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보통의 나날
* * *
큰 창 아래 비추어지는 햇빛에 하진의 속눈썹이 움찔 떨렸다. 이내 반쯤 뜨였다가 다시 감기는 눈은 피로에 젖어 있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까닭이었다. 하아, 하진은 작게 숨을 토했다가, 움직이지 않는 몸에 조금 낑낑거린다. 하진의 얇은 몸이 재혁의 거구 아래 거의 깔리듯 얽혀있었다.
“……깼어.”
하진의 뒤척임에 재혁이 잠에서 깨어났는지, 어느새 눈을 떠서 하진과 눈을 마주쳤다. 결코, 재혁을 깨울 생각까지는 없었던 하진은 당황해서 손을 꼼지락거린다. 재혁과 한 침대에서 잠이 든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이렇게 눈을 뜰 때마다 재혁과 눈을 마주하는 것은 여전히 부끄럽다.
“왜 울었어.”
하진은 자신이 울었다는 사실조차도 몰랐다. 재혁이 큰 손을 들어 하진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닦아주는데 물기가 묻어났다. 재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하진의 얼굴을 살핀다.
“모르겠어, 꿈이라도 꿨나.”
무슨 꿈을 꾸긴 한 것 같은데, 무슨 내용이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왠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어 하진은 괜히 재혁에게서 눈을 피했다.
“무슨 꿈.”
재혁이 끌어안고 있던 하진의 몸을 놓아주고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하진의 몸 위로 겹치듯 올라오는 재혁의 상체는 실오라기 하나 없는 맨 몸이었다. 재혁은 하진에게 고개를 숙여 뺨과 입술에 키스를 하고, 아직 다 닦이지 않은 하진의 눈물을 훔쳐 준다. 사랑과 애정이 담긴 손길이었고, 무슨 꿈인지 묻고는 있었지만 재촉하지는 않았다. 하진은 이런 재혁의 일상적인 행동에서 안도를 얻고는 했다.
“기억이 안 나.”
“큰일이네.”
재혁이 다시 하진의 입술을 살짝 물고 빨아 당겼다가 놓아주었다. 하진의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은 어젯밤의 그 정복욕 가득한 사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다시 입술이 닿을 것처럼 얼굴이 가까웠다.
“무서운 꿈 꾸면, 나 부르라고 했잖아.”
“…….”
“내가 다 지켜준다고.”
부르기만 했으면 당장 달려갔을 텐데. 조금은 현실감이 없는 말을 하면서도 재혁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하진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그런 재혁의 얼굴을 자신의 눈에 담는다. 재혁이 하진의 이마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하고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하진도 몸을 세웠다.
“내려와, 아침 먹자.”
고층의 펜트하우스 내부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전에 지내던 저택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저택이 사람을 쓰기에는 더 편했지만, 하진이 많은 고용인들과 함께 있는 것을 내심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 저택에서는 안 좋은 기억이 많았다. 재혁이 저택을 당장 처분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분간은 하진과 펜트하우스에서 지낼 생각이었다.
재혁의 시선이 하진의 맨발부터 머리끝까지 닿는다. 대리석 바닥을 밟던 맨발이 곧 거실 슬리퍼 안으로 쏙 들어갔다. 침실을 나서기 전에 아무 옷이나 꿰어 입었던 건지, 벗은 다리 위로는 재혁이 입었던 셔츠 한 장이 걸쳐져 있었다. 품이 벙벙한 셔츠가 허벅지까지 아슬아슬하게 닿아 셔츠가 아찔하게 엉덩이를 가리고 있었다. 재혁도 마찬가지로 드로즈만 입은 채였다. 재혁이 팔짱을 낀 채 하진이 식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진은 졸린 건지, 멍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턱을 괴어 재혁을 본다. 하진은 청초하게 생긴 얼굴로 가끔은 저렇게 조심성이 없었다.
“빵으로 괜찮지?”
하진이 작게 끄덕거린다. 재혁이 냉장고에서 샐러드를 꺼내고 식빵을 토스터기에 집어넣었다. 커피를 내리던 재혁이 다시 뒤를 돌아 하진을 보는데, 하진 역시 재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하진이 살풋 웃었다.
“왜?”
“신기해서.”
“…….”
“그냥,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아직 꿈같아.”
꿈이라면 차라리 빨리 깨고 싶은 꿈이다. 점점 이 평온에 익숙해지는 자신이 때로는 두려워지는 하진이었다. 재혁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처음 몸을 섞었을 때,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이런 날들이 올 줄은 정말 몰랐었는데.
“나는…… 음!”
마치 체념한 것 같은 하진에게 재혁이 다가와 키스를 퍼부었다. 재혁은 이렇게 하진이 행복에 동화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일 때마다 불안이 밀려든다. 누구보다 이 안온에 발을 딛게 하고 싶은 것이 재혁이었다. 뜨거운 혀가 하진의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 하진은 뱃속이 다시금 뜨거워진다. 재혁이 하진의 입술을 삼키며 허리를 휘어잡아 하진의 몸을 일으켰다. 체격 차 때문에 하진이 까치발을 들어 힘겹게 재혁의 페이스를 맞춘다. 하진과 피부가 닿자 다시 뜨겁게 발기하는 것이 느껴졌다. 재혁의 손이 천천히 허리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셔츠 아래 손가락에 닿는 살갗이 부드럽고 탄력 있었다. 맙소사. 셔츠 아래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속옷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리에 만져지는 살갗에 재혁이 더 크게 발기했다. 하진이 자신의 몸에서 유일하게 살집 있는 엉덩이를 움켜쥔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하아, 안 돼.”
“뭐가 안 돼?”
재혁의 흥분이 완연하게 느껴졌다. 하진이 당황해서 재혁을 올려다보았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하진의 상태도 재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재혁의 셔츠가 기립한 하진의 페니스에서 나온 프리컴으로 얼룩이 졌다.
