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화 (15/26)

1.

“…JS유통…? 그 대기업… J-마트?”

“대표적인 게 마트고 요새 다른 사업도 많이 하던데요. 그 주유소 J-Oil도 거기 거고요.”

“걔네가 우리 회사를 알아? 어떻게??”

일하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에 놀란 사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혹시 모를 설렘으로 사무실이 잔뜩 긴장된 분위기였다.

“당장 대표님한테 한국에 들어오시라고 연락….”

당황한 서진이 멍한 얼굴로 일단 전화기부터 손에 들었다. 당장 회사가 파스스 재가 되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 데다, 직원들 월급도 밀린 상황에서는 마지막 동아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 그게 대표님이 아니라…… 홍 팀장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나 할 것 없이 누군가의 장난 메일이라는 데에 의견이 모이더니 술렁이던 사무실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실망한 사원들은 관심을 끄고 각자 업무로 돌아갔다.

이런 시기에 장난 메일이라니. 서진 역시 실망이 가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다시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도 이상해서 확인해 봤는데, 제, JS유통 공식 계정이 맞아요.”

또 한 번 이게 뭔 개소리냐는 얼굴을 한 사원들이 저마다 수군거렸다.

“제이에스, 거긴 상장사잖아….”

“그럼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서진은 자신이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황당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가리키며 물었다.

“거기서… 나를…? 왜??”

“정확히, 홍서진 팀장하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왜??”

“저도 몰라요….”

박 대리 역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당장 오늘 약속 잡자고… 아니, 아니다.”

서진이 멍하니 내뱉던 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다. 하마터면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으니.

“홍 팀장님이 워낙 바쁘셔서, 금요일쯤 시간 될 것 같다고 전해줘요.”

뻔뻔스럽게 업무 시간에 쎄이월드에 접속하려던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지만, 원래 사업이란 상대에게 절박한 티를 낼수록 밑지는 법. 뒷짐 진 손에 숨겨진 비장의 패라도 들고 있는 척해야 하는 것이 이 바닥이다. 서진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자신에게 감복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똥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의 박 대리가 결국 서진의 헛소리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제이에스 측에서 금요일 오후 5시 어떠시냐고 답장 왔는데요.”

“좋… 아니, 아니다.”

바로 입을 벙긋거리던 서진이 또 한 번 말을 끊었다.

“오후엔 다른 일로 너무 바쁘셔서, 한 오전 11시 20분쯤에야 시간이 날 것 같다고 전해줘요.”

“네??”

“전해줘요.”

또 한 번 그녀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메일을 보내자마자 바로 답장이 또 온 걸 보면, 뭔진 몰라도 우리 회사에 그쪽이 원하는 메리트가 확실히 있는 게 분명했다.

사업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들이야 좋다고 냅다 달려들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서진은 흐흥 콧노래를 부르면서 책상 위에 놓인 손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점검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오늘 점심은 오랜만에 초밥을 먹자고 할까…….’

한창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있을 때 메일함을 확인한 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그땐 시간이 안 된다고, 미팅은 없던 일로 하자는데요?”

“그냥 금요일 오후 다섯 시에 된다고 해!! 지금 당장!”

곧바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서진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좆될 뻔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마지막 동아줄을 제 손으로 댕강 끊어낼 뻔했으니.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바지 주머니에서 위잉 진동이 울린다. 서진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했다.

[마누라]

익숙한 저장명을 확인한 서진은 폴더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어, 왜.”

- 남편! 회사야?

“회사지 그럼.”

- 아니 그 회사 아직도 안 망했나 해서. 망하면 나한테 장가오라고 하려고 그랬지.

“씹… 끊어!”

속을 박박 긁는 영미의 장난에 탁 소리 나게 핸드폰을 닫아버렸다. 소꿉친구 김영미는 그해 여름 서진의 연애사를 아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매일 바닥에 엎어져 울고불고 폐인처럼 나뒹구는 그를 걱정하며 이유를 말해보라고 닦달하다가, 결국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함께 울어 준 유일한 친구다.

몇 년 전부터 서로 남편과 마누라처럼 잔소리가 심하다고 붙여준 별명이 입에 붙어 그냥 애칭이 되어 버렸는데, 박 대리가 서진을 유부남으로 아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원래부터 여자 이야기나 연애에 관심이 없었기에 마침 잘됐다 싶어 딱히 정정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냥 유부남인 체하는 게 편했으니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서진은 씻고 나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허름한 현실과 달리 재벌 부럽지 않은 가상 현실로 들어서자 번쩍번쩍 화려하게 빛나는 미니캐릭터가 그를 반겼다. 히죽 웃으면서 화면을 바라보던 그가 금세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흐음…. 또네.”

