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7/26)

3.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이 꽉 닫힌 눈꺼풀 위에 부서진다. 밤새 쎄이월드에 고별 글을 올리느라 늦게 잠자리에 든 남자의 눈살이 눈부신 주홍빛에 구깃구깃하게 구겨졌다.

“허억.”

익숙지 않은 채광에 놀라 순간 몸뚱이가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다급한 손길로 몇 번 헛손질하다가 탁상 위에 놓인 시계를 잡는 데 성공한 서진은 흐리멍덩한 초점을 시곗바늘에 맞췄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 수축한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 들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물을 끼얹고 나온 다음, 제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은 원망스러운 녀석을 쏘아보았다.

밤새 핸드폰 배터리가 나가서 알람이 울리지 않은 것이다. 서진은 충전된 배터리로 갈아 끼운 다음 환하게 빛을 내뿜는 화면을 보자마자 얼굴을 감싸 쥐었다.

조아상사 박 대리. 부재중 전화 4건.

혹시 죽을 사에 맞춰서 딱 네 번만 남긴 걸까. 당장 오늘이 회사 사무실을 JS 본사로 이전하기로 한 날인데 팀장이 지각했으니….

푹, 한숨을 내쉬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화 기록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역시나 철에게서 온 연락은 없다. 이제 어디서 뭘 하는지 더 알고 싶지도 않고.

어금니를 꽉 깨문 서진이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JS 유통 철수

이 연락처를 삭제할까요?

YES l NO

눈썹 끝에 야트막하게 힘을 준 채로 YES 쪽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귤 박스가 할 일을 완벽하게 끝낸 상황에서 더 이상 철과 엮일 이유는 개미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더불어 그날 있었던 일로 그의 증오심과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뼈저리게 느끼기도 했고.

횅하게 뚫린 가슴에 한겨울보다 시린 바람이 숭숭 파고든다. 아직 그의 어머님께 빌린 돈도 다 갚지 못해서 매달 십일조 헌금처럼 꼬박꼬박 월급에서 빼서 보내는 중인 걸 생각하면 더욱 가슴 시렸다.

여태껏 자신도 모르게 질질 끌어왔던 미련도 불에 타서 흩날린 편지처럼 잿더미로 변한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도 그래야 했다.

위잉―

[팀장님 왜 출근 안 하세요. 이사 벌써 다 끝났어요 -_-;;]

박 대리의 문자를 보고 미간을 좁힌 서진이 급하게 집 밖으로 나섰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일 처리가 빠른 사람이었나…. 당장 연락받은 게 어제 일인데, 벌써 일사천리로 이사까지 끝내 버리다니.

빠른 속도로 도로를 달려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한 하얀 경차가 넓은 주차장에 멈춰 섰다.

들어가기 전에 혹시 철을 마주칠까 머뭇거리기도 했지만, 사옥이 워낙 크다 보니 그런 일은 드물 테고. 만에 하나 마주치더라도 자신이 쥐 죽은 듯 피해 다녀야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으며 출입문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바닥이나 건물 자재부터 돈을 처덕처덕 처바른 티가 난다는 생각에 두리번거리던 서진의 시야에 어제 그 안내 데스크 직원이 들어왔다.

그와 눈이 마주친 직원은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차분하게 입술을 뗐다.

“……시큐리티?”

분명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온몸에 힘이 들어간 서진은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점점 더 빠르게 옮겼다.

“로비, 잡상인 출현.”

마치 들으라는 듯이 덧붙이는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속에 박혔지만, 일단은 듣지 못한 척 재빠른 쥐새끼처럼 건물 안쪽으로 두 다리를 움직였다.

거의 달리는 속도에 가까운 경보로 걸어가 막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찰나,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덩치 두 명이 이번에도 양옆에서 살갑게 팔짱을 껴왔다.

“선생님.”

별안간 덩치 큰 제자가 두 명이나 생긴 서진이 양옆을 번갈아 쳐다보며 황당함을 드러냈다.

“…저 선생님 아닌데요…?”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저도 여기 직원…!”

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이라는 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련한 몸뚱이를 공중에 붕 띄운 두 사람은 그대로 출입문을 향해 서진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뭔가 실수한 게 있는지 어제 상황을 찬찬히 되새겨봐도 도무지 마음에 걸릴 만한 것이 없었다.

이 용역 깡패나 다름없는 시큐리티를 나중에 인사팀에 고발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시방 뭣 하는 겁니까.”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억양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물론, 허공에 붕 뜬 서진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아니고 두 덩치의 발목을 잡아 세웠다.

두 사람이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자, 서진의 몸뚱이 역시 햄버거에 딸린 어린이 세트 메뉴처럼 함께 홱 돌아갔다.

“아…안녕하십니까!! 로비에 웬 잡상인이,”

“으따 손을….”

뒷말을 끝맺음 짓지 못할 정도로 넘치는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무언가 꾹 인내하듯이 힘을 준 턱 근육이 불룩하게 도드라진다. 그게 무엇이든 절절 들끓는 마그마처럼 당장 새까맣게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았다.

“…홍서진 씨. 30층으로 가세요.”

날숨을 길게 내뱉으며 호흡을 정리한 그가 엘리베이터가 있는 방향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동시에 두 사람에게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된 서진은 잠시 어물쩍거리다가 굼뜬 다리를 움직였다. 철이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은 눈빛이라 순간 망설여졌다.

서진은 슬금슬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30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마자 낭패한 얼굴을 두 손으로 폭 감싸 쥐었다. 어떻게든 그를 피해 다니기로 마음먹어놓고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허공에 붕 뜬 채로 얼굴을 마주하다니.

잠시 후 경쾌한 띵― 소리가 울리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조아상사’라는 팻말과 함께 고작 열댓 명을 수용하기엔 심하게 널찍한 공간이 눈앞에 튀어나왔다.

“홍 팀장님!”

“팀장님! 왜 이제 오세요?”

어리둥절한 사원들은 저마다 지나치게 넓은 공간에서 어쩔 줄 모르고 광장 공포증을 겪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사무실에 첫발을 내디딘 서진 역시 피부에 와 닿는 횅한 공기에 흔들리는 동공이 갈 곳을 잃고 요동쳤다.

이게 무슨…….

아예 한 층을 싹 다 밀어 버렸는지, 골대만 가져다 놓으면 곧바로 풋살을 해도 될 것 같았다. 일단 당황한 사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얼른 표정 관리에 들어간 서진은 ‘응, 원래 이런 거야’라는 듯한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책상을 찾아 자리에 앉았다.

다른 팀원들과 상당히… 멀다.