“……조금 있으면 선생님 오셔.”
하진은 요즘, 주치의인 황 박사에게서 소개받은 정신과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이 예약일이었다. 재혁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다시 하진의 엉덩이를 움켜쥐고 재혁이 하진의 몸을 자신에게 바짝 끌어당긴다.
“나 선 거 알잖아.”
“알아…… 그래도 안 돼.”
“금방 끝낼게.”
“그러고 금방 끝낸 적 한 번도 없잖아.”
“조루가 아닌 걸 어떻게 해, 그럼.”
재혁은 뻔뻔한 낯짝으로 태연한 말을 하고 있었다. 조루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엄청 집요하게 굴어대면서…… 재혁이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은 하진의 귓불 아래를 세게 빨았다. 재혁의 품 안에서 바르작대는 하진의 허리를 붙잡고, 재혁이 고개를 숙였다. 아! 재혁의 입술이 하진의 가슴을 삼켰다. 재혁의 혀끝으로 얇은 셔츠 아래, 하진의 유두가 닿았다.
“하, 아응……!”
하진이 재혁의 어깨를 밀어내며 파르르 떨었다. 그러나 재혁의 몸은 돌처럼 단단하다. 여전히 하진의 유두를 물고 있는 재혁이 혀를 세워 그의 유두를 희롱했다. 재혁이 빨아대는 유두 근처의 셔츠가 젖을수록 하진의 몸도 젖어갔다. 하진의 척추를 쓸어내리던 재혁의 손이 다시 하진의 엉덩이를 움켜쥐더니,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아! 제발…….”
하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진의 안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재혁의 손가락이 파고들어 조심스럽게 안을 건드릴 때마다 하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재혁이 세게 빨아 당기던 하진의 유두를 입에서 놓아주었다. 젖은 셔츠 아래 진홍빛 유두가 벚꽃처럼 비쳐졌다.
“이렇게 젖었는데?”
“안 돼, 정말……. 흐응!”
재혁이 손가락으로 에널을 쑤실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가 야하게 울렸다. 상기된 얼굴의 하진이 재혁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재혁이 느끼는 곳을 건드릴 때마다 에널이 견디지 못하고 개폐운동을 하며 애액을 울컥울컥 뱉어냈다. 이래서야, 여기서 멈춘다 하더라도 상담에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몰, 라……. 정말……!”
하진이 울먹거리며 재혁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 * *
“어마, 엄마아.”
돌쯤 되었을까. 이제는 제법 머리털이 빽빽하게 난 작은 아이를 안는 남자의 몸은 낭창했다. 아이가 조금 칭얼거리자 달래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옆에는 시터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본능적으로 엄마의 존재에 끌리는 모양이라고, 혜정은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빠빠이. 하진의 품 안에 안긴 아이도 혜정을 향해 입을 옹알거렸다. 눈에 달고 있던 눈물은 어느새 쏙 들어가 있었다. 아이의 얼굴 위로, 혜정을 향해 웃는 하진의 얼굴은 이전보다 훨씬 편해졌다. 혜정도 그때서야 조금은 안심한다. 엄마가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아이가 안정을 찾는 것처럼, 하진의 불안도 쉽게 나아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참 좋으련만.
“다음 주에 또 뵙겠습니다.”
혜정이 진료 차트를 챙겨 가방에 넣은 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고층에서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혜정은 눈을 감았다. 하진과의 상담을 끝난 후면 그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고는 했다. 재벌이라기보다는 영화배우라고 해야 더 이해가 될 것 같은 용모에, 날카로운 눈매로 혜정을 꿰뚫듯이 바라보던, 혜정을 고용한 장본인.
‘전 박사에게 다 말할 수는 없고.’
혜정은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피상담자가 처한 상황을 알려주지도 않은 채 정신과 상담을 하라니, 이건 눈을 가려놓고 물건을 찾아보라는 격이었다.
‘저한텐 다 말씀하셔야 해요. 그래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하진이는 저도 모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진이가 겪고 있는 그 불안 요소에 대해. 내가 말 할 수는 없으니, 전 박사 능력껏 알아내요.’
오히려 윤하진 본인보다도 방어적인 사람이었다. 아니, 오히려 공격적이라고 봐야 할까.
혜정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그 소문 속의 커플’과는 다른 모습에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얼마 전 태성그룹의 후계자에 낙점되었다고 했던 강재혁 태성건설 대표는, 분명 오메가포비아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정략결혼을 했던 윤하진과는 사이가 소원하고 따로 베타애인이 있다고들 다들 떠들어댔었다. 그런데 혜정이 직접 만난 그는…….
삐-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고 문이 열리자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입구 바로 앞에, 검은 세단이 대기하고 있었다. 강재혁 대표의 자택에 오가는 날이면, 강재혁 대표는 이렇게 차를 보내 혜정의 편의를 봐주었다. 아니. 편의를 봐준다기보다는 이것도 윤하진을 위한 일종의 방어인지도 모른다. 불순물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한, 작업.
세단과 마찬가지로 검은 양복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혜정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혜정도 어색한 얼굴로 얼굴을 끄덕였다. 경호원 중 하나가 세단 뒷좌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련만, 혜정은 아직도 이런 호사가 낯설었다.
“대표님이 오늘 잠시 뵙자고 하십니다.”
“아……. 네.”
가끔 이렇게 강재혁 대표가 따로 만나자고 할 때가 있는데, 이런 날은 보통 그의 사무실이나 상담을 진행했던 펜트하우스보다도 훨씬 규모가 큰 저택에서 만남이 이뤄졌다. 윤하진의 옆에서는 그저 사람 좋은 것 같은 미소만 짓고 있으면서, 그가 없는 자리에서는 더없이 차가운 남자였기에 혜정은 괜히 긴장이 되었다.
