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8/26)

4.

“박 대리님. 발주량 확인했어요?”

“네? 아직…….”

“오늘까지 부탁할게요.”

“넵.”

다음 날. 턱 밑까지 올라오는 하얀 목폴라 티를 입고 회사에 출근한 서진은 어제 있었던 무단결근을 메꾸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하는 척, 발바닥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녔다.

괜히 나서서 남의 일까지 도맡는가 하면 쓸데없는 외근을 자처했다. 솔직한 심정으론, 지금은 그와 한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하다고 할까. 따지고 보면 한 공간은 아니지만 어쨌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으니.

종팔이 의자를 궁둥이에 붙이고 허공에 들어 올린 채 엉금엉금 걸어 서진의 옆으로 다가왔다.

“팀장님, 오늘 옷 이쁜데요.”

“응. 얼굴이 완성이니까.”

여전히 컴퓨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키보드를 두드리던 서진이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대답했다.

“어제는 왜 무단결근했습니까?”

은근히 눈치를 살피던 종팔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몸살 기운이 있어서. 그날 별일 없이 잘 들어갔지?”

화면에서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본 서진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뭐… 그거보다 우리 팀장님이 억수로 비싼 밥 멕여줬는데, 저도 밥 한번 사고 싶습니다.”

“됐어. 너한테 뭘 얻어먹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서진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습 기간이 막 끝난 신입 사원 월급이 얼마인지 뻔히 아는데…. 서진도 양심은 있었다.

“에헤이! 팀장니임, 괜히 그른다. 이번 주말에 시간 어떠세요?”

적은 임금에도 굴하지 않는 종팔은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서진의 팔을 잡고 흔들며 늘어졌다.

그 순간.

“최종씨팔.”

난데없이 튀어나온 낮은 목소리에 시끄럽던 사무실이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던 소리, 종이 서류를 정리하는 소리, 떠들던 소리까지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방금 뭔가… 문자의 배열이 잘못되지 않았나…….’

사원들은 각자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본인만 이상하게 들은 건지 확인하듯 눈빛을 교환했다.

“…방금 뭐라… 캤습니…….”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던 종팔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쪼까 봅시다.”

철이 사장실 방향을 가볍게 턱짓하더니 바닥을 짓이기듯 돌아서서 걸음을 틀었다. 저벅저벅 걷는 발걸음 뒤에 여기저기서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을 하던 사장은 지금 마치 옥상으로 따라오라고 불러내는 쌩양아치 같은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무감정해 보이는 표정 이면에 시꺼멓게 타오르는 분노가 설핏 비치는 듯했다.

순식간에 파리해진 직원들 눈치를 살피던 서진이 냉큼 컴퓨터 화면을 정리하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종팔 씨. 제가 갔다 올게요.”

서진은 안심시키듯이 종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다음 결연한 얼굴로 대신 사장실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삐뚤어진 녀석이 왜 갑자기 종팔을 불러냈는지 몰라도 자신의 부하 직원이 그를 봐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으니까.

분위기를 봤을 땐 꼭 때리기라도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지만,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결론을 내리고 사장실의 묵직한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아무런 응답이 없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안에 있던 남자를 마주하는 순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은 바로 그럴 수 있다로 바뀌었다.

“난 최종씨팔놈 불렀는디.”

한쪽 눈썹을 치켜뜨고 불만을 표출한 철은 재킷을 벗어 던지고,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자연스럽게 손목시계까지 풀던 중이었다.

누가 봐도 무언가를 대차게 후려치기 직전의 모양새다.

“……불러서 뭐 하려고요?”

울퉁불퉁한 핏줄이 도드라진 두꺼운 팔뚝을 바라보던 서진의 등골이 싸늘해졌다.

“왜. 내가 저 새끼 패대기라도 쳐브릴까 봐 쫓아왔어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픽 코웃음 친 남자가 별일이라는 것처럼 다시 손목시계를 채웠다. 패대기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마 패대기칠 작정이었나 보다.

“우리 최종팔 씨가 사장님 따로 볼일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욕하지도 말고요.”

어렵사리 두려움을 목구멍 뒤로 삼킨 서진이 나름대로 강단 있는 어조로 말문을 텄다. 사실 더 강력하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손에 한 대 맞으면 그대로 인생을 하직할 것 같았기에 어찌어찌 참아졌다.

예의가 가득 담긴 말 어디서 기분이 상한 건지, 옅은 웃음기를 누그러뜨린 철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서진의 코앞까지 다가와 서늘한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불시에 손을 뻗어 서진의 옷깃을 잡아당겨 목덜미를 드러내더니, 창백한 피부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그날의 잔흔을 확인이라도 하듯 눈으로 훑었다.

“함부로 손대지 말죠.”

