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폐허(2권) (5/13)

2권

5. 폐허

* * *

하진이 대원건설 사장실에 들어갔을 때, 윤일환 사장은 하진과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하진이 자신의 양자라는 자각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이었다. 대신 소파에 앉아있던 윤민형만이 하진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진이 그런 윤민형을 못 본 척 외면하고, 윤일환 사장이 앉아있는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윤일환 사장 앞에서 하진은 생기 없이 파리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다.

“부르셨어요.”

하진의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윤일환 사장은 그것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니꼬운 표정으로 쯧- 하는 소리를 내더니 책상 위의 서류봉투를 하진을 향해 던졌다. 황색 서류봉투가 하진의 어깨를 맞고 하진의 발치에 떨어졌다.

“읽어봐.”

윤일환 사장이 그렇게 말하곤 다시 하진이 아닌 신문으로 시선을 주자, 뒤에서 소파에 앉은 윤민형의 킥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이골이 날 대로 난 상황이다. 하진은 태연하지 못했지만 태연한 얼굴로, 가만히 구둣발로 바닥을 문질렀다. 하진의 발치에 있던 서류봉투가 바닥 아래 이리저리 쓸렸다. 별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거역할 수는 없다.

하진이 결국 몸을 굽혀 서류봉투를 집어 들었다. 밀봉하지 않은 서류봉투 안에는…… 이혼서류가 있었다.

“……아버지.”

“네놈이 무슨 천운을 타고났는지, 뻔히 불임인 걸 알면서도 최 회장이 널 받아주겠다 했다.”

하진의 손에 들린 이혼서류에는, 하진과 재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하진의 원망 어린 눈이 윤일환 사장을 향했다.

“천운이라구요.”

“대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원 그룹 총수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좌지우지하는 게 최 회장이야!”

“하…….”

하진이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아버지보다도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첩으로 들어가는 걸, 세상에선 천운이라고 하나 보죠?”

“뭐?”

“아, 천하디천한, 거기다 이혼까지 한 오메가를 무려 대원그룹 회장님께서 거둬주신다니 저, 아니 우리 집안엔 영광인 건가요?”

“이놈이!”

하진의 얼굴 옆으로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재떨이가 날아갔다. 곧 벽에 부딪혀 모서리가 깨진 재떨이가 바닥을 굴렀다. 하…… 자꾸만 하진에게서는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순응하지 않는 하진에게 분노한 윤일환 사장이 책상 앞쪽으로 나와 하진에게 뺨을 후려쳤다. 위태롭게 서 있던 몸이 그대로 흔들리더니, 빗겨진 하진의 시선이 윤일환 사장을 향했다. 자비 없이 내리쳐진 두꺼운 손바닥에 입술과 입 안쪽이 터져 쓰라렸다. 입안으로는 피 맛이 돌았다.

“아버지 원하시는 게, 제 이혼이신 거죠.”

언제는 팔려가듯이 정략결혼을 하라고 하더니, 이제 와 이혼을 하라고. 잊고 싶어도 도저히 잊을 수 없게 했다. 자신은 윤일환 사장의 장기판 위의 장기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언젠가 진짜 아들로 인정해줄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그런 것을 아주 기대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모두 헛된 바람일 뿐이었다. 윤일환 사장을 바라보는 하진의 눈에 언뜻 눈물이 비쳤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여느 때와는 다른 하진의 태도 때문에 윤일환 사장은 부들부들하며 화를 참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제가 아버지 뜻에 따르는 것도 그게 마지막일 테니.”

하진의 낯에 결연함이 어려 있었다.

“저, 저, 저놈이!”

당연한 하진의 반격에 충격이라도 받은 건지 윤일환 사장이 관자놀이를 감싸 쥐며 비틀거린다. 하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아, 그대로 인사도 없이 사장실을 나섰다. 사장실 문을 열자마자 하진을 경호하는 경호원들이 따라붙는다.

“윤하진!”

하진을 다시 돌려세운 것은 윤일환 사장이 아니라 그 뒤에서 빙글빙글 웃고만 있던 윤민형이었다. 민형이 느글느글한 미소를 지으며 하진의 가까이로 다가가자, 하진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쳐서 멀어지려 했다. 그런 하진의 팔을 붙잡아 자신의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민형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친다.

“할 말 있는데.”

“난 할 말 없는데요, 형.”

‘형’ 이라는 글자에 하진이 힘주어 말했다. 윤민형은 하진을 단 한 순간도 동생으로 생각하거나 여긴 적 없었다. 하진이라는 아름다운 피조물 자체에 욕정 했고, 우성오메가라는 알파들의 독점물을 욕망했다. 그래서 하진은 더 형제의 사이로 선을 긋는 것이다. 그것을 민형이 받아들인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지만.

“난 얘길 해야겠는데.”

민형의 눈이 좌우로 움직이며 하진의 경호원들을 훑었다.

“지금 말해도 상관없으면, 그냥 하고.”

윤민형이 하진에게 할 말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진의 경멸하는 것 같은 눈이 민형을 향한다. 하진은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하진의 그런 눈이 오히려 민형을 도발하고 발정하게 한다는 사실을. 하진이 고갯짓을 하자, 하진의 바로 곁에서 경호하던 경호원들이 몇 발자국 떨어진 곳으로 가서 대기했다.

그리고 곧 민형의 입술이 하진의 귓가 가까이로 다가갔다. 온몸에 소름이 끼쳤지만, 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늘 도곡동 오피스텔로 네가 좀 와줘야겠어.”

하진이 파르르 떨며 민형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개인 오피스텔로 오라고 하는 이유를 하진이 모르지 않았다.

“……미친 새끼.”

“미친 게 아니라, 기회를 잘 써먹는 거지.”

“…….”

“이게 뭐일 것 같아?”

민형이 재킷 주머니에서 작은 USB 하나를 꺼내 손으로 굴렸다. 하진의 낯이 창백하게 질린다.

“잊지 마. 네가 누구의 오메가가 되어도 넌 내 거라는 걸. 그게 강재혁이든, 최 회장이든, 누구든.”

민형의 저열함에 소름이 끼쳤다. 하진을 폭행해온 것을 마치 자랑인 양, 그것을 이용해 하진에게 위협마저 하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에 하진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저 안에 얼마나 수많은 사진들과 영상이 있을까. 끔찍함과 경멸 위로 두려움이 덮쳤다. 하진의 사고회로는 그대로 정지해버렸다.

민형은 자신이 알파가 아니라는 열등감을 이렇게 하진을 짓밟는 방식으로 해소해왔다. 하진이 강재혁과 결혼을 하고, 이후 최 회장의 첩이 된다고 해도. 그의 열등감은 하진을 짓이기는 것이 아니라면 해갈이 될 수 없었다. 정략결혼으로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겠다는 하진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강재혁이 보면 뭐라고 할까?”

파르르 떠는 하진을 보며 민형은 조소했다. 굳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는 하진의 곁에서 민형이 웃으며 뒷걸음질을 친다. 하진은 민형을 쳐다보지도 못한다.

“이따 보자고.”

그 이후로 하진은 자신이 어떻게 엘리베이터까지 갔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베이터 앞이었고, 자신을 둘러싼 경호원들 사이에 있었다. 우스운 일이다. 이렇게나 경호원이 많은데 윤민형 같은 쓰레기 하나를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게.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하진은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손으로 눈가를 덮었다. 작은 얼굴을 덮은 가는 손가락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다. 손바닥 아래로는 물기가 떨어져 내린다. 엘리베이터는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지상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에게 사랑이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 깜깜한 지옥에는 출구가 없는 것 같았다. 강재혁이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그 빛을 따라가기에 자신에게는 이미 너무도 많은 족쇄에 걸려 있었다.

하진은 추락하듯 하강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각했다. 최 회장에게도, 윤민형에게도 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강재혁의 곁에서 있을 수도 없었다.

‘오메가에게 사랑이란 없단다.’

어릴 적 친모에게 들었던 말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돈다.

* * *

머리를 찌르는 두통에 재혁이 얼굴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진통제를 먹어야 할 것 같다. 점심부터 시작된 기분 나쁜 통증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다행히 오늘 일정이 모두 끝나갔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7시에 가까워져 있다. 재혁이 거구의 몸을 책상에서 일으켰다. 대표실의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전면 창 아래, 서울의 어지럽고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재혁은 바깥의 풍경에 빠진 채 하진을 생각했다. 재혁은 이미 하진에게 사로잡혀 있었다. 재혁 스스로는 하진을 놓아줄 수 없다. 우성알파 2세를 낳아 그룹 승계권을 가져갈 생각이었으나 그것은 이미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재혁은 깊게 한숨을 내쉰다. 자신의 야망과 바라던 삶의 방식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흘러가 버린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미 그룹 승계권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현재 쥐고 있는 계열사나 잘 키워보겠다는 소박한 계획이 들어있었다. 그의 친구인 지욱이 안다면 기절할 일이었다.

얼마나 재혁이 서 있었을까. 대표실 안이 전화벨 소리로 가득 찼다. 재혁은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전화를 받았다. 연결해주는 비서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이 대표님과의 통화를 원한다며, 수차례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뭐든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재혁은 그냥 전화를 넘기라고 생각 없이 말했다.

[나예요.]

곧, 목소리를 들은 재혁의 눈이 커다랗게 떠진다. 그동안 그렇게 찾았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던, 이시연의 목소리였다.

“뭐지?”

재혁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마지막 인사, 하려고요.]

시연은 맹수나 다름없는 재혁을 겁내지 않고 당돌하게 대답했다. 자신을 쥐 잡듯 찾았을 재혁을 알면서도 시연은 태연하다. 재혁은 수화기를 다시 고쳐 잡으며 몸을 똑바로 일으켰다.

“그 전에 설명할 게 있을 텐데.”

재혁이 최대한 억누르며 말했다. 과거의 시연은 재혁의 변심에 의한 피해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파파라치 사건 이후로 더 이상 피해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결혼식 날 호텔 방에 들어갔던 때와 같은 원피스를 입고 여러 번 태성 계열의 호텔에 드나든 것, 그리고 재혁과 사진을 찍힌 것. 모든 것이 의도가 아니라기에는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재혁은 시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대체 어떻게 시연이 저렇게 잘 숨어 있을 수 있었는지도.

[사실 이렇게 내가 당신한테 전화를 걸어도 안 되는 거지만…… 내가 사랑했던 남자니까 그래도 이 정돈 하고 싶네요. 당신이 너무 불쌍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알아듣게 말해.”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다. 재혁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나 떠날 거예요. 오늘 저녁 비행기에요.]

“미안하지만 협조해주기 전엔 보내지 못하겠는데.”

[아뇨, 당신은 날 보내줘야 해. 아니, 보내줄 수밖에 없을걸.]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주려면 시연이 필요했다. 세상이 뭐라 생각하든 재혁은 상관없지만, 하진의 명예 문제가 걸려 있었다. 하진을 매스컴의 먹잇감으로 더 이상 내버려 둘 수 없다. 그러나 시연의 태도에서는 죄책감이나 망설임 따위가 보이지 않았다. 재혁은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소리지?”

[날 더 이상 당신들 정치질에 끼워 넣지 마요. 지긋지긋하니까. 외국에서 조용히 살 테니까 나 더 이상 찾지도 말고, 이용 하려 들지도 마요.]

이해가 가질 않는 말만 시연은 늘어놓고 있었다. 오히려 억울하고 서러운 것처럼 시연은 쏘아붙이며 울었다. 재혁이 찡그리며 이마를 매만졌다. 시연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었고, 시연을 만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 느껴지는 이시연의 태도가 예상 밖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달리 이시연도 우연히 파파라치에 말린 걸까.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들어 온다.

“어디야, 만나서 얘기해.”

[당신은 죽는 그 날까지 사랑하지 못할 거야.]

울분에 차서 저주하는 듯한 시연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아까부터 이시연이 이해가 가지 않는 말만 늘어놓고 있었다. 재혁이 이마를 매만지던 손을 떼어내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쌍해. 그 오메가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뭐?”

그 오메가. 하진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꾸민 일이었어.]

무엇을? 재혁은 시연이 한 말을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바닥에 단단하게 서 있는 재혁의 몸 위로 커다란 파도가 밀어닥쳤다.

[당신 결혼한 사람, 그 사람이 당신하고 헤어지고 싶어서 나한테 부탁한 거라고.]

“……대체 무슨 소리지?”

[꼴좋다. 다 가지려다가 당신 결국 다 버림받은 거야. 다시 말해줘? 그 사람이 나한테 부탁했어. 당신이랑 사진 찍혀달라고.]