혜정을 태운 세단이 곧 넓은 정원 안으로 들어섰고, 저택 앞에서 멈췄다. 펜슬스커트를 입은 혜정의 다리가 저택의 위압감에 잠시 휘청거렸다. 힐을 신고 오지 말 걸 그랬나. 혜정은 한숨을 내쉰다.
고용인의 안내에 따라 혜정이 응접실로 들어서자, 가운데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의 눈이 혜정을 향했다. 어마어마한 저택과 수많은 고용인,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물건들과 벽에 걸린 작품들 모두가 혜정에게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지만, 역시 가장 위압감을 주는 것은 이 남자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날카로운 외양에 운동으로 다져진 거구의 몸은 분명 스크린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미남이었다. 방금 만나고 왔던 하진이 꽃 같다는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면, 재혁은 맹수에 가까워 보였다.
“전 박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혜정이 자리에 앉자, 뒤에서 차를 내온 고용인이 재혁과 혜정 앞으로 찻잔을 내려놓고 응접실을 나갔다. 응접실 안에는 재혁과 혜정뿐이었다.
“하진이는 좀 어떻습니까.”
“많이 좋아지셨습니다만, 아직도 불안해하세요.”
혜정의 말에 재혁이 자신의 턱을 감쌌다. 하진의 일로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다. 혜정은 재촉하지 않고 재혁의 말을 기다렸다.
“상담을 해보니 어떤가요, 하진이는.”
그가 가진 불안 요소를 능력껏 알아내라고, 그렇게 말했었다. 재혁은 그녀를 시험하고 있었다.
“상처가 깊으세요.”
“저도 압니다.”
“정략결혼 목적으로 키워지셨더군요. 그쪽 집안에서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고요. 그리고…….”
혜정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러자 재혁이 더 말해보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계속하세요.”
“대표님이 알고 계셨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자신을 고용한 사람이 강재혁 대표라지만, 피상담자에 대한 민감한 이야기까지 다 해도 괜찮은지에 대해 혜정은 갈등이 들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가 그 사실에 대해 광분하기라도 한다면 혜정은 감당할 수 없을 것이었다. 혜정이 머뭇거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혜정이 말을 다 잇지 못하자 재혁이 조금 미간을 찡그렸다.
“전 박사가 알아냈을 정도의 일이라면 다 알고 있으니 말해요.”
“……폭행당하셨더군요, 이복형에게.”
재혁의 관자놀이 옆으로 핏줄이 섰다. 혜정은 꽉 쥐어진 그의 손과 눈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무슨 폭행이었는지도 알고 있습니까?”
“네.”
재혁이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혜정도 마음이 무거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혁에게는 비밀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이었기에, 하진에게 혜정은 자신의 괴로움과 약점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의료인으로서의 사명이 아니고서야 무거운 일이었다.
“그분은, 대표님이 그 사실을 알고 계실까 봐 불안해하세요.”
“그래요.”
“그리고 알게 될까 봐 불안해하시고요.”
“……영상 파일이 있던 것도 알고 있습니까?”
“네.”
“복사본이 남아있는 게 아니라면 폐기되었어요. 가지고 있던 사람이 죽어서 나한테로 왔거든.”
후우…… 그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덮었다. 곧 손이 내려가자, 날카로운 그의 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그래요. 내가 오늘 묻고 싶은 건, 이겁니다. 하진이는 내가 그걸 폐기시킨 것도 봤다는 것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 영상은 폐기됐어요. 하진이가 나한테 돌아온 뒤로 영상이 수면 위로 올라온 적이 없으니, 하진인 그 영상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죽으면서 그것도 매몰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죠.”
“……네.”
“하진이가 아는 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하진이 본인과 전 박사를 제외하고는 세상에 한 명뿐입니다.”
“폭행한 당사자 말이군요.”
“그래요.”
윤하진의 이복 형. 하진에게 듣기로는 그는 도박 중독으로, 재혁의 돈으로 해외를 전전하며 도박을 하며 살고 있을 거라 했다. 그는 하진이 불안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한량이 언제고 돈이 떨어졌다며 연락을 하거나 협박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중 이 세상에 있는 건 하진이와 전 박사 두 명뿐이라면 어떻겠습니까.”
혜정이 놀라 자신의 앞에 앉은 재혁을 바라보았다. 그 말을 전하는 재혁의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 이야기는 분명……. 윤하진의 이복형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 새끼가 죽었다면, 하진이가 그 사실을 아는 편이 낫겠습니까?”
혜정의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그는 하진을 위해서라면 살인교사도 서슴지 않을 사람이었다. 혹시 그의 죽음이 강재혁 대표와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혜정은 더 이상 깊게는 관여하지 않기로 한다.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이 죽었다는 걸 알면, 좀 더 편해지실 순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군요.”
재혁이 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혜정은 타는 목을 차로 달래며, 다시 재혁에게 말했다.
“그분은 대표님이 혹시라도 그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래서 자신을 버릴까 봐 두려워하세요.”
“…….”
그의 가장 큰 불안은 그것이었다. 혜정은 피상담자라는 것을 떠나, 힘겨운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평생 모른 척할 겁니다. 하진이가 그걸 원한다면.”
혜정이 마음이 놓인 듯 짧게 한숨을 뱉었다. 위험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이 남자가, 그를 지켜줄 유일한 존재였다.
* * *
“……하진아, 어떡하니……!”
