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그게 아니고
* * *
둘째의 태명은 도담이였다. 우려할 수준의 유산기도 없이, 도담이는 하진의 뱃속에서 하루가 다르게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었다. 한 번의 유산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임신인 셈인데, 재하를 임신했을 때와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그럴 때마다 재하에 대한 안쓰러움과 누구 하나를 탓할 수 없는 원망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곤 했었다.
“어떡하지…….”
가장 다른 것은 입덧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입덧에 임신 전보다 하진은 더 말라갔다. 그와 동시에 먹고 싶은 것도 늘었다. 재하 때는 숨어다니는 것에 급급해서 먹는 것을 챙길 여유가 없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새벽, 하진은 옆자리의 재혁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자신을 끌어안은 팔을 풀어냈다. 내일 출근하는 재혁을 위해 발소리도 내지 않고 침실을 나서서 부엌의 불을 켠 하진은,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는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자다 일어나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냉장고에 자신이 찾는 것이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
밤에도 재혁이 사다 바친 음식들을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다시 게워냈던 하진이다. 고픈 배를 부여잡은 하진이 냉장고 문을 닫고 나이트가운을 여미며 부엌을 서성거렸다. 한평생을 식욕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며 살았던 그였는데, 이렇게 무언가를 먹고 싶어질 줄은.
냉장고에 있는 걸로 비슷하게 만들어나 볼까. 다시 냉장고를 연 하진의 표정이 침울하다. 그러고 보니 침실에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다. 요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레시피도 없이 스스로 만들 수 있을 리 없다. 힘이 빠진 하진이 냉장고 앞에 쪼그려 앉았다. 임신 5개월이었지만 아직은 배가 많이 나오지 않았던 탓에 옆모습은 아직 마르기만 하다. 다시 한숨을 내쉰 그가 결국 과일 칸에서 예쁘게 생긴 복숭아를 하나 집어 들었다. 입덧이 심한 하진이 입덧 없이 편하게 먹는 것은 과일 뿐인지라, 재혁의 모친인 선경이 틈날 때마다 사람을 시켜 그득그득 채워 넣은 것이었다.
싱크대로 가서 흐르는 물에 복숭아를 씻어낸 하진이, 껍질을 대충 벗겨낸 후에 복숭아를 크게 베어 물었다. 잘 익은 복숭아의 단물이 입안 가득 퍼지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다. 붉게 부풀어 있는 입술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과즙을 닦아내며 금방 복숭아 하나를 먹어치운 하진이 아쉬운 얼굴로 손을 닦아냈다. 잠이 들기 전 우연하게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음식이 자꾸만 떠올랐지만…… 고개를 도리질 친 하진이 다시 조심스럽게 침실로 들어갔다.
어슴푸레 비치는 빛에 잠에 빠져든 재혁의 얼굴이 보였다. 하진은 숨소리도 조심하며 침대에 조용히 걸터앉아 그런 재혁의 얼굴을 본다. 희게 뻗어진 하진의 손 아래로 재혁의 잘생긴 얼굴이 조금 가려지자, 하진은 다시 손을 주먹 쥐며 거두었다. 옆자리에 누군가가 항상 이렇게 있다는 것, 매일매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아직은 조금 낯설지만, 하루하루 익숙해지고 있는 하진이었다.
왜 이렇게 사랑하게 되어버렸을까. 하진은 자문하지만, 답은 늘 한 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하진이 고개를 숙여 재혁의 뺨에 살짝 키스했다.
“음…….”
동시에 재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도둑키스를 해놓고 놀란 하진이 눈을 빠르게 깜박거리더니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쿵쿵 뛰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억지로 잠을 청하는데, 곧 익숙한 페로몬이 하진의 몸을 내리누른다.
“깼어?”
재혁의 커다란 손이 하진의 팔부터 손목까지를 훑더니, 깍지를 끼고는 가까워진 얼굴로 코를 부딪쳐 온다. 더 이상 모른 체를 할 수도 없어 하진이 천천히 눈을 뜬다. 눈꺼풀 아래 촘촘하게 박힌 속눈썹이 길게 펴졌다. 눈을 뜨자 바로 앞에 재혁의 얼굴이 있었다.
살짝 벌어진 도톰한 입술을 끈덕지게 쳐다보던 재혁이 참지 못하고 결국 그 입술을 삼켰다. 섞이는 더운 숨 사이로 파고든 입술이 작은 혀를 그대로 핥아 올리자 하진의 목 아래에서 야한 음이 울렸다. 하진의 입안에서는 하진의 페로몬 향기와 비슷한 맛이 났다.
“아까 조금 부족했나?”
“그게 아니……!”
