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계약의 끝
* * *
재혁과 하진이 하진의 방으로 들어오자, 방 안에서 아이를 보고 있던 시터가 인사를 하고는 아이를 안아 아이 방으로 들어갔다. 시터가 방문을 닫자, 재혁이 하진의 어깨를 감싸더니 하진을 침대 위로 앉혔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하진은 불안한 눈빛으로 재혁을 본다. 재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말 믿어?”
“무슨 말.”
“우리 형……이 한 말.”
자신이 최 회장과 재혁 사이에서 흔들렸다는 것, 그리고 그때 윤민형이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는 것.
하진이 재혁의 대답을 기다리며 재혁의 얼굴을 살피지만, 얼굴 위로 드러나는 표정으로는 재혁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재혁이 고개를 돌려 하진을 마주 보았다.
“글쎄.”
목구멍이 콱 막히는 것 같은 기분에 하진은 숨을 길게 내뱉는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줄은 알고 있었지만, 윤민형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진은 불안해 미칠 것 같았다.
“사실 아니야. 흔들린 적 없어.”
하진이 매달리듯 말했다.
“정말이야. 정말…….”
하진은 이렇게밖에 말할 수가 없는 자신을 탓한다. 그러나 하진을 바라보는 재혁의 눈에는 미동조차 없었다. 재혁은 기본적으로 냉정한 사업가였다.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바가 있으면 밑바닥을 볼 때까지 파고드는.
둘은 얼마간 말이 없었다. 공중에서 시선이 엉키고, 긴장한 상태에서 페로몬이 얽힌다. 서로의 감정과 진실 여부를 알아내려 예민해진 감각이 서로를 향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본능에 휩싸였다. 이렇게 이성의 칼날이 목을 겨누고 있는 이 순간조차도. 피부에 닿는 페로몬으로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하진이 목을 조금 움츠렸다. 하진의 손등 위로 재혁의 손이 겹쳐진다. 재혁에 의해 하진이 침대에 눕게 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아, 잠깐…….”
하진을 침대에 눕힌 재혁이 하진의 몸 위로 올라왔다. 재혁이 고개를 기울여 하진의 턱 끝에 입을 맞춘다. 하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숨에 하진이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 역시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해요.”
튀어나온 하진의 경어에 재혁의 얼굴에 웃음기가 흘렀다. 재혁은 멈출 생각이 없는지, 시트 위의 하진의 손에 깍지를 끼웠다. 재혁의 입술이 조금 올라와 하진의 귓불과 귓바퀴를 살짝 물었을 때, 하진은 어깨를 옹송그린다. 의식도 하지 못하는 새, 재혁이 하진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덮었다.
“음, 응…….”
하진이 바로 입술을 열어주지 않자, 재혁의 손끝이 하진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자극되는 성감에 하진이 흠칫거리며 몸을 떨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하진의 얼굴이 붉었다. 셀 수 없이 많이 했던 키스인데도 하진은 여전히 키스를 부끄러워한다.
“하아, 그만 해요,”
“왜?”
“주연 씨 바로 옆방에 있잖아.”
하진이 눈을 굴리며 속눈썹을 떨자, 얇게 난 쌍꺼풀이 드러났다. 하진의 눈동자가 아기 방이 있는 쪽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옆방에 아이를 보고 있을 시터가 행여 들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다른 방으로 가라고 할까?”
쪽. 재혁이 하진의 뺨과 귓가에 잘게 키스했다.
“지금부터 야한 짓 할 거니까…… 나가라고.”
“……무슨 소릴.”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재혁의 어깨를 팡팡 치며 밀어댔다.
“지금 말하러 갈까?”
“하지 마요, 나 정말 화낼 거야.”
재혁이 피식 웃었다. 하진은 귓바퀴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들으라고 해.”
다시 재혁이 고개를 숙여 하진에게 깊게 키스했다. 다시 하진이 이렇게 돌아온 것이 새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자고 나면 꿈이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재혁에게 하진은 신기루 같았고, 언제나 갈증이 나는 존재였다. 그래서 이렇게 집착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지만, 지금의 이 관계마저 깨어져 버릴까 무서워지기도 한다.
“아…….”
하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신음소리가 도화선이었다. 재혁의 자제심으로 억누르고 있던 본능이 둑이 터진 듯 쏟아져 내렸다. 하아, 재혁이 급하게 하진의 뺨을 움켜쥐고 입술을 맞부딪쳤다. 맞닿은 하체가 열이 오른 채로 단단하게 팽창해 있었다.
“흐응…….”
하진이 허리를 뒤틀자, 하진의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는 재혁의 손길이 더욱 급박해졌다. 금방 드러난 흰 살갗이 눈부셨다. 젖혀진 셔츠 사이로 분홍빛의 유두가 비쳤다. 재혁이 하진의 입술을 놓아주자마자, 다시 고개를 숙여 하진의 유두를 입안으로 삼키고 빨아들였다. 타액으로 젖은 붉은 입술이 신음한다.
“하응, 읏…….”
어떡해. 눈물까지 날 정도로 흥분감이 몰려들었다. 어쩔 줄을 모르고 하진이 다리를 비튼다. 젖을 빨 듯 쭉쭉 빨아대는 재혁에 절로 허리가 떨렸다. 장난감처럼 농락당하는 반대편 유두도 재혁의 손끝에서 촉촉하게 우윳빛으로 젖어 들어갔다. 같은 오메가여도 남성 오메가의 경우에는 여성 오메가처럼 젖이 잘 돌지 않는 터라, 모유를 중단한 상태였다.
아…… 하진이 몰려드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재혁의 애무에 하진의 흰 가슴 위로 우윳빛의 액체가 고이고 있었다. 재혁이 혀를 세워 분홍빛의 돌기를 빙글빙글 입안에서 돌렸다. 입안으로 단맛이 퍼지고 있었다.
“달아.”
“흐응…….”
재혁의 손이 곧 하진의 바지 버클을 풀고, 하진의 바지 속으로 파고들었다. 하진의 페니스도 이미 단단하게 일어나 있었다. 재혁이 하진의 페니스를 기둥을 잡듯 감싸 수차례 위아래로 흔들었다. 머지않아 하진의 페니스 끝에서 뿌연 액이 사출되었다.
“흑, 잠깐…… 잠깐 재혁 씨.”
하진의 사정과 동시에 방 안에 복숭아 향기가 가득 들어찼다. 하진의 페로몬 향기였다. 촉, 소리와 함께 재혁의 입술이 하진의 유두에서 떨어졌다. 한쪽 유두가 퉁퉁 불어있었다. 하진이 사정감을 견디지 못하고 재혁을 붙잡았지만, 재혁이 아랑곳 하지 않고 하진의 바지를 벗겨냈다. 사정한 것은 페니스뿐만이 아니었던지, 흰 엉덩이가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 많이 못 기다려.”
재혁이 하진의 매끈한 다리를 잡아 벌렸다. 습하게 젖어있던 곳이 야한 빛깔을 띠며 모습을 드러낸다. 재혁의 손가락이 에널 안으로 파고들자, 하진이 격렬하게 반응했다.
“읏!”
액체가 점막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방안을 가득 울렸다. 야하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붉은 내벽이 하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알파를 반기며 쭉쭉 빨아 당겼다.
“아! 흑…….”
하진이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재혁이 급하게 아래만 풀어헤쳐 자신의 페니스를 꺼냈다. 핏줄이 불거진 채 상당한 크기로 발기한 페니스가 꺼떡거렸다. 재혁이 급히 하진의 양다리를 잡아채고는 하진의 에널 안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삽입했다. 하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흐흑…… 제발.”
퍽 소리와 함께 깊숙하게 삽입되는 페니스가 하진의 에널 안에서 더 커지고 있었다. 페니스의 선단이 피스톤 질을 할 때마다 더 깊숙이 들어가 하진의 자궁경부를 자극했다. 아, 아, 아…… 재혁의 페니스를 무는 것처럼 오물거리는 에널이 왈칵 애액을 토해냈다.
“하아, 올라와 봐.”
삽입한 채로 재혁이 자세를 바꿔, 하진의 몸을 들어 올렸다. 하진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였다. 맞닿은 가슴에 예민한 유두가 비벼졌다. 하진은 아래에서 찔러 들어오는 페니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평소보다도 더욱 깊게 들어오고 있었다.
“아, 어떡해…… 흑, 아, 응, 응!”
응접실에서 윤민형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진이 재혁의 위에서 흔들릴 때마다 스치는 살갗에 페로몬 향기가 더 진해졌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강한 쾌감이 들었다. 둘은 미친 듯이 서로를 탐하고 몸을 섞었다. 자신을 꿰뚫을 것 같은 페니스에 하진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하읏, 아흑!”
재혁이 하진의 허리를 세게 잡아 자신의 위로 내리꽂자, 머지않아 하진이 사정하며 정신을 잃었다.
* * *
방 안으로 가득 차 있던 페로몬 향기가 잠잠해지고, 코끝으로 커피 향기가 돌았다. 흰 이불 아래 배꼼 나온 흰 손가락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멀어져 있던 하진의 의식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챗살처럼 가지런히 퍼져 있는 하진의 속눈썹도 파들거리며 흔들렸다.
“……괜찮아?”
낮게 어르는 듯한 익숙한 목소리. 재혁의 목소리였다. 낯익은 음성에 하진의 고개가 살짝 움직이며 반응했다. 사슴처럼 길게 내어진 목덜미 아래로 재혁의 손이 파고든다. 서늘한 체온이 기분 좋게 하진을 감싼다. 하진은 눈도 뜨지 않은 채 고개를 더 숙여 재혁의 팔뚝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익숙한 페로몬과 체온에 안심한다.
“열이 있는데.”
재혁의 큰 손이 하진의 이마를 덮는다. 몽롱한 가운데 시원한 체온이 닿으니 하진은 무의식중에도 재혁에게 매달린다. 하진이 가늘게 눈을 떠 재혁을 바라보았다. 정신을 잃었던 동안 재혁이 씻겼는지 하진은 배스가운을 입고 있었고, 재혁도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하아. 하진이 가쁜 숨을 뱉는다. 내뱉어지는 숨이 더웠다.
“기다려.”
황 박사 불러야겠어. 재혁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주치의를 호출하려 하진의 이마에 얹은 손을 떼어내자, 하진이 재혁의 팔을 다시 잡아끌었다.
“……싫어.”
열에 취한 눈이 깜박거린다. 엄청난 고열은 아니었지만, 재혁은 의사의 처방이 필요하다 여겼다. 긴 도피생활과 출산으로 약해진 몸은 아직 강도 센 섹스를 견딜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진이 재혁의 팔을 더 끌어다 다시 자신의 이마 위로 손을 얹게 한다. 재혁은 그런 하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가지마…….”
열병으로 자신이 뭐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럼에도 재혁은 다시 하진의 말에 따라 하진의 옆으로 침대에 걸터앉았다. 커다란 손이 하진의 이마를 덮고, 그리고 뺨을 매만졌다. 하진은 그 손길이 기분 좋은 것처럼 가만히 눈을 감았다가, 이따금씩 열에 취한 눈을 떠 재혁을 확인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계속된 적막에 아기방에 들어가 있던 시터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방을 나간 줄 알았는지 시터는 아직도 재혁이 방 안에 있는 것을 보고는 적잖이 놀라 한다.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숙이려 하자, 재혁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필요 없다는 사인이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나가신 줄 알고…….”
“괜찮아요. 그보다 이 사람 몸이 안 좋으니 나가서 정 비서한테 황 박사 좀 부르라고 해요. 아이는 당분간 전에 쓰던 방에서 돌보고.”
“알겠습니다, 대표님.”
잠이 든 아이를 안은 시터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섰다. 말소리에 잠에 깼는지 다시 눈을 뜬 하진이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재혁을 보고 있다.
“……미워.”
붉게 열 오른 입술이 작게 오물거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재혁은 놓치지 않는다. 분명 밉다고, 그렇게 말했다. 재혁의 눈이 일렁였다.
“미워, 당신…….”
“…….”
“아기도 못 보게 하고, 아기…… 우리 아긴데…….”
하진의 눈이 다시 천천히 감기자, 하진이 뺨을 기댄 재혁의 손바닥 안으로 축축한 물기가 찼다. 재혁은 내색하고 있지 않았지만, 심장이 빠르게 내려앉았다. 평소 냉정하고 냉소적으로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요동친다.
“……재혁 씨는, 몰라.”
“뭐를.”
“정말 몰라…….”
흐느낌도 없이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눈물이 샜다. 유리구슬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재혁을 향한다. 열에 취해 초점이 비틀려 있는 얼굴마저도 은근히 알파의 색욕을 자극하는 얼굴이었다. 어떤 긴장감에서였는지 재혁이 목울대를 넘기고 하진의 몸쪽으로 손을 디뎌 하진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바라본다. 하진의 작은 숨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싫어…… 나 너무 싫어…….”