어차피 장소만 옮겼을 뿐 업무는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었기에 곧바로 분위기를 잡고 업무를 시작했다. 가끔 팀원들에게 나이트클럽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말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나름 괜찮은 느낌이었다. 뷰도 좋고.

“종팔 씨, 포워더랑 연락했어요?”

“예―?”

저 멀리서 어리둥절한 얼굴의 종팔이 대답하자마자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옙. 조아상사입니다.”

“포워더 연락했냐고.”

“옙. 연락했습니다.”

전화기에선 여러 번 큰 소리로 말하기 귀찮았던 서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희미하게 웃음을 터뜨린 종팔이 전화기를 내려놓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세상 다 가진 것 같은 불공평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사무실과 긴장한 사원들의 시선이 저벅저벅 걸어가는 남자에게 오롯이 집중된다.

“홍서진 씨. 사장실로 오세요.”

허허벌판 같은 사무실에 남자의 목소리가 홀연히 울렸다.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몇 번 끔뻑거리던 서진은 주춤주춤 의자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철이 왜 사장이 찾는다는 말을 전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뒤로한 채 커다란 등에 시선을 맞추고 멀찍이서 따라 걸었다. 알고 보니 사장실이 같은 층 끝에 있어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바로 안까지 들어설 수 있었다.

무거운 문이 닫히고, 여전히 의문스러운 낯으로 눈알을 굴리던 서진의 시야에 넓은 책상 위에 놓인 ‘사장 범 철’이라는 명패가 들어왔다.

일순, 산소 공급이 멈춘 것처럼 뇌가 정지된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충격에 온몸의 솜털까지 쭈뼛 서는 것 같다. 이건 성공을 해도 너무한 거 아닌가.

‘소처럼 밭만 갈던 녀석이 어떻게…….’

“안 앉아요?”

익숙한 자리에 앉은 철이 유려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

“그람 서 있든가.”

그냥 서 있으라고 했을 뿐인데, 마치 ‘니 다리가 부러지든 잘리든 상관 안 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귀신이라도 마주친 듯, 멍한 낯빛으로 서 있는 서진의 귀에 그가 회사에 관한 간단한 설명을 억지로 꽂아 넣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듣든 말든 너의 소관이란 듯이.

“…나한테 사장이라고 왜 말 안 했어요?”

남자가 얘기를 마무리할 때쯤, 지금까지 다른 시공간에 있다가 간신히 돌아온 것 같은 서진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씨부릴 필요 있습니까?”

철이 비웃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싸늘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다 옛날 일인데 이쯤에서 그만하죠.”

“뭣을.”

“대기업에서 대체 왜 이러나 했더니…. 저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축구장으로 사무실 옮겨 놓고, 사람 불편하게 만들고.”

“…두 번 괴롭혔다간 회사 거덜나겄네.”

웃는 건지 정색하는 건지 알 수 없던 남자의 입가에 이번엔 냉랭한 비웃음이 선연하게 번졌다.

“그럼 왜 이러는 건데요?”

“왜. 내가 로비해서 갚으라고 할까 봐.”

어느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철이 느지막한 걸음으로 다가와 서진의 앞에 섰다.

이제 보니 안락하게만 느껴졌던 큼지막한 품이 거대한 해일처럼 위압적으로 느껴진다.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이 꿀꺽 소리를 내며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에게 놀아났다는 충격에 브레이크가 뽑힌 진보적인 주둥아리는 제멋대로 움직여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괴롭히고 싶은 거면 전 누구랑 뭘 하든 아무 상관 없으니까 아예 로비스트로 쓰세요.”

“홍서진 씨.”

철이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서진의 얼굴을 살짝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당장 입술을 맞출 것처럼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채 마주한 얼굴은, 누가 음소거 버튼만 누른다면 달큼한 밀어라도 속삭일 것 같았다.

“내 자지 한 번 빨아본께 아직도 옛날이랑 똑같은 줄 압니까.”

눈빛과 이질적인 대사 간의 좁힐 수 없는 간극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를 만큼 내가 좆병신으로 보이냐고요잉.”

예리하게 갈아놓은 칼날 같은 말이 이미 뻥 뚫린 심장을 한 번 더 후비고 뒤집어 놓는다.

입을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철이 서진의 삐뚤어진 넥타이를 잡아당겨 반듯하게 정리한 다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제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가서 일이나 처하세요.”

의자에 앉은 그가 서진의 등 뒤에 놓인 문을 눈짓하더니 더 상대하기 싫다는 듯 종이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제 손에 물 한 방울이라도 묻으면 큰일 날 것처럼 기함하던 남자의 입에서 일이나 처하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멍한 얼굴로 잠시 굳어 있던 서진 역시 주저 없이 뒤돌아 사장실을 빠져나갔다. 왠지 어긋나게 맞물린 톱니바퀴가 돌아가며 만들어낸 막다른 길에 부딪힌 기분이다.

그가 변한 것도 당연한 이치건만.

태산 같은 바위도 매번 부딪쳐오는 파도에 깎이고 깎여 형태가 변하는 법이니까. 하물며 잔잔한 파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래성에 비유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결국 서로가 만나지 못하고 속절없이 흐른 매분 매초가 그에게는 심장을 후려쳐 깎아내는 거센 파도였나 보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을 혼자 그리워해 봤자 무력감만 짙어질 뿐이다. 인제 쓸데없는 생각 말고, 그의 말대로 일이나 열심히 처해야 했다.

***

JS유통 본사로 이사 온 지 며칠이 지나고부터는 지나치게 널찍한 사무실도 어느 정도 적응되기 시작했다.

지내 보니 사원들끼리 책상 간격이 넓은 것이 아예 장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이를테면.

베토벤: 이 쓰래기새퀴 드디어 자살하러 가냐~ ㅋㅋ 아직도 안 뒤져쓰면 내가 일빠로 너랑 니 애미랑 죽이러 갈꺼 ㅇㅋ?

아직 업무가 한창인 근무 시간, 자신의 미니홈페이지 마지막 글에 달린 댓글을 확인하던 서진이 오랜만에 찾아온 악플러를 발견하고 픽 코웃음 쳤다.

뭐, 미니홈페이지 금지라고 해도 게시글만 안 올리면 들어가서 보는 건 자유였으니까.

베토벤의 댓글 밑에 달린 글을 차분히 읽어보던 그가 순간 멈칫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익숙한 이름 김봉철. 소녀가 또 악플러에게 댓글을 단 것이다.