“제대로 말해보라고!”

재혁이 포효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건장한 팔목 아래 손이 잘게 떨렸다. 시연은 전화기 너머로 이전에 사랑했던, 그리고 너무나도 강했던 남자가 파괴되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절망을 겪고 나면 통쾌하게 외국으로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전화기를 붙든 시연의 큰 눈 아래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 남자가 이렇게 나약했었구나. 내 앞에서 그동안 그렇게나 강했던 그 사람이.

정말, 그 오메가를 사랑했구나.

“돈이 필요했어?”

[당신한테 복수하고 싶었어. 그런 부탁 받고 후련해서 잠이 안 왔어.]

“나한테 요구했어야지!”

재혁은 아직도 시연이 그런 짓을 한 이유를 알지 못한다. 머릿속에 돈, 계약, 회사 같은 것들로만 가득 찬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 오메가를 사랑해서 무너지는 것이 이질적이기 그지없다.

[당신은 끝까지 이런 사람이구나. 그러니까 그 오메가한테까지 버림받은 거야, 당신.]

재혁의 눈앞으로 윤하진의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부끄러운 것처럼 안겨 오던 하진의 몸짓이나 서툰 표정이 모두 연기였을까. 어디부터가 계획된 것이었을까. 설마 처음부터였을까. 재혁이 비틀거린다.

“……누가 너한테 지시했어. 하진이가?”

끝까지 하진을 믿고 싶은 재혁이다. 그런 재혁을 시연은 동정했다.

[그 오메가, 원래 이런 목적으로 키워진 거라고 했어. 감정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고.]

“뭐……?”

[나한테 돈까지 주더라. 호텔 복도에서 찍은 사진, 얼굴이 잘 안 나와서 기사화를 못 시킨다고 다시 한 번만 더 찍혀달라고. 진짜…… 내가 웃겨서. 나한테 그런 부탁을…….]

“하…….”

그렇게 단단하던 남자였는데. 복수는 성공했고, 재혁의 목소리는 시연이 상상하던 바로 그 그림이었지만 왜인지 자신의 표정만은 상상과 달랐다. 이런 기분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시연이 그 제안을 처음 받았던 것은, 그들이 결혼식을 올리고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시연은 처음으로 대원건설 쪽과 접촉했을 때를 떠올린다.

‘그 아이는 말하자면 로봇 같은 겁니다. 그런 그 애가 시연 씨에게서 강 대표를 뺏는다는 건 애초에 말이 안 되죠. 돌려줄 수 있어요, 시연 씨한테.’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아요. 강재혁 씨 돌려받고 싶은 마음도 없습니다.’

‘그럼 이렇게 생각하시죠. 강 대표한테 복수한다고.’

‘그래서 당신들이, 윤하진 씨가 얻는 게 대체 뭐죠?’

‘위자료.’

‘…….’

‘태성그룹으로부터 받을 엄청난 위자료. 그리고 더 높은 신분 상승.’

‘…….’

‘우린 이제 한배를 탔으니까…… 여기까지만 말씀드리죠.’

정말로 그것만이 그 오메가가 강재혁과 결혼한 이유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 첫날 버림받았다는 찌라시 등으로 그 역시 강재혁에게 앙금이 남은 것이 많았겠구나 시연은 짐작했을 뿐이다.

윤하진과 직접 접촉한 적은 없었지만, 거액을 제시하며 시연의 앞에 나타난 남자가 바로 그 오메가의 형이었다. 시연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윤하진의 의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파문이 터진 이후 시연을 보호 겸 감시하고 있던 것도 그쪽이었다. 아직도 시연에게 그 남자의 번들거리는 눈빛이나 뱀 같은 인상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당신의 패배야.]

과연 시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재혁은 그대로 끊기는 전화를 붙잡지 못했다.

다만 바랄 뿐이었다. 시연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 * *

[도곡동 오피스텔로 일곱 시까지 와.]

문자메시지를 확인한 하진은 그대로 핸드폰을 탁자 위에 뒤집어 놓았다. 윤민형에게서 온 것이었다. 윤민형의 뜻에 따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하진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방 안의 커다란 수조를 향해 있었다. 대원건설의 사장에게 입양되기는 했지만, 오메가라는 이유로 그 세계에 제대로 편입되지도 못하고 부표처럼 떠돌던 삶이었다. 그렇다고 자유롭게 흘러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조 안의 열대어는 꽃잎 같은 지느러미를 물결에 날리며 헤엄치고 있었다. 하진은 그것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무릎 위에 놓였던 하진의 손이 꽈악 바지자락을 쥐었다. 결혼해서도 윤 씨 일가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이제는 자신이 수조를 깨고 나와야만 했다. 그것이 설령 자신에게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벼랑 끝에 몰린 하진의 감정은 불안정했다. 생각의 끝에는 자신의 감정이 향했던, 강재혁을 향했지만 그것 역시 하진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는 없었다. 어차피 윤민형에게 하진의 사진과 영상이 있는 한, 하진과 재혁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재혁에게 하진과 윤민형의 관계가 탄로 나거나, 윤민형이 재혁에게 USB를 넘기거나.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예정된 파멸이었다.

‘오메가에게 사랑이란 없단다.’

친모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서 이명처럼 떠돌았다. 하진이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정략결혼 같은 것으로 지옥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신이 안일했던 것이었다.

하진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결국 흡수되지 못했던 이 알파들의 세계에서, 하진은 자신이 빠져주기로 한다. 윤일환 사장도, 윤민형도, 최 회장이나 최준원도, 그리고 재혁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

스스로 생을 끊는 것 역시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결국에는 그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는 것을 하진도 알고 있었다. 하진은 손목시계 아래, 흉터로 남은 자신의 자해 흔적을 떠올렸다. 죽더라도 재혁을 떠난 이후여야 했다. 그게 자신이 재혁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선의니까. 친모의 존재가 죄책감처럼 하진의 마음을 짓눌렀으나 이내 잊어버리기로 한다. 친모도 어차피 자신을 버린 지 오래였다.

개인금고를 연 하진이 여권과 현금을 챙겨 옷 안쪽에 집어넣었다. 수표를 제외하니 현금은 그리 큰돈이 되지 못했지만, 당분간은 몸을 숨기거나 해외로 나를 정도는 될 것이다. 벗어난다는 게 가능은 할까. 확신이 들지는 않았다. 이 세계에 물들고 싶다거나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 싶다거나 하는 목적 없이 생을 이어갈 수 있을지, 그것도 하진은 알 수 없다. 다만 지금의 이 세계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만이 절실했다.

그때, 하진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하진이 일어나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던 탁자 가까이로 걸어갔다. 핸드폰이 놓인 탁자 위에는 핸드폰뿐만이 아니라, 윤일환 사장에게서 받은 이혼서류도 함께 있었다. 핸드폰을 다시 뒤집어 액정을 확인하니,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재혁이었다. 하진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요동쳤다. 재혁은 항상 이렇듯 하진을 흔드는 사람이었다.

‘잘 살아.’

친모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왜인지 하진은 자신에게 그 말을 했던 친모가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재혁을 떠나려는 이 순간, 재혁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 역시 그의 안녕이었다. 하지만 하진은 재혁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재혁의 목소리를 듣는다면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았다.

핸드폰 옆면의 버튼을 눌러 진동모드로 바꾼 하진이, 핸드폰을 든 채로 수조 위로 손을 뻗었다. 하진이 핸드폰을 놓자마자, 수조의 수면 아래로 핸드폰이 빨려 들어가듯 잠겼다. 수조 안에서 핸드폰이 빛을 내며 수조 바닥 자갈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그것을 잠시 무표정으로 바라보던 하진의 눈에서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몇 번이고 울리던 핸드폰을 지켜보던 하진이, 곧 방을 나섰다. 집 안에는 하진뿐이었으나 현관 바깥으로 나간다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겉옷을 걸친 하진이 현관문을 열자, 예상했던 대로 경호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일정이 따로 있으십니까.”

경호가 명목이기는 했지만, 하진은 매일같이 자신에게 그림자처럼 붙던 이 경호원들이 감시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도망치기로 결심한 지금은 더욱 그랬다. 경호팀장이 하진의 앞으로 걸어와 하진에게 묵례를 했다.

“저녁 약속을 잡았어요. 강 대표님이랑.”

하진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드마리에로.”

재혁과 하진이 함께 식사를 한 적 있던 레스토랑이었다.

* * *

철저히 예약제인 소규모 레스토랑이었지만, 그곳에서도 예외로 두는 사람들은 당연히 존재했다. 하진은 그중 하나였다. 테이블이 많지 않은 곳이라 하진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간 이후, 경호원들은 그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진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을까, 곧 경호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재혁의 비서였다.

“네, 경호팀장 이규철입니다.”

[지금 VIP와 함께 있습니까.]

다급한 목소리에 경호팀장이 옆의 경호원과 눈을 맞췄다. 경호팀장이 눈짓을 주자, 경호원들이 레스토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갑자기 들이닥친 장정들에 레스토랑 직원들의 시선이 경호원들을 향했다.

“건물 외부에서 경호 중이었습니다.”

[지금 당장 VIP 신변 확보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곧바로 당황으로 얼굴이 질린 경호원 몇이 다시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조금 귀에서 떼어낸 경호팀장이 경호원들에게 무언으로 눈짓을 주자, 경호원들이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VIP는.”

“팀장님, VIP께서…….”

심상치 않음을 느낀 경호팀장이 열린 레스토랑 문 안으로 들어섰다. 한 팀만 식사를 하고 있을 뿐, 나머지 두 테이블은 비어있었다. 분명히 테이블에 앉아 있었어야 할 하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서버 말이, VIP께서 쉐프를 만나고 싶으시다고 해서 주방으로 안내했다는데 아무래도 주방 쪽을 통해서 나가신 것 같습니다.”

“뭐?”

“쉐프한테는, 잠깐 바람 좀 쐬겠다고 하셨다고…….”

경호원 하나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납치도 아니고 스스로 걸어갔다. 최악의 경우가 생각났지만 우선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근처에서 바람 쐬고 있는 정도의, 재벌가 도련님의 가벼운 일탈이기를, 그는 진심으로 바랐다. 경호팀장이 보고를 위해 천천히 다시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실장님.”

[이 팀장.]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비서가 아닌, 그의 고용주이자 태성건설 대표인 강재혁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흥분하지 않고 있었지만 억눌린 분노가 느껴졌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싸하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윤하진, 어디 있습니까.]

“그게…… 대표님.”

[지금 같이 있을 거 아닙니까.]

경호팀장이 얼굴을 구기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른 경호원들에게 거칠게 손짓을 보내자 경호원들이 건물 바깥 사방으로 흩어진다.

“……죄송합니다. 대표님하고 약속을 잡으셨다고 해서, 저희는.”

[여권이랑 현금도 다 들고 갔어요. 이거 무슨 의민 줄 압니까.]

아니기를 바랐지만 아무래도 그 최악의 경우였던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 필요 없고, 당장 찾아요.]

“저…….”

[씨발, 윤하진 당장 내 눈앞에 갖다 놓으란 말이야!]

핸드폰 너머로 들린 거센 파열음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 * *

삑.

현관에서 전자음이 들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린 문 사이로 재혁이 들어왔다. 불이 다 꺼진 실내는 오직 현관 위 센서 등의 불빛을 제외하고는 모두 암흑이었다. 센서 등의 노란 불빛이 재혁의 어깨 위로 쏟아졌다. 재혁이 천천히 눈을 깜박이며 암흑 속의 실내를 천천히 둘러본다. 하진과 함께 살기 위해 마련했던 신혼집이다. 사실 계속 병원 신세를 지어야만 했던 하진이 이 공간에서 살았던 것은 긴 시간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집안 곳곳에는 하진의 부재가 느껴졌다.

“윤하진 출국 막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출국은 못 하게 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은 재혁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재킷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신발을 벗고 마루에 발을 디딘 재혁의 발밑으로 서류가방과 외투가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넥타이를 풀어 던져버린 재혁에게 거친 숨소리가 났다. 아직도 하진이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이 재혁은 믿겨지지 않았다. 재혁의 발길이 멈춘 곳은 하진이 작업실로 썼던 방이었다. 높은 천장과 넓은 방 안에 여러 개의 캔버스가 놓여있는 것이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였다. 어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혁이 가장 커다란 캔버스 앞으로 가서 섰다. 어둠에 익숙해져서인지, 외울 정도로 많이 보았던 그림이기 때문인지, 재혁에게는 그림이 생생하게 보였다. 윤하진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자신을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이시연에게서, 파파라치를 찍게 한 것이 하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 소리를 들었는데도 하진에게 어떠한 추궁도 심문도 할 수가 없다. 처음에는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었고, 나중에는 하진이 그에 대한 변명이라도 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하진이 진실로 그것을 계획한 것이었대도 재혁은 하진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하진이 먼저 사라져 버렸다. 변명도, 대답도 할 수 없게. 하진이 남긴 것이라고는 이혼서류가 전부였다. 아니, 그것을 하진의 대답이라고 봐야 할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 역시 하진과 계약결혼을 했던 것이었으면서 하진에게 어느새 감정을 쏟아붓고, 또 감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있었을 줄은.

