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결혼식 (3/13)

3. 결혼식

* * *

재혁의 모친인 선경은, 다른 재벌 사모님과 다를 바 없이 남의 이목에 꽤나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해외 유명 플로리스트의 자문을 받아 식장을 꾸민 꽃값만 억대였다. 화려하게 장식된 꽃들과 박수 치는 사람들 사이로 윤하진이 버진로드를 밟으며 들어왔다. 흰 색상의 턱시도에 흰 타이, 부토니에 자리에 꽂힌 꽃은 에메랄드빛이었다. 뒤를 돌아 하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재혁과 달리, 하진의 눈은 아래를 향해 있었다. 손에 들린 부케는 푸른색과 연두색, 흰색이 섞여 있었고, 하진의 얼굴을 가린 베일은 아주 단조롭고 수수했다. 보통 재벌가 여식들이 쓰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는 그대로 우아하고 애처로운 느낌까지 들었다. 재혁의 손 위로 하진의 손이 포개어지고, 하진은 주례 앞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 하진의 옆모습을 재혁은 슬며시 곁눈질로 볼 뿐이다.

“…젊은 두 사람의 앞날에 축복만이 가득하길 바라며…….”

주례사는 총리를 역임했던 정치인이 맡았다. 짧지 않았던 주례가 끝나고 결혼반지 교환이 있었다. 재혁은 끈질기게 베일 너머의 하진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하진은 끝까지 재혁의 눈을 보지 않았다. 떨림조차 없이, 침착하게 재혁의 손에 반지를 끼우는 얼굴은 마치 도자기 인형 같았다. 내리깔린 눈은 어딘가 애 닳았고, 무언가 칠하지 않아도 항상 붉은 입술은 미소 없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재혁이 하진에게 바랐던, ‘알파에게 정략결혼을 오는 오메가’의 역할을 그는 완벽하게 수행 중이었다. 결혼에서 오는 설렘도, 자신 옆에 서서 오는 긴장도 없었다. 재혁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이런 윤하진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원치 않은 결혼을 해서 그런 것이다. 재혁은 혼자 마음을 다잡는다. 하진의 매끈한 네 번째 손가락에 선경이 심사숙고해서 고른 결혼반지가 미끄러져 들어갔다. 다 들어간 반지에 재혁은 다시 한번 하진의 얼굴을 살폈지만, 하진의 눈은 여전히 자신의 손에 가 있었다. 표정엔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로써 이 두 사람이 진정한 부부로 하나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주례의 성혼 선언 후 하객들에게서 박수가 쏟아졌다. 화촉은 여전히 밝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회자의 사회에 따라 언약의 키스를 하기 위해 재혁의 손이 하진의 베일을 뒤로 거둬냈다. 베일 너머 드러난 하진의 얼굴은 바늘 하나 들어갈 자리가 없이 완연하게 꽉 짜인 아름다움이다.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메가와의 결혼을 비아냥거리면서도 그와의 결혼을 시기하는 족속들, 자신이 숨기고 있는 여자, 그리고 결혼을 원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까지도.

재혁의 손이 베일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와 하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하진은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았다. 천천히 하진의 입술을 향해 내려가던 재혁의 얼굴이 망설이듯 잠시 멈추더니, 금세 도톰하니 붉게 색이 오른 입술을 감쳐 물었다. 하진의 뺨에 재혁의 더운 숨이 흩어졌다. 호텔 안을 가득 메운 하객들이 아니었다면 여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혁의 배에 닿아오는 부케가 잘게 떨렸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이 물이 번지는 것처럼 퍼진다. 재혁의 입술은 하진의 입술에서 떨어지고 나서도 아쉬운 듯 더 멀어지지 못하고 가까이에 머물렀다. 그 후 하진의 이마에 짧게 키스한 것은 순전히 무의식이었다. 입술을 떼어낸 재혁은 다시 하진의 눈을 살폈지만, 여전히 하진의 눈은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다. 하진의 기다란 눈이 천천히 감겼다 뜨였다.

* * *

차 뒷좌석에 몸을 실은 재혁이 짧게 한숨을 쉬면서 자신의 고정시킨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이 짓을 두세 번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 재혁은 놀랍기만 하다. 별로 본인이 했다 싶은 일은 없는데 스트레스나 체력소모가 엄청났다. 뒤이어 하진이 옆자리에 와 앉았다. 약간 안색이 파리한 옆모습이 역시나 피곤해 보였다.

“고생 많았어요, 윤하진 씨.”

“네.”

마네킹같이, 하진이 약간 시선을 아래로 두고 답했다. 재혁이 어디 아픈 건 아니냐고 물으려는 차에, 하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차가 출발했다. 손가락을 턱에 대고, 살짝 괴고 있는 옆모습은 그림 같다. 하진의 입술 가까이에 자신이 끼워준 다이아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몸은.”

“괜찮습니다.”

“…….”

하진이 잘라내듯 대답했다. 재혁이 그런 그의 태도에 잠시 머뭇거리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내가 계속 신경 쓰여서 말인데…….”

최준원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볼 참이었다. 그때, 잠시의 정적을 깨고 재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재혁이 답답하다는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멈추더니 짧게 뱉어냈다. 시연이었다.

“잠깐.”

하진은 관심 없다는 듯 차창 밖으로 둔 시선을 뗄 줄을 몰랐다.

“네.”

[…흐흑, 지금 와요…… 빨리 와요.]

핸드폰 너머로 흐느끼는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끝났잖아요. 이제 나한테 와요.]

“하, 지금 어떻게…….”

재혁이 핸드폰을 든 채로 하진을 돌아보았다. 습관적으로 그녀의 이름이 자신의 입에서 샐까 봐 머뭇거리는 자신이 있다. 미동 없던 하진의 속눈썹이 떨리고 있었다.

[내가 필요할 때 언제든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한 거… 잊지 않았죠?]

“…….”

[지금, 지금 필요해요. 재혁 씨. 지금요.]

당연히 그녀의 곁에 있어야 했다. 사랑하고 있는 그녀였다. 자신의 야망으로 인해 결혼이라는 상처를 주었으니 위로해주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핸드폰에서 새어 나와 차 안에서 흩어졌다. 재혁이 옆을 살피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을 좀 줘.”

어차피 허니문이니, 첫날밤이니 운운할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 로맨틱함을 이제 와서 바라볼 사이도 아니었다. 그나마 냉정을 차리고 있는 이성이, 그녀에게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끝까지 책임지려고 했었던 여자다. 전화를 끊고 천천히 눈을 감는 재혁의 눈꺼풀이 떨렸다.

어느새 차는 예정해놨던 도심의 호텔에 도착했다. 신혼여행은 서울 시내의 호텔 숙박으로만 대신하기로 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 바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냥 가도 됩니다.”

차에서 따라 내리는 재혁에게 하진이 말했다. 하진이 그에게 눈을 맞추어서 이야기한 것은 오늘 중 처음이었다. 이런 순간에 와서야 눈길을 주나 싶어 재혁은 바람 빠진 한숨을 낸다.

“데려다주겠습니다.”

“괜찮아요.”

일종의 죄책감인지도 몰랐다. 자신의 행동에 면죄부를 주고 싶은 행동인지도 몰랐다. 그저, 혼자 체크인을 하고 입실하는 것만이라도 피하게 해주고 싶었다. 재혁이 하진의 손목을 잡아 쥐고 호텔 안으로 이끌었다. 미리 도착한 수행인이 건네주는 키를 받아 둘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최고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잡힌 손목은 뜨겁다.

