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통의 행복
* * *
쪽. 입술 위로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숨결에, 하진의 감각이 느리게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벌써 아침이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올리자마자 하진이 직접 골랐던 넥타이의 무늬가 시야 가까이에서 멀어졌다. 큰 창 아래 쏟아지는 햇빛에 하진은 눈을 찡그리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파자마 안쪽으로 보이는 목덜미가 꽃이라도 핀 것처럼 울긋불긋 익어 있었다.
“깨우지…….”
잠이 덜 깬 하진의 목소리가 길게 늘어진다. 재혁이 시계를 잊었던 것이 생각나 다시 드레스룸으로 가려던 차였다. 하진의 목소리에 넓게 벌어진 어깨가 다시 뒤를 돌았다. 향수 냄새와 함께 짙은 페로몬 향기가 섞여 하진에게 다가온다. 재혁이 한껏 허리를 굽혀, 여전히 침대 위에서 잠이 덜 깬 채 앉아 있는 하진에게 입을 맞춘다. 커다란 손이 뺨과 턱을 감싸고, 이번에는 방금 전과는 달리 조금 깊은 키스였다. 아직 감각이 둔해 어쩔 줄 모르는 하진의 혀를 재혁이 아찔하게 감아올린다. 타액과 점막이 닿을 때마다 어젯밤의 기억을 상기시켜주었다. 더 길어지기 전에 멈춰야 한다. 하진이 손을 들어 재혁의 셔츠 깃을 조금 손안으로 구겼다. 그러자 쪽, 하고 아쉬운 듯 재혁의 얼굴이 멀어진다.
“뭐하러.”
“아침이라도 차려줬을 텐데.”
하진은 조금 미안한 얼굴이었다. 원래 아침잠이 많기는 했지만, 요즘 따라 더 잠이 많아져 재혁이 출근하고 나서야 깨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재혁이 나갈 시간이다. 다시 드레스룸으로 들어가는 재혁을 하진이 느릿한 걸음으로 따라갔다. 드레스룸 진열장에 빼곡하게 채워진 시계들 중의 하나를 고른 재혁이, 손목에 시계를 채우며 하진을 향해 웃었다.
“김 비서가 아침 사놓고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야.”
“샌드위치 배고플 텐데.”
“별걱정을 다.”
그래도 오늘은 이렇게 아침에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재혁이야 하진의 잠든 얼굴을 보고 출근을 한다지만, 하진의 입장에서는 그의 퇴근 때까지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들이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재혁이 하진을 내려다보며 하진의 열려 있는 파자마 단추를 잠가 주었다.
“네가 아침 차려주는 로망은 없고, 대신 너한테 굿모닝 키스 받고 출근하는 로망은 있는데.”
“응? 아까 했잖…….”
“그건 내가 한 거고.”
결국, 하진이 먼저 하는 키스를 받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재혁이 태연하게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톡톡 쳤다. 하진의 귓바퀴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잘 다녀와요.”
살짝 비뚤어진 재혁의 넥타이를 바르게 매만져주며, 하진이 재혁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반쯤 내리깔린 눈꺼풀에 속눈썹이 아찔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 재혁이 기다리지 못하고 고개를 꺾으며 입술을 삼켰다.
“음…….”
재혁의 시선 끝으로, 하진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재혁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재혁의 팔이 하진의 허리를 잡아채고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대체 어느 지점에서 이렇게 재혁이 발정하는 건지도 하진은 알 수가 없었다. 잠깐 떨어지는 입술에도 서로의 더운 입김이 섞인다.
“하아, 하진아.”
벽과 재혁의 팔 안에 갇힌 하진이 당황해서 재혁을 올려다보자, 재혁이 다시 고개를 숙여 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커다란 손이 기껏 아까 다시 잠가주었던 파자마 단추를 끌러내려 하고 있었다. 하진이 그런 재혁의 손을 막으려는 찰나, 멀리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재하.”
“들었어.”
재혁이 아쉬워하며 하진을 가뒀던 팔을 내려주었다. 하진이 살짝 재혁의 눈치를 보더니 드레스룸을 나가 재하 방으로 향했다. 긴 복도를 지나 옅은 파스텔톤으로 칠해진 문을 열자, 아기자기하게 꾸민 아이 방이 펼쳐졌다. 시터가 울고 있는 재하를 안아 달래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재하가 갑자기 울어서.”
“잠이 덜 깼나 보다.”
시터와 하진 이상으로 오랜 시간을 같이 있으면서도, 재하는 이렇게 울며 하진을 찾을 때가 종종 있었다. 본능적으로 페로몬을 통해 모체의 존재를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하진이 능숙하게 시터에게서 재하를 받아 안았다.