하진은 자신의 어깨 위로 눈물을 떨구는 중년의 여인과 재혁을 번갈아 바라본다. 엄습하는 불안감에 하진의 팔이 떨렸다. 중년의 여인은, 하진을 어린 시절 키워주었던 양어머니였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그녀는 다리가 마비되어 거동을 잘하지 못했고, 최근에는 치매 증상마저 있었는데 오늘은 비교적 정신이 또렷한 날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재혁이 얼마 전 마련한 민형의 시체검안서가 들려 있었다. 소식은 없을지언정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으리라 여기고 있었을 그녀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윤민형의 죽음을 알린 것은 재혁의 잔인함이자 하진에 대한 다정함의 발로였다. 윤민형의 죽음을 모르고 있는 이상, 하진은 언제고 그 비밀이 누설될까 그가 돌아오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어야 하므로. 재혁은 하진이 의심하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절차가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누군가의 슬픔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재혁은 하진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천성이 나쁜 남자였다.
“어쩌면 좋니, 우리 민형이…… 딱해서 어쩌니…….”
하진은 실신할 듯 울며 매달리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다. 하진의 눈에서도 둑이 터진 것처럼 눈물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많은 의미가 내포된 눈물이었다.
사인은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라고 했다. 윤민형의 진짜 사인을 내보이지 않은 것은 재혁의 마지막 자비였다. 실제 윤민형은 여기저기로 장기가 뜯긴 후에 온몸이 갈려 사료 따위가 되었을 터다. 재혁은 여인의 울부짖음 속에서 하진의 떨리는 손을 바라본다.
“어머님, 장례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장례…… 장례라니…… 흐으……!”
하진을 붙잡고 매달리던 몸이 정신을 잃고 침대 위로 쓰러지자, 하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하진은 뒤에서 뛰어들어온 간호사들에 떠밀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덜덜 떨기만 하는 그를 지탱해준 것은 재혁이었다.
하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려댈 뿐이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재혁이었으나 하진에게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하진은 그의 양어머니가 다시 깨어날 때까지 요양병원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재혁이 그 곁을 지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깨어난 그의 양어머니는 다시 자신의 아들을 찾았다. 자신의 배로 낳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잊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를 보고 나니 하진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아들의 죽음을 지워낸 채 아이처럼 민형을 찾는 그녀의 모습을 뒤로하고, 하진은 병원을 떠났다.
“하진아, 뭐라도 좀 먹어야지.”
“……괜찮아요.”
“윤하진.”
다시 집으로 돌아온 하진은 지쳐 보였다. 하진이 편해졌으면 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하진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재혁이 하진을 잡아 돌려세웠다. 재혁의 눈을 피하는 하진에 재혁은 인내심이 고갈되는 것을 느꼈다. 이 묘한 기시감은, 예전에 자신에게 날을 세우던 윤하진이었다.
“너 오늘 내내 아무것도 안 먹었어.”
“신경 쓰지 마요.”
“신경을 어떻게 안 써, 내가!”
하진은 벽으로 몰아세운 재혁이 소리를 지르자, 그때서야 하진이 고개를 올려 재혁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재혁은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하진은 자신의 우울은 뒤로 한 채, 손을 들어 재혁의 마른 뺨을 감쌌다. 하진의 손 위로 재혁의 손이 겹쳐지자, 하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툭 떨어졌다. 뺨을 가르고 떨어진 눈물에 재혁의 눈이 좁혀졌다. 울리고 싶어서 그 새끼의 죽음을 알린 것이 아니었다.
“울지 마, 제발.”
그 말을 하면서, 재혁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진이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하자 곧 재혁이 하진의 입술을 삼켰다. 빠르게 입술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혀에 하진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재혁의 뺨 위에서 겹쳐진 재혁의 손이 뜨거웠다. 재혁의 어깨를 밀어내려던 하진이 재혁의 어깨를 감쌌다.
“음…….”
코끝이 부딪치는 줄도 모르고 재혁은 키스에 몰두했다. 그가 질척하게 혀를 비비자 하진이 재혁의 어깨를 힘주어 쥐었다. 재혁이 입술을 놓아주자마자 하진이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울지 마.”
위로하는 듯 퍼지는 음성에 하진이 감았던 눈을 다시 떠 재혁을 바라보았다. 결단코 윤민형의 죽음이 슬픈 것은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바랐던 것이 하진이었다. 꿈속에서 수십 번을 그의 심장을 찌르고 목을 졸랐었다.
“내가…….”
하지만 그래서 하진은 그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다.
“나빠서 그래요.”
“뭐가.”
“엄마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도, 난 하나도 슬프지가 않았어.”
처음에는 천벌이라고 생각했다. 죽어도 하나 아깝지 않은 개자식이었고 그의 존재 자체가 매일 불안했던 하진으로서는 마음 한 켠 다행이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윤민형을 이렇게 저주했던 자신 때문에 그가 죽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윤민형이 사라지고 최근에야 편하게 그녀를 엄마라고 부를 수 있게 된 하진이었다. 괴로워하는 양어머니를 보고 마음이 편치 못했던 하진은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꼭 나 때문에 그런 것 같아서, 엄마한테 너무 미안해서…….”
“윤하진, 하아.”
재혁이 하진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을 향해 올곧게 내리꽂히는 눈빛에 하진은 잠시 숨을 멈춘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너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어.”
“…….”
“사고였어. 누구나, 술을 그 정도로 마시고 차를 몰면 죽을 수 있어.”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사. 윤민형의 죽음이라고 할 때 가장 어색하지 않은 사인이다. 아니, 사실 그렇다 하기에는 사치스럽기까지 한, 한심한 죽음이었다. 그에게 주기에는 너무나 속 편한 죽음이다. 너무 편히 죽었다고 하진이 그렇게 생각할까 걱정마저 들었을 정도로.
“네 탓이 아니야.”
태어나고 나서 기억이 있는 첫 순간부터, 세상은 하진을 불행의 씨앗이라고 했다. 하진을 임신했기 때문에 친어머니가 불행해졌고, 하진이 히트사이클이 왔던 탓에 양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고. 하진이 색기 있는 탓에 더러운 소문에 휩쓸려 양아버지가 곤란해졌고, 이복형이 하진을 범하게 한 거라고. 그 속에 하진의 선택이나 의지는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이 하진의 탓이 아니라고 해주지 않았다.
