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14/26)

7.

“평생 니 모시고 살께….”

철없는 한낱 어린애의 치기 어린 말들도, 이 남자가 하면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물처럼 진실하게 느껴졌다.

픽 웃음을 터뜨린 서진은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똑같이 이마에,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랑 살래.”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안락한 안정감을 주는 커다란 품에 꽉 끌어안긴다.

그때 불현듯 저 멀리서, 아무도 건드릴 일 없는 현관문이 달그락거리는 차가운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마 잘못 들었거나 길고양이가 또 뭘 건드렸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긴 서진은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어 탄탄한 몸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커다란 손이 서진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살살 매만지다가 깍지를 끼더니 슬그머니 제 입술로 가져간다.

부드러운 입술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가 바로 또 손등에 맞닿았다. 씨익 입술 끄트머리를 올린 서진은 달큼한 꿀통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꿀벌처럼 둘만의 시공간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이 세상에 두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오롯한 둘만의 시간…….

“철아―!”

그 순간, 처음 듣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둘만의 시공간을 와장창 망치로 깨부수고 쳐들어왔다.

“철이 집에 있냐.”

“아따, 거 같이 들가자니께.”

집 안으로 들어서는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지고 뒤따라 중년 여성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번쩍 뜬 서진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아들, 우리 왔….”

소파에 누워 있는 철의 위에 올라앉은 자세로 거실에 들어선 두 불청객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고요한 정적 속에 서로 초면인 세 사람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오갔다.

등산복을 입은 머리가 짧은 중년 여성과 키가 엇비슷한 중년 남성,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흔한 어머니와 아버지상이다.

‘아니 저분들에게서 어떻게 이런 세기의 미남이…….’

일단 유전자의 기적에 감복하는 건 제쳐두고, 급박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 온갖 변명이 스쳐 지나갔다. 장성한 남자 둘이 소파에서 이런 자세로 누워 있을 일이 섹스 말고 뭐가 있더라?

찰나의 순간 팽글팽글 돌아가던 서진의 머리는 끔찍하지만, 어쩌면 최선일지도 모르는 결론을 내렸다.

“…씹! 토, 통장 어딨어!!”

눈썹을 사납게 구긴 서진은 눈알을 잔뜩 위로 까뒤집고 흰자를 드러낸 사이코패틱한 표정으로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주먹을 꼭 말아 쥔 손 밑에 드러난 손목이 가냘프다.

애초에 격투기 체급으로 쳐도 3급 가까이 차이 나는 덩치를 깔고 앉았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지만, 자기 아들이 위험해 처해 있다는 생각에 공황 상태가 된 부모는 기본적인 사실도 망각해 버렸다.

그들은 “왐마야!”, “도, 도도둑놈의 시끼!!” 등을 외치며 허둥지둥 주변을 둘러보더니 각자 얄팍한 무기 하나씩을 주워 들었다.

마땅히 손에 들 만한 게 없었는지 어머니는 장식장 위에 있던 코끼리 조각상을,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던 액자를 뽑아 손에 들었다.

그들이 손에 쥔 것을 마구 휘두르며 침입자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 철이 자세를 휙 뒤집어 서진을 제 품에 가두었다. 널따란 철의 등짝에 조각상과 액자가 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아, 와 이라는디.”

도둑놈의 새끼를 꼭 감싸 안은 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이 니 안 비키고 뭣 하냐!”

“기여! 이 도둑놈 시끼 대가리를 박살내불….”

흥분한 두 어른이 씩씩거리며 콧김을 내뿜는 순간.

“내 친구란께.”

철의 다급한 목소리가 말을 잘라먹었다.

“…으잉?”

황당함을 머금은 눈빛이 부모님 두 분 사이에 오갔다.

잠시 후, 미안한 마음에 냉장고에 있던 과일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어머니는 서진을 곰살갑게 대하며 자리에 앉혔다.

다 컸다고 해도, 집에 놀러 온 아들 친구를 예뻐하는 것이 따뜻한 부모님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세계 일주 중에 잠시 서프라이즈로 한국에 들어온 두 사람은, 일주일 정도만 머무르고 금방 떠날 계획이라고 했다.

정작 서프라이즈를 받은 당사자는 기뻐하는 모습을 개미 먹이만큼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따, 다 큰 아들이 뭐 그라고 논당가. 아 꼼짝 읎이 도둑놈인 줄 알았제.”

“누가 도둑….”

아버지 말에 발끈한 철의 발을 콱 밟은 서진이 냅다 끼어들어 입을 열었다.

“경찰과 도둑이라고, 요, 요새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입니다.”

우연히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마주쳤을 때 느낌이 이런 느낌일까. 서진은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극도의 긴장감으로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꾸욱 누르며 간신히 참았다.

“기여. 그… 서진이라고 했나? 설에서 와서 그른가 때깔이 허벌라게 곱네잉.”

“이것도 한나 묵어봐야.”

이번엔 어머니가 달걀노른자 같은 애플망고를 포크에 찍어서 서진에게 건넸다.

“야 아까 많이 묵었는디.”

가만히 보고 있던 철이 한마디 뱉었다. 망고를 냅다 받아 입에 처넣고 우물거리는 서진을 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안색을 살폈다.

“…괘안애? 체하는 거 아니여?”

“크허억!”

결국 사레가 들린 서진은 뭉크의 절규 같은 표정으로 기침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아따, 거봐….”

철은 자리에서 스프링처럼 튀어 나가 순식간에 물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서진은 그런 아들을 생소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부모님의 신경을 돌리기 위해 “하하. 아드님을 참 잘 키우셨습니다….” 하고 어색하게 웃다가, 너무 정신이 없는 나머지 “아버님이 정말 미인이십니다.” 따위의 헛소리를 하기도 했다.

무슨 말을 나눴는지도 모르게 우주 바깥으로 튕겨 나간 영혼이 허공을 부유하는 시간이었다.

“미안, 서진아. 많이 놀랬냐잉.”

서진이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초가집 앞에 도착한 트럭 안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엉? 어어….”

서진이 어색하게 대답하자, 안전벨트를 풀고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내민 철이 그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자연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아랫입술을 살살 빨다가 혀를 밀어 넣고 말캉한 혀를 감아 당긴다. 얼마간 뜨거운 숨결이 오가던 입술이 살짝 떨어지자 싱긋 웃음을 머금은 그가 물었다.

“낼은 데이트 으디서 할까.”

“…개똥밭에서.”

조금 전 키스로 아까 일어났던 사건은 싹 잊어버린 듯, 서진이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개똥밭에서 굴러도 좋았다.