“알다시피 여자 있습니다.”

“…네.”

대답하며 하진은 재혁에게 잡힌 손목을 빼내려 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빠져나가려는 손목을 더 세게 쥐어온 것은 재혁 쪽이었다.

“그 여자 나밖에 없어요. 어려서 부모님 다 돌아가시고, 친척 집에서 눈치 보면서 살았습니다. 남은 거 나 하나였는데, 알파랍시고 결혼도 못 해줬어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 여자한텐 아무도 없습니다. 나밖에…….”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최고층에 다다랐다. 하진은 여전히 식장에서의 표정과 같은 얼굴이었다. 금방이라도 굳어버릴 것 같은, 아름다운 외양의 도자기 인형. 둘은 말없이 복도를 걸어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선을 봤던 날, 거의 강제적으로 몸을 섞었던 바로 그 방이었다. 호사스럽다고 해야 할까, 사치스럽다고 해야 할까. 화려한 내부에 이미 익숙해져 있는 둘은 이런 것에 놀라워하며 말을 붙일 거리조차 없었다.

입구 근처에서 서성이며 더 이상 들어가지 않고 있는 하진을 보고 있자니,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붙든 손목을 놓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 감정을 뭐라 해야 할까. 놓아버리면 정말 도망가버릴 것 같아서 두려운, 그런 감정이 든다. 우스운 일이다. 사랑보다 질긴 계약으로 맺어져 있으면서, 그 윤하진이 도망갈까 두렵다니. 아니, 설사 도망간다 하더라도 자신은 잃을 것이 없는데도.

“잘 자요.”

어렵게 입을 뗐다. 잡았던 손목을 놓는 쪽은 자신인데, 왜 안타깝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이미 등을 보인 재혁을 세운 것은 이번엔 하진이었다. 머리가 몽롱했다. 어디서 흘러들어온 것인지 모를 슬픔과 절망이 하진을 잠식시켰다. 숨통이 막혀가는 하진은 자신이 뭐라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무의식을 그대로 쏟아냈다.

“절 뭐라고 생각하세요.”

무슨 의미인지 몰라, 재혁은 다시 뒤를 돌아 그저 하진을 응시하고만 있었다.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는 겁니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좋은…… 계약 파트너라고 생각합니다.”

하진은 우스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파트너라는 동등한 위치로 생각해본 적 단 한 번도 없으면서…….

단정하게 다물린 재혁의 입술에는 어딘가 고집스러운 느낌이 났다. 하진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다시 방황하자 재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죠. 나더러 누구와 섹스를 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그건 확실하게 윤하진 씨입니다. 그쪽도 짐작했겠지만.”

“…….”

“그런데 그게 사랑의 감정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욕망과 사랑이 같은 말은 아니니까. 윤하진 씨와 나 사이에 필요한 건 아이고, 그걸 위해 필요한 건 사랑보다 욕망이니 잘 됐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과 욕망 중에 굳이 한 쪽을 택하라고 한다면.”

다시 마주친 하진의 눈이 물기에 젖어 있다.

“전 다 제치고 섹스를 택하는 그런 저질은 아닙니다.”

“저는.”

급하게 쏟아붓는 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는, 대표님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재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하진을 보았다. 하진이, 재혁을 좋아한다 말하고 있었다. 양쪽 다 혼란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재혁이 하진에게 한 일들을 재혁도, 하진도 기억했다. 수도 없이 억지로 안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런데 나를 좋아한다니. 재혁의 심중이 공격적으로 해답을 찾았다. 재혁의 미간이 일그러지며 한쪽 눈이 좁혀졌다.

“그쪽 아버님이 그렇게 말하라고 하던가요.”

무리도 아닐 것이다. 갑자기 이런다면. 하진은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자신의 고백에도 계약과 정치싸움을 끌어오는 재혁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제가 말하면서도 우습네요. 대표님 같은 사람을 대체 왜…….”

머리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침에 맞았던 억제제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기까지 했다. 하진이 손의 떨림을 내리눌렀다. 시야가 온통 뿌옇게 어렸다.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강재혁 대표에게 어쩌자고 이런 말을…… 더 경멸당할 것이 자명하다.

“나랑 자고 싶은 감정,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그거 사랑 아닙니다.”

“…….”

“윤하진 씨.”

재혁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에는 시연이 아닌 눈앞의 오메가가 온통 들어차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이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하진이 자리에서 멈춘 채 그대로 아무 말이 없자, 재혁은 다시 뒤를 돌았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재혁의 등 뒤로, 떨리는 하진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정말 흔들린 적도 없어요? 나한테…….”

객실을 나서려 문고리를 잡은 재혁이 그 말에 다시 하진을 향해 뒤를 돌았다. 이번에는 하진 역시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해 온다. 묘사할 수 있는 표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페로몬이 풀풀 날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형 같은 무표정에, 또렷한 눈동자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흔들린 적 없었냐고? 다른 누군가가 했다면 이게 무슨 싸구려 수작이냐며 오히려 실컷 비웃어줄 재혁이었다. 재혁의 어깨가 숨으로 들썩였다. 존대를 했다가, 반말을 했다가. 처녀처럼 굴었다가, 야살스럽게 굴었다가. 자신을 이렇게나 휘젓고 흔들어 놓고, 이제 와 흔들린 적이 없냐니.

간신히 붙잡아 당기고 있던 실이 끊어진다. 재혁이 팔을 뻗어 하진을 끌어당긴 건 한순간이었다. 큰 손으로 긴 목덜미를 감싼 재혁이 고개를 꺾으며 하진의 입술을 삼키자 하진의 눈이 움찔 떨려왔다. 하진이 입술을 열지 않자 재혁의 다른 손이 하진의 허리를 끌어안아 재차 당겨왔다. 물기 어린 혀가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미끄러진다. 하진은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꾸만 입을 맞춰오는 이 알파가, 이 남자가, 이제는 자신의 반려인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를 떨리는 눈꺼풀이 덮는다. 살짝 벌어진 틈으로 급하게 재혁의 혀가 들어왔다.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이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함께 있을 때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모순적으로 행동한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안고 싶고 입을 맞추고 싶다. 끌어안아 맞댄 몸 사이로 하진의 팔이 올라왔다. 어깨 위로 올라온 손은 안타깝게 움직인다. 금방이라도 목을 감을 것처럼 펴지다가, 누가 볼 새라 꽈악 쥐어졌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신장 차 때문에 목이 꺾이는데 그런 하진의 목을 재혁이 단단히 받쳤다.

비스듬하니 고개를 들은 하진의 눈꼬리에서 아슬하게 물기가 새어 귓바퀴 안으로 스며들었다. 재혁이 길게 혀를 내어 하진의 혀 아래를 문지른다. 둘의 호흡이 점점 뜨거워졌다. 하진의 배에 닿아오는 재혁의 아래는 이미 발기해 있었다. 붙잡는 건지 밀어내는 건지 모를 하진의 손이 이번에는 완연한 거부의 의사를 드러내며 재혁을 밀어냈다. 재혁은 아쉽게 입술을 떼어내며 하진을 본다.

“항상 이렇게 키스하세요? 그쪽 여자한테도?”

“……윤하진.”

하진이 원망스럽게 재혁을 노려보았다. 속눈썹도, 유리알 같다고 생각했던 눈동자도,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다시 키스하려는 듯 가까워지는 재혁의 얼굴에, 하진이 재혁의 몸을 또다시 밀어냈다.