당황한 서진이 갑자기 휑해진 목덜미를 다시 추스르면서 뻣뻣하게 말을 이었다.

“그날은 그냥 술 취해서 한 번 실수한 거고요. 원래 원 나이트 스탠드는 원 나이트로 끝인 거, 알죠?”

정확히 따지면 한 번은 아니었지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의 태연한 가면이 한 꺼풀 벗겨지더니 바로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술 처묵고 아무 새끼한테 대줬다는 겁니까.”

혈색 좋게 벌어진 남자의 입술에서 빠꾸 없는 막말이 튀어나왔다.

“뭐…?”

제 귓구멍을 의심케 하는 언행이었다. 정조 관념이 독실한 신부님급으로 보수적으로 살아왔던 서진의 뒷골이 빠듯하게 당겨졌다.

철은 당장 폭발할 것 같은 분노를 누그러뜨리듯, 어금니를 사리 물고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가서 최종팔이나 불러오세요.”

“야, 김철수.”

격앙된 목소리가 넓은 공간을 날카롭게 가로질렀다. 뻔히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명패를 구태여 무시한 발언이다.

“선 넘지 말지.”

눈가를 매섭게 좁힌 서진이 구석에 몰려 맹수를 위협하는 소동물처럼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서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원래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 하지 않던가.

“경고하는데 나 괴롭히고 싶은 거면 그냥 나한테 하고, 우리 직원은 건드리지 마세요. 진짜 가만 안 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정면으로 눈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서, 괜히 애먼 바닥을 노려보며 화난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세웠다. 사실 남자가 어떤 표정일지 확인하기 무서웠다.

바로 발길을 돌린 서진은, 자기가 생각해도 꽤 박력 있고 쿨한 대사를 끝으로 일부러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세게 닫으며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하나는 그에게 제 패기를 보여주기 위함이었고 하나는 팀원들 들으라는 듯, 저를 우러러보는 효과를 사뭇 기대하면서 한 행동이다.

“다들 신경 쓰지 마세요.”

전쟁터에 승기를 꽂은 표정으로 사무실로 돌아온 서진이 씩 웃으며 긴장한 종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비록 궁둥이를 의자에 붙이려고 하는 순간, 의자 바퀴가 뒤로 밀려나면서 주르륵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지만.

“팀장님…!”

“어어, 괜찮아.”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고 다시 의자에 앉은 서진 옆으로 다가온 종팔이 넌지시 아까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그럼 이번 주말 콜입니까?”

“…으음, 다음에 먹자.”

서진이 귀찮다는 듯 허공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당분간은 휴식이 필요할 만큼 머리가 어지러웠다. 컨디션도 좋지 않고.

“김 대리님. 오퍼 시트 작성했어요?”

일단은 뒤죽박죽인 뇌를 비우기 위해 괜히 더 목청을 높이며 일을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며칠 동안은 야근까지 해가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일만 했다. 다행히 그동안 갑자기 나타난 철이 최종팔 씨라던가, 최종씨팔이라고 부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아예 회사에 나오지도 않는 건지 매일 마주치던 얼굴도 며칠째 한 번도 보이질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나 싶다가도 차라리 이대로 멀어지는 게 낫겠지 싶어 그냥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팀장님 또…!”

“으응?”

박 대리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서진이 또 수분을 과다 섭취 중인 고추나무 곁에서 얼른 물뿌리개를 치웠다. 어쩐지 조금 시들시들해진 것도 같다.

‘시들면 안 되는데….’

고추나무를 걱정하던 그 날도 서진은 뇌를 빼놓기 위해 남의 일까지 도맡아 하며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선적 연락됐어요?”

“아니요. 그게, 아무리 해도 연락을 안 받아서.”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대신 전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렀다. 무역에서 선적 시기를 맞추지 못하면 신용장까지 변경해야 하니 비용부터 시간까지 고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요즘엔 선적을 늦게 해주는 수출상이 많아 안 그래도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심지어 이번엔 아예 연락이 두절됐나 보다. 이러다가 나중에 연락이 되면 선적이 늦어졌다면서 무작정 통보하는 일도 부지기수라 벌써 골치가 아팠다.

벌써 일주일째 일은 전에 없이 죽어라 하는데 갈수록 어째 전부 꼬이기만 했다. 어느 날은 필요한 서류 목록과 계약서에 들어가야 할 내용이 빠진 것을 발견한 그가 팀원들을 불러 모았다.

“왜, 왜, 일을 똑바로 확인 안 하고 그러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다 죽일 거야. 다.”

“그건 너무 갔는데요.”

스케줄을 엉망으로 짠 팀원들을 혼내던 서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회사원이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게 분명하다. 돈만 많으면 시골 내려가서 농사지으면서 사는 건데….