눈을 맞추고 간지러운 웃음을 교환한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몇 번 더 애틋하게 입을 맞추고, 서로 잘 자라는 인사를 열 번쯤 더 한 뒤에야 트럭에서 내릴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서진은 행복함이 만개한 방정맞은 발걸음으로 방으로 향했다.

***

“글쎄 난 첨 보는 얼굴인디? 줄포 댁은 봤당가?”

“아니. 봤으믄 딱 알제잉.”

눈을 가느다랗게 뜬 아주머니들이 남자가 내민 사진을 돌려보며 저마다 고개를 내저었다.

“이것 봐, 아줌마들. 다 알고 왔다고요. 바른대로 말하라니까?”

흡사 양서류를 닮은, 양복을 빼입은 남성이 삼총사 아주머니들이 앉아 있는 평상 위에 흙이 묻은 구두를 턱 올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아, 그라믄 못 본 것을 못 봤다고 하제. 못 봤는디 봤다고 하나?”

광이 나는 구두를 바라보던 정숙이 정색하고 대답했다.

“아줌마들 얘가 어떤 앤지는 알아? 범법자 아들이야, 범법자 아들. 이런 애 숨겨주면 아줌마들도 벌 받는다고. 어? 알아들어?”

그 누구보다 범법자처럼 생긴 남자가 서진의 증명사진을 가리키며 협박했다.

“아따, 얻따 대고 재섭는 소릴. 주둥아리를 확 꼬매불라, 썩 끄져!”

참다못한 순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큰소리를 쳤다.

“기여. 그 주둥이 뽑아다가 명란젓으로 담궈불기 전에 썩 끄지소잉.”

가만히 앉아 과도로 과일 껍질을 깎던 영옥이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던지자, 흠칫 놀란 남자가 평상 위에 올린 발을 냅다 치우더니 “하…. 거참 거…. 아줌마들 성질하고는….” 하며 은근슬쩍 자리를 피해 멀어졌다.

***

“철이 니는 농사 안 짓냐.”

다음 날 새빨갛게 잘 영근 고추의 첫 번째 수확을 위해 밭으로 나온 할아버지가 어김없이 함께 따라 나온 철을 향해 물었다.

“꼬추 따는 게 재밌잖애.”

“참 내, 별…. 그라믄 너거들은 저짝.”

말 같지도 않은 대답에 떫은 표정을 지은 할아버지가 각자 수확할 구간을 나누어 주었다.

할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두 사람은 초록 잎에 주렁주렁 매달린 빨간 고추를 따 바구니를 채우다가, 몰래 볼에 쪽 입을 맞추고 킥킥 웃고 딴청을 피우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고추밭에 퇴비를 뿌리고, 두둑을 만들고, 모종을 심고, 물고랑을 파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고추를 수확한다. 커다란 바구니를 한가득 채운 빨간 고추를 보니 감흥이 남달랐다.

서진은 인제 요령이 생겼으니 내년에는 더 농사를 잘 지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잘 익은 고추를 바구니에 담았다.

그렇게 고추 수확을 마친 두 사람은 남은 시간 동안 시내에서 데이트하며 짧은 하루를 보냈다.

언제나 그렇듯 서진을 집에 데려다준 철이 내일 하루는 집안일로 부산에 다녀와야 하니 같이 가자는 제안을 건넸다. 물론, 서진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지만.

집안일이라니. 어제 부모님을 한 번 뵌 거로 족했다. 딱 하루를 못 볼 뿐인데, 그날따라 헤어지기 전에 하는 키스가 더 길고 애틋했다.

이튿날.

할아버지와 단둘이 고추 수확을 위해 밭으로 나온 서진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열심히 바구니를 채웠다.

빨간 아랫부분만 따야 나중에 꼭지를 따로 따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에 아랫부분을 똑, 똑, 따며 엉금엉금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을 때였다.

“서진 씨.”

“어 씨, 깜짝이야!”

별안간 뒤에서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놀란 서진이 들고 있던 고추를 허공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그게 누군지 확인했을 땐, 차라리 고추밭에 머리를 박고 기절하고 싶어졌다.

“쪼깨 볼 수 있을까요잉?”

“…예? 예….”

며칠 전에 만난 철의 어머니는 등산복이 아니라 예쁜 옷을 곱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살가웠던 그 날과 달리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근처에 세워놓은 그녀의 승용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익숙한 한옥이었다.

철과 함께 아버지도 집을 비운 건지, 고요한 집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어머니가 내어준 차를 마시던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그녀였다.

“말 쪼까 놔도 될까요?”

“예에….”

긴 속눈썹을 내리깐 서진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진 씨.”

그의 이름을 부른 어머니가 난데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왜, 왜 이러세요!”

당황한 서진이 자리에서 펄쩍 뛰듯이 일어나 똑같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서 읎어져 줘.”

“예??”

다짜고짜 훅 들어오는 공격에 쟁반으로 대가리를 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내가 이렇게 빌께….”

하지만 그건 공격 같은 게 아니라 벼랑 끝에서 하는 애원이었으니.

“딱 보니께 철이 쟈 혼자 좋아서 저러는 거 같은디, 우리 서진 씨는 그 정도 아니잖애. 응? 쟈가 아직 철이 읍써서, 아직 에려서 그런거니께….”

열 달 동안 배 속에 품고 있다가 배를 갈라 낳은 자식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사실, 서진을 쳐다보는 눈빛만 봐도 알 수밖에 없었다.

“참말로 내가 나쁜 년이고 씨레기 짓 하는 거 아는디. 그 생각만 하믄 자다가도 이, 이, 심장이 펄떡펄떡 뛰어가꼬, 내가….”

어머니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손바닥으로 두들기며 눈물을 글썽였다.

“내가 이 꼴을 보고 으딜 간당가. 우리 아들….”

결국 그렁그렁하던 눈물이 짙게 파운데이션을 바른 뺨에 궤적을 남기며 주룩 흘러내렸다.

“부족한 거 한나 읎는 착한 내 아들, 어서 손가락질당하고 나 그런 거 못 봐. 참말로… 기냥, 기냥 내가 썩을 년 할랑께…. 아마 그것은 서진 씨네 부모님도 마찬가지일 것이여.”

“…….”

“장가를 안 갔으믄 안 갔지 그것은 안 돼…. 우리끼리는 괘안다 쳐도 딴 사람들이 알믄 뭣이라고 할까. 그 생각만 하믄 기냥… 내가 죽일 년이 돼브러도 그 꼴은 못 보겄…….”