침대에 디딘 재혁의 손등 위로 핏줄이 비쳤다. 하진은 작게 도리질을 친다. 싫다는 말에 재혁의 신경이 예민하게 날이 섰다.
“뭐가.”
아픈 사람을 두고 열을 내는 것도 우스운 꼴이었으나, 평정심을 찾을 수는 없었다. 재혁이 열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하진에게 답을 종용했다.
“……내가, 너무 싫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재혁 씨는 몰라…….”
“윤하진.”
하아. 완전 어린애랑 대화하고 있는 기분이다.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다시 재혁이 하진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싫어?”
다시 또 하진이 도리질을 친다. 도리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재혁이 답답하다는 투다. 왜 몰라줘. 내가 이렇게 힘든 걸 왜 몰라줘. 하진은 재혁에게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것이다.
“그럼.”
“…….”
순간 재혁의 한쪽 눈이 좁혀졌다. 그 잠깐 사이 뇌리를 스치는 인물이 있었던 탓이었다.
“윤민형?”
하진이 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민형을?
응접실에서 윤민형을 마주했을 때, 이상할 정도로 굳어버린 하진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재혁이 하진의 양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고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줄줄 흐르던 눈물이 분홍빛으로 열이 오른뺨을 적시고 있었다.
“무서워…….”
“뭐가 무서워.”
다시 살짝 떠진 하진의 눈이 재혁과 마주쳤다. 하진은 그사이에도 금방 눈을 회피해버린다.
“윤하진.”
“싫어, 내보내…….”
의식이 제대로 있지 않은 상태에서도 하진은 재혁에게 털어놓지 않는다. 재혁은 마음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해져 왔다. 자신이 모르는 윤하진과 윤민형 사이의 관계는 대체 무엇일까. 윤민형을 이토록 싫어하는 윤하진이라니.
“약속해줘, 응?”
다시 눈을 뜬 하진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애원한다. 재혁은 당할 도리가 없었다.
“알겠어.”
그때서야 하진은 안심한 듯 눈을 내리감는다.
* * *
황 박사가 다녀간 뒤, 하진은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여전히 재혁은 간밤에 하진이 자신에게 하던 애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재혁이 손끝으로 계속 책상 위를 두드렸다. 돌아온, 아니 다시 잡아 온 윤하진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퍼즐처럼 남아 있었다. 윤 사장도, 윤민형도, 최 회장과 이시연까지도 모두 윤하진이 야망 때문에 벌인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혁이 보는 하진은 도무지 부나 권력을 좇는 것 같지가 않았다. 오히려 흘러가는 대로 자신에게 오는 풍파를 안간힘으로 견디고 있는 사람 같다.
재혁은 자신이 무언가를 빠트린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제 윤민형의 이름을 듣자마자 잘게 떨리던 몸을 기억한다.
윤민형…….
하진이 그렇게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싫어하는데, 아무리 하진과 형제간이라고는 해도 계속 같은 집에 둘 생각은 없었다. 윤민형은 계열사 호텔에서 지내게 하면서 감시를 붙여두었다. 윤민형에게서 들어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대표님.”
비서팀의 신입 비서 하나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재혁이 심드렁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대원그룹 최준원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
언제 한 번 약속을 잡자고 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미리 언질을 받은 바는 없었다. 재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로 달갑지 않은 손님인 까닭이었다.
곧 마른 몸의 비서 뒤로 준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 재혁이 준원을 노려보듯 쳐다보며 앞의 소파를 말없이 손으로 가리켰다.
“차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차는 내올 필요 없어요.”
재혁이 잘라 말했다. 당황한 비서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종종걸음으로 대표실을 나갔다.
“성질 하고는. 차 한 잔 주기가 어려워?”
“차 나눠 마실 정도로 달가운 사이 아니잖습니까.”
재혁이 준원이 앉은 소파 맞은편으로 앉으며 말했다. 재혁이 준원을 응시하자, 준원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들었다. 하진이 돌아온 거.”
“정말 몰랐습니까? 하진이, 대원 쪽에 있던 거.”
“나도 몰랐어. 알았다면 하진이 되찾은 건 네가 아니라 나였을 거다.”
죽은 최 회장과 최준원은 이미 부자간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라 실질적으로 절연을 한 관계나 다름없었다. 준원의 말에, 준원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재혁 앞으로 준원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반지였다.
“뭡니까.”
“뭔지 몰라?”
재혁도 알고 있는 반지였다. 재혁의 모친인 선경이 골라주었던 하진의 결혼반지…….
재혁이 말없이 반지를 응시하고 있자, 준원이 그 옆으로 작은 USB 하나를 올려두었다.
재혁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다이아 반지와 USB를 한 번 보고는, 다시 준원을 바라보았다. 겨우 이걸 건네주자고 약속도 없이 여기까지 왔을 리가 없는데. 재혁은 목이 타는 것 같아 손을 뻗어 넥타이를 헐겁게 한다.
“반지 주려고 온 건 아닌 것 같고.”
“반지도 맞아. 이거 결혼반지 아닌가?”
“여러 사람 손 타서 굴러온 거, 별로 달갑지 않은데요.”
다이아 크기가 워낙 컸기 때문에 재혁이나 준원에게도 가벼운 가격의 것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런 보석류의 진정한 가치는 가격보다도 희귀성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재혁은 지금 준원에게서 건네지는 저 반지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았다. 결국, 최 회장 쪽으로 흘러갔다가 돌아오는 것일 텐데, 저것을 다시 하진의 손에 끼운다는 생각을 하니 불쾌해지는 것이다.
예상외로 차가운 홀대를 받게 된 다이아 반지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다. 재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준원을 보는데, 준원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여러 사람 손 타서 굴러온 거…….”
“반지 같은 건 새로 사서 끼워주면 그만입니다.”
“……그럼 내가 가져가도 되나?”
재혁과 준원의 눈이 마주쳤다. 고성이 오간 것은 아니지만 팽팽하게 알파의 페로몬이 맞부딪친다. 다시 자신이 가져가겠다는 말은 예상외였다. 재혁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재계서열의 최상위에 있는 최준원이, 다른 알파의 오메가가 꼈던 반지 정도가 아쉬울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윤하진.”
“뭐?”
“윤하진, 내가 가져가도 되냐고.”
하! 재혁이 황당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점점 더 알 수 없는 소릴 지껄이고 있다.
“무슨 미친 소립니까.”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다른 비서 하나가 대표실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든 트레이에는 생수와 아마도 차가 들어있을 찻잔이 있었다. 재혁이 바로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해 소리친다.
“나가!”
들어오자마자 들린 재혁의 노기에 사색이 된 비서가 트레이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바로 다시 대표실을 나갔다. 준원이 손을 들어 이마를 긁적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재혁과 준원 사이로 긴장과 적막이 흘렀다. 닫힌 문에서 다시 준원에게로 시선을 돌린 재혁이 준원을 찢어 죽일 기세로 준원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진이 돌려줬으면 한다.”
“돌려줘?”
“하진이가 낳은 아이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건지.”
재혁이 짜증이 난다는 듯 다리를 꼬며 준원의 말을 잘랐다. 유전자 검사를 아직도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하는 말이었을까. 하진이 낳은 아이는 확실하게 재혁의 씨였다. 알고 있음에도 괜히 마음을 놓지 못한 재혁이 준원을 응시한다. 준원은 그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고 얘기하려던 것 같았다.
“……그래, 좋아.”
체념한 듯 준원이 테이블의 반지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재혁을 쳐다보았다.
“넌 그 애, 감당 못 해.”
“겨우 이런 얘기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겁니까?”
하진을 감당하고 안 하고는 자신이 결정할 문제였다. 이미 하진은 재혁이 선택한 반려였고 그것은 여전히 유효했다. 다른 알파가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재혁으로서는 몹시 불쾌감을 느꼈다.
“겨우가 아닐 텐데.”
“하, 언급할 가치가 없어서 그렇죠. 윤하진 서류상으로도 아직 제 오메갑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구요.”
“하진이가 원하기만 하면 혼인 무효소송 낼 거다. 내가 도와줄 거야.”
“뭐?”
순간적으로 눈이 돌았다. 재혁이 그대로 팔을 뻗어, 테이블 반대편에 앉아있는 준원의 멱살을 잡아 끌어당겼다. 중심을 잃은 준원이 테이블 위로 손을 디디고, 재혁을 마주 보았다. 분노에 잠식된 눈동자가 삼킬 듯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씨발, 네가 뭔데 그딴 소릴 해.”
재혁이 씹어 뱉듯이 말했다.
“하진이가 정말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니까.”
“씨발, 이제 와서 그딴 말이 통할 것 같아?”
“이 반지.”
“…….”
“남의 손 타고 굴러서 싫다고 했지.”
“말 돌리지 말고!”
“그럼 하진이는?”
그를 노려보는 재혁의 눈이 좁혀졌다. 남의 손을 타고 굴러서 싫다는 반지에, 하진을 빗대고 있었다. 재혁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 비유였다. 준원의 멱살을 잡은 재혁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딴 말을 자신 앞에서 최준원이 지껄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참을 수가 없었다.
“노망났던 그쪽 부친 말하는 건가?”
“…….”
“변태 같은 당신 부친이 하진이 손끝 하나 안 건드렸을 거라곤 생각 안 해. 그래서 뭐.”
재혁이 준원의 멱살을 잡은 손을 더 세게 쥐고 흔들었다.
“그래서 네가 책임지겠다고 지금 나한테 이렇게 하진일 입에 올리고 있는 건가? 씨발, 웃기지 마!”
“아버지.”
준원이 팔을 뻗어 자신의 멱살을 잡은 재혁의 손을 뿌리쳤다. 정갈하던 셔츠 앞섶이 엉망으로 구겨져 있었다.
“서재에서 나온 거다.”
그리고 아까 꺼내 놓았던, 다이아 반지 옆에 놓여있던 USB를 준원이 재혁 쪽으로 밀었다. 재혁은 노기로 흥분해서는 숨을 몰아쉬며 다시 그 USB를 바라본다.
“그쪽 집안에서 하진이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몰아붙였어. 너도 아무것도 모르고 팔려 온 오메가 상상했다면 틀렸어. 하진이, 살아보려고 너하고 결혼했던 거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겁니까? 이건 또 뭐고.”
이해가 가질 않는 말만 늘어놓는 최준원 앞에서, 재혁은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하진이, 계속 폭행당했던 것 같다.”
재혁이 숨을 멈췄다. 어떤 종류의 폭행을 말하는 것인지 재혁은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젊고 아름다운 오메가가 당했을 폭력이라면 뻔한 것이었다. 재혁의 손이 잘게 떨렸다.
“대체 무슨 소릴…… 알아듣게 설명해.”
“설명해도 넌 이해 못 해.”
“…….”
“그냥, 그 애 놔 줘라.”
불안하게 배회하는 시선을 거둔 재혁이 테이블 위의 USB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원도 재혁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재혁을 붙잡는다.
“내가 보고 판단할 겁니다.”
“보면. 네가 뭘 어쩔 건데. 그냥 그 애 놔 주라고!”
“그것도 내가 보고 나서 생각합니다.”
“하아, 재혁아.”
“이제 그만 나가요.”
작은 USB를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툭툭 불거져 나온 뼈와 핏줄이 위태롭다.
* * *
“요 며칠 좀 분위기 풀리나 싶었더니.”
“그러니까요. 대표님 완전 무서워요…….”
대원그룹의 최준원 회장이 나간 이후에도 살벌한 분위기는 쉬이 사그라들지 않았다. 비서팀 직원 두 명이 서로 눈치만 보면서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매너 있고 융통성 있는 대표라는 평을 듣던 재혁이었으나, 하진이 사라진 이후 비서팀은 실장급을 제외하고는 한차례 물갈이가 된 바 있었다.
“솔직히 대우는 좋은데…….”
다른 것도 아니고, 손님이 오셨기에 차를 가져간 것뿐인데 그렇게 소리를 지를 줄 누가 알았을까.
탁탁 서류를 정리하던 비서 하나가 한숨을 포옥 쉬는데, 그 순간 대표실 안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왔다. 벌떡 일어난 비서 둘이 시선을 맞춰보더니, 대표실로 뛰어들어간다.
“무슨 일…… 대표님!”
굉음에 놀라 대표실 문을 열어젖힌 비서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폭풍이라도 지나간 듯, 대표실 안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놀라 홉떠진 눈들이 온갖 서류들과 깨진 유리가 낭자한 바닥을 훑었다. 굉음의 출처를 찾은 비서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벌려진 입을 손으로 막았다. 강 대표의 자리에 놓여있던 커다란 모니터가 책상 아래로 던져져 화면이 깨져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강 대표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오만할 정도로 당당하고 여유로웠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강 대표는 일어선 채, 비틀거리며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덮고 있었다.