재혁에게서 실소가 터졌다. 태성그룹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단 말인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 위자료가 아무리 크다 해도 태성그룹 안에 속해 있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지 않을 텐데.

재혁이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잔에 양주를 반쯤 따랐다. 하진이 자취를 감춘 이후, 재혁이 침실 이상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은 단연 이 작업실이었다. 재혁은 매일 이곳에서 취하지도 않는 술을 마시며 하진이 남기고 간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이 마치 하진의 얼굴이라도 되는 양, 재혁은 귀가한 이후 잠이 들 때까지 하염없이 그림만 쳐다보았다.

순간, 재혁의 눈가가 좁혀졌다. 최준원 전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태성그룹을 버리고 갈 만한 자리라면.

“씨발.”

재혁이 마시던 잔을 작업실 한쪽으로 집어 던지자 유리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맹수가 숨을 고르는 것처럼 재혁이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진을 찾아야 했다.

감정도 없다는 윤하진, 계약조차 저버리고 간 윤하진.

재혁은 자신을 떠난 하진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하진을 방조하거나 부추긴 자들 역시 용서할 수 없었다. 재혁은 하진이 자신에게서 떠난 대가를 치르게 할 요량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하진을 자신의 옆으로 데려올 것이다. 윤하진은, 죽더라도 자신의 곁에서여야만 했다.

* * *

하진은 마스크를 고쳐 쓰고는 털이 잔뜩 달린 패딩의 후드를 더욱 깊숙이 잡아당겼다. 계절이 아직 겨울이어서 하진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눈만 내어놓은 하진이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 대합실을 살폈다. 대합실 한쪽 구석에는 꽤 오래된 것 같은, ‘부산 국제 여객선 터미널’이라고 적힌 간판이 있었다. 재혁이 자신을 찾는다면 분명 공항부터 갈 것이라 생각해 하진은 배를 택했다.

배로 외국으로 나간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하진은 패딩 깊숙한 곳에 있는 자신의 여권을 괜히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승선 시간이 가까워지는 대로 바로 표를 구입해 배로 뛰어들어갈 생각이었다. 탑승자 명단에 길게 이름을 올려 좋을 이유가 없었다. 우선은 일본으로 가고, 일본에서 미주 쪽으로 다시 거취를 옮길 생각이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이 넉넉하지 않아 미주에 도착해서부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지만, 어쨌거나 지금 한국에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일본에 계속 남을 수 있다면 좀 더 낫겠지만 재혁이든, 최 회장이든, 아니면 윤일환 사장이든 하진을 찾아내는 건 그리 멀지 않은 일일 것이다.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했다.

미리 시간표를 보고 온 하진이 손목시계를 보며 시간을 계산하고 있을 때였다. 대합실 가운데에 놓여있던 커다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하진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스크 위로 드러난 하진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하진이 텔레비전 가까이로 다가간다. 갑자기 밀려드는 갑갑함에 하진이 쓰고 있던 마스크를 잡아 내렸다.

[……서울지검 특수2부는 17일, 장부영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하여, 대원건설의 윤일환 사장을 뇌물혐의로 불구속 입건하였습니다. 윤 사장은 현재 평소 앓던 지병을 이유로 수사에 적극 협조하지 않고 있어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 관련해 원국당 최해원 원내 대표를 뇌물수수와 뇌물요구 혐의로…….]

화면 안에서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사이로 휠체어에 앉은 채 지나가고 있는 것은, 분명 하진의 양아버지인 윤일환 사장이었다. 뉴스를 접한 하진이 뒷걸음을 쳤다. 자신이 사라진 시점에 갑자기 비리의혹이 터지다니. 시선이 분산될 테니 다행이라고 봐야 할까. 윤일환 사장은 휠체어에 앉은 채 이전에 없이 생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윤일환 사장의 얼굴을 끈질기게 담아낸 화면이 곧 다시 아나운서의 얼굴을 비추었다.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친모도, 양부도,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이야기였다. 하진이 결심한 듯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가 놓았다. 희게 질렸던 입술이 삽시간에 다시 빨갛게 물든다. 하진은 다시 마스크를 눈 바로 아래까지 잡아 올렸다.

대합실을 나선 하진이 매표소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커다란 눈은 여전히 경계심에 젖어있다. 이른 새벽 시간이라 창구가 모두 열리지 않아서인지, 줄은 꽤나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진이 줄의 끝에 가서 섰다.

하진은 끝없는 것처럼 길게 늘어선 사람들 사이에서, 멍하니 재혁을 생각했다. 자신이 떠난 걸 알았을 때 재혁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이혼서류를 두고 나왔으니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후련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우습다고 생각했을까. 그도 아니면 화가 났을까.

상념에 빠져 있는 하진의 곁으로, 양복을 입은 사내들 무리가 지나갔다. 하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인다. 오히려 눈에 띌 것 같아, 뒤집어쓰고 있던 패딩의 후드도 잡아 내렸다. 하진의 신경이 남자들에게 향했다.

“……아직 특별한 점 없습니다. 탑승자 명단 확인했습니다.”

사람들이 많고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어 뭐라 말하는지 하진은 들을 수 없었지만, 하진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을 잡기 위해 보내진 사람들이었다. 저들을 보낸 것이 재혁인지, 최 회장인지, 아니면 양부나 또 다른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하진이 자연스럽게 줄에서 물러나 터미널 바깥으로 뛰어나왔다. 출구 앞에 주차되어 있는 택시를 잡아탄 하진이 택시 안에서 숨을 몰아쉰다. 아무래도 해외로 가는 것은 당장은 불가능해 보였다.

* * *

[……오늘 아침, 대원건설 전 사장인 윤일환 씨에게 징역 5년, 집행유예 8년이 선고되었습니다. 윤일환 씨는 대원건설 자금 수 십억 원을 횡령해 국회의원 장 씨와 김 씨 등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지난 17일 불구속기소 된 바 있었습니다. 이에 서울고법 장희태 판사는…….]

무표정으로 TV를 보던 재혁의 미간에 살짝 실금이 갔다. 대표실 바깥으로 듣기 싫은 소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런 때에는 불청객이 오기 마련이다. 재혁이 피곤하다는 듯 손을 들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곧이어 대표실 문 쪽이 시끄럽게 울리며 문이 열렸다. 재혁의 차가운 눈이 그곳을 향한다.

“강재혁!”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에 비해 초췌해진 꼴로, 문가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은 하진의 형인 윤민형이었다. 재혁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그의 얼굴을 차갑게 바라보았다. 윤민형은 정장을 갖춰 입기는 했지만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비서실이나 경호팀에서는 윤민형이 누군지를 알고 있기에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못하고 재혁의 눈치만 보고 있다.

“됐으니까 문 닫고 나가요.”

재혁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서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 너무나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어 오히려 냉기가 떨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비서진과 경호팀이 끝까지 눈치를 보며 대표실 문을 닫자, 윤민형이 재혁의 쪽으로 달려들었다. 윤민형이 재혁이 앉아있는 책상을 손으로 세게 내려치자, 재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가지로 바쁠 텐데, 나한테 인사 올 시간이 있나?”

재혁이 고개를 까닥이며 TV를 가리켰다. 브라운관은 이제는 수의를 입은 채 연행되고 있는 윤일환 전 사장을 비추고 있었다. 민형의 눈동자 안으로 다시 풍랑이 일었다.

“우리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대체 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봐요, 강 대표. 강 대표.”

민형이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재혁의 팔을 붙잡았다. 기세 좋게 재혁의 이름을 소리치며 나타날 때는 언제고, 재혁의 앞에 서니 다시 꼬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남자로서의 본능인지,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자의 심정인지는 알 길이 없다.

“왜 이러는 건지 얘기나 해 주면!”

“그걸 몰라? 지금 정말 몰라서 나를 찾아온 겁니까?”

재혁이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민형의 손을 뿌리쳤다.

“윤하진.”

“씨발, 그게 없어진 걸 나한테 왜!”

민형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눈이 뒤집혀서는 재혁의 앞에서 소리를 질러댄다. 재혁은 그런 민형을 경멸하는 눈으로 지켜보았다.

“내가 그 년 빼돌렸어? 씨발, 네가 벌인 짓인 거 내가 모를 거 같냐고!”

“안다니 다행이군.”

민형이 악을 쓰다 제풀에 지쳐 헉헉댔다. 그런 민형을 재혁은 벌레라도 보듯 내려다본다.

“사업의 기본 아닙니까. 계약하기 전에 상대의 약점을 아는 건.”

“…….”

“그리고.”

재혁이 잠깐 눈을 내리감았다. 하진이 사라진 이후 제대로 잠을 이룬 적이 없었다. 피로감에 예민해진 컨디션으로 민형과 마주하고 있자니 불쾌감이 치솟았다. 재혁은 그를 억지로 눌러 담으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계약이 파기됐으면 대가가 있어야지.”

“우리도! 하진이 찾고 있어요. 하진이 찾고 있단 말입니다.”

윤하진이 사라져서 곤란한 것은 재혁뿐만이 아니었다. 하진을 최 회장에게 넘겨 대원의 계열사 하나를 받으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물거품이 됐다. 비빌 데라고는 대원건설 사장직에 있는 부친뿐이었는데 이제 구속까지 된 범죄자 신세다. 분명 이 사건이 터진 건 재혁의 짓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민형이었다. 민형은 금방 또 태세를 바꾸어 재혁의 앞에 빌빌댔다.

“내가, 내가 하진이를 잘 압니다. 시간만 좀 주면.”

“입 좀 닫아줬으면 좋겠는데, 불쾌하니까.”

“뒷돈 찔러주는 것도 없이 건설업을 어떻게 합니까! 강 대표님, 아니 매제.”

윤민형은 급기야 재혁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다.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재혁은 빗겨진 시선으로 그런 민형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제발, 기회를 주시면.”

“그래서 지금 주잖습니까. 유급 휴가 줄 테니 윤하진 찾아와요.”

재혁은 윤 씨 집안을 모두 붕괴시킬 생각이었다. 여기까지 왔는데도 윤민형이 하진을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을 봐서는 윤하진은 집안과 독단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윤하진이 아무리 도망을 치고 있다고는 해도, 윤일환 사장이 구속된 것 정도는 알게 되겠지. 어떻게 해서든 하진을 돌아오게 할 생각이었다. 집안을 위해서 계약결혼까지 불사했던 사람 아니었던가. 결혼을 추진하면서 캐어냈던 윤일환 사장의 횡령, 뇌물 비리 카드를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태연하게 유급 휴가를 운운하는 재혁의 얼굴에 무릎을 꿇었던 윤민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금방이라도 재혁의 멱살을 틀어쥘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저한테 이러면 안 되실 겁니다, 강재혁 대표님.”

윤민형이 부들부들 떨며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말했다. 그런 민형을 재혁은 우습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이렇게 되기까지 윤 씨 일가가 하진에게 동조한 죄가 작지 않다고, 재혁은 생각하고 있었다. 하진을 자신의 눈앞에 내어둔 것도 그쪽이니 하진을 잃은 것에도 책임을 져야 했다. 다른 것보다도 하진이 자신을 떠난 것에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지만.

“이러면 안 됐던 건 당신이지. 윤하진 찾아와.”

“강재혁…….”

“그게 나도 살고, 당신도 사는 일이야.”

악에 받친 윤민형의 눈가가 붉게 충혈된 채 파르르 떨렸다.

* * *

“신분증 있어야 되는데요.”

손바닥만 한 크기로 구멍이 뚫린 유리 사이로 퉁명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사투리가 묻어 있었다. 벌써 세 번째 거처였다.

“제가 신분증을 잃어버려서요.”

“신분증 없으면 안 돼요.”

남자는 유리 너머에서 무얼 하는지 재빠르게 컴퓨터 타자를 치더니 마우스를 연신 클릭해댔다. 하진이 옷을 뒤적거리더니, 봉투에서 5만 원 권 한 장을 빼 유리 너머로 밀어 넣었다.

