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용병 귀족 -->
004
용병단을 이끌고서 귀족들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 도체스터(Dorchester)라는 이름의 영지를 하사받았다.
이른바 봉토를 하사받은 셈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 멸문하였던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는 뜻이었고, 현 귀족 세력들에게 올가미가 씌워졌다는 뜻이다. 귀족들은 봉토를 주는 대가로 충성을 강요하였으며, 나는 그를 받아들였다.
로마시대에는 두르노바리아라고 불렀던 곳으로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도시인데, 농축산물의 집산지로 상업이 발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영토였지만 그 주변에 게르만족이 극성이라는 점과 그 위험성을 내포한 영토에는 아무도 가기 싫어한다는 점이 작용하면서 도체스터의 영주가 되었다.
수도인 카멜롯에서 상업적인 항구도시인 론디니움으로 이어지는 요충지에 해당되는 도체스터를 맡게 되면서 자연스레 이민족 침공을 저지하는 임무를 부여받았고, 브리튼 왕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병사들을 모으기 시작하는 군벌들을 토벌하면서 세력을 모았다.
"나는 브리튼 왕국에 충성을 다하려는 거지, 절대로 너 같은 무뢰배를 따르는 게 아냐!"
허리벨트에 여러 자루의 대거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푸른 머릿결의 소녀가 당차게도 말했다. 웨일즈의 소영지인 카메란드의 귀족 영애---- 기네비어였다. 반납치에 가까운 형식으로 우리 용병대에 합류한 당찬 소녀는 이민족의 침공을 받는 방어 도시인 도체스터의 장교로 부임했다.
군략도 뭣도 모르는 소녀를 군 장교로 앉힌 것은 얼토당토 않은 일이었지만, 적어도 귀족 영애라는 점을 들어서 자리를 마련했다. 시골 벽지를 벗어나 군 장교로 부임한 것에 대해서 만족하고 있었는지 적어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병사들의 조련에는 힘을 쓰고 있었다.
"그래 그래. 아무튼 이 도체스터는 수천 명의 인구가 상주하고 있는 변방의 대도시라고 할 수 있으니, 그 방비를 철저히 기해야겠지. 게다가 게르만족과 북방의 픽트족, 색슨족과 앵글로족까지 넘보고 있는 도시로 유명하니 더욱 빡센 수준이야."
위험천만한 사지라는 것을 경고해 주었다.
나로서는 시골 벽지에서 곱게 자른 귀족 영애에게 강제로 싸우도록 만들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천하의 개쌍놈이지만 그런 거친 행동까지는 하지 않는다. 내 말을 들은 기네비어는 오히려 푸른 벽안을 빛내기 시작했다.
도 S인가, 이 녀석은!
위험하다는 말에 오히려 흥미를 보이다니.
"좋아! 나라를 위해서 싸울 수 있다면!"
"....기사들의 무용담을 너무 많이 본 거 아니냐."
"그게 어때서? 브리튼은 브리튼인들의 것이야! 우방국이었던 로마가 물러나고 더러운 게르만족이 몰려왔지만 우리 브리튼인은 결코 지지 않을 거라고!"
자, 여기서 설명을 하도록 하자.
과거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속국으로서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로마의 선진화된 문물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병력으로 이민족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면서 브리튼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게르만족의 침공에 로마는 브리튼에 상주하고 있던 병력과 기술자들을 본국으로 철수시키게 되고, 결국 브리튼은 이민족의 공세를 받게 된다.
그게 지금의 현 상황이다.
우방국으로 믿었던 로마 제국이 이민족에게 본국의 영토를 공격당하자 해외에 파병을 보낸 병력들을 철수시켰고, 결국 브리튼은 로마 제국의 조력도 없이 이민족과 싸우게 생겼다. 그 동안은 로마만 믿고 평화에 취한 브리튼인들이 거친 게르만인과 싸우게 되었고, 변변찮은 병사 훈련조차 하지 않은 브리튼은 큰 궁지에 몰려버렸다.
"여기는 꽤나 번성한 도시 같네."
"적어도 론디니움 주변의 도시들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라고 생각하는데."
"다른 도시들은?"
"게르만의 약탈로 모조리 망해버렸지."