얼마 전부터 자신의 미니홈페이지 방문자 100만 hit 달성까지 5만 명마다 도토리 이벤트를 열었는데 70만, 75만, 80만 번째 방문자 당첨자가 모두 김봉철인 것이다.

‘방문자도 해킹이 되나….’

뭐 그러려니 넘기며 사진첩 댓글 창에 들어가 보니, 이번엔 김봉철이 슈베르트라는 악플러의 뼈와 살을 나노 단위로 분해하며 텍스트 살인을 저지르고 있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서진이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쪽지를 보냈다.

홍서진

봉봉님.. ^ㅡ^;;

악성 댓글은 그냥 무시하세여ㅋㅋ

다 부러워서 그러는 거니깐 ^ㅡ^

곧바로 쪽지함에 답장이 도착했다.

김봉철

사진 안 올리면 안 돼요?

누가 보면서 이상한 짓 할 수도 있는데.

답장을 읽던 서진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가 보면서 이상한 걸 할 수 있다니. 고작 사진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뭘까. 기껏해야 셀카 몇 장 가지고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홍서진

ㅋㅋㅋ이상한 짓? 어떤 거욤??

하지만 그 후로 소녀에게선 답장이 없었다.

“뭐야….”

계속 그녀의 답장을 기다리던 서진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결국 다른 날보다 일찍 컴퓨터를 종료한 그는 금요일에 있을 일생일대의 미팅을 준비하려 옷장을 뒤집어엎고 옷가지들을 휙휙 던져가며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고심한 끝에 가장 비싼 아이템들만 골라 부내가 풀풀 풍기는 코디를 완성했다. 넥타이와 셔츠 색깔이 좀 미스매치였지만 아무튼 둘 다 명품이다.

대기업 앞에 주눅 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있어 보여야 하니까.

그날 밤은 결전의 날에 대비해 셔츠를 미리 다리미로 싹싹 다려놓고, 부푼 꿈을 끌어안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

“팀장님, 저 잊으시면 안 됩니다.”

“팀장님, 저희 갈 데 없어요.”

금요일 오후, 약속 시간에 맞춰 사무실을 나서는 서진에게 매달린 사원들이 저마다 간절한 목소리로 한마디씩 뱉었다.

사실 기적처럼 흡수합병 계약을 맺는다고 해도 전 직원 고용 승계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 직원들 입장에서는 한순간에 대기업 입사자가 될 수도 있지만 권고사직으로 정리될 위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물론 그마저도 이 말도 안 되는 합병이 성공했을 때나 해당하는 얘기지만.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다들 걱정하지 말고 일 보세요.”

짙은 색 코트를 챙겨 든 서진이 비장하게 한마디 던진 뒤 사무실을 나섰다. 성큼성큼 걸어가 하얀 경차 문을 열고 올라타 바로 시동을 걸자 꽁꽁 얼어붙은 차 안에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몇 번이고 확인한 약속 장소는 도산대로에 있는 예약제 한정식집이었다. 확실히 대기업이라 그런지 미팅 장소도 남다르다고 감격하며 천천히 액셀을 밟았다.

서진은 어젯밤에 아버지와 밤새 통화하며 세운 전략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쿵쾅거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냥 바닥에 납작 엎드려 싹싹 빌면서 도움을 청하라는 것도 전략이라면 전략이니까. 아무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조아상사는 끝이다.

“발렛이요.”

고급스러운 건물 앞에 도착한 서진이 주차 요원에게 키를 내밀었다. 생각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려다가 멈칫하고 손목시계를 살펴보니 늦지 않으려고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먼저 도착해 버렸다.

‘30분은 너무 절박해 보이는 것 같은데….’

잠깐 고민에 잠기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정확한 시간에 들어가야겠다고 계획을 튼 서진은 총총걸음으로 옆 건물 주차장으로 향했다.

여기 서서 잠깐 기다렸다가 들어가야지. 하필이면 오늘이 최고 추위라더니 칼바람이 어찌나 부는지 귀를 잡아당기면 똑, 똑, 떨어져 나갈 것 같다.

주차장에 서서 추위와 싸우던 그는 발을 동동 구르며 허어… 하얀 입김을 용가리처럼 내뿜었다. 옆에 주차돼 있는 차창에 덜덜 떨고 있는 그의 모습이 비쳤다.

‘저 정도 선팅이면 불법 아닌가….’

