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21/26)

7.

모니터 화면을 가득 채운 화려한 화투패가 휙, 휙, 효과음과 함께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클릭 한 번에 검은색 언덕이 그려진 패 위에 세 마리 새가 날아다니는 패가 겹쳐 착! 달라붙었다.

“아싸 고도리…!”

“고, 고! 무조건 고!”

하얀 간호사 복장을 한 남녀가 함께 화면에 집중하며 못 먹어도 고다, 아니다 스톱이다,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형 병원이라고 해도 인적이 드문 지방에 위치한 이 병원은 노동 인력에 비해 항상 환자가 부족해 일이 적은 편이었다.

텅 빈 복도 끝에서 나타난 박 간호사가 나이트를 연속 일주일 한 것 같은 초췌한 얼굴로 걸어오더니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넸다.

“김 쌤, 최 쌤, 얘기 못 들었어? 하… 지금 응급실 쌩난리 난리. 이런 난리가 없다.”

“…왜요? 어디서 붕괴 사고라도 났대요?”

“아니 교통사고 환자 한 명.”

“근데 웬 난리?”

컴퓨터 화면에서 시선을 뗀 두 사람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박 간호사가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툭툭 정리하며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연다.

“아니, 환자 때문이 아니라 그 미친 보호자 때문에.”

“쌤…! 수 쌤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 말에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김 간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수 선생님이라 불리는 수간호사는 심하게 FM에 가까운 꽉 막힌 인간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병원 안에서 몰래 환자나 보호자 뒷담을 하는 것을 가장 최악으로 여겼다. 그게 어떤 인성을 가진 환자나 보호자가 됐건 간에.

“후우… 이번엔 진짜거든? 완전히 미쳐서 날뛰는데… 그냥 이거야 이거.”

억울하다는 듯 한숨을 뱉은 그가 눈을 뒤로 까뒤집고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린다. 이 두 사람도 응급실이 얼마나 아비규환이었는지 보았다면 태평한 소리는 단전 밑으로 쑥 내려갔을 것이다.

“지금 내려가면 지랄발광이란 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게 될 거다.”

박 간호사는 한마디 덧붙이고 아련한 기억을 떠올리듯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 교통사고로 실려 온 환자의 상태는 확실히 조금만 더 늦었으면 DOA2)였을 정도로 심각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도 전에 바로 시작한 심폐소생술 중에 30초 동안 심정지까지 왔었으니까.

하지만 더 심각한 건 환자와 함께 온 그 미친 새끼다.

온몸에 그의 피를 묻힌 채 절규하던 남자는 환자에게 심정지가 오자마자 닥치는 대로 날카로운 것을 찾아 손에 들더니 바로 제 목을 그으려고 했다. 자기 심장을 그에게 주면 된다면서.

장정 여섯이 달려들어 겨우 제지했지만, 워낙 지랄발광을 하는 터라 이미 흐르는 피를 지혈할 수 없어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영화 속 광인이나 폐쇄 병동에서 날뛰던 환자들은 이제 유순한 천사로 보일 지경이다. 지금껏 눈앞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망도 많이 봐왔지만 차원이 달랐다.

그건 살면서 처음 보는…… 개미친 또라이의 광기였다.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환자가 잘못되면 이 미친놈의 새끼도 절대로 온전하지 않겠구나’라는 것을. 아마 따라 죽거나, 미쳐 돌거나.

분명 한 사람 목숨인데 두 사람 이상이 달린 느낌. 까딱했다가는 우리까지 좆되겠다는 감상을 강하게 받았으니까. 소름이 좍 돋는 광경을 다시 떠올리던 박 간호사가 진저리 난 것처럼 부르르 몸서리치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근데 그 미친노… 크흠, 보호자. 그 사람 같아. 그 뭐냐… 아 왜, 잘생긴 거로 유명한 사장 있잖아.”

“……설마 JS유통이요? 에이 …그 사람이 왜 미친놈이겠어요?”