“……해보니까 알겠습니다.”

쏟아지는 페로몬에 현기증이 일었다. 하진이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대표님 말이 맞네요. 그런 감정은 아니라는 거.”

사랑이 아니었다고, 그런 말을 한 것은 나의 실수였다고. 하진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재혁이 그런 하진을 바라보면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불쾌감. 지금의 재혁을 덮친 것은 분명한 불쾌감이었다.

“재미 다 봤으면… 그만 가세요.”

그때 하진은, 자신도 늘 아무도 없이 혼자였노라고. 재혁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 * *

시연을 만나기로 한 것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태성 계열사의 호텔이었다. 그녀에게 전달받은 호텔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팔이 그의 목을 감았고 입술이 다가왔다. 지친 듯 재혁이 그녀의 입술을 고개를 돌려 피하자,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빠진 거 맞구나.”

“피곤해서 그래.”

“그렇게 잘난 체를 하더니 똑같아!”

자신이 끌어안아 놓고, 다시 밀어내는 그녀를 다시 품에 품을 기력이 없었다. 재혁은 그저 조금 노기를 띤 얼굴로 그녀를 볼 뿐이다. 페로몬에 아랫도리가 동해 휘둘리는 게 추하다 말했었다. 페로몬이 없어도 네가 좋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이게 진정한 사랑일 거라고, 내심 자신 스스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배신감을 느껴 하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었다.

“좋았어요? 오메가랑 자보니까 좋았어요?”

“이시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순간, 윤하진의 눈물이 떠오를 것은 또 무엇인가. 윤하진의 눈물이 무겁게 떨어져 내리던 것이 자꾸만 환상처럼 피어올랐다. 쏟아지는 무게감이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것 같다. 자꾸만 그를 떠올리는 자신도 정상은 아니었다.

“재혁 씨가 욕하던 보통 알파들하고, 재혁 씨가 다른 게 뭐에요? 똑같아… 그 반반한 얼굴에, 오메가 몸에 정신 못 차리는 알파들하고 똑같아! 이러면 똑같은 거야!”

“…….”

“자꾸 이러면…… 재혁 씨는 그 알파들하고 다른 게 없어. 아니, 제대로 인정도 못 하는 재혁 씨가 훨씬 더 더럽고 비겁해.”

재혁은 재혁 자신도 알파이면서, 알파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동시에 경멸하고 있었다. 자신의 성기를 받기를 원하며 제 스스로 다리를 벌려오는 오메가들과, 그런 오메가들을 희롱하는 알파들을 보면서 더럽다 느꼈었다. 알파로서 각성한 뒤부터 늘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더 베타인 그녀를 사랑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난 다르다고, 다르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했잖아…….”

“…….”

“내가 재벌이 아니어도! 알파나 오메가가 아니어도! 좋아한다고, 결혼하고 싶다고!”

“그래! 그랬어, 그랬어…….”

그녀가 재혁의 가슴을 두들기며 울었다.

“아직 나 사랑하죠? 그렇죠? 그렇죠, 재혁 씨?”

그러니까 이렇게 와 준 거잖아요. 그 오메가 버리고, 나한테 와 준 거잖아요. 재혁의 셔츠 위로 그녀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재혁은 말없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내렸다.

“우리 달라지는 거 없는 거예요. 난 재혁 씨 결혼 잊을 거고, 우린 안 헤어질 거고. 재혁 씨도 나랑 있을 때는 결혼 했던 거 잊으면 돼요.”

“…….”

“나랑 결혼하진 못해도, 결혼하는 기분은 나게 해줘요.”

재혁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재혁의 눈도 어딘가 물기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안아줘요. 오늘 결혼한 건 우리라고 생각하고…….”

* * *

벽 너머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은 침대에 앉아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꾹꾹 눌렀다. 물기로 젖어 있는 몸은 커다란 흰 타월로만 감겨 있었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타월로 머리를 털어댄다. 이미 자존심이랄 것은 남아있지도 않았다. 그래도 용납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알파와 결혼한다고 했으면, 아니, 결혼했으면 나았을까. 그편은 오히려 납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재혁의 혼처로 거론되었던 알파들은 적어도 여자였고, 자신보다 나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그가 오메가와, 남자와 이루어졌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손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는 시연의 귀에 핸드폰 벨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에서의 물소리 역시 계속됐다.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 그와 결혼식을 올렸던 바로 그 오메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닿자 손끝이 떨려왔다. 머리카락을 내리누르던 타월을 아무렇게나 침대 시트 위로 던져놓고 시연이 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의자에 걸어놓은 재혁의 재킷에서 시연이 핸드폰을 꺼냈다.

차 실장.

핸드폰 화면 위로 뜨는 딱딱한 저장명에 어딘가 모르게 안심하는 자신이 있다. 짧게 한숨을 내쉬는데, 빠르게 뛰던 심장은 여전했다. 시연은 살짝 찡그린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다본다. 어떤 객기였는지 모르겠다. 시연은 다른 이들에게 공고히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결혼은 그 남자 오메가와 했지만, 이 남자의 몸은 자신의 곁에 있음을.

“…여보세요.”

[대표…… 대표님 안 계십니까.]

급하게 말을 꺼낸 핸드폰 너머의 남자에게서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사무적인 어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급한 일인데 바꿔주시겠습니까.]

“지금 재혁 씨 전화 못 받는데…….”

욕실 쪽을 바라보던 시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타인이 그를 떠올릴 때 자신과의 관계를 알아주었으면. 이제는 그림자가 될 수밖에 없는 여자가 되었지만, 그가 결국에는 놓지 못하도록 말이다. 어딘가 모를 독기가 솟아오른다.

“재혁 씨 샤워 중이에요.”

[아…….]

어디서 이런 뻔뻔스러움이 내재되어 있었는지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시연이 급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본부인 역할놀이에 심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윤하진 씨가 쓰러지셨습니다.]

심장이 미칠 듯이 뛴다. 아까의 그 여유는 온데 간데 사라져버렸다. 시연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대표님께서 D호텔로 다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된다. 분명 TV의 결혼식 생중계에서 본 그 오메가는 얄미우리만큼 멀쩡했었다. 재혁과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쓰러질 기미가 있었으면 제게 왔을 재혁이 아니었다. 제멋대로지만 정에 약한 사람이다. 시연이 미간을 구겼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에게서 그를 빼앗아가려는 알량한 거짓이 아닌가 싶어진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욕실 쪽을 바라보니, 뿌옇게 새어 나오는 수증기 사이로 벗은 상체의 재혁이 나오고 있었다.

“전해드릴게요.”

다급히 전화를 끊는 시연의 모습에 재혁의 고개가 살짝 기운다.

“어디 나한테 전화 왔었어?”

“어, 응.”

“뭐라는데?”

“…듣긴 들었는데 무슨 얘긴지 못 알아 듣겠어서. 나중에 재혁 씨가 다시 전화해봐요.”

차 실장이네. 핸드폰을 건네받은 재혁이 혼잣말로 되짚더니 핸드폰을 베드사이드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한 시연이었다. 모른다는 말로 응수해 놓고, 혼자 불안에 떨었다. 난 못 들은 거야. 속으로 되뇌면서.

“전화… 안 해봐요?”

“급한 거면 다시 또 전화하겠지.”