차 선팅이 어찌나 진한지 그냥 거울이나 다름없었다. 씨익 미소 지은 서진은 성큼성큼 걸어가 차 창문에 대고 제 외모를 점검하다가, 혹시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진 않았는지 이― 입을 벌리고 확인에 들어갔다.

꽁꽁 얼어붙은 얼굴 근육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풀던 중, 미리 JS 측 사람을 만났을 때 건넬 인사말이라도 연습하기로 마음먹었다.

“안녕하데….”

그새 입이 꽁꽁 얼어붙었는지 발음이 질질 샌다.

“안녕하데요. 쓰읍….”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침을 후르릅 마시며 소매로 닦아낸 서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홍서진 팀당입니다.”

씹, 혀도 얼어붙었나.

“안녕하세….”

불현듯 스르륵 부드럽게 내려가는 창문과 함께 차창에 비치던 자신의 얼굴이 점점 사라져갔다.

그리고 나타난,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마주하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서진은 그대로 다리 힘이 풀려 넘어지면서 차가운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었다.

“…….”

서진은 길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차 안에서 밝은 광채를 내뿜는 미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넋을 놓았다. 다행히 너무 놀란 나머지 눈물샘마저 작동하지 않았다. 심장이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부치지 못하고 서랍에 쌓인 수백 수천 통 편지의 주인이자 수영장을 채우고도 남을 눈물과 콧물의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여전히 짧은 머리, 짙고 가지런한 눈썹과 미끈하게 연결되는 높은 콧대부터 적당한 입술까지.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멍하니 눈 코 입을 하나하나 뜯어 보던 시선이 입술에서 조금 길게 머문다. 저 도톰한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알고 있었다. 짙은 색 눈동자가 얼마만큼 다정해질 수 있는지도.

솔직히 헤어지고 몇 년이 지나고부터는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떠올리기 힘들었는데, 실물은 흐릿하게나마 그려보던 잔상보다 훨씬 남자답고 성숙한 모습이었다. 이젠 이목구비 어디에도 그 여름날 어린 청년은 찾아볼 수 없었으니.

“안녕.”

세필 붓으로 그린 듯 수려한 얼굴이 사뭇 이질적인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와 전혀 다른 느낌에 우주 바깥 차원에 있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지만, 꽉 막혀버린 목구멍은 쉬이 대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안녕… 안녕이 무슨 뜻이지…….’

이런 걸 게슈탈트 붕괴 현상이라고 하던가. 사실 그냥 서진이 창문에 대고 연습한 ‘안녕하데요’에 대한 반응인 듯싶었으나, 산소 공급이 멈춰버린 뇌는 간단한 인사말도 해석을 힘들어했다.

“크흠.”

마땅한 대답을 내놓는 시간을 유예하기 위해 괜히 헛기침하며, 간신히 몸뚱이를 일으키는 데 성공한 서진이 먼지가 붙은 궁둥이를 툭툭 털어냈다.

텅 비어버린 머릿속을 샅샅이 뒤져 할 말을 찾는다. 이상해 보이지 않게 무슨 말이든 뱉어내야 했다.

“오, 오랜만이다, 야.”

무슨 말이든 뱉고, 튀어야 한다.

“기여.”

별 동요 없는 그와 달리 당황한 서진은 고장 난 라디오처럼 말을 버벅거렸다.

“자, 잘 지냈어? 좋… 좋아 보이네.”

“좆, 좋아 보이냐.”

빈정거리듯 반복하는 말에 왠지 모를 비소가 섞였다.

“그래. 그 뭐냐…. 이름이… 철수, 맞지?”

마치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을 더듬는 것처럼 한쪽 눈살을 찌푸린 서진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만나서 반가웠다.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다음에 기회 되면 보자. 지금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이어지는 말은 목구멍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술술 흘러나왔다. 원래 서진은 느자구 없는 컨셉의 달인이었다.

서진은 여전히 자신에게 꽂힌 시선을 뒤로한 채, 삐거덕거리는 목각 인형처럼 어색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비록 같은 쪽 손과 발이 동시에 나가긴 했으나 일단 그곳에서 퇴장하는 데는 성공이었다.

급한 대로 약속 장소로 도망쳐 들어온 서진은 직원에게 커다란 룸을 안내받았다. 고즈넉한 분위기의 방 안에 앉자마자 따라주는 따뜻한 차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정신이 회까닥 나갈 것만 같다. 조용한 방 안에 울리는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 소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이미 합병이고 미팅이고 나발이고 모든 생각은 머리에서 휘발된 지 오래다.