변명을 하려는 입술을 재혁이 다시 입술로 막아버렸다. 하진이 다시 여몄던 나이트가운을 풀어내는 손은 더없이 능숙하다.
이럴 생각은 절대 아니었는데!
대답하게 허벅지 사이를 파고드는 팔에 하진은 눈앞이 핑핑 도는 것만 같다. 아직 완전하게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재혁은 어딘가 더 야성적이었다. 순식간에 하진의 속옷을 벗겨낸 재혁에게서 목 깊은 곳에서 신음이 찼다. 망설임도 없이 하진의 페니스를 쓸어 올리는 강건한 팔에는 핏줄이 섰다.
“아, 재혁 씨! 그게 아니라…….”
재혁이 이를 보이며 웃더니 다시 하진의 턱을 들게 했다. 순식간에 섞이는 타액에 온몸이 녹아내린다. 어느새 빳빳하게 선 페니스에 재혁의 손이 더 아래를 파고든다. 이미 촉촉하게 젖은 에널 안으로 재혁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하진의 얇은 허리가 튕겨졌다. 하진이 재혁을 저지하려 손을 아래로 뻗자, 오히려 재혁은 그런 하진의 손을 붙잡아 뻔뻔스럽게 자신의 페니스에 가져다 대었다. 안 그래도 솟아있던 페니스가 하진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꿈틀거리며 크기를 키웠다.
“하진아, 너 너무 예뻐.”
“내일……, 출근하잖아요.”
“그게 왜.”
하진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정작 출근을 하는 재혁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재혁이 께느른하게 고개를 숙여 다시 하진에게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아래로는 음험한 손이 하진의 에널을 파고든다. 어젯밤 그가 괴롭혔던 에널은 아직도 녹진하게 재혁의 손가락을 감싸왔다.
“아……, 흣!”
하진이 신음하며 재혁의 목을 끌어안았다. 재혁의 집요한 손가락에 하진의 허벅지가 점점 벌어지자, 재혁이 희미한 웃음기를 지우고는 자신의 페니스를 하진의 엉덩이 사이로 가져다 대었다. 페니스에서 나온 프리컴과 애액으로 맞닿은 선단 끝이 미끄러웠다. 재혁의 손이 하진의 배부터 갈비뼈, 가슴을 매만지자 하진의 몸이 잘게 떨렸다.
“넣을까.”
하진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긴장한 허벅지 안쪽이 팽팽하게 조여져 아픔마저 느끼는 것 같았다. 그가 하진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에널을 넓히던 손가락을 빼냈다. 벽에 비춰지는 재혁의 그림자가 초식동물을 집어삼키는 맹수처럼 굽혀져 있었다. 하진이 눈을 꾹 감으며 재혁의 어깨를 쥐어뜯었다. 빠듯한 아픔이 아래를 꿰뚫는다.
“아!”
“괜찮아.”
“처, 천천히…….”
뱃속의 존재를 떠올린 하진이 재혁을 저지시키자, 재혁이 그런 하진의 손바닥을 잡아 손안으로 키스를 퍼부었다. 애가 탈 정도로 천천히 삽입되는 페니스에 젖은 눈동자가 어둠 아래 드러났다.
“배가 더 나온 것 같네.”
끝까지 삽입한 재혁이, 임산부라기에는 아직은 판판하기만 한 하진의 배를 다정하게 쓸어주며 웃었다. 하진의 입장에서는 먼저 수작을 부린 것은 재혁이었으나, 애가 탄 쪽은 하진이었다. 괜히 서러워져 울먹거리던 하진이 재혁의 허리를 다리로 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베드사이드테이블 위에 올려 있던 베이비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아아아아앙!]
선잠이 들었던 재하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재혁의 어깨를 붙잡았던 하진이 손바닥으로 재혁을 미약하게 밀어냈다. 물론 그대로 떠밀릴 재혁이 아니었다.
“잠깐만, 보고 올래.”
“괜찮아.”
“잠깐만 재혁 씨.”
“괜찮다니까.”
재혁이 하진의 팔을 들어 자신의 목 뒤로 감게 하고는 목덜미를 깊게 빨아들였다. 모니터 안으로는 상주 시터가 재하를 안아 달래고 있는 모습이 찍히고 있었다. 소리를 끈 재혁이 하진의 허벅지를 잡아 벌리자, 의지와 다르게 에널이 움찔거리며 재혁을 끌어당겼다.
“재하는 주연 씨가 잘 달래고 있으니까, 하진이 넌 나 좀 달래줘.”
“음…….”
하진이 아니면 잦아들 수 없는 흥분이었다. 재혁이 천천히 허리를 빼어 다시 삽입하자, 하진의 입에서 교성이 터졌다. 서로의 살갗이 찰지게 달라붙으며 절정에 치달아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진은 섹스할 때 소리를 잘 참지 못하는 편이었다.