재혁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시연과는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되는 자리였다. 탄탄하게 근육이 짜인 몸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결이 보였다. 말없이 우수에 찬 눈은 번뇌가 느껴졌다. 그녀는 갖고 싶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최악으로 만드는 이 남자가.

“재혁 씨가, 오늘 밤 일을 후회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시연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 보이기도 했다. 재혁의 눈이 시연을 향했다. 시연의 눈동자 속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놀라우리만큼 담담한…….

그리고 재혁은 오늘 밤 있을 정사를 위해 몸을 씻고 반라인 이 순간, 결국에는 깨닫고 말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자신에게 애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윤하진에게서는 전신이 타는 것처럼 느꼈던 그 정염이, 그녀에게서는 터럭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연아.”

재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녀가 재혁의 몸을 쓰러트려 눕혔다. 자신에게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그가 앞으로도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도록. 자신에게 늘 미안해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하도록. 시연의 얼굴이 재혁의 얼굴 위로 다가갔다. 서로의 숨이 닿을 때쯤, 재혁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고개를 돌린 재혁이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 너머로 새어 나오는 시끄럽게 톤이 높아진 목소리에 여자의 고개가 위로 들렸다.

“뭐라고?”

끝이다. 여자는 직감했다.

* * *

밖에는 언제 내리기 시작했는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급하게 옷을 꿰어 입고 나온 재혁의 머리카락은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나, 곧 무엇 때문에 젖은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주차장으로 급히 향하는 재혁의 뒤로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따라붙는다.

“재혁 씨.”

재혁은 돌아보지 않는다.

“재혁 씨! 난…….”

“왜!”

빨간색 스포츠카에 오르려는 재혁을 시연이 잡아 세우자 재혁이 낮게 소리를 질렀다. 마치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내리는 비에 머리카락이며 옷이 둘 다 젖었다. 돌아본 재혁의 눈에서는 분명한 노기가 느껴졌다.

“…왜 말 안했어?”

“그럼 가버릴 거니까! 이렇게 가버릴 거였으니까! 그 오메가랑 있을 때 내가 쓰러졌다고 전화했음 올 거였어?”

내리는 비로 얼굴이 젖고 있었지만,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눈물에도 재혁의 눈동자는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그때서야 그는 깨닫고 말았다. 자신에게서 그녀의 존재는 이미 미약해져, 과거형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사랑인줄로만 알았던 그 감정은 오래 전 불씨를 꺼트려 재로 변해 있었다.

“헤어지자.”

“…뭐라고요?”

헤어지자는 말을 하며 재혁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그 오메가도 허락했어. 나 당신 만나도 된다고.”

울음을 토해내며 그녀가 항변했다.

“너 하진이 만났니?”

화난 얼굴의 재혁이 시연을 향해 분노를 쏟아내자, 시연이 한 발자국 뒷걸음질을 쳤다. 거구의 재혁이 시연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진 것은 단언컨대 이 순간이 처음이었다. 그는 늘 시연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다.

“네가 왜!”

“허락받고 싶었으니까. 당당하게 재혁 씨 만나고 싶었으니까!”

하…… 재혁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래, 미안하다.”

시연을 그렇게 만든 것은 결국 자신이라고, 재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그렇게 쉽게 나와?”

“…….”

시연이 다가와 재혁의 뺨을 치고, 주먹으로 가슴을 때렸다. 울음소리가 빗속에서 흩어진다.

말도 안 된다. 이렇게 끝내는 건, 말이 안 된다. 반대하는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고 함께 키워갔던 사랑이었다. 진짜 속내가 어쨌든, 알파 여자와 결혼하는 것보다 오메가와 결혼하는 것이 자신과 더 만나기 좋을 거라고, 그래서 그 오메가와 결혼한다 했었던 남자였다. 결혼은 못 하더라도 끝까지 자신을 품고 가려고 했었던 남자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다니.

“내가, 내가 아까…… 그 오메가…”

“오메가, 오메가, 하지 마!”

네가 그렇게 얘기해도 되는 애 아냐. 재혁이 고함을 지르자 턱부터 목 아래까지 핏대가 솟았다.

“그래. 그 사람 쓰러졌다고 말 안 전해줘서 그래? 거짓말인 줄 알았어! 누가 진짜라고 믿겠어! 그렇게 멀쩡했었는데! 진짜인 줄 알았으면 나도 말 해줬을 거야. 그리고…….”

“…….”

“욕심이었어. 나도 재혁 씨랑 결혼하고 싶고, 가지고 싶어서 그랬어!”

“그만하자.”

“뭘 그만해…? 진짜 헤어지자는 얘기야?”

재혁이 운전석 문을 열었다. 윤하진을 향한 이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그래서 더 갑갑했다. 윤하진과 함께 있으면 확실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자신을 갈증 나고 조급증이 나게 한다. 단지 확실한 것은, 시연에 대한 감정이 끝났다는 것이다.

“너 때문 아니야. 그냥 내 마음이 떠났어. 너도… 알고 있었잖아. 네가 그러지 않았어도 나, 헤어지자고 말했어.”

“…미쳤어.”

“미안하다.”

“그 오메가랑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 잠깐 몸에 미친 거야! 왜 그런 걸 몰라? 진심 아니야, 그거!”

“나 욕하는 건 상관없는데 걔는 욕하지 마. 걘 아무 잘못 없으니까.”

재혁이 차에 오르고 바로 시동이 걸렸다. 쏟아지는 비 아래 서 있는 시연을 두고, 재혁의 차가 출발했다. 재혁의 차가 조그만 점으로 멀어질 때까지도, 그녀는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 *

운전하는 중에 윤하진이 호텔에서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차 실장의 전화를 받아 차를 돌렸다. 단순 피로누적이 아닌 모양이었다. 어딘가 뻥 뚫어진 기분이다. 누군가 심장을 옥죄는 것 같은 느낌에 재혁의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대원병원에 도착하자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수행원들이 재혁을 둘러쌌다. 어디서 냄새를 맡고 몰려온 건지 재혁의 주위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플래시가 터진다. 시끄럽게 물어오는 기자들의 물음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시죠.”

차 실장이 이끄는 대로 VIP 병동의 엘리베이터로 몸을 실었다. 나머지 수행원들은 쫓아 들어오는 기자들을 막는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재혁의 입에서 한숨이 터졌다. 축축하게 젖은 몸에서는 오한인지, 뭔지 모를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상태가 어떤데.”

“아직 못 깨어나셨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어.”

“고농도 억제제를 투약한 상황에서 또 억제제를 드신 모양입니다. 거의 치사량이었답니다.”

“그걸 왜…….”

재혁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최고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복도 끝에 경호원들이 서 있다. 병원이 주는 특유의 위압감이 재혁의 기분을 거슬리게 했다.

“와인오프너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해서 호텔직원이 객실로 올라갔는데, 그 잠깐 사이에 쓰러져 계셨답니다.”

차 실장이 재혁의 뒤를 따라붙으며 설명을 더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는 경호원들이 재혁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커다란 특실 안에, 투명한 비닐 같은 것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투명한 사각형 안에서 침대맡의 가습기는 뽀얀 수증기를 토해낸다. 그 아래 눈을 감고 있는 윤하진의 얼굴이 보였다. 그림같이. 아니, 그림을 그린 대도 저렇게 그릴 수는 없으리라.

황망하게 서 있는 재혁의 곁으로 소파에 앉아있던 선경이 다가왔다.

짜악!

“못된 녀석.”

