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님! ……장님!”
쪼르르륵, 투명한 물줄기가 하강 곡선을 그리며 까만 흙을 축축하게 적신다.
“팀장님!”
“…으헝?”
귀를 찌르는 목소리가 머나먼 차원을 유영하던 영혼을 육체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서진의 흐리멍덩한 초점이 옆에 있던 박 대리에게 맞춰졌다.
“회사 접고 수영장 개장하려고요?”
박 대리가 눈짓으로 그의 손에 들린 물뿌리개를 가리키더니 “뭐 그게 더 나을 수도….” 자조적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이제 보니 소중한 고추나무가 수분을 과다 섭취하다 못해 받침대에서 물이 줄줄 흘러넘치고 있었다.
당황한 서진이 얼른 물뿌리개를 거두고 창문을 열어 고인 물을 쏟아 버렸다. 며칠 전 철과 마주친 후로 나사가 100개 정도 빠져버렸다.
또다시 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간만 때우던 그는 떠밀리듯 회의실로 향했다.
“…지난번 미팅에서 JS와 계약은 불발됐습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회사의 부고 소식이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전했지만, 직원들은 애초부터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지 ‘응 그래’ 식으로 쿨하게 넘어갔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 알고 보니, 길에 떨어진 지폐를 주우려는 순간 누가 투명한 줄을 잡아당기는 농간질에 불과했다고나 할까. 정말 박 대리 말대로 회사는 접고 홍가(家)네 눈물로 만든 수영장이나 개장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어수선한 분위기로 회의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온 서진은 괜히 불안한 마음에 쎄이월드 쪽지함을 살폈다.
홍서진
봉봉님 어디 가셨어여? ㅠ_ㅠ
항상 칼답장을 보내오던 김봉철은 주말 내내 답장 한 통이 없다. 하필이면 이럴 때 소녀까지 자신을 외면해 버리다니. 기분이 한층 더 울적해졌다.
처음으로 업무 시간에 짬이 생길 때마다 그녀에게 쪽지를 보내봤지만, 결국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답장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팀장님은 퇴근 안 하세요?”
사무실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원이 자리를 정리하며 말을 건넸다.
“응? 어어…. 퇴근해야죠.”
그제야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음을 깨달은 서진이 느릿하게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곧바로 수고하라는 인사와 함께 마지막 사원이 빠져나가고, 조용한 사무실에 혼자 남겨진 그가 마지막으로 텅 빈 쪽지함을 확인하더니 울적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오늘 하루 동안 회사에서 뭘 했는지도 모르겠다. 철을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사실, 머릿속이 엉킨 정도가 아니라 그냥 뇌가 멈춰버렸다. 그와 한 번 마주쳤을 뿐인데 순식간에 아무것도 못 하는 띨띨이 영구가 돼버린 기분이다.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두툼한 패딩을 챙겨 입은 서진이 사무실 바깥으로 나오자, 벌어진 옷깃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오늘은 기름값도 아낄 겸 대중교통을 타고 왔기에 추위를 피해 지하철역으로 빠른 걸음을 옮겼다.
빵빵.
기다렸다는 듯 짧게 끊기는 클랙슨 소리와 함께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옆으로 느리게 따라붙었다. 길을 걷던 서진이 차를 향해 시선을 던지자, 선팅이 진한 창문이 아래로 매끄럽게 내려갔다.
“…….”
그 순간 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잘생긴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모든 혼란과 혼돈의 원인. 분명 자신을 죽여버리고 싶다고 선언했던 남자다.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선 서진은 바로 시선을 거두고 못 본 척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빵빠앙― 빠아아앙―
“야.”
아까보다 조금 길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와 함께 귀를 의심케 하는 단어와 목소리의 조화가 뒤에서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
“뭐, 야아…?”
그의 입에서 나올 거라고 예상치 못한 소리에 홱 뒤돌아본 서진이 운전석으로 다가가 물었다.
“너 지금 야라고 했냐?”
“기여.”
“…내 기억으론 내가 너보다 형이거든?”
“나이 더 처묵어서 좋겠네요, 형.”
이 새끼가….
연이어 뺨따귀를 후려갈기는 것 같은 대사에 나이를 더 처먹은 형의 관자놀이 핏대가 움칠움칠한다.
철은 단 한 마디로, 이름을 부르는 건 괜찮아도 ‘야’라는 소리는 충격이었던 서진을 할리우드 스타에서 유교 사상이 충만한 공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듯 호흡을 가다듬은 서진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철수 씨, 나 죽이고 싶다면서요. 암살하러 왔어요?”
“델따줄란께 타세요.”
