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병 귀족 -->
005
브리트 왕국의 지배권을 잡고 있는 것은 현 국왕인 우서 펜드래건으로부터 모든 정권을 빼앗은 『재상』 피에르 보두앵이었다.
어느 나라가 그러하듯이 국왕이 병석에 누워버리면, 그것을 대신하기 위해서 간신배들이 왕궁에 들끓는다. 지금의 브리튼이 그러했다. 폭군 보티건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우서 펜드래건이었지만, 그런 영웅도 병이 들어버리니 유약한 암군에 지나지 않았다.
앞에서 말하였던 대로 현재 브리튼 왕국을 이끄는 것은 피에르 보두앵.
태어날 때부터 상위층에 위치한 중앙 귀족은 그렇지 않아도 이민족들로 들끓는 브리튼을 망치는 주범이었고, 피에르 주변의 간신배들은 모두 고관대작이 되어 국정을 최악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다시 말해서 개판 오분전.
그냥 외국으로 도망치는게 현명스러운 방법처럼 보일 정도였다.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한 적도 많았다.
이미 재상이라는 쓰레기가 나라를 좀먹고 있었고, 그 재상의 주변에는 간신배들로 가득하다. 이민족들이 극성인 마당에 브리튼 왕국은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다. 브리튼인들 중에서 그걸 모르는 인간은 없었다. 지방 귀족들이 브리튼 중흥의 기치를 들고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 결국 재상 보두앵의 건재함만 보여준 꼴이 되어버렸다.
"후와아. 역시 후드를 쓰는 건 답답하네."
새하얀 로브를 걸치고 있던 마법사 여성이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그녀는 해질넠의 햇빛처럼 찬란한 주황색을 띄는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이었다. 로리 체형인 기네비어와는 달리 너무도 풍부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인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 만난 여인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단번에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머리카락 색채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말했다.
"안녕. 비세리온 군."
"---군이라. 나보다 어려보이는데."
"흐흥. 그렇게 말해주니 영광이야."
마법사가 진심으로 기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어리게 봐줘서 고맙다는 모습이다. 아무래도 이 여인은 나보다 연상인 모양이다. 하긴 여성들은 자신의 외모가 어리다는 말을 들으면 좋아하니까. 물론 예외도 존재한다. 기네비어 같은 경우에는 "열두 살은 되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열 다섯이야!"라고 빽 소리를 내지른 기억이 난다.
기네비어와 헤어지고 나에게 노골적으로 기척을 드러내던 마법사 여성과 만남을 가졌다.
그녀와 만남을 가진 곳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낡은 선술집이었다. 기묘할 정도로 낡은 선술집에는 손님이 없었다. 아예 인기척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비록 낡아지만 이렇게 인기척이 없을 수가 있다니. 선술집을 운영하는 주인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마법사로 보이는 그녀가 수작을 부린 것 같다.
"나는 멀린이야. 반인반마의 마술사."
"그래. 브리튼 왕실의 궁정 마법사께서는 어쩐 일로."
심드렁한 어조로 답했다.
하지만 놀라지 않는 건 아니다. 겉으로는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제법 놀라고 있었다.
브리튼 왕실을 책임지고 있는 궁정 마법사께서는 어쩐 일로 나를 보자고 하였을까. 멀린이라는 여성 마법사는 폭군 보티건을 섬겼고, 나아가 그 뒤에 즉위한 우서 펜드래건을 섬겼다. 두 명의 왕을 섬긴 왕좌지재라고 할 수 있는 여인은 브리튼 최고의 마법사라고 불리었고, 궁정 마법사였음에도 왕궁에 머무르지 않고 매번 브리튼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 움직임과 행동거지조차 불분명한 마법사가 이번에는 나를 찾아왔다.
한낱 도시의 영주에 불과한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
"그다지 큰 용건은 아니야. 동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게르만족을 막아서는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을 뿐."
내게 흥미가 동하였는지 멀린은 주황색 눈동자를 선명하게 빛내면서 고개를 내밀었다.
얼굴이 가깝다. 새하얀 피부를 가진 빼어난 미모의 미녀와 좁은 거리에 있다는 건 저절로 사람을 긴장시킨다. 남정네라면 미인을 보면 음심부터 품기 마련이지만, 그 아름다움이 인간을 초월하였다면 오히려 남정네를 긴장시키게 만든다. 음심조차 품기 어려울 정도라고 할까.