너와는 아무 상관 없다고,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재혁의 목소리에 하진은 울 수밖에 없었다. 그 무엇보다도 잃기 싫은 위로였다.
* * *
재혁은 자신의 얼굴을 내리누르는 힘에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인지 방 안이 햇빛으로 환해져 있었다. 재혁이 눈을 떴음에도 뺨과 이마를 꾸욱 누르는 손바닥이 야무지다. 재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하, 너 이 녀석.”
“압바, 아빠빠.”
재혁이 침대에서 일어나 재하를 안아 올렸다. 이제는 어설프게나마 갓난아기 티를 벗은 재하가 재혁의 팔 안에서 꼬물거렸다. 재하가 고사리 같은 손을 뻗어 재혁의 콧날을 잡아 쥐자, 재혁이 다시 또 웃음을 터트렸다.
“재혁 씨, 일어났어요?”
고개를 돌리자, 문 너머에 하진이 서 있었다. 어제보다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금방 먹구름이 가신 얼굴에, 재혁은 안도한다. 자신의 선택에 또 한 번 후회를 더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는 그다. 안심하는 재혁에 하진이 생긋 웃었다.
“오늘 연희동 가기로 했잖아요.”
“아…… 그렇지.”
“우리 재하가 아빠 잘 깨웠네.”
꺄아. 하진을 마주한 아이가 탄성을 내며 꺄르르 웃었다. 하진도 미소를 지으며 재혁의 품 안에 있던 아이를 건네받는다. 제법 재하를 안는 자세가 안정되어 있었다. 재혁은 침대에 앉은 채로 아이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하진의 얼굴을 본다.
하진은 행복해 보였다.
재혁이 침대에서 일어나 하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상체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반라였다. 하진이 그런 재혁을 조금 의식하자, 재혁이 피식 웃으며 하진의 몸을 끌어당겼다. 재혁과 하진 사이에 안긴 아이가 꼬물거린다.
“뭐 해요, 재하 있는데…….”
“내가 뭘?”
재혁이 하진의 이마와 눈가에 키스하자 하진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그의 귓바퀴가 붉었다. 재혁과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하진은 긴장했다. 방금 일어난 재혁이 아직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않은 탓이었다. 재혁의 팔이 하진의 허리를 잡아채자 하진이 흠칫 몸을 떨었다.
“오늘따라 더…….”
“…….”
“키스하고 싶네.”
“무슨…….”
재혁의 입술이 하진의 입술 위에서 쪽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하진의 얼굴을 본 재혁이 웃으며 하진을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하진에게서도 조금씩 복숭아 향기가 피어올랐다.
“……하지 마요.”
재혁의 손이 하진의 셔츠 아래 등의 맨살을 매만지자, 바로 하진에게서 저지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뭘 알기나 하는 건지, 그 둘 사이에서 재하가 몸을 꼬물거렸다. 재혁도 다시 웃음이 터진다. 다시 재혁의 입술이 하진의 목덜미 근처에 닿았다.
“하지 말라니까…….”
겉으로 보기에 하진의 기분이 나아졌다고 해서, 그의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하진은 조금씩, 점점 변하고 있었다. 재혁은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마음이 든다.
따스하고 행복한 아침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는 보통의 행복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그런 아침. 하진에게 이런 아침을 지켜주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겠노라고, 재혁은 그런 생각을 했다.
* * *
조용한 가운데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의 연희동, 재혁의 본가 방문이었다. 내리깔린 눈을 다시 감았다 뜨니, 멀리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하진은 이렇게 가끔, 보통의 일상을 보내다 문득 예전의 자신을 떠올리곤 했다. 누군가를 겁내지 않고, 누군가를 경계하지 않고, 혹은 외롭지 않은 식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자신이 때로는 낯설었다.
“하진아, 얘 이것도 좀 먹어봐라. 청주댁이 애쓴 거야.”
재혁의 어머니인 선경이었다. 그녀는 재혁의 가까이에 놓여있던 전복초를 하진의 가까이로 밀어놓으며 말했다. 하진이 살짝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선경을 쳐다보자, 그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래. 하진이 몸나았다고 소홀히 하면 안 된다. 더 조심해야지.”
“그럼. 많이 먹어, 응?”
하진이 힐긋 재혁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전복초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올렸다. 하진이 사라진 1년여 동안, 재혁은 하진이 아파서 외국으로 요양을 갔다 전했다고 했다. 얼마 전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손주를 얻은 재혁의 부모는 그저 하진이 고맙고 예쁜 모양이었다. 평소 과묵한 재혁의 아버지까지도 몇 마디 거드는 것을 보면.
“이제 아프지는 않고?”
“……네. 괜찮아요.”
“엄마는 하진이 너가 더 마른 것 같아 걱정이다.”
“아니에요. 저 살 좀 쪘는데.”
“찌기는 무슨. 아무튼, 재혁이 네가 잘해야 해.”
선경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재혁에게 당부했다. 재혁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선경은 그때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이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그릇을 모으는 것이 취미라던 선경의 취향대로 음식들은 고급스런 식기 위에 예쁘게도 놓여있었다. 선경이 다시 식사를 하는 모습에 하진도 다시 고개를 내리고 전복초를 입안으로 삼켰다. 꿀을 넣은 전복초가 쫄깃하게 입안에서 씹히자 달콤 쌉싸름한 맛이 퍼진다. 하진이 전복초를 목 뒤로 넘기기가 무섭게, 다시 선경이 고개를 들어 물었다.
“하진아. 얘 너한테 잘해주기는 하니?”
“네……, 콜록, 콜록!”