“싫은데. 그냥 죽이든지, 가던 길 가든지 하나만 하세요.”
“회사 이야기할 필요 없나 보네.”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무심하게 던진 한마디에 바로 몸을 틀어 조수석으로 달려간 서진이 잠겨 있는 차 문을 덜그럭덜그럭 잡아당겼다.
“문 잠겼는데, 열어주세요.”
서진은 차창을 똑똑 두드리며 창문에 작은 얼굴을 들이민 채 말했다. 탁, 소리를 내며 잠금장치가 풀리자 조수석에 올라탄 그는 어색한지 괜히 몸을 꼼지락거리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철이 집으로 가는 길을 묻자 대충 방향을 설명해 준 다음 조심스레 본론을 입 밖으로 꺼냈다.
“회사 이야기… 어떤 거요?”
그 말에 무표정하게 운전하던 철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홍서진 씨, 아버지가 사업가인디 보고 배운 것도 없습니까.”
“뭐요?”
“기본적인 것을 안 하네.”
“네?”
“로비도 모르냐고요잉.”
뻔한 이야기도 그의 입을 통해 들으니 벼락을 맞은 듯한 충격이 정수리에 떨어졌다.
“너….”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목구멍이 턱 막힌 서진의 눈동자에 강도 높은 지진과 같은 충격이 넘실거렸다.
시골에 있을 땐 그렇게 순수하고 순박하던 녀석이……. 확실히 서울 물이 무섭긴 무섭나 보다. 마치 속세 카지노에서 타락한 부처님을 마주친 것 같은 이질적인 감상과 안타까움, 온갖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결국 서진은 안구에 습기가 차올라 창가로 얼굴을 휙 돌린 채 말을 건넸다.
“그쪽이 로비할 만한 가치는 있고요?”
그러고 보니 워낙 정신이 없어 명함 한 장 받질 않았다.
“예.”
“…오, 오늘 당장은 힘들고 준비할 시간을 주세요.”
숨겨둔 비자금이 있는지 일단 아버지에게 연락해보고, 필요하다면 돈을 더 빌려야 할지도 모르지만, 회사를 살릴 수 있다면 그 정도 투자는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예.”
그 역시 대놓고 돈을 밝힌 게 민망하긴 했는지 귓바퀴가 조금 붉게 물들었다. 느긋한 속도로 도로를 달리던 승용차가 익숙한 오피스텔 앞에 도착하자마자, 아차 하는 생각이 대가리를 가로질렀다.
철은 이미 적극적으로 고개까지 쭉 내뺀 채 건물을 올려다보며 ‘여기서 산다고?’ 하는 기색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스치듯 보아도 부부가 살 만한 집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와, 와이프는 공부하느라 잠깐 해외에 있어서 임시 거처예요. 갈매기 남편 알죠?”
서진이 다급하게 꺼낸 와이프 이야기에 순식간에 차 안 공기가 뒤집혔다. 그는 빙하기처럼 싸늘해진 분위기를 뚫고 철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준비되면 연락하게 명함 줘보세요.”
“없는디.”
“그럼 핸드폰 내놔봐요.”
철이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내 서진의 손에 떨어뜨렸다. 폰을 열어 꾹꾹, 번호를 입력한 서진이 통화 버튼을 누르자 주머니에서 위잉 진동 소리가 울린다.
“제 번호입니다.”
“…….”
다시 핸드폰을 받아 든 철은 전화번호가 찍힌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를 뒤로하고 차에서 내리기 위해 문을 열어젖힌 서진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한마디 덧붙였다.
“사적인 연락은 하지 말고요.”
“…예.”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위이잉―
[JS유통 철수]
진동과 함께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이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번호를 교환한 이후로 철이 사적인 연락을 하는 일은 정말로 없었지만, 핸드폰을 뭘 어떻게 만지는 건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번호를 잘못 눌러 부재중이 찍히곤 했으니까.
위잉―
[잘못 눌렀어요]
늘 그렇듯 바로 전화가 끊기고 정정 문자가 와서 딱히 신경 쓰이진 않았지만.
일단 개인적인 감정은 모두 묻어놓고 회사 일만 생각하면서, 아버지에게 비자금을 받은 것도 모자라 며칠 동안 백방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며 로비 자금을 만들었다. 쎄이월드 접속도 못 할 만큼 바쁜 날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묵직한 귤 박스를 차 뒷좌석에 싣고 나온 서진이 그에게 문자로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오늘 오후 6시 코엑스 지하 주차장 B3로 오세요]
보내자마자 진동이 윙 울린다.