비서들이 뭐라 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굳어져 있는 가운데, 열린 문으로 정 실장이 들어왔다. 침착한 눈으로 대표실을 훑은 그가 강 대표의 옆으로 가 서며, 다른 비서들에게 나가라는 듯 손짓을 한다.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여전히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재혁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윤민형.”
억눌린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흐느낄 것 같다.
“내 앞에 데려와요. 지금 당장.”
불안한 눈으로 정 실장이 재혁의 몸을 살폈다. 유리에 베이기라도 한 건지, 재혁의 손에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정 실장은 차마 손의 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도 못한다. 위태롭게 서 있는 지금의 재혁에게는 그런 것을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마치 거대한 파도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 * *
커튼 너머로 내려오는 오후의 햇살에 하진이 푸스스 눈을 떴다. 황 박사가 수액을 다 맞고도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하진이었다. 저택은 늘 그렇듯 조용했다. 하진의 컨디션 문제로 아이가 다른 방에 가 있었기 때문일까. 오늘따라 더욱 사람 사는 냄새가 없는 곳처럼 비춰진다.
“일어나셨습니까. 첫 식사는 뭘로 가져다 드릴까요?”
하진이 일어나자, 저택의 상주 간호사가 하진의 곁을 지키고 있다 고용인을 호출한다. 이 모든 것이 강재혁의 취향일까. 집 안의 고용인 모두는 시계 속 태엽처럼 움직였다.
“별로 생각 없어요.”
“대표님께서 일어나시면 꼭 식사 도와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새벽 내내 수액을 맞았던 탓인지 정말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계속 거절하면 자신보다도 고용인들이 불편해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팬케이크랑 커피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식당에서 먹을게요.”
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 바깥에 있던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다. 현재는 재혁이 저택 안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그렇다고 경호원의 시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었다. 하진이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있는 경호원들을 지나쳐 방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를 따라 나오자, 고풍스럽게 장식된 발코니와 계단, 그리고 1층이 내려다보인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에 온 이래로, 단 한 번도 이곳을 느긋하게 돌아다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1층 식당으로 내려가려던 하진이 다시 발을 돌린다. 2층 곳곳을 한번 보고 싶었다. 저택은 규모에 걸맞게 고가의 장식품들이나 그림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미술을 전공했던 하진으로서는 눈길을 끄는 것들이 아닐 수 없었다.
긴 복도에 길게 걸려 있는 유화를 바라보던 하진이 순간 발을 멈췄다. 잊고 있었다. 윤민형이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걸. 하진이 불안해하며 고개를 돌리자, 그 뒤 조용한 걸음으로 하진을 따라오던 경호원과 눈이 마주친다.
“저, 그 사람 어디 있나요?”
“누구 말씀이십니까?”
“윤민…… 아니 제, 형이요.”
형. 그를 그렇게 묘사할 때마다 입안에 가시가 돋치는 것 같다. 모래를 삼킨 듯 입안이 까끌거렸다.
아. 그의 행방을 알고 있는 듯, 경호원이 기색을 밝힌다.
“오늘 아침에 바로 거처 옮기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TS 호텔로.”
“그래요…….”
무슨 일이든 윤민형과 한 공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다행이었다. 하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재혁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아침부터 윤민형의 거처를 옮기게 했을까. 불안한 상상을 하게 되는 하진이다. 자신이 어제 열에 취해 사실대로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았을까 싶은…….
어느새 복도의 끝에 다다른 하진이 어떤 방 앞에 섰다. 하진의 방 반대 방향에 위치한 방이었다. 하진이 문고리를 잡자, 경호원에게서 아, 하는 소리가 터졌다.
“왜요?”
“아닙니다.”
“여기 무슨 방인데요?”
저택은 넓은 만큼 비어있는 방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반응으로 봤을 때 빈방은 아닐 것이다. 하진이 눈을 굴리다, 다시 경호원을 올려다본다.
“제가 들어가면 안 되는 방이에요?”
“아뇨, 아닙니다. 그게, 대표님 방이셔서요.”
문고리를 잡았던 하진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간다. 문고리를 놓쳤던 하진이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바라본다. 생각해보면 늘 재혁이 방으로 찾아왔던 터라, 재혁의 방을 구경한 적이 없었다.
“강 대표가 제가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절대. 괜히 제가.”
“그럼 구경 좀 하죠, 뭐.”
괜한 오기였다. 언제나 하진을 침범하는 것은 재혁 쪽이었다. 한 번쯤은 하진도 그런 위치이고 싶었다.
“그럼 저는 바깥에 있겠습니다.”
신참내기 경호원은 재혁이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땀까지 흘릴 기세로 굳어 있었다. 하진이 그런 그에게 한 번 눈길을 주고는 문고리를 잡아 돌린다.
문이 열리고, 하진은 재혁의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톤으로 꾸며진 방 안은 재혁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진의 뒤로 문이 조용하게 작은 소리를 내며 닫혔다. 방 안에는 아직도 재혁의 향기가 남아있었다. 재혁과 함께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한쪽 벽면이 모두 책으로 가득 찬 서재 안쪽으로 침실이 들어가 있는 구조다.
하진은 천천히 몸을 돌려 서재의 벽면을 둘러보다, 그대로 멈춰 굳어버렸다. 재혁의 방 안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모두 하진도 알고 있는 그림들이었다. 하진은 말문이 막혔다. 저택의 주인이라면 응당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장식했을, 주인의 방이었다. 복도나 응접실, 식당에 걸려 있는 해외 유명 작가의 그림이나 작품이 아니었다.
모두 하진이 그린 그림이었다.
재혁을 떠나기 전에, 신혼집의 작업실에서 그렸던, 그리고 그리던 그림. 개중에는 하진이 결혼 전 전시회를 하고 팔았던 그림도 있었다.
하진은 말없이, 오랜만에 만나는 자신의 그림들과 마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재혁은 이 그림들을 보면서 지난 시간 동안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미워하고 증오하던 것처럼 굴었으면서,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쳐다봤으면서.
침실에는, 자신이 재혁을 생각하며 그렸던 푸른빛의 대형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킬 것 같은 물빛, 푸른 화염이다.
밖에 사람을 오래 세워둘 수는 없었다. 너무 오래 있다 보면 괜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진이 그림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림의 반대편에는 재혁이 평소에 썼을 넓은 침대와, 베드사이드테이블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진의 눈이 살짝 일그러진다.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간 하진이 그것을 집어 올린다. 그 반짝임의 정체는 만년필이었다. 촉 반대편에 작은 정방형의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흔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하진의 손끝이 만년필의 끝을 매만졌다. 갑자기 하진의 안으로 오래전의 기억이 쏟아져 내려왔다.
하진은 예전에도 이 만년필을 손에 쥔 적이 있었던 것 같다는, 그런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 * *
재혁의 옆으로, 차창이 빠르게 배경을 바꾸고 있었다. 재혁은 오늘에서야 받아본 하진과 민형의 통화 녹음본을 계속 되감아 가며 듣고 있었다. 재혁의 조각 같은 옆모습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진다.
[내가 지금 강 대표 집으로 갈 거거든? 내가 너 만나기만 하면 니 예쁜 구멍 다 찢기는 줄 알고 있어.]
“하.”
[강 대표가 지랑 내가 구멍 동서였던 거 알면 어떨 것 같아?]
“씨발!”
재혁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어폰을 잡아 뜯어 던져버렸다. 미칠 것 같았다. 준원에게서 건네받았던 USB에 담겨 있던 것은 하진의 영상이었다. 섹스비디오였다면 차라리 이렇게 분노하지는 않았으리라. 영상 속의 하진은 계속 울면서 거부하고 있었다. 명백한 강간이었다. 베타에게 열릴 리 없는 몸을 억지로 짓누르고 벌어지지 않는 몸 안으로 고깃덩어리 같은 성기를 쑤셔 넣었다. 결국, 하진이 피를 보고 기절할 때마저도 그 씹새끼는 웃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랬을까. 그리고 언제까지 그랬을까. 간신히 재혁은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는다. 큰 손이 가파른 호흡 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경기도의 한 폐공장에 다다르자, 차가 멈췄다. 재혁은 경호원들이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자신이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폐공장 안으로 들어서는 재혁의 뒤로 정 실장과 경호원들이 따른다. 묵직한 쇠문이 열리고, 어두운 폐공장 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그 한줄기 내린 빛 아래,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누워있는 남자가 보였다. 윤민형이었다.
“가, 가, 가…… 강 대표.”
여기저기 피딱지가 앉은 얼굴이 피를 토하며 재혁을 불렀다. 더 이상 허리를 곧추세울 힘이 없는지, 아니면 동정심을 자극할 생각인지 윤민형이 바닥을 기어 재혁의 발아래까지 왔다. 재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고, 곧 뒤에서 문이 닫혔다.
문이 다시 닫히면서 어둠이 완전히 빛을 삼켜버렸다. 동시에 윤민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크기를 늘려 어둠이 익숙해진 그의 동공 안으로 재혁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윤민형의 교활함이 이 일이 예삿일이 아님을 알게 했다. 재혁의 발아래 놓인 민형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나, 나는…… 강 대표, 내가 왜, 아아악!”
재혁의 구둣발이 윤민형의 손가락을 세게 짓이기자 윤민형에게서 듣기 싫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인이 만들었을 수려한 디자인의 구두 아래 피가 튀긴다. 좁지 않은 폐공장 벽으로 윤민형의 비명소리가 이리저리 부딪쳤다.
“왜인지는, 너가 더 잘 알 것 아닙니까.”
“으아아악! 몰라, 모른다고!”
재혁이 이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고 있었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눈은 뜨기 어려울 정도로 찢어져 부어 있었고 입에서는 계속해서 쇠 맛이 났다. 늑골이 부서지기라도 한 건지 가슴 쪽이 너무 아파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재혁의 구둣발이 거둬지자마자 윤민형이 잽싸게 손을 빼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젖은 얼굴에 피와 흙먼지가 묻어있었다.
“도박 좋아합니까?”
경호원이 재혁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윤민형이 떨며 위를 바라보았다. 재혁이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사냥용 장총이었다.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민형의 뇌리에 스치자 윤민형은 눈에 보일 정도로 떨었다. 딱딱딱딱, 이가 부딪친다.
“가…… 강 대표, 님…… 이게 왜…….”
“도박 좋아하냐고 물었습니다.”
재혁이 무슨 대답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민형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민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자, 재혁의 관자놀이에 핏대가 섰다. 민형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허으으윽!”
“대답.”
“좋아…… 조, 조조조…… 좋아합니다.”
“그래요. 계속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겁니다.”
재혁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민형은 그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에 오히려 절망을 느꼈다.
“이제 나랑 그 좋아하는 도박을 한다고 생각하세요.”
“그, 그게 무슨…….”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당신 생사가 걸려 있을 겁니다.”
예상외로 나긋한 재혁의 어투에 민형이 사정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피해서 마카오 갔을 때. 누구 돈으로 했습니까? 도박 말입니다.”
“예……?”
윤민형이 망설이는데,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윤민형의 얼굴이 한 쪽으로 날아갔다. 재혁에 의해 장총의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후려 맞은 것이었다. 윤민형의 이마를 타고 뻘건 피가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내가 지금 인내심이 없어요.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겁니다.”
“도, 도…… 돈은…….”
머리 굴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재혁이 차가운 눈으로 장총의 끝을 민형의 이마에 대자 민형이 발작할 듯 소리를 질렀다.
“최! 최 회장이었습니다. 대원, 대원…… 대원그룹 최 회장이…….”
“얼마를요.”
“사사사, 삼십이었습니다.”
“그래요. 삼십 억. 그럼 대가는 뭐였습니까.”
윤민형이 대답하지 못한다. 과연 어디까지 재혁이 알고 있는 것일까. 민형이 재혁의 얼굴을 살피지만 냉정해 보이는 그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민형에게서 대답이 없자, 재혁이 능숙하게 총알을 장전한다. 민형은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죽음의 공포가 목전이었다.
“살생에 별로 취미는 없지만, 사실 전 골프보다는 사격을 좋아합니다. 어릴 때부터 꽤 오래 해서 나름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데.”
“…….”
“요즘은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말이죠. 도통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재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민형의 눈이 불안하게 떨렸다. 피 묻은 손이 재혁의 바짓단을 쥐려는 찰나, 다시 재혁이 민형의 손을 구둣발로 짓이겼다. 악 소리를 내며 얼굴을 찡그리는 민형의 이마에 다시 총구의 냉기가 닿았다.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어도 오랫동안 쉬면 실력이 녹슬기 마련이죠.”