그날 퇴근길에 부푼 꿈을 끌어안은 채 복권을 여러 장 사 들고 집에 도착한 그는, 바로 옷을 아무 데나 벗어던지고 욕실에 들어갔다.

욕실 거울에 비치는 몸을 보니 어느새 거의 옅어진 흔적들이 눈에 들어온다. 희미한 자국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작거리다가 괜히 몸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그만두었다.

잠이 오지 않는 새벽 두 시.

서진은 결국 컴퓨터를 켜고 오랜만에 퀴즈 게임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캐시로 처바른 휘황찬란한 캐릭터가 번쩍번쩍 화려함을 뽐내며 그를 반겼지만, 어쩐지 혼자 하는 퀴즈 게임은 도통 흥이 나질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5번 문제를 넘기기도 전에 물속에 꼬르륵 잠기거나 불구덩이에 떨어지니 흥이 날래야 날 수가 없다고 할까.

결국 30분도 지나지 않아 게임을 종료한 서진이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더니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목말라 죽겠는데….’

하필 타이밍 좋게 떨어진 생수를 보고 근처 24시 편의점을 떠올린 그가 대충 잠옷 위에 패딩을 걸쳐 입고 바깥으로 향했다.

“아, 추워.”

옷깃을 파고드는 겨울바람에 호오 입김을 불며 건물 밖으로 나서는 순간, 집 앞 가로등 밑에 서서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고 있는 커다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이 새벽에 여긴 왜…….’

당황한 서진이 발걸음을 뚝 멈췄다. 분명 시선이 마주쳤는데도, 철은 별 반응 없이 큰 손으로 찬 바람을 막은 채 라이터를 깔짝거렸다.

그가 입에 물고 있던 필터를 쭉 빨아들이자 끝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 훅 내뿜은 탁한 연기가 공기 중으로 부옇게 흩어졌다. 언제부터 여기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던 건지 발밑을 보니 떨어진 담배꽁초가 못해도 반 갑은 넘게 쌓여 있었다.

흡연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당연히 비흡연자인 줄 알았는데, 인제 보니 골초였나 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편의점 가는 것도 잊어버린 서진이 뒤돌아서 다시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 낮은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서진아.”

한 번 더 짧게 필터를 빨아들인 철이 몇 번 피우지 않은 장초를 콘크리트 위에 떨어뜨리더니 불씨를 짓밟았다.

새까만 새벽이라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거리는 어디 사는지 모를 개 짖는 소리만 간간이 울렸다.

남자는 지체 없이 뚜벅뚜벅 걸어 서진의 앞까지 당도했다. 어쩐지 으스스한 분위기에 서진이 엉거주춤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

두려움과 의문이 적절하게 섞인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린 철이 두 팔을 뻗어 서진을 품에 끌어안았다. 안았다기보단 기댄 것에 가까운지, 약간 무게가 실린 것도 같았다.

휘둥그레 뜨인 서진의 눈동자가 상황을 파악하듯 스르륵 굴러간다. 그사이 한층 더 무게가 묵직하게 실리면서 조금 버거울 정도로 몸이 밀착됐다.

“다 없던 일로 하자.”

예상 밖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은 서진의 미간에 얕게 주름이 팼다.

“내가 옛날보다 더 잘할께. 니가 짖으라믄 짖고 기어 댕기라믄 기고.”

어울리지 않는 구차한 말이 줄줄 이어진다. 이윽고 서진을 감싸고 있던 커다란 몸이 살짝 떨어져 나갔다.

“…죽으라믄 뒤져 브릴께.”

마지막 말에 이게 농담인가 싶었는데, 이 남자가 하면 어쩐지 농담도 영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있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서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인 대답과 달리 살짝 맞닿아 있던 몸이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

“그럼 나 놔줘.”

“…….”

“가라.”

서진은 짧고 간단한 인사를 끝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남자를 남겨둔 채 뒤돌아 건물 안으로 향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간 쌓인 스트레스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왠지 속이 쓰려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 우욱. 몇 번 토해내고 나니 물 생각이 더 간절해져서 잇새로 욕을 짓씹었다.

그러다가도 바깥의 남자를 떠올리고는 내일 아침에 사러 가자고 마음을 고쳐먹고 침대에 지친 몸뚱이를 눕혔다.

그날은 하염없이 뒤척이다가 결국 푸르스름한 동이 터올 때쯤 겨우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다가올 일은 모르는 채로.

***

꿈을 꿨다.

묘하게 낮아진 시야에 손발을 내려다보니 아주 어린 아이처럼 쪼끄맸다. 무의식중에 실제 기억이 꿈으로 반영된 건지,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 정도 꽤 현실적인 구석도 있었다.

커다란 소나무 묘목이 심어진 정원이라든가,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 어릴 때 다닌 유치원까지 나온 걸 보면 아마 유치원생이었나 보다. 꿈속 자신은 콧물 방울을 터트려가며 울고불고 자빠질 때가 많았다.