[예]
하, 화면을 보자마자 코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지간히 기다렸나 보지.
미륵보살처럼 속세에는 관심이 없던 순진한 남자가 이렇게 변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래서 세간에선 첫사랑을 환상 속에만 남겨두는 것이 더 좋은 거라고 떠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대충 사사로운 감상은 제쳐두고 시간에 맞춰 회사를 빠져나온 서진이 테헤란로를 가로질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지하 3층으로 내려가 주차할 공간을 찾으려는 순간 낯익은 고급 승용차가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근처에 차를 세운 다음, 뒷좌석에서 묵직한 귤 박스를 양손으로 꺼내 들고 첩보 작전을 펼치듯 주변을 살피며 승용차로 다가갔다.
안에서 달칵, 잠금장치 풀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팔을 길게 뻗어 조수석 문을 대신 열어주었다.
귤 박스를 꼭 끌어안은 채 낑낑대며 조수석에 오른 서진은 문을 쾅 닫더니 비장하게 호흡을 골랐다.
차 안에 있던 철은 정색하는 이모티콘 같은 표정으로 귤 박스를 내려다보았다.
“뭐여.”
그 말에 후우 한 번 더 크게 심호흡한 서진이 운전석을 향해 몸을 틀고 작게 속삭였다.
“열어보세요.”
남자가 여전히 정색하는 이모티콘 같은 표정으로 서진이 품에 안은 박스를 슬쩍 열어보았다. 주황색 싱싱한 귤들이 박스 안에서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그가 곧바로 박스를 닫아버리자 당황한 서진은 고개를 쭉 빼낸 다음 철의 귀에 대고 나긋하게 속삭였다.
“…밑에, 밑에 보세요.”
“…….”
서진은 여전히 요지부동인 그를 대신해 하는 수 없이 박스를 열고 위에 얹어놓은 노란색 귤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그러자 밑에 깔려 있던 배춧잎 색깔의 세종대왕이 인자한 모습을 드러냈다.
지폐 더미를 공개한 다음 흘끗,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그의 표정을 본 서진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더니 주머니에서 명품 지갑을 꺼내 박스 위에 얹었다.
“자. 이것도 너 해.”
신용 카드가 몇 장 들어 있긴 하지만, 어차피 한도가 얼마 안 된다는 걸 모를 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조금도 동하지 않는 듯한 철의 표정을 쳐다보며 식은땀을 흘리던 서진은 결국 배 째라는 식으로 좌석에 널브러졌다.
“씹…! 그냥 내 간을 빼먹어라.”
마침내 짧게 한숨을 내쉰 철이 입을 열었다.
“벨트.”
“뭐?”
그가 몸을 숙여 서진의 옆에 있던 안전벨트를 달깍 소리 나게 채워주더니, 난데없이 차가 역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끼이익―
타이어가 매끄러운 바닥과 마찰하는 굉음과 함께 빠른 속도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차는 며칠 전 서진을 집에 데려다줄 때와 달리 엄청난 속도로 막힌 도로를 뚫으며 눈 깜짝할 새 새로운 동네로 진입했다.
서진은 어디 가냐는 말도 묻지 못한 채 그저 귤 박스를 꼭 끌어안은 채 어리둥절하게 창밖을 둘러보았다. 서울에서 가장 조용하기로 유명한 부촌에 들어선 차는, 언덕길 위에 있는 전원주택 차고 앞에 멈춰 섰다.
“…집이에요?”
“예.”
철은 익숙하게 차고 안에 차를 집어넣었다. 범씨네가 강남에서도 건물 몇 채는 살 수 있는 부자라고 하더니, 아무래도 사실이었나 보다. 잠시 후 귤 박스를 두고 차에서 내린 서진은 그를 따라 터벅터벅 집 안으로 들어섰다.
깔끔한 집주인 성격과 달리 인테리어가 조금 난잡하고 쓸데없이 호화로웠다. 사실, 세상사 관심 없는 그에게 달라붙은 인테리어 업자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지만.
“같이 씻칠래?”
“네?”
집 안 여기저기를 뜯어보느라 제대로 듣지 못한 서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싫으믄 저짝 쓰세요.”
남자가 가리키는 방향 끝에 있는 커다란 욕실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밖에서 놀다 들어왔으면 손발이라도 씻으라는 말 같았다. 서진은 그의 말대로 손과 발을 꼼꼼하게 씻고 나왔다.
그가 넓은 집 안을 둘러보며 집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샤워를 마치고 나온 철이 아랫도리에 아슬아슬하게 수건 한 장만 두른 채 거실에 있던 서진을 찾았다.