“흐으…… 강 대표님.”
“내가 실수로 쏴버릴지도 모르니, 조심해요.”
예를 들자면 윤민형 씨 머리통 같은 곳 말입니다.
재혁이 덧붙였다. 윤민형이 꺽꺽거리면서 통곡을 한다. 그럼에도 재혁의 낯빛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재혁이 그런 윤민형을 보며 품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작은 플라스틱의 스틱 형태를 한 것이었다.
“이거 뭔지 알고 있습니까?”
윤민형도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무려 삼십 억에 대원그룹의 최 전 회장에게 팔았던 USB였다. 윤민형의 얼굴에 사색이 드리운다. 강재혁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 알량한 목숨 건질 기회 주죠. 대신 잘 대답해야 할 겁니다.”
“흐으으으…… 대표님…….”
“뭐라 하면서 팔았습니까? 그 노망난 노인네한테.”
“허윽, 대표님, 저는…….”
텅! 엄청난 굉음이 민형의 가까이에서 터져 나왔다. 재혁이 천장을 향해 총을 쏜 것이었다. 민형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놀라 콜록거린다.
“다음엔 윤민형 씹니다.”
미쳤다. 완전히 미쳤다. 강 대표는 정말로 자신을 죽일 작정인 거라고, 민형은 생각했다.
“질문 바꿀까요?”
“헉…….”
“하진이 일 년 전에 사라졌을 때, 원인제공 한 게 윤민형 씨 맞습니까?”
“대표님, 악!”
재혁이 민형의 손을 짓이기는 발에 더욱 힘을 주자 윤민형이 비명을 질렀다. 손이 으스러지기라도 한 것 같았다. 꺼멓게 피가 터진 손이 너덜거린다.
“하진이 사라졌던 마지막 날, 윤민형 씨한테서 연락 받은 적이 있더군요. 내용 기억합니까?”
“아니, 아닙니다, 아니.”
“기억 안 나는 것 같아 말하자면, 그쪽 오피스텔로 오라고 문자 했었습니다.”
커헉. 윤민형이 엎드린 채 숨을 토하자 입술과 잇새로 피가 흘렀다. 재혁이 민형의 손등을 짓이기던 발을 떼, 발끝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 눕혔다.
“하진이가 답하지 않았길래 못 봤을 거라 생각했었습니다. 아니, 봤다 치더라도 형제간에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죠. 형제니까.”
“대표, 커헉!”
“여기 들은 영상하고, 그 문자하고 연관 있는 것 같다면 틀린 겁니까?”
재혁의 발이 이번에는 윤민형의 목 위를 내리눌렀다. 기도가 좁아진 윤민형이 연신 콜록거리며 몸을 바르작거렸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퍼렇게 올라온 낯빛이 가관이었다.
“언제부터 그랬습니까.”
“크헉, 컥……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 아아아아악!”
탕! 다시 한번 폐공장 안으로 총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천장을 향해 방아쇠가 당겨진 것이 아니었다. 총알이 윤민형의 발등을 꿰뚫고 바닥에 박혔다. 회색빛의 콘크리트 위로 선혈이 낭자하다.
“으아아아아아악!”
윤민형이 몸을 꿈틀거리며 자신의 다리를 부여잡았다. 재혁은 그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얼굴로 윤민형의 배를 걷어찼다.
“대체 언제부터!”
“아아아악! 미치…… 미친 새끼, 진짜 쐈…… 하윽, 흐아아악!”
윤민형도 이제는 독과 악만 남은 듯이 소리를 질러댄다. 그것을 지켜보는 재혁의 눈도 함께 돌았다.
“내가! 내가 혼자 뒈질 것 같아? 어! 씨발, 씨바알! 윤하진, 윤하진 그거 내 거야. 니 새끼가 아무리 잘난 알파라고 해도, 넌 나한테 진 거야. 알아 이 새끼야? 내가 지겹게 따먹은 윤하진, 네가……!”
재혁이 발로 윤민형의 얼굴을 짓이기며 입을 막았다. 하아, 하아. 안정을 찾지 못하는 재혁의 어깨가 크게 솟아올랐다가 내려갔다.
“이 새끼, 죽여요.”
“네?”
“죽이라고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까.”
재혁이 옆에 가만히 서 있던 남자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도저히 평정심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다 저 새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진이 자신을 떠난 것도, 그리고 자신이 하진을 잃고 괴로워했던 것도 모두 윤민형으로 말미암아 생긴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분노의 화살을 하진에게로 돌렸던 자신도 마찬가지로 혐오스러워진다. 재혁이 윤민형의 얼굴을 짓이기던 발을 떼고 뒤를 돌았다. 걸음이 비틀렸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다시 폐공장을 나가려는 재혁을 멈춰 세운 것은 윤민형이었다.
“씨팔! 그년이 작정하고 꼬시는데 어쩌라고!”
재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윤민형은 죽음 앞에서 되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안 먹는 게 좆병신이지!”
악을 쓰는 윤민형의 목소리에 재혁이 다시 몸을 돌려 윤민형 가까이로 걸어갔다.
“아니, 그냥 죽이면 안 되지.”
그냥 죽이는 정도로는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재혁이 천천히 목을 돌리며 피투성이가 된 윤민형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좋은 생각이 나서 말입니다. 윤민형 씨. 죽는 그 순간이라도 착한 일 좀 하고 죽어야 하지 않겠어?”
“아아아악!”
“세상엔 너 같은 쓰레기 새끼들이 참 많거든. 지 욕정 채우자고 무고한 사람 데려다가 스너프 필름을 찍는 새끼들.”
윤민형의 눈동자가 눈에 보일 정도로 요동쳤다.
“아, 으으…… 무슨 소리……”
“괜히 무고한 사람 건드리지 않게, 그쪽 하나 불살라 그런 성불구자 새끼들 좆을 세워주는 겁니다.”
“무, 뭐, 강…… 강 대표……! 아아아악!”
“그럼 그게 선행이 되겠지.”
재혁이 옆의 남자들에게 눈짓을 하자, 그들이 윤민형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폐공장 더 깊숙한 곳으로 그의 몸을 질질 끌고 갔다. 총알이 꿰뚫고 나간 발이 땅에 질질 끌리며 덜렁거릴 때마다 피로 자취를 남겼다.
“씨발, 손대지 마, 이 좆같은 새끼들아악!”
“걸작 하나 남기는 겁니다, 윤민형 씨.”
“강 대표, 강 대표! 내가, 내가 잘못했습니다. 강재혁!”
재혁은 그런 윤민형의 최후의 모습을 지켜보다 발길을 돌려 폐공장을 나섰다. 폐공장 바깥은 이제 제법 초봄의 기운이 느껴졌다. 햇살이 따갑게 재혁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그리고 나서 장기 브로커한테 넘겨요. 장기, 눈알, 피부 한 조각까지 저 인간 몸에서 멀쩡하게 남아있는 건 전부 싹 벗기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나머진 짐승 먹이로 주면 딱 좋겠군.”
다시 문이 닫힌 폐공장 안에서 작게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재혁은 폐공장을 한 번 쳐다보더니, 세워져 있는 세단 안으로 올라탔다.
* * *
바에 들어선 지욱은 안내에 따라 재혁을 만나자마자, 재혁의 손에 든 잔을 빼앗았다. 재혁이 이렇게 엉망으로 취할 때면 늘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은 지욱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완전히 취할 때까지 재혁이 술을 마실 때는 흔치 않았다. 그 빈도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하진을 만난 이후부터다.
“그만 마셔, 새끼야.”
잔을 빼앗기자마자 재혁이 눈을 돌려 지욱을 바라보았다. 계약과 조건, 대가로 점철된 알파의 세계에서, 지욱은 거의 유일하게 우정이나 사랑 따위를 믿는 천연기념물 급의 존재였다. 알파의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그런 감정들에 무감각하고 냉정한 재혁과 지욱이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낸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었으나, 지욱은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진정으로 재혁을 이해하는 사람은 자신뿐이라고.
“어, 왔어.”
재혁은 하진을 사랑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하진을 만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이런 재혁의 감정에 누구보다 놀라 하는 것 역시 지욱이었다. 자신의 오랜 친구인 재혁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이기지도 못할 정도로 술을 찾는 것도 늘 항상 윤하진 때문이었다. 결혼 전에는 자신이 오메가인 윤하진을 원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였다. 그래서 술의 힘으로 이성을 마비시키고 나서야 윤하진을 불러 곁을 채웠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는, 자신이 진정으로 윤하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술을 마셨다. 그때는 이미 윤하진이 재혁의 곁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해소될 방도가 없었다.
지욱은 다시, 결혼식 때의 재혁을 떠올린다. 하진의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린 베일을 걷고, 조심스럽게 이마와 입술에 키스하던 재혁을. 그건 이미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이었다.
“야, 강재혁.”
지욱이 잔을 빼앗자 그 옆에 있던 빈 잔에 다시 양주를 따라 입으로 가져가는 재혁에, 지욱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이제는 이렇게 술을 마셔도 재혁의 마음을 채워줄 사람도 없는데.
“……내 자신이 이렇게 싫은 건 처음이다.”
재혁이 그렇게 말하고 커다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오만하고 강인한, 우성알파 강재혁에게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재혁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지욱은 뭐라 재혁에게 말하려다, 그만두고 만다. 재혁은 지욱에게 어릴 적부터 항상 우상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무너지고, 힘들어하고,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해 불안해하며 방도를 헤매는 모습은 낯설기만 하다. 그 자신만만하던, 뭐든지 집어삼키려고 했었던 강재혁이.
“너…… 또 하진 씨 때문에 그러냐.”
믿기 어렵지만, 이 모든 것이 윤하진으로 인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지욱은 이제 윤하진의 존재가 달갑지만은 않다. 철옹성 같았던 자신의 우상을 이렇게 무너뜨린 인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낱 오메가가.
“이제 그만, 윤하진 씨 잊고…….”
지욱의 잊으란 말도 여러 번 들었던 내용이었다. 재혁은 자신의 얼굴을 감싼 손을 떼지도 않고,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찾았어.”
“뭐?”
하진이 돌아왔다는 것을 들은 바 없었던 지욱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하진이 찾았다.”
“……찾았다고? 어디서.”
찾았다면 더욱 이런 반응이어서는 안 됐다. 지욱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우성알파의 귀속품이나 다름없는 오메가가 일방적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토록 재혁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찾기는 찾았는데…… 어떡하지.”
“뭐가.”
재혁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내가 상처를 많이 줘서.”
“재혁아.”
지욱이 재혁을 돌아보자마자, 재혁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 같은 한숨이 터졌다. 오메가든, 여자든 자신의 침대를 데우는 액세서리로 생각해왔던 강재혁이, 자신의 오메가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지욱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강재혁은 정말로 윤하진을 사랑하고 있다고.
* * *
하진은 재혁의 서재에서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몇 개 뽑아두고 서재의 소파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재혁을 떠나 있는 동안, 책을 읽을 여유 같은 것은 없었다. 도망 다니고 있을 때에는 책을 구경할 새도 없었고, 대원의 본가에 있을 때에는 아이를 돌보고 최씨 일가의 눈치를 보느라 한가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책을 읽다가, 하진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면 자신이 그렸던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진이 짧게 대답하자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이 문을 열고 하진을 찾았다. 그러고 보니 바로 나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많이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하진의 옆으로는 핸드드립으로 내린 커피와 과일 몇 조각, 그리고 핫케이크의 흔적이 남은 그릇이 있었다. 하진이 식당으로 오지 않자 고용인이 올려보내 준 것들이었다.
“저, 대표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그래요.”
하진이 허벅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호원은 뭐라 더 말하려 망설이고 있었다. 하진이 무슨 내용이냐며 추궁하는 얼굴을 하자, 그가 어렵게 입을 다시 열었다.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대표님께서 취하셔서…….”
“취해요?”
하진이 조금 놀란 얼굴을 한다.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결혼식을 올리기 전, 재혁이 취한 모습을 몇 번 봤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재혁은 하진을 무자비하게 안았다.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아래로 침잠했다. 커다란 눈이 느리게 깜박일 때마다 긴 속눈썹이 파들파들 떨린다.
“내려가 볼게요.”
하진이 결심했다는 듯이 책을 정리하고 서재를 나섰다. 서재를 나오자 계단 아래로, 취한 재혁과 그를 부축하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하진도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재혁이 취할 때마다 하진을 불렀던, 그리고 재혁의 곁에 있었던 그의 친구였다. 하진이 천천히 계단 아래로 내려가자, 자신보다 작은 친구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거구의 몸이 움찔거렸다.
“오랜만입니다, 하진 씨.”
지욱의 인사에 하진도 고개를 숙였다. 지욱은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친구를 무너뜨리고 힘들게 하는 하진에 대해 원망의 마음도 가진 바 있었지만, 하진을 오메가라 폄훼하거나 무시하는 성정의 사람은 아니었다.