김 간호사가 황당한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린다. 얼마 전 매각 이슈로 뉴스를 타면서 TV에 자주 나왔기 때문에 요새 젊은 여성이라면 남자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주부 잡지 앙케트 결과, 남편을 갖다 버리고 재혼하고 싶은 남자 1위. 배우보다 잘생긴 재벌이라면서 전혀 관련 없는 연예 프로그램에도 심심찮게 등장했으니까.

“혹시…! 그 사고 난 환자가 어마어마한 비밀 자금의 위치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던가?”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최 간호사가 셜록이라도 빙의한 것처럼 헛소리를 던졌다.

“개뿔. 다 모여봐.”

피식, 바람 빠지는 코웃음을 친 박 간호사는 비밀 이야기하듯 주위를 둘러보더니 두 사람의 대가리를 한데 모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 환자 애인이라니까…. 막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어. 눈빛이 진짜… 난 그렇게 절절한 눈깔은 또 처음 봤잖아. 눈깔이 완전 회까닥 뒤집…….”

“쉬잇…! 뒤에 수 쌤 오셔요!”

동시에 복도 끝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수간호사를 발견한 김 간호사가 아연실색하며 말을 끊었다.

그녀에게 병원 내에서 보호자 뒷담 하는 것을 들켰다간 퇴사하는 날까지 재가 되도록 활활 태워질 게 뻔하다.

늘 라디오처럼 FM, FM을 찾는 고지식 그 자체인 사람이었으니까.

“어머 씨팔, 어우! 뒈질 뻔했네. 미친 새끼…! 개 또라이 새끼…!”

차마 수간호사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지 못한 말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세 사람 모두 나란히 벙찐 표정이 되었다.

“수… 쌤…?”

“응??”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수간호사는 평소 우아했던 머리 스타일과 단정한 옷매무새까지 어쩐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엔 혈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그래요…?”

김 간호사가 어디서 지옥문이라도 열렸냐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여자는 조금 전 급박했던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누가 마취총 좀 가져와!!”

“들었지, 마취총 가져오래! 빨리!”

수간호사는 다시 생각하면서도 소름이 돋았는지 박 간호사와 똑같이 부르르 떨며 몸서리쳤다.

“무슨 일은, 다 좆될 뻔했지. 하다못해 없는 마취총까지 찾았잖아. 나중엔 경비까지 다 달려들어서 겨우 주사 맞혔다.”

“세상에… 이러다 그 환자 사망하기라도 하면 진짜 사달 나는 거 아니에요? 환자분 상태는 어때요?”

서진의 상태를 묻는 말에 주변을 휙휙 둘러본 수간호사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많이 안 좋아. 바이털도 안 좋고. 수술 중에 심정지만 벌써 두 번째라 뇌사 가능성도 있고. 아마 오래 버티면 하루 이틀…….”

“어쩜 좋아…….”

입을 틀어막은 김 간호사가 안타까움을 그득하게 내비친다.

“뭐… 사람 목숨은 신의 영역인 걸 어쩌겠니. 일단 그 미친놈은 안정제 맞혀서 격리해뒀으니까 다들 걱정 말고, 각자 할 일이나 합시다.”

***

차가운 수술실 안에 심전도 기계음이 불안정하게 울리고 잔뜩 긴장된 공기가 감돈다.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지금 지혈 안 되면 바로 또 어레스트 올 것 같습니다.”

“코다벌룬 준비하세요.”

“네…!”

추락 사고로 인한 심각한 장기 손상과 과다출혈 쇼크로 실려 온 서진은 무려 열 시간이 넘도록 수술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수술 도중, 갑작스럽게 발생한 뇌부종과 과다출혈로 혈압이 뚝 떨어지는 바람에 결국 수술은 중단되고 그는 다급하게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당장 상태가 너무도 심각해서 더 큰 병원으로 이송할 여력조차 되지 않았다.

여기서 담당 의사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 정도 상태면 경험상 늘 좋지 않은 예후로 이어지고는 했으니까. 다만 한 가지, 환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코마 치료를 버텨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정도다.