실제로 김영미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은 또래 남자애들에게 괴롭힘당해서 자주 울었으니까. 저 녀석은 맨날 여자애들하고 소꿉장난만 하고 논다면서. 더러 주먹으로 때린 것도 아니고, 그냥 주둥이로만 놀려댔을 뿐인데 아무튼 그땐 세상 무너질 것처럼 울었다.

그중 서진을 가장 심하게 괴롭혔던 아이는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서 갑자기 나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골목대장이 된 케이스였다.

말투가 조금 어눌했던 것 같은데, 아무튼 그가 대장이다 보니 그것마저 유행이 되어 어설프게 그의 말투를 따라 하는 아이들도 많았다.

“내가 더 이쁘니까 엄마 할래.”

“너는 남자니까 아빠거든?”

“아빤 못생겨서 안 해. 그럼 너도 엄마 하면 되잖아.”

“어떻게 엄마끼리 결혼을 해!”

유치원 한구석에서 분홍빛 돗자리 위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깔아놓고, 얼굴이 흐릿한 여자아이와 소꿉놀이를 하다가 어린이용 앞치마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제 부모님을 떠올려봤을 때 절대적으로 엄마가 더 예뻤기 때문에 그것만은 사수하고 싶었다.

그 순간 여상히 모습을 드러낸 남자아이는 “지금 누구 허락받고 여기서 장사하는 거야” 하고 깽판 치는 삼류 깡패처럼 등장해 단출한 세간살이를 뒤집어엎더니, 급기야 발로 때려 부수는 퍼포먼스까지 보여주었다.

똑똑한 여자아이는 바로 선생님을 부르며 도망치고, 멍청한 서진은 입을 쩍 벌린 채 뜨악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헐레벌떡 달려온 유치원 선생님이 그 작은 몸을 들어 올릴 때까지도 남자아이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씩씩거렸다.

그 밖에도 남자아이는 서진이 여자애들과 마론인형 놀이를 하고 있으면 빼앗아 패대기치거나, 흙으로 쌓은 모래성을 허무하게 철거해 버리거나 하는 패악을 부렸다.

인류가 오랫동안 논쟁해온 논제인 성악설에 무게가 실리는 순간들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사탄이 아이를 낳으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어린 서진이 바닥에 배를 붙이고 누워서 종이에 엉망진창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도, 흰 종이 위에 또 사악한 그림자가 졌다.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등장한 남자아이는 어쩐지 어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나랑 같이 놀…자.”

놀랍게도 한쪽 손에 직접 패대기쳤던 마론인형을 들고, 몸에는 소꿉놀이용 앞치마를 두른 채였다.

머리 꼭대기까지 화가 난 서진은 인형을 빼앗아 던지고 앞치마를 잡아 뜯을 듯이 벗겨낸 다음 발로 밟는 척했다.

“바보! 멍청이! 돼지! 찔찔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혐오 단어를 내뱉으면서. 아무 말 없이 쳐다보던 남자아이는 그냥 떨어진 것들을 천천히 주워서 제자리에 갖다 놓았을 뿐이었다.

그 일이 생긴 뒤로 남자애들 사이에서 대장으로 추앙받던 녀석은, 서진의 패기에 놀란 건지 단둘이 있을 때면 긴장한 듯 우물쭈물 쪼그라들었다.

그러다가도 서진이 소꿉놀이하려고 할 때마다 티라노사우루스처럼 돌변해 난동을 피워댔지만.

아무튼 쪼끄만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놈이었다.

어느 햇살이 따사로운 점심. 집에서 직접 가져온 건지,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바비 인형을 손에 든 채 괜히 제 주변을 알짱거리는 녀석을 보고 변덕을 느낀 서진이 먼저 말을 건넸다.

“너 나랑 놀고 싶어?”

솔직히 말하면 녀석이 들고 있던 바비 인형에 혹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남자아이가 바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럼 이제부터 나한테 메텔이라고 불러.”

“메텔… 메텔아.”

녀석은 조금의 주저도 없이 낯 뜨거운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땐 한창 ‘은하 철도 구구구’에 빠져 있을 때라 어쩔 수 없었다.

“그래, 그럼 그것도 내놔봐.”

조그만 손에 들린 것을 턱짓하자 아이가 인형을 슥 내밀었다. 히죽 웃으며 바비 인형을 받아 든 서진은 콧노래를 부르며 긴 금발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땋기 시작했다. 머리를 풀었다가 묶었다가 한창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아직도 옆에서 얼쩡거리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가.”

“같이 놀자믄서.”

“지금 놀고 있잖아.”

너 때문에 흥이 깨졌다는 듯 인형을 다시 그 애 손에 억지로 쥐여주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당연하지만 자신을 가장 괴롭히던 아이와 놀고 싶었을 리 없다. 그 애가 유치원에서 제일 싫었으니까.