“저, 김지욱입니다. 예전에 몇 번 뵈었는데…… 기억하세요?”
하진이 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재혁에게는 강한 페로몬 향기와 함께 술 냄새가 났다. 이성이 마비되니 페로몬 조절능력도 확연하게 떨어진 모양이었다. 하진이 불안한 눈으로 재혁과 지욱을 번갈아 보았다. 취했음에도 재혁은 또렷하게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혁이랑 술을 좀 마셨는데, 재혁이가 많이 취했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하진이 눈짓을 보내자, 하진의 뒤로 서 있던 경호원이 지욱에게서 재혁을 받아 부축했다. 재혁이 비틀거리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고, 하진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지욱에게 고개를 돌렸다.
“재혁이, 걱정 많이 했어요. 하진 씨 사라졌던 동안이요.”
“…….”
“오늘은 정말 많이 괴로워하더라고요. 하진 씨한테 상처 많이 줬다고.”
하진이 시선을 떨궜다. 상처를 줬다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이렇게 할퀴고 상처를 주면서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것도 여러 날이었다. 하진은 지욱의 말에 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닫아버렸다.
“재혁이 정말 멋진 놈이지만, 나쁜 놈이기도 한 거 잘 압니다. 저 자식, 저 오래 알았지만 저렇게 망가진 모습 저한테는 너무 낯설어요. 하진 씨한테 무조건 재혁이 받아달라고 보듬어달라고 하는 거 못 할 일이라는 거 알지만…….”
지욱이 하진의 눈을 피하며 말을 흐렸다. 하진이 재혁을 무너뜨리는 존재라는 걸 알지만, 하진도 재혁의 곁에서 상처 입었을 거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죄송합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우성오메가와 결혼해서 우성알파를 낳고, 그리고 태성그룹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선언했던 재혁의 목소리를 지욱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그 우성알파가 우성오메가를 사랑하게 되어버렸다고, 그에게 그 사랑에 상응하는 사랑을 요구할 수는 없다. 지욱은 제대로 말을 맺지도 못한 채 다시 뒤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욱이 저택에서 멀어질 때까지, 하진은 오랫동안 문 앞에 멈춰 서 있었다.
* * *
가만히 멈춰 있는 하진의 눈앞으로 지난 시간들에 대한 회상이 흘러 지나갔다. 폭풍과 같았던 시간들이 지나간 이후, 남아있는 것은 폭설 가운데 남아있는 어린아이. 세상의 전부와도 같았던 생모를 잃고 망연해진 눈으로, 어린 날의 하진이 현재의 하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한 실내온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몸이 차가워지는 것 같은 기분에 하진은 괜히 자신의 팔을 감쌌다가, 어린 날의 환영을 외면하고 만다.
하진은 아마도 방금 전 재혁이 올랐을 계단 위로 걸음을 옮겼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어린 날의 자신, 그리고 생모의 마지막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무력한 몸 위로 쏟아지는 불안감에 하진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재혁을 다시 마주해서 이 불온함을 모두 떨쳐내고 싶다.
하진이 자신의 방이 아닌 재혁의 서재 쪽으로 향했다. 하진이 서재 앞에 서자, 때맞춰 서재 안에서 아까 재혁을 부축했던 경호원이 나왔다.
“아, 안에 대표님이 계십니다.”
“알고 있어요.”
하진이 짧게 대답하고는 서재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온통 재혁의 페로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들른 재혁의 서재였다. 들어오자마자 하진은 서재 벽에 걸린 자신의 그림들에 시선을 멈추었다가, 재혁을 찾았다. 하진의 등 뒤로 서재 문이 닫혔다. 경호원들도 굳이 그 안까지 따라오지는 않았다.
“……재혁 씨.”
재혁은 서재 옆 침실에 있었다. 커다란 침대를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것처럼 기다란 몸이 늘어져 있었다. 슈트는 물론이고 타이조차 풀지 않은 채였다. 하진의 목소리에 감았던 재혁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재혁은 하진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강인했던 눈매가 침잠해 있었다. 하진이 천천히 침실 안으로 들어섰고, 그런 하진을 재혁은 놓치지 않고 계속 눈으로 좇는다. 침실 안으로 온전히 들어온 하진의 뒤로, 청색의 빛이 타오를 듯 넘치고 있었다.
하진이 그린 그림을 보면서, 하진이 이렇게 돌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었던가.
“대체 얼마나 마신 겁니까.”
하진이 손을 뻗어 재혁의 타이를 풀어냈다. 가까이에서 본 재혁의 눈은 여전히 하진을 향하고 있었다. 달음박질이라도 한 것처럼 하진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재혁을 마주한 떨림 때문인지, 아니면 페로몬에 의한 생리적 현상인지, 그도 아니면 아까부터 하진을 지배하고 있는 불안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옷이라도 좀 벗고…….”
순간 재혁이 하진의 손목을 붙잡아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며 하진의 시야가 뒤집혔다. 등 뒤로 푹신한 침대가 감싸듯 하진의 몸을 지탱했다. 놀라 눈을 치켜뜨는 하진의 얼굴 위로 재혁의 얼굴이 겹쳤다.
“음…… 응……!”
말랑한 입술의 표피가 짓눌린다. 갑작스런 키스에 하진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재혁이 하진의 아래턱을 살짝 눌러 입을 벌리게 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재혁이 파고들었다. 치아 끝이 살짝 부딪힌다 싶더니 이내 능숙하게 재혁은 혀를 섞었다. 재혁은 얼마나 술을 마셨던 건지 타액은 알코올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진의 몸 위로 재혁의 단단한 몸이 겹쳐졌다.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하진은 재혁의 키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수록 마음속 불안은 점점 부피를 늘려갔다.
“콜록, 콜록…….”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젖어서 소름 끼칠 정도로 야한 입술로 하진은 기침을 했다.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깨끗한 눈동자가 재혁을 향한다. 아. 재혁은 가슴 속 어딘가가 뽑혀져 나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낀다.
재혁의 숨은 거칠었고, 하체는 완전히 발기해있었다. 재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바로 아래에 있는 하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오메가라서 느끼는 단순한 소유욕 같은 것이 아니었다.
하진도 재혁을 바라보았다. 맞닿은 재혁의 흥분을 모르지 않았고, 자신을 이렇게 올곧게 원하는 재혁을 모르지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의 재혁에게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재혁의 눈에 죄책감이 어려 있었다. 하진은 다시 자신과 재혁의 앞에 나타났던 윤민형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꾸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게 된다.
“하아, 하진아…….”
재혁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에 절망감이 젖어 들었다. 가까이에서 내뱉는 재혁의 숨에는 술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재혁이 자신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차라리 재혁이 자신을 원망하는 편이 낫다.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재혁이 괴롭게 말을 뱉었다. 취한 목소리가 괴롭게 일그러졌다.
“너는…….”
“…….”
재혁이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재혁은 나를 왜 이렇게 무능한 놈으로 만드냐고 하진에게 털어놓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하진이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취한 와중에도 재혁은 내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장을 칼로 후벼 파내는 것 같다.
“하진아.”
“…….”
“미안하다, 정말…….”
재혁이 모든 걸 다 알아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진은 불안을 품에 안은 채 생각했다.
그대로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하진이 재혁의 몸을 밀어낸다.
“당신 왜 나한테 사과하고 있는 거야.”
목소리에 원망이 가득했다. 어느새 작은 뺨에 눈물이 넘쳐흘렀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안다고 해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차라리 오메가 따위가 주제도 모르고 콧대만 높다고, 그렇게 생각하길 바란 사람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재혁이 자신과 윤민형과의 관계를 알아버린 것 같다는 불안감이 커졌다. 하진은 그에 반발하기라도 하는 듯 재혁을 밀치고 소리친다.
재혁을 밀치는 손길에 재혁은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하진이 몸을 일으켜 젖은 눈으로 재혁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른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재혁이 정말 그 사실을 알았다면 재혁도 자신도 견딜 수 없다.
“미안하다.”
“대체 왜! 왜 사과하고 있냐고!”
하진이 울며 주먹을 쥔 손으로 재혁의 어깨와 가슴을 때렸다. 아이처럼 엉엉 쏟아내는 울음에 숨이 막힌다.
“하진아.”
“왜 사과해요, 나한테.”
작은 뺨이 흘러넘친 눈물로 온통 젖어있었다. 재혁이 손을 들어 하진의 뺨을 가만히 닦아준다.
“다, 알아요?”
재차 물어오는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돌아온 윤민형이 혹시라도 재혁에게 그간에 있던 일을 모두 말한 건 아닐까. 아니면 돈이라도 받고 영상을 팔아넘긴 건 아닐까. 아니, 그렇다면 그가 이렇게 슬퍼하고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속였다고 화라도 내지 않았을까. 헛된 바람과 망상을 하며 하진이 재혁의 눈을 바라본다. 재혁의 눈도 하진과 마찬가지로 떨리고 있었다.
“강재혁 씨.”
“너한테 심하게 했던 거.”
“…….”
“너 괴롭혔던 거, 전부 다.”
재혁은 이제야 비로소, 하진이 숨기고 싶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알아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알아버렸다는 그 사실조차도 하진이 상처 입을까 숨기고 있었다. 재혁이 하진을 끌어안는 것에, 하진은 순순히 재혁에게 안겼다.
지치지도 않고 하진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재혁이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그저 불안해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모른 채 하진은 절망했다.
“……당신이 모르길 바라.”
하진이 건조하게 말했다.
정말로 모르길 바랐다. 재혁이 자신을 동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순간 하진의 머릿속에 재혁의 만년필이 떠올랐다.
재혁과 자신이 이렇게 만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까. 자신의 운명이 이렇게 비극적이지 않을 수 있었다면, 재혁과 자신은 어땠을까.
계약에 의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평범하게 그와 만났다면…….
* * *
딱 한 번, 하진이 윤 씨 일가에서 도망쳤던 적이 있었다. 하진은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공항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가진 돈이라고는 윤일환 사장의 서재에서 훔친 돈 이백오십 만원이 전부였다.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는 도저히 살 수가 없을 것 같아 스스로 목숨을 끊어보려고도 했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카운터로 달려가 가장 빠른 비행기 편도 행을 끊었다. 바르셀로나행이었다.
비행기로도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이다. 하진은 진심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이제 정말로 윤민형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하진은 생각했다. 애매한 평일 오후 시간이어서 그런지 공항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없었다. 바로 발권까지 마친 후, 하진은 출국장으로 들어가려 몸을 돌렸다. 아직은 하진을 찾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빨리 이 자리를 떠야만 했다.
“아!”
하진은 몸을 돌리자마자 누군가와 부딪쳐 바닥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눈앞에 바닥이 있었다. 순식간에 몸을 감싼 것은 두려움이었다. 혹시 아버지가 나를 찾은 건 아닐까. 자신과 부딪친 사람도 아버지가 보낸 사람은 아닐까…… 하진이 바닥에 쓰러진 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청량한 향기. 자신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바뀌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하진의 시야 안으로 누군가가 내민 손이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진은 잠시 동안 그 손을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하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알파였다.
고개를 들자, 조각처럼 깎은 듯한 미남형의 얼굴이 있었다. 키가 어마어마하게 컸고, 남자의 얼굴은 하진이 생각하던 것과는 달랐다. 자신을 철저하게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던 다른 알파들의 표정과는 달랐다. 하진은 망설임을 접고 남자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괜찮습니다.”
손을 잡고 있자니 손을 잡은 곳부터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우성알파. 하진은 본능적으로 계급의 우위를 깨닫는다. 이상한 것은 그 이후였다. 남자가 하진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잡은 손을 놔주지 않고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남자의 악력이 더 셌기 때문에, 하진은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까지 써 가며 남자의 손을 떼어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남자는 잘생긴 얼굴로 여전히 하진을 바라보더니,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조금 일그러뜨렸다.
“이쪽입니다.”
그때, 뒤에 서 있던 스튜어드가 끼어들었다. 남자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졌다.
“미안합니다.”
남자의 저음에 귓바퀴가 타는 것 같았다. 불안했던 마음에 더해진 긴장감에 심장은 더 빠르게 뛰었다. 쿵쿵거리는 심장에 숨이 가빠지는 것 같다. 하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떨구는데,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가 반짝였다. 하진이 다시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작게 사파이어가 박힌 만년필이었다.
“저기……!”
이럴 여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하진은 다시 몸을 돌려 남자를 좇았다.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 이상이 큰 남자는 다행히 인파 속에서도 눈에 띄었다.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리고 그때, 남자의 툭 튀어나온 뒤통수를 향하던 하진의 시야 안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가로막았다. 하진의 큰 눈이 더욱 커져서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다.