놀라 사레가 든 하진이 입을 가리고 콜록거리자 재혁이 일어나 뒤의 고용인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재혁의 손이 부드럽게 하진의 목 뒤를 감싸고, 입을 가리고 있는 하진의 손등 위로 손수건을 덮어준다. 하진이 새빨개진 얼굴로 손을 빼내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곧 기침이 잦아들고, 재혁도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경은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다.
“하진이 너 괜찮니?”
“아, 네. 사레들려서요.”
“네가 어떻게 했길래 애가 사레가 들어?”
선경이 눈을 돌려 재혁을 뾰족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재혁이 말없이 하진을 돌아보자, 하진이 손사래를 치며 부인한다.
“아니에요! 재혁 씨 잘해줘요. 정말요.”
잘해준다는데? 재혁이 싱긋 웃는데 선경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다. 하진이가 워낙 착해서, 내가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선경이 덧붙였다. 하진은 왠지 모르게 울컥해지는 것 같은 기분에 목 뒤로 침을 꼴깍 삼켰다. 이런 따뜻한 걱정은 하진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것이었다. 이럴 때면 하진은 과거의 자신이 가여워졌다. 점점 이런 다정함에 익숙해지고 있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시원하고 괜찮구만.”
“그래요? 전주댁이 어떻겠냐기에 올려봤는데 다행이네. 재혁아. 하진이도 한 국자 떠 줘.”
선경이 재혁에게 눈짓을 주자, 재혁이 팔을 뻗어 하진의 앞에 놓인 작은 국그릇을 가져갔다. 그 안으로 대구지리가 소담하니 담겼다. 평소 육류보다는 생선을 좋아하던 하진이다. 재혁이 대구지리를 담은 국그릇을 다시 하진의 앞에 놓았다. 그런데 미묘하게 굳은 하진의 얼굴에 재혁이 눈을 좁혔다.
“왜, 괜찮아?”
“아뇨, 그게……, 욱!”
하진이 입을 가리고 헛구역질을 하자, 다시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경 내외도 놀라 하진을 쳐다본다. 재혁이 다시 고용인에게 새로 받은 손수건을 하진의 입가에 대 주었다. 코와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은 하진의 눈가와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재혁이 하진의 앞에 놓인 국그릇을 자신의 앞으로 치운다.
“하진이, 너 혹시…….”
“아니, 아니에요. 사실 오늘 아침부터 속이 조금 안 좋아서…… 죄송합니다.”
놀란 눈의 선경이 하진과 재혁을 번갈아 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임신한 건 아닐까 싶어 놀랐던 선경이었다. 분명 다시는 임신이 어려울 거라고 했었는데. 사실 불임 판정이나 다름없었던 하진이 재하를 낳은 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또 임신하기가 쉽지는 않겠지. 속이 안 좋았다던 말에 선경은 놀라고 설렌 마음을 겨우 가다듬는다.
“속이 안 좋았으면 쉬었어야지, 아가. 억지로 먹은 건 아니지?”
“아니에요. 정말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러지 말고 속 안 좋은 거면 올라가서 쉬고 있지.”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하는 하진의 얼굴이 조금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 회장이 올라가 쉬라 하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재혁이 하진의 무릎 위에 힘없이 놓인 손목을 잡아챘다. 하진이 다시 놀란 눈으로 재혁을 올려다보는데, 재혁은 힘을 주어 하진의 몸을 일으킨다.
“그럼 저희 잠시 위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아, 아니, 저는.”
하진이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재혁은 흔들림이 없었다. 재혁이 하진의 손을 잡은 채로 계단을 올라 2층 재혁이 썼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에 하진이 결혼 전에도 와본 적이 있었던 방이다.
“이러면 어떡해요, 어른들 식사하시는데.”
“거기 계속 앉아 있으면 너 걱정한다고 더 식사 못 하셔.”
“재혁 씨가 이러면 나 미움받아.”
“진짜 아들보다 널 더 챙기는 거 못 봤어?”
“그래도…….”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속은. 괜찮아?”
아까는 참지 못할 정도로 구역질이 치미더니, 또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았다. 조금 메슥거리는 것 같기도 했지만, 몸이 안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자신의 걱정을 많이 하는 선경이다. 그런 그녀를 더 걱정시켜드린 것 같아 하진은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내심 하진은 자신의 몸이 신경 쓰인다. 아까 식당에서는 절대 임신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만에 하나라도 임신일지 모른다는 상상이 자꾸만 머리를 들었던 탓이다.
“괜찮아, 정말. 아까 왜 그랬는지도 모르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다행이네.”
재혁은 다시 괜찮아진 것 같은 하진의 얼굴에 다시 부드럽게 웃었다. 재혁과 하진은 나란히, 결혼 전 재혁이 썼던 침대에 걸터앉았다. 침대 위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살짝 얽혔다. 금세 방 안의 공기가 바뀌는 것만 같다. 재혁도 그것을 느꼈던 모양인지, 그가 손을 들어 하진의 턱을 살짝 쥐어 돌리게 했다. 달아오른 공기에 하진이 눈을 천천히 내리감자, 곧 재혁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었다.
“음…….”
하진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넘어갔다. 하진을 눕히자 재혁의 혀가 더 깊게 하진의 입안을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훅 퍼지는 서로의 페로몬이 아찔하다. 이대로라면 흥분해버릴 것만 같아 하진이 다리를 비비적댔다. 점막을 가르는 질척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혹적이다. 하진이 가늘게 눈을 뜨며 재혁의 어깨를 살짝 밀어내자, 재혁이 순순히 밀려났다. 멀어지는 재혁의 입술이 타액으로 젖어 있었다. 하진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선 안 돼요.”
아래층에 재혁의 부모님이 계시는데 이런 짓을 태연히 할 정도로, 하진은 담이 큰 부류가 아니었다. 하진의 목소리가 야하게 갈라졌다. 재혁이 엄지로 천천히 하진의 입술에 젖은 타액을 닦아냈다. 탄력 좋은 입술이 손가락 아래에서 뭉개졌다가 다시 튀어 오르듯 모양을 갖춘다.
