을 포함해서 마도의 극에 오른 모르간 또한 거짓의 간파가 가능했다. 그에 반해서 니무에는 불가능하다고. 아직 수련이 미숙한 탓이라 한다. 내가 보기에는 니무에도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되지만, 멀린과 모르간에 비하면 매우 부족한 수준이라고.
내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는 모르간.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연스레 손길이 그녀의 머리 위로 향했다고 할까.
머리 위로 중압감을 느낀 모르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뭐야? 치워."
"아, 나도 모르게."
아버지의 영지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는 않을까 염려해서 내게 경고를 하러온 효녀가 너무 기특하게 여겨졌다고 할까.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소녀인데도 기특하기도 하지. 외견상 나이로 보면 10대 후반으로 보인다. 멀린만큼은 아니더라도 풍만한 가슴을 가진 나이스 바디의 미인이다. 몸에 두르고 있는 붉은 드레스는 색정적인 느낌이었고, 허리를 조이고 있는 코르셋 덕분에 몸매가 더욱 부각되었다.
내가 본 여성들 중에서 멀린을 제외하고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까. 기네비어와 니무에도 성장하면 분명 미인이 될 거라고 확신하지만 멀린과 모르간에게는 조금 부족하다. 그녀들이 예쁘지 않다는 건 아니지만 비교하는 대상이 엄청난 탓이다.
"당신. 거짓말을 한 거라면 머리 위로 불덩이를 떨구어주겠어!"
"그래 그래."
"큿! 그 어린애 바라보는 듯한 시선은 치워!"
손을 내저으면서 하하 웃음을 짓는 내 얼굴을 본 모르간이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내 모습이 그렇게나 불쾌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모르간은 훌륭한 어린애다. 남몰래 부모님을 위해서 힘내는 공주님. 분명 멀린에게 마법을 배운 것도 가족을 위해서겠지. 이런 기특한 녀석 같으니라고. 콘월 공작가문의 셋째 영애님은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래도 나는 영애님에게 큰 미움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모르간은 고개를 돌리며 자리를 떠나려고 했고,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사람은 금발 금안의 소녀였다. 니무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아가씨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가에 손가락을 물면서 입을 열었다.
".....엄마?"
"누가 엄마야! 나는 모르간 르 페이! 멀린을 도와서 너를 만들긴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너를 만든 사람은 멀린이잖아!"
"응, 엄마!"
"엄마 아냐아아아아아!!"
니무에는 모르간이 뭐라고 하건 그것을 무시하고는 붉은 머리카락의 마녀에게 퐁하고 매달렸다.
품에 안기는 니무에의 모습이 자연스럽다. 대놓고 불쾌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던 모르간은 자신에게 무방비할 정도로 안겨오는 니무에를 결국 꼭하고 끌어안았다. 겉으로는 싫다면서 투덜거리면서도 사실은 니무에를 소중하게 여기는 듯하다. 모녀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이좋은 언니 동생처럼 보였다.
"좋은 모녀구나. 그래서 아빠는 누군데? 아직 어려보이는데.... 하긴 브리튼 왕국은 조혼이 유행이니까 불가능할 건 없지. 상대 남편은 아마 로리콘인 모양이구만."
"아냐! 아냐! 니무에는 인공 요정.... 그러니까 마력으로 만들어진 요정이란 말이야!"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애초에 멀린이 니무에를 내게 맡기면서 '인공 정령'이라는 것을 말해주었다. 인공 정령이 태어난 경위에 대해서도 설명해주었고. 지금은 그저 모르간 르 페이라는 소녀를 놀리기 위해서 한 말일 뿐이다. 내게 성깔만 부리던 아가씨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엽게 보였다.
니무에가 고개를 올리며 모르간을 보더니,
"엄마? 비세리온은 새 주인님."
"주인님이라고------?!"
하필이면 부적절하게 보일 수 있는 호칭으로 나를 지칭하는 니무에 때문에 모르간의 눈빛에서 격정적인 에너지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살기라는 건가. 눈에서 광선이라도 나오는 줄 알았다.
고개를 홱하고 돌리면서 강하게 나를 노려보는 모르간 르 페이.
그녀는 자신의 딸아이에게 혹시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추궁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설마 1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니무에에게 무슨 짓이라도 했을까봐? 내 부하 녀석들은 모두 로리콘이지만 나는 성인식이 지난 소녀가 취향인 평범한 인간이다. 어린아이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할까. 물론 니무에는 귀엽고 장차 크면 미인이 될 것 같았지만 지금의 내 취향은 아니다.
"니무에한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당신이라는 사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안 들어!"
니무에를 꼭 끌어안으면서 모르간이 절박한 어조로 소리쳤다.
제 3자가 지금의 상황을 본다면 과연 뭐라고 생각할까. 아마도 내가 100% 나쁜놈으로 찍히겠지. 이래서 불공평하다. 어째서 나만 나쁜 역할을 맡아야 하는 걸까. 그 내막을 자세히 보면 오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나만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억울하다.
니무에가 쓸데없이 말을 해버려서 결국 모르간 르 페이라는 소녀에게 미움을 받아버렸다. 원래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더욱 격렬하게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할까. 곤란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