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인적이 드문 깊은 산속에 위치한 통나무집. 그곳에선 며칠째 침상이 삐걱거리는 소음과 앙상블처럼 터져 나오는 새된 신음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하으, 응! 응! 아아…!”
“흐읏…하….”
사흘, 어쩌면 나흘….
이곳에 도착한 첫날 밤 이후로 한 일이라곤 최소한의 생존 활동을 제외하면 온종일 누워서 다리를 벌리거나, 무릎을 꿇고 엎드리거나, 그냥 일자로 다리를 모으고 엎어지거나…….
아니면 지금처럼 그에게 안겨 허공에 몸이 들린 채로 욕실 벽에 기대어 박히는 일뿐이었다.
“응! 아! 흣…! 그, 그… 만…! 아읏!”
철퍽! 철퍽―! 습기를 잔뜩 머금은 소리가 욕실에 울려 퍼진다. 서진의 양쪽 다리를 잡아 들고 있는 남자의 사타구니가 발갛게 물든 엉덩이에 쉴 틈 없이 부딪쳤다.
계속된 성교로 홧홧하게 달아오른 구멍에 성기가 처박힐 때마다 이미 안에 여러 번 싸지른 정액이 기둥에 딸려 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아응! 흐읏! 아! 아흑…!”
콱, 콱, 배를 뚫을 것처럼 위로 세게 쳐올리는 행위에 저절로 시야가 점멸했다. 극도의 쾌감과 자극으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서진은 이미 정신을 놓고 무아지경으로 허리를 치대는 남자의 목을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 바들바들 떨며 매달렸다.
한계까지 뚫고 들어간 자지가 뜨끈뜨끈한 내벽 안을 제집처럼 마구 휘저었다. 색정적인 구멍은 며칠 내내 짐승 같은 자지로 쑤시고 박혀도 더 꽉 조이고 쫀쫀하게 물어댔다. 정말 서로에게 몸이 딱 맞춰지는 것처럼 박으면 박을수록, 하면 할수록 더 좋았다.
“으으응…! 하아…!”
“하윽, 서진아….”
쇳덩이 같은 자지가 퍽, 퍽, 처박힐 때마다 고통인지 쾌감인지 구별 안 되는 짜릿한 감각이 온몸에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극한의 쾌락도 쉬지 않고 계속되면 힘든 거였다. 이대로 배 속이 고장 나버리거나 정신이 나갈 것 같다.
인제 정말 그만해야…….
아무래도 눈이 흐리멍덩하게 풀린 철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씻겨준다고 해서 쭐레쭐레 쫓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또 끌어안겨서 엉덩이를 철썩철썩 맞고 있었으니.
퍼억―!
“아흐으응…!!”
기다란 자지가 음낭까지 집어넣을 것처럼 세게 처박히는 순간, 더 이상 쥐어 짜낼 것도 없어 풀이 죽은 서진의 성기 끝에서 투명한 액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후우….”
그 상태로 잠시 행동을 멈춘 남자는 서진의 귓바퀴를 뜨겁게 핥았다가 목덜미를 슬근슬근 깨물고 빨아대며 더 짙은 자국을 남기지 못해 아쉬워했다.
“으응… 철아….”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흥분한 남자가 허리를 미친 듯이 흔들기 시작했다. 거세게 샅이 맞붙는 소리가 욕실에 요란하게 울렸다.
철퍽, 철퍽, 퍽, 퍼억.
“으읏!! 아응!! 아!! 아흐윽!! 하아…!!”
흉포한 추삽질에 서진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자지러졌다.
“크읏…!”
퍽…! 가장 깊은 안쪽 울퉁불퉁한 곳에 처박힌 귀두 끝에서 더운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콱, 콱, 허리를 추켜올릴 때마다 꿀렁꿀렁 터져 나오는 정액은 온종일 사출해대도 양이 많았다.
희멀건 액이 남자의 탄탄한 양쪽 허벅지를 타고 욕실 바닥에 후드드득 떨어져 내렸다. 허공에 뜬 두 다리가 속절없이 후들거렸다. 철이 안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 철퍼덕 엎어졌을 것이다.
철은 여전히 서진을 꽉 끌어안은 채 닥치는 대로 키스를 퍼부었다. 지금 눈을 뜨면 꼭 눈알까지 핥아 먹을 것 같은 기세였다.
“으…읍… 끄으윽….”
서진의 목구멍에서 죽어가는 괴물이 내는 것 같은 괴상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아… 미안… 인자 씻겨줄께.”
저 다정한 목소리에 몇 번을 속았던지.
***
전쟁 같은 섹스에 휴전을 선언했다. 이대로 동반 복상사하기 전에 스톱하자고.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박아대던 철은 막상 계엄령이 떨어지자 후회가 막심해 보이는 얼굴이다.
어디선가 가져온 연고를 들고 뒤에 약을 발라주겠다며 설치는 놈을 있는 힘껏 밀쳐버렸다. 며칠간 새롭게 발견한 그의 진면모를 봤을 때, 제 자지에 연고를 처덕처덕 바른 다음 구멍에 쑤셔 넣어줄지도 모르니까.
늦은 점심, 뜨뜻한 욕조에서 몸을 녹이고 나온 서진은 소파 위에 패잔병처럼 벌러덩 드러누웠다. 팔을 뻗어 핸드폰을 손에 들고 화면에 뜬 날짜를 확인하더니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진짜로 나흘 동안 그 짓만 했다니.