“왜.”
“어머님, 아버님 계시잖아.”
“둘째 생기겠다고 더 좋아하실걸.”
재혁의 손이 하진의 상의 허리 안쪽을 파고들자, 하진이 흠칫 놀라며 허리를 틀었다. 날이 갈수록 민감해지는 몸에 하진은 가끔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진이 재혁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재혁이 한쪽 눈썹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하진은 재혁을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다.
“오늘만 참아.”
“내 눈앞에 있으면서 참으라고 하는 거, 좀 잔인한 거 아닌가…?”
하진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눈앞에 있는 재혁에게로 손을 뻗었다. 하진이 재혁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재혁을 끌어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재혁과 하진의 몸이 침대 위에서 온전히 겹쳐졌다.
“이러면 안 보이죠.”
“글쎄, 이럼 다른 문제가…….”
끌어안고 있어 서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진의 허벅지가 닿은 재혁의 아래가 단단히 발기해 있었다. 하진이 당황한 듯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귓바퀴가 타는 것처럼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진이 재혁을 끌어안은 채로 가만히 멈춰 있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허벅지를 찔러오는 재혁의 발기나 페로몬은 모른 척 지나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재혁의 어깨에 둘렀던 하진의 팔이 스르륵 풀어진다. 재혁은 먹잇감을 놓친 맹수처럼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재혁과 눈이 마주치자, 하진이 눈을 피했다. 재혁이 피식 웃고는 그런 하진에게 다시 고개를 숙였다.
“왜, 놀랐어?”
재혁이 다가오자 움찔거리며 눈을 감는 하진이다. 그 모습을 본 재혁은 낮게 웃었다. 가까워진 재혁의 얼굴이 하진의 콧잔등에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하고는 다시 멀어졌다. 몸을 일으켜 다시 침대에 걸터앉은 재혁의 옆으로, 하진도 몸을 세웠다.
“괜찮아요?”
하진이 진심으로 걱정하며 물었다. 재혁은 다시 웃어버렸다. 사랑스럽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달리 없었다. 재혁이 하진의 턱을 살짝 잡고는 고개를 돌려 키스했다. 남자답게 뻗은 턱이 날카롭게 섰다. 지치지도 않고 재혁의 커다란 손이 하진의 허벅지를 슬쩍 주무르자, 그때서야 하진이 재혁의 손을 막아서며 입술을 뗐다.
“왜 이렇게…… 못 참아.”
“키스도 안 돼?”
난감했지만 하진도 싫지는 않았다. 처음 이 방에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결혼 전, 재혁의 어머니인 선경이 초대했던. 서로 상처를 내고 할퀴기 바쁠 때였다. 재혁은 다른 남자 이야기를 하면서 추궁하고, 하진은 거짓을 말하며 그저 회피하려고만 했었다. 억지로 키스하려는 재혁을 밀어내고, 먼저 돌아가라는 그의 말에 모순적으로 탈력감과 야속함을 느꼈던.
“솔직히 말해 봐요. 재혁 씨, 준원 형한테 질투했지.”
“질투라기보다는 죽이고 싶은 쪽에 가까울걸.”
재혁은 태연하게 답한다. 그런 재혁을 마주한 하진의 얼굴도 사르르 풀어졌다. 재혁과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의 기억을 지워내고 다시 새로운 기억을 덧씌우고 있었다. 일생을 살아가며 자신의 삶과 자신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이토록 빛난 적은 결단코 없었다.
“예전에 예물 맞추러 왔을 때, 그때도 이 방에서 나한테 키스하려고 했잖아.”
“그랬지.”
“그때는, 정말 당신 미웠는데.”
하진이 자신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작게 말했다. 사실은 그때도 자신은 이미 사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를 역겨워하고 베타를 사랑하고 있었던 그였다. 이렇게 그에게 사랑받고 그와 사랑할 수 있을 줄 그때의 자신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었다.
“난 그때도 키스하고 싶었어.”
“……이해가 안 가.”
“나도 이해가 안 가.”
그때는 따로 사귀는 여자가 있었으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얼굴이 굳어진 채 하진이 고개를 숙이자, 재혁이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며 입술에 살짝 키스를 했다.
“화내지 마. 사실이니까.”
“…….”
“하진아.”
“키스해줘.”
사람의 감정을 명확하게 정의 내리기란 어렵다는 것을 하진도 인정하고 있었다. 과거의 일에 연연하지 않기로, 앞으로의 행복만 생각하며 살기로 다짐했었는데.
“으응…….”
키스해달란 하진의 말에, 재혁은 지체하지 않고 팔로 하진의 허리를 감았다. 얇은 허리를 끌어안은 채 품 안으로 당기는 힘에, 하진은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익숙하게 혀를 감아오는 감각에 하진은 재혁의 어깨를 다시 세게 안았다. 벅차서 자꾸만 넘치려고 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부질없는 예전 일까지 하나하나 서운해하면서 또다시 행복해하고, 수없이 다시 사랑에 빠지곤 했다.
어느새 하진은 재혁의 단단한 허벅지 위로 올라타 있었다.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에 하진은 파르르 허리를 떨며 재혁에게서 입술을 떼어냈다. 타액으로 젖은 붉은 입술이 재혁의 시선 끝에 머물렀다.
“사랑해.”