재혁의 뺨을 내리친 가냘픈 팔이 파들파들 떨리며 내려왔다. 재혁은 돌아간 고개를 바로 하지도 못한 채였다.

“결혼 첫날에, 애를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놔?”

선경의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삭막한 재벌가에서 자라고, 버텨온 그녀지만 마음이 약한 여자였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들 하지만,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아들이다. 어떤 사고를 쳐도 결단코 손찌검한 적 없었다. 그런데 오늘 재혁의 행동은 하진의 생살을 도려낸 셈이었다. 조금만 늦게 발견됐어도 죽을 수도 있었다. 선경의 눈가가 빨갛게 올랐다.

재혁이 왔다는 것을 들었는지 담당의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핸드백을 집어 든 그녀가 또각거리는 힐 소리를 내며 병실을 나간다. 붉게 부어오른 뺨을 큰 손으로 쓸어내리며, 재혁은 다시 비닐 커튼 너머의 하진을 보았다.

천사처럼 잠들어 있는, 그 얼굴을.

* * *

아직도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점점 빗줄기가 굵어지는 것인지 이제는 거의 장대비다 싶게 내리고 있다. 호텔인지, 병실인지 분간이 되질 않는 이 장소의 방음은 철저하다. 빗소리도, 바깥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다. 재혁은 병실 안에 자신과 함께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진의 얼굴을 커튼 너머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귓가에 좀 전에 있었던 담당의와의 대화가 떠돌았다.

‘이제 억제제 성분은 이미 상당 부분 중화되어서 걱정하실 단계는 아닙니다. 다만 생식 기능은 좀 더 지켜봐야…….’

‘왜 이런 겁니까.’

‘억제제는 어디까지나 억제 역할을 해 주는 것이지, 오메가가 아니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본인이 컨트롤이야 할 수 있었겠지만, 하객 대부분이 알파였다면 견디기 어려웠을 게 당연합니다. 해소가 안 되고 쌓인 것들은 수면제 약효가 떨어지면 터질 겁니다. 더 이상 알파와 접촉하는 건 환자분께 고문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나마 격리시킨 것이고요.’

그렇게 말하는 의사조차 열성알파였다. 재혁이 그런 담당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자 담당의가 말을 이어나갔다.

‘억제제 과용 후유증으로 한 사나흘 정도는 환자분 페로몬 기능이 제 기능을 못 할 겁니다. 그렇다고 본인이 알파 페로몬을 지각하지 못하는 건 또 아니어서, 당분간 보호 관찰이 필요합니다. 쉽게 말해서 수용은 되는데 발산이 안 되는 겁니다. 페로몬으로 확인을 할 수는 없지만 히트사이클도 올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선 억제제 성분을 중화시키는 약제 투약이 끝나면 또 다른 약을 투약할 겁니다. 환자께서 욕구로부터 느끼는 고통을 감소시키는 데 탁월한…….’

‘섹스하는 건 어떻습니까.’

‘예… 예?’

‘깨어나면 섹스해도 되냐고 물은 겁니다, 지금.’

재혁이 커튼을 여미고 있는 지퍼를 잡아 내렸다.

지퍼를 잡아 내리고, 재혁이 커튼을 열어젖히자 누운 하진의 몸이 뒤척였다. 예민하게 곤두서 있는 피부가 알파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하진이 내던 달달한 향내는 어디로 간 것인지 사라져 있었다. 과연 그 의사가 말한 그대로였다. 폭신한 이불 아래의 몸이 움직이는지 떨림이 느껴졌다. 아직 수면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얼굴이 고갯짓을 하며 신음을 한다. 페로몬이 날리지는 않았지만 분명하게, 발정하고 있었다.

‘가능만 하시다면 사실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투약양도 줄일 수 있고 환자분 몸에 부담도 확실히…….’

도리어 재혁 쪽에서 해결책을 내어놓자 놀란 것은 담당의 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병원 곳곳에서 떠들어 대듯이 대원건설 차남이 태성그룹의 차남에게 결혼 첫날 소박을 맞아 병원에 홀로 실려 온 것이 아니던가. 거기다 현재의 하진에게서는 알파를 홀릴 만한 페로몬도 없다. 그런 상황이니 담당의가 둘의 관계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강재혁이 나서서 섹스하겠다고 하다니.

발정으로 괴로워하는 오메가에게 가장 즉각적으로 발정을 그치게 하는 것은 알파와의 섹스다. 알파나 오메가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약 따위는 어디까지나 눈가림이나 일시적인 방편밖에 되질 못 했다. 특수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 보편적인 법칙은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으응…….”

하진이 몸을 뒤척이며 옆으로 돌아눕자 재혁의 상체가 하진 쪽으로 기울었다. 침대 위를 짚은 손에 습기가 느껴졌다. 환자복이 축축해질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감이 가벼운 이불을 거둬낸 재혁이 손을 내려 하진의 몸을 손끝으로 쓸었다. 옷 위로 쓸어내리는 것만으로도 얇은 몸은 가련하게 떨어댄다. 옆구리 쪽의 리본을 풀자 너무나 쉽게 맨 살갗이 드러났다. 눈처럼 하얀 몸 위에 더 짙은 색으로 돋아난 돌기에 눈이 간다. 하얗게 드러난 목덜미를 쓰다듬던 재혁의 얼굴이 하진의 입술로 향했다.

“으, 으응…!”

의식이 없는 입술을 가르고 입안 깊숙한 곳까지 혀를 놀린다. 가쁘게 키스를 받던 하진의 몸에서 달뜬 신음이 흘러나왔다. 슬며시 떠지는 눈은 열에 들 떠 있었다. 반쯤 뜬 눈으로 자신에게 깊게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더니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옷을 잡아 끌어당기기도 한다.

“흐윽, 흐으…….”

재혁의 입술이 떨어지자 하진의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터졌다. 무릎을 세워 발을 시트에 딛고는 허리를 띄우기도 한다. 그 전처럼 짙은 페로몬은 없지만 분명하게 발정하고 있었다. 중심이 윤곽이 드러나도록 발기해 있었다. 다리 사이는 환자복이나 시트보다 짙은 색으로 젖어 있었다.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윤하진을 이렇게 만든 데에는 자신의 탓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히트사이클 때 알파의 도움으로 욕구를 해소하지 못하는 오메가들은 쾌락 대신 느끼는 지독한 갈증으로 계속 괴로워해야 한다. 그 트라우마로 자살을 하는 오메가들도 종종 뉴스나 신문에 짤막하게 소개되곤 했다. 재혁이 허리께에 손을 넣어 환자복 하의와 속옷을 함께 잡아 내렸다. 옷감이 피부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하진은 도리질을 치며 울었다.

“기다려, 좀.”

힐끗 내려다본 자신의 남성도 이미 있는 대로 부피를 키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낭패다. 키스 말고 대체 뭘 했다고. 재혁의 미간이 좁아진다. 지금은 윤하진의 페로몬도 없는데, 대체 왜.

“안 꼴릴까 봐 걱정했더니.”

입에서 헛웃음이 터진다. 무슨 걱정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열락에 취해 붉게 오른 눈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혁이 재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린다. 넓은 병실 안의 좁은 비닐 커튼 안이 재혁의 페로몬으로 가득 찼다. 어쩐지 윤하진의 페로몬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최대한 조절하고는 있지만, 이미 흥분상태에 접어든 뒤라 쉽지 않다. 혼자 허리를 계속 들썩이던 하진이 무릎을 세운 자신의 허벅지 사이로 손을 넣었다.