‘니 어디 사냐고 이 씨벌롬아’라는 문장으로 먼저 베토벤의 신상을 캐낸 소녀는, 눈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은 쌍욕과 함께 베토벤의 신체를 토막 내 온갖 젓갈로 담가버렸다.

여전히 자신의 쪽지엔 답장도 안 하면서 악플러에겐 꼬박꼬박 답장하는 소녀를 보면서 왠지 모를 배신감을 느낀 서진이 닫기 버튼을 눌렀다.

우습게도, 극악무도한 악플을 보고도 멀쩡했던 마음이 오히려 김봉철을 보고 상처받았다고 할까.

“팀장님. 오늘 밥 사줄랍니까?”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서진의 책상 옆으로 다가온 종팔이 은밀한 접선을 시도했다.

“어? 어어….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양식 묵고 싶습니다, 양식. 스떼이크.”

이 새끼가….

주머니 속 얄팍한 지갑 사정을 떠올린 서진의 관자놀이 핏대가 순간 꿈틀거렸지만, 고기 불판 위에서 진짜 스떼이크가 돼버린 종팔의 지갑이 아른거리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라앉았다.

“그래. 스떼이크 쓸자.”

서진이 마더 테레사만큼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난다는 듯이 감탄사를 내뱉은 종팔이 주먹을 꽉 쥐고 팔을 휘두르는 제스처를 취한 순간이었다.

“최종팔 씨.”

언제 사장실에서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등장한 남자가 남의 신입 사원 이름을 막 불러댔다.

JS유통 본사로 이사 온 후에 어쩔 수 없이 철과 매일 마주치고 있긴 했지만, 서진도 수많은 직원 중 한 명이라는 듯 개인적으로 말을 걸거나 따로 찾는 일은 첫날 이후로 한 번도 없었다.

그 대신.

“거 바닥 얼마짜린지 압니까.”

어찌나 최종팔 씨, 최종팔 씨, 불러대는지 요 며칠 새 그 덕분에 종팔이 성이 최 씨였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는 중이다.

최종팔 씨, 거 창문 얼마짜린지 압니까. 최종팔 씨, 니 목소리가 겁나게 시끄러븐 것 압니까. 최종팔 씨 최종팔 씨……….

“예?”

“의자 끌지 말라고요잉.”

“예에….”

바닥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종팔이 결국 의자를 궁둥이에 붙여 들어 올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 제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불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닥을 노려보던 철이 다시 사장실 쪽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고작 저 말을 하기 위해 뛰쳐나왔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지금 의자를 끄는지 어떻게 알고…….’

대기업 사장의 쪼잔함에 소름이 쭈뼛 돋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30층 입주민들에게 JS유통 사장 이미지도 날이 갈수록 최악으로 치닫는 중이었고.

어느덧 시간이 흘러 드디어 칼퇴근할 시간,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온 서진이 종팔과 함께 자신의 경차에 올랐다. 추운 공기를 데우기 위해 바로 시동을 걸고 히터를 켰다.

“와, 팀장님이랑 단둘이 데이트하는 거는 첨 아닙니까.”

조수석에서 안전벨트를 매던 종팔이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게. 폭스강 괜찮지?”

대충 핸들을 꺾어 주차장을 빠져나가던 서진이 넌지시 물었다.

“폭스강이 뭐죠?”

“스떼이크 집. 촌놈아.”

“팀장님이랑 가는 건데 머, 암떼나 다 좋습니다.”

회식으로 갈 만한 장소는 아니었지만 지갑도 태워 먹었겠다, 이왕이면 괜찮은 곳으로 데려가자는 마음에 속으로 지도를 그려보면서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퇴근길 강남은 늘 막히긴 했지만 거리가 멀지 않아서 생각보다 금방 폭스강 스테이크 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히야…. 데이트 느낌 난다.”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선 종팔이 잔뜩 상기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남들은 남자 둘이서 뭐 이런 데를 오냐고 진저리 칠 수도 있는 분위기였지만, 서진은 애초부터 성별에 대한 편견이 희미해 거래처 남자 부장을 핑크색 인테리어로 도배된 딸기 디저트 카페로 데려가던 놈이었다.

직원에게 안내받아 동그란 테이블에 앉은 두 사람 사이에 분위기 있는 작은 촛불이 놓였다. 메뉴판을 받아 살펴보던 서진이 종팔에게 물었다.

“와인 마실 거지?”

“저는 다 좋습니다.”

벌써 몇 잔 마신 것처럼 취해 보이는 종팔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서진이 직원에게 와인을 주문하고 있는 사이, 불현듯 무언가를 발견한 종팔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금세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창백하게 질려버렸다. 주문을 마친 서진이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그래?”

“진짜 점마 저거 뭐고….”

“뭐가?”

“아, 암껏도 아입니다.”

식사 시간 내내 종팔은 어딘가 불편한 사람처럼 사레가 들리거나, 힐끔힐끔 눈알을 굴리거나, 자신의 의자가 바닥에 지이익 끌릴 때마다 자꾸 눈치를 살피곤 했다. 한마디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어수선하게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도망치듯 바깥으로 서둘러 빠져나왔다. 정신 사나운 분위기에서 와인을 너무 빨리 마셔버린 서진은 취기가 거하게 올랐는지 크게 휘청거리며 헛소리까지 웅얼거리고 있었다.

“베토벤…. 슈 슈슉, 슈슉, 슈발로마….”

“하이고 우리 팀장님 마이 취하셨다. 베토벤한테 막 욕도 하고.”

그를 살갑게 부축하던 종팔이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바로 바깥에 세워진 서진의 차를 보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묻는다.

“대신 대리 불러드릴까요?”

“어, 어… 고마워요…. 우리 신입 사원 최종팔 씨….”

종팔은 서진의 코트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낸 다음 뒷좌석 문을 열고 그를 짐짝처럼 쑤셔 넣었다. 바로 좌석에 일자로 뻗어버리는 서진을 보고 씩 웃으며 차 문을 닫고 돌아섰다.

그 순간, 종팔은 자신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커다란 남자를 보고 화들짝 놀라 경기를 일으켰다.

“식겁이야!”

다짜고짜 차 키를 내놓으란 듯이 큰 손을 내민 남자는, 지금까지 사무실에서 봤던 분위기나 태도와는 확연히 달랐다.

평소에 그 쪼잔한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모습마저 가면이었는지, 지금은 대놓고 노골적인 악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큰 바윗덩이에 온몸이 짓눌리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당신 뭡니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종팔이 조용히 묻는다.

“김봉철.”

황당한 대답에 방심한 사이, 순식간에 손아귀에 든 차 키를 낚아챈 철이 그를 지나쳐 바로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다.