순수한 어린아이는 그 악의를 눈치채지 못한 건지 그다음에도 계속 새로운 인형을 들고 서진의 앞에 나타났다.

“메텔아… 놀자.”

대신 작전을 바꿨는지 양손에 인형을 하나씩 들고 나타나 딱 하나만 서진에게 내주었다.

잠시 후, 어린 서진은 손에 든 바비 인형을 좌우로 마구 흔들며 상황극에 몰입해 있었다.

“지각이야! 지각!”

“오메, 으째쓰까잉.”

언제부턴가, 남자아이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또 다른 바비 인형으로 항상 적절한 때에 끼어들어 특이한 말투로 리액션을 선보였다.

“너무 늦어서 전투기를 타고 회사에 가야겠어요.”

“그라믄 되겄네요.”

각자 손에 든 인형을 공중에 띄우고 피유웅― 하늘을 나는 듯한 효과음을 내며 웃긴 것도 없는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따란! 회사에 딱 맞게 도착했어요.”

“우와아. 겁나 빨라브러.”

또 하나 좋은 점은, 그 아이와 노는 동안엔 자신을 놀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다.

사내새끼가 계집애처럼 인형 놀이를 한다고 놀려대던 남자애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를 싹 바꾼 걸 보면 아무래도 주동자가 이 녀석이라는 가설에 힘이 실리긴 했지만. 일단 영미가 없는 동안은 그 애를 이용하기로 했다.

대신 마음의 앙금을 풀지 못한 어린 서진은 그 애를 아직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같이 놀아도 미운 건 미운 거였다.

“너 사냥꾼의 집 가봤어?”

사냥꾼의 집은 유치원 옆에 있던 오래된 빈집이었는데, 집주인이 동물 가죽 같은 것들을 여기저기 버리고 떠나서 흔히들 그냥 사냥꾼의 집이라고 불렀다.

버려진 집이 으레 그렇듯,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무성해 아이들 사이에선 귀신의 집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집엔 담벼락에 개구멍이 있어 호기심 많은 어린애들이 들어가서 공포체험을 하곤 했다.

“아니.”

“우리 거기서 이따 저녁에 보자.”

“으응.”

당연히 서진은 갈 생각이 없었고 순진한 녀석을 귀신과 마주치게 해서 골려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유치원이 발칵 뒤집혔다. 그날 저녁 아예 집에 들어오지 않은 녀석 때문에 그 애의 이모가 생난리를 피운 것이다. 사복을 입은 경찰이 알록달록한 유치원 바닥 위에 시꺼먼 발자국을 남기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그 애를 본 사람이 있냐고 묻는 말에 결국 서진은 덜덜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곧바로 다 함께 달려간 사냥꾼의 집에서, 바닥에 널브러진 동물 가죽을 뒤집어쓴 채로 자고 있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부스스 깨어난 아이가 희끄무레한 시선을 맞추고 맨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메텔아…….”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서진은 괜히 딴청 피우며 자신은 절대 메텔이 아닌 척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아이가 어른들에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는지 따로 혼이 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로 작은 몸집만큼 작은 양심에도 가책을 느낀 서진은 일부러 그 애를 멀리하려고 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눈치 없는 녀석은 계속 제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지만.

참다못해 폭발한 서진이 미약한 힘으로 아이를 밀쳐내고서 소리쳤다.

“야! 너는 눈치가 없냐?”

“뭣이?”

“나 너 싫다고. 저리 가라고.”

남자아이는 날 선 말이 말이 꽤 충격이었는지 눈물이 가득 맺힌 눈으로 서진을 바라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작은 치아로 입술을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붉은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당황한 서진은 그 애가 으앙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그 자리에서 전속력을 다해 도망쳤다. 커다란 눈동자에 가득 고인 눈물을 보는 순간 왠지 마음이 흐물흐물 약해질 것 같아서.

이쯤 하면 알아들었겠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다음 날 녀석은 기억을 잊은 금붕어처럼 아무렇지 않게 또 서진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품에는 돗자리와 소꿉놀이용 소품을 안고.

새초롬하게 한숨을 내쉰 서진은 할 수 없다는 듯 아이와 함께 돗자리를 깔았다.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엄마 역할, 녀석은 아기 역할이었다.

가짜 야채를 허공에서 쓱쓱 썰던 서진이 바깥에서 돗자리 안으로 들어오는 아이를 보고 물었다.

“아가야. 오늘은 뭐 하고 놀았니?”

“밭을 갈고 왔어요.”

“아기는 밭 같은 거 안 갈아!”

“소똥을 뿌리고 왔어요.”

대체 어디서 살다 온 건지 몰라도, 녀석은 이따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해대곤 했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같이 놀다 보면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까르르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작은 배 속을 울렸다.