“도련님.”
하진을 마크하던 전담 경호원들이었다. 빠르게 현실로 다시 추락해버린 하진은 온몸에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사장님께서 많이 화나셨습니다.”
하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진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경호원의 뒤로, 남자가 뒤를 돌아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진은 뒷걸음질 친다.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윤민형의 얼굴과 손길이 스쳤다. 하진은 어금니를 문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 자꾸 이러시면.”
경호원 하나가 하진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손님?”
그때, 한 스튜어디스 한 명이 다가와 하진에게 말을 걸었다. 커다란 눈의 그녀는 흘깃 옆의 경호원들을 쳐다본다. 하진이 탈 항공사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비행기 승객으로 보이는 하진이 곤란해 보여 말을 건 것이었다.
“아니에요.”
하진이 대답했다. 도움을 받고 싶지만, 실질적으로 받을 수 있는 도움이라는 게 있을 리 없었다. 여기서 도움을 요청한다면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을 오히려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하진은 알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까요?”
그녀는 여전히 탐탁지 않다는 듯 하진에게 재차 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하진이 들고 있는 탑승권에 머물렀다.
“이거.”
끝났다.
자신을 데리러 온 경호원들을 앞에 두고, 자포자기해버린 하진이 스튜어디스에게 방금 주웠던 만년필을 내밀었다. 고가로 보이는 만년필을 한 번 보더니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쪽 키 큰 남자분께서 떨어뜨리셨어요.”
“달리 도와드릴 일은 정말 없으신가요?”
“……네.”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스튜어디스가 하진에게서 만년필을 받아들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남자를 향해 다가가는 그녀의 구두 소리가 바닥을 울린다.
“사장님께는 제가 잘 설명해드리겠습니다.”
“…….”
멀리서 스튜어디스가 아까의 남자에게 다가가 만년필을 건네는 것을 본 하진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지옥으로 갈 시간이었다.
* * *
차 안에는 익숙한 오페라 선율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Lascia Ch’io Pianga(울게 하소서).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였다.
울게 하소서, 내 슬픈 운명.
한숨짓네, 내 슬픈 운명.
고통의 끈을 끊어 주소서.
자비를 내려 다 끊어 주소서…….
하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초봄의 푸른 바다가 창밖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눈이 부신 푸른빛이었다.
꽤 긴 시간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재혁이 소유하고 있는 별장이었다. 별장 가까이로 맞닿은 해변에서 바다 소리가 났다. 하진이 차에서 내리자, 별장 안에서 재혁이 걸어 나왔다. 재혁을 확인한 기사는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는 다시 차를 몰고 갔다. 갑작스럽게 언질도 없이 도착하게 된 곳 치고는 먼 곳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말도 없이.”
아직은 쌀쌀한 꽃샘추위가 뺨을 간질였다. 하진이 몸을 움츠리자 재혁이 하진의 코트를 여며 주었다.
“오늘 출장지랑 가까워서.”
“…….”
“그리고 보여주고 싶었어.”
하진이 고개를 들어 재혁과 눈을 마주했다. 하진은 그새 찬바람에 눈언저리와 귓바퀴가 빨갛게 색이 올라 있었다. 재혁이 손을 들어 하진의 양 귀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하진과 재혁 사이에는 불문율 같은 것이 생겼다. 하진의 숨기고 싶은 과거에 대한 것이었다. 재혁은 이미 알고 있었으나 말하지 못했고, 하진 역시 재혁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했지만 내색하지 못했다.
철썩, 파도 소리가 재혁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 들어왔다. 재혁과 이렇게 평소와 다른 공간에 있다는 것 자체가 생경한 경험이었다. 하진은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마주한 재혁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재혁의 얼굴이 다가온 것은 순간이었다. 천천히 가까워지는 재혁의 얼굴을 하진은 피하지 않았다. 재혁이 고개를 숙여 하진의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입술에 닿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안타까운 키스였다.
천천히 입술이 다시 떨어지고, 하진의 귀를 감싸고 있던 재혁의 손이 하진의 턱 끝을 스치고 내려갔다.
“좀 걸을까.”
태성의 사유지인 해변은 사람 한 명 없이 조용했다. 하진이 조금 머뭇거리자 재혁이 하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넣었다. 커다란 손안에 싸인 손은 식었던 것이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다시 데워졌다.
“우리 할아버지가 나한테 주신 곳이야.”
하진이 재혁을 따라 걸으면서, 재혁의 옆모습을 훔쳐보듯 바라보았다. 걸을 때마다 자박자박 뭉그러지는 모래가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내가 여길 좋아했거든. 그래서 다른 좋은 거 다 형부터 챙겨줘도, 여긴 나한테 주셨어.”
바닷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다.
“그래서 하진이 너한테도 보여주고 싶었고.”
재혁이 고개를 돌려 하진을 바라본다. 마주 잡고 있는 손의 체온이 너무나 따뜻해서, 하진은 모든 것을 전부 잊어버리고만 싶었다. 자신의 끔찍한 과거도, 그리고 재혁이 그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모두.
“차갑다…….”
바다를 얼마 만에 본 건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하진은 부러 바닷물이 밀려들어 젖은 모래 쪽으로 가 발자국을 남겼다. 바닷물이 얕게 밀려올 때마다 발이 다 젖어 드는 것처럼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바다, 바다에 왔구나. 그 냉기를 느낄 때마다 하진은 진짜 자신이 바다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이리 와, 젖어.”
재혁이 하진의 손을 끌어오지만, 하진은 고집을 부린다. 마지막으로 본 바다가 언제였더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항까지 도망쳤을 때,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에 택시 안에서 보았던 것이 떠오른다. 아. 그리고 서울에서 도망쳤을 때. 바다를 보러 송정까지 내려갔었다. 마음 편히 바다를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질 않아서 스치듯 본 것이 다였지만…… 하진에게 바다의 기억은 ‘도망’과 관련된 것들뿐이다.
아.
정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바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린 하진이 걸음을 멈췄다. 푸른빛 끝으로는 드넓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딱 한 번, 엄마와 바다에 온 적이 있었다. 학대와 집착을 오가던, 하진에게는 제대로 따뜻한 사랑을 주지 않았던 엄마였지만 바다에 왔을 때 엄마의 얼굴은 아직도 기억이 났다. 그때만큼은 엄마도 다정했고, 눈부셨다.
“엄만 잘 있을까.”
하진이 혼잣말하듯 말했다. 윤 사장에게 팔아넘기듯 입양 보낸 엄마지만, 하진은 엄마를 버릴 수 없었다. 윤 씨 일가에게서 사람 취급받지 못하고 길러졌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 있다면 오로지 엄마였다. 항상 하진이 받았던 단 한 가지 위안도, 그것이었다. 자신이 윤 씨 일가에게 가치 있음으로 인해 엄마에게 평온한 삶이 보장된다는 것.
“우리 엄마요. 나 낳아준 엄마.”
하진이 멈춰 서서 재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윤일환 사장이 구속되어버린 지금, 누가 그녀를 돌봐주고 있을지 하진은 불쑥 걱정이 든다.
“……찾아줄까.”
재혁의 말에 하진은 대답 없이 그냥 고개만 끄덕거렸다. 절대 사랑하지 말라고, 떠나는 그 순간 자신에게 말했던 엄마였다. 가장 사랑해서는 안 될 우성알파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지금의 자신을 보면, 엄마는 뭐라고 말할까.
“아주머니도 본 지 오래됐는데.”
잠시 동안 하진을 아껴주었던 윤일환의 처를 말하는 것이었다. 하진이 그녀를 엄마로 대하는 것을 윤민형이 발작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하진은 아직도 엄마라고 표현하기를 어려워한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병문안 한 번도 마음 편히 갈 수가 없었다.
“잘 계셔.”
재혁이 대답하자 하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재혁을 돌아보았다. 친모에 대한 이야기도, 양모에 대한 이야기도 이제야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들인데 재혁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건지.
“다음에 한 번 같이 병원 가볼까.”
“…….”
다음. 우리에게 다음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다음도, 있는 걸까. 하진은 차마 대답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재혁의 모친인 선경을 뜻하는 물음이었다. 오메가인 하진을 진심으로 아껴주었던. 도망가 있는 동안에도 선경 생각이 많이 났었다.
“엄마도 잘 계셔.”
“그렇구나.”
“너 많이…… 보고 싶어 해.”
자신을 보고 싶어 했다는 말에 하진은 목이 메는 것 같아 시선을 바다로 돌렸다. 어느덧 뉘엿뉘엿 지고 있는 해가 바다에 비춰지고 있었다.
“서울 가면, 엄마한테도 갈까?”
“응.”
“재하도 보여드릴 겸.”
하진이 고개를 다시 끄덕거렸다.
쏴아아. 다시 파도가 밀려들어 왔다. 젖은 모래를 밟고 선 하진과 재혁의 바짓단을 적시고 다시 파도는 쓸려 내려갔다.
“그러게 나오라니까.”
얼음장 같은 바닷물이 신발 안으로 스며들었다. 재혁이 하진의 어깨를 잡아 위쪽으로 올라오게 한다. 재혁과 하진의 발자국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형은……?”
돌아본 재혁의 눈이 격양되어 있었다. 그 쓰레기를 아직도 형이라고 말하는 하진의 미련스러움에 화가 났다. 정작 그의 안부를 물으면서도, 하진의 눈은 텅 비어있었다.
“그건 왜 물어.”
“갑자기, 사라졌잖아.”
“못 들었어? 호텔에 가 있으라고 한 거.”
그렇구나. 다시 하진이 작게 끄덕거린다. 넋이 나가 있었다. 저렇게 눈에 보이는 걸, 왜 여태까지 몰랐을까. 심장을 뜯어내는 것 같은 괴로움에도 재혁은 하진에게 내색하지도 못한다.
“형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하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재혁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모를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윤민형이 아직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나한테 아직 뜯어갈 것들이 많아서. 그래서.
“글쎄.”
그렇게 말하며 재혁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
하진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이 느껴지자, 재혁이 더 세게 하진의 손을 잡아 쥐었다.
“무슨 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하던가?”
“…….”
하진이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이 일몰의 빛 아래로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앞으로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왜?”
“다시 마카오로 간다던데. 부친 일로 아무래도 한국에 있기 껄끄러운 모양이야.”
하진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희망의 빛 같은 것이 어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어려운 것 같아서 내가 좀 도와줬어.”
“그랬구나.”
다행이다. 하진이 작게 되뇐다.
하진은 자신을 강간했던 의붓형에게 복수한다고 해서 후련해하거나 기뻐할 만한 사람이 못 되었다. 자신으로 인해 재혁이 그런 참사를 일으킨 걸 안다면 더 괴로워하겠지. 재혁은 흉터가 남은 살갗 위에 억지로 상처를 덧입힐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윤민형을 어떻게 했는지, 하진이 모르게 할 작정이었다.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 * *
갑자기 쏟아진 비에 재혁과 하진은 별장 안으로 들어왔다. 비를 피하려 벗었던 재혁의 코트는 비를 먹고 무겁고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재혁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진 코트가 철썩거리는 소리를 내며 주저앉는다.
별장 안은 금방 전에도 사람의 손길이 있었는지, 벽난로에서 불이 타닥타닥 타고 있었다.
“이리 와.”
하진을 벽난로 앞까지 끌고 온 재혁이, 하진을 벽난로 앞 흔들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아래 재혁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하진의 신발을 벗겨주었다.
“하지 마요.”
놀라서 움찔거리는 하진에도 재혁은 망설임이 없었다. 기어코 하진의 양말까지 벗겨 내고는 하진의 젖은 발을 담요로 감싸준다. 정작 그러는 재혁의 머리카락이나 한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그에 비해 하진은 재혁이 코트로 감싸준 덕분에 젖지 않은 상태였다.
“관리 하는 사람이 체크는 했을 것 같긴 한데, 온 지 오래돼서.”
“…….”
“욕실에 따뜻한 물 나오는 거 먼저 확인하고, 그다음에 씻어.”
하진의 손이 머뭇거리다 천천히 재혁의 젖은 어깨에 닿았다. 오메가가 조금 젖었다고 해서, 그의 발아래 무릎 꿇는 알파는 이 세상에 없다.
얼마 전까지도 서로 죽일 듯이 달려들었던 그들이었다. 그의 넘치는 증오와 분노를 다 품어낼 자신이 없었다. 끊을 수 없는 애증이었고 아픔이었고, 또 그리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불에 타 사라진 것처럼, 그러한 감정들은 흔적만이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진의 손길을 느꼈는지, 재혁이 고개를 들어 하진과 눈을 맞췄다. 이어 하진의 손이 재혁의 어깨 뒤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하진의 팔이 재혁의 목을 끌어당기자, 재혁이 큰 손으로 하진의 목 뒤쪽을 감쌌다. 재혁의 머리카락에서 뚝 물기가 떨어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서로 입술을 겹쳤다. 차게 식은 입술 위로 더운 숨이 올라왔다. 미끈한 혀가 입안을 쑤셔 박듯 들어온다.