종팔이 벙찐 얼굴로 그 자리에 서 있는 동안 작은 배기음을 울리며 출발한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큰 도로까지 빠져나갔다.

차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뒷좌석에 누워 있던 서진이 몸을 뒤척이며 눈을 게슴츠레 떴다.

“기사님. 논현동 289-4번지요….”

서진은 흐릿하게 주소를 중얼거림과 동시에 다시 정신을 잃고 좌석에 대자로 뒤집어졌다.

안락하고 편안하다…….

시원한 숲에 있는 것 같다. 상쾌한 초록색 향기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그다음 느껴지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흐릿하게 정신이 들었을 땐, 웬 낯선 침대 위에 자빠져 있었다.

“홍서진 씨.”

듣기 좋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귤 박스 들고 처인나세요.”

이어지는 차가운 말에 눈꺼풀을 슬며시 연 서진이 뿌연 초점을 맞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쓸데없이 호화로운 인테리어. 얼마 전에 한 번 왔던 적이 있는 방이다.

가만히 서서 자신이 일어나길 기다리는 커다란 남자의 발밑에는 낯이 익은 하얀색 귤 박스가 놓여 있었다. 차에서 내려 고민하던 철이 잠시 서진을 침대 위에 눕혀둔 다음,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귤 박스를 꺼내온 거였다.

“…귀찮아.”

아직 술기운이 깨지 않은 서진이 하얀 이불을 꼭 끌어안으며 일어나지 않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누워 있으니 바로 정면에 보이는 그의 고간에 시선이 맞춰졌다.

분명 물건을 수납하는 쪽 품이 넓게 맞춰진 바지임에도 그것이 불룩 튀어나와 형태가 보이는 것 같았다. 눈을 끔뻑거리며 남의 중심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서진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흐릿한 발음으로 입을 열었다.

“철수야. 너 자지 너무 커… 나 토 할 뻔했잖아.”

“…….”

“좀 줄여봐… 응? 자지 너무 크면 여자들이 싫어한대…. 나 정도가 딱이야. 내가 딱 인기 많은 크기….”

“그 주둥아리 안 그치냐잉.”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낭설을 떠들던 서진의 말을 끊은 남자가 사나운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술기운 때문인지 그간 쌓여온 설움이 복받친 서진은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도, 나도, 너 세상에서 제일 싫어…. 내 입에 고추 막 쑤셔 넣고…. 또… 너무 커서 토 나오고… 우웩.”

마지막엔 진짜 토하는 것처럼 혀를 내밀고 눈알도 까뒤집는 열연을 펼치며 투정을 부렸다.

하, 어이없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뱉은 철이 그가 누워 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홍서진 씨.”

사뭇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진을 부르더니 시선을 내려 그와 눈을 맞췄다.

“마누라는 으딨어요.”

조심스레 손을 뻗은 다음, 매끄러운 머리칼을 손가락에 걸고 살살 쓸어 넘긴다.

서진은 훅 들어온 질문에 당황했지만 술에 전 머리를 도르륵 굴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가 잘 모를 만한 나라로 고르는 것이 뒤탈이 없을 터. 그는 기지를 발휘해 언젠가 퀴즈 게임에서 천재 소녀가 맞혔던 국가 이름을 간신히 떠올렸다.

“내 마누라… 보스냐 헤체르비엔나에.”

대답과 동시에 머리를 살살 쓰다듬던 손가락이 허공에 멈추더니 스윽 빠져나간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겄제. 남유럽에 있는 거.”

순식간에 차가워진 시선이 얼굴에 떨어져 내렸다.

“어… 거기.”

조금 당황한 서진은 침대 시트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충 얼버무렸다.

“거서 무슨 공부.”

“영어 공부.”

“거 크로아티아어 쓰는디.”

이 자식은 모르는 게 없나…….

천재 해커 소녀와 버금가는 상식 수준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씹… 크로티어 거기서 영어 공부하면 안 되냐? 그럼 한국에선 영어 공부 왜 해.”

서진이 뭐 그런 걸 다 따지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정정당당하게 이길 수 없을 땐 늘 목소리 큰 놈이 이기는 법이라 했다.

변명이 먹힌 건지, 철은 더 이상 딴죽을 걸지 않고 알 수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다.

무슨 표정인지는 몰라도 안 좋은 쪽이란 것은 확실했다. 실제로 방 온도가 싸늘해졌다고 느낄 만큼 공기가 냉랭해졌으니까.

“홍서진 씨는 예나 지금이나 그짓말만 하네요.”

긴 정적 끝에 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진아.”

몸을 숙이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철이 한층 더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니한테 나는 길바닥에 싸질러진 장난감이고 씹다 뱉는 껌이지.”

지금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극도의 분노를 참고 있는 듯, 성난 이마와 관자놀이 핏대가 움찔거렸다. 마주친 두 눈의 실핏줄이 터질 것처럼 시뻘겋다.

“내가 괴로워서 뒤져브리든 대가리가 터쳐브리든 니는 눈 하나 꿈쩍도 안 할 거고.”

이어서 그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은, 지금껏 듣던 중 가장 황당한 말이라 술에 취한 머리론 이해하기 어려웠다.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뜨겁게 바라보는 시선에 얼굴이 타버릴 것 같다.

와인에 잔뜩 전 뇌는 한 가지 생각밖에 떠올리지 못했다. 이 남자 허벌라게 잘생겼다.

“그래. 니가 터져버리든 디져버리든 상관 안 해.”

서진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의 실핏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뭐라도 대답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핏줄이 터질 것 같았으니까.

대답을 듣자마자 픽 터지는 웃음과 함께 남자의 성난 근육이 유하게 풀어진다.

“…기여. 니도 인자 나한테 아무껏도 아닌께.”

“그래.”

“홍서진 씨도 나한테 씹다 뱉는 껌이라고.”

혼자 다짐을 하는 건지 결연한 선언을 하는 건지 모를 말이 서진의 정수리에 떨어졌다. 따뜻한 곳에 있어서 그런지 점점 취기가 오른 서진은 게슴츠레 반쯤 감긴 눈으로 웅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래…. 잘됐다. 나도 너 싫어. 세상에서 제일….”

“잘됐네.”

그 짧은 대답을 끝으로 남자가 몸을 숙이더니, 서진의 입술 위로 도톰한 입술이 부드럽게 맞붙었다.

서로 내가 널 더 싫어한다고 싸우는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진창이었던 대화 내용과 달리, 자연스럽게 벌어진 틈새로 혀를 밀어 넣자 미끄덩한 두 살점이 부드럽게 섞이기 시작했다.