“이렇게 맨날 울면 안 되는데. 이모 힘들게 하네, 우리 재하.”
하진이 안자마자 히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재하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하진의 파자마를 꼬오옥 쥐는 손이 아직도 너무나 작았다. 언제 그렇게 울었냐는 듯이 울음을 멈춘 재하를 안고 하진이 다시 거실로 나오자 재혁이 현관에서 구두를 신고 있었다. 평소보다 출근이 조금 늦은 시각이었다. 재하를 안은 채로 하진이 재혁에게 다가갔다. 하진이 아직 조그맣기만 한 재하의 손을 펴내어 재혁을 향해 흔들어주었다.
“재하야, 아빠 빠빠이.”
“빠빠…….”
수면 위에 물감이 번지듯, 하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번졌다. 그런 하진을 본 재혁도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여린 아이의 볼과 하진의 뺨에 번갈아 키스를 한 재혁은, 그때서야 뒤늦게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설 수 있었다.
* * *
“맘마.”
다행히 재하는 먹성이 좋은 편이었다. 재하가 쇠고기를 갈아 넣어 만든 이유식을 찹찹 목 뒤로 넘긴다. 꽤 많은 양을 먹은 아이가 이유식에서 눈을 떼고 딴청을 피우자, 하진이 아이의 입가를 조심스럽게 닦아 주었다. 앵두같이 작은 입술이 오물거리는 것에 하진은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가, 불현듯 재혁을 떠올린다. 가끔 재혁의 얼굴이 재하에게 보일 때마다 하진은 신기하기만 하다.
“재하 재우고 있을게요.”
아직 아침을 먹지 못한 하진을 위해 시터가 재하를 안아 올려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꽤 흘러 있었다. 뭘 먹을까. 하진은 아침마다 이렇게 냉장고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도우미는 오후에 와서 항상 아침은 하진이 직접 준비해 먹고는 했다. 물론 거의 만들어져 있는 식사를 꺼내 먹는 정도지만. 단면이 비스듬하게 잘린 빵을 꺼낸 하진이 그것을 살짝 굽고, 다시 냉장고를 열어 잼을 꺼냈다. 속이 더부룩해서 아침을 많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구운 빵과 잼, 직접 내린 커피 정도만 식탁 위에 올라왔다. 하진이 무화과 잼을 나이프에 조금 덜어 구운 빵 위에 얹었다. 빵이 하진의 입술 아래에서 바삭하게 부서지는 소리를 내자마자, 잼의 단맛이 혀끝으로 퍼졌다.
이제 더 이상 혼자인 시간마저도, 외롭거나 고독하지 않았다.
하진은 가끔, 이렇게 너무나 평범한 일상 속에서 변한 자신을 느끼고 놀라 하고는 한다. 금방이라도 베일 것처럼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고 있던 그였다.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이전의 숨 막힐 것 같았던 나날들이, 이제는 드라마 속의 일처럼 희미해져 갔다. 모두 잊혀진 것은 아니었으나 단단해진 흉터 위로 새로운 그림이 덮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하진이 귀퉁이만 남은 빵을 그릇 위에 올려놓았다. 거실로 나오며 얼핏 본 시계가 벌써 12시를 넘기고 있었다. 인터폰 화면 너머로 보이는 사람은, 하진이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진이 안심하고 버튼을 눌러 외부인 출입구와 현관을 열어주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마치자마자 단아한 외모의 여자가 싱긋 웃으며 하진에게 커다란 꽃다발을 건넸다. 그녀는 태성그룹 계열사 호텔 소속 플로리스트로, 주기적으로 생화 장식을 위해 집에 들르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장식이라기보다는 선물용에 가까운 꽃다발을 보며 하진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대표님께서 아침에 전화 주셔서요.”
“네? 왜…….”
“카드 보내주시겠냐고 했더니, 그냥 생각나서 보내시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녀가 덧붙인 말에 풍성한 작약 꽃다발을 엉겁결에 받아 든 하진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냥 생각나서 꽃다발을 보내는, 재혁이 그런 남자인 줄 예전엔 상상이나 했을까. 변한 것은 하진뿐이 아니었다. 하진이 옅게 웃었다. 재혁이 보낸 그 백색의 화려하고 우아한 꽃은 하진과 그림처럼 어울렸다.
핸드폰이 울리는 소리에 하진은 작약 꽃다발을 안은 채로 핸드폰을 들었다. 재혁의 전화였다. 하진이 지체하지 않고 그의 전화를 받았다. 작약의 달콤하고 상쾌한 향기가 그의 목소리와 함께 기분 좋게 퍼졌다.
[꽃은 잘 받았어?]