대뜸 헐벗은 조각상이 등장하자 서진은 저도 모르게 탄탄한 근육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어째 운동만 하고 살았는지, 더 좋아질 수 없을 것 같던 몸이 더 좋아진 느낌이다.
“어후…. 굉장히 내처럴 하시네요.”
서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다음,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시선을 내리깔며 상기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이건 얼마짜리….”
괜히 딴청 피우며 벽에 걸린 그림으로 시선을 옮기는 순간, 강한 힘으로 몸이 홱 당겨지더니 입술 위로 뜨거운 무언가가 퍽 부딪혔다.
“읍….”
거친 손길과 다르게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았다. 동시에 코끝을 파고드는 익숙한 숲 내음 같은 향기가 진해졌다. 지난 세월 매 순간 그리워했던 향이다.
순식간에 한쪽 팔로 서진을 품에 안은 철은 나머지 한 손으로 뒷덜미를 꽉 붙들고, 윗입술과 아랫입술의 연한 살을 빨아당기며 입술을 비볐다.
그 향기와 달큼한 입맞춤에 취해 잠깐 힘이 빠진 사이 몸이 가볍게 들리더니 어느새 푹신한 침대 시트 위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우응… 읍….”
질척이는 혀가 조금 게걸스럽게 입 안을 드나든다. 깊숙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투명한 타액이 축축하게 흘러내린다. 쭙, 쭈읍, 미끄덩거리는 살덩이가 얽히고설켜 뜨거운 호흡이 오간다. 요추가 찌릿하게 떨리는 쾌감이었다.
사실 서진은 그와 헤어진 후로 거의 무성욕자가 됐다시피해 아래가 끓어오르는 일이 없었다.
차마 그를 떠올리고 싶진 않아서 인터넷 야한 동영상을 보면서 자위를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흥분이 되질 않거나 흥분을 하더라도 물을 빼지 못하고 중간에 식어 버렸다. 고자라도 된 것처럼.
그런데 지금은 키스만으로 밑이 발딱 설 것 같다. 어쩌면 처음부터 돌처럼 딱딱하게 발기해서 자신의 하반신을 푹푹 찔러대는 그의 방망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목덜미를 부드럽게 매만지던 커다란 손이 슬며시 아래로 내려가더니 서진의 흰 셔츠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서진이 개처럼 흥분한 남자를 확 밀쳐내고서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왜…, 왜 이러세요.”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비해 상당히 얄팍한 거부감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홍서진 씨.”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 남자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로비해 봐요.”
“……네?”
“설에선 다 그러고 바람핀담서.”
기억이 흐릿한 서진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철은 두 사람이 처음으로 같이 봤던 영화 내용을 말하는 거였다. 주인공이 불륜을 저지르는 삼류 에로 영화를 보고 나서 서진이 그에게 직접 건넨 말이었으니.
철이 다시 서진을 끌어당겨 턱을 들어 올리더니 조급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서진의 입술 사이를 꿰뚫고 들어온 뜨거운 혀가 난잡하게 입 안을 휘젓고 입 주변을 전부 핥아 먹었다.
“으응….”
등허리가 움찔움찔 떨리는 아찔한 쾌감에 정수리까지 오싹해졌다. 어느새 안 돼, 안 돼…응… 돼 돼 돼…… 로 바뀌어가는 자신을 발견한 서진의 머리가 도르륵 굴러갔다.
사적인 감정은 접어두고, 공적인 로비로써 한 번 하는 건 괜찮지 않을까….
불온한 생각도 서슴지 않는다. 흥분한 아랫도리는 빠르게 얕은꾀를 만들어내 술수를 부렸다. 결국 서진은 자신에게 딱 달라붙은 철의 가슴팍을 세게 밀쳐낸 뒤 나름 사무적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럼 이번 딱 한 번만이고, 끝나면 조아상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계약 추진해 주기로 약속하세요.”
다소 딱딱하게 내뱉은 말은, 결국 성 상납을 하겠다는 당찬 포부였다.
“…기여.”
대답하는 철의 목소리와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서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침실 주변을 둘러보며 종이와 펜을 찾기 시작했다.
“하기 전에 계, 계약서 쓰고 지장이라도 찍읍시다.”
철을 못 믿는 건 아니었지만, 일부러 비즈니스라는 점을 상기시키기 위해 괜히 계약서를 들먹였다. 침대 옆에 놓인 협탁 서랍을 열어보고,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던 서진이 순간 멍청한 얼굴로 굳었다.