“하아, 하진아.”
재혁이 무엇인가 말하려 했는지, 하진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하진은 대답 없이 재혁의 어깨에 다시 매달릴 뿐이었다. 붉게 상기된 뺨이 사랑스러웠다. 재혁은 다시 이성을 잃고 하진의 허리를 잡아 의자에서 일으켜 세웠다. 바짝 몸을 밀착하고 키스를 나누자 금세 체온이 올라갔다.
재혁의 너른 어깨에 매달려 키스에 열중하면서도, 하진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잊고만 싶었다.
사랑한다. 이 죽을 것 같은 감정이 사랑이 아닐 리가 없었다.
이런 자신을 재혁은…… 알고 있을까.
* * *
섹스 후의 목욕은 사람을 더 노곤하게 만들었고, 욕실의 습윤한 공기는 갈증이 나게 만들었다. 하진은 재혁과 별장의 히노끼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비바람에 얼었던 살갗이 다 녹아내렸는지, 하진의 피부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만 봐요.”
하진이 욕조에 기댄 채, 반대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혁에게 말했다. 그 말에도 재혁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진에게 둔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그쪽에 있으니, 볼 수밖에 없는데.”
수면 아래에서, 재혁의 손가락이 하진의 발을 매만졌다. 보드라운 살이 손안에서 미끄러졌다.
“부끄러우면 이쪽으로 오던가.”
극구 재혁과 몸을 겹치며 앉는 것을 사양하며 반대편에 앉은 하진이었다. 하진이 대답 없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젓는다.
“싫으면, 뭐.”
하진의 발을 매만지던 손이 위로 올라가 하진의 종아리를 살짝 쥐어 주물렀다. 재혁이 하진의 종아리를 잡아 끌어당기자, 거절한 보람도 없게 하진의 몸이 맥없이 재혁 쪽으로 끌려갔다. 벌어진 다리에 가까이 마주 보고 있자니 열이 오른다.
“잠깐만요, 알았어요.”
하진이 결국에는 몸을 돌려 재혁과 몸을 겹치고 앉았다.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움츠리게 되는 어깨를 재혁이 알았는지, 하진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쪽, 재혁의 입술이 하진의 어깨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하진은 움직일 때마다 재혁의 꽉 조여진 허벅지 근육이나 가슴 근육이 닿아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너무 겁먹지 마.”
“겁먹는 게 아니라…… 아!”
목선을 타고 애무하는 재혁의 입술에 하진이 몸을 떨었다. 겁을 먹는다면, 재혁이 아니라 자신에게 해당되는 일일 것이다. 재혁의 손길에 항상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자신이, 하진은 때로는 무섭다.
재혁의 손가락이 하진의 가슴 위 톡 튀어나온 돌기를 스치자, 하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욕조 안에 차오른 수면 위로 파문이 일었다. 욕조에 몸을 담그기 전에 했던 섹스에서 하진은 이미 수차례 사정을 한 상태였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몸은 기민하게 재혁이 자극하는 대로 달아오른다. 하진이 발끝을 세워 욕조 바닥을 밀어내듯 긁었다.
“하아…!”
재혁의 팔이 하진의 몸을 더울 바짝 끌어당겼다. 맞닿은 하체, 엉덩이골 사이로 재혁의 페니스가 다시 발기해서 꺼떡거리고 있었다. 재혁의 발기를 느낀 하진이 팔을 허우적거리자, 재혁이 그런 하진을 다시 끌어당긴다.
“말도 안 돼.”
재혁의 절륜함을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재혁은 도저히 하진의 상식으로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진이 놀라 뒤를 돌아보자마자, 와락 안겨 그대로 입술을 먹히고 말았다. 재혁이 마치 페니스를 쑤셔 박는 것처럼 하진의 입술 사이로 혀를 쑤셔 넣었다.
“하, 음, 응…….”
어정쩡하게 뒤를 돌아보고 있는 하진의 자세가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재혁이 하진의 몸을 완전히 돌리더니 하진의 몸을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로 올렸다. 하진은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재혁의 목을 다시 한번 끌어안았다. 더욱 깊게 겹쳐지는 입술과 저절로 벌어진 다리에 하진의 몸도 더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재혁의 손가락이 음험하게도 하진의 에널을 파고들어 자신의 페니스가 들어갈 자리를 넓히기 시작했다. 아까의 섹스로 어느 정도 풀어져 있는 에널이 움찔거리며 재혁을 맞을 준비를 한다.
“아, 제발…….”
하진이 애원했다. 얇은 허리가 오르는 성감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렸다. 어느새 하진의 페니스도 바짝 발기해있었다. 재혁이 하진의 허리를 좀 더 들어 자신의 페니스 끝을 하진의 에널 근처로 조준했다. 흉포하게 발기한 페니스의 선단이 애액으로 미끄러운 입구를 애태우듯 깔짝거렸다. 하진이 밭은 숨을 내쉰다.
“일 년 넘게 사라져 있던 거 생각하면, 몇 번을 해도 모자라.”
하진의 속눈썹이 젖어 파들거리고 있었다. 재혁은 그것을 감상하듯 보며 하진의 허리를 천천히 내렸다. 비좁은 내벽이 거대하게 발기한 것을 오물거리며 조금씩 삼켰다. 얇은 뱃가죽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하진은 덜컥 겁이 난다.
“하읏, 너무…….”
너무 깊어. 하진이 울먹이며 말했다. 재혁의 어깨를 끌어안은 손가락이, 그 격통에 안으로 굽어든다. 재혁을 저지하려 하는 그 말들이 오히려 재혁을 부추긴다는 사실을 하진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만 조여.”
“너무, 너무 커서…….”
창살에 꿰뚫린 물고기가 된 것 같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재혁과의 섹스에 적응하려면 아직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 재혁의 위에서 간헐적으로 숨만 토해내고 있으니, 재혁이 하진의 몸을 안아 부드럽게 자세를 바꿨다.
“다리 잡고 있어.”
“못 해, 흑…… 하응!”
재혁이 허리를 밀어칠 때마다 욕조 안의 물이 출렁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페니스가 하진의 내벽을 깊게 찔렀다. 하진의 폐부 깊숙이 재혁의 페로몬이 밀려들어 왔다. 재혁의 페니스가 자궁 입구 뒤쪽을 자극할 때마다 하진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흐느끼듯 울었다. 붉은 내벽이 찰지게 재혁의 페니스에 달라붙으며 쉬이 놓아주지 않는다. 오랜 시간 재혁에게 길들여진 몸은 더없이 매혹적이다.
“하응! 흣…… 아, 아! 아!”
물이 출렁일 때마다 욕조 바깥으로 목욕물이 넘쳤다. 하진은 다리를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버리고, 다시 재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쾌락이었다. 단단한 페니스가 찔러 들어올 때마다 더 높은 절정으로 끌려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하진의 눈앞이 캄캄하게 암전되었다가, 다시 희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아흑, 응, 아아!”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점멸하는 시야에 하진은 그대로 사정하고 정신을 잃었다. 하진이 쏟아낸 정액과 애액으로 목욕물이 조금 탁해져 있었다.
“후…….”
곧 재혁의 페니스가 더 크게 부풀어 올랐다. 노팅이었다. 재혁을 받아내기 위해 한계까지 벌어진 에널이 붉었다. 하진의 안으로 데일 듯 뜨거운 재혁의 정액이 길게 쏟아져 들어왔다. 견디기 힘든 격통에 멀어졌던 하진의 의식도 다시 돌아왔는지, 재혁의 목 뒤로 겹쳐진 하진의 손이 움찔 다시 떨려왔다.
“아, 어떡해…….”
재혁의 노팅으로 다시 의식을 차린 하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떨고만 있자, 재혁이 그런 하진의 뺨에 잘게 키스를 했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사랑스럽다. 사랑스럽다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 * *
노팅이 끝난 후, 기진맥진해진 하진을 재혁이 다시 씻겨 주었다. 하진은 갓 태어난 새끼 동물처럼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린다. 하진의 손이 아직도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배스가운을 꿰어 입은 하진이 비틀거리며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하진이 맞은편에 보이는 의자에 앉자, 재혁이 욕실을 정리하고 하진을 따라 나온다. 재혁의 손에는 커다란 타월이 들려 있었다.
하진에게로 다가온 재혁이, 타월로 젖은 하진의 머리카락을 털어준다. 귓바퀴까지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주는 손길에 하진이 살짝 웃었다.
“좋다, 이렇게 머리 말려주니까.”
머리를 말려주던 재혁의 손길이 조금 느려지더니, 곧 멈췄다. 하진은 그동안 이런 것들을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깜박이던 하진의 눈이 재혁과 마주친다.
“앞으로도 그렇게 말 해줘.”
“…….”
“어떤 게 좋은지, 그리고 어떤 게 싫은지.”
아직도 서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낳았으면서도 이런 사소한 것 하나 제대로 나눌 수가 없었다. 서로에 대한 무지와 계약이라는 장막 때문에 오히려 그동안 힘든 시간이었다.
재혁의 얼굴이 다가가자, 하진의 처연한 눈매가 내리깔렸다. 서로의 입술이 겹쳐지고 젖은 점막이 위태롭게 얽힌다. 너무나 달콤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키스였다.
천천히 입술이 다시 떨어지고, 하진의 귀를 감싸고 있던 재혁의 손이 하진의 턱 끝을 스치고 내려갔다.
“……하진아…….”
하진이 시선을 올려 다시 재혁의 눈을 마주했다. 하진의 뺨 위로 다시 재혁의 손이 부드럽게 감싸진다.
“계약, 그만하자.”
재혁의 저음이 낮게 깔렸다.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계약이었다. 서로의 감정의 증폭은 도저히 계약 따위가 껴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진과 자신이 계약을 했던 그 순간이 환영처럼 떠오른다. 처음에 거기서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호텔에서 처음으로 하진을 마주했을 때, 하진의 얼굴을 재혁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하진에게 감정을 품은 것은.
하진은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갑작스런 계약 파기에 놀라 하진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재혁을 바라보고만 있자, 재혁이 다시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하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 별장까지 온 것이었다. 단지 그 말을 전하기 위해서.
“다시 시작하자. 처음부터 다시.”
하진의 속눈썹이 잘게 떨려왔다. 재혁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하진은 알 것 같았다. 재혁의 눈이 계속 그 말을 되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억지로 눌러 왔던 기대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간다.
“사랑해.”
돌고 돌아 지금에서야 고백한 마음이었다.
“정말… 사랑해.”
굳어버린 하진의 눈에서 무겁게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믿을 수 없었지만, 너무나도 믿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다.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말인데, 하진은 자신이 그런 마음을 받아도 되는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다 알아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도?
재차 확인받으려 하는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끝없는 자기비하와 검증이 앞다투어 하진의 앞에 섰다.
“상관없어.”
재혁이 하진의 몸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품 안에 안긴 하진의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면… 그렇게 말 못 할 거야.”
자신을 사랑한다 말하는 재혁에게 비밀을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죄스러운 기분이다. 반신반의하고 있었지만, 확실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알고 있다면, 더러운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
“사랑해.”
하진의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흘렀다.
“나…….”
“말하지 않아도 돼.”
더러운 자신을 사랑한다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자신의 밝히고 싶지 않은 아픈 치부를 드러내려는 하진을 재혁이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 당신 이용하려고 했던 거야, 나 편하려고, 지옥에서 벗어나려고…….”
“상관없어.”
넌 깨끗하다고, 넌 잘못 없다고… 그렇게 누군가가 말해주기를 그렇게나 바라고 있었다. 하진은 재혁에게 안긴 채 재혁을 마주 끌어안았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사랑해.”
재혁은 하진의 흐느낌이 멎을 때까지 몇 번이고 계속해서 말해주었다.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하고 있노라고.
* * *
쏴아아…….
지면을 때리듯 몰아치는 폭우에 실내까지 빗소리가 울렸다. 재혁은 약속했던 대로 하진의 친모를 찾아주었고, 지금은 그녀의 앞이었다. 하진은 칸칸이 빼곡하게 들어찬 벽면을 바라보며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검은 정장 소매 아래 흰 손가락이 이따금씩 움찔 떨릴 뿐, 하진에게는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바보 같았네, 나.”
가장 아래 칸, 그 흔한 조화 하나 장식되지 않은 자리. 초라한 납골당의 가장 보잘것 없는 자리에 들어가 있는 그 유골함에는, 생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간다. 하진은 옷이 더럽혀지는 줄도 모르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죽어버린 줄도 모르고.