목소리에 웃음기가 있었다. 하진도 저도 모르게 그 목소리에 미소를 짓는다.
“응. 이거 왜 보낸 거예요?”
하진이 워낙 기념일 같은 것에 무심하기는 하지만, 기념일도 아닌 것 같고. 꽃이라는 건 원래 그런 날에 어울리는 선물이었다. 하진이 소파에 앉아 작약 꽃다발을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유려한 손끝 사이로 매만져지는 작약 꽃잎이 부드럽다.
[전해주지 않던가? 그냥 생각나서 보내라고 했다고.]
“그렇게 말하기는 했는데……. 이런 거 사줄 줄도 알아요?”
[기억 안 나? 전에도 내가 꽃 많이 사줬잖아.]
아. 하진이 머릿속에 묻혀있던 기억 조각을 꺼냈다. 재혁이 꽃을 사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억제제 과용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을 때, 재혁이 온 집안을 생화로 채워놨었다. 그리고 유산해서 입원했을 때도. 그러고 보니 다 아프고 정신적으로 괴로울 때였다.
“……그거야 재혁 씨가 지은 죄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하진이 그를 책망하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하진의 얼굴은 더 이상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하진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하진이 겪은 좋지 않은 기억들을 이렇게 새로운 기억으로 바꿔주려, 재혁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맞는 말이라 받아칠 수가 없네.]
재혁의 말에 하진은 웃어버렸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 걸까. 풀어진 마음으로 웃다가도 하진은 가끔씩 밀려드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웃음을 멈췄다. 예전엔 모르던 감정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던 자신이 낯설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멀리서 관망하듯 바라보는 순간도, 사실 점점 줄어 들어갔다. 이렇게 달라진 삶에 익숙해지는 모양이다.
“좋았어요.”
[…….]
“선물 받아서, 좋았어.”
핸드폰 너머 재혁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그의 표정이 궁금해진다.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고 몸을 섞는 그가 아직도 하진은 궁금하다.
[어떡하지.]
다시 들려오는 재혁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지금 잠깐 봤으면 싶은데.]
재혁이 퇴근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은 때였다. 하진이 소리 내지 않으며 웃었다. 재혁과 다르지 않은 마음에 하진은 괜히 그가 보낸 작약 꽃다발을 매만진다.
[잠깐 볼까?]
“안 돼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네가 와줘.]
“일해야 하잖아. 퇴근하고 집에서 봐요.”
이렇게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쉬운 건 하진도 마찬가지다. 하진도 보고 싶다는 말을 덧붙이려다, 이내 그만둔다. 자신이 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참아 넘길 재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함께하는 시간 한순간 한순간이 소중했다. 자신의 말 하지 못했던 비밀 때문에 떨어져 지냈던 시간이 이럴 때면 더욱 아까워진다.
[알았어. 오늘 일찍 들어갈 테니까 야한 속옷이라도 입고 기다리고 있어.]
실없는 그의 말에 하진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재하는 그림책을 참 좋아했다. 아직 어려서 글이나 동화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을 리 없다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하진은 재하에게 그림책 읽어주기에 항상 열심이었다. 하진의 무릎 위에 안기듯 누운 아이가 그림책 쪽으로 손을 뻗어 움직인다.
“……그렇게 왕자님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고사리 같은 작은 손이 펴지고 쥐어질 때마다 하진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오른다. 개월 수를 더해갈수록 재하가 재혁을 닮아가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이런 모습이었을까. 아이의 사랑스러움과 함께 재혁에 대한 감정이 뒤엉킨다.
“그리고 예쁜 아이가 태어났어요.”
“꺄아!”
책의 모서리를 만지던 하진의 손이 멈칫거리며 멈춘다. 재하가 방싯방싯 웃으며 몸을 돌리더니, 하진의 납작한 배를 껴안았다. 그림책을 내려놓은 하진이 재하의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
무언가에 생각이 머문 듯, 하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재하를 안은 채로 하진이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가 무섭게 바로 전화를 받은 것은, 하진의 전담 경호원인 선호였다.
“선호 씨, 저 부탁 한 가지 해도 돼요?”
[네, 말씀하십시오.]
“필요한 게 있어서요.”
하진의 시선이 재하가 매만지는 자신의 배에 가 있었다.
* * *
차를 주차한 재혁이 카페에 들어섰다. 회사에서 집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카페였다. 퇴근 후라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시각이었다. 바쁘게 누군가를 찾던 시선의 끝에,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하진이 들어왔다. 결혼 전 카페에서 저렇게 앉아 있던 하진을 보고, 참 그림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재혁은 불현듯 겹쳐지는 예전의 기억에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왔어요?”