데구루루 눈알을 굴려 자신과 달리 말짱해 보이는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철은 아직도 힘이 남아도는지 바깥에서 장작까지 패온 다음 불을 붙인 벽난로에 쑤셔 넣고 있었다.
옷을 걸쳐도 비치는 탄탄한 등 근육이 오른팔로 장작을 뒤적거릴 때마다 적나라하게 움직였다. 이어서 시선을 내리고 제 나약한 몸을 바라보던 서진의 눈동자에 옅은 질투와 분노가 서렸다.
♩♬~~♪♫♪~~~????♬~~
순간 손아귀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놀라 핸드폰을 내던질 뻔했다. 허겁지겁 발신자 번호를 확인해보니 그냥 광고 전화다. 바로 아차 하는 생각이 대가리를 스쳤다.
랜선 마누라랑 연락하는 척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아무리 보스니아 헤체비엔나에 있다지만 제 마누라랑 일주일이 돼가도록 연락 한번 안 하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시끄러운 벨 소리에 뒤를 돌아본 철의 눈치를 살피던 서진이 크흠, 목을 가다듬더니 통화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여, 여보….”
- 짝짝짝짝! 당첨 축하드립니다! 해피 해피 여행사….
다행히 자동으로 녹음된 음성이다.
“어어, 맘마는 먹었쪄?”
- 지금 사이트에 접속하시면 태국 여행 패키지가 단돈….
“나두 자기 보고 싶지이.”
살면서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토 나오는 발성으로 열연을 펼쳤다. 까딱했다간 부부 사이가 안 좋아 보일까 봐 한층 노골적인 연기를 펼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결과적으론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몸을 섞은 남자 앞에서 쓰레기 같은 대사들을 내뱉는 꼴이었지만.
“웅. 웅. 나두우….”
핸드폰을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운 채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이는 순간, 통화 음량 버튼이 꾸욱 최대치로 눌렸다.
- 빰빠라밤~! 지금 당장! 해피 해피 여행사를 검색해 주세요!
동시에 시끄러운 자동응답 목소리가 허공을 꿰뚫는다. 놀란 서진이 바로 탁! 소리 나게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갑작스레 통화가 끊기자 작은 거실에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조용한 가운데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흘끔, 남자의 눈치를 살피니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할 뿐 따로 딴죽을 걸거나 추궁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쓰읍… 안테나가 잘 안 터지나….”
민망해진 서진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찌뿌둥한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벽난로의 덮개를 끌어 내린 철은 이전 상황을 없던 일처럼 무시하고 입을 열었다.
“밖에 날씨 좋은디 산책 갈래?”
“…놀리냐?”
“업어줄께.”
그 말에 혹해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 산의 그림 같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오두막에만 처박혀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그의 말대로 외출을 준비했다.
여러 겹 겹쳐 입은 옷 위에 패딩을 걸치고, 털모자를 쓰고, 목도리에 스키 장갑까지 꼈다. 제 의지라기보다는 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지만.
집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 바닥에 무릎을 꿇고 등을 내주는 남자에게 사양 않고 몸을 맡겼다. 따지고 보면 걷기 힘든 것도 다 그의 탓이니까.
저벅저벅.
아무도 닿은 적 없는 새하얀 눈밭에 한 사람이 발자국을 남기는 대신 두 사람이 함께 걸었다. 하얀 눈을 드레스처럼 껴입고 겨울을 버티는 나무들과 투명하게 얼어붙은 개울이 햇빛에 반짝이면서 장관을 이뤘다.
그보다 더 장관은 자신을 업고 꿋꿋하게 산길을 걷는 남자의 옆얼굴이지만. 앙상한 나뭇가지 틈새로 쏟아지는 주홍빛 햇살이 잘생긴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뒤에 업혀서 멍하니 철의 옆모습을 훔쳐보던 서진은 문득 그가 자신이 없는 지난 6년간 어떻게 지냈을지 궁금해졌다.
하루를 보내다가 가끔은 나를 생각했을까. 난 매일 생각했는데. 매일 울면서 편지를 썼는데. 너는 어땠을까.
“…어떻게 지냈어?”
“뭣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잘.”
김이 푸시식 빠지는 그의 대답에 픽 바람 빠지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잘 지냈으면 다행이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철은 꼭 시한부 환자를 업고 환자에게 아름다운 겨울 산을 감상하라는 것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화 〈러브 레터〉였나…. 영화였던가 드라마였던가 어디선가 아픈 여자를 업고 다니는 이야기를 본 것 같은데.
아무튼 격한 섹스로 걷기 힘든 남자를 업고 눈밭을 걸어 다니는 이야기는 없을 테니 자신이 최초일 것이다.
저벅저벅.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천천히 오르며 벚꽃처럼 하얀 눈꽃이 핀 나무들을 감상했다. 새하얀 산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해서 꼭 세상에 두 사람만 남은 것 같은 감상이 들었다.
모든 게 대낮에 꾸는 꿈처럼 지나치게 아름답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더 보지 못하고 그냥 얼굴을 묻었다. 그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어차피 깨어날 백일몽인 것이 새삼 실감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산자락을 울리는 아주머니 목소리에 와장창 깨졌지만.