뭐지…… 이래도 되나…….

희미한 이성이 고개를 내밀려는 찰나. 입 안과 잇몸을 샅샅이 훑고 질척한 호흡을 나누던 혀가 서진의 목덜미에 자리 잡았다. 쪼옥, 가볍게 빨고 입술을 떼어낼 때마다 붉은 울혈이 피부에 번졌다.

“으응….”

몽롱한 가운데 남자의 입술이 닿는 부분이 화롯불에 덴 듯 열감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서진은 머릿속에 고개를 내밀려던 이성을 못 본 척 꾸욱 짓쳐 눌렀다.

철은 먼저 제 윗도리를 벗어 던진 다음, 팔 하나로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한 채 나머지 한쪽 팔로 서진의 셔츠를 벗겨 아무 데나 던져버렸다. 커다란 손이 옷이 벗겨진 상체를 더듬거리며 매끈한 살결을 음미하는 것처럼 쓰다듬었다.

서로 내가 더 싫다고 싸우다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른한 정신은 그냥 물 흘러가듯 감각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철이 손가락에 걸리는 작은 유두를 손끝으로 살살 문지르자 서진의 허리가 움찔하며 튀어 올랐다. 작은 자극에도 예민한 몸은 바르르 떨며 경련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발정해 거친 숨을 내뱉은 철이 다급하게 그의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아, 흣…!”

옅은 색을 가진 유두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문지르다가 혀로 길게 핥아 올리자 어쩔 줄 모르는 신음이 귓가로 흘러 들어왔다.

“아흐, 응…!”

“하아….”

철은 쌓일 대로 쌓인 욕정으로 번들거리는 눈을 치켜뜨고 서진의 반응을 살피면서, 꼭지를 세게 쪽쪽 빨아들이다가 혀끝으로 간지럽히듯 할짝거렸다.

“아응!”

예민한 유두가 난잡하게 빨리고 자극당하니 어쩔 줄 모르는 허리가 곡선으로 휘었다. 지나치게 야한 반응에 밑이 터져버릴 것 같은 남자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철이 다급한 손짓으로 제 바지를 벗고 드로어즈를 내리자 터질 것처럼 발기한 성기가 퉁, 질량감을 더하며 튀어나왔다.

벌써 일반 사람이 사정한 것처럼 쿠퍼액을 줄줄 싸고 있는 기둥을 아무렇게나 세게 쥐고 흔들면서 입으로는 서진의 유두를 쯔읍, 쭙, 소리 내며 빨기 시작했다.

“하으, 흐응…! 읏…!”

“아… 후읏….”

여린 유두를 잘근잘근 깨물고 괴롭히다가, 혀로 둥글게 돌려가며 진득하게 핥아대니 입 안에 가득 고인 침이 서진의 가슴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동시에 쿠퍼액으로 질척거리던 기둥을 놓고 젖은 손으로 서진의 바지를 벗겨내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버클을 풀고, 지퍼를 내린 다음 속옷까지 한 번에 잡고 아래로 끌어내리자 숱이 적은 음모와 반쯤 발기한 예쁜 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정말로, 미칠 것 같았다. 남자는 쫄쫄 굶은 개처럼 그의 아래에 고개를 처박고 귀두 끝에 쪽쪽 입을 맞추다가 기둥을 한꺼번에 입에 넣고 게걸스럽게 빨아올렸다.

“하읏…! 으응!”

세상 어느 것보다 달큼한 신음 소리가 고막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수없이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수음했던 목소리다. 뜨거운 혀가 자지를 감싸고, 남자의 고개가 오르락내리락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단단하게 세워진 서진의 자지가 그의 입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모습을 드러내길 반복했다. 인제서야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 서진이 그의 탄탄한 어깨를 미약한 힘으로 붙들어 보았다.

분명 내가 더 싫다, 니가 더 싫다, 혐오 경연 대회라도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가 제 아래에 머리를 묻고 개처럼 빨아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하…아, 아흣…!”

철의 어깨를 붙들고 고개를 도리질하던 서진이 결국 시트에 뺨을 묻었다. 완강히 거부하기엔 그가 주는 쾌락이 너무 크다. 안 그래도 흐린 의식이 더 부옇게 흐려졌다.

성기를 입에 머금은 채 세게 빨아올리던 남자는 서진의 흥분한 반응을 힐끗 살피더니 한껏 더 발정했다. 동시에 자신의 성기를 세게 주무르며 마구 흔들어댔다.

“응, 으흐읏…!”

“후읍….”

서진은 오랜만에 갖는 정사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심지어 그는 마지막으로 사정한 게 언제인지도 모를 만큼 수절한 스님 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터라 극도로 예민한 상태였다.

“하아, 으, 나… 쌀 것 같…! 아으읏…!”

서진이 신음 소리를 짧게 내지르자 동시에 남자의 입 안에 비릿한 정액이 왈칵 터져 나왔다. 철은 볼이 홀쭉해지도록 기둥을 쭈욱 쭉, 빨아당기며 귀두 끝에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액을 뽑아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살덩이를 뱉어내니 희멀건 액은 한 방울도 없이 침만 샅샅이 발려 번들거리고 있었다.

이어서 철이 허공에 꺼떡거리는 제 자지를 몇 번 위아래로 쓸어내리자, 쿠퍼액을 질질 흘리던 귀두 끝에서 오줌 같은 정액이 세차게 터져 나왔다.

“아… 으윽….”

단마디 신음을 뱉은 남자가 서진의 양쪽 다리를 들어 올려 가운데 구멍을 활짝 드러내더니 그 작은 구멍 입구에 대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끈적끈적한 하얀 액이 자지 끝에서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며 뽀얀 엉덩이와 침대 시트를 흥건하게 적셨다.

먼저 사정을 끝낸 서진은 달뜬 숨을 내쉬며 그 모습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제 구멍에 닿은 뭉뚝한 귀두와 뿜어져 나오는 액이 용암처럼 뜨거웠다.

“하아… 아…. 서진아….”

오래도록 사정한 남자의 커다란 흉곽이 부풀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철은 거의 무너지듯 서진을 품에 안더니 부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쪽쪽 입을 맞추고 혀를 내밀어 핥아댔다.

“…하… 서진이 니 싫어….”

물론 그 중간중간 혐오를 표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쪼옥, 싫어. 쪽쪽, 너무 싫어. 꼭 싫다는 말이 세상에서 제일 열렬한 사랑 고백같이 들려서 정신이 이상해지는 기분이다.