생각해보면 그 애가 같은 곳에 머물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을 불러 모은 선생님이 잠시 이모 집에 맡겨졌던 아이가 이제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했다며,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라고 했으니까.

아이들은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일렬로 줄을 서서 녀석에게 한 명씩 인사를 건넸다. 서진은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녀석 앞에 서서 소리쳤다.

“간다고? 잘됐네. 빨리 가버려!”

어린 서진의 목구멍에서는 왠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있는 힘껏 던져 자그마한 녀석의 몸을 때려 맞혔다.

그러고는 그 애가 뭐라고 입술을 달싹이기도 전에 유치원을 뛰쳐나왔다. 잘됐다. 잘됐다.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결국 그 애가 떠나는 날엔 기어코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다가 한참 늦은 시간에 등원을 했다. 은근히 눈알을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얼굴에 심통이 가득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 녀석을 찾으며 맑은 눈망울이 점점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서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로 선생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걔는…… 요?”

“아까 마지막 인사하고 나갔지. 저기 밖에 저 차 보이지? 거기 있을 거야.”

선생님이 가리킨 곳에 커다란 승합차가 한 대 서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시동이 걸린 차는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바퀴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조그마한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바로 바깥으로 뛰쳐나간 어린 서진은 제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맨발로 커다란 승합차를 따라가며 그 애 이름을 목청이 터져라 불렀다.

“철이야! 철이야―!!”

메텔은 철이가 필요했다. 철이 없는 은하철도 구구구는 앙꼬 없는 찐빵이요, 껌이 들어 있지 않은 껌바였다. 한마디로, 상상할 수 없었다.

이름을 소리 내어 부르는 순간 질척하게 맺힌 눈물이 허공을 가로질러 흩날렸다. 길바닥에 널브러진 깨진 유리를 밟았는지 살갗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발바닥이 찢어지는 게 어쨌든 마음이 찢어지는 것보단 나았으니까. 이윽고 저 멀리 신호에 걸린 승합차가 잠시 멈추어 섰다. 기회다 싶은 서진이 짧은 다리를 빠르게 교차하며 더 열심히 달렸다.

“철이야…!! 가지 마…!!”

힘이 빠진 몸뚱이가 맥없이 비틀거렸다. 미처 애달픈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초록 불로 바뀐 신호를 따라 차가 희미한 매연을 내뿜으며 출발했다.

서진은 아무리 가지 말라고 외쳐도 하염없이 멀어지는 자동차를 보며 바닥에 주저앉아 허망한 울음을 터뜨렸다. 몇 분인지, 혹은 몇 시간인지 울먹임이 가득 섞인 말을 웅얼거리면서.

이제 안 괴롭힐게…… 다음엔 너도 엄마 시켜줄게…… 가지 마…….

“…….”

목이 꽉 조여오는 느낌에 눈이 스르륵 뜨였다. 급하게 산소를 들이켜는 흉곽이 빠르게 부풀었다가 내려앉았다. 멍한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뜨뜻한 물이 베개를 적신다.

꿈을 꾸면서도 계속 울고 있던 건지, 얼굴 전체가 축축하니 따로 모이스처라이저가 필요 없었다.

그런데… 무슨 꿈이었더라.

금붕어처럼 금세 꿈 내용을 까먹은 서진이 인제야 흐릿한 초점을 맞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느낌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는 순간,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뭔 꿈을 꿨길래.”

“……!”

서진은 혼자 있어야 할 공간에서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경기를 일으키며 튀어 올랐다.

동시에 있으면 안 될 곳에 들어온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며칠 밤을 새운 것처럼 지쳐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서 피곤함이 뚝뚝 떨어졌다.

그 옆에 보이는 심전도 기계, 값비싼 인테리어 소품들. 인제 보니 있으면 안 될 곳에 있는 건 그가 아니라 저였나 보다.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바통 터치라도 한 것처럼 등장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대뜸 청진기를 몸에 들이대더니 황당한 질문을 던졌다.

“홍서진 씨, 오늘이 며칠인지 아세요?”

“…네?”

“탈수랑 과로로 쓰러지셔서 사흘 만에 깨어나셨어요.”

귓속에서 자체 띠용 효과음이라도 울리는 것 같다. 간단한 진찰을 마친 의사가 당분간 집에서 쉬면서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가당한 말을 남긴 채 사라지고, 혼자 방에 남겨진 서진은 침대 헤드에 기대어 투명한 액이 똑똑 떨어지는 링거 주머니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 좀 못 마셨다고 기절까지 하다니. 그보다 어떻게 그 녀석이랑 같이 병원에 와 있는 걸까. 일단은 회사 사람들에게 연락을…….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핸드폰을 발견하고는 바로 팔을 뻗어 손에 들었다.