재혁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하진 역시 마음속으로 수없이 되뇌던 말이었다. 하진이 가만히 재혁의 목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나도”
하진은 사랑한다는 말에, 아직도 면역이 없었다. 하진에게 사랑을 주었던 사람들은 모두 결국에는 그의 곁을 떠나갔기 때문에, 본능적인 두려움 같은 것들도 있었다. 이런 동의의 말조차도 하진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한 말이었다. 하진의 큰 눈에 물기가 어렸다. 재혁은 그런 그의 눈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하진은 여전히 재혁의 허벅지 위에 앉은 채로, 재혁의 목에 감았던 팔을 풀고 그의 양 뺨을 감쌌다. 다시 입술이 닿고, 하진의 눈꺼풀이 힘없이 감겼다. 쏟아지는 페로몬에 몸속의 피가 요동쳤다. 핏줄이 일어선 재혁의 팔이 다시 하진의 허리와 등을 거칠게 매만진다. 그의 숨소리가 여실히 흥분해 있었다.
“하아, 하진아.”
입술이 애달프게 멀어지자,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반쯤 내려뜬 눈의 흐린 초점이 재혁을 향해있었다. 겹쳐진 허벅지 안쪽으로 재혁의 발기가 뜨겁게 하진을 찔러왔다.
“아……!”
재혁이 하진의 귀밑 아래를 강하게 빨았다. 재혁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짙은 빛깔로 울혈이 남아있었다. 하진이 재혁의 어깨를 밀어냈지만, 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진의 쇄골에 입술을 묻었다. 어느새 하진의 상의 아래로 들어간 손이 하진의 양 유두를 매만지고 굴려댄다. 분홍빛으로 열감이 오른 눈가가 살짝 일그러진다. 어쩔 수 없이 흥분하고만 하진도 재혁의 허리에 감은 허벅지에 힘을 주었다.
“한 번만.”
“흣, 재혁…….”
“금방 끝낼게.”
한 번으로 끝낸 적도 없고, 금방 끝낸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부모님이 계신 집이라는 것이 걸렸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정말 임신한 게 맞다면…….
“대신 입으로 해 줄게요.”
“……뭐?”
당황한 재혁의 손 사이로 얇은 허리가 빠져나갔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하진이 침대 아래 재혁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재혁의 바지 버클을 풀어내려 하진이 손을 뻗자, 그런 그의 손목을 재혁이 잡아 올렸다. 하진은 그런 재혁을 바라보며 붙잡힌 손을 빼낸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하진은 물러섬이 없었다.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요.”
“하아, 윤하진.”
“나 잘 못 할 텐데…….”
하진이 이미 불룩해진 재혁의 앞섶을 풀어헤쳤다. 드로즈를 살짝 내리기만 했을 뿐인데 이미 빳빳하게 발기한 페니스가 위로 튀어 올라왔다. 재혁이 어쩔 수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한쪽 눈을 손으로 덮었다. 이미 핏줄까지 불거진 채 꺼떡거리는 페니스는 터질 것처럼 발기해 있었다. 당황한 하진이 그의 페니스와 재혁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많이 힘들었겠…….”
하진이 말끝을 흐렸다. 하진의 손끝이 닿자 그의 페니스가 박동하며 꿈틀거렸기 때문이었다. 페로몬에 취한 이성은 이미 힘을 잃은 지 오래였다. 하진이 고개를 숙이자마자 쏟아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천천히 페니스 끝을 입에 물었다. 짙은 페로몬 향기가 폐부로 흘러들어온다. 워낙 커다란 탓에 입을 크게 벌려도 잘 입안으로 담기지 않는 페니스에 하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하아.”
축축하게 젖은 혀 위로 미끄러지듯 들어가는 페니스 선단에 재혁은 탄성을 토했다. 치켜뜬 눈으로 그것을 지켜본 하진이, 페니스 아래를 손으로 잡은 채 재혁의 페니스를 더 깊게 삼켰다. 두꺼운 귀두가 입안을 꽉 막으며 입천장을 눌렀다. 겨우 반쯤이나 들어갔을까. 본능적인 구토감까지도 잊을 정도로 하진도 펠라티오에 몰두해 있었다. 찔끔 배어 나온 눈물에 하진의 눈가가 축축했다.
“하진아…….”
기술이랄 것도 없이 그저 물고만 있을 뿐인데도 재혁은 흥분했다. 재혁의 커다란 손이 하진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페니스가 이렇게 아프게 목구멍까지 찔러오는데, 왜 자신도 흥분하고 있는지 하진은 알 수가 없었다. 뱃속이 뜨거운 기분에 하진은 입안의 페니스를 사탕처럼 쭉쭉 빨며 재혁을 올려다보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입에 턱이 얼얼했다.
“하아, 윤하진, 그만.”
사정이 가까워진 탓에 재혁이 다시 하진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하진이 도리질을 쳤다. 자신의 서툰 펠라티오에 흥분한 재혁을 보자 묘한 기분이 든 하진이었다. 하진이 어설프게 혀를 쓰며 피스톤 질을 하듯 고개를 앞뒤로 움직였다. 꿇어앉은 다리 사이 에널이 움찔거리며 애액을 토해내 바지가 축축했다.
“우읍, 음……!”
갑자기 입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뜨거움에 하진이 재혁의 페니스를 빼냈다. 페니스와 입술 사이로 이어져 흐른 불투명한 액체에 하진도 재혁도 놀란 눈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하진은 부은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려는 정액에 손으로 입술을 가렸다. 삼키지도, 토하지도 못하고 그저 입에 머금은 채 어쩔 줄을 모른다. 이미 한 번 사정을 했음에도 빳빳하게 일어서 있는 재혁의 페니스가 눈에 들어왔다.
“하진아, 우선.”
재혁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옆에 티슈를 뽑아 건넸다. 그리고 바로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당황한 하진이 입을 가린 채 방 안에 딸린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 문 너머로, 과일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오시라는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새빨개진 얼굴로 입안에 든 것을 꿀꺽 목 안으로 넘긴다.
“……미쳤다, 정말.”
하진이 작게 혼잣말을 했다. 갈수록 대담해지는 것은 하진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