숨쉬기가 버거운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쉬던 철의 눈에서 고여 있던 물이 툭, 시트 위에 떨어져 내렸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본 순간 심장이 시꺼먼 먼지 구덩이에 폭삭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굳어 있는 서진을 보며 철이 입을 열었다.
“서진아.”
언제 눈물을 떨궜냐는 듯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빨아 줘.”
“…어?”
“자지 빨아 달라고.”
“…어? 어어….”
한순간에 계약서고 나발이고 머릿속에서 날려버린 서진이 침대에 걸터앉은 그에게 삐거덕거리며 뻣뻣하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괜히 그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슬쩍 수건을 걷어내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흉물스러운 크기의 성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예전에 한 번 빨아 봤으니까….’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귀두 끝에서 흘러내린 쿠퍼액이 아래 기둥까지 번들번들하게 적셨다.
마른침을 꿀꺽 넘긴 서진이 다시 한번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살폈다. 길고 잘생긴 눈매에서 떨어지는 서늘한 시선이 얼굴에 꽂힌다. 서진은 왠지 시선을 마주치기가 힘들어 두 눈을 질끈 감고 혀로 입술을 축인 다음 입을 크게 벌렸다.
양손으로 묵직한 기둥을 받치면서 턱에 딱 소리가 날 만큼 입을 벌리고 뭉툭한 귀두를 입에 물었다. 이미 좆물이 줄줄 흐르고 있던 자지는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끈적한 쿠퍼액을 한 번 더 토해내며 움찔, 더 크게 부풀었다.
아직 끝밖에 넣지 않았는데 더 집어넣기 힘들어 두 손으로 두꺼운 기둥을 잡고 앞뒤로 탁탁 흔들기 시작했다.
입 안에서 부드러운 혓바닥을 귀두에 대고 문지르다가 혀끝으로 살짝살짝 액이 흐르는 곳을 핥기도 했다. 가끔 쫍쫍, 아이스크림을 빠는 것 같은 귀여운 소리도 튀어나왔다.
“하아…….”
가만히 서진을 내려다보던 철이 그의 머리카락을 치워 반듯한 이마를 드러내더니 어금니를 꽉 사리물었다. 문득 남자의 표정이 궁금해진 서진이 감고 있던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는 순간.
“우읍…!”
커다란 손이 서진의 뒤통수를 감싸더니 별안간 힘이 가해졌다. 동시에 철의 허리가 튕기듯이 움직이며 주먹만 한 귀두가 목구멍을 푹 찔렀다.
“…우으…!”
생각지도 못한 행동에 서진이 억 소리를 내며 버둥거렸다. 철이 허리를 앞뒤로 살살 움직이자 두꺼운 기둥이 목구멍을 찌르듯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벌써 입술 양옆이 찢어질 것처럼 아리고 한계까지 벌어진 턱은 빠질 것 같았다. 커다란 살덩이에 목이 꽉 막혀 숨이 안 쉬어지는 고통으로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으읍, 우으윽…!”
“아….”
당황한 서진이 그의 단단한 허벅지를 짧은 손톱으로 긁어댔지만, 그는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입 안을 가득 채우다 못해 목구멍까지 빈틈없이 꽉 채운 살덩이에 토기가 올라왔다.
서진은 뒤통수를 꽉 누르는 힘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입 안을 마구 드나드는 자지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냈다. 눈가에 고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목구멍이 꽉 막혀 삼키지 못한 쿠퍼액과 침이 아래턱을 타고 줄줄 흘렀다.
철은 기분이 좋은 건지 이빨에 긁히는 게 아픈 건지 모를 괴로운 표정으로 잔뜩 미간을 구겼다.
“우으읍, 흐윽….”
서진은 팔뚝만 한 것을 억지로 작은 입 안에 처박고 있으니 죽을 맛이었다. 서진의 원망 섞인 눈초리가 위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왠지 더 몸집을 부풀린 것 같은 자지가 목구멍 깊숙이 콱, 박힌다. 서진은 입에 문 것을 절대 빼내지 못하게 뒤통수를 꾹 누르는 커다란 손이 원망스러웠다.
“으읏….”
제 양물을 물고 있는 서진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단마디 흐트러진 신음을 터뜨리자, 귀두 끝에서 뜨겁고 꾸덕꾸덕한 정액이 거세게 쏟아져 나왔다.
억지로 목구멍 뒤로 쏘아지는 액체에 서진의 목울대가 꿀꺽꿀꺽 움직였다. 다 삼킬 수도 없고 입에 머금을 수도 없는 양이라 끈적한 시럽 같은 액이 입 밖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나 짙고 양도 많은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헉…! 커억…!!”