“아! 너무, 깊어…… 의사 선생님이…….”
“후우, 알아.”
너무 깊은 삽입은 피하라고 했던 주치의의 조언을 떠올린 하진이 재혁을 저지했다.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재혁이 하진의 뺨에 쪽 하고 키스를 하고는 다시 멀어졌다. 하진의 벌어진 양 발목을 한 손에 그러쥔 재혁이 그의 쭉 뻗은 다리를 위로 치켜 올렸다. 일자로 뻗은 종아리에 재혁이 입술을 맞추며 다시 허리 짓에 박차를 가했다.
“흑, 읏……. 응!”
재혁의 어깨를 쥔 하진의 손이 희게 질렸다. 쏟아지는 페로몬과 성감에 하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뒤로 꺾었다. 계속해서 스팟을 찔린 하진이 참지 못하고 뒤를 조이자, 재혁에게서도 짐승 같은 신음소리가 쏟아졌다.
* * *
섹스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진은 재혁에게 뭐라 말도 없이 침대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당연히 자신의 팔 안에서 평소처럼 잠이 들 거라 생각했던 재혁이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진은 그런 재혁을 뾰로통한 얼굴로 한번 쳐다보더니, 팩 고개를 돌려 침실을 나가버린다.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그럴 리도 없고, 섹스 중 하진의 반응도 분명히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물론 뱃속의 도담이가 걱정돼서 예전보다 좀 소프트하게 섹스했던 감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오히려 하진의 체력에는 더 맞는 것 같았는데.
답을 찾지 못한 재혁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진을 따라 침대에서 일어났다. 재혁이 침실에서 나서자, 복도 끝으로 하진이 모습을 감춘다. 재하가 울었던 게 걱정되었던 모양인지, 하진은 재하 방으로 가고 있었다. 재혁이 느른하게 하품을 하고 그를 따라갔다.
“크응, 엄마아…….”
아직은 인형처럼 작기만 한 아이가 하진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안겨 있었다. 하진은 그런 재하의 등을 안은 채로, 아이 방문을 열고 들어온 재혁과 눈을 마주한다. 아직도 뭐가 불만인지, 하진의 표정이 뾰로통했다.
“하진아.”
“…….”
“아. 잠깐만 자리 비켜줄래요?”
재혁이 하진이 입은 것과 색만 다른 나이트가운을 여미며, 하진의 옆에 앉은 시터에게 말했다. 졸린 눈의 그녀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재하 방에 딸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진은 재혁에게 향한 시선을 거두고 입술만 움직였다.
“왜.”
이 새벽에 웬 앙탈일까.
좀처럼 감정을 내보이지 않던 예전에 비하면, 이런 앙탈은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재혁은 삐친 얼굴의 하진이 귀여워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나 그런 거 아니었어요.”
“뭐가……. 아.”
새벽에 깬 하진을 두고 부족했냐며, 그가 욕구불만인 것처럼 말했던 것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혁이 참지 못하고 풋,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아니고……. 나 먹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랬던 건데.”
쏟아지는 피곤과 수면의 유혹으로, 하진은 조금 횡설수설했다. 재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그런 하진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문에 기댄 한쪽 어깨 근육이 꿈틀거린다.
“뭐가 먹고 싶었는데?”
“사줄 수…… 있어요?”
뭐가 됐든 그거 하나 못 사줄까.
재혁이 말하라는 듯 하진을 향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하진이 재혁의 눈치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기 국수…….”
“어?”
“고기 국수 먹고 싶어요.”
재혁과 하진이 눈을 맞춘 채로 잠시 멈춰 있었다. 고기 국수? 그게 뭐지? 재혁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다.
“그게 뭔데?”
“국수인데, 음. 돼지고기를 넣고…….”
“어디서 파는 거야?”
하진의 품 안에서 칭얼거리던 재하가 다시 꼬록 잠이 들어있었다. 하진은 그런 재하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재혁의 눈치를 보았다. 한 번 머릿속에 들어온 고기 국수는 하진의 머리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산이요.”
* * *
[……아, 대표님.]
평소와 달리 긴 수화음 이후에서야 통화로 넘어갔다.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김 비서.”
[예,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고기 국수라고 아나?”
[아…… 예. 제주도 음식 말씀이십니까?]
“……그게 제주도 음식이야?”
재혁이 콧잔등을 긁적거렸다. 부산에서 먹었다더니, 원래는 제주도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재혁이 자꾸만 좁혀지는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눌렀다.
“그걸 좀 사 왔으면 좋겠는데.”
[……네?]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김 비서가 되물었다.