목이 꽉 막힌 어머니는 결국 테이블 위에서 티슈를 뽑아 들더니, 뺨을 꾹꾹 누르며 눈물을 닦다가 콧물을 크흥―! 풀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무릎 꿇은 서진 앞에 또 무릎을 꿇고 앉아 말을 이었다.

“나 서진 씨 볼 면목도 읎고 참말로 미안한디, 미안해 죽겄는디…. 아줌마 한 번만 살려준다 치고…. 응? 어차피 헤어지고 쪼까 지나믄 싹 잊히는 게 또 연애 아니여.”

“…….”

“김 영감한테 얘기 들어본께 집에 빚 있담서. 대신 그거 아줌마가 갚아줄랑께. 나도 철이 아빠 모르게 꿍쳐놓은 돈이 꽤 있어. 잘 생각해봐야.”

여기까지 말한 어머니가 엉금엉금 무릎으로 기어 다가오더니 서진의 힘 빠진 손을 두 손으로 꽈악 붙들고 간절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자알― 생각해보고 낼까지 확답 줘. 응?”

2000年 (3)

“…지금 한강 물 많이 차가울까.”

저마다 회식 중인 직장인들의 목소리로 한껏 데시벨이 높아진 고깃집, 서진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엎어져 힘없이 중얼거렸다.

“지금 바깥에 영하니까 뭐… 얼음물이겠죠?”

옆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던 박 대리가 영하 날씨만큼 차가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럼 그냥 찌개에 머리 박고 죽어야겠다. 아니면 박 대리가 나 죽여줘.”

서진이 된장찌개 뚝배기를 제 앞으로 드그극 끌어당겼다.

“에헤이! 팀장님, 또 이런다.”

“나 진짜 면목이 없어….”

서진은 행여 맛있게 먹고 있던 찌개에 코라도 박을까 자신을 말리고 나선 손길을 뿌리치며 취기가 오른 흐릿한 눈으로 제 처지를 비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팀원 중 한 명은 평소 황 부장에게 쌓인 게 꽤 많았던지 통쾌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홍 팀장님이 황 부장 대가리에 수삼냉채 얹어주면서 머리카락으로 쓰라고 했다면서요? 나 그거 듣고 10년 묵은 체증이 싹 내려갔잖아. 그 대머리 두꺼비 새끼….”

“씹… 내가 미쳐서….”

정작 영웅담의 당사자는 대머리가 되고 싶은 심정으로 울며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었지만. 야채전을 표창처럼 던져대던 그 날을 떠올리자 다시금 눈시울이 뜨끈뜨끈해졌다.

‘그게 얼마짜리 계약인데…….’

게다가 회사도, 자신도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산더미다.

“에이, 괘안습니다. 우리 조아상사는 그딴 대머리 섀끼 필요 없다 아닙니까.”

“필요 없긴 개뿔. 대머리 필요해….”

서진은 소주가 찰랑찰랑하게 담긴 소주잔을 바라보며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당장 회사가 와르르 무너져 길거리로 나앉아도 이상할 게 없는 판국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 사원의 호기로운 말이 오히려 신경을 박박 긁어댔다.

“후우…. 황 부자앙―!”

결국 길게 한숨을 늘어뜨린 그가 술에 취해 전 여자 친구를 찾는 진상처럼 황 부장의 이름을 외치며 질척거렸다.

다소 울적한 분위기 속에 회식 자리가 무르익고, 다섯이서 소주를 열 병도 넘게 깐 팀원들과 서진은 각자 주사를 부리거나 할 일을 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로 자리를 이어갔다.

“…누가 아직도 고기를 이렇게 안 구웠어….”

취기로 눈이 삼백안이 된 서진이 흐리멍덩한 손짓으로 고기 집게를 들더니,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가죽 반지갑을 집어 불판 위에 올렸다.

활활 타오르는 숯불 위로 치지직 소리와 함께 소가죽이 타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어, 팀장님!!”

뒤늦게 그 모습을 발견한 박 대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칠 때쯤, 이미 서진은 검은 반지갑을 먹기 좋게 자르기 위해 가위를 집어 들고 있었다.

“씹…. 뭐가 이렇게 질겨….”

급기야 한 번에 잘리지 않는 지갑을 어설프게 가위질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 그거 종팔이 지갑…!”

***

“어어…. 잘 들어가고. 다들 내일 회사에서 봐요.”

회식이 끝나고, 팀원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와 인사를 나눈 서진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종팔의 손을 꼭 붙든 채 사과를 건넸다.

“뭐 들은 것도 을마 없는데, 괘안습니다.”

너덜너덜해진 가죽 지갑을 주머니에 넣은 신입 사원 종팔이 허허 사람 좋게 웃는다.

“대신 팀장님이 다음에 밥 한 번 사주십쇼.”

“그래, 우리 종팔이 먹고 싶은 거 말만 해. 다 사줄게, 다.”

건물이라도 사줄 듯이 팔을 휘적휘적 크게 휘저으며 대답한 서진은 종팔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뒤, 택시를 잡기 위해 몸을 돌렸다.

휘청휘청하며 택시를 잡는 서진 앞에 모범택시가 멈춰 섰다. 갑자기 술이 번쩍 깬 서진이 급히 팔을 거두고 괜히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가만 멈춰 있던 모범택시는 서진이 모르는 체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했다. 멀어지는 모범택시를 바라보던 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일반 택시를 잡아타 집으로 향했다.

잠시 후, 기사 아저씨에게 돈을 건넨 뒤 차에서 내린 그가 비척비척 걸어 허름한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코트 주머니를 뒤져 꺼낸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기저기 옷가지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원룸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대충 코트와 구두를 벗어 던지고 욕실에서 씻고 나온 다음 지친 몸을 침대에 던지다시피 눕혔다. 술을 마시고 나면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안 오는 게 문제였다.

옛날엔 이럴 때마다 받는 사람이 없는 편지를 쓰곤 했는데, 이젠 그런 것도 그만둔 지 꽤 됐다.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서진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발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꾹 눌렀다.

얼마 전부터 그는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쎄이월드 미니홈페이지를 키우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우연히 모 커뮤니티 카페에서 얼짱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유명세를 탔더니 방문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소녀 추종자들이 많아진 것이다.

많은 소녀의 외모 찬양 댓글은 그의 나르시시즘을 만족시키고 지친 일상에 엔도르핀이 돼주었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서진은 쎄이월드에 로그인해 자신의 미니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작은 창 안에서 BGM으로 설정해둔 최신 가요가 흘러나온다.

서진은 먼저 사진첩에 들어가 며칠 전에 게시했던 사진에 달린 댓글을 쭉 살펴보기 시작했다.