문제는 ‘그’ 보호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란 말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그랬다간 말 그대로… 진짜 좆될 것 같았다.

응급실에서 미쳐 날뛰던 남자를 떠올리던 의사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신이 혼미하도록 계속 정맥주사로 안정제를 맞히고 있지만, 그는 희미한 정신으로도 환자의 얼굴을 보게 해달라며, 괜찮은지 보러 가겠다고 발광해댔다.

보는 사람도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절박함은 광기에 가까웠다. 일단은 남자를 찾아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 대신 혈압이 떨어져 수술을 중단하고 중환자실로 이송했다는 소식을 전하기로 했다.

분명 약 기운으로 정신이 없을 터인데, 남자는 제발 그 사람을 보게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매달렸다. 남자의 절실함을 외면하지 못한 의사는 결국 면회를 허락해 주었다. 어차피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

자꾸 누군가 팔에 좆같은 주사를 놔대는 바람에 정신이 혼미하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철은 결국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서진이 있는 중환자실로 향했다.

아직도 옷에는 그 사람이 흘린 피가 묻어 있다. 숨 쉴 때마다 뜨거운 불길에 내장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그때 서진이 떠나자마자 바로 차량을 부른 철은 짧은 시간 만에 그를 따라갔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뚫린 가드레일과 낭떠러지 밑에 뒤집힌 익숙한 차를 발견했을 때, 남자는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어떻게 병원까지 왔는지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울부짖었다. 자꾸만 자신과 서진을 떨어뜨려 놓으려는 사람들에게 미친놈처럼 행패를 부리다가 심장이 멈추면 제 심장을 주면 된다고 울며 빌고 애원했다.

그러다 결국 거지 같은 수면제 따위를 놓았는지 이상한 곳으로 격리당하고 말았다. 나중에 찾아온 의사에게 무릎을 꿇고 제발 그 사람을 보게 해달라고 개처럼 빌었다.

약 기운으로 비틀거리는 철을 부축한 사람들이 중환자실 문 앞에서 멈춰 선다.

그들이 대신 문을 열어주자, 침대 위에 죽은 것처럼 누워 차가운 기계에 둘러싸인 연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누워 있는 그가 너무 아파 보여서 영혼까지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다.

무너지듯 그의 옆으로 다가간 철은 차마 손대면 사라질까, 손도 대지 못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절망했다.

희대의 병신 같은 자신과 달리 그저 천사가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서진은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의 서진, 나의 사랑, 내 전부.

서진아, 서진아… 서진아…….

그렇게 얼마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바라봤을까.

믿을 수 없게도, 서진의 칠흑처럼 새까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고동색 눈동자가 스르르 굴러가더니 넋을 놓아버린 남자를 향했다.

“……가….”

서진이 잔뜩 갈라진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 거짓말처럼 산소 호흡기에 뿌옇게 김이 서린다. 그 희미한 한마디를 끝으로 서진은 다시 깊은 코마에 빠졌다.

***

새까만 어둠이 정처에 깔린 새벽. 갑작스레 띠 띠 띠― 경고음처럼 요란하게 울려대는 기계음이 조용한 중환자실을 가득 채웠다. 병실 문이 거세게 열리더니 다급하게 뛰어 들어온 간호사가 바로 환자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빠르게 확인을 마친 간호사는 약 기운으로 정신이 나간 듯 여전히 침상 옆에 멍하니 앉은 철을 짐짝 치우듯 밀쳐내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상태.”

이어서 빠르게 모습을 드러낸 의사가 병실로 들어서며 서진의 상태부터 묻는다.

“홍서진 환자, 산소포화도 7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간호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지체할 시간 없이 바로 침대 위에 올라탄 의사가 두 손을 모은 다음 서진의 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체중을 싣고 온 힘을 다해 심장 부근을 꾸욱 꾹 내리눌렀다. 철을 의식해서인지 어쩐지 평소보다 간절함이 담긴 컴프레션 중에도 시끄럽게 울려대는 기계음은 점점 더 요란법석을 떨며 마지막 경고를 날리는 듯했다.