“흐응, 응, 읏…….”

지금의 윤하진에게는 자존심이 없었다. 수치심도 없다. 혼탁한 의식은 사람을 본능적으로 만든다. 하진의 손가락이 자신의 에널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재혁의 오른쪽 눈이 눈썹 위에 주름을 그리며 더 좁혀졌다. 예쁘게 뻗은 손가락이 에널의 주름을 매만지며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에널이 개폐운동을 하며 왈칵 애액을 뱉는다.

“…흐, 아, 앗…….”

재혁의 손가락이 하진의 통통한 아랫입술을 내리눌렀다. 빨갛게 익은 입술이 마치 젤리 같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뭐 하나 먹음직스럽지 않은 게 없었다. 이렇게나 야하니까 어릴 때부터 그렇게 추문을 달고 살 수밖에 없는 거다. 재혁의 검지를 하진의 이가 살짝 깨물더니 아이처럼 쪽쪽 빨았다. 하. 재혁이 놀랍다는 듯이 하진을 내려다본다.

재혁이 하진의 입안에 들은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자 하진은 우는 것처럼 칭얼댄다. 자신의 에널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것은 여전했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야한 장면이다.

“아! 아!”

혀를 세운 재혁이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한쪽 유두를 혀로 희롱하자 하진의 몸이 파드득대며 떨렸다. 혓바닥 전체로 쓸어 올리다가, 다시 혀를 세워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놀리기도 하고 살짝 깨물거나 빨아대기도 한다. 허리를 파르르 떨며 교성을 지르는 것에 재혁의 손이 나머지 한쪽 유두로 향했다. 나머지 한쪽마저 엄지와 검지로 잡아 비틀자 하진의 에널에서 애액이 또 쏟아졌다. 사람 미치게 하는 그 향기마저 있었다면 어땠을까. 지금도 이렇게 눈이 도는 것 같은데 정말 미쳤을지도 모른다고, 재혁은 생각했다.

“빨리, 제바알…….”

허리를 있는 대로 비틀며 헐떡인다. 허리며 고개며 모두 똑바르게 세우질 못하고 꺾어대기 일쑤였다. 파도처럼 몰아치는 열락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손가락 따위로 해갈될 욕구가 아니었다. 뱃속에 있는 뜨거운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손목까지 다 젖을 정도로 아래를 헤집어보지만, 갈증은 갈수록 더해만 갔다. 하진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애원했다. 안아달라고, 이 뜨거움을 어떻게 좀 해달라고.

“귀가 새빨갛네.”

하진의 귓바퀴를 매만지는 재혁의 목소리도 잠겨있었다. 재혁의 몸이 침대 위로 올라왔지만 VVIP 실의 매트리스는 흔들림이 없다.

“안, 안아줘…….”

“…아직도 이렇게 고상한 말을 하고.”

윤하진은 확실히 가학심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재혁이 하진의 에널을 들락거리는 하진의 손가락을 잡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끌었다. 하진의 손은 파들거리며 떨렸다. 재혁의 길게 내어 놓은 혀가 하진의 젖은 손바닥을 천천히 훑었다. 향기는 없었지만 약간의 단맛이 난다. 하진의 손가락 사이로 재혁과 하진의 시선이 얽힌다. 관망하는 듯한 표정이지만 재혁의 눈동자 역시 열락에 젖어 있다.

“…흐으, 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엉망으로 만들고 싶다. 완전하게 망쳐버리고 싶다.

재혁은 미칠 듯이 치미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이 순백의 눈밭을 내 발자국으로 완전히 덮어버리고 싶다고.

“내 좆이 먹고 싶어?”

하진의 고개가 빠르게 끄덕였다.

재혁이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려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이미 완전하게 발기한 것은 선단에 쿠퍼액이 맺혀 있었다. 하진의 허벅지를 활짝 열어젖힌 재혁이 그 사이로 자리를 잡았다. 허벅지와 종아리 끝에 닿는 알파의 몸에 하진의 에널이 닿기도 전에 움찔거린다. 재혁이 자신의 페니스 끝을 하진의 에널에 비비며 말을 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하진은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오빠 자지 넣어달라고 말해 봐.”

열락으로 달뜬 눈이 재혁을 향한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모를 시선이었다.

“빨리.”

“너어… 너어주세요…….”

“뭐라고?”

귀두 일부가 에널 사이로 살짝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한다. 하진의 눈꼬리를 타고 물기가 계속 흘렀다.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입술 사이에서 새는 말들은 더 자극적이다.

“오빠…….”

재혁의 입가에 옅게 웃음이 퍼졌다.

“…자지 너어주세…… 아, 아!”

좁게 다물려 있던 곳 사이를 벌리며 재혁의 페니스가 하진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단번에 삽입된 것은 그대로 하진의 성감을 찌른다. 마치 꼭 맞춘 것처럼. 재혁의 치골이 하진의 몸을 짓누르자 하진의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 하진이 눈을 치떴다. 크게 떠진 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신음조차 흐르지 못한다. 하얀 몸이 분홍색으로 물든다.

“윤하진, 좋아? 오빠가 박아주니까 좋아?”

흐아아. 하진이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옆으로 고개를 떨궜다. 고등학생 시절 들었던 음담패설이나, 최준원의 이야기가 내심 신경이 쓰였던 건가. 윤하진에게 오빠 소리를 하게 종용하고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이 우스웠다. 재혁은 막무가내로 추삽질을 하며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리는 하진을 내려다보았다. 손은 시트를 더듬거리기만 할 뿐, 힘이 들어가질 않아 어떻게 쥐어보지도 못한다.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이 타액으로 번들거리며 재혁이 흔드는 대로 흔들렸다.

“하, 씨발.”

눈썹 길이로 기른 머리가 앞으로 쏟아질 때마다 시야를 가리는 게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재혁이 뒤로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기며 허리 아래를 세게 밀어쳤다. 아-! 작게 비명 같은 교성을 지르더니 하진이 그대로 눈을 감고 늘어졌다. 이미 사정한 페니스가 재혁의 허릿짓에 맞춰 함께 흔들렸다. 우윳빛의 백탁액이 하진의 목선까지 튀어있었다. 재혁이 기절한 하진의 허벅지를 놓자 침대 위로 허벅지가 벌어지며 떨어졌다.

“윤하진, 하진아…… 정말 내 아기 낳을래? 하아!”

사정이 가까워진 재혁이 급하게 하진의 무릎에 팔을 끼우고 숨을 쏟으며 박아댔다. 의식이 없는 몸은 그대로 흔들거리며 재혁의 정액을 받아낸다. 윤하진을 임신시키고 싶다. 사정감에 온통 하얘진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다만 그것이 오메가를 수태시키고자 하는 알파의 본능인지, 윤하진을 갖고 싶다는 소유욕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난 아직 한참 남았는데.

하진의 안에 사정한 재혁이 숨을 고르며 매끈하게 뻗은 다리를 다시 자신의 어깨 위로 얹었다. 사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페니스는 하진의 몸 안에서 다시 꼿꼿하게 일어난다. 재혁은 사정 후에도 여전히 하진의 내벽 속에 묻힌 제 것을 빼지 않은 채 느긋하게 허리 아래를 비벼왔다. 힘을 잃은 다리가 재혁의 넓은 어깨 위에서 달랑거렸다.

“정신 차려.”