서진은 철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져 미친 듯이 기침하며 침이 섞인 정액을 뱉어냈다.
심지어 사정을 다 끝내지 않고 입에서 빼낸 건지 허공에서 꺼떡거리는 자지 끝에서 희멀건 액이 아직도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뒤져버릴 뻔했다.
컥, 크억, 기침하며 입 안에 남은 정액을 바닥에 퉤퉤 뱉어내는 서진을 보며 철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뱉지 말어.”
서진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고, 자기가 대체 뭘 들은 건가 싶어 한껏 커다래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읍…. 뭐…?”
“삼키라고.”
따지듯 묻는 말에 돌아온 대답은 간단했다. 철은 바닥에 엎어져 기침을 토하는 서진을 휙 일으켜 세우더니 푹신한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진 서진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된 얼떨떨한 얼굴로 눈을 끔뻑거렸다. 철은 자연스럽게 그 위에 자리를 잡고 그를 품 안에 가두었다.
“서진아, 나는 니가….”
남자는 매끈한 뺨을 커다란 손으로 살살 쓰다듬다가 서진의 입가에 묻어 있는 제 정액을 혀로 핥듯이 쪽쪽, 입을 맞췄다.
“너무 싫어….”
입에서 나온 대사와 달리 또다시 쪽, 입술이 부딪치더니 부드러운 혀가 정액으로 더럽혀진 입 안을 정리해 주는 것처럼 샅샅이 훑었다.
“세상에서 제일 싫어….”
그렇게 말하는 철의 눈에서 또 따뜻한 물이 툭 떨어져 서진의 뺨을 타고 흘렀다. 서진은 그 한마디에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울 정도로 허벌라게 싫다…….
영혼이 새까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빨아달라고 한 것도 아직 자신에게 마음이 남아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성욕을 풀면서 복수하려던 것뿐이라는 생각에 토기가 올라왔다.
머리가 어지럽다. 그렇게 생각하니 정말 모든 행위가 구역질 나게 느껴졌다.
“나, 나 안 할래…. 갈 거야.”
그를 확 밀쳐낸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신없이 옷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
“집에 갈래….”
서진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이아가라 폭포수처럼 콸콸 쏟아질 것 같은 것을 꾹 참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겉옷을 챙겨 집을 빠져나왔다.
지나치게 화려한 정원을 성큼성큼 가로질러 커다란 대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오니 차가운 공기와 함께 가파른 언덕길이 그를 맞이한다.
‘씹… 집을 살 거면 역세권으로 샀어야지.’
잇새로 욕을 뱉은 서진이 내리막길을 한참 걸어 버스 정류장에 당도할 때까지, 그를 뒤따라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날 서진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보내지 못한 편지가 빼곡히 채워진 서랍을 책상에서 빼낸 다음 그대로 들고 옥상에 올라갔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그가 자신을 이만큼 싫어하고 원한이 이렇게 깊은데 집에 이런 편지가 있는 걸 알면 얼마나 소름이 돋을까 싶어서 얼른 없애버리고 싶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일 때 이거 혹시 불법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예쁜 편지지 속에 담긴 눈물과 콧물이 묻은 글씨들이 하나둘 까만 재로 변한다. 언덕길을 내려올 때 꾹 참았던 눈물은 결국 수많은 편지를 태우면서 청승맞게 터져 나왔다.
허공에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지난 세월이 타들어 갔다.
그 여름날, 누군가 한없이 여리고 무르게 주물러 놓은 심장은 그 누군가에 의해 너무 쉽게 상처받아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총알이 날아와 박혀도 멀쩡한 콘크리트인 줄 알았던 심장이 알고 보니 한 사람에게는 얇디얇은 유리로 되어 있어서 작은 충격에도 산산이 부서져 형태를 잃었다.
그렇게 그날 밤엔, 시꺼먼 재가 되어 흩날리는 편지처럼 감정의 잔해들도 태워지길 바라면서 불법 소각을 서슴지 않았다.
***
“아….”
실컷 처울고 텅 빈 서랍을 든 채 방으로 돌아왔을 때,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은 서진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짚었다.
이사할 때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박스 안에도 꽉 차 있는 망할 놈의 편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일기도 제대로 쓴 적 없는 주제에 뭘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써댔는지.
“후우.”
일단 추가 불법 소각은 나중으로 미뤄두고, 더러워진 얼굴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가 물을 끼얹었다. 어푸어푸, 고개를 든 그가 뿌옇게 김 서린 거울을 뽀드득 소리 나게 닦고 잠시 거울을 보다가 슬쩍 45도 각도로 얼굴을 돌려보았다.