흰 셔츠의 금욕적인 느낌과 살짝 풀어 헤친 넥타이에서 퇴폐미가 느껴지는 것이 꽤 마음에 드는 사진이었다.

아 야근 시러 -_-+

나 대신 해줄 사람 ~ ? ^0^ ♪

‘퍼가요~♡’가 가장 많았고 언제나 그렇듯 잘생겼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씨익 웃으며 만족스럽게 스크롤을 내리던 서진이 손가락을 멈칫했다.

얼마 전부터 모차르트 같은 가명으로 악플을 다는 웬 초딩 녀석이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베토벤: 웩ㅋ 회사에서 그리 할 짓이 없디?ㅋ 왜 사냐? 죽어라 홍서진 그냥 자살해버려~

↳구은희: ㅇㅇ님이나~ ㅋ 오빠 씹으세여 ^ㅁ^ 괜히 악성글 읽고 상처받지 마시구여...

↳소유라: 헐~~ 서진오빠한테 왜 그러셈?;;; 혹쉬....;; 부러워서??;; -_-;;

↳박연지: ㅉㅉ!! 이런 악성 댓글이 사람을 죽인다는 거 모르세요?? 이러다 서진님 진짜 죽으면 님탓임니다!!!

솔직히 열등감인 것이 너무 뻔한 내용이라 타격은 모래알만큼도 없었지만, 오히려 자신보다 마음이 약한 소녀(추정)들의 필사적인 쉴드를 보면서 귀여워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밑으로 열등감에 찌든 불쌍한 남자(추정)를 비난하는 댓글만 수두룩하게 달릴 뿐이다.

쇼팽: 병신 ㅋㅋ 딱 봐도 성형 조낸 했음 ㅋ 눈,코,턱 우웩 괴물ㅋㅋ 다 뜯어고치고 얼짱이라고 나대는 너 같은 자식 낳은 니 애미가 불쌍하다!!! 하긴 그 애미에 그 새끼 ㅉㅉㅉ 너 밤길 조심해~~ 만나면 죽여버릴 테니깐!!!

↳유민주: 헐... 님 남의 홈피 와서 대체 왜 그러시는지...?? =_=^ 빠직!

↳김선자: 님...!! 그러다 천~~벌! 받습니다!

베토벤이 신고당했는지 다음 날 쇼팽으로 또 댓글을 남긴 모양이다.

참 지랄도 정성이란 말이 딱이라고 생각하며 오랜만에 방명록에 들어간 서진은 이촌2)들의 사이버 안부 인사에 댓글을 남기며 시간을 보냈다.

김은선: 켁+ㅁ+ 오빠 미니캐가 그게 모에염..ㅋㅋ 너무 하쟈나~~ 밤 없음? ㅋㅋ

↳홍서진: 은선이 안녕ㅋㅋㅋ 밤이 없으니까 글치... 우씨 밤 내놔ㅜ^ㅜ

자신의 헐벗은 미니캐릭터3)를 욕하는 글에 유행에 민감한 서진의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얼짱의 미니홈페이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

하필 얼마 전 유료 스킨 사용 기간이 끝나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캐릭터가 돼버린 탓이다. 미니캐릭터의 예쁜 스킨은 흔히 ‘밤’이라 불리는 밤톨이4)로 살 수 있었는데, 비싸도 너무 비쌌다.

잠시 물을 마시고 온 서진은 게시글에 또 댓글이 올라왔나 새로 고침을 누르자마자 눈에 띈 새로운 댓글을 보며 눈을 끔뻑거렸다.

쇼팽과 베토벤의 악플 밑에 답글을 남긴 김봉철이란 소녀(추정) 때문이었다.

‘너 어디 사냐 이 씨벌놈아’로 시작되는 댓글은 보는 것만으로 눈이 더러워지고, 속이 울렁거리는 상스러운 욕설로 가득했다.

온갖 악플에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서진마저 너무 놀라서 아예 게시글까지 삭제해 버렸을 정도다.

바로 도망치듯 컴퓨터 전원을 꺼버린 그는 꿈에 나올까 무서운 댓글을 머릿속에서 떨치려고 노력하며 겨우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 날, 서진은 거래처를 홀라당 날려버린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 새로운 거래처를 뚫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하루를 보냈다. 힘든 노동을 마치고 지친 패잔병처럼 병든 얼굴로 집에 돌아오니, 아침에 먹다 남긴 라면 설거지와 여기저기 너절하게 널브러진 옷가지들이 그를 맞이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11시가 넘었다. 안 그래도 방 청소를 거의 하지 않는 서진의 집 안 환경은 늦은 퇴근으로 나날이 악화하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온 그는 대충 옷가지들을 집어 빨래통에 처넣고, 설거지는 대충 물에 담가놓기만 했다.

그러고는 하루 끝엔 언제나 그렇듯 코코아를 마시며 컴퓨터를 켜고, 유일한 낙인 쎄이월드로 들어갔다.

쌓인 쪽지들을 오랜만에 읽으며 시간을 보내던 서진은 순간 멈칫하며 눈살을 가늘게 찌푸렸다.

김봉철

안녕하세요? 밤이 필요하시다고 들었습니다.

마침 산에서 주워 온 밤이 많네요.

밤 100kg 드리고 싶은데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이런 것도 유머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서진은 김봉철이란 이름을 다시 보았다.

어제 베토벤과 쇼팽에게 답글을 단 그 이름이다.

비록 상스럽긴 했으나, 자신을 대신해 악플러에게 쌍욕을 퍼부어준 소녀(아버지 이름으로 가입한 소녀로 추정)를 위해 서진은 대충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홍서진

크크크큭ㅋㅋㅋ잼있는 분이네요 ^ㅡ^

ㅋㅋ근데 설마 밤톨이를 진짜 밤으로 안 건... 아니죠?

좀 촌스러운 유머긴 해도 자신에게 직접 답장을 받는 소녀는 몇 되지 않으니 나름 성공적인 시도였던 셈이다.

서진은 바다를 서핑하듯 이촌들을 파도 타며 다른 사람은 홈피를 어떻게 꾸몄는지, 유행하는 미니캐릭터 스킨이 무엇인지 구경하다가.

“푸흡―!”

별안간 화면에 뜬 작은 창에 놀라 입에 담긴 코코아 한 모금을 세차게 내뿜어 버렸다.

『김봉철 님이 선물을 보내셨어요.

밤톨이 100,000개』

김봉철이 보내온 것은 밤톨이가 10만 개. 무려 현금 천만 원어치의 밤이었다.

“…….”

