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병 귀족 -->
007
멀린은 이야기를 끝내고 도체스터를 떠나면서 나에게 '숙제'를 남겼다.
황혼의 마법사라고 불리는 그녀는 훗날 새로운 왕이 세상 바깥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그 때 결단을 내려달라면서 내게 촉구했다. 멀린은 내가 새로운 왕이라는 녀석의 조력자가 되어줬으면 좋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아마도 그녀는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도 접촉을 가지면서 조력자를 구하는 걸로 보였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브리튼 왕실을 차지하고 있는 재상 보두앵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진 마법 실력이라면 그것을 너무도 간단하게 이룰 수 있겠지만, 그래서는 인류사를 해칠 수 있다고 판단을 내리면서 브리튼 왕실을 농단하고 있는 간신을 처단할 권리를 인간에게 부여했다. 자신은 반인반마의 괴물이니 인류사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멀린이라는 여인은 철저히 '방관자'의 역할을 이행하려고 한다.
어느 순간에 나타나 의문을 던지다가도 정신을 차려보면 그녀의 자취는 보이지 않는다. 덧없는 여자라고 할까. 어째서 그녀의 이명이 '황혼의 마도사'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황혼처럼 아름답지만 덧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황혼이 아닐까.
집무실에 박혀서는 고민에 빠진 나에게 다가온 소녀가 있었다.
"비세리온, 고민이 많아 보여. 무슨 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친숙하게 구는 거냐."
"됐어. 2시간 정도. 이상해?"
"아니. 딱히."
꽤나 서툴게 브리튼어로 말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멀린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미려한 금발을 가진 소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니무에(Nimue).
멀린이 만든 인공 요정이라고 하는데, 투명한 금발과 금색 눈동자로 보아하니 인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걸 알 수 있었다.
딴에는 요정이라는 걸 강조하고 싶었는지 하늘하늘한 드레스에 머리 위에는 고깔모자를 쓰고 있다. 새하얀 허벅지가 강조되는 미니 스커트에 검은색 니삭스까지. 니무에를 창조한 멀린이라는 여성의 성취향이 고스란히 보였다.
중년 변태 남성이 마치 자신의 인형에 여러 가지의 모에 요소를 결합시켜 놓은 듯한 모습이라고 할까. 남성들이 꿈꾸는 모든 조합을 뭉쳐놓은 것 같았다. 물론 섬세한 아름다움과 순진무구한 귀여움이 느껴지는 소녀라는 것은 부정하지 않았다.
멀린은 내게 '우리 니무에 좀 잘 부탁할게! 유능한 아이라서 도움이 될 거야.'라고 무책임하게 말하고는 니무에라는 이름의 요정을 두고서 떠나갔다. 마치 자기 자식을 버리고 도망치는 매정한 어미라고나 할까.
황혼의 마법사가 자신을 두고 떠났음에도 니무에의 반응은 고요하기만 하다.
울고 불고 난리를 피운다거나, 꼴에는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는 멀린이 보고 싶다면서 떼를 써야 할 터인데 그런 것도 없다.
그저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간혹 테이블 위에 놓여진 쿠키나 다과류를 오물오물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린애 같은 모습답게 단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주방에서 일하는 시녀들에게 단것을 주문했고, 다과류를 마음껏 먹을 수 있게 된 니무에가 금안을 반짝였다.
"맛있다, 쿠키."
"그래 그래. 나는 일하는 중이니까 조용히 먹고 있어."
"응."
둘둘 말려있는 양피지를 살피면서 오늘의 서류 업무를 시작했다.
망할 마법사 때문에 일이 늦어지고 말았다. 오늘까지 봐야할 서류는 굉장히 많은 수준이었고, 시급하게 결재를 기다리는 것도 많았다.
론디니움이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을 경우에 곧바로 출동 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비상체계 명령을 구상한다던지, 론디니움에서 피난을 해올 경우에 피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 시설을 만드는 것도 필요했다.
브리튼 왕국의 동쪽은 그야말로 열악한 상황이다.