“어떻게 좀 안 될까요? 좀 피곤해서.”

“아…… 안 되는데. 얼마나 있을 건데요? 대실이에요?”

“아니요, 일주일 있을 거예요.”

“아, 진짜 안 되는 건데.”

두꺼운 손이 유리 사이로 쑤욱 나오더니 5만 원짜리를 가져갔다. 하진은 안도의 숨을 살짝 내쉬었다.

“근데 여 뭐 볼 거 있다고 일주일이나 있어요?”

송정 바다 바로 앞의 허름한 모텔이었다. 보통은 연인들이 급하게 와서 하룻밤을 빌리는 정도의 곳일 것이다. 모텔 직원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하진에게 물으며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유리 사이로 계산기를 내밀었다. 하진이 지불할 돈은 다행히도 그리 크지 않았다.

“그냥…… 바다 좋잖아요.”

안 좋은 기억 여기다 다 버리고 가기도 좋고.

하진이 봉투를 뒤적거려 돈을 지불하자, 남자가 거스름돈과 함께 모텔 키를 내밀었다.

“5층이에요.”

하진은 바로 키를 집어 들고는 좁고 낡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덜컹거리던 엘리베이터가 곧 멈추자, 어두컴컴한 모텔 복도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로 하진을 맞았다.

송정 앞바다 가까이에 있는 모텔이라고는 하지만, 창문도 좁은 데다 애초에 건물에 둘러싸여 있어 바다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진은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져 얼굴을 묻었다. 침구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왜 지금 이 순간 재혁의 향기가 그리운 건지 모르겠다고 하진은 생각했다.

허전한 마음에 TV를 틀자, 통속적인 연속극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지나가는 자막 뉴스에, 하진의 양아버지가 결국 수감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상할 만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저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었나 느낌이 들 정도로. 저 세계에 있던 것도 모두 꿈같다. 안 좋은 꿈. 하진은 TV를 꺼 버리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나도, 할 말 있어. 이따 퇴근하고 보지.’

재혁이 자신에게 해준 마지막 말. 하진은 가만히 눈을 깜박이며 허름한 천장을 보았다. 재혁은 그때,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걸까.

* * *

차에 막 오르려는 최 회장의 뒤로 누군가의 소리침이 울렸다. 그 소리는 마치 짐승의 울부짖음 같이 들리기도 했다. 리무진과 최 회장 옆으로 길게 늘어선 경호원들을 차마 뚫지도 못하고 소리만 고래고래 질러대는 그 사람의 정체는, 최 회장도 잘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최 회장이 거만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옆으로 까닥거리자 경호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몸을 움직여 견고한 벽에 틈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울부짖음의 근원이었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최 회장 앞으로 뛰어들었다.

“자네, 오랜만이구만.”

최 회장의 주름진 입술 한 쪽이 비릿하게 위로 솟았다. 면전에 대고 보란 듯이 비웃고 있었다.

“회장님, 이러시는 거 아닙니다. 저랑 아버지는!”

“사람들 시끄러워지니, 우선 타지.”

최 회장의 늙은 몸 앞에서 기세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그는 윤민형이었다. 최 회장이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몸을 돌리자, 수행원들이 리무진의 문을 열어주었다. 최 회장이 리무진에 몸을 실은 후, 민형과 수행원의 시선이 부딪힌다. 수행원이 타라는 듯 손짓하자 그 때서야 민형이 리무진에 올랐다. 바깥에서 문이 닫히고 얼마 안 있어 리무진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그래, 날 만나고 싶어 했다고?”

“어떻게 회장님께서 저한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계속 민형의 접견 요청을 받아주지 않았던 최 회장이다. 최 회장은 괜히 턱 부근을 매만지며 딴청을 피웠다. 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여유롭고 능청스러운 모양이었다.

“경우가 없구만. 이렇게 갑자기 와서는.”

“저하고 아버지가 얼마나 회장님께 충성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재혁도 찾지 못하는 하진을 민형이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버지는 대원건설 사장직에서 해임된 후 수감되었고, 자신은 이제 끈 떨어진 연처럼 어디 하나 기댈 곳도 없다. 뒷배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강재혁이었는데, 태성건설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제 민형에게 남은 것은 최 회장뿐이었다.

“그랬던가.”

“이시연이 강재혁과 접촉했었습니다. 전화를 걸었던 모양입니다.”

“……그래?”

은근하게 최 회장의 눈빛이 민형을 향했다. 주의를 끌었다 생각한 민형은 때를 놓치지 않고 최 회장에게 매달린다.

“도청까진 못해서, 이시연이 어디까지 말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한테 사주받았다는 것까지 말했는지는.”

“흐음.”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강재혁, 저 내친 거나 다름없습니다.”

민형은 이제 와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떤다.

“다 회장님이 지시하신 것 아닙니까. 집안 풍비박산 나고 저는 이제 정말 회장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 버리시면.”

“…….”

윤민형과 윤일환 전 사장을 통해 이시연을 조종하고, 스캔들로 재혁과 하진을 갈라놓게 한 주동자. 최 회장은 말없이 윤민형을 바라보았다. 주름진 눈꺼풀 아래 눈동자만은 형형한 맹수의 눈빛으로 민형을 꿰뚫는다.

“그래서 자네들이 조건 없이 응했나? 충분한 보상을 받았지 않았나.”

“회장님을 원망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다만.”

“자네 부친 덕에 내가 얼마나 곤란해졌는데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내 앞에 나설 생각을 하는지.”

최 회장의 얼굴이 짜증으로 일그러지자, 민형은 금방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납작 엎드렸다.

“회장님.”

“오메가 하나 옆에 앉히는 게 이렇게 힘들어서야.”

쯧. 최 회장이 혀를 차며 민형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민형은 자신의 눈앞에 놓인 동아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민형의 눈동자가 떨렸다. 최 회장도 없으면 자신의 안위는 보장할 수가 없다.

“하진이 제가 찾을 겁니다, 회장님.”

“자네가 그 아일 무슨 수로 찾겠나.”

다시 돌아본 최 회장의 눈은 민형을 비웃고 있었다.

“내게 자네가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해 보게.”

순간, 민형은 강재혁이 떠올랐다. 그가 지난번 자신에게 주었던 모욕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민형이 사는 길은 하진을 찾는 것뿐이라고 말하던. 치솟는 복수심에 민형이 주먹을 꽉 쥐었다.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려 윤하진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면, 윤하진을 이용해 장사라도 하는 게 남는 일일 것이다.

“설령 강재혁이 먼저 하진이를 찾아내더라도, 회장님 품으로 안기게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소린지 이해가 가질 않아 최 회장이 민형을 바라보았다.

“……비디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진이를 찍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시 서서히, 최 회장의 입가에 웃음이 걸린다.

“그거, 마음에 드는구만.”

최 회장과 윤민형 사이, 마지막 위험한 거래가 성사되던 순간이었다.

* * *

부산에서 양산을 거쳐 김해까지 올라온 하진은 계속 보증금이 없는 허름한 여인숙이나 고시원을 전전하고 있었다. 짐은 항상 최소화시키고, 숙소가 정해져도 짐을 풀지 않았다. 언제든 도망가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아직 자금이 당장 부족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망을 다니고 몸을 숨기는 것 자체가, 하루하루가 다 돈이었다. 하진은 실소가 터진다. 다 돈이 문제구나.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힘들었고, 커서는 돈 때문에 팔려가고, 지금은 또 돈이 없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때를 봐서 해외로 나가는 게 좋겠지만 그게 언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후…….”

답답한 마음에 하진이 겉옷을 걸치고 모자를 눌러썼다. 이동할 때가 아니면 거의 바깥을 오가지 않던 하진이지만, 늦은 밤에는 간혹 바깥을 나가 먹을 것을 사오곤 했다. 갑갑하기 그지없는 고시원을 나서자 찬바람이 하진의 코끝을 스쳤다. 하진은 주머니에 들어있던 마스크를 꺼내 양쪽 귀에 걸었다. 언제든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고시원 가까이에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하진이 포장된 삼각 김밥이나 빵 따위를 집어 들던 때였다.

“……야, 물 빼러 갈래?”

“그때 갔던 오메가 업소 괜찮던데.”

오메가 업소에 대해 이야기하는 젊은 남성들의 목소리에 하진의 손이 멈칫했다. 하진은 잠시 잊고 있었던 자신의 형질에 대해서 생각했다. 해외에도 나가지 못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자금도 모두 떨어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될까. 보통의 다른 오메가들은 밤세계에서 몸을 팔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하진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 업소의 어떤 오메가가 괜찮다더라, 새로운 업소가 생겼다더라. 성을 돈 주고 산다는 것에 대한 부끄러운 인식조차 없는 남성들의 목소리가 하진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진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굳히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너 이 새끼, 넌 알파라고 갈 때마다 대우받잖냐.”

빵 봉지를 쥔 하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 무리 사이에 알파가 섞여 있는 것이다. 알파라면 당연히 하진의 오메가 페로몬을 맡게 될 것이고,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짧은 시간 하진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 잠깐만. 여친한테 연락 온다. 닥쳐봐.”

하진의 우려와 달리, 아무런 기미도 없이 그들은 하진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하진 역시, 알파가 있다는 느낌은 받았지만 조금도 흥분을 느끼지는 못했다. 단지 조금의 불쾌감을 느꼈을 뿐…….

긴 속눈썹 아래 하진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런 증상이 일어나는 경우를 하진은 알고 있었다. 하진이 천천히 편의점 약품 코너로 발길을 돌렸다. 하진의 시선이 멈춘 것은 오메가용 임신 테스터기였다.

설마, 말도 안 된다. 불임이라고 했을 텐데.

아이를 잃고 너무도 아이를 바랐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생긴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진이 무의식중에 아랫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재혁의 만류로 가임적합성 검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불임이 확실한 것도 아니었다. 도망 오기 전 재혁과 몇 번 몸을 섞었던 것도 기억이 난다. 그중 재혁이 노팅을 한 적도 있었다는 것 역시 떠올랐다. 하진의 떨리는 손이 테스터기를 두 개 집어 들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이를 도저히 환영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이 기분은 뭘까. 자꾸만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은.

* * *

고시원에 들어오자마자 짐을 푼 하진은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아이를 바라는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뒷면의 테스트 방법을 꼼꼼하게 살핀 하진이 다리 사이에 가져갔던 테스터기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테스터기를 든 손은 왠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진도 모르게 아랫입술이 이에 짓눌렸다.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고 있는 거라 하진은 스스로를 조롱하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했다.

하진은 테스터기의 창에 줄이 뜨기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있다. 그리고 곧, 결과 창에 초록색 두 줄이 엇갈린 열 십자(十)가 떠올랐다.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하진은 작은 결과 창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툭 눈물이 떨어졌다.

가족이 생긴다.

두 번째로 찾아온 아이였다. 절대 이번에는 잃어버리지 않으리라. 품에 안아보지도 못하고 떠나보냈던 아이가 떠올라 하진은 좁은 화장실에서 엉엉 울었다. 그때는 소중한 줄도 모르고 아껴주지도 못했다. 이번에는 절대 후회하지 말아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지. 자신의 뱃속에 다시 잉태된 작은 생명을 이번에는 꼭 자신이 지킬 수 있기를 하진은 간절히 빌었다.

“윽…….”

소리도 내지 못하고 하진은 가슴을 툭툭 치며 울었다. 자신 말고는 이 아이의 잉태를 축하해줄 사람도 없다.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도 못한다. 도망치는 신세라 좋은 것을 듣고 보는 것도 해줄 수가 없다. 주치의가 말했듯 습관성 유산이 될지 모르니 더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래서는 병원도 자주 갈 수가 없어 걱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하진은 재혁을 떠올린다.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이 재혁을 떠나는 이유 중 한 가지였다. 그렇다면 이제 재혁에게 돌아가도 되는 걸까. 그가 나와 아이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재혁이 이 아이의 아빠였다. 그에게 임신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가 자신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뒤섞인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각이 멈추는 것은, 윤민형이다. 윤민형이 비디오를 가지고 있는 한 자신은 윤민형에게 자유롭지 못했다. 이미 결혼까지 한 자신에게 오피스텔로 오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했던 그다. 이제 더는 싫었다. 윤민형에게 몸을 주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이제는 구역질이 났다. 그럴 수는 없다. 그건 죽기보다도 싫었다. 자신을 타인에게 맡기는 건 이제 끝이었다. 자신도, 그리고 뱃속의 아이도 자신의 손으로 지켜낼 것이다.