부드러운 몸 여기저기를 정처 없이 더듬던 손이 어느새 엉덩이골 가운데 위치한 구멍을 살살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응…!”

철은 엉덩이에 흠뻑 묻은 꾸덕꾸덕한 정액을 입구에 펴 바르다가 안으로 꼼꼼히 밀어 넣으며 손가락까지 같이 집어넣었다. 조금씩 조금씩 하얀 액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던 손가락이 순식간에 끝까지 처박혔다. 잔뜩 흥분한 남자는 본능을 인내하듯 서진의 귓바퀴를 느릿하게 핥아 올리며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조금씩 앞뒤로 왕복하는 손가락이 젖은 엉덩이골과 부딪치며 찔꺽거리는 야한 소리를 냈다.

“아… 안… 응! …으응!”

나중엔 어쩌려고 이러는지, 좁고 차진 내벽은 고작 손가락 하나도 빠듯하게 조여왔다. 푹푹 찌를 때마다 서진은 손가락에 반응하는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움찔움찔 떨어댔다.

어떤 사내새끼가 이런 몸을 참아낼 수 있을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도 모자라 남자를 미치게 만드는 야한 몸을. 조금의 여유도 남아 있지 않은 철은 서진의 온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단숨에 손가락을 여러 개로 늘렸다.

찰박찰박, 보기 좋게 살이 오른 엉덩이와 손가락이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린다.

“아흐, 응! 아아, 으읍….”

어느새 야릇한 신음도 남자에게 먹혀 그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몸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쾌감을 주던 손가락이 주르륵 안에서 빠져나가고, 몸을 일으켜 무릎을 꿇고 앉은 철이 서진의 다리를 잡아 활짝 벌리더니 귀두를 작은 구멍에 맞추고 체중을 싣기 시작했다.

“후우….”

“아… 아파…. 으읏! 아아…!”

“후윽… 하아….”

자지 끝에 맞춘 구멍이 괴이하게 벌어지며 투둑 뜯어지는 느낌까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혹시 피가 흐르는 건 아닌지 걱정된 서진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주먹만 한 귀두를 꾸역꾸역 삼키고 있는 제 밑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눈으로 보니 더 믿기지 않았다. 오랜만에 새삼스럽게 인체의 신비를 깨닫게 됐다. 온몸이 저릿한 충격에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어 제정신으로 잠깐 돌아온다.

“아, 너무… 커…! 너무, 아으윽!”

“아…흣….”

철은 서진의 두 다리를 자신의 어깨에 걸친 다음, 억지로 체중을 실어 도저히 더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좁은 내벽 안을 점점 파고들었다. 조금씩 조금씩 몸 안으로 모습을 감추는 팔뚝만 한 자지가 제 자리를 욕심내듯 장기를 위로 밀어낸다.

아파 죽으려고 하는 주인의 반응과 달리 색정적인 구멍은 자꾸만 들어오는 두꺼운 살덩이를 환영하는 것처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악착스럽게 착 달라붙어 꽉 조여댔다.

“아윽…. 쫍아서 뒤질 것 같… 흣.”

“아, 하응, 아아…!”

남자는 황홀함에 잔뜩 풀린 눈으로 허리를 살짝 뒤로 뺐다가 다시 앞으로 꾸우욱 밀면서 어떻게든 그의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지 못해 안달이 났다.

쑤욱, 쑤우욱, 커다란 자지가 몸 안에 길을 만들어 자리 잡았다. 순간 무너지듯 두 팔로 서진을 꽉 끌어안은 철이 남겨둔 체중을 실어 뿌리 끝까지 그의 안에 푹 박아 넣었다.

“아흐읏…!”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올라오는 전율에 서진이 저도 모르게 그의 탄탄한 몸을 꽉 끌어안았다.

“하아….”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바르르 떨며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었다. 배 속이 가득 차다 못해 터질 것 같다.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시야가 어둑해지면서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너무 강한 자극에 가만히 멈춰 있던 철은 자신에게 폭 안긴 작은 머리통에 끊임없이 입을 맞추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리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으, 아, 아응….”

미리 싸질러 놓은 정액이 윤활제가 되어 성기가 구멍 안에서 수월하게 미끄러질 수 있도록 도왔다. 빠르게 수축하고 풀어지는 근육은, 막 들어온 자지의 정액을 뽑아낼 것처럼 조이고 꽉꽉 물어댔다.

철은 당장에라도 폭발할 것 같은 사정감에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지난 몇 년간 상상으로 그를 떠올리며 수음하는 것만으로도 미칠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보다 더했다. 사실은, 그의 숨결이 섞인 공기만 마셔도 하루 종일 사정할 수 있었다.

철은 아래 구멍도 모자라 앙다문 서진의 입술 사이로 혀까지 꾸역꾸역 밀어 넣더니, 허리를 살살 움직이면서 혀로 함께 입 안을 쑤셔댔다.

“흐응, 아, 흐, 으응!”

한계까지 쫙 벌어진 분홍빛 구멍에 흉물이라고 부를 만큼 두껍고 검붉은 성기가 드나들었다. 손가락으로 안에 얕게 밀어 넣은 정액이 기둥을 타고 밀려 나오면서 시트 위에 뚝뚝 떨어져 내렸다.

“하윽… 하아….”

“흐읏, 아응, 아…!”

커다란 팔뚝이 내장을 통째로 밀어 올리는 느낌이다. 그런데도 발끝에서부터 번지는 찌릿한 쾌감에 눈앞이 번쩍번쩍 튀었다. 서진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어쩌면 이 모든 게 지나친 술기운이 만들어낸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후윽….”

남자는 제 기둥 모양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뱃가죽을 바라보면서 거의 정신을 잃다시피 흥분했다.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허리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철퍽, 철퍽, 철퍽! 잔뜩 젖은 사타구니가 진득하게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아흐, 아, 아응, 하앗!”

“허윽, 후우….”

“으응, 읏…!”

거센 허리 짓만큼 부드러운 내벽도 쉼 없이 요동치며 자지를 깊숙이 품었다. 이미 벌어진 구멍에서 오는 아픔보다 무자비하게 안을 쑤셔대는 살덩이가 주는 쾌락이 머릿속을 뒤덮은 지 오래다.

“아으! 아! 아읏, 철아… 빠, 빨리…!”

서진은 이미 머릿속이 엉망이라 자기가 뭘 빨리해 달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에 가까웠다. 그 말에 철이 짐승처럼 안을 박아대며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헉헉 숨을 내뱉었다.