급박하게 떨어지는 숫자를 확인한 간호사가 더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혈압 더 떨어집니다!”

“디핍 가져와!”

군기가 바짝 든 대답을 하며 빠르게 뛰어간 간호사가 바로 제세동기를 끌고 나타났다.

“뭐 해! 보호자 내보내!!”

있는 힘껏 흉부를 압박하던 의사가 여전히 병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눈빛이 흐리멍덩해 보이는 남자를 발견하더니 소리 지른다.

순간,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울려대던 기계음이 삐이이― 끊김 없이 길게 이어지는 한 가지 음으로 모였다. 미약하게나마 불규칙한 지그재그를 그리던 가느다란 선이 일직선으로 길게 늘어진다.

“쌤, 어레스트요!!”

동시에 간호사의 초조한 외침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자세 잡아!”

흉부 압박을 중단하고 침대에서 내려온 의사가 손잡이 달린 사각형 물체를 양쪽 손에 들고 문지르는 동안, 간호사가 환자의 상의를 벗겨내고 팔다리를 떨어뜨려 자세를 잡았다.

모습을 드러낸 가슴과 복부, 어깨까지 어느 한구석 성한 부분 없이 커다란 멍이 새까맣게 들어 있다. 철이 행여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밤마다 소중하게 끌어안았던 새하얗고 보드라운 피부였다.

이미 시꺼멓게 타버려 재가 된 심장이 또 한 번 지옥으로 무너져내렸다. 발등만 살짝 까져도 아프다고 흙밭에 싸질러질 만큼 나약한 사람인데, 이건 너무 아파 보였다.

“비켜! 슛…!”

의사의 다급한 구호와 함께 가슴에 차가운 기계가 닿더니, 축 처진 상체가 덜커덩 위로 솟아올랐다가 힘없이 다시 떨어졌다.

“맥박 안 잡힙니다…!”

급박한 간호사의 목소리와 여전히 이명처럼 울리는 삐― 소리가 남자의 귀를 칼날처럼 파고들더니 그대로 두개골을 쪼개어 관통한다. 뻣뻣하게 굳은 뇌까지 날카로운 칼날에 산산이 부서져 내리는 것 같다.

“하나, 둘, 셋, 슛!”

또 한 번 가느다란 몸뚱이가 덜커덩 허공에 치솟았다가 침대 위에 떨어졌다.

뒤이어 병실로 뛰어 들어온 여러 명의 의료진이 초점이 나간 듯한 눈으로 멀거니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우며 종용했다.

“보호자는 나가 계세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철을 양쪽에서 붙들고 내쫓듯이 바깥으로 부축하더니, 곧바로 커다란 병실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세게 닫혔다.

시끄러운 안과 달리 적막이 흐르는 병원 복도에 홀로 남겨진 남자는 그 자리에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머리는 남자에게 어떤 명령도 내리지 못했다.

시뻘겋게 핏발 선 눈알에서는 뜨뜻한 물조차 흘러내리지 않는다. 어쩌면 이미 죽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뇌도 심장도 폐도 꺼내져서 다 타버렸으니까.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멍하니 서 있던 철은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서진이 갑자기 오두막을 뛰쳐나간 이유는 몰라도 한 가지 명확한 건, 모든 게 제 탓이라는 거다. 자신과 함께 있다가, 제 차를 타고 나가서 사고가 났다.

머리끝까지 흥분한 그 사람을 잡지 못했다. 아니, 애당초 한 달 동안 같이 살아달라고 욕심을 부린 게 문제였다. 이곳에 데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끈질긴 거머리처럼 그에게 매달리지 말았어야 했다. 애초에 6년 전에 자신을 버리고 떠났던 그를 절대 찾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만나지 않았더라면.

강당에서 하프를 연주하던 그 사람을 스토킹하지 않고, 고향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모른 체했더라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희미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지난 세월을 넘어 귓가에 들려왔다.

“철이… 맞죠…?”

“나 알어?”

“…에 뭐, 아침에 마을 아주머니들한테 들어서요.”