“하아…….”

하진이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이제 갓 자리 잡은 새 생명에게, 하진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 * *

바람에 종이가 날리는 소리와 함께 서류들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졌다. 이후 찾아온 고요 속에서 재혁의 눈은 맹수처럼 형형하다.

“사람 하나 찾는데 이렇게 오래 걸립니까.”

“……죄송합니다.”

“그렇게 죄송하면 빨리 찾아내세요.”

재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눈썹 뼈 위를 매만졌다. 하진이 사라진 지 이미 수개월이었다. 간혹 하진의 자취를 밟기는 했지만, 항상 하진이 떠난 뒤였다.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CCTV가 많지 않은 도시 외곽에 주로 기거하고 밝은 때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 듯했다. 어지간히 도망에 소질이 있는지 사람을 그렇게 풀었는데도 아직까지 윤하진 하나를 잡아 오지를 못한다.

“나가요.”

재혁이 깊게 숨을 내뱉으며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윤하진을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마음속에서는 불길처럼 증오가 치솟았다. 계약서를 쓰고 시작한 결혼이었고, 재혁 역시 사랑으로 시작한 결혼이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이 감정은 논리로 설명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너무 뻔한 오메가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리 따져 봐도 말이 안 되는 것 투성이었다. 자신의 명예를 버려가며 거짓으로 버림받은 오메가인 척하고, 푼돈을 들고 도망자 신세를 자청한다는 것 자체가. 그래서 더 붙잡고 싶어지는 것이다. 찾아내서 무슨 일인지 알아야겠으니까.

“저, 대표님.”

정 비서가 나가라는 재혁의 말에도 나가지 못하고 재혁의 앞에서 서 있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천천히 그를 향하자, 그는 동요도 없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비서 일에 천직인 사람이었다.

“우희은 씨가 여성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대표님 이야기가 조금 들어간 모양입니다.”

“별 게 다 신경 쓰이 게 하는군.”

우희은은 우장훈 야당 대표의 딸로, 최근 재혁과 몇 번 식사 자리를 가진 적이 있었다. 우장훈 야당 대표는 윤일환 대원건설 전 사장을 구속시키는데 큰 역할을 해 준 장본인이었다. 때문에 그가 다리를 놓아 주는 우희은과의 자리를 피하기도 민망해 몇 번 함께 식사를 했던 것이 다였다.

“어떡할까요.”

“내버려 둬요. 하고 싶은 대로 떠들라고 해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재혁이 나가라며 손짓을 했다. 언론에는 하진이 건강 문제로 잠시 요양을 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하진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건 이미 정재계에는 소문이 다 퍼진 상태였다. 재혁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재력이나 우성알파라는 형질을 제외하고라도 매력적인 남자였다. 아직 태성그룹의 후계자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시 비어버린 재혁의 옆자리를 노리는 여성들은 여전히 많았다. 우희은 역시 그런 여성들 중 하나였다.

재혁은 모든 일에 피로감을 느꼈다. 바깥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하든 그는 관심이 없었다. 친구인 지욱 역시 오메가 하나가 사라졌다고 이렇게 변해버린 재혁을 낯설다 했다. 재혁이 관심을 쏟는 것은 오직 윤하진 하나였다.

윤하진을 생각하면 항상 재혁의 안에서는 한 가지 질문이 남곤 했다. 자신은 대체 하진을 찾아서 어떻게 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재혁은 자신도 왜 이렇게 하진을 필사적으로 찾는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왜일까.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의 이 증오로 끝까지 미워하고 처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것일까.

자신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해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일까.

그게 아니면…….

* * *

임신 테스터기 두 개 모두 임신으로 판정이 나왔다. 믿기 힘든 기적 같은 일이었지만, 정말 임신이었다. 떠나기 전에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재혁과 자신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여러 가정들을 해보지만, 결국엔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하진은 계속 재혁을 떠난 자신을 후회하거나 책망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한다.

하진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적지 않은 돈을 가지고 도망 나오기는 했지만, 아이를 낳을 때까지 생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일을 구할 수도 없는 상황이고, 아이를 가졌다면 더더욱 일용 노동 같은 것은 할 수도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하진의 시선 끝에, 이제는 다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공중전화기가 들어왔다. 하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공중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재혁에게 전화를 걸까.

어쩐 일이었는지 재혁의 번호만큼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하진과 공중전화기 사이로 여러 사람들이 바삐 지나간다. 시야가 모두 흑백으로 물들었다. 재혁에게 전화를 걸어 무어라고 말한단 말인가.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날 찾으러 와달라고?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이야기였다. 하진은 한숨을 쉬며 버스에 올랐다. 우선은 다른 지역으로 가서 산부인과를 먼저 들러야겠다고 하진은 생각한다. 아침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하진은 버스에 오르며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김해에서 다시 포항으로 올라가는 버스였다. 터미널에 주욱 늘어선 버스들 안으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하진이 탄 버스에도 사람들이 차곡차곡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하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창가 자리에 앉아있었다. 버스 안이 거의 자리를 채웠을 때, 출발 시간이 되었고 곧 버스는 터미널을 떠났다.

“아…….”

하진은 쓰고 있는 검은색 모자를 더 깊게 눌러쓰며, 배를 감쌌다. 배에서 낯설지 않은 통증이 일었다. 얼굴과 등에 식은땀이 배어 나온다. 하진은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배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조금 신경 쓰일 정도였던 통증은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봐요, 학생. 괜찮아요?”

버스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각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중년의 여성이 하진의 팔에 살짝 손을 대며 하진의 얼굴을 살폈다. 하진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에 띄어 좋을 게 없는 상황이었다.

“괜찮…….”

“얼굴이 창백한데!”

정신이 깜박거리며 점멸하는 것 같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린 하진의 눈에서 눈물이 차올랐다.

유산.

재혁의 얼굴이 떠오른다. 재혁을 다시 만나게 될 수나 있을까. 다시 사랑할 수는 있을까. 언제 또다시 아이를 갖게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가 없다.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절대 잃어선 안 되는데.

정말 유일한 내 가족인데.

하진의 몸이 앞 좌석 쪽으로 고꾸라지자 옆좌석에 앉아있던 중년 여성의 눈이 커다래졌다. 조금 상태가 안 좋은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어머, 학생! 학생!”

하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목포 시내의 한 대학병원 응급실.

“abortion(*유산) 가능성 보이는 남성 오메가입니다. bleeding(*출혈) 있었지만, 현재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신원미상이라 아직 보호자와는 연락을 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휴대폰은.”

“소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환자 깨어나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신원미상, 휴대폰도 안 가지고 있는 남자 오메가. 이거 병원비 낼 여력이나 되겠어?”

임신한 남자 오메가라면 뻔한 이야기였다. 어디에서 몸 굴리다 임신해서 여기까지 굴러 들어온 거겠지. 남자 의사 하나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트는 옆으로, 베드에 누워있는 하진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난다. 하진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듯 수액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저기, 병원비는 아마.”

“뭐.”

“소지품에서 현금으로 들고 다니기엔 꽤 많은 돈이 나왔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 같습니다.”

“뭐? 그게 더 이상하잖아.”

남자 의사가 다시 몸을 홱 돌려 하진의 얼굴을 보았다. 그도 열성알파였는데, 하진의 얼굴은 알파들이 오메가를 향해 가지고 있는 스테레오 타입 그 자체는 아니었다. 색기가 있기는 했지만…….

“소지품 봐봐.”

“아, 네. 여기.”

그가 인턴이 내미는 하진의 소지품을 받아들었다. 검은색 모자와 온통 무채색 계열의 옷들, 그리고 오 만 원권 묶음의 돈다발과 반지.

“이거 뭐야.”

“아, 환자 소지품에서 나온 건데.”

“그걸 몰라서 물어? 오메가가 이런 반지를 어떻게 가지고 있어? 이거 장물 아니야?”

하진이 태성그룹으로부터 받았던 결혼반지였다. 정교하게 커팅 되고 세공된, 거기다 다이아 크기부터가 압도되는 반지는 한눈에 봐도 수억 원을 호가할 것 같았다. 어디에서나 눈에 띌 정도의 미모의 남성 오메가, 현금 뭉치, 다이아 반지. 아무래도 보통 환자는 아닌 것 같았다.

“교수님께 말씀드릴 테니 우선 이 오메가 도망 못 가게 잘 붙들어놔. 알겠어?”

“네.”

남자는 처세술에 밝고 냄새를 잘 맡는 부류였다.

* * *

하진은 재혁의 꿈을 꿨다. 꿈에서의 그는, 떠나기 전 함께 했을 그때처럼 다정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하진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헉…….”

하진은 일어나자마자 자신의 팔을 감쌌다. 입고 다니던 옷 대신 말끔하게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아직 사태 파악이 되지 못한 하진의 곁으로 가습기가 내뿜는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하진의 눈이 불안하게 주변을 살폈다. 익숙하지만 익숙해서는 안 될 풍경이 하진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 호화롭고, 또 텅 비어있는 1인실. 하진의 불안한 시선 끝에 한 사람이 닿았다. 병원의 간호사로 보이는 그녀는, 하진이 깨어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괜찮으세요? 기분은 어떠세요?”

“저기.”

상냥한 그녀의 말투에도 하진은 지레 겁을 먹는다.

“저 어떻게 된…….”

“아이는 무사해요. 산모님도 괜찮으시구요.”

하진의 바이탈을 체크한 그녀가 살풋 웃으며 하진에게 대답했다. 하진은 반쯤 안도했다. 정신을 잃는 그 순간에도, 아이가 또 자신을 떠날까 봐 걱정했던 하진이다.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습관성 유산 가능성이 있으셔서요. 무리하시면 절대 안 돼요.”

“…….”

하진이 환자복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가 무사하다는 것만으로도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1인 병실은 다 뭐란 말인가.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하진은 지금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머, 뭐 하시는 거예요!”

하진이 링거 바늘을 빼내려 하자 간호사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하진을 막아서는 간호사와 하진의 눈이 마주친다. 절박하게까지 보이는 하진의 눈에, 놀란 것은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제가 사실, 이러고 있으면 안 될 사정이 있어서요.”

“아직은 안정 취하셔야 해요. 그리고 산모님…….”

간호사가 말끝을 흐렸다. 하진은 그런 간호사의 태도에 이미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때, 간호사의 등 뒤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하진은 간호사의 어깨너머로, 병실에 들어서는 양복을 입은 남자 무리를 지켜보았다. 마른 손목이 떨렸다.

“잠시 자리 좀.”

“아, 네.”

뒤에 들어온 남자 중 하나가 간호사에게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자, 아직 어려 보이는 그녀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자리를 피했다. 하진은 병실을 떠나는 간호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양복 무리의 남자들을 쳐다보았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

무리 중 가운데에 서 있던 남자가 몇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하진의 앞으로 섰다.

“누구시죠.”

하진의 말투는 날이 서 있었지만, 하진은 겁을 먹고 있었다.

“윤하진 씨, 일어나셨으니 같이 서울로 가 주셔야겠습니다.”

“……제가 왜요.”

쿵쾅쿵쾅쿵쾅. 심장이 쉴 새 없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하진은 불안하게 그들을 응시한다. 누군가가 보낸 사람들이 분명했다.

“대원그룹 최 회장님께서 보내셨습니다.”

하진이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그럼에도 팔의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고속버스에서 정신을 잃은 하진이 이송된 곳이 하필 목포 대원병원이었다. 하진의 소식을 들은 최 회장은 바로 수하들을 목포로 내려보냈다. 언론에 노출되기 전에, 그리고 강재혁이 눈치채고 손쓰기 전에 데려와야 했다.

“제가 최 회장님께 가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진이 애써 태연한 척을 하며 말했다.

“회장님께서도 윤하진 씨가 그렇게 말씀하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

“USB를 가지고 있다고.”

하진의 눈앞으로 검은 장막이 떨어졌다.

* * *

“이번 분기 매출 실적 관련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톡톡톡. 재혁의 손끝이 테이블 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열정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앞에 두고 재혁은 하진을 생각했다. 벌써 하진이 사라진 지 수개월이었다. 테이블을 두드리던 재혁의 손이 뚝 멈췄다. 재혁의 한쪽 눈이 좁혀지며 눈가가 일그러진다.