“아, 얼른 와, 얼른!”
“아구 힘들어. 아구 죽겄네.”
“아, 왜 이리 발이 느려어. 늙어빠져가지고!”
중년 아주머니가 부부로 추정되는 아저씨를 재촉하며 화내고 있었다. 오래 같이 살면 다 저렇게 되는 건가…. 그런 면에서 자신은 철과 얼마 안 남았으니 다행일지도.
“사, 사람 있어. 내려줘….”
다른 사람을 마주치자 민망해진 서진이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괘안애.”
“내려, 내릴래….”
“신경 안 쓴단께.”
어느 성인 남자가 다 큰 남자를 업고 다닌단 말인가. 내 말 좀 들으라는 듯 단단한 어깨를 퍽퍽 때려댔지만 철은 꿋꿋하게 그의 허벅지를 붙들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게다가 철은 뉴스에도 나오는 유명인이다. 사실 다쳤다고 생각하면 이상할 건 없었지만, 서진은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처럼 더 세게 몸부림쳤다.
“신경을 왜 안 써… 내려줘…!”
“어어, 가만있어.”
점점 흥분해 버둥거리던 서진은 급기야 철의 짧은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두 다리를 허공에 마구 흔들었다.
“내려… 내려!!”
“악!”
최후의 수단으로 서진이 철의 귀를 세게 깨물자, 그가 순간 서진을 업은 손을 놓쳤다.
철퍼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서진이 눈밭에 떨어졌다. 일자로 나자빠진 서진은 튀김옷이라도 입혀지는 것처럼 하얀 눈 위를 데구루루 굴러갔다.
“흐어억…!”
“서진아!!”
아연실색한 철이 그를 잽싸게 따라가 멈춰 세우고 온몸에 묻은 눈가루를 털어냈다. 바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피며 다친 곳은 없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킨 서진은 입에 들어간 눈을 퉤퉤 토해냈다. 그리고 튀어나온 감상은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우리 내일 썰매 탈래?”
눈밭을 구르면서 얻은 거라곤 유치한 아이디어뿐이다.
“…기여.”
황당한 웃음을 터뜨린 철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커다란 벽난로 앞에서 함께 담요를 덮고 몸을 녹였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겨울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에 풍긴다.
아무 말도 없는 가운데 타닥타닥 장작이 튀는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타오르는 장작을 보다가 조용히 눈을 마주치기도 했다. 이제 그 적막함이 불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히려 하늘에 뜬 흰 구름처럼 포근하기까지 하다.
조금 남아 있던 어색함도 몇 번의 미친 짓 끝에 눈 녹듯 녹아내렸다. 둘 사이를 가르는 6년의 공백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거센 파도에 깎인 바위처럼 변했다고 생각했던 남자는 얇은 천 자락을 걷어내니 놀라울 만큼 그대로였다.
단 한 번도 헤어진 적이 없는 것처럼. 사실은 그날 그가 부산에 만두를 사러 갔을 때 도망친 적도 없고, 같이 만두를 나눠 먹다가 그다음 날 다시 만난 것처럼. 첫사랑 스무 살 어린 청년 그대로….
‘이제 일주일 조금 넘게 남았으려나…….’
남은 시간을 떠올리면 솜사탕을 물에 씻어 먹는 너구리가 된 것 같다. 한순간에 물에 녹아 사라지는 솜사탕처럼 우리에게 남은 달달한 시간이 금세 사라져 허망한 감정만 남을 듯한 기분. 괜히 가슴만 뜨끈뜨끈해지고 축축해졌기에 그냥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저녁 묵을까?”
“응.”
철은 며칠 만에 휴전을 맞이한 기념으로 제대로 된 저녁 식사를 차려주었다. 바깥에 놓인 그릴에서 스테이크를 굽고, 프랑스 와인을 꺼냈다.
어디서 낙엽만 굴러가도 크게 웃던 두 사람은 축하할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코가 삐뚤어지게 와인을 식도에 부어댔다. 분명 차가운 액체인데 목구멍이 뜨거웠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서진은 아예 병째로 와인을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은 거실을 싸돌아다녔다.
거실 한구석에 놓인 턴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춘 서진은 그 밑에 놓인 레코드판을 뒤적거렸다. 제목을 보니 다 팝송인 것 같다. 대충 아무거나 골라서 〈Why do you love me〉라는 제목의 노래를 틀었다.
음악은 생각했던 음이 아니라 조금 당황했지만, 그냥 음정 박자를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몸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철은 재미난 유흥거리라는 듯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더니 서진을 안주 삼아 시간을 보냈다.
“너 현대무용 알아?”
한참 몸을 흔들다가 소파에 앉아 자신을 보고 있는 그를 발견한 서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춰봐.”
서진의 몸부림을 감상하던 그가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 내리고 대답했다.
“잘 봐.”
의기양양하게 대답한 서진은 기다란 팔다리를 허공에 허우적거리며 춤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몸짓을 선보였다. 결국 또 웃음 참기에 실패한 철이 아예 소파에 쓰러져서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지만.
그럴수록 서진은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한층 더 멍청한 짓을 해댔다. 그가 웃는 소리를 듣는 게 좋으니까.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밤이 까맣게 깊어갔다.