왠지 좀…… 괜찮다.
거울 속의 처연한 서사를 10개쯤 가진 것 같은 절세 미남과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턱선을 타고 뚝 뚝 흐르는 물방울이 관능적이다. 질질 짜는 동안 퉁퉁 부어오른 눈꺼풀, 이런 걸 인간미라고 부르던가.
결국 또 몹쓸 불치병이 도져버린 서진은 욕실에서 뛰어나와 대뜸 디지털카메라를 손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쎄이월드에 사진을 업로드한 게 언제더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방에서 가장 깨끗한 곳을 물색하다가 어쩔 수 없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 자리 잡았다.
차차차차차차찰칵, 빠르게 울리는 소리에 맞춰 조금씩 얼굴 각도를 움직여 보았다. 셀카는 원래 연속 사진으로 찍는 게 맞았다. 이렇게 하면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완벽한 구도를 발견할 수 있으니까.
서진은 한참 셔터를 눌러대다가 이쯤 하면 됐다는 생각에 컴퓨터를 켜고 사진을 폴더로 옮겼다. 최종 후보 두 장 중에 가장 잘 나온 사진을 고른 다음, 바로 쎄이월드 미니홈피에 접속했다.
일단 분위기에 맞게 홈피 BGM부터 조금 우울한 발라드로 바꿔주고, 요즘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외계어 스타일’로 쎄이월드 감성 글을 끄적여보았다.
어느새 나쁜 기운이 끓어올라 줄줄 흘러넘칠 듯이 차오른 새벽 세 시, 드디어 게시글을 올리고 찌뿌둥하게 기지개를 켜는 서진의 입가에 희미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침대 셀카)
난,, ㄱ ㅏ끔 우울해진ㄷr… ^-ㅠ
ㄱ ㅏ끔은 우울한 LHㄱr 별루ㄷ ㅏ…★
그ㄹ H
O r무도,, 날 안 조Oㅏ해도 괜ㅊ r L r…
그ㄹ ㅐ도 난……… LHㄱr 좋 ㄷ ㅏ 。
***
먹튀. 이트 앤 런(EATE AND RUN)이라고 하던가.
냉정한 현실은 마냥 슬픔을 음미할 시간마저 앗아갔다. 사무실 의자에 앉아 핸드폰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서진의 얼굴에 걱정과 근심이 수성 물감처럼 번졌다.
그날 철의 차에 두고 온 지폐 더미는 영혼을 믹서로 드르륵 갈아서 마련한 최후의 보루였으니까.
“하아….”
땅이 폭삭 꺼지는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쪽팔림을 무릅쓰고 주말 내내 그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응답이 오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로비는 받을 생각도 없었고, 그냥 복수가 목적이었다면 귤 박스 100개를 건네본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없는 돈을 싹싹 긁어모은 데다 빚까지 져서 마련한 자금이라 자존심을 세우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설마 이것도 지독한 복수 계획 중 하나였던 건 아닌지 깊은 의심에 잠겨 있는 사이, 옆에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진짜 우리 팀장님 키보드를 부숴야 하나….”
“…응?”
“아, 아입니다.”
남몰래 서진의 미니홈페이지 화면을 훔쳐보던 종팔이 다급하게 닫기 버튼을 연타하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머릿속이 온통 귤 박스 생각으로 도배된 서진은 불안한 듯 아랫입술을 짓씹다가 결국 코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외근 좀 다녀올게요.”
서진은 결연하게 한마디 뱉은 뒤 사무실을 빠져나오자마자 JS유통 본사가 있는 곳으로 차를 돌렸다. 개인적인 감정은 둘째치고, 그 큰돈을 홀라당 날려 버리기엔 재정 상황이 바닥을 치다 못해 땅굴을 파고 지옥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서진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커다란 건물 앞에 도착하자마자 가느다란 호흡을 내쉬며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다듬었다.
다짜고짜 큰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거울처럼 번쩍번쩍한 대리석이 깔린 널찍한 로비가 그를 맞이했다. 비싼 슈트를 차려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할 일이 있는 것처럼 바쁜 걸음으로 그를 스쳐 지나갔다.
“저… 안녕하세요.”
안내 데스크에 있는 직원에게 다가간 서진이 세상 무해한 미소를 가장하며 인사를 건넸다.
“네. 안녕하십니까.”
서진을 발견한 직원이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화답했다.
“저기, 조금 황당한 거는 저도 아는데… 여기 직원을 좀 만나고 싶은데요. 따로 연락이 안 돼서요.”