나와 기네비어는 도시의 시가지를 거닐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웨일즈의 민란을 정벌하고 돌아온 지 불과 2주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 동안은 기네비어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영지인 도체스터에 와서는 마치 악우처럼 시시껄렁한 이야기라도 줄곧 했다. 나는 타인과의 친화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 이렇게 살가운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은 모두 기네비어 덕분인가.
웨일즈에서 온 이방인이었음에도 붙임성이 좋다.
특유의 친근함이 있다고 할까. 푸른 머리카락의 작은 소녀는 방방곡곡 돌아다니면서 촐랑거렸고, 도체스터의 작은 아가씨라는 이명까지 생겼다.
"오늘도 데이트를 즐기시는 겁니까?"
"단장도 말로만 싫다고 하지, 어린 소녀를 좋아한다니까."
"솔직히 로리 싫어하는 남정네는 없지."
"로리를 진리라고."
부하 녀석들은 나와 기네비어를 보면서 실실 웃음을 지었다.
그 말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고, 오로지 기네비어만이 얼굴을 붉히면서 완강하게 거부했다. 진짜로 싫어하는군. 하긴 만난 지로부터 불과 2주일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동안에 조금 친분을 쌓았겠지만 귀족 영애가 헤픈 성격도 아니고, 갑자기 외간 남정네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가질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알기에 부하들은 노골적으로 놀렸다.
기네비어 특유의 반박이 너무 재밌었기 때문이리라. 푸른 머릿결의 공녀는 그것도 모르고 씩씩거리면서 울분을 터트렸다.
"저 무례한 녀석들!"
"무례라. 용병 따위에게 예의를 바라는 게 이상한 거잖아."
방금 이야기를 나눈 녀석들은 용병들 중에서도 자유 기사에 해당된다.
흔히 기사들은 그 출신에 따라서 평민 기사와 귀족 기사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자유 기사들 같은 경우에는 평민 출신의 기사로서 그 직무를 이행하다가 주군을 잃거나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당하면서 자연스레 용병으로 흘러들어온 녀석들을 말한다.
적어도 전장에서 마상창을 찌르면서 적 기사를 낙마시킨 전적이 뛰어난 자유 기사들은 도체스터의 일부 영토를 봉토로 받는 대가로 내게 복종했다. 이미 주군을 잃거나 주군이 존재하지 않는 자유 기사들로서는 자신에게 봉토를 주는 나를 주군으로 섬겼고, 그에 대한 대가로서 이민족과의 전투에서 그 진가를 보였다.
알고 있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그 행동거지가 심히 방정맞고 추례하다는 것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들은 용병이다. 과거에는 명예로운 기사였으나 불우한 환경과 시대로 인해 몰락해버린 기사들의 후예들. 기사로서의 명예도 자긍심도 볼 길이 없지만 그럼에도 실력만큼은 준프로급이다.
"그러니까.... 그, 당신 이름이...."
"지금은 비세리온 도체스터러고 불리고 있다."
"....지금은?"
"흠."
그에 대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친가였던 가문이 멸망하고 성씨를 빼앗겼다는 것도, 그리고 임시적으로 하사받은 영토의 이름을 새로운 성씨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도. 내 이름은 비세리온이 맞았지만, 성씨는 달랐다. 언젠가는 과거의 친가와 그 가문의 이름을 되찾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서 브리튼 왕국의 귀족 가문들과 결탁을 맺었다. 그들의 수족 노릇을 하면서까지.
언젠가는 나를 수족 취급한 그들로부터 가문을 되찾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내 가문이 몰락한 것은 모두 브리튼 왕국의 중앙 귀족가문들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이 단초를 제공한 것은 확실했다. 나는 내 가문을 되찾기 위해서, 내 가문을 멸망시킨 요소를 제공한 자와 손을 잡아버렸다.
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면 피눈물을 흘렸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쓰게 웃음을 지었다.
기네비어와 함께 시가지를 거닐고 있던 나는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얀 로브를 걸치고서 후드로 얼굴을 가린 미형의 여인.
적어도 기네비어 같은 꼬맹이는 아니다. 성숙한 느낌이 풍기는 소녀는 풍만한 가슴과 발달된 골반, 그리고 가녀린 허리까지. 작은 어깨는 여성적인 매력이 물씬 풍기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음에도 노출된 입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절세미녀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그 여성 마법사의 이름이 그 유명한 브리튼의 왕궁 마법사인 '멀린'이라는 것을 그녀를 만난 다음에서야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