***
“주권에 액면 금액은 기재되지 않고 주 수만 기재된 주식.”
“무액면주.”
“무…액…면…주.”
노트북을 무릎 위 쿠션에 올려둔 서진이 그의 대답을 따라 차근차근 키보드를 두드렸다. 살짝 화면이 버벅거리며 전환되고 이어 딩동댕― 효과음이 울리면서 캐시로 처바른 화려한 캐릭터 머리 위에 동그라미 모양이 떠올랐다. 서진은 문제를 듣자마자 바로 답을 맞힌 철을 제법이라는 듯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챙겨온 노트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철과 떠나기로 결심한 뒤, 서진은 그래도 내가 팀장인데 혹시라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기는 거 아닌가 하는 그답지 않은 걱정을 했다. 그의 고민에 철은 새 노트북을 그에게 냉큼 내주었다.
무려 팬티엄III에 웬만한 데스크톱 뺨치는 하드 18기가를 자랑하는 최신 노트북은, 500만 원이 훌쩍 넘어 눈이 튀어나오게 비싼 가격이라 눈독만 들였던 제품이었다.
이걸로 별장에서 멋지게 업무를 처리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며 속으로 키득거렸던 그는 도착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높은 확률로 인터넷 접속이 불가능한 장소라는 것을 직감했다. 업무는 무슨. 실망감에 서진이 소파 위로 털썩 엎어졌다.
“어? 뭐야….”
잔뜩 실망한 얼굴로 소파 위를 뒹굴던 그는 테이블 뒤쪽 벽에 있는 전화선을 기적적으로 발견하게 되었다. 신이 난 서진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제발 전화만은 살려두고 여길 방치했었기를….’1)
긴장하며 전화선을 노트북에 연결한 그는 인터넷 연결 화면이 켜진 것을 보며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덕분에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은 늦은 밤, 서진은 의자에 앉아 퀴즈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다. 따라서 옆에 앉은 철에게 몇 문제라도 좀 맞혀보라고 묻기 시작했는데, 그는 의외로 천재 해커 소녀 김봉철 못지않게 모르는 게 없었다.
서진의 뒤통수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이 슬그머니 내려가더니 무언가를 재촉하듯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의뭉스러운 손길에 고개를 돌리자 어딘가 수줍어하는 소년 같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뽀뽀.”
철이 채근하자 바로 쪽, 두 입술이 재빠르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서진이 장난식으로 문제를 맞힐 때마다 뽀뽀해 주겠다고 유세를 떨긴 했지만 그가 이렇게 다 맞힐 줄은 몰랐다.
행여 아랫도리에 또 불이 붙을세라 잽싸게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린 서진은 계속해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모든 문제의 답을 척척 알아내는 철에게 감탄하다가, 나중엔 아주 쉬운 문제까지도 자아를 잃고 의탁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의 수도, 빨리…!”
“…서울.”
“서…울….”
다시 쪽, 입술이 가볍게 맞닿는다. 어두운 공간에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사랑스러운 서진의 얼굴을 어스름하게 장식했다. 철은 그의 옆모습을 홀린 듯 물끄러미 응시하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함에 빠져들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팔고(八苦) 중 하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은?”
“애별리고.”
“애별…….”
허공에서 멈칫한 손가락은 글자를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머지않아 오답을 알리는 안타까운 효과음이 나더니 서진의 화려한 캐릭터가 물속에 꼬르륵 잠겨버렸다.
“난 맞혔는디.”
“…….”
“뽀뽀.”
철은 아무렇지 않게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재촉하더니 세금을 징수하듯 착실하게 뽀뽀를 뜯어냈다. 게임 오버가 뜨는 노트북을 탁 닫은 서진이 소파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애별리고. 서진은 일분일초가 흐를 때마다 누구보다 이를 뼈저리게 실감하는 중이었다.
남몰래 그와 영원히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다가도, 손등 위로 뚝뚝 떨어지는 까만 마스카라 눈물을 떠올리며 애써 상상의 나래를 꾸깃꾸깃 접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럴 때마다 아직도 귓가에 선연한 여자의 목소리가 약속을 잊지 말라고, 그러니 정신 차리라고 외치는 것 같다. 과거에 무엇을 위해 도망쳤는지 잊었냐면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기분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침전됐다.
어느새 축 처진 서진을 제 쪽으로 끌어당긴 철이 자연스럽게 그를 품에 안았다. 둘이 눕기엔 좁은 소파에서 몸을 포갠 채 동그란 머리통에 쪽, 쪽, 입술을 맞댔다.
무슨 파블로프의 개도 아니고, 이 와중에도 바지를 뚫고 나올 듯이 착실하게 커지는 철의 아랫도리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딱 한 번만.”
“두 번만….”
훅 들어온 느자구 없는 딜에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철이 말하는 두 번이란 것은 전적으로 서진이 사정하는 숫자였다. 제 몸에 있는 정액이란 정액은 다 뽑아갈 생각인 건지.
“응…! 아…!”
얼마 지나지 않아, 참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과 젖은 샅이 찰박찰박 맞붙는 소리가 허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후윽….”
“읏, 하아… 제발, 천천히….”
서진이 두 팔을 벌려 잔뜩 상기된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러다간 얼마 못 버티고 금방 싸버릴 것 같다.
“아…! 흐읏…!”