그녀의 말에 답했다.
"영지로 받은 땅을 지키려고 할 뿐이야. 브리튼 왕국과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조금도 없어."
"우서에게도?"
"당연하지. 병석에 누워서는 골골거리면서 오늘 내일하는 영감님의 안위를 걱정해 줄 정도로 나는 한가하지 않아. 오히려 바쁜 입장이지. 매번 이민족들의 공세를 막아야 하니까. 적어도 제 2의 수도인 론디니움이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지, 론디니움까지 밀렸으면 이 도체스터까지 밀려났을 테니까."
"응. 론디니움 주변에 있는 도시는 이 도체스터 밖에 없으니까. 이미 이 인근은 이민족의 땅이 되어버렸어."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왕 우서에 대한 무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그런 불손한 말을 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싱긋거리고 있을 뿐이다.
"저기 저기, 비세리온 군! 새로운 왕을 섬겨보지 않을래?"
"새로운 왕?"
"그래! 가련하고 아름답고...으응, 그리고 나보다도 뛰어난 왕이야. 물론 지금은 많이 미숙하지만."
내 두 손을 부여잡으면서 얼굴을 내미는 멀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자칫 고개를 숙여버리면 입술이 맞닿을 것 같다. 선명한 호박처럼 빛나는 주황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마법사가 마치 자신의 제자를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다를 떨었다.
"지금까지 흉폭한 게르만을 막아내고, 그리고 브리튼 전역을 돌면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는 야심가에게 건네는 제안이라고 할까? 야심이 많다는 것은 조금 걸리지만 적어도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까 건네는 제안이야."
"그 제안 한 번 가볍군. 원래 이런 낡아빠진 선술집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 않나."
"시국이 불안정하니까. 어쩔 수 없지."
멀린이 말하는 '새로운 왕'이라는 타이틀과 그 존재에 대해서는 미지수였지만, 그 메리트에 끌리진 않는다. 역적 보두앵과 그를 따르는 간신배를 척결하고 왕궁의 새로운 주인을 섬겨라, 그게 바로 멀린의 제안이다.
현재 새로운 왕에게는 세력이 미약하고 현저하게 부족하니, 동쪽에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나를 포섭하려는 움직임이다. 왕으로서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고 하더라도 그 휘하에 기사와 병력들이 없다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몽상가에 가깝다. 그렇기에 멀린은 새로운 왕의 새로운 세력을 위해서 나를 포섭하려는 것이다.
나는 그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이미 우서 펜드래건도 요절하기 직전인데 또 누구를 새로운 왕으로 섬기란 말인가. 애초에 멀린이라는 존재부터가 수상쩍다. 인간 여성과 악마 인큐버스의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마. 처음 보는 그녀의 말을 덜컥 믿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녀와 새로운 왕이 성공할 거라는 확실성도 부족했고.
"나랑 한 번 자게 해줄게."
"....아, 끌릴 뻔 했다."
풍만한 가슴골을 강조하는 멀린. 그리고 그를 보면서 아찔한 충동감을 느꼈다.
이성을 매료시키는 마력을 뿜어내는 여성 마법사를 짐승처럼 껴안아버릴 뻔 하지 않았던가. 그게 멀린의 노림수인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까지 새로운 왕에게 기대려는 건가. 멀린이 그 정도로 기대감을 거는 새로운 왕이라면 조금은 흥미가 생긴다.
"칫! 통하지 않았나...."
"젠장할."
혀를 차기 시작하는 멀린을 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앙큼한 암여우 같으니. 누가 인큐버스의 후예가 아니랄까봐 인재를 포섭하려는 방법부터가 글러먹었다. 남정네들에게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말이다.
"보두앵도, 간신들도. 언젠가는 그들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걸로는 새로운 왕을 섬기겠다는 의지가 느껴지지 않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야심에 대해서 허심탄회하게 내뱉었다.
멀린은 그 말을 듣고서도 전혀 놀랍다는 표정을 짓지 않았다. 대체 나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는 반응만을 보여줄 뿐이다.
"나도 알아. 나는 예언가이기도 하니까. 역적과 간신들을 죽이는 것은 비세리온 군의 운명이야."
"이제는 운명론인가. 마법사인지 예언가인지, 하나만 정해라."
내 말에 멀린은 '내가 너무 잘나서 투잡을 뛰고 있을 뿐이야.'라고 말하면서 요망스러운 눈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