재혁의 상체가 하진의 다리를 누르며 하진의 앞으로 기운다. 재혁이 손을 뻗어 하진의 두 뺨을 매만졌다. 상기된 두 뺨이 꼭 복숭아 같다고, 재혁은 생각했다. 가증스럽다고도 생각했었던 윤하진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 품에서 눈을 감은 모습을 보니 그 생각과는 영 달랐다. 어떨 때는 천하의 요부 같더니 이렇게 보니 애기 같다.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안쓰러운 마음까지 피어났다. 그 자존심에, 흔들린 적 없냐고 까지 물었었다. 그런 윤하진을 두고 자신은…… 아직도 하진의 안에 들어차 있는 페니스가 박동한다. 재혁이 눈물에 짓무른 하진의 눈가를 쓸어주자, 하진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눈 뜨니까 더 예쁘네.”

“아…!”

하진이 의식을 찾자마자 재혁의 어깨 위에 얹어진 다리가 다시 천천히 흔들렸다. 재혁의 페니스가 드나들 때마다 향기 없는 애액이 정액과 섞여 하진의 에널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뭉근하게 다리 사이를 흐르는 정액의 느낌마저 외설적이다.

“좋아? 대답해봐, 좋아?”

“으응…! 좋아, 좋아…….”

반쯤 감긴 눈은 쾌감에 절어 있었다. 재혁이 자신의 어깨에 올려둔 하진의 다리를 옆으로 내리며 상체를 겹쳐 입술을 삼켰다. 점막에 닿아오는 혀끝이 미치도록 짜릿하다. 숨이 찰 때까지 서로 미친 듯이 혀를 섞었다. 아쉽게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하진이 다시 떨어지려 하는 재혁의 어깨를 팔을 감아 끌어당기며 속삭인다

“좋아… 좋아해… 좋아해…….”

재혁을 바라보는 처연한 눈매가 젖어있었다.

* * *

팔 안의 존재를 의식한 재혁이 푸스스 눈을 뜬다. 몇 시간이나 잤을까. 재혁이 세 번째 사정을 마쳤을 때, 하진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하진이 기절하듯 잠에 빠졌을 때마다 하진의 몸을 팔 안에 가두고 재혁은 자신도 잠을 청했다. 그리고 짧은 수면 이후 깨어난 하진이 발정하면 그때마다 하진의 몸을 안았다. 먼저 매달려오는 윤하진은 매혹적이다. 수면의 유혹 따위가 비견할 바 아니었다. 푹 자지 못하고 몇 번이나 깨어 격한 섹스를 한 터라 피곤이 쌓여는 있었지만, 오히려 몸은 개운한 기분이었다.

재혁은 아직도 잠이 들어 있는 하진의 뽀얀 얼굴을 본다. 재혁의 팔을 베고 뒤척임도 없이 잔다. 평소에는 날이 선 말투를 하고 사람을 빗겨보면서, 잠들어 있을 때만큼은 천사가 따로 없다. 색색거리는 숨이 목덜미에 와 닿자 재혁은 다시금 빳빳하게 고개를 쳐든 자신의 남성에 짧게 한숨을 쉬었다.

“윤하진.”

“…….”

“하진아.”

하진의 이름을 부르는 자신의 모습에 재혁은 스스로 위화감을 느꼈다. 잠에 빠져든 하진의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청순하기만 하다. 재혁의 손가락이 하진의 아랫입술을 살짝 내리눌렀다. 통통한 입술이 양감을 드러내며 눌리자 재혁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손가락을 떼고 나서도 탱글탱글한 촉감이 손끝에 남았다. 재혁이 뒤에서 베개를 끌어다 자신의 팔 대신 하진의 목에 대어주자 뒤척이며 베개에 얼굴을 부볐다. 상체를 일으킨 재혁이 하진의 뺨을 살짝 꼬집는다. 하얀 볼이 찹쌀떡처럼 당겨지는 것을 보니 피식 웃음이 샜다. 하진은 재혁이 제 얼굴을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도 모르고 잠에 빠져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재혁이 창가로 가 버튼을 누르자 블라인드가 걷혔다. 밖은 언제 그렇게 장대비가 내렸냐는 듯이 하늘은 맑게 개어있다. 넓은 유리창 너머 한강과 높은 건물들,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결혼하고 첫날밤을 병원에서 보낸 것이 되어버려 아쉽긴 했지만, 호텔과 별다를 것도 없구나 싶었다. 아직도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까. 재벌가의 스캔들을 즐기는 황색언론들은 미끼를 물고 날뛰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윤하진을 더러운 주제로 입에 올릴 생각을 하니 미간에 절로 금이 갔다. 발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이어진 생각은 한참이나 계속됐다.

병실 밖으로 재혁이 나가자 경호원들과 비서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기사는?”

“우선 급한 대로 입막음은 했는데, 될지 모르겠습니다.”

“계속 주시하세요. 그리고 내 옷이랑, 저 사람 옷 좀 준비하고. D호텔에 슈트케이스 있을 겁니다.”

재혁은 아직도 어제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타이트하게 상체를 감싸는 흰 셔츠에, 재혁은 불편함을 느꼈는지 팔을 걷었다. 어제 이러고 그냥 잤으니, 셔츠건 바지건 어딘가 더러워져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간밤에 제대로 씻질 못해 옷이 준비되는 대로 샤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재혁이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데, 복도 끝에서 담당의가 걸어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재혁이 병실 밖으로 나왔단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재혁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담당의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다.

“오후에 회진해 주시죠. 아직 저 사람, 더 자야 할 것 같으니까.”

“네, 네… 환자분 상태는…?”

“제가 소용이 있었다면, 좋아졌겠죠.”

지난밤에, 병실 침대에서 섹스를 했노라고 밝히는 재혁의 목소리에는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무리 오메가라고는 하지만 VVIP다. 환자와 보호자의 깊은 사생활까지 관여하고 듣게 된 담당의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담당의를 내려다보는 재혁의 눈빛에는 우성의 위엄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아닌, 주변의 알파들은 모두 깔아뭉개고 짓밟아 경계하는 기운이었다.

“점심 먹고 호출할 테니, 그때 다시 와주시죠.”

“예, 예.”

재차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의사를 뒤로하고, 다시 재혁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간밤에 병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재혁의 페로몬 향기는 많이 희미해져 있었다. 비닐 커튼 안의 윤하진의 상체가 일어나 있는 것이 보였다.

“더 자지.”

유리구슬같이 맑은 눈은, 다시 냉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평온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재혁도 나름 긴장하고 있었다. 어제 결혼식을 했고, 그럼에도 재혁은 윤하진을 두고 다른 여자에게 갔었다. 그리고 결국 윤하진과 함께 첫날밤을 보냈다. 어떤 표정을 해야 가장 자연스러울지 갈피가 잡히질 않았다. 하진은 대답 않고 다시 아래를 본다. 정확히는, 자신의 얼룩진 다리 사이를 보고 있었다.

“윤하진 씨.”

침대에 가까이 온 재혁이 재킷 안쪽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재혁은 또 말이 없어진 하진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섹스한 상대의 뒤처리도 해주지 않을 정도로, 재혁이 그렇게 매너 없지는 않았다. 그가 능숙한 손길로 머리맡의 생수를 들어 입구를 열고 손수건을 적신다.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이 차갑게 하진의 허벅지에 닿아오자, 하진이 살갗을 파르르 떨며 다리를 접으려 했다.

“됐어요. 내가 할 겁니다.”