퍽퍽, 퍽퍽퍽… 박아대다가 아래에서 콱콱, 허리를 쳐올리며 뿌리까지 깊게 쑤신다.

“아읏, 응! 아아……!”

두 사람의 은밀한 부위가 부딪치는 소리가 거세졌다. 마찰로 벌게진 구멍 사이로 팔뚝만 한 자지가 뿌리까지 모습을 감췄다가 빠르게 흉흉한 모습을 드러내길 반복했다.

다리를 한껏 벌린 가운데 핏줄 선 성기가 철퍽철퍽, 박히며 허연 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응…! 하아…!”

“허억, 아윽….”

허리를 쉼 없이 움직이던 철이 별안간 서진을 일으켜 세워 끌어안더니 자신의 위에 앉힌 자세로 아래에서 세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자세만 바꿨을 뿐인데 자지가 배 속 깊은 곳까지 더 깊게 들어오는 느낌이다.

퍽퍽퍽, 허리를 위로 쳐올리면서 동시에 가슴에 얼굴을 묻고 유두를 혀로 길게 핥다가 쭉쭉 빨아당겼다.

“아아, 아으응….!”

곧게 선 채로 아래위로 마구 흔들리는 서진의 자지 끝에서 하얀 물이 픽픽 터져 나왔다. 서진의 정액을 몸으로 맞으며 머리끝까지 흥분한 철은 멈추지 않고 성기를 쉴 틈 없이 밀어 넣었다.

“아, 아흑, 시, 싫어….”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쾌락에 정신이 혼미한 서진이 야트막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시 서진을 침대 위에 눕힌 철은 지금까지는 봐주고 있었다는 듯 그의 골반을 꽉 붙든 채 허리를 미친 듯이 털어댔다.

“아응, 응! 아! 하아! 아!”

돌덩이 같은 것에 배 속이 짓눌리는 것 같았다. 온몸의 힘이 싹 빠진 채로 남자가 쑤시고 흔드는 대로 매끈한 두 다리가 허공에서 덜렁거렸다.

퍽퍽퍽퍽……. 아래가 격렬히 쑤셔지는 고통에 하체에 감각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철은 밭은 숨을 할딱거리는 서진의 숨결마저 제 입술로 삼켰다.

철은 더 깊어질 수 없는 결합을 깊게 하고 싶은 것처럼 볼기짝을 두 손으로 잡아 활짝 벌린 다음 팔뚝만 한 성기를 쫀쫀한 구멍 안으로 거세게 치받았다.

“아으, 으윽! 하아아…!”

철썩철썩! 사타구니가 부딪치는 소리가 샅을 때리는 것처럼 크게 울렸다. 아무리 손으로 잡아 벌려도 좁은 구멍은 계속 수축하며 안을 드나드는 자지를 씹어 먹을 듯 달라붙었다.

“아, 아으응…!”

“…흐읍!”

퍼억! 강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나더니 돌덩이 같은 성기가 배 속 가장 깊은 곳 끝까지 처박혔다. 꽉 끌어안아 맞붙은 샅이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완전히 꾸욱 눌렸다.

이윽고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액체가 거세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읏…!”

생경한 느낌에 서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 아까 사정을 했는데도 끊임없이 꿀렁꿀렁 쏟아져 나오는 액체에 배 속이 한계까지 차오르는 것 같다. 사정없이 퍼붓는 정액이 내벽을 때리며 더할 나위 없이 안을 꽉 채웠다.

남자는 숨죽여 서진을 꽉 끌어안은 채로 처음보다 더 길게 사정했다. 끝났다 싶으면 허리를 콱콱, 처박으며 몇 번에 걸쳐서 진득한 정액을 계속 쏟아냈다.

“하아….”

서진의 흐릿한 시야에 초점을 맞춘 철이 헐떡이는 숨을 내쉬며 다급하게 그의 입술을 찾았다. 정신없이 혀를 섞고 쪽쪽거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서진이 먼저 그를 밀어내고 입을 열었다.

“싫어…. 너, 진짜 싫어….”

“…나도 니 싫어….”

대답과 동시에 어느새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가 또다시 부어오른 내벽 안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꽉 차 있던 정액이 벌게진 구멍 사이로 질금질금 새어 나왔다.

그날은 죽어도 서로 싫다고 우기는 어린애들처럼 싫다는 말만 반복하는 주제에, 몇 번인지도 모르게 밤새도록 관계를 가졌다.

***

기다란 손가락이 머리칼 사이에 걸렸다가 매끄럽게 빠져나간다.

아직 예민하게 달아올라 축 늘어진 몸을 간헐적으로 쓰다듬는 손길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어쩐지 뼛속까지 간지러워지는 느낌에 서진의 발가락이 슬그머니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철은 그 작은 움직임도 기민한 센서처럼 감지해 내더니, 그가 깨어났다고 생각했는지 허겁지겁 보드라운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비벼댔다.

“으, 읍….”

꾹 참고 있었던 것처럼 갈급하게 혀를 밀어 넣어 서진의 마른 입 안을 적시고, 껴안은 몸을 한층 더 밀착시키자 돌처럼 딱딱하게 발기한 것이 하반신을 짓눌렀다.

밤새도록 배 속을 휘젓고 수도 없이 들락거리던 몽둥이는 둥근 해가 떴음에도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고 그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다. 혹시 고추 안에 진짜 철근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만큼.

서진이 남아 있는 잠기운에 몸을 조금 뒤척이는 순간, 그 딱딱한 것이 살짝 벌어진 허벅지 틈 사이를 푹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든 서진이 그를 확 밀쳐내더니 흉흉한 살덩이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넓은 침대를 데구루루 굴렀다.

“하… 난, 더 못해….”

밤새도록 신음을 질러댄 목구멍에서 잔뜩 갈라져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낯빛을 가라앉힌 철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는 듯, 굴러간 남자를 끌어당겨 성적인 느낌 없이 커다란 품에 꼭 껴안았다. 꼭 사랑을 나눈 다음 후희를 즐기는 연인처럼 무아지경인 눈빛으로 작은 머리통에 쪽쪽 짧게 입을 맞췄다.

그에 반해 점점 술기운이 사라지면서 머나먼 차원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서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갔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만취 원 나이트 스탠드…….

“…처, 철…수 씨… 잠깐만.”

당황한 서진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어쩐지 자신보다 더 취한 것처럼 정신이 흐릿해 보이는 남자를 세차게 밀어냈다.

분명 어제 ‘홍서진 씨는 이제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고, 씹다 뱉는 껌’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던 것 같은데, 뱉기는커녕 날이 밝도록 정수리부터 발가락까지 입에 물고 빨고 잘근잘근 씹어먹고만 있으니.

