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병 귀족 -->
008
백금발의 여기사가 등장할 것이라는 건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브리튼 왕실의 근위기사들을 이끄는 기사단장이 등장해버릴 줄이야. 그것도 이런 변경에. 아마도 내게 역심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겠지. 그런데 왜 그녀가 온 걸까? 그녀는 적어도 재상 보두앵의 끄나풀은 아닐 텐데. 청렴하고 결의로 가득 찬 눈동자를 가진 여기사는 결코 그들의 하수인 역할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오랜만입니다, 도체스터 경."
"그러게. 베디비어."
베디비어는 그 태생이 엘리트 기사 가문에서 태어난 장녀로서, 간신들로 인해 타락한 브리튼 왕실을 섬기고 있는 대단한 괴짜였다.
설령 왕실이 타락하더라도 그를 지키는 것이 본분이라고 여기는 외골수라고 할까. 내가 보기에는 그저 미련하게 보일 뿐이다. 이런 왕실에 충성을 다하겠다니, 어지간한 괴짜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천한 태생의 용병들과 어울리는 나와는 달리, 베디비어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된 근위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었고 무엇보다 브리튼 왕실에서 제일 가는 검술사이기도 했다. 가녀린 어깨를 가진 여성이지만 어지간한 남성 무장들보다도 근력이 대단했다. 특히 말 위에서 휘두르는 마상창 솜씨가 출중하다.
"그래서 여기는 무슨 볼일인데? 대충 이해는 가지만."
"예, 매번 있었던 순찰이죠. 그 순찰에 다른 이면이 끼어있는 듯 하지만."
"귀찮군. 대충 보고나 잘 해줘."
내 말에 베디비어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을 뿐, 그녀가 도체스터를 돌아다니며 순찰 조사를 하는 것은 여전했다. 그 어떤 청탁이나 부탁도 통하지 않는 인간이 바로 베디비어였으니까. 오랫동안 같이 지낸 사이라서 조금은 친해졌을 거라고 여겼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백금발의 여기사는 영지 곳곳을 둘러보면서 평가를 내렸다.
"꽤나 성벽이 튼튼하군요. 이민족을 막기 위함인가요?"
"그런 셈이지."
엉성한 디자인이었지만 적어도 내구도는 튼튼한 성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수성전을 대비해서 불을 끌 소화수라던지, 성벽 바깥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해자도 미리 파두었다. 저장하고 있는 화살도 충분했고, 보관하고 있는 병장기들 또한 상태가 양호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매번 체크를 하고 있으니 틀림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건 무슨 짓이죠...?"
베디비어가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내 손길은 정확히 그녀의 갑옷 틈으로 파고들어가 탱탱한 둔부를 만지고 있었다. 역시 갑옷 안에는 몸매가 확실히 드러나는 타이즈를 입고 있었나. 타이즈를 입고 있었음에도 피부의 감촉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흠. 딱히. 쭉쭉빵빵한 미인을 보면 알아서 반응하는 현상이라고 할까."
"....그, 그런 현상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미안."
그렇게 말하면서 곧바로 손길을 치워주었다.
멀린에게는 경황이 없어서 성희롱을 할 수 없었지만 착실한 성격의 베디비어에게는 가능하다. 수려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인은 역시 참을 수 없단 말이지. 그것도 청려한 분위기의 미인에게는.
베디비어는 나를 힐끗 노려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역시 소문대로군요."
"카멜롯에 대체 나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그 소문은 잘못 알려졌다고 생각해."
"여자를 보면 헤벌레거리는 난동꾼."
"그건 틀린 말이 아닌데."
지금까지 수많은 귀족 영애와 동침을 하고서 원나잇을 즐긴 나에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군.
카멜롯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중앙 귀족 가문들의 딸내미들과 여러 연분이 나버린 나로서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딸내미의 처녀와 순결을 빼앗겨버린 중앙 귀족들은 나에게 강한 적개심을 느끼고 있었고, 여러 번이고 태클이 걸어왔다.
동쪽에서 게르만족을 막는다는 구실이 없었다면 옛적에 귀족 작위를 몰수당하고 처형당했을 것이다. 지조도 없이 수많은 공주와 아가씨들을 농락한 죄로. 하지만 눈부신 미인을 두고 물러나는 것은 내 체질이 아니다. 적어도 손에 넣고 싶은 아가시라면 무조건 손을 대는 게 내 일상이라고 할까.
"역시 넌 고지식한 여자야."
"당신처럼 방종 맞은 사람에게 듣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와 베디비어는 서로에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는 이단아들이다.
부패와 향락으로 물든 브리튼 왕실을 끝까지 섬기고 있는 기사단장. 그리고 변방에서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킨 중앙 귀족을 향한 복수의 칼날을 드러내고 있는 촌구석의 용병 귀족. 결코 세상과 현실에 안주하지도, 만족하지도 못하는 이단아였기에 서로에 대해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서로의 이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베디비어의 충직을 이해하기 힘들었고, 베디비어 또한 복수에 모든 것을 바친 나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카멜롯은 어때?"
".....매번 같습니다."
"지옥이라는 뜻이군."
"예."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한숨을 토해냈다.
이제 슬슬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노르만족들이 카멜롯을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도까지 뚫렸다는 것은 이미 브리튼 왕국에 희망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아직 카멜롯의 중앙 귀족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대체 언제쯤이 되어야 정신을 차리려나.
브리튼 왕국이 멸망하고 브리튼인들이 이민족들의 노예로 끌려갈 때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릴까. 아니, 종말이 오더라도 정신을 못 차리겠지.
"저희 기사단이 얼마 전에 큰 피해를 감수하면서 노르만족의 대군세를 물리쳤습니다만.... 다음은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카멜롯의 방어 병력들은? 왕실 기사단이 나서야 할 정도인가?"
"재상 보두앵이 자신에게 칼날을 드러낼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중앙군의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현재 카멜롯을 방어할 수 있는 중앙군은 많지 않습니다."
"미친. 자기 손으로 병력을 해산시켜? 제정신이냐."
재상 보두앵이라는 녀석에 대해서는 혀가 내둘러질 뿐이다.
어떻게 그런 버러지가 브리튼 왕국의 실세로 등극한 걸까. 우서 펜드래건의 부재가 그렇게도 큰 여파를 남겨버렸나. 이미 브리튼 왕국 내부에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할거하고 있었고, 그것은 곧 파멸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머리가 아프다.
이 놈의 나라 꼴이란.
베디비어가 말했다.
"그러면 이제부터 순찰 조사를 시작하죠. 도체스터의 모든 출입금 내역과 모든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는 자료를 요구합니다."
".....좀 봐주라."
"당신이라면 분명 공금으로 술을 마시거나 얼토당토 않은 짓에 썼겠죠. 철저히 밝혀내 드리겠습니다."
젠장할, 그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거냐.
공금 중의 일부를 횡령해서 여자 꼬시기에 써버렸는데. 분명 출입금 내역에 빈 여백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겠지. 베디비어는 눈썰미가 좋은 녀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