“쫌 괘안애?”

“으응?”

갑자기 나타난 남자 때문에 놀라서 그대로 손에 든 것을 바닥에 떨궈버렸다. 철은 터벅터벅 걸어오더니 허리를 숙여 핸드폰을 주운 다음 다시 서진의 손에 쥐여주었다.

“고, 고맙다.”

아직 상황 파악이 온전하게 되지 않은 탓에 눈을 데구루루 굴려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바로 전원 버튼을 누르고 우르르 쌓인 문자 메시지들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팀장님 소식 들었습니다. ㅠㅠ 얼른 쾌차하시고 건강하게 봬요.]

[어쩐지 요즘 무리하시더라니 푹 쉬고 꼭 다 나으면 오세요!ㅠ_ㅜ]

이미 회사에 연락이 갔던 모양인지 형식적으로 보낸 안부 메시지가 잔뜩 도착해 있었다. 심지어 개중 몇 개의 텍스트에는 분명 감추지 못한 기쁨이 묻어 있다. 배은망덕하다는 생각에 미간이 구겨지려는 찰나였다.

“의사가 퇴원해도 된다는디. 집에 갈까?”

“어? …어어.”

아무렇지 않게 묻는 어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사복으로 갈아입고 병실 밖으로 나온 서진은 철의 살뜰한 부축을 받아 차에 올랐다. 바로 시동이 걸린 차가 매끄럽게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간다.

‘직접 집까지 데려다주는 건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에 빠졌지만, 누적된 피로 때문인지 지친 몸뚱이가 점점 노곤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또 매달려도 어떻게든 떼어내면 되겠지. 그런 희미한 생각 속에서 물에 젖은 솜뭉치 같은 눈꺼풀이 꾹 닫혔다.

먼저 깨어난 건 청각이었다. 촉촉한 것이 짧게 마찰하는 소리가 고막을 간지럽힌다. 쪽 한번, 쪽쪽 짧게 두 번, 그다음은 촉각. 손등과 손끝에 보드라운 것이 가벼이 닿았다가 떨어져 나간다.

기분 좋은 감촉에 닫힌 눈꺼풀을 여는 순간, 침대 아래에 앉아 손등에 입을 맞추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씹! 깜짝이야!”

서진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손을 빼내며 침대 위에서 몇 cm가량 펄쩍 뛰어올랐다. 다소 정신 나간 반응에도 꿈쩍 않는 철은 커다란 몸을 일으키더니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았다.

분명 마지막에 봤을 때 확실하게 의사를 전달했던 것 같은데, 그의 행동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설마 그것도 다 꿈이었나 하는 의문이 슬그머니 피어올랐다.

“……너 그날 …내가 얘기 안 했어?”

“뭣을.”

철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꿈이었다는 가설에 한층 무게가 기울어졌다.

“…나 놔달라고.”

왠지 모르게 자꾸 바싹바싹 마르는 목구멍을 침으로 적시며 입을 열었다.

짧은 침묵 끝에 그게 뭐 어려운 일이냐는 것처럼 피식 실바람 빠지는 웃음과 함께 명쾌한 답변이 흘러나왔다.

“놔줄께.”

“……지금 이게 놓는 거야?”

자신 있는 대답과 상반된 모호한 행동에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눈썹이 찌푸려졌다.

“딱 한 달만 나랑 살자.”

불그스름한 입술 양쪽 끄트머리를 씩 끌어올린 철이 나긋한 목소리로 제안을 건넸다.

“내가 왜 그래야 되는데?”

이게 과연 등가교환이 되는 일인가 싶은 서진이 작은 대가리를 핑글핑글 굴렸다. 망설이는 그를 보던 남자가 고민하는 고객을 설득하는 세일즈맨처럼 말을 덧붙였다.

“그라믄 영원히 얼굴 볼 일 없게 할께.”

“…….”

“다시는 니 앞에 안 나타난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단한 딜이라도 내놓은 듯한 말투에 하마터면 혹할 뻔했다. 뒷골이 당긴 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하냐? 회사에서 맨날 보잖아.”

“회사 지분도 다 정리할께.”

“……말이 되는 소릴. 그러다 내 와, 와이프가 알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담서.”

철은 마치 와이프 얘기는 더 듣기 싫다는 것처럼 뒷말을 숭덩 잘라버렸다. 제 마누라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던 서진이 슬쩍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마누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있구나. 이참에 외워둬야겠다. 보스니아 헤르고비나, 보스니아 헤체비엔나…….

크흠흠, 괜히 목청을 가다듬는 남자는 누가 봐도 이미 세일즈맨에게 반쯤 넘어간 호구 고객 같은 모습이었다.

“…니가 약속 안 지키면?”

“경찰에 신고해. 접근금지 뭐시기.”