서진은 괜히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은데요. 일단 성함부터 말씀해 주시면 이야기는 전달해 보겠습니다. 어느 부서의 누구 말씀이신지?”
살짝 눈가를 찌푸린 직원이 여전히 서비스직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저는 조아상사 홍서진이구요.”
“네, 조아상사의, 홍, 서, 진, 님…. 어느 분 찾아오셨나요?”
바로 펜을 꺼내 포스트잇에 간단하게 메모를 적기 시작한다.
“어느 부서인지는 모르겠고… 좀 특이한 이름이라 아마 한 명밖에 없을 거예요. 범, 철이라는 직원이요.”
“…….”
그 말에 순식간에 서비스 미소를 얼굴에서 싹 날려버린 직원은 마치 ‘정상인인 줄 알고 대화했는데 알고 보니 미친 새끼였네요.’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범, 철, 이요. 성이 범이고 이름이 철, 외자예요.”
서진은 혹시 이름이 너무 어려워서 그런가 싶어 얼른 주석을 달았다. 경제 뉴스에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 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큐리티?”
안내 직원은 여전히 정색하는 얼굴로 테이블 밑에 달린 호출 버튼을 누르더니,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네? 시큐리티… 부서라고요?”
그 말의 의중을 알 리 없는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머지않아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난 덩치 두 명이 양쪽에서 살갑게 서진의 팔짱을 끼며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 어어… 왜 이러세요?”
강제로 부축 당하는 것처럼 몸이 허공에 붕 뜬 그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양옆의 덩치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생님. 여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두 덩치는 차분하게 말을 건네며 서진의 몸뚱이를 점점 로비 중앙에 위치한 출입문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언뜻 친절을 가장했지만 분명 귀찮은 잡상인 상대하는 말투다.
“저, 저 돈 받을 게 있어서 그래요!”
결국 강제로 커다란 회전문 앞에 선 서진이 필사적으로 안타까운 사연을 어필했다.
“아니, 그 자식이 내 돈 떼먹었…!”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으헉, 소리와 함께 몸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서진은 영문을 몰라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쳐들었다.
멀쩡한 사람을 바깥에 던져놓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깡패놈들의 의기양양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뒷모습이 단단한 바리게이트 같아 보여서 다시 들어가 시도하고 싶은 마음이 사르르 사라져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이라도 기억해 놓는 건데. 풀이 죽은 몸을 일으키고 손을 툭툭 털어내자 땅을 짚고 넘어질 때 쓸린 상처가 따끔하게 아려왔다.
‘이걸 이 회사에 손해배상 청구해, 말아….’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찡그린 그는 옷자락 사이로 숭숭 들어오는 찬 바람을 피해 다시 차 안으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손을 따뜻한 입김으로 호 불며 히터를 틀었다.
다시 철에게 연락이 온 게 없는지 확인하려고 꺼내 든 핸드폰 부재중에 떡하니 찍혀 있는 아버지라는 글자를 보고 기함했다.
좆됐다.
로비, 뭐라고 말하지……. 서진은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네?”
잠시 후, 한참 동안 계속된 통화에서 아버지는 슈퍼볼이라도 당첨된 사람처럼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실제로 슈퍼볼이나 다름없었지만.
주말에 미국까지 찾아온 JS유통 대표가 단기차입금도 밀린 월급도 모두 지급했으니, 당장 다음날 모든 직원이 JS 본사에 신설된 무역 부서로 장소만 옮겨가서 하던 일을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고.
“…그럴 수도… 있어요?”
심지어 아버지는 JS유통의 주식 지분까지 약속받았다고 했다.
설마 귤 박스가… 먹힌 건가.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흡수 합병이 아니라 그냥 자원봉사다. 대기업에서 아무런 이득도 없이 막심한 손해를 입으면서 작은 회사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다.
어마어마한 호의에 붙은 조건은 오직 JS 본사로 근무처를 옮기라는 알 수 없는 요구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가된 조건이 하나 더 있었다. 역시 이유는 모르지만, 서진에게 미니홈페이지 금지령이 내려진 것이다.
그날 새벽, 결국 서진은 울며 겨자 먹기로 미니홈페이지의 소녀팬들에게 작별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금지령이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당분간은 게시글을 못 올릴 것 같으니 그만큼 열과 성을 다해 최선을 쏟아부었다.
(감성 사진)
ㅈ ㅓ는 일상의 ħaPPy를 찾Oト
잠시 TRaVёL을 떠납L lㄷ r。 ⋆˚.•✩‧₊⋆
ටㅕ러분. . . . 보고싶을 ㄱ ㅓ예요。
ㅅし己6ㅎ ዞ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