그 말에 철이 천천히 허리를 움직여 양물을 빼냈다가 집어넣기를 반복했다. 느릿한 움직임에 살덩이의 불거진 핏줄까지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이건 이거대로 곤욕이었다.
“아흐윽… 그, 그냥 빨리…….”
“하아….”
이랬다가 저랬다가 오락가락하는 요구에도, 남자는 세상 야릇한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발정했다. 팔고의 고통인 애별리고는 묻어둔 채, 두 사람의 신음과 뜨거운 숨결로 빈틈없이 채워진 밤이었다.
***
우웅― 울리는 진동에 꾹 닫힌 서진의 눈꺼풀이 가느다랗게 떨린다. 겨우 슬쩍 눈을 떠 희끄무레한 시야로 보이는 진동의 진원지로 팔을 뻗어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핸드폰을 잡았다.
[김 변]
김 변이 뭐람…….
서진은 굼뜨게 뜬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제 핸드폰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놓았다. 마트라도 간 건지, 허전한 침대 옆자리를 확인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거울 속에서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친 비렁뱅이를 발견한 서진이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이런 걸 껴안고 밤새 사랑한다고 한 건가.
철이 돌아오기 전에 꽃단장이라도 하고 있자는 생각에 급하게 욕실로 향했다.
우웅―
샤워를 끝내고 나와도 여전히 진동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본 서진은 그의 부재라도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결국 대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 대표님. 부탁하신 유언장 공증 마쳤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목소리에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던 손이 허공에 멈추었다.
“…….”
- 더 필요하신 일은 없으십니까?
……유언장을 미리 작성하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유서를 미리 작성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으니까.
특히 남길 재산이 많은 재벌이라면 필수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으로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아… 수정할 게 있나 다시 확인해야겠는디…. 문자로 메일 주소 보낼 테니까 그쪽으로 파일 보내줄래요?”
목소리를 한 톤 정도 낮춘 다음, 철의 말투를 흉내 내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 네, 알겠습니다.
전화 목소리라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한 건지 깍듯하게 대답한 남자는 별다른 의심을 보이지 않았다. 들통나기 전에 냉큼 통화를 끊어버린 서진은 문자로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 전송 버튼을 눌렀다.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실제로 나쁜 짓이었지만.
뭐, 훔쳐본다고 유언이 닳는 것도 아니고….
애써 자기 잘못을 합리화하며 문자 메시지 내역을 삭제하고 있을 때였다.
“서진아.”
방문이 벌컥 열리는 것과 동시에 서진은 핸드폰을 침대 위에 냅다 던져버렸다.
“어? 어…….”
“썰매 태워줄께.”
도톰한 입술을 끌어올리며 미소 지은 남자가 바깥을 향해 턱짓한다. 아침부터 어딜 갔나 했더니 바깥에서 산타처럼 썰매를 만들고 있었나.
잠시 후, 드라이어로 젖은 머리카락을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옷을 두껍게 챙겨 입은 서진은 그를 따라 바깥으로 나왔다.
“우와.”
두꺼운 나무 합판을 구해 단단한 끈을 매단 썰매는 그 나름대로 클래식한 맛이 있었다. 서진은 바로 조금 전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들뜬 얼굴로 썰매 위에 쪼그리고 앉았다.
스물일곱 살이 아니라 일곱 살 같은 그의 순수한 모습에 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유치한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마음 한구석이 찔린 서진이 날을 세웠다.
“왜 웃냐?”
“안 웃었는디.”
순식간에 웃음기를 싹 지우고 심각한 표정을 지은 철이 시치미를 뚝 떼더니, 썰매 끈을 꽉 잡고 눈 내린 나무 사이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서진은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자빠지지 않기 위해 썰매를 꽉 붙들어 잡았다.
뺨에 닿는 찬 바람을 느끼며 아름다운 풍경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철은 전생이 루돌프나 시베리아허스키라도 되는 건지 지치지도 않고 썰매를 끌며 눈밭을 뛰어다녔다. 오히려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이 더 지칠 정도다.
“…근데 너 어디 간다고 했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남자의 뒷모습에 대고 질문을 던졌다. 푸에르토 어쩌고… 잠결에 들은 것 같긴 한데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남미.”
“…남미 어디?”
“니는 몰라도 돼.”
귀찮다는 듯한 그의 대답에 헛웃음을 터뜨리고 입을 열었다.
“참 나. 내가 찾아갈까 봐?”
“기여.”
김칫국을 세숫대야로 퍼 마시는 게 누군지, 찾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냥 인터넷으로 그 섬의 이미지만 찾아보고… 밤마다 머릿속으로 그곳에 있는 남자를 상상하고 싶었을 뿐이다.
“안 가. 잘 먹고 잘 살아라.”
“기여. 잘 먹고 잘 살란께.”
그 말에 뒤돌아본 철이 씩 웃더니 한층 더 빠르게 썰매를 끌기 시작했다. 서진은 스치는 찬 바람에 눈물을 조금 흘린 것 같기도 하다.
한참 산속을 헤집고 다닌 두 사람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산 아래로 고개를 숙일 때쯤 다시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커다란 벽난로에서 몸을 녹인 다음 저녁 식사로 서진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해 먹고, 밤에는 좁은 침대에 두 사람이 같이 몸을 눕혔다.