애써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을 기적처럼 다시 만난 날, 자신을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가 제 이름을 불러주자마자 바로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었다.

한번 빠지면 다시는 기어 나올 수 없을 만큼 깊은 심연에 빠져들듯이 뒷일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입으로 달라고… 마우스, 립스.”

그날은 입으로 물을 달라는 믿기지 않는 부탁에 머저리처럼 덜덜 떨며 입술을 맞대고 물을 줬었고.

“더… 더 줘….”

어느새 물이 떨어졌는데도 손깍지를 낀 채 혀를 얽으며 계속 입을 맞췄다.

“…담배… 피웠어?”

“……이제 안 피울께….”

“오히려 좋아.”

처음으로 그 사람과 입맞춤 한 날. 그날 이미 그에게 목숨을 바쳤다.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이 사람이 원한다면 간이고 쓸개고, 온몸에 흐르는 피까지 싹 뽑아서 줄 수 있었다. 그저 자신을 가지고 놀고 싶다는 이유였어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언제부턴가 그가 필요로 해야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욕심. 이 빌어먹을 욕심이 문제였다. 서진이 자신을 돌아봐 주고 먼저 입을 맞춰줄 때마다 시꺼먼 소유욕이 꿈틀거리며 고개를 내밀었으니.

“나랑 살자. 내가 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줄께. 평생 니 모시고 살께….”

“그래… 너랑 살래….”

그때부터 그가 제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서진에게 주제도 모르고 분노했었다. 사실은 그렇게 믿어야만 그를 다시 찾아낼 수 있으니까. 어쭙잖은 복수를 빌미로 엉겨 붙어서 어떻게든 손끝이라도 다시 한번 스쳐보겠다고.

“홍서진 씨도 나한테 씹다 뱉는 껌이라고.”

그 과정에서 억지로 서진에게 쏟아냈던 쓰레기 같은 말들이 여전히 숨 쉴 때마다 폐부를 찔렀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죽일 듯이 심장을 들쑤셔놓았다.

만약 그 사람의 심장이 다시는 뛰지 않는다면.

더는 숨을 쉬지 않으면,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그와 함께했던 모든 기억들이 나 혼자만의 기억이 된다면. 그러면 어떻게 하지. 어떻게. 어떻게 죽어야 하지.

이제 편하게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남은 건 그 사람보다 백배로 고통스럽게 죽을 방법을 생각하는 일뿐이니까.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복도 창문 사이로 어렴풋이 동이 터올 때쯤 열린 병실 문에서 잔뜩 흐트러진 모습을 한 의사가 걸어 나오더니 밭은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보호자님. 환자분 상태가 많이 안 좋습니다. 이제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에 철의 입에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대체 무슨 준비를 하라는 건지.

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한 번 꿀꺽 넘긴 의사가 말을 잇는다.

“당장 장기가 못 버텨주면 바로 뇌사로 갈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희박하지만 한 가지, 코마 치료 말고는 방법이 없겠습니다. 한시가 급해서 바로 시작해야 하는데… 생명이 달린 문제라 반드시 직계가족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순간 흐리멍덩하던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의사가 말하는 코마 치료는 저체온 치료로, 몸을 얼리고 체온을 32도까지 하락시켜 신진대사를 늦춘 다음 손상을 최소화하는 치료 방법이다. 그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방법이었다.

“보험 조회해 보니까 홍서진 씨 부모님이 두 분 다 미국에 계신 것 같더라고요. 여기서는 연락처 조회가 안 됩니다.”

“…치료 먼저 시작해 주세요. 책임지고 동의받겠습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못 할 것이 없다.

***

서진의 핸드폰은 고사하고, 사고 현장에서 자신의 핸드폰마저 잃어버린 철은 일단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 서진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이나 서류 따위를 찾아서 사촌 연락처라도 알아내면 해결될 일이니까.

지금은 무엇보다 그 사람을 위한 일을 하는 게 먼저였다.

검은색 택시가 두어 시간을 달려 익숙한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서고, 차에서 내린 남자는 근처 공중전화부스에서 열쇠공을 불렀다.