커다래진 동공을 두어 번 끔뻑거리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쓰윽 문질러봐도 작은 창에 뜬 100,000개라는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사이트가 오류 났나…….’

문득 얼마 전에 봤던 인터넷 뉴스가 흐릿하게 머릿속을 스쳤다. 몰래 부모님 명의로 쎄이월드 밤톨이를 결제하는 10대 청소년들이 늘어나 골머리를 앓는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아버지 이름으로 가입한 이 소녀팬도 몰래 부모님 카드나 핸드폰으로 결제한 게 틀림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인터넷 사이버 머니를 천만 원어치나 보내는 게 분별력 있는 성인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으니.

서진은 괜히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내쉬고 김봉철에게 보낼 쪽지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홍서진

헐...;; 당황;; 십만...개??;;;;

저 이렇게 큰돈 못 받아욤!! ㅠ_ㅠ;;

당장 쎄이월드에 문의해서 환불받으세요!!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녀에게선 한동안 답장이 없었다. 잠시 후, 드디어 쪽지함에 답장이 도착했다.

김봉철

그거 돈으로 산 거 아닌데요?

밤톨이 해킹한 거예요.

쪽지를 읽자마자 뒤통수를 프라이팬으로 맞은 것같이 띵해졌다.

밤톨이 해킹…….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밤톨이에 쏟아부은 돈이 눈앞에 아른거리면서 억울함에 피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하긴 10만 개는 말이 안 되는 숫자긴 하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정확한 확인을 위해 못 믿는 척 한 번 더 실험해 보기로 했다.

홍서진

거짓말 -_-;;

그럼 똑같이 한 번 더 해보세요;;

이번엔 쪽지를 보내자마자 화면에 작은 팝업 창이 떴다.

『김봉철 님이 선물을 보내셨어요.

밤톨이 100,000개』

“헙….”

화면을 확인한 서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재벌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의 미니홈페이지를 돈으로 처바를 생각에 설렘으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안 그래도 헐벗고 있던 미니캐릭터를 365일 화려하게 꾸미고, 허름한 마이룸5)을 유럽의 왕실로 꾸밀 생각을 하니 웃음이 절로 흘러나온다.

“와… 짱이다….”

서진은 돼지우리처럼 더러운 현실의 제 방은 치울 생각도 않고, 가상의 미니룸을 어떻게 꾸밀지 생각하며 히죽거리다가 바로 사이트에서 쇼핑을 시작했다.

인기 있는 최신 배경 음악을 전부 추가하고, 눈에 보이는 온갖 화려한 아이템을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다.

한창 쇼핑에 빠져 있을 때 천재 해커 김봉철의 쪽지가 도착했다.

김봉철

더 조사볼까요?

더 조질 필요 없이 평생 먹고도 배 터져 죽을 만큼의 밤이다. 서진은 신이 나서 실실 웃는 얼굴로 답장을 보내다가, 마지막에 혹시… 하는 희망을 걸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홍서진

아녀ㅋㅋ 짱이에여ㅋㅋㅋㅋ

우와~~ 신기방기ㅋㅋㅋ

지금까지 밤톨이를 진짜 돈 주고 샀었다니...

흑흑ㅠ_ㅠ

님.... 혹시 퀴즈퀴즈라는 게임도 해킹 가능?

〈퀴즈퀴즈〉는 요즘 유행하는 퀴즈 게임이었는데, 사실 퀴즈를 푸는 것보단 자신의 캐릭터를 남들보다 예쁘게 꾸미는 게 목적인 게임이었다.

직접 퀴즈를 푸는 노동으로 사이버 머니를 벌거나 실제 현금으로 캐시를 충전해서 아이템을 살 수 있었다.

퀴즈를 잘 풀지 못하는 서진의 캐릭터는 늘 거지꼴이었기에 즐기진 않았지만, 캐시를 해킹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니까.

김봉철

예 가능해요.

봉 잡았다.

서진은 큭큭 사악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홍서진

우와!! 그럼 퀴즈퀴즈 들어오실래염??ㅋㅋ

©이퓨리진®S2 〈- 친구추가 ^ㅡ^ㅋㅋㅋ

30분 정도가 흐른 뒤 〈퀴즈퀴즈〉에서 만난 천재 해커 김봉철은, 희한하게도 게임 내에서 나눠주는 게임머니는 해킹이 안 되고 실제 돈으로 충전하는 캐시머니만 해킹이 가능하다고 했다.

천재 해커답게 퀴즈는 또 얼마나 잘 맞히는지, 항상 5번 문제를 넘기지 못하고 탈락하던 서진이 소녀의 답을 따라가니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필 게임 닉네임도 영어인 그녀를 뭐라고 부를까 고민하다가, 결국 봉 잡았다는 의미의 ‘봉’과 김봉철의 ‘봉’을 따 ‘봉봉’이라는 귀여운 애칭을 정해주었다.

[©이퓨리진®S2: 우와 봉봉님 천재... 퀴즈도 다 맞히시고ㅋㅋ 저 오엑스 퀴즈 끝까지 살아남은 거 처음이에여ㅋㅋㅋ 내일도 또 하실래욤??]

[sjbcsjbc: 예]

서진은 그녀와 〈퀴즈퀴즈〉에서 내일 또 보자는 약속을 잡고, 풍족한 온라인 곳간을 떠올리며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띤 채 밤늦게 잠이 들었다.

***

가상 세계에서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현실의 우울한 악재는 끊이지 않고 해일처럼 몰려와 그를 덮쳤다.

“하아….”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인터넷 기사를 보던 서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며칠 전 미국에서 큰 테러가 일어나 그나마 회사 주력 상품이던 차량 엔진 오일의 수출이 막혀버린 것이다.

개미 먹이만큼 남아 있던 전의마저 상실한 사원들은 저마다 울적한 기분으로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회사와 제 앞날을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저, 팀장님… 드릴 말씀이….”

더 이상 조아상사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리 판단이 빠른 팀원 두 명은 그날로 사표를 던졌다.

딱히 붙잡을 명목도 없기에 새롭게 출발할 두 사람의 행운을 빌어주는 척했지만, 실은 퇴직금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유동 자금으로는 직원들 월급도 맞추기 힘든 실정이다. 아무래도 좆된 게 틀림없었다.

어제 그 밤톨이를 돈으로 환불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연쇄적인 악재로 녹초가 된 서진은 그날 김봉철과의 게임 약속을 까맣게 잊고, 퇴근하자마자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역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간단하게 샤워를 마친 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만에 쎄이월드에 접속했다.