그나저나 시골에 있어야 할 녀석이 왜 서울에….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생각에 잠기는 순간, 정면에 보이는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조금 전 보았던 남자가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처, 철수야….”

또 한 번 서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철이 버려진 똥강아지처럼 자신을 따라 들어 온 것이다. 이번엔 정말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너 여기 들어오면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서진이 하는 수 없이 그의 커다란 몸을 밀어내며 필사적으로 문밖으로 쫓아냈다.

“이만 가줘.”

겨우 그를 문밖으로 쫓아낸 뒤, 눈앞에서 다시 미닫이문을 닫아버렸다.

아득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고 자리로 돌아가서 궁둥이를 붙이려고 하는데, 또 한 번 문이 열리더니 방금 쫓겨난 남자가 다시 룸으로 들어섰다.

“하 참, 여기 들어오면 안 된다니까.”

자리에 앉기도 전에 다시 일어난 서진은 결국 우악스러운 힘으로 그를 바깥까지 밀어내야 했다.

“그만 돌아가.”

심장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것 같았다.

또 탁 소리가 나게 문을 닫은 순간, 이번엔 바로 드르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철수야 제발 이러지….”

“홍서진 씨.”

차가운 목소리로 뒷말을 끊은 철이 처음 보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분명, 뭐 이딴 게 다 있냐는 눈빛이었다.

“미팅 안 할 겁니까.”

“…네?”

그의 사무적인 말투에 서진의 입에서도 자동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일 안 하냐고요잉.”

차갑게 말을 뱉은 철은 그대로 그를 지나쳐 자리에 앉았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서진 역시 헐레벌떡 맞은편 자리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정갈한 코스 요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서 오고 간 대화는 정말 JS유통과의 사무적인 미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결국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식사를 마쳐야 했다. 대수롭지 않게 대차 대조표를 넘겨보던 철이 희미하게 눈썹을 구겼다.

“3년 연속 영업 이익 적자에, 유동 부채만 해도 자본금의 세 배가 넘었네요.”

철이 JS유통 직원이었다니…….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진과 달리 그는 오로지 일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대체 뭔 생각으로 어음을 남발해 쌌는지.”

“그, 보시… 면 아시겠지만 IMF 이전에는 흑자가….”

당황한 서진은 준비한 말도 하얗게 잊은 채 버벅거렸다.

“이게 회사여 빚덩이여.”

종이를 대충 넘겨보던 철이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준비해온 서류를 탁 내려놓았다. 그의 말대로 자본금 대비 단기차입금이 너무 많아 회사가 아니라 빚덩이에 가까운 건 사실이었다.

“재무제표에 느자구가 없어도 겁나게 없으시네.”

“기, 기회를 주… 시면 충분히 회복이 가능한….”

죄인처럼 눈을 내리깐 서진이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방 우리더러 부채 덩어리를 가져가 달라고 하는 겁니까.”

뭐래, 먼저 연락한 건 그쪽이면서…. 순간 치밀어오르는 대사를 꾸욱 눌러 참은 서진이 차분하게 말을 꺼냈다.

“제이에스와 함께 시너지를 발휘하면 충분히 흑자 전환이 가능하다고, 약속드립니다.”

“예나 지금이나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참 잘하시네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철이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없던 일로 합시다.”

그가 옷걸이에 걸린 코트를 챙겨 드는 순간, 당황한 서진이 따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 이럴 거면 왜 보자고…!”

긴 코트를 몸에 걸치고 뒤돌아본 그가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혼자 김칫국을 세숫대야로 마셔브렀나 보네.”

“…네?”

“왜요. 난 홍서진 씨 가지고 놀믄 안됩니까.”

이 자식이…. 그저 철의 농간질에 놀아났을 뿐이라는 생각에 머리가 띠잉 울렸다.

사실, 그것보단 이대로 정말 가는 건가 싶어 저도 모르게 아쉬운 감정이 꿈틀거렸다.

순간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서진의 핸드폰에서 윙 진동이 울리더니, 화면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누라]

슬쩍 화면을 확인한 철이 턱짓으로 핸드폰을 가리켰다.

“받아보세요.”

전화를 받지 않고 멀뚱멀뚱 서 있는 서진을 보며, 그가 오늘 본 얼굴 중에 가장 사람답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한 마디 덧붙였다.

“받으라고.”

그 말에 하는 수 없이 핸드폰을 손에 든 서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남편! 뭐….

“일 중이야. 끊어.”