하진이 우성오메가라는 이유 하나로 그녀가 자신을 윤 사장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을, 하진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잘살고 있기를 바랐다. 만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그녀도 결코 원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하진을 판 대가로 잘 먹고 잘 살고 있기를 하진은 진정으로 바라고 있었다. 하진이 윤민형의 마수 아래에 있을 때 목숨을 끊지 않았던 유일한 이유는 엄마였다.
네 엄마가 편히 살 수 있게 하려면 고분고분 말 잘 들어야 한다고…… 윤민형이 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 엄마가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을 거란 생각이 때로는 위안이 되고 때로는 족쇄가 되었었다. 그런데 결국에는 모두 다 허망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하진의 생모가 죽은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다. 하진이 윤 사장에게 입양을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의 일이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엄마가 자신을 생각해주기를, 그래도 그 애를 낳아서 다행이었다고 잠깐만이라도 가끔씩 생각해주기를. 자신을 팔아넘긴 대가를 충분히 누리지도 못하고 그녀는 가버린 것이다. 숨이 막히는 기분에 하진은 자신의 가슴을 치지도 못하고 그저 잘게 몸을 떨었다.
“왜…….”
“하진아.”
옆을 지키고 있던 재혁이 한숨을 쉬며 쓰러져 내린 하진의 몸을 일으켰다. 하진이 쏟아내는 눈물에 대리석 바닥 위로 물기가 떨어졌다. 얇은 몸이 휘청이며 재혁의 어깨에 기댄다.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하진은 절망하고 있었다.
“윤하진.”
재혁의 어깨를 감싸 쥐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떤 모습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고 했던 하진이었다. 생모의 사망 사실을 전했을 때에도 담담하던 그였는데 이렇게 납골당에 와서 무너지는 하진의 모습에 재혁도 눈을 내리감았다.
알콜 중독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녀는 매정했지만 나약했고, 하진을 학대했었지만 그래도 하진에게 집착이나마 처음으로 애정을 준 존재였다.
“하진아.”
“…….”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엉엉 우는 하진의 뺨을 재혁이 감쌌다.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큰 손안으로 들어온다.
“미안하다.”
찾아주겠다고 말하지 말걸. 아니, 그저 모른 척 찾지 못한 체를 할 것을. 생사라도 알고 싶어 하였던 것은 하진이었으나, 어딘가에서 살아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꺾어버린 셈이 되는 것 같아 재혁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하진의 상처를 메울 수만 있다면 재혁은 목숨이라도 걸 수 있었으나, 이미 재가 되어버린 그의 생모를 살릴 수는 없었다.
하진은 섬이었다. 망망대해 가운데 외로이 표류하는 작은 섬.
재혁이 하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 *
그날 새벽, 하진은 침대에서 계속 뒤척였다.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은 재혁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찾아오는 갈증에 물을 찾으려던 재혁은, 몸을 일으켜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하진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는 있었지만, 하진이 잠이 들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동그랗게 말은 몸이 재혁이 누운 쪽을 향해 있었다. 등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재혁은 안도한다. 재혁이 고개를 숙여 하진의 이마에 키스를 하고, 침대에서 내려가려고 할 때였다.
“재혁 씨.”
사르르 눈을 뜬 하진이 재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발갛게 된 눈이 재혁을 좇는다. 재혁은 손을 뻗어 하진의 옆머리와 귓바퀴를 매만졌다.
“더 자.”
“갈 거예요?”
하진의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고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침대 시트 위를 디디고 있는 재혁의 손가락 끝으로 하진의 손가락이 조금 겹쳤다. 맞닿은 손끝이 박동하듯 떨려왔다. 재혁이 눈을 떼지 않자 하진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또 나 버리고…….”
아직 잠에서 떨 깨어난 목소리가 재혁을 붙잡는다. 때로 하진은 고립되었기보다는,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좁은 방 안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 그 안으로 칸칸이 유리 벽을 쌓고, 그 안에 몸을 웅크린 존재다. 아마 그 고독과 절망을 재혁이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조차 상처 입어 떨고 있는 하진에게, 재혁은 상처를 덧입힌 사람이기도 했다.
“하진아.”
하진은 때때로 자기 파괴적이었다. 지레 겁먹고 최악을 상상하고는 했다. 그것은 하진의 천성이라기보다는 하진을 둘러싼 세계가 하진을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재혁이 한숨을 쉬며 하진의 얼굴 옆으로 팔을 세워 몸을 기울인다.
“절대 그러지 않아.”
“…….”
“절대.”
재혁은 하진의 이 불안이 어디서 기인했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평생을 두고 돌아보아도, 재혁의 인생에 그만한 후회는 없을 것이다. 최악의 선택이었고, 수없이 후회했었던 날. 재혁은 하진과 결혼식을 올렸던 그 날을 떠올렸다. 반려가 되었던 하진을 호텔에 두고, 여자가 기다리고 있었던 다른 호텔로 갔던 그 날. 하진은 억제제를 과다복용했던 일로 생사를 오갔었다.
“…….”
하진이 불안해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이 아니었다. 돌아누워 재혁에게서 눈을 돌리려는 하진을 재혁이 다시 바로 눕혔다.
“그 날도.”
“…….”
“다시 돌아가려고 했었어.”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재혁이 덧붙였다.
재혁은 ‘그 날’이라고 말했지만, 하진 역시 어느 날을 지칭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식 날. 하진이 병원에 실려 갔다는 전화가 없었더라도 다시 하진이 있는 호텔로 돌아갔을 거라고, 재혁은 생각했다. 지독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여자와 한 방 안에 있었지만 안을 수 없었다. 마음의 동요조차 없었다. 단순히 페로몬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억제제 부작용으로 인해 페로몬이 사라졌던 때의 하진에게 자신이 품었던 갈애가 설명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사랑은 하진에게 가 있었다. 그것을 나중에나 깨달은 것은 재혁의 크나큰 과오였다.
이미 상처를 되돌리거나 하기에는 늦었다는 것도, 하진이 쉬이 믿지 않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재혁은 뒤늦은 변명을 뱉는다.
“잘래.”
“하진아.”
하진이 결국 돌아누웠다.
“거짓말한 적 없어. 너한테 다 정리했다고 말했던 거, 거짓말 아니었다.”
“…….”
“결혼식 날, 널 두고 다른 사람한테 갔던 건 맞지만, 그냥 거기까지였어. 네가 쓰러졌다는 연락받고 바로 정리했어.”
돌아누운 하진은 제대로 듣고 있기는 한 건지, 미동도 없었다. 하진이 믿기나 할지, 아니 듣고는 있는지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재혁은 못 다했던 변명을 쏟아붓는다. 그동안 하진은 감히 묻지 못할 일이라 생각하며 추궁하지 못했고, 재혁에게는 설명할 기회가 없었던 일이었다.
“사진도 그 날 찍힌 거였다. 헤어지고 만난 적 없어. 이후에 우연하게 지나친 적 있었지만 그뿐이야.”
오메가가 가지지 못한 자격이었고 알파가 해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재혁과 하진의 관계는 보통의 알파와 오메가의 주종관계에서는 틀어진 지 오래였다.
그 날 찍힌 사진이 짜깁기로 나중에 스캔들로 이용될 줄 재혁도 상상이나 했을까. 평생을 사죄한다고 해도 덮어지지 못할 상처였다.
재혁이 다시 하진의 어깨에 손을 올려 바로 눕히자, 하진이 힘없이 재혁의 손길에 끌려온다. 하진의 눈동자가 처연하게 재혁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기 생각난다.”
하진은 그렇게 재혁의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눈물도 말라버린 것인지 하진은 울지 않았다.
“처음으로 왔던 아기.”
허망하게 잃었던 아이를 하진은 이따금씩 떠올리곤 했다. 그 스캔들이 도화선이 되어 결국에는 하진을 떠났던 아이였다. 재혁의 말을 온전히 다 믿는 것은 아니었으나, 듣고 있자니 하진은 또 다시금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게 되는 것이다.
내가 조금만 더 의연했더라면, 그랬다면.
“불쌍해. 나 같은 거한테 와서.”
아이를 잃은 것이 다 자신의 탓만 같아지는 하진이다. 다시 자책하는 하진에, 재혁이 하진의 뺨을 감싼다. 하진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매달리듯 의지한다. 뭐든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하진의 좋지 못한 버릇이었다.
“다시 왔잖아.”
울멍이는 눈이 재혁의 시선을 좇는다.
“잠깐 떠났다가 다시 온 거야. 완전히 떠났던 게 아니야. 재하, 다시 왔잖아.”
위로해주려는 말이라는 것을 하면서도, 하진은 재혁의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하진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던 재혁의 손가락을 살포시 붙잡았다. 그리고 안도하듯 하진이 눈을 내리감는다. 재혁은 하진이 다시 잠이 들 때까지 하진에게 붙잡힌 손을 빼지 않고 하진을 바라보았다.
하진에게 상처를 주었던 재혁이, 이제는 하진을 위로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단단하게 흉터가 남은 살갗 위를, 그들은 그렇게 천천히 치유하고 있었다.
* * *
“음…….”
커튼 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에 재혁이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드는 빛에 재혁의 눈가가 일그러진다.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하진을 생각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도 사랑할 수 있겠냐고 울던 하진의 얼굴이 떠오른다. 이미 그들에게는 소용없어져 버린 의심이었다.
재혁은 습관처럼 팔을 뻗어 옆자리를 쓸었다. 그런데 손안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은 온기가 없는 침대 시트뿐이었다. 한순간에 정신이 들은 그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벗은 상체 위로 짜인 근육이 결을 달리했다.
“하진아.”
침대가 비어있었다.
“하진아!”
옷을 꿰어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재혁이 침대를 박차고 나갔다. 별안간 방에서 뛰쳐나온 재혁에 저택 곳곳에 있던 고용인들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은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대표님, 무슨 일이라도……?”
“이 사람, 어딨습니까.”
“네? 아…… 아까 일어나셔서 1층으로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심장이 곤두박질친다. 재혁이 숨을 깊게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저기, 이거라도.”
“아이는요.”
“지금은 김주연 씨가 담당입니다. 출근했습니다.”
재혁이 고용인이 내민 가운을 잡아채, 빠르게 걸치며 계단을 내려갔다. 재하를 두고 갈 하진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재 담당이라는 시터와 하진이 가까워 보였던 것이 또 내심 마음에 걸렸다. 그럴 리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에 떠는 마음은 대체 왜.
1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재혁은 1층 끝에 있는 아이 방문을 열었다. 아이 방 안은 텅 비어있었다. 아이도, 시터도 보이지 않았다. 문고리를 틀어쥐고 있는 재혁의 손이 떨렸다. 바깥에서 대기 중이던 김 비서가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재혁에게로 다가갔다.
“대표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
“대표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캄캄한 어둠이 재혁을 집어삼킨다. 문고리에 매달려 있던 재혁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쿵쿵쿵. 심장의 박동이 머리를 울렸다.
그리고 그때, 멀리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본능적이었다. 재혁이 비서를 지나쳐 정원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쿵.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쏟아지는 초록빛에 머리가 아찔했다. 정원 벤치에서 시터의 품 안에 안긴 아이가 까르륵 웃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간 곳에는…… 재혁의 손끝에서 문고리의 찬 기운이 멀어졌다.
“일어났어요?”
꽃이 가득한 정원 사이로, 하진이 있었다. 옅게 웃는 얼굴이 재혁을 향했다.
“……재혁 씨?”
재혁은 슬리퍼를 신지도 않은 채로 하진에게 뛰어갔다. 품 안에 넣자마자 퍼지는 향기에 재혁은 안도한 얼굴로 눈을 감는다. 암흑이던 세상이 밝게 비춰진 느낌이었다.
찾았다, 나의 빛. 내 오메가.
“발 다 젖어요. 괜찮아요?”
“괜찮아.”
하진은 정원에서 물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껴안은 재혁에, 하진은 들고 있던 물뿌리개를 가까스로 고쳐 잡았다. 재혁에게 떠밀려 흘러내린 물이 재혁의 다리를 적시고 있었지만, 재혁은 개의치 않았다.
“무슨 일 있어요?”
“……없어.”
재혁이 하진을 다시 힘주어 안았다. 하진의 향기가 있어야만 평안을 찾는 육체가 안온함에 젖어 들었다.
“좋은 아침이야.”
편안한 저음이 하진의 심장 위로 내려앉았다. 하진이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재혁의 어깨에 뺨을 기댔다. 재혁의 넓은 등 위로 하진의 손이 둘러졌다.
“좋은 아침.”
재혁만 들릴만한 크기의 목소리로, 하진도 재혁의 인사에 화답했다. 따뜻함이 물빛처럼 퍼져나가는, 그런 아침이었다.
<끝. 외전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