동시에 침대 밑에 떨어진 재킷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위잉 울리기 시작했다. 뇌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을 차린 서진은 허둥지둥 기어가 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누라]

밝은 빛을 내뿜는 핸드폰에 뜬 화면을 본 서진은 저도 모르게 눈알을 도르륵 굴려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시선 끝엔 조금 전 취기가 오른 것처럼 몽롱해 보이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웬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도저히 조금 전과 동일 인물로 보이지 않는 지경이었다.

“받어봐야.”

가만히 핸드폰 화면을 보던 철이 표정만큼 딱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나중에 받을….”

그의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간 바로 거짓말이 들통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황급히 핸드폰을 다시 재킷 안에 넣어두려는 찰나, 철이 날렵한 손짓으로 손아귀에 있던 핸드폰을 빼앗아 가더니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대신 전화를 받았다.

그대로 서진의 귀에 폰을 갖다 대고 버튼을 연타하며 통화 음량을 최대치로 키운다.

- 남편, 뭐해? 회사야?

핸드폰 안에서 흘러나오는 명랑한 여자 목소리가 정적이 흐르는 방 안에 낭랑하게 울렸다. 서진은 벌써 식은땀이 등줄기로 주르르 흐르는 것 같았다. 눈앞이 빙글빙글 어지럽다.

“어, 어… 회사.”

머릿속이 아찔해진 서진은 결국 핸드폰을 받아 들고 잔뜩 갈라지는 목소리로 아무 대답이나 내놓았다.

대답하면서 은근 철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 …근데 목소리 왜 그래?

“어? 뭐가…?”

- 다 갈라지는 게 완전 쓋인데?

- …뭐가, 읍…!”

서진이 대답을 고민하는 사이 별안간 고개를 숙인 철이 그의 풀이 죽은 성기를 집어삼키더니 쭈웁, 소리를 내며 길게 빨아당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통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뜨거운 혀가 살덩이를 질척하게 감쌌다.

당황한 서진이 눈썹을 와락 찌푸린 채 그를 내려다보자, 맹수처럼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서진의 반응을 살피는 것처럼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 뭔 일 있어?

“……!”

저도 모르게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철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과 눈을 맞춘 채로 쭈웁, 쭈웁, 일부러 소리를 내는 것처럼 세차게 아래를 빨아댔다.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러다 김영미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당장 수치사로 죽을지도 모른다.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수치심과 더불어 갑자기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을 하는 남자에게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 뭐라고?

“…나, 나중에 전화할게.”

결국 급하게 종료 버튼을 누른 서진이 여전히 아래에 고개를 묻고 있는 남자의 단단한 어깨를 있는 힘껏 발로 차버렸다. 매서운 발길질에 뒤로 밀려나 몸을 일으킨 그가 대수롭지 않게 입가에 묻은 타액을 쓱 훔쳤다.

“너 진짜 미쳤어?”

서진은 들끓는 화를 억누르며 바로 성난 똥강아지처럼 따지고 들었다. 그의 돌발행동에 하마터면 거짓말이 들통날 뻔했다. 수치사로 죽을 뻔한 건 보너스고.

“미쳤다.”

“…뭐…?”

차마 철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괴이한 대답에 서진이 미간에 힘을 주었다. 늘 정적이고 차분했던 그였는데 다시 만나고부터 하나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는 것 같다.

“…홍서진 씨는 왜 잠자리 매너도 느자구가 없습니까.”

아까부터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있던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더니 말을 이었다.

“박는디 기절해브리고, 꼬추 빨아줘도 발로 차브리고.”

제 정력을 무시하는 듯한 말에 자존심이 상한 서진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그렇게 정신 나간 듯이 박아대는데 기절을 안 하는 게 비정상이라는 말을 꾹 삼키고 열이 오른 호흡을 가다듬었다.

“앞으로 너랑 잘 일 없으니까 걱정 말죠.”

서진의 단호한 어투에 별말 없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철이 멀찍이 놓인 서랍을 열어, 안에 있던 옷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의 발밑으로 옷이 툭 떨어졌다.

하나는 속옷, 하나는 캐시미어 소재로 된 짙은 색 터틀넥 스웨터였다. 속옷은 그렇다 치고, 스웨터를 바라보던 서진이 의문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뭡니까?”

“처입으라고요.”

“…….”

설마. 짐작 가는 이유를 떠올리며 시선을 내려보니 가슴, 배, 허벅지 가릴 것 없이 온몸이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뒤덮인 처참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씹….

기억이 흐릿한 와중에도 남자가 제 목덜미를 얼마나 물고 빨고 씹어댔는지 감각이 생생한 지경이니 안 봐도 비디오다.

서진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대충 스웨터의 목구멍에 대가리를 넣고 팔을 끼웠다. 비싼 게 좋은 거라고, 품이 많이 남긴 했지만 소재가 부드럽고 따뜻해서 나름 느낌이 괜찮다.

그러고 보니 자는 동안 씻겨주기까지 했는지 허연 액으로 생난리가 났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불쾌한 느낌 없이 뽀송뽀송하기만 했다.

나머지 옷을 전부 챙겨 입고 몸을 일으킨 서진이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 인사말을 뱉었다.

“길바닥에 싸질러진 장난감 씨. 씹다 뱉은 껌은 갑니다.”

대답을 기다릴 것 없이 방 안에 그를 남겨둔 채 밖으로 빠져나왔다. 간밤에 계속된 정사로 힘이 들어가지 않는 하반신이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후들거렸지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자신의 차까지 걸어오는 데 성공했다.

철은 이젠 잡으러 나오지도, 집까지 데려다주지도 않는다. 냉큼 문을 열고 올라타 시동을 걸고 그의 집을 빠져나오는 순간 자괴감과 후회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머릿속을 점령했다.

미친놈… 욕정에 돈 놈. 짐승만도 못한 놈. 정신 나간 새끼. 서진은 자신에게 온갖 욕을 쏟아붓는 걸 멈추지 않았다.

“장가를 안 갔으믄 안 갔지 그것은 안 돼…….”

별안간 머릿속에 떠오른 여자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서진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갓길에 차를 세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손등을 뜨끈하게 적시던 새까만 마스카라 눈물이 아른거린다. 다급하게 가슴께를 붙잡은 채로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아무리 술기운 때문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 봐도 욕정에 정신이 회까닥 나갔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아직도 갚지 못해서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빚을 떠올리자 한층 더 자괴감이 몰려왔다.

서진은 두 번 다시 같은 과오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천천히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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