뒤늦게 소녀와 했던 약속이 떠올라 쪽지함을 눌렀다가 쌓여 있는 쪽지를 보고 기함했다. 100개가 넘게 쌓인 쪽지는 발신인이 모두 같았다.

김봉철

님 왜 안 오세요?

무슨 일 있으신가요?

님.

혹시 베토벤 새끼가 무슨 짓 한 건 아니죠?

어디 아프세요?

지금 어디세요?

보시면 바로 답장 주세요.

쪽지를 읽다가 대체 베토벤 새끼가 누구지…, 하고 미간을 찌푸리던 서진의 머릿속에 잠깐 보았던 닉네임이 어렴풋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래도 얼마 전 그 악플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제발요.

심지어 마지막에 남긴 쪽지는 도착한 지 몇 분 흐르지도 않았다. 당황한 서진은 부랴부랴 답장 버튼을 누르고 키보드를 탁탁 두드렸다.

홍서진

아이쿠~ 미안염 봉봉님...

어젠 회사가 좀 늦게 끝나가지구ㅠ_ㅠ

바로 잠들었어여...;;

때마침 소녀도 접속해 있었는지 쪽지를 보내기가 무섭게 빛의 속도로 답장이 도착했다.

김봉철

어디 회산데요. 회사명이 뭐예요?

회사명은 알아서 뭐 하려는 거지…….

서진이 기분 전환을 위해 〈퀴즈퀴즈〉나 같이 하자며 말을 돌리자, 소녀도 별말 없이 게임에 접속해 주었다.

그날부터 서진은 김봉철과 매일 밤 쪽지를 주고받거나, 퀴즈를 풀며 온라인 공간에서 뜨뜻한 내적 친밀감을 쌓아갔다.

비록 텍스트지만 답글 하나로 베토벤과 쇼팽의 내장을 꺼내 잔인하게 토막 살인하던 소녀는, 서진의 앞에선 태어나서 비속어라곤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얌전하게 굴었다.

자꾸 반찬을 너무 많이 해버려서 집으로 보내주겠다거나, 회사 이름이 뭔지 물어본다거나, 틈만 나면 신상을 캐내려고 시도한다는 점만 빼면 대나무 숲처럼 편안한 안정감을 주었다.

서진은 차가운 텍스트에서도 따스한 체온이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점점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누구에게 보내지 못할 편지를 쓰는 대신 김봉철에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떠드는 날들이 많아졌다.

서진은 저도 모르게 회사를 특정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흘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업무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도 신나게 떠들어댔다.

오늘도 소녀와 함께 퀴즈 게임을 하는 동안, 배경 음악처럼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다음 곡을 소개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다음 곡은 어… 터보 노래네요. 음… 씨버 러버(cyber lover).” 」

비록 디제이가 ‘싸이버 러버’를 ‘씨버 러버’라고 잘못 읽긴 했지만, 리드미컬하니 괜찮은 전주에 맞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

영하 10도에 가까운 겨울 날씨보다 더 차가운 현실은 생각보다 빠르게 위기가 찾아왔다. 어젯밤, 조아상사 해외 지사에서 근무 중인 아버지에게 이번 달 직원들 월급 지급이 밀릴 것 같다는 소식을 받은 것이다.

말은 “밀릴 것 같다”고 했지만, 회사는 이미 회복할 수 없는 시꺼먼 나락으로 추락 중인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당장 길바닥에 나앉는 게 아니라 나뒹굴 만큼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다.

다음 날 서진은 어쩔 수 없이 회의실에 사원들을 모아 놓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밀린 월급에 대해 입을 열어야 했다.

“이번 달 내로 꼭 입금해드릴 테니까, 다들 걱정 마시세요.”

당황한 나머지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과 마세요라는 말이 섞여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못 미더워하는 사원들의 미심쩍은 시선과 의심 가득한 눈빛이 화살처럼 날아와 온몸에 푹푹 꽂힌다.

좆됐다.

사실 지금 회사 상황을 가장 잘 알고 못 미더워하는 사람은 서진 본인이었으니.

어영부영 긴급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자, 신입 사원 종팔이 서진이 좋아하는 봉봉봉 음료수를 슬쩍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한마디 건넸다.

“팀장님. 저는 걱정 안 합니다.”

“어? 어어… 종팔아. 고마워.”

나는 엄청 걱정되는데…. 라는 말을 목구멍 아래로 누르며 어색하게 대꾸했다.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진은 결국 불안한 마음에 쎄이월드 쪽지함에 들어가 김봉철을 찾았다.

지금까지 근무 시간엔 한 번도 쪽지를 보낸 적이 없었지만 왠지 지금은 뭐라도 보내야 마음에 안정이 올 것 같았다.

순간, 멀리 앉아 있던 박 대리가 별안간 의자를 박차고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티, 팀장님…!!”

서진은 설마 그새 쎄이월드에 들어간 걸 들켰나 싶어 잽싸게 닫기 버튼을 누른 다음 그녀를 바라보았다.

“JS유통에서, 우리 회사랑 하, 합병에 관한 미팅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이게 뭔 개소리냐는 황당한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JS유통…? 그 대기업… J-마트?”

“대표적인 게 마트고 요새 다른 사업도 많이 하던데요. …그 주유소 J-Oil도 거기 거고요.”

“걔네가 우리 회사를 알아? 어떻게??”

일하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에 놀란 사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혹시 모를 설렘으로 사무실이 잔뜩 긴장된 분위기였다.

“당장 대표님한테 한국에 들어오시라고 연락….”

당황한 서진이 멍한 얼굴로 일단 전화기부터 손에 들었다.

당장 회사가 파스스 재가 되어 사라지기 일보 직전인 데다, 직원들 월급도 밀린 상황에서는 마지막 동아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 그게 대표님이 아니라…… 홍 팀장님하고 이야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해 여름

집으로 돌아와 노란 장판 위에 드러누운 서진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좍 펴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번호가 적힌 쪽지를 꼭 쥐여주던 아주머니의 손은, 항상 따뜻한 철과 달리 얼음장인 데다 흔히 말하는 물 한 방울도 안 묻혀 본 손 같았다. 그 고운 손 위로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피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눈물이 아니라 마스카라가 번진 검은 눈물이었지만.

“생각 정리되믄 낼까지 이짝으로 연락 줘요. 난 서진 씨 얼굴만 봐도 영특한 사람인 거 믿어.”

나중에 거울을 보면 기함할 만한 새까만 눈물 자국을 뺨에 매단 아주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은, 서진의 얼굴보다 더 영특했다.