금방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많은 돈을 들고 도망간 것도 아니고, 아예 출국금지를 내렸으니 여권을 위조하거나 밀출국하지 않는 이상 이 손바닥만 한 나라 안에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잡힐 듯 말 듯 좁혀지던 하진의 자취가 어느 순간 가위로 잘라낸 듯 사라져 버렸다. 금방 찾아내 죽든 살든 자신의 옆에 앉혀놓으려고 했었는데 예상과 달리 돌아갔다.

재혁이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나중에 듣죠.”

도저히 프레젠테이션을 듣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재혁이 그대로 의자에 걸려 있던 자신의 재킷을 들고 회의실을 나섰다. 하진이 사라진 이후로 계속 컨디션이 좋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하진을 찾을 수 있을까. 계속된 그리움과 버려졌다는 자각은 재혁을 자학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곧 하진을 향한 증오로 탈바꿈한다. 재혁은 하진을 찾아 갈기갈기 찢어놓고 싶었다. 하진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자신의 옆에 두고, 다시 제대로 오메가 취급을 할 작정이었다. 알파의 아랫도리를 품어주는 예쁜 인형, 그 정도로. 하진의 집안을 박살 낸 것도 그 일환이었다. 하진을 사랑했던 자신에게 결국 이런 결과라면, 정말 철저하게 하진을 ‘오메가’로 만들어주겠다고 재혁은 매 순간 다짐했다.

숨을 쉬지 못하겠다. 재혁이 괴로운 듯 이마를 감싸며 대표실로 들어갔다. 대표실에는 하진이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다. 재혁이 이마를 감싼 채 그림 앞에 서 있자, 재혁의 뒤로 정 비서가 들어왔다. 정 비서는 힘들어 보이는 재혁의 모습에 잠시 머뭇거린다.

“뭡니까.”

“다음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지금 하세요.”

재혁이 단호하게 정 비서의 말을 잘랐다.

“윤하진 씨 위치 잡아냈습니다.”

9개월 만이었다. 재혁이 바로 이마에서 손을 떼어내 정 비서를 바라보았다.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몸 상태가 심상치가 않아 보였는지 정 비서가 놀란 눈을 한다.

“어디 있던가요.”

“저, 대표님.”

“윤하진 어디 있냐고, 씨발!”

재혁이 소리를 지르자 정 비서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대원 최 회장 자택에…… 대표님!”

휘청거리는 재혁의 거구의 몸을 정 비서가 받았다. 재혁은 어금니를 악물고 있었다. 벌게진 두 눈은 분노로 인한 것인지, 후에 진단받은 위경련의 고통 때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흐트러진 슈트를 재혁이 부여잡았다.

“대원 최 회장…… 하하하…….”

재혁은 망연하게 웃었다. 태성의 일원으로도 만족하지 못했던 이유가, 대원그룹이었던 건가. 재혁은 위경련으로 비틀거리면서도 하진을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하진을 되찾을 것이라고.

그리고 하진을 자신 이상으로 처참하게 망가뜨릴 것이라고.

* * *

대저택의 높은 천장 아래, 하진이 서 있었다. 호화롭지는 않지만, 결코 좁지 않은 방 안에는 아기침대와, 그 안에 갓난아이가 잠이 들어있었다. 아이의 잠든 모습은 명화 속 아기 천사의 형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하진의 모든 것이었다. 하진의 봉긋 솟아있던 배는 어느새 푹 꺼진 채, 이전처럼 마른 몸이었다. 아이가 잠든 공기는 평온했지만, 결코 평안하지만은 않았다.

하진은 곧 수개월 전의 일을 떠올린다. 목포에서 서울로 잡혀 와 최 회장을 마주했던 그 날을.

‘내가 왜 자네 임신을 기사화 시켰는지 아나?’

‘…….’

‘강재혁 그 친구 스캔들을 내기 전에 최대한 자네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다면, 이해하겠나?’

아이의 모빌을 만지던 하진의 손이 멈췄다. 끔찍한 기억이다. 대체 최 회장은 자신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었어야 만족했을까. 아니, 지금 만족하고 있을까.

‘그럼 도망치고 싶을 거 아니겠나. 그럼 나 같은 노인네에게라도, 힘 있는 자에게 오게 되어 있으니.’

‘……죽어도 당신한테는 안 가.’

하진의 손안에서 모빌에 달린 인형의 섬유가 짓이겨졌다. 자신을 보며 즐거운 듯 웃고 있는 최 회장의 얼굴이 떠올라 하진은 구역질이 난다.

‘이게 뭔 줄 알고 있나?’

‘…….’

‘사내 받는데 영 소질이 없더군.’

최 회장의 손안에서 굴려지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을 담고 있을지 뻔히 예상이 되는 USB였다. 하진은 결국 손안에 쥐었던 모빌을 놓고 방 안에 딸린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하진은 바로 몸을 숙이고 양변기를 붙잡아 속을 게워낸다. 아들보다도 어린 사내에게 발정하고, 옭아매려는 용도로 그런 영상을 이용하는 속내에 진심으로 구역질이 났다. 최 회장이 어디서 그것을 구했는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윤민형이 넘겼겠지. 그 쓰레기라면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는데 상상하지 못했던 자신이 바보였다.

‘준원이 형, 아니 최 전무님 때문에, 저한테 이렇게까지…….’

‘아니, 이제는 그냥 자네가 마음에 드는 걸세.’

주름진 얼굴이 하진을 향해 웃었다.

‘어떻게 하겠나? 이제는 이 늙은이에게 안길 마음이 생겼나?’

역겹다.

하진은 최 회장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다시 한번 수면을 향해 구역질을 뱉었다.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수면 위로 떨어진다.

‘아이를.’

‘아이? 들었네. 자네 이제 불임인 줄 알았는데.’

‘낳고 싶습니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최 회장에게 족쇄를 잡힌 상태에서 아이를 지키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만이라도 자신을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하진으로서는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자 방어였다. 하진은 이전의 유산으로 인해 유산기가 있는 데다 오랜 도망으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다. 다른 알파와의 성교는 아이가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말이 최 회장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했다.

‘다음 아이는 내 핏줄이어야 할 걸세.’

최 회장은 하진에게 마지막 아량이라는 듯, 본채에 하진의 거처를 만들어주었다. 하진은 그곳에서 갇혀 세상과 차단된 채로 하루하루를 벼랑 끝에 선 것처럼 불안하게 보냈다. 하진이 그 밖으로 나오는 일도 없었고, 그 안으로 들어오는 고용인들 역시 한정적이었지만 하진과 한 마디의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하진은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 최 회장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그런 감옥 안에서, 하진은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남자아이였다.

“욱…….”

하진의 신경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아이를 낳은 지 이제 곧 두 달이었다. 최 회장과 약속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진은 여전히 최 회장을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최 회장이 그런 더러운 짓을 해가면서까지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알 수가 없다. 시작은 자신의 아들인 최준원 때문이었겠지만, 지금은 최준원 때문이라고 설명하기에도 너무 멀리 와버렸다.

달칵.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진이 고개를 들었다. 파리하게 마른 손이 떨렸다. 아이를 빼앗기지는 않을까 항상 마음을 졸이고 있는 하진이다. 청소를 하러 들어온 고용인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하진은 입가를 아무렇게나 닦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진이 화장실에서 나와 문가를 바라보자,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완전히 의외의 인물이었다.

“안녕.”

하진의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본능적으로 하진은 날을 세운다. 하진의 방 안에 들어온 남자는, 최 회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첩에게서 봤다던, 그 열성알파.

하진은 방어적인 눈빛으로 눈만 깜박이며 그를 응시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하진에게 다가온다. 하진이 그를 피하려 뒷걸음쳤지만, 멀지 않아 하진의 등 뒤로 벽이 닿았다.

“나 누군지 알지.”

드물게 마주칠 때마다 하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던 바로 그 남자였다. 최 회장이 자택에 없을 때마다 이렇게 가끔 하진의 방에 들어와 하진에게 말을 걸곤 했었던.

페로몬 냄새. 하진이 벽 쪽으로 더 바싹 붙으며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그런 하진이 신기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빙글빙글 웃고 있지만, 하진은 왠지 그에게서 위험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곧 아버지가 수청을 들라고 하시겠군.”

“…….”

노인네가 여태까지 참은 것도 용하지.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나랑도 놀래?”

남자가 손을 내어 하진의 턱을 잡아 들었다.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지만 끔찍하게 싫었다. 하진이 매섭게 남자의 손을 쳐냈다.

“……치워.”

“말 할 줄 알았네.”

남자는 기죽지 않고 클클 웃었다. 하진은 계속해서 경계를 풀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진도 그를 알고 있었다. 최 회장이 아낀다던 아들이었다. 최준원 전무가 아니라 이 사람에게 대원그룹 승계권을 주려고 한다던. 아직은 남자와 소년의 경계에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남자는 하진에 대한 호기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아버지 같은 늙다리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그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태성에 강재혁 대표가 마음에 걸려서 그러나?”

“…….”

“강재혁 새로 여자 생겼던데.”

하진의 눈이 흔들렸다. 짐작했던 일이다. 당연히, 충분히 짐작했던 일인데…….

“이번 야당 대표 딸.”

각오했던 일임에도 철렁 마음이 떨어졌다. 하진은 눈을 피하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이혼서류까지 놓고 재혁을 떠났던 게 자신이다. 재혁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면 말도 안 됐다. 그러면 지금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재혁이 알게 된다면, 아이마저 빼앗길 게 뻔했다. 우성알파는 태성그룹에서도 귀한 손이다. 애초에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우성알파를 낳을 확률이 높은 몸이라는 것 때문이었으니까.

하진이 흔들리는 것을 본 남자가 킥 웃으며 다시 하진의 턱을 잡아 올렸다. 설명할 수 없었지만 남자는 하진의 저런 모습에도 발정하고 있었다. 다시 하진이 차갑게 그 손길을 쳐냈다.

“왜?”

“…….”

“오메가도 우성, 열성 이런 거 가리는 건가?”

하진에게 시선을 떼고 남자가 웃었다. 어딘가,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약이라도 취한 것 같은. 짙은 담배 냄새가 났고, 술에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아랫도리는 이미 불룩하게 발기해 있었다.

“내가 어떡하면 너 가질 수 있는데?”

“…….”

“죽여줘?”

“뭐?”

죽여줄까. 남자가 다시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우리 아버지.”

남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위험하다고, 하진의 모든 세포들이 외쳤다. 더 이상 이 남자와 엮여서는 안 됐다. 하진이 남자의 몸을 밀어냈다.

“……해 봐.”

남자의 삐딱한 시선과 하진의 시선이 부딪혔다.

“할 수 있으면.”

이 안에서 제정신이 아닌 건 하진도 마찬가지였다.

* * *

똑똑.

커다란 문 앞에 선 하진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파리하게 마른 손목이 허공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하진의 목울대가 조금 움직였고, 하진의 시선은 처연한 모양새로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있었다.

“들어오게.”

문 너머에서 연륜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최 회장이었다. 고용인이 열어주는 문 사이로 하진은 걸어 들어갔다. 결국에는 이렇게 될 일이었다. 아이, USB, 강재혁. 하진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영상들이 뒤섞이고 암흑 안에서 그것들이 토해졌다. 하진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손길들에 하진은 저항할 방법도, 그럴 의지조차 남아 있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진의 시선 안으로 넓고 화려한, 그러나 중후한 분위기의 침실이 들어왔다. 하진은 넓은 침대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침대 옆에 서 있는 최 회장을 바라보았다. 최 회장은 웃고 있었다.

“기다렸네, 오늘을.”

“…….”

어쩌면, 자신이 어려서 친모의 손에서 대원건설의 윤일환 사장에게로 건네졌을 때부터 이런 날은 예견되어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윤일환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간이었고, 윤민형 역시 자신을 위해서라면 자신과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 정도야 수없이 짓밟을 수 있는 인간이었다.

최 회장 앞에 서자 걸음을 멈춘 하진은, 최 회장을 보지 않고 있었다. 하진은 이 순간, 재혁이 떠올랐다. 그와 결혼을 하고 나면 모든 것이 정리될 줄 알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은, 재혁과 혼전계약서를 쓸 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재혁과도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재혁도 자신에게 수없이 상처를 주었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는 재혁과 좋았던 기억만 떠오르는 걸까.

“긴장했나?”

최 회장의 주름진 손이 하진의 턱과 귀 아래를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하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본능적인 감각이 그를 거부하는 듯,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최 회장은 상관하지 않고 그런 하진의 모습에 웃었다.

“한 잔 하겠나?”

최 회장이 하진에게서 손을 거두고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병을 들어 보였다. 병 안에 들은 갈색의 액체가 보석같이 같이 반짝거린다.