받자마자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 다음 탁 소리 나게 핸드폰을 닫았다. 통화를 엿듣는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 있던 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진아.”

익숙한 부름에 서진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앞으로 엔간하면 눈에 띄지 말어.”

자기가 먼저 불러놓고.

서진이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자, 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서서 목울대를 꿀렁이던 철이 생전 처음 마주하는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죽여블고 싶은께.”

그는 듣던 중 가장 이중적인 말을 끝으로 미닫이문을 확 열어젖히더니 바로 성큼성큼 걸어 건물을 빠져나갔다.

짧은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서진은 다소 현실감 떨어지는 상황에 눈꺼풀을 멍하니 끔뻑였다. 정신을 놓고 한참을 서 있던 그는 나중에 룸으로 들어온 직원을 보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식당을 나섰다.

추운 날씨를 피해 곧장 차에 올라타자마자 고장 났던 눈물샘에서 뒤늦은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의 앞에서 울지 않은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함께 벌써 또 그가 보고 싶고, 절대 보고 싶지 않다는 양가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시간이 흘러 이제 어느 정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흐른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그를 향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 평생 그를 잊지 못한 채 혼자 독거노인으로 늙어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

서진은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며 핸들에 머리를 처박고 한참 울었다. 그러다 창문을 두드리는 주차 요원에게 쫓겨나 눈물 콧물을 흘리며 액셀을 밟았다.

따지고 보면 이 정도는 자신이 철에게 했던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 흐릿한 정신 상태로 운전하다 보니 사고가 날 뻔한 데다가 길까지 잘못 들어버렸다.

도로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도착한 서진은, 씻고 나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앉아 김봉철을 찾았다. 마음이 불안정할 때 그녀와 이야기하면 왠지 모든 게 괜찮은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대충 옆에 놓인 티슈로 또 흐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으면서 김봉철에게 쪽지를 보내려다가, 일단 먼저 쪽지함에 쌓여 있는 쪽지부터 읽기로 했다.

김봉철

이거 보시면 쪽지 주세요.

님.

집에 잘 도착하신 건가요?

왜 이렇게 늦으세요?

집에 잘 들어간 거죠.

바로 답장해 주세요.

예전엔 그녀와 퀴즈퀴즈 하기로 약속해놓고 서진이 만 하루가 넘게 들어오지 않아서 연이어 연락했다 쳐도, 이번에 보낸 메시지는 어째 전부 오늘 저녁에 온 것이다.

왜 김봉철이 자신이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해하는 건지 영문은 모르겠지만 일단 답장을 적기 시작했다.

홍서진

오늘은 일이 생겨서 늦었네염ㅎㅎ

봉봉님 같이 퀴즈퀴즈 고고?^ㅡ^

펑펑 울다가 어째선지 김봉철의 쪽지를 보고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서진은 기분 전환을 위해 그녀에게 퀴즈퀴즈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날도 서진은 천재 해커답게 퀴즈도 잘 푸는 김봉철과 함께 새벽까지 퀴즈를 풀었다.

사실 김봉철은 쪽지 테러할 때 빼곤 말이 많지 않았지만, 무슨 이상한 소릴 해도 다 받아주는 특유의 편안함이 있었다. 힘들 때 찾는 탁 트인 숲과 비슷한 안락함이랄까.

어느새 오전 세 시가 넘어갈 무렵, 짙게 깔린 새까만 어둠처럼 세상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나약한 인간의 마음에 새벽 감성이라는 나쁜 기운이 깃들기 쉬운 시간이다.

결국 그 감성에 취하고 만 서진은 그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조심스레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퓨리진®S2: 봉봉님.... 정말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닐까요? 저 사실 오늘 옛날에 사겼던 전 애인 만났거든요ㅎㅎ]

[©이퓨리진®S2: 진짜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쳤어요.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sjbcsjbc: 어땠어요.]

[©이퓨리진®S2: 음.. 오랜만에 보니깐, 어땠냐면여....]

[sjbcsjbc: 예.]

티슈를 뽑아 한 번 더 콧물을 끄응―! 푼 서진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퓨리진®S2: 후 ㅋㅋ 뒤지게 재수 없어졌음 ㅋㅋㅋ 한 대 때려주고 싶더라구여]

[©이퓨리진®S2: 어차피 이제 볼일 없는 거 딱밤이라도 갈기고 튀는 건데 천추의 한 -_-;;]

[sjbcsjbc 님이 로그아웃하셨습니다.]

“뭐야, 튕겼나….”

절대 서진보다 먼저 로그아웃하는 일이 없던 소녀는 그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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