거기엔 강요도, 협박도 없었다. 모든 결정은 네가 내렸다는 것처럼 선택지를 던져주고, 물리적인 조건까지 얹어 더 완벽한 배신을 의도했으니까.

갑자기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멍한 정신에 찬물을 끼얹었다.

“홍 사장 아들내미 계신가.”

모든 일은 마치 톱니바퀴의 톱니가 맞물리는 것처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처음부터 잘 짜인 판에 걸려든 것처럼. 그 끝은 결국 한 가지 결말을 종용한다.

“아이고. 안 계신가 보네?”

삼류 영화 속 양아치처럼 빈정거리는 남자 목소리에 이어서 쿠당탕, 쨍그랑, 무언가를 발로 차고 깨부수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이, 썩을 놈으 자슥이! 여가 으디라고!”

“하이고 영감탱이. 여기가 어딘데. 여기 뭐 돼?”

또 한 번 우당탕 넘어지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린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할아버지 목소리에 돌처럼 굳어 있던 서진의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끼익. 낡은 경첩 소리를 내는 방문을 열고 나오자, 가장 먼저 흙바닥에 쓰러진 할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아연실색한 서진이 힘이 빠진 다리를 휘청거리며 쓰러진 할아버지를 향해 달려갔다.

흙바닥에 부딪힌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쓰러진 할아버지의 머리를 받히고 맥박을 확인하려 할 때, 별안간 머리채가 잡혀 목이 휙 뒤로 젖혀졌다.

“아악!”

머리 가죽을 뜯을 듯이 막무가내로 잡아당기는 손에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서진이 시선을 돌려 남자를 쏘아보자, 그가 손에 쥔 동그란 머리통을 가지고 놀듯이 좌우로 흔들어댔다.

마치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역할에 충실한 악역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등장한 남자는, 이미 서울에서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사채업자 중 한 명이었다.

“왜 나한테 이래요.”

서진이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보며 따졌다.

“왜긴 왜야 이 쌍년아. 부모가 돈 안 갚고 증발했으면 자식이 장기를 팔아서라도 갚는 게 도리라고 학교에서 안 가르치던? 연대 책임. 연대 책임 몰라?”

씹… 그런 걸 배웠었나….

학교 수업에 충실하지 못했던 서진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에서 놓지 않은 남자가 별안간 개구리 같은 얼굴을 불쑥 들이밀더니 삐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 거무죽죽한 입술이 벙긋거리며 비웃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장기를 뗄 게 아니라 아예 그쪽으로 팔아넘겨야 하나….”

꽉 맞물린 톱니바퀴가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쩌면 애초부터 정해져 있던 결말에 조금 빨리 당도할 뿐인지도 모른다.

“글쎄, 누가 사내놈끼리 연애질을 하더라고, 차 안에서.”

기회를 기다리던 맹수에게 쫓겨 달아날수록 낭떠러지 절벽으로 몰린다.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거센 소용돌이는 한순간에 서진을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었다.

***

그해 여름은, 살면서 병원을 가장 많이 드나든 때라고 할 수 있겠다.

띡― 띡―

일정하게 울리는 심전도 기계음이 왠지 모를 안정감을 주었다.

병실 침대 옆, 간이 의자에 앉은 서진은 굳은살과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얇은 피부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 미약한 손길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할아버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모습을 드러낸 탁한 눈동자가 그에게 향했다.

“…죄송해요….”

시선을 느낀 서진이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괜히 아무 상관 없는 할아버지까지 집안 사정에 휘말려 버렸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쪽으로 도망치는 게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후회되는 순간이다.

“…뭣이. 잘못은 느이 부모랑 그 쌍것이 저질러브렀제.”

“할아버지… 철이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죽을 때까지. 네?”

떨군 고개를 쳐든 서진이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기 시작했다.

“느자구 없는 자슥.”

할아버지의 힘없는 딱밤이 서진의 이마에 툭 닿았다. 아프지도 않은데 뜨거운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며 바짓가랑이를 적신다.

“서진아.”

맞잡고 있는 손에 힘이 꽈악 들어갔다.

“누구헌테 피해준 거 없으믄 후진 것들 눈치 볼 거 한나도 읎어. 좋은 사람하고 같이 있기도 짧은 게 인생인께.”

몸을 살짝 일으킨 할아버지가 링거가 꽂힌 나머지 한 손으로 서진의 뺨에 흐르는 뜨뜻한 물기를 닦아주며 말을 이었다.

“니 좋은 대로. 니 쪼대로 살어. 알긋냐잉.”

황혼에 접어들었기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통달한 말이었다.

“할아버지….”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던 서진은 결국 할아버지를 와락 끌어안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근데 그게 안 된대요….”

라고 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면서. 할아버지의 말을 깨닫기엔 그는 아직 한참 어렸다.

한참 동안 짭조름한 눈물 콧물을 쏟아내고 병실을 빠져나온 서진은 비척비척 걸어 병원 밖으로 향했다.

어느새 이렇게 해가 짧아졌는지 까맣게 어둠이 내린 바깥은 벌써 쌀쌀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고작 며칠 전까지 열심히 세웠던 계획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는지 깨닫게 된 그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흘렀다.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이듬해 여름이 올 때까지도 여기 있겠다고.

누군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끈을 묶어주었던 운동화가 아무도 없는 공중전화 부스 앞에 멈춰 섰다.

뒤적뒤적 주머니를 뒤져 찾아낸 동전들을 투입구의 뚫린 모양에 맞춰 집어넣었다. 50원, 100원짜리 동전이 넘어가며 댕그랑 소리가 맑게 울린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쪽지를 꺼내 든 서진은 종이에 적힌 번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버튼을 꾹, 꾹, 누르기 시작했다.

***

그날 밤 짐을 싸기 위해 초가집에 돌아왔을 때 서진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부산에서 내일 돌아온다던 남자가 마루에 떡하니 앉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진을 발견하자마자 커다란 몸을 벌떡 일으킨 철은 쏜살같이 다가와 그를 품에 껴안았다.

대체 어디 갔었냐고, 서진을 애타게 찾아다닌 남자는 고작 몇 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염병 블루스였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잠깐 입원하셔서…. 근데 철아. 너 내일 저녁에 온다고 하지 않았어?”

간신히 그의 품에서 빠져나온 서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보고 싶어서.”

철은 무뚝뚝한 이름과 달리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보고 싶어서 도망쳐 나왔다는 철없는 대답을 들려주었다.

“들어와.”

부드럽게 입술 끄트머리를 올린 서진이 그를 제 허름한 방으로 잡아끌었다.