“좋은 술이라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술을 마실 기분도 아니었지만, 수유를 하는 탓에 술 같은 것을 마실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아쉽다는 듯이 최 회장이 크리스털 같은 잔 안으로 술을 따르더니,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자네 같은 술이지.”

최 회장이 잔을 든 손으로 하진을 가리키더니, 다시 잔을 가져가 목을 축였다. 하진 같은 술. 하진은 그가 어떤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역겨워서 더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술을 마시는 최 회장의 눈이 하진을 끈적하게 훑는다. 하진은 가 본 적이 없지만, 알파들이 다닌다는 오메가 클럽에서 알파들의 표정이 저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창부가 된 것 같은 기분 정도는 살면서 지겨울 정도로 자주 느꼈던 감정이었다.

“자네가 오기 전에도, 그걸 한 번 더 봤네.”

그것. 최 회장이 정확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하진은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진의 눈이 흔들리는 것을 본 최 회장은 술을 넘기며 하진의 얼굴을 다시 한번 훑는다.

“서투른데, 또 그게 나쁘지 않았어.”

“…….”

“눕게.”

최 회장이 술잔을 든 손으로 침대를 가리켰다. 하진은 감정이 없는 것 같은, 인형 같은 얼굴과 표정을 하고 침대로 다가갔다. 최 회장은 어느덧 비워진 잔에 다시 술을 따랐다. 두 잔째 술을 마시며, 테이블 위에 있는 어떤 알약을 삼킨다. 비아그라였다.

“……USB, 주시기로 약속하셨죠.”

“그러지.”

하진의 창백한 낯 위로, 그림자가 졌다. 최 회장이 침대에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은 하진에게 몸을 기울인다.

“궁금하지 않나? 자네 반려였던.”

“…….”

“얼마 전에 만났네. 잘 지내고 있더군. 자네가 여기 이러고 있는 건 상상도 못 할 테지.”

주름진 손이 하진의 얼굴을 다시 매만졌다. 끔찍함, 역겨움, 고통. 하진의 안에 여러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재혁의 이야기에 시트를 붙잡은 하진의 손이 떨렸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최 회장의 손 역시 떨리고 있었다.

“후으, 흐…….”

잔에 남은 술을 급하게 입안으로 털어 넣은 최 회장이 하진의 몸 위로 고개를 숙였다. 아까보다 더 떨리는 최 회장의 손이 급하게 하진의 갈빗대 위와 가슴을 매만졌다. 하진의 목덜미에 처박힌 입술이 허겁지겁 숨을 들이켠다. 흡사 짐승으로 느껴지는 호흡이었다. 하진의 입술도 마구 떨려왔다.

“후우…… 후…… 후윽, 컥…….”

하진의 몸 위로 거친 숨이 쏟아졌다. 최 회장의 손이 하진의 등 뒤로 들어와 하진의 얇은 허리를 끌어안았다. 하진은 최 회장에게 붙잡힌 채 그의 이상한 호흡에 몸을 움츠리며 떨 수밖에 없었다.

“컥…… 억…… 억!”

마구잡이로 하진의 몸을 더듬던 거센 손길이 한순간 최 회장의 억눌린 신음과 함께 멈췄다. 하진은 숨도 쉬지 못한 채 자신의 몸 위에 엎어진 최 회장을 바라본다. 붉은 입술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똑똑.

그때,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진은 대답조차 내지 못했다. 경악으로 물든 하진의 눈이 크게 홉떠진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최 회장의 몸은 간헐적으로 미동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점점 굳어가고 있었다. 현실인가. 하진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하진의 몸을 여전히 최 회장이 짓누르고 있는데도 하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다. 정신만은 멀쩡해서 그것이 하진을 더 괴롭게 만들었다.

끼이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장신의 남자가 들어왔다. 하진의 놀란 눈이 그와 마주친다. 최 회장의 둘째 아들이었다.

‘죽여줄까?’

‘우리 아버지.’

귓가에 그가 말했던, 그러나 진심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그 말이 떠올랐다. 하진의 눈이 공포에 잠식되었다. 커다란 눈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놀란 기색도 없이 하진과 최 회장이 몸을 겹치고 있는 침대 쪽으로 걸어온다.

“이제, 나한테 올 마음이 좀 생겼어?”

남자는 웃었다. 최 회장을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남자가 하진의 위에 몸을 겹친 채 늘어진 최 회장의 몸을 옆으로 치웠다.

“일어나.”

하진이 덜덜 떨기만 하고 일어날 생각을 않자, 남자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남자가 억지로 하진의 팔을 쥐어 침대에서 일으켰다.

“가자.”

“무슨 짓 한 거야.”

“죽여 달라며.”

남자의 얼굴에는 일말의 죄책감이나, 죄악감이 없었다. 하진이 팔을 빼어내 보려 하지만, 남자의 완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짜 미친놈이었다.

“진짜 죽인 거야……?”

하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최 회장을 동정하거나, 연민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하진은 모든 것이 너무나 무서웠다. 자신이 도저히 견딜 수 있는 삶이 아닌 것 같았다.

“왜?”

“놔!”

하진이 울면서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붙잡힌 채 울며 뻗대는 하진을 조금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다.

“가만히 있어, 예쁜아.”

“놔, 놓으라고! 이 미친 새…….”

철썩. 남자의 커다란 손이 하진의 여린 뺨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하진의 얇다란 몸이 저 멀리까지 튕겨져 나갔다.

“난 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나를 화나게 해.”

남자의 눈은 미쳐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하진의 손이 떨렸다. 살갗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파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뺨 위로 하진의 눈물이 떨어졌다.

“가야 돼, 우리 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

“알겠어? 예쁜아? 응?”

하진이 후들거리는 팔로 바닥을 딛고 일어난다. 맞은 탓인지, 아니면 울어서인지 부어오른 입술을 하진이 살짝 물었다.

“아이…….”

“…….”

“아이 없이는 안 가.”

하진이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 * *

녹슨 쇠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열리자, 그 안에서 두 명의 교도관과 한 명의 중년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윤일환이었다. 한 때,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건설사 중 한 곳인 대원건설의 사장이기도 했었던. 수의를 입은 그의 모습은 여느 때보다도 더욱 초라해 보였다. 힘없이 축 처졌던 어깨가, 면회실의 유리 너머를 응시하더니 교도관들의 팔을 뿌리치고 그 앞에 앉아 수화기를 들었다.

“이보게, 자네……!”

고통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으로 일그러진 윤일환의 얼굴이 울부짖듯 말했다. 유리 너머에 긴 다리를 꼰 채로 앉아있는 것은 강재혁이었다. 유리로 꽉 막힌 공간이었기에 그런 윤일환의 울부짖음은 재혁에게 그저 허상처럼 보였다. 재혁이 그런 윤일환에게 한 번 눈길을 주더니, 그때서야 벽에 붙어있는 수화기를 든다.

“나 좀, 나 좀 꺼내주게. 강 서방.”

재혁이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마자 윤일환의 듣기 싫은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재혁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수화기를 잠시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귀로 가져다 대었다. 그런 재혁의 모습에 윤일환은 더욱 재혁에게 마치 매달리는 것처럼 애원해댔다.

“강 서방, 자네…… 내가 뭘 서운하게 했는지 모르는 건 아니네만.”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느리게 읊는 재혁의 목소리는 냉정했다.

“기회를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유리 벽에 댄 윤일환의 손이 떨렸다. 눈앞에 앉아 있는 이 새파란 놈이 자신을 감옥에 집어넣은 존재라는 걸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윤일환은 이제 와 매달릴만한 사람이 그밖에 없었다. 대원의 최 회장에게 팔아먹으려고 했던, 자신의 양아들 윤하진이 사라졌고 대원건설 사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제 와 모든 것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빌어볼 데라고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눈앞의 남자밖에 없는 것이다.

윤일환이 턱을 떨며 재혁의 처분을 기다렸다.

“하진이 어디 있는지 찾았으니 돌려받을 겁니다.”

“뭐! 하진이 그걸 찾아!”

윤일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모든 것이 다 윤하진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게 갑자기 사라지지만 않았어도…… 눈이 뒤집히는 것 같은 윤일환의 모습을 보며 재혁이 버릇처럼 탁자를 톡톡 손끝으로 두드렸다.

“그 전에 사장님께 들어야 하겠습니다.”

“어디 있었나, 하진이 그 자식! 어디 있었느냔 말일세.”

윤일환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와 대비되게 재혁은 침착했다.

“사장님 아들, 윤민형. 하진이 찾으라 풀어줬더니 같이 자취를 감춰서 제가 몹시, 기분이 언짢습니다.”

“민형이가?”

“윤민형 어디 있습니까.”

“모, 모르네. 그 녀석 나 찾아 온지도 오래돼서.”

재혁이 싸늘한 눈으로 윤일환을 쳐다보았다. 재혁이 몸을 일으키자 거구의 몸이 윤일환의 시야에 들어온다. 윤일환은 지푸라기를 놓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리 벽을 마구 두드렸다.

“나는 진짜 몰라! 모른단 말이네!”

“이러시면 곤란하죠.”

“정말 몰라. 강 서방, 이러지 말고…….”

윤일환은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얼굴을 찌푸린 채 재혁에게 애원한다. 자신이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강재혁에게 이렇게 애원하고 비는 것밖에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럼 정말 마지막 기회를 드리죠.”

재혁의 차가운 눈이 다시 윤일환의 눈과 마주쳤다. 윤일환은 자신보다 훨씬 젊고 어린 남자에게서 압도당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아는 대로, 사실대로 말씀하셔야 할 겁니다.”

가석방이 달려 있으니까. 소리가 전달되지는 않았지만, 재혁의 입 모양이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윤일환은 유리 너머의 재혁을 향해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윤일환은 감옥에 들어오고 모든 것을 다 잃었다. 베타에 불과했던 자신이 알파들의 세계에 기업인이라는 이름으로 진입했다는 자부심까지도, 모두 다. 누구보다도 석방이 간절한 그였다.

“윤하진 아이, 누구 앱니까.”

순식간에 윤일환의 동공이 조여들었다. 윤일환이 크게 뜬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고 재혁을 바라보았다.

“애라니, 무슨 말인가. 그때 분명, 하진이 그 아이 유산…….”

“그 아이 말고, 바로 얼마 전에 낳은 아이 말하는 겁니다.”

윤일환은 재혁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하진은 분명 불임 판정을 받았었고, 반려였던 강재혁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렇다면 누구의 아이를 낳는단 말인가.

“최 회장은 자기 아이라고 하던데.”

“모…… 모르네. 하진이가 아이를 낳았나? 그럴 리가…….”

“……더 얘기 나눌 게 없겠군요.”

“이보게, 강 서방! 강 서방!”

재혁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려 하자, 다시 윤일환이 유리 벽을 세차게 두드렸다. 윤일환은 눈물을 흘리며 재혁을 붙잡으려 안간힘이었다. 그 눈에 독기가 서린 것도 같았다.

최 회장이 자기 아이라고 했다니. 그 망할 노친네가 자신은 이렇게 감방에 가둬놓고 하진이 그 애를 낚아챘단 말인가. 윤일환이 살길을 찾아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하진이가 낳았다는 아이는 분명 그 최 회장의 아이일 게 분명했다. 어떤 거짓을 늘어놓아서라도 재혁과 척을 져서는 안 될 일이었다. 재혁은 마지막 남은 동아줄이었다.

“내 아는 거 다 말해 줌세, 가지 마시게.”

재혁이 내려놓으려던 수화기를 다시 귓가에 가져다 대었다. 뭐라 지껄이는지 들어볼 필요는 있었다. 지금 와서 윤하진에 대해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건 몇 사람 없었으니까.

“그 애, 내 입으로 언급하기도 낯 뜨거운 소문이야 많았지만 나, 그렇게 그 아이 이용한 적 없네. 정말이네.”

“…….”

“그렇다면 애초에 왜 내가 자네한테 그 아이 보내려 했겠나. 하진이 그 아이, 얼굴 꽤나 반반해서, 그 앨 달라고 했던 기업 회장님들만 해도 여럿이었네. 나는 그래도 그 애가 행복하기를 바라서 강 서방 자네한테…….”

“요점만 간단히 말씀하시죠.”

“내 뜻이 아니었네. 하진이 그 애가 자네한테 앙심을 품고……! 최 회장에게 가겠다고 자네랑 이혼하겠다는 걸 내가 그리 말렸네. 정말일세! 믿어주게.”