[제주도에서 말씀이십니까?]
“제일 맛있는 곳부터 우선 알아봐요. 시간 얼마 주면 됩니까.”
[저기, 대표님.]
“네. 말해보세요.”
[아직, 비행기가 뜨려면 시간이 좀…… 식당 문 열 때까지도 시간이 필요하고요.]
“그래서요.”
그때의 시각, 새벽 5시 40분이었다. 재혁과 김 비서 사이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세 시간 주십시오.]
“두 시간 반. ”
[…….]
“아, 면 퍼지지 않게 따로 포장 잘 해오는 거 잊지 말고.”
재혁이 전화를 끊으며, 다시 잠에 빠진 하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 * *
정확히 2시간 40분을 넘겼을 때, 김 비서가 도착했다. 다행히 하진이 아직 깨어나기 전이였다. 육수와 면이 따로 포장된 고기 국수를 넘기는 김 비서의 얼굴은 전에 없게 핼쑥했다.
“대표님, 출근은…….”
“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잠이라도 좀 자면서 기다려요. 오늘 좀 늦게 출근해야 할 것 같으니까.”
김 비서가 오기 전까지 인터넷 서핑으로 제주도에서 유명한 고깃국수집을 세 곳 정도 추렸던 재혁이, 포장 가방의 상호를 확인하며 대답했다. 다행히 재혁이 기억하고 있는 가게의 상호였다.
김 비서를 보낸 뒤 부엌에 들어온 재혁이 식기세척기 안에서 따뜻하게 데워진 그릇을 두 개 꺼냈다. 포장 안에는 가게 주인이 적은 건지, 아니면 김 비서가 급히 지시해서 공수해 온 누군가가 적은 것인지 간단하게 조리법을 적은 종이도 동봉되어 있었다. 일부러 설익힌 면을 살짝 데치듯 익힌 재혁이, 그릇 안에 면을 넣고, 육수를 부었다. 돼지고기와 야채 고명까지 올리자 제법 그럴듯한 모습에 재혁이 만족스럽게 미소를 띤다.
“이거 무슨 냄새에요?”
그때, 타이밍 좋게 침실에서 하진이 걸어 나왔다. 아직 잠에서 온전히 깨어나지 못한 눈을 소매로 비비며, 하진이 익숙하게 재혁에게 가 안겼다. 잠에서 덜 깬 하진은 이렇게 더 사랑스럽다. 아까 토라진 것처럼 굴 때는 언제고, 어쩌면 이렇게 또 예쁘게 굴까. 재혁이 자신에게 기대오는 하진의 허리에 팔을 감으며 이마에 쪽 키스를 했다.
“도담이 먹고 싶었던 거.”
재혁을 향해 올려 뜬 하진의 큰 눈동자 안으로 기대감 같은 것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이런 하진의 얼굴을 보는 것이 요즘 재혁의 가장 큰 낙이었다. 재혁이 하진을 식탁으로 데리고 가 조심스럽게 앉히고, 육수를 부어 두었던 고기 국수를 하진의 앞으로 가져다주었다.
“이거, 어떻게…….”
“먹어봐. 맛있을지 모르겠네.”
하진이 침을 꼴깍 삼키고는 젓가락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끈한 국물 위로, 하진이 집어 올린 면 몇 가닥이 열을 식히기 위해 멈춰 있었다. 후후 불던 하진이 곧 호로록 입안으로 면을 삼켰다. 돼지 냄새라면 항상 입덧을 하던 하진인데, 화장실로 달려갈 생각도 않고 계속해서 열심히 먹는 모습에 재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국수는 사실, 하진이 재하를 임신했을 적에 부산에서 도망 다니며 먹었던 음식이었다. 도담이를 임신하고 나서도 또 이게 먹고 싶어질 줄은 몰랐는데. 재혁에게 말도 걸지 않고 한 그릇을 전부 비워내는 하진에 재혁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진이 입덧 없이 이렇게 음식을 다 먹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잘 먹었어?”
“응. 진짜 잘 먹었어요. 맛있었어.”
재혁으로서는 김 비서를 닦달한 보람이 있었다. 하진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일어나 재혁에게 답삭 안겼다. 재혁은 그런 하진의 이마 위로 내려간 앞머리를 쓸어주며, 그의 이마에 다시 한번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했다.
“고마워, 진짜.”
“말로만?”
재혁이 하진을 안은 채로 자신의 입술을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하진이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재혁의 입술 위로 입을 맞춘다.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맛있었어요.”
아…… 하진의 말에 잠깐 굳었던 재혁이 다시 하하 웃었다. 하진에게 원조의 맛이 중요했던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부산으로 다시 사람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는 재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