동쪽에서 게르만족을 경계하고 있는 거점은 단 두 곳. 이 곳과 론디니움 뿐이다. 다른 영주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고, 야만스럽기로 유명한 게르만족이 두려워 그 눈을 돌리고 있었다. 만약 도체스터와 론디니움이 게르만에게 함락당한다면 다음은 어디일까?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도 지방 귀족들은 결코 나서지 않았다.
아마도 야만인들이 자신의 영지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최악의 과정에서 눈을 돌리고 싶은 거겠지. 수많은 백성들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귀족이라는 놈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그저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눈앞의 사치와 향락에만 빠져드는 것 뿐이다.
한심한 일이 아닌가.
게르만족은 도체스터와 론디니움이 막는다고 치더라도 스코틀랜드에서 내려오는 픽트족과 남쪽에서 선박을 이용해서 대거 올라오는 노르만족은 어떻게 막을 생각인가? 이미 노르만은 수도 카멜롯까지 진출한 상황이었고, 북방의 픽트족 또한 스코틀랜드에서 내려와 브리튼 왕국의 북부 지역을 약탈하고 있었다.
펜을 굴리면서 생각에 빠졌다.
젠장할. 이대로 나라가 멸망하는 게 아닐까.
브리튼 왕국이 멸망해버린다면 그들로 인해 가문이 멸망당하고 가족을 잃는 것에 대한 최고의 복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리튼 왕국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어버린다면 복수를 이룬 게 되려나.
고민에 빠진 나에게 쿠키를 내미는 니무에.
금발 금안의 소녀는 내 입가에 쿠키를 쏙하고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각한 얼굴. 단것 먹으면 기운 나."
"그래. 고맙다."
"응."
그 꿍꿍이를 알 길이 없는 멀린과는 달리 그녀의 피조물인 요정 니무에는 순수한 소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나를 해코지를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인다. 고깔모자를 쓰고 있는 그녀는 멋대로 내 무릎 위에 올라타더니 그대로 몸을 내게 기대었다.
니무에가 갑작스럽게 편입된 이후로 나를 향한 '로리콘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로리에 불과한 기네비어와 니무에. 이 두 명의 어린 소녀들을 대동하고 다니기 시작한 나에게 부하 단원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힌다. 누가 봐도 추궁을 하는 듯한 눈빛이다.
"와아, 부럽다."
"하긴 음탕하고 속내를 알 수 없는 여편네들보다야 어린 소녀들이 좋지."
"로리들한테 보살핌 받으면서 살고 싶다."
전쟁의 수라장을 겪은 용병 기사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을 토해내면서 말했다.
과거에 밀회를 나누었던 주군의 귀부인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아리따운 여급에게 사기를 당한 전적이 있는 남정네들은 성인 여성을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그런 주제에 목숨이 오고 가는 전쟁터에서는 어린 소녀들을 추종하다시피 열광하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로리 최고!'라고 외치면서 이를 경배하기에 이르렀다.
목숨을 언제 잃을 지 알 수 없는 그들이기에 잠깐 동안의 버팀목을 원했을 것이고, 그 버팀목으로 어린 소녀들을 택했다. 가련하고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크고 자라는 광경을 지켜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나이의 로망이라고 지껄이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이 꼬맹이처럼 어린애가 아냐!"
기네비어가 소리쳤다.
니무에와 같은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열 다섯이라고는 해도, 신체 체형부터가 이미 로리 수준인 것을. 웨일즈에서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귀족 가문의 공주님까지도 이런 불쌍한 몸매인 걸까.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니무에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손을 맞잡았다.
"니무에는, 잘 몰라...."
"알 필요 없는 문제야."
"응. 알았어."
금발 금안의 소녀가 답했다.
내 말이라고 하면 철저히 따르는 그녀다운 대답이다. 멀린은 떠나기 전에 니무에의 보호자로 나를 지정하였고, 얼떨결에 니무에의 보호자가 되어버렸다. 그걸 알고 있는 니무에는 일방적으로 나를 따랐다.
기네비어와 니무에. 이 두 명의 소녀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애꾸눈의 용병이 내게 다가오면서 양피지를 건넸다.
"팔자 좋으시구만, 우리 백작님은."
"원래 그렇지."
양피지를 펼쳐보았다.
그에 적힌 내용을 보고서는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꽤나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이곳 도체스터로 만나고 싶지 않은 불청객이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