철은 익숙하게 품을 파고드는 서진을 단단한 팔로 옭아매 주었다. 다리를 얽고, 빈틈없이 몸을 밀착시킨 다음 따뜻한 온기를 나눴다.
앞으로 있을 애별리고를 애써 무시하듯 밤이 새도록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잠이 드는 것이 아까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도 결국 잠기운을 이기지 못한 서진은 얕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그토록 생각나지 않았던 섬의 이름이 귀신처럼 또렷이 생각났다.
푸에르노 아스타루에고.
꿈속의 자신은 현실과 달리 그를 만나기 위해 푸에르노 아스타루에고 섬을 찾았다. 야자수가 심어진 아름다운 해변을 돌아다니며, 커다란 남자를 찾아 반짝이는 모래사장을 정처 없이 걸었다.
투명한 바닷물은 발을 담그면 발톱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았다. 넘실거리는 파도에 맞춰 서핑을 즐기는 사람들, 납작한 선베드에 누워 태닝하는 사람들… 바빴던 일상과 달리 평화로운 곳이다. 좋은 곳에 사는구나.
햇빛에 조금 탔으려나. 머리는 얼마나 자랐을까. 뿌듯한 미소를 입에 머금은 서진은 부드러운 백사장을 맨발로 걸으며 철을 찾아다녔다. 이따금 바다에 발을 담그고, 칵테일을 마시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해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부자들이 거주한다는 호화로운 별장에 찾아가도, 섬을 한 바퀴 다 돌아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일출부터 일몰이 질 때까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애타게 찾으며 부르던 서진은 끝내 모래사장 위에 허망하게 주저앉아 엉엉 눈물을 흘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남자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린아이처럼 펑펑 눈물을 쏟던 서진이 결국 질문을 바꿔 지나가는 행인에게 물었다.
‘여기 푸에르노 아스타루에고 섬 아니에요?’
얼굴이 흐릿한 행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런 섬은 세상에 없어요.’
“허억.”
부족한 들숨을 강하게 들이쉬며 꿈에서 깨어났다. 누군가 울먹이는 소리가 귓가에 들린다 했더니 제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번에도 또 차갑게 식어 있는 옆자리를 확인한 서진은 눈물을 훔치며 바로 노트북으로 달려가 전원을 눌렀다. 푸에르토… 아스티…. 답답함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푸레르노 아스타라리나, 푸에르니 이스티루고 등등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색어가 하나둘 쌓이는 만큼 불안감이 쌓여갔다.
결국 끝까지 섬을 찾아내지 못하고 노트북을 종료하려던 그가 문득 어제 김 변의 메일을 생각해냈다. 다시 인터넷을 클릭하고 메일에 접속했다.
『유언장 파일입니다.』
메일함 가장 위에 도착한 메일 제목이었다. 그냥 단순한 제목일 뿐인데 심장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고 마른침을 삼킨 서진은 바로 메일을 클릭한 다음, 천천히 첨부된 파일을 읽어보았다.
『유언장』
유언자 범철이라고 쓰여 있는 이름 밑에 주소, 주민등록번호, 날짜와 날인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나는 다음과 같이 유언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 문서는 증인을 여러 명 세워 자신의 사망 사실을 언론에 함구시킬 것을 자세하게 명시해 놓았다.
어마어마한 양의 부동산과 재산도 모두 기록돼 있었다.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던 서진의 손가락이 어느 순간 뚝 멈추었다.
나의 사망일로부터 3년 후, 법정 상속분을 제외한 전 재산을 홍서진(서울시 강남구 논현동 289-4번지 501호, 주민등록번호 xxxxxx-xxxxxxx)에게 증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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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 집행자로 김현수(서울시 서초구 양재동 52-5번지, 주민등록번호 xxxxxx-xxxxxxx)를 지정한다. 유언 집행자는 이유 불문, 피유언자의 사망 원인을 사고사로 알린다.
⋮
이 유증은 나의 사망으로 인해 효력이 발생한다.
빛을 내뿜는 화면이 멍하니 넋이 빠진 남자의 얼굴을 환하게 비춘다. 쿠당탕, 요란한 소음을 내며 목제 의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이게 무슨…… 개떡 같은…….
『3년 후 사망 원인을 피유언자의 사고사로…』
빨갛게 충혈된 눈을 한 번 끔뻑이고.
『효력이 나의 사망으로 발생한다…』
두 번 끔뻑일 때마다, 화면 안에 정렬된 글자들이 뿌옇게 흩어지더니 뒤죽박죽으로 엉킨 채 머릿속을 유랑하기 시작했다. 눈앞의 사물들이 두 개가 되었다가, 세 개가 되었다가 다시 스르르 겹치길 반복한다.
아찔한 현기증으로 시야가 핑글핑글 돌았다. 중심을 잃은 그가 휘청이다 노트북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퍽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나더니 빛나던 화면이 까맣게 암전됐다.
“딱 한 달만 나랑 살자. 그라믄 영원히 얼굴 볼 일 없게 할께.”
“그래도 또 나타나면….”
“서진아. 절대 그럴 일 없어.”
“…….”
“맹세할께.”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낸 순간, 누군가 짱돌로 풀 스윙을 날린 것 같은 충격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손톱 끝부터 머리카락 끝까지 소름이 돋아나는 느낌이다. 냉수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결국 주저앉아 두 다리를 감싸 안았다.