재혁이 가까워지자 하진이 고개를 올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재혁은 맞은편에 앉으려다 의자를 끌어다 하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혁이 몸을 구기듯 앉자 하진이 웃음이 터졌는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장신에 몸집이 큰 그가 작은 의자에 앉는 것은 다시 봐도 적응이 되지 않는 모습이었다.
“왜 웃어?”
“아니에요. 주문부터 하고 와요.”
하진이 웃음을 참으며 재혁의 팔을 쓸어내리자, 재혁이 다시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하진이 괜히 찻잔을 이리저리 돌리며 찻잔 안의 수면이 흔들리는 것을 지켜본다. 평소 차분한 그였지만 왠지 마음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재혁이 하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근데 여기는 왜 갑자기.”
“그냥…… 조금이라도 빨리 말하고 싶어서요.”
“무슨 할 말 있어?”
“응. 여기로 오라고 해서 귀찮았던 건 아니죠?”
“먼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니까 되게 설레던데.”
마주한 두 사람이 웃었다. 따뜻함이 차향처럼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뭐 주문했어요?”
“아메리카노. 넌…….”
“아, 이거. 잉글리시 로즈 티.”
천진한 얼굴로 말하는 하진에, 재혁이 웃었다.
“왜 웃어요?”
“옛날 생각나서.”
예전에도 하진은 그 차를 마셨었다. 하진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는데, 재혁 자신에게는 너무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더 빨리 알아보지 못하고 더 빨리 감싸주지 못한 자신이, 재혁은 안타까울 뿐이다.
“넌 여전히 너 같은 걸 마시는구나 싶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하진이 조금 갸웃거리자 재혁이 손을 들어 자신의 턱과 입술을 쓸었다. 그때도, 참 본인이랑 어울리는 차를 마신다고 생각했었다.
“무슨 말인지…….”
“예쁘단 뜻이야.”
봉인되어 있던 옛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현재의 하진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하진까지 사랑스러워졌다. 재혁이 테이블에 팔을 올리고 고개를 기울여 하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노골적인 다정한 눈빛에 하진이 조금 부끄러워하며 몸을 뺐다. 타이밍 좋게 점원이 다가와 재혁이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놓고 자리를 떴다.
“아, 할 말이라는 게 뭔데? 집에 오는 잠깐이 아쉬울 정도로 빨리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음…….”
“벌써 기대되는데.”
“별거 아니면 실망할 거예요?”
“글쎄, 이렇게 네 얼굴 보니, 뭐가 됐든 실망은 안 할 것 같기도 하고.”
재혁이 손을 뻗어 하진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조금 결연한 것 같기도 한 하진이 침을 꼴깍 넘기더니 무릎 위에 놓인 파우치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꼼지락거리는 손이 긴장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재혁 씨.”
“응.”
“보여줄 게 있는데…….”
하진이 머뭇거리며 재혁의 앞으로 무언가를 내밀었다. 태연하게 얼음이 가득 들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재혁이, 곁눈으로 그것을 확인하고는 잔을 테이블 위로 다시 올려놓았다. 하진이 조심스러운 얼굴로 재혁의 얼굴을 살폈다. 평소 낯빛이 변하는 법이 없던 재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이거…….”
“나 지금 병원 가보려고 하는데, 같이 가 줄 수 있어요?”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은, 검사창 위로 두 줄이 선명한 임신 테스터기였다. 하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진의 몸이 재혁의 팔 안으로 파묻히듯 안겼다. 겹쳐지는 몸에 서로의 향기가 한 데 섞였다. 갑작스런 반응에 당황한 하진이 눈동자를 굴리며 카페 안의 사람들을 살폈다.
“재혁 씨, 잠깐…….”
“고마워, 하진아.”
“사, 사람들 보잖아요.”
재혁이 어찌나 꽉 껴안았는지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하진이 재혁의 어깨를 팡팡 내리쳤다.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하진과 재혁을 향해있었다. 하진의 귓바퀴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부끄러운 감정과 함께, 하진도 벅찬 마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이게 만약 꿈이라서 깨야 한다면, 아마 죽고 싶어질 거야.”
“……그럴 일 없어요.”
“어떡하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재혁의 목소리가 감격에 차 있었다. 하진도 부끄러움을 잊고 재혁의 너른 어깨를 마주 안았다. 생각보다도 더 기뻐하는 재혁에, 하진은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나도…….”
하진이 재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행복해.”
하진이 조용히 재혁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자, 재혁의 어깨 위로 가만히 물기가 스며들었다. 둘 사이의 간극은 이제 온전하게 메워져 있었다.
그토록 애타게 염원했던 행복과 평생 얻지 못할 줄만 알았던 사랑이, 하진을 세게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