이윽고 닫혀 있던 501호 현관문이 열리자 엉망으로 어질러진 작은 원룸이 나타났다. 귀한 그 사람과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공간에 마음이 아프다.

반사적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옷들을 주우며 집 안으로 들어선 철은 닥치는 대로 서랍을 뒤지면서 눈에 보이는 노트나 수첩들을 빠르게 넘겨보았다.

침대 밑 박스 안에서 형형색색의 편지 더미를 찾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받은 러브레터를 모아둔 것 같아 열어보지는 않았다.

여기저기 뒤지고 다녀도 연락처를 적은 수첩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 나가려던 찰나, 책상 옆에 달린 작은 서랍을 발견한 철이 안쪽에서 검은색 수첩을 찾아냈다.

종이를 넘겨보니 초등학교 동창들부터 친척들의 집 전화번호까지 빼곡하게 적혀 있다. 동글동글하게 적힌 사랑스러운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가 저도 모르게 마른 잉크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이미 오래전 쓰인 글씨라 그럴 리는 없지만 제 손에 묻어났으면 좋겠다.

철은 수첩을 주머니에 챙기고 나왔다. 바깥의 찬 바람이 그의 피부를 스치는 순간,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방금 전에 봤던 러브레터가 잔상처럼 눈에 남았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다 같은 스티커로 마무리한 거 보면 한 사람이 보낸 러브레터 같은데. 대체 누가 뭐라고 써 보냈기에 이렇게 열심히 모아두고 있던 건지.

그는 결국 다시 오피스텔 안으로 향했다. 딱 한 개만 열어보고 가자는 마음으로 바닥에 꿇어앉은 철은 결국 노란색 편지 봉투를 손에 들었다. 봉투는 물론, 편지지 안에도 받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은 적혀 있지 않다.

“…….”

그런데도 둥그런 글씨를 보자마자 단박에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안녕. 오늘은 뭐 하고 지냈어?

이번 태풍 때문에 농부들이 고생한다는데…

꼬추밭은 특히 물고랑을 잘 파야 돼.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농부보다는 내가 더 고생하는 거 같애.

정진물산 황 부장 놈이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아?

저번에는……

아무 두서없이 자기 할 말만 쫑알쫑알 늘어놓은 편지에는 혼자만의 일상 이야기가 가득하다.

순식간에 예쁜 편지지에 빼곡히 쓰인 편지를 다 읽어버린 남자는 뭔가에 홀린 듯이 바로 다른 편지를 손에 들었다.

오뎅끼데쓰까? 와따씨와 오뎅데쓰.

‘잘 지내세요? 나는 잘 지내요’라는 뜻이래.

영화에서 봤는데 거기서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나왔어.

모든 인연엔 오고 가는 때. 시절이 있다는 말인데,

기독교 용어인가 불교 용어인가 아무튼 그래.

그러니까 우리는 그해 여름 시절 인연이었나 봐…….

그 자리에서 수십 장이 넘는 편지를 읽은 철은 몇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받는 이의 이름을 적지 않은 이 편지를 쓴 사람은, 단 한 번도 수신자에게 회신을 받은 적이 없다는걸.

그 흔한 일기도 써본 적 없는 사람이 매일 손에 펜을 쥘 만큼 상대를 그리워했다는걸.

첫사랑이랑 첫눈을 같이 보면 이루어진다는데.

여기는 오늘 첫눈이 내렸어. 거기는 눈이 잘 안 내리지?

눈이 많이 쌓이면 너랑 같이 눈썰매 타고 싶다.

고장 났던 눈물샘에서 투명한 물이 뚝 떨어져 내리며 소중한 편지의 글씨가 흐릿하게 번진다.

유독 힘들었다고 잔뜩 투덜거리는 내용이 적힌 날, 마지막 문장에 그의 시선이 아주 오랫동안 머물렀다. 드디어 처음으로 등장한 수많은 편지 주인공의 이름이었다.

보고 싶다.

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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