허억, 허억, 연신 가쁜 숨을 토해내는데도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으, 흡….”
다 거짓말이었다. 허억, 숨을 한 번 토해낼 때마다 사랑해 마지않던 장면들이 시꺼먼 잿더미로 변해 흩날렸다.
눈 내리는 차 안에서 마주 보고 잠이 든 밤에도. 이 좁아터진 오두막에서 나란히 앉아 밥을 먹고, 미친 듯이 웃다가, 서로 몸을 빈틈없이 옭아맨 채 잠이 들 때도.
방부터 거실과 욕실까지 온 사방을 돌아다니며 그것을 박아 넣을 때도. 뜨거운 정액을 싸지르다가 사랑한다고 속삭일 때도 그 자식은 거짓말을 했다.
그러니까 이 메일을 보지 못했으면 아마 영원히…….
“으욱….”
턱 끝까지 차고 올라오는 구역감에 그 자리에 엎드려 헛구역질을 했다. 대신 끈적한 침만 질질 바닥에 떨어질 뿐 진짜로 구토가 나오지는 않았다. 옷소매로 대충 흐르는 침을 닦아낸 서진이 욕을 뇌까렸다.
“…씨이…발….”
지 혼자 뒈져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남겨진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고통 속에서 빌빌거리다가 꼴까닥할 게 뻔한데. 아무것도 모르고 헤헤 처웃고 춤이나 춰대는 제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병신같이 좋다고 앙앙 신음이나 흘리는 제가.
흐르는 피가 시뻘겋게 들끓다가도 또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차갑게 식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다가도 죽은 것처럼 멎었다. 살면서 가장 행복하다고 느꼈던 시간이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기만당한 시간으로 변질됐으니.
열이 오른 머리가 터질 것 같다. 열화와 같은 분노의 화마가 온몸을 휩쓸었다.
힘 빠진 다리를 비틀비틀 일으킨 서진이 찬찬히 눈알을 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 뒤집어엎고 싶은 손이 파르르 떨린다.
뭘 어떻게 깨부숴야…….
원래 물건을 던지고 깽판 치는 것도 해본 사람이나 잘하는 거라고, 한 번도 뭘 던져본 적 없는 그는 뭐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우선 식탁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촛대를 쥐고 거실 창문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와장창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나고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달리, 단단한 유리창에 부딪친 촛대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루루 굴러갔다.
더욱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씩씩거리던 서진은 자기가 던진 물건들을 줍고, 던지고, 줍고 던지고를 반복하다가 급기야 티슈를 한 장씩 뽑아 바닥에 엉망으로 뿌려대기 시작했다.
무아지경으로 티슈를 뽑아대느라 바깥에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소리도 듣지 못했다.
잠시 후.
끼익― 나무 문이 열리는 순간, 안으로 들어서는 커다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뭐여.”
흡사 비글 한 마리가 휩쓸고 지나간 것 같은 집 안 상태에 상황 파악이 안 된 남자의 눈이 서진을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느릿하게 훑었다.
“…헉, 허억….”
동작을 멈추고 가쁜 숨을 내뱉는 흉곽이 빠르게 팽창됐다가 가라앉았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철이 다가와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입고 있는 옷까지 휙휙 들춰봤다.
“죽을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은 서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남자의 심장이 까맣게 내려앉았다.
“나와, 병원 가자.”
“그냥 누워 있을래.”
서진은 부축하는 철을 귀찮다며 밀쳐내고 비틀비틀 걸어 방으로 향했다. 바로 침대에 고꾸라지다시피 몸을 던지고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썼다. 추운 것처럼 온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서진을 뒤따라 들어온 철이 그를 이불째로 끌어안으며 번쩍 들어 올렸다.
“놔.”
“니 병원 가야 돼.”
자기가 더 아픈 것처럼 낯빛이 창백하게 질린 철은 그를 껴안고 정신없이 바깥으로 향했다.
“씨발, 놔.”
“…….”
“놓으라고!”
서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미친 듯이 다리를 버둥거리고 저를 꼭 붙든 팔뚝을 비틀고 마구 할퀴었다. 남은 힘을 쥐어짜 그의 몸을 걷어차고 팔을 마구 휘둘러도, 남자는 바위처럼 꿈쩍도 않고 기어코 차 뒷좌석에 서진을 싣는 데 성공했다.
낮은 배기음이 울리고 시동이 걸리는 순간, 잠금장치를 풀고 뒷좌석에서 뛰어내린 서진이 비틀거리며 다시 오두막을 향해 달려 나갔다. 허겁지겁 달려 방으로 들어간 다음 문을 걸어 잠그고 다시 침대 위에 철퍼덕 엎어졌다.
지금은 마냥 누워 있고 싶을 뿐이었다. 머리가 텅 비어서 뭘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서진아 문 열어.”
바로 뒤따라온 철이 문을 똑똑 두드리며 낮은 목소리로 을렀다. 안에서 아무런 기척이 없자 급기야 쾅! 쾅!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기 시작한다.
“그라믄 비켜 있어. 문 부사 불란께.”
얼핏 들으면 침착해 보이는 목소리는 불안과 초조함으로 뒤섞여 엉망으로 흔들렸다. 침대에 새우처럼 몸을 쪼그리고 누운 서진은 애써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시트를 끌어당겨 몸을 최대한 감쌌다.