“그래도 또 나타나면…….”

“서진아.”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치 일 더하기 일은 이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확고한 눈빛이 마주쳤다.

“절대 그럴 일 없어.”

“…….”

“맹세할께.”

남자가 한쪽 손을 허공에 치켜들고 진짜 맹세라도 하듯 두 눈을 감았다.

“……그럼 …딱 한 달이다.”

우물쭈물하던 서진이 입술을 달싹이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 굳이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믿어줄 작정이었다.

딱 한 달… 정도만 같이 살고 끝내면 아무도 모르겠지…….

“응….”

그런 그를 보며 매우 사랑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접은 철이 몸을 숙이더니 가볍게 입술을 맞춘다. 부드럽게 맞닿은 입술이 봄날처럼 따스하다.

그 순간 어째서인지, 기절해 있는 사흘 동안 꾸었던 꿈의 잔상이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충 일요일 아침마다 봤던 만화 은하 철도 구구구에 관한 꿈이었던 것 같다.

왜 만화 꿈을 꾸면서 눈물을 펑펑 쏟았나 생각해보니 만화의 결말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메텔이 철이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건네고 자신은 777호에, 철이 역시 메텔과 이별을 받아들이며 999호 기차에 오르면서 두 사람이 영원한 작별을 맞이하는 결말이었다.

***

미국에서 만난 서진의 아버지를 통해 그가 결혼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그대로 리볼버를 밀반입해서 쏴버리고 싶었다.

부드러운 세 치 혀로 자신을 속이고, 제 영혼을 새까맣게 태워서 지옥에 내던져놓고 개미 먹이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그 사람을.

자신이 받은 상처의 만분의 일이라도 그를 상처 입히고 더럽히고 싶어서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그를 향해 쏟아낸 막말들이 뭐든지 튕겨 내는 벽에 대고 쏜 총알처럼 되돌아와 제 심장을 꿰뚫을 뿐이었다.

제가 뱉은 한마디, 한마디에 피를 철철철 흘리다가 아무래도 그 사람보다 먼저 과다출혈로 뒈질 것 같았다.

그렇게 영원히 소강되지 않을 것처럼 들끓던 분노도 그의 눈을 마주하는 순간 하루에 수백 번씩 불이 지펴졌다 꺼졌다 오락가락하기 시작했다.

죽이고 싶다가도 당장 끌어안고 미친 듯이 사랑을 퍼붓고 싶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두고 세상 가장 귀애하고 아껴주고 싶고. 축축한 늪지대보다 더럽고 질척질척한 감정이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분노로 가득 찬 복수의 화신은 온데간데없고 옛날보다 더 그에게 환장해 마지않는 웬 미친놈만 홀연히 남아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향하던 분노 역시 단단한 벽에 부딪혔다. 새까맣게 타오르던 감정의 종착점도 뒤틀려 결국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어 돌아왔다.

병신 새끼. 쓰레기 새끼. 결국 그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도망칠 정도로 싫어하게 만든 제 잘못인데.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사람에게 거짓말이나 시키고.

점점 그에게 걸레짝처럼 내팽개쳐질 정도로 사랑받지 못한 자신이 끔찍하게 싫어졌다. 싫다고 밀어내는 그에게 자꾸 매달려서 괴롭게 하는 개새끼를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수십 번 끓어올랐다.

자신이 살아 있는 한 그를 놓지 못하고 영원히 집착할 테니까.

그 사람은 죄가 없다.

아무리 상처 입히고 더럽히려고 해도 그는 자신의 안에서 티끌만큼도 오염되지 않고 밝게 빛나기만 했다. 손에 쥔 그 사람은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다는 걸 증명하듯 아무리 힘을 줘 구겨도 구겨지지 않았다.

사실 그를 알게 된 후 매일 밤 그의 집 앞을 찾아갔었다. 딱히 목적이나 바라는 건 없었고, 그냥 불이 켜졌다가 꺼지는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게 좋았다. 추운 겨울바람도 잊고 그가 가까이 있는 걸 느낄 수 있는 게 좋았다.

어쩌면 그날 새벽의 우연한 만남은 예정된 것인지도 모른다.

“…죽으라믄 뒤져 브릴께.”

결국 마주친 그를 붙잡고 굶어 죽어가는 거지처럼 구걸했었다.

“그래.”

믿을 수 없는 대답과 달리 살짝 닿아 있던 몸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자, 차가운 공기가 살갗을 스친다.

“그럼 나 놔줘.”

“…….”

“가라.”

정말로, 그 사람이 바라는 건 다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집에서 나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 급하게 열쇠공을 불렀다. 바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쓰러진 그를 보고 심장이 멎을 뻔했다.

입원해 있는 사흘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서진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 사람을 놓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니까.

그러니 마지막은 조금만 욕심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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