“해준다 할 때 좀 가만히 좀 있어요.”

재혁의 손에 들린 손수건이 허벅지 안쪽 예민한 곳을 훑고 지나갔다.

“잠 깼으면 아예 씻겠습니까?”

“제가 알아서 씻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 몸으로 어떻게 혼자 씻는다고 그럽니까.”

하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슬쩍 내려다본 재혁의 아랫도리가 또 발기해있었다.

“어제…….”

“기억 안 납니다.”

하진이 재혁의 말꼬리를 자르며 단호하게 말했다.

“강재혁 씨가 이렇게 나오는 걸 보니 어제 저랑 그랬나 본데, 기억 안 납니다.”

“…….”

“기억할 필요, 없겠죠.”

재혁이 고개를 들어 하진과 눈을 맞춘다. 재혁의 눈동자가 당황스러움에 젖어있었다. 아래턱만 삐딱하게 아래로 내릴 뿐, 뭐라 제대로 응수도 하질 못한다.

“하…… 그래. 그건 기억 안 난다 치죠. 그쪽 대체 약은 왜 더 먹은 겁니까.”

“피곤합니다. 이만 나가주세요.”

“너 혹시, 일부러…….”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자살시도냐고 물어오는 기자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자신의 발을 돌리기 위해서 약을 먹고 쓰러진 건 아닌지 하진이 잠들어 있는 동안 별 극적인 상상을 다 했었다. 그러자 하진이 재혁의 손을 차게 밀어냈다.

“일부러? 웃기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정신 나가서 나도 모르게 먹었던 거지, 당신 따위랑은 아무 상관 없어. 내가 순순히 결혼해줬다고, 그리고 내가 어제 당신이 좋은 것 같다는 정신 나간 소릴 해서 큰 오해를 하는가 본데 남의 감정 그렇게 멋대로 생각하는 거 몹시 불쾌합니다.”

하진이 재혁을 쏘아보고는 다시 재혁의 반대 방향으로 침대에 돌아누웠다. 어제 몸을 섞을 때에는 그렇게 예쁜 얼굴과 목소리로 좋다고 말해놓고서. 그 행위가 좋다는 건지, 내가 좋다는 건지 모호한 말까지 해놓고 이렇게 나오다니.

재혁이 무릎을 세워 하진의 침대 위로 올라갔다. 손으로 하진의 어깨를 눌러 정면을 보게 몸을 돌렸다. 손바닥에 환자복 아래 앙상하게 드러난 어깨뼈가 느껴졌다. 하진도 눈을 피하지 않고 재혁을 바라본다.

“너, 어제 좋다고 했었어.”

“기억 안 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줘?”

“좋아한다고도 했어!”

하진이 냉정한 눈으로 재혁을 올려다본다.

“…네 좆이 좋았겠지.”

하진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힘이 풀어지자 하진이 다시 몸을 돌아누웠다.

재혁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어젯밤 그렇게 예쁘게 울며 매달려오던, 좋아한다고 속삭였던 윤하진은 어디로 간 걸까. 재혁의 페로몬이 분노로 하진의 몸을 내리눌렀다. 하진은 모른 척 감긴 눈을 더 꽉 감는다. 불에 덴 것처럼 뜨거운 손바닥이 다시 재차 하진의 몸을 돌려 눕히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놔, 이거.”

“왜? 네가 좋아한다는 내 좆 다시 구경시켜주려고 그러는 건데.”

“놔, 읏, 놔아!”

재혁이 하진의 몸 위를 덮고 있던 시트를 거둬내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어 하진의 몸 위로 올라타자, 하진이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재혁의 몸을 밀어내고, 때리고, 아무렇게나 할퀴어댔다. 벗은 하체가 바둥거렸다. 거센 악력에 억지로 벌려진 다리는 천장을 향해 쭉 뻗었다. 재혁은 어느새 버클을 풀고 페니스를 꺼내 축축해진 에널에 제 것을 비비고 있었다. 언제고 삽입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눈물이 차올라 불투명해진 시선으로 하진은 아무렇게나 손을 휘둘렀다. 하진의 손톱이 지나간 재혁의 뺨에 길게 생채기가 나며 피가 배어 나왔다.

비참함이 이루 말할 것이 없었다. 그는 결혼 첫날에 자신을 버리고 갔고, 자신은 발정이 온몸을 컨트롤하지 못해 억제제를 과용해 병원에 실려 왔다. 그러고도 이 남자가 좋다고 다리를 벌리고 하루 내내 앙앙거리고 매달렸다. 정말 용납할 수 없는 건 그런 자신의 본성이었다. 더럽고 천박한 오메가의 본성.

“혼전 계약서 다시 읊어줘?”

“개새끼, 흑, 개새끼…….”

재혁의 상체가 하진의 앞으로 가까워지자 재혁의 머리카락이 하진 쪽으로 쏟아졌다. 재혁은 빈정거리고 있었지만, 얼굴은 그만큼 즐거워 보이지는 않았다. 화가 나 있었다. 재혁의 커다란 손이 하진의 이마와 목덜미를 쓸었다. 손길은 퍽 다정했다.

“서방님이 원하면 언제든지 보지 벌리기로 했잖아.”

이어 육중한 것이 간밤의 숱한 정사 이후 겨우 다물린 곳을 비집고 들어왔다. 학! 하진은 밭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꺾었다. 벼락같은 쾌감이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온몸이 찌릿하게 조여 대고 눈앞은 하얗고 까맣게 점멸했다. 재혁의 몸을 때리고, 밀어내던 손도 하릴없이 재혁의 옷깃을 쥐었다. 전희 없는 삽입으로 인한 생리적인 아픔보다도 본능적인 쾌감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좋다고 보지 조여 댈 거면서, 왜 매번 내숭 떨어?”

“흣, 흐아, 아…!”

하진의 몸이 거세게 위아래로 흔들리자 하진이 죽을 것처럼 재혁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때서야 재혁도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잡아챘던 하진의 손목을 놓고 제 어깨 위로 올려두었다.

“그게 더 미치게 하는 거 알아?”

“흐응, 응, 으응!”

“내가 박아주면 너 이럴 거 뻔히 아는데, 넌 매번…!”

하진은 언제 사정했는지 배가 묽은 정액으로 얼룩져 있었다. 사정감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추삽질에 하진의 부어오른 내벽이 움찔거리며 더 세게 조여 왔다.

“좋아? 하진아, 좋아?”

“아…! 아, 앙, 아앗!”

긴 인터코스가 이어졌다. 이어 재혁의 허리를 감은 날씬한 다리의 피부가 파드득 떨렸다. 뜨거운 정액이 하진의 내벽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해졌음에도 하진의 허리는 참을 수 없이 뒤틀렸다.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아직도 단단하게 일어서 있는 재혁의 페니스가 자신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온통 뜨겁게 온몸을 달구고 있던 피가 순식간에 차가워지는 기분이다. 하진이 아직도 헐떡이는 자신의 숨을 가다듬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봐요, 윤하진 씨. 괜찮…….”

사정과 함께 사그러들은 분노의 빈자리에, 미안함이 자리했다. 실수했다 생각한 재혁이 사과하려 하는데 동시에 하진의 손바닥이 매섭게 재혁의 뺨을 후려쳤다. 순간적인 아픔보다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감정이 먼저 치밀었다.

“싸셨으면 이만 가셨으면 좋겠네요, 강재혁 대표님.”

부어오른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하진은 아프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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