꽝―!
굉음을 내며 두 사람을 가르던 문이 손쉽게 떨어져 나가더니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이어서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손대지 마.”
“……싫어도 쪼까 참어, 병원만 가고.”
서진이 왜 이러는지 영문을 모르는 철은 그가 아프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침대 시트를 꼭 붙든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허벅지와 등에 손을 끼워 넣자 서진이 발작을 일으키다시피 펄쩍 뛰어오르며 마구 반항했다.
“씹…! 이거 놔! 놓으라고!”
침대 헤드를 생명 줄처럼 꼭 붙든 채 마음만 먹으면 제 몸을 장난감처럼 들어 올릴 수 있는 남자를 향해 쉼 없이 발길질을 해댔다.
“…제발, 제발 서진아… 응?”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기도하듯 고개를 숙인 채 손을 잡고 애원한다. 이러다 어딘가 잘못될까 봐 두려운 건지 맞잡은 손을 떨고 있다. 육안으로도 보일 만큼 벌벌 떨고 있는 그를 보며 물음을 던졌다.
“내가 뒈지기라도 할까 봐?”
그 말에 철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진은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가…. 나 그냥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둬.”
“뭐…?”
“내버려 두라고.”
일그러진 남자의 눈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이 비친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서진의 입가에서 작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제가 죽는다는 말만 뱉어도 그런 표정을 짓는 주제에, 이 새끼는 진짜로 저를 두고 죽으려고 했다. 어느새 두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긴 눈물이 스멀스멀 차올랐다.
“이… 나쁜, 거짓말… 새끼…….”
“…….”
“네가 안 가면 내가 갈게. 내가 먼저 죽어버릴 거야.”
두꺼운 쇠창살로 심장을 꿰뚫는 것과 같은 말을 내뱉은 서진은 그 자리에 굳은 철을 뒤로한 채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바깥으로 향했다.
지금은 그와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으니.
빠르게 내달리기 시작하자 급박하게 흔들리는 시야가 점점 뿌옇게 흐릿해진다.
가쁜 숨을 헐떡이던 서진은 운전석 문이 그대로 열려 있는 철의 차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서진아!”
뒤늦게 따라 나온 남자의 절박한 목소리가 산자락을 울리며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무시하고 차 문을 쾅 닫은 서진은 키가 꽂혀 있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주저 없이 액셀을 밟자, 바퀴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산길을 굴러가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에 그가 창문을 두드리면서 뭐라고 소리친 것 같긴 한데, 대충 지금 운전하면 안 된다는 식의 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홍서진!!”
절규인지 이름을 부르는 것인지 모를 외침을 무시한 채,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층 더 속력을 높였다. 거의 2주일 넘게 오두막에만 처박혀 있어 길은 몰랐으나, 비스듬한 산등성이 길을 따라 대충 내려오니 다행히 도로가 나타났다.
어느새 아스팔트 도로에 들어선 자동차는 딱히 목적지도 없이 굽은 커브 길을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자꾸만 흐르는 눈물에 시야가 가려져 한쪽 손을 와이퍼처럼 사용하며 끊임없이 닦아내야 했다.
물론 말은 죽어 버리겠다고 했지만 진짜로 죽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그와 같이 있는 걸 견딜 수 없어서 도망치고 싶었을 뿐이다. 울면서 운전한다고 사고를 낼 멍청이도 아니고.
차가 잘 다니지 않는 도로는 나무가 빽빽한 산을 끼고 꼬불꼬불 아래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오른편에 낙석 주의라고 적힌 낡은 푯말을 지나치면서, 위치를 알려주는 다른 표지판은 없는지 주위를 꼼꼼히 둘러보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뒤돌아보면 그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꿋꿋이 앞만 바라보며 계속 핸들을 꺾었다. 이제 반 정도 내려왔을까.
어디로 가야 하지…….
대충 머릿속으로 갈 만한 곳 몇 군데를 떠올려 보았다. 김영미는 지금 외국에 있고, 솔직히 다른 친구들은 지난 6년 내내 울고불고하는 동안 거의 다 떨어져 나갔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철을 만난 이후로는 인간관계가 다 파탄 난 지경이다.
할아버지는 매년 명절 선물만 챙겨드렸는데 이번에 찾아봬도 될까…….
차라리 종팔이한테 연락을 해볼까.
그리고 찰나에 벌어진 일은, 그가 흥분한 상태이기 때문이거나 다른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닌 오로지 운이 가른 일이었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서진은 앞에 굴러떨어지는 커다란 낙석을 피해 핸들을 급하게 꺾었다. 끼이이익, 타이어가 거세게 마찰하는 굉음이 산등성이에 울려 퍼졌다.
낙석을 피해 반대편 차선으로 넘어간 자동차는 튼튼한 차체로 충돌한 가드레일을 뚫고 그대로 낭떠러지 아래로 추락했다.
자신의 경차였으면 그냥 가드레일을 박고 멈추지 않았을까.
차가 너무 크고 튼튼해도 문제였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추락하는 차 안에서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정말이지, 지금 죽어버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는데.
아직도 제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연하게 울리는 것 같다.
그리고 느리게 스치는 주마등 따위도 없이, 모든 것이 새까만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