초점을 잃은 윤일환 사장이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변호했다. 골자는 하진이 태성그룹에 만족하지 못하고, 최 회장에게로 스스로 가기를 원했다는 것이었다. 재혁의 손바닥 안쪽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재혁의 얼굴은 체념한 것처럼 굳어져 있었다.

“최 회장에게 가겠다고?”

“나는 분명 말렸네! 최 회장이 아이를 낳으면, 대원그룹을 물려주겠다고 해서…… 그래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최 회장의 자택에 있었다는 것으로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윤일환의 말에 쐐기가 박힌 꼴이었다. 재혁이 거칠게 수화기를 집어 던지듯 구석으로 내던지고는 뒤를 돌았다. 애초에 윤하진을 막지 못한 윤일환에게 어떻게든 죗값을 물게 할 작정이었기 때문에 가석방 따위를 시켜줄 마음은 없었다. 몇 번이고 죄를 덧씌워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 요량이었다. 설령 윤일환이 결백하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윤하진을 상처 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생각이었으니.

매몰차게 돌아서는 재혁의 뒤로 윤일환이 울부짖으며 면회실에서 교도관들에 의해 끌려나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그의 초라한 마지막이었다.

교도소를 나서는 재혁의 머리 위로 진눈깨비가 날렸다. 정 비서가 바로 재혁의 뒤를 쫓아 나오며 재혁의 머리 위로 검은색 장우산을 펼쳤다. 재혁이 잠시 멈춰 아무 말 없이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내쉬는 숨이 거칠었다.

이렇게 한 존재를 애타게 찾고, 애타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을 재혁은 처음 알았다.

재혁이 정 비서를 지나쳐 수행원에게 손을 내밀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재혁의 손가락에 담배를 끼워주었다. 재혁이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 필터를 물자, 누군가가 불을 붙여 주었다. 재혁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다. 윤하진. 윤하진.

윤하진.

머릿 속에는 하진의 이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윤민형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요. 그리고 윤하진.”

“…….”

“대원 가에 사람 붙여놔요. 언제든 틈만 나면 다시 찾아올 수 있게. 아이도 같이.”

“네, 대표님.”

재혁의 발끝에 진눈깨비가 내려앉았다가,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 * *

방 안에 자고 있던 아이를 데리고 나와, 하진은 그대로 남자가 가는 대로 따랐다. 남자는 최 회장이 첩에게서 봤다는 둘째 아들, 최준현이었다. 최 회장의 죽음을 알 리가 없는 고용인들은 단지 하진이 최준현을 따라 밖을 나서는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고 하진은 그런 눈들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진은 이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품 안에 안고 있었고, 최준현은 그런 하진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저택을 나섰다. 그에게서는 담배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냄새가 났고, 페로몬 향기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페로몬 향기이기만 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타.”

고용인들의 이상하다는 눈빛을 뚫고, 차고에 도착한 최준현이 하진을 놓아준 것은 그의 차 앞이었다. 소위 말하는 맛이 간 얼굴을 하고, 최준현은 조수석 문을 연 채 하진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이 사람을 따라가도 되는 걸까. 더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건 아닐까 숨이 가빠왔지만 달리 방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미친놈이 자신과 아이를 죽여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선택은 하나뿐이었다. 자신의 친아버지도 죽인 미친 인간이었다. 하진이나 아이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진이 아이를 안은 채로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하진이 차에 오르자마자 최준현 역시 운전석에 올라탔고, 곧 시동이 걸렸다. 자동으로 차고 문이 열리고 하진은 수개월 만에 집 안이 아닌 곳에서 바깥세상을 보았다. 겨울 하늘은 먹물이라도 뿌린 것처럼 깜깜했고, 겨울이라는 것이 실감이 날 정도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에 하진은 아이를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기분이 좋은 것처럼 최준현은 시종 노래를 흥얼거렸다. 하진은 맘 편히 눈을 붙이지도 못했다. 천사 같은 얼굴로 잠이 들었던 아이가 몇 번 잠투정을 부리다 결국 다시 잠이 들었을 때 즈음, 차가 멈췄다. 이곳은 어디쯤일까. 주변에 다른 건물들조차 보이지 않는 외딴곳이었다. 외벽이 나무로 된 별장 하나만이 숲이 울창한 벌판 위에 덩그러니 서 있다.

“내려.”

최준현이 문을 열어주자, 하진이 불안한 눈으로 최준현을 바라보았다. 하진의 그런 불안정한 눈이 언제나 알파들을 자극한다는 것을 하진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진이 자신을 욕정 어린 눈으로 마주 보는 최준현의 눈을 피해 차에서 내렸고, 최준현이 먼저 별장의 문을 열었다.

뒤로 달려서 뛰어갈까.

잠깐 도망칠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았다. 하진은 무거운 발을 떼어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 잠깐 사이 하진의 머리에 떨어졌던 눈발은 다시 녹아 사라져 버렸다.

“애 내려놔.”

이미 별장에 준비를 해 놨던 건지, 문을 열자마자 이미 별장의 온기는 벽난로의 열기로 훈훈했다. 최준현이 겉옷을 벗어 입구 가까이에 서 있는 옷걸이에 걸며 말했다. 최준현이 힐긋 시선을 준 곳에는 아기침대가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할 작정이었을까. 하진이 최준현의 눈치를 보고는 천천히 아기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아이는 착하게도 아직 잘 자고 있었다. 하진이 작기만 한 아이를 아기침대 안에 눕히자, 하진의 뒤로 훅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하진의 귓가에 뜨거운 숨을 불어넣으며, 커다란 손이 하진의 몸을 더듬었다. 곧 하진의 겉옷이 하진의 발치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 마.”

“너나 튕기지 마.”

최준현은 발정하고 있었다. 최준현에게 붙잡힌 하진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이제 우리 둘이 있을 수 있는 건가? 응?”

최준현의 입술이 하진의 목덜미를 빨아들이며 울혈을 남겼다. 하진이 움찔거리며 최준현의 몸을 밀어내려 하자, 최준현이 더욱 힘을 주어 하진의 가슴을 쓸어 올렸다. 얇은 흰 셔츠 아래 예민한 피부가 자극되어 신경이 곤두섰다.

“…잠깐, 잠깐……!”

하진이 버둥거리자 최준현이 하진의 얇은 몸을 끌고 벽에 몰아넣었다. 남자의 허벅지가 하진의 다리 사이로 들어왔고, 하진은 도망칠 데 없이 그에게 붙잡혔다. 하진의 눈이 다시 불안한 듯 아기침대 안에서 잠이 든 아이를 향했다. 그런 시선을 놓치지 않고 최준현이 하진의 얼굴을 돌려 자신을 보게 한다.

“애까지 뺏을 생각은 나도 없어.”

“…….”

“그러니까 가랑이나 제대로 벌려, 응?”

최준현의 페로몬이 하진의 몸을 덮쳤다. 최 회장에 이어 최준현까지 접촉하자 예민하게 달아오른 몸은 알파의 페로몬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하진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진의 페로몬이 별장 안에 퍼져갔고, 다리 사이가 조금씩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하진의 반응에 최준현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최준현이 목덜미에 이어 하진의 쇄골에 키스 마크를 남기며 탐욕스럽게 하진의 가슴을 만졌다. 작게 도드라진 유두가 손끝에 닿는다.

“하아,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갖고 싶었어.”

“…….”

“갖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어…….”

결국에는 또, 이런 섹스돌 취급이었다. 이제는 정말 신물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하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손길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끼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하진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으며 최준현을 밀어냈다.

“싫…… 어. 싫어!”

짜악! 하진이 소리를 지르며 최준현을 밀어내고는 그대로 뺨을 쳤다. 옆으로 돌아갔던 최준현의 얼굴이 천천히 다시 하진을 향했다. 하진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최준현의 눈이 미쳐 있었다. 곧바로 멱살을 잡혀 끌려 나온 하진이 다시 최준현에게 뺨을 맞았다. 하진이 때린 것보다 훨씬 센 강도에 그대로 후려쳐진 하진은 옆에 있던 서랍에 몸을 부딪쳐 그대로 주르륵 내려앉았다. 서랍이 흔들리면서 서랍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들도 바닥으로 굴렀다.

“이 미친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입안이 터졌는지 하진의 입안으로 알싸한 피 맛이 퍼졌다.

“너한테 선택권 주는 것 같아? 선택권 주고 있는 거 같냐고!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데, 씨팔! 어!”

“…….”

“너 이딴 식이면 니 애새끼도 내가 죽여 버릴 거야. 내가 못 할 것 같아?”

하진의 적대감 가득한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이 파국에 대체 멈출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고분고분하게 굴어, 씨발년아.”

최준현이 하진의 머리카락을 쥐어 그대로 바닥에 눕혔다. 절망으로 체념한 것 같은 하진의 몸 위로 최준현이 올라왔다. 최준현이 다시 하진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하진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최준현이 자신의 바지춤을 푸는 소리가 절그럭거리며 하진의 귓가를 울렸다. 긴 눈꼬리 옆으로 계속 눈물이 넘쳐흘렀다. 치욕감에 하진의 손이 떨렸고, 하진의 손끝에 무언가가 닿았다. 아까의 몸싸움에 서랍에서 떨어져 내린 엔틱한 모양의 탁상시계였다. 시계를 꽉 쥔 손은 눈에 보일 만큼 흔들렸다.

“허억, 헉…….”

그리고 그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하진과 남자의 눈이 마주쳤고, 아이의 존재에 하진은 그대로 탁상시계를 든 손으로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억……!”

한순간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쏟으며 남자의 무거운 몸이 옆으로 쓰러졌다. 하진은 몸을 일으켜 자신이 손에 쥔 탁상시계를 남자의 몸과 번갈아 보았다. 탁상시계의 튀어나온 부분이 피에 묻어 있었다.

어떡하지.

머리를 감싸 쥔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흘러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진의 눈에서도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생각나는 건 단 한 사람이었다.

하진은 손에 쥐고 있던 탁상시계를 버려두었다. 그리고 남자의 옆으로 떨어져 있는 핸드폰을 들어, 하진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왜 그가 생각났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가 하진의 인생에 있어 유일하게, 곁을 내어줬던 사람이었다. 그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자신이 떠났음에도, 도와 달라 청하고 싶었던 건.

신호음은 길지 않았다.

넘어간 통화에, 핸드폰을 쥔 하진의 손은 덜덜 떨렸고, 먼저 입을 뗀 쪽은 상대편이었다.

[말해.]

하진이 파르르 떨리는 눈을 내리감자, 긴 속눈썹 아래로 눈물길이 났다.

강재혁의 목소리였다.

“여기, 어딘지…… 모르겠어…….”

아이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하진은 패닉이었다. 자신의 앞에 쓰러진 남자는 미동도 없다. 하진이 고개를 떨궜다. 낯선 사람의 핸드폰으로, 하진은 자신이 누구인지도 말하지도 않았지만, 재혁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곧 핸드폰 너머에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기다려.]

무슨 뜻일까. 기다리라는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하진은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저렇게 쓰러져버린 최준현은 어떻게 해야 하지. 계속해서 들리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하진은 그때서야 다시 아이 생각을 한다. 핸드폰을 떨어뜨린 하진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기침대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우선 여기를 떠나야 한다.

우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하진은 겉옷도 챙겨 입지 않은 채로 무작정 별장 밖으로 나갔다. 싸늘하게 추운 겨울바람과 눈보라가 하진 앞으로 몰아쳤지만, 하진은 추위도 느낄 수 없었다. 여전히 울고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까맣고 하얀 겨울밤을 메웠다. 하진은 두꺼운 아기 이불 채로 아이를 감싸 안으며 눈이 쌓인 언덕을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비춰졌다. 지나칠 줄만 알았던 헤드라이트 빛은 하진의 근처에서 멈추어 겨울밤을 계속해서 빛냈다.

하진은 걸음을 멈춘 채, 빛이 났던 방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익숙했던, 그리고 그리웠던 페로몬이 느껴졌다. 하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길게 늘어선 차들이 비추는 헤드라이트 빛. 그 안에서 그가 걸어 나왔다. 하진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강재혁.

하진은 숨도 쉬지 못하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재혁을 바라보았다. 재혁이 눈짓을 하자, 옆에 서 있던 수행원이 하진의 품에 안고 있던 아이를 하진에게서 받아들었다. 하진과 재혁의 사이로 어느새 굵어진 눈발이 휘날렸다. 재혁은 겨우 흰 셔츠에 얇은 슬랙스 차림인 하진을 보더니,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하진의 어깨에 걸쳐준다.

“드디어 돌아왔네, 내 오메가.”

일 년 삼 개월 만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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