울퉁불퉁한 노란 장판이 깔린 작은방이 호화로운 왕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어와 쑥스러워하는 남자는, 항상 뭐가 그렇게 조심스러운지 도통 먼저 덤비는 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진이 먼저 철의 목에 팔을 걸고 도톰한 입술에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살짝 입술을 열어주자, 익숙한 혀가 입 안을 파고들며 야들야들한 살점을 훑고 타액을 슬쩍 훔쳐 간다.

젤리처럼 말캉한 입술과 혀가 부드럽게 섞이고, 자연스럽게 몸이 뒤로 넘어가더니 뒤통수를 덮은 커다란 손이 먼저 바닥에 닿았다. 서진을 눕힌 그는 열에 들뜬 얼굴로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다가, 붉은 혀를 뽑아갈 것처럼 쪽쪽 빨아당겼다.

“하아, 읏.”

서진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추고 철을 꼭 끌어안은 채 서로의 입술이 산소 호흡기라도 되는 것처럼 절박하게 키스했다. 꼭 오늘 밤이 마지막인 것처럼.

잠깐 입술이 떨어지면 귓가에 들뜬 숨보다 더 뜨거운 고백이 닿았다.

사랑해, 서진아… 사랑해.

그러다가 또 고백보다 열렬한 입맞춤이 젖은 소리를 내며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냥 시간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첫사랑에 빠진 두 청년은 정신없이 입술을 비비고 코를 비비다가 또 이마를 맞댔다.

“서진아.”

아마 바라보는 눈빛에도 온도가 있다면 얼굴이 다 타버려 재가 됐을 것이다.

“나는 부모님은 없어도 살 수 있는디, 니 없으믄 못 살어.”

이래서 아들놈은 키워봐야 아무 소용 없다고 하나 보다. 부모 맘도 모르고 웬 후레자식 같은 소리를 잘도 해대기에 서진의 입가에서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짜로 인제 니 없으믄 못 살어….”

자신의 비밀을 고백하듯,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귓가에 속삭이던 그가 동그란 귓불을 입에 물고 쪼옥 빨아당겼다. 낯간지러운 웃음을 터뜨린 서진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당겨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쪽쪽거리다 못해 쭙쭙거리며 혀와 입술을 빨아당기는 동안, 철이 느슨한 천 자락 안에서 터질 듯이 발기한 성기를 서진에게 들이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사귀는 동안 잠자리를 했어도 틈날 때마다 하는 거였는데, 아쉬운 일이다.

정말로 자신과 했던 섹스가 별로였던 건지. 왜 한 번을 안 덤비는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철아… 나 하고 싶어….”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사이로 젖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서진은 긴장한 듯 움직임을 멈춘 철의 아랫도리에 손을 집어넣고 딱딱하게 부풀어 오른 살덩이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를 졸랐다.

“해줘, 넣어줘, 그냥.”

애타게 조르는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시방… 암껏도 없는디….”

“괜찮아. 그냥, 그냥 해.”

정말 괜찮다는 듯, 단단한 기둥을 쓰다듬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대답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서로의 옷을 찢을 듯이 급하게 벗겨낸 다음 순식간에 나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었으니까.

“하아… 서진아….”

“아으… 윽…!”

반쯤 풀린 눈으로 서진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조급함으로 이미 이성을 잃은 듯 보였다.

솔직히 그날의 감각을 떠올리면 그냥 넣어달라고 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할 만큼 미치게 아팠고, 사무치게 슬펐다는 감상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아…. 하윽….”

“으읏, 아, 아흐윽…!”

침과 쿠퍼액을 윤활제 삼아, 제대로 풀리지 않은 구멍을 급하게 밀고 들어오는 좆 기둥에 몸이 반쪽으로 쪼개지는 것 같았다. 서진은 극한의 아픔 속에서 그가 느낄 쾌락만 생각하며 겨우 버텼다.

“하… 철아. 네가, 좋았으면… 좋겠… 아윽!”

“흐읏… 서진… 아….”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자신을 꾸역꾸역 쑤셔 넣던 남자가 살살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성기에 꽉 들러붙은 속살이 구멍을 드나드는 기둥을 따라 그대로 밀려 들어갔다가 딸려 나온다.

서진은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고통에 어금니를 꽉 깨물고 비명을 참았다. 그저 그가 기분 좋기만을 바랐으니까. 무아지경에 빠져 헉헉 뜨거운 숨을 뱉는 남자는 끊임없이 입술을 맞추며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퍽, 퍼억, 퍼억….

뜨거운 혀가 난잡하게 섞였다. 키스에 흠뻑 빠진 철이 잠시 허리 짓을 멈춘 순간, 다급하게 입술을 떼어낸 서진이 물었다.

“느낌… 좋, 아?”

그 목소리에 꽉 감고 있던 눈꺼풀을 열고 시선을 맞춘 철이 얼핏 물기를 머금은 눈빛으로 대답했다.

“…사랑해….”

정말 자신과 하는 섹스는 느낌이 별로인 건지, 좋냐고 물어보는 질문에도 대뜸 사랑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예전에 자신과 잔 게 별로라고 했던 남자의 말을 못내 신경 쓰고 있던 서진의 눈에 결국 아롱아롱 눈물이 고였다.

마지막으로 그가 기분 좋았으면 했는데…….

사랑한다는 말을 끝으로 다시 무자비한 추삽질이 시작됐다. 퍽, 퍽, 두 사타구니가 사정없이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으응! 하, 으으윽…!”

오늘로 마지막인데, 정말 좋지는 않은 거냐고. 대답을 듣지 못한 아쉬움에 끝내 서진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서진은 두꺼운 몽둥이에 꿰뚫려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아픔과 슬픔의 눈물을 펑펑 흘렸다. 섹스의 좋은 점은 슬퍼서 엉엉 소리 내 우는데도 티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흐으윽…! 아 흑… 아흐으….”

서러움에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른다. 철은 그 눈물을 진득하게 혀로 핥아 먹으며 거센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아, 으응, 아, 아…!”

“흡…!”

낮은 단마디 신음과 함께 뜨거운 물이 안쪽을 때리며 세차게 쏟아져 내렸다. 두꺼운 성기가 주르륵 빠져나가는 순간, 발갛게 부어오른 구멍에서 끈적이는 하얀 정액이 꿀렁꿀렁 흘러넘친다. 희뿌연 액을 끊임없이 뱉어내는 구멍을 지켜보던 남자는 참지 못하고 갈급하게 입을 맞췄다.

“으읏.”

“서진아….”

열에 들뜬 목소리로 서진의 이름을 부른 철은 급하다는 듯, 다시 딱딱하게 세워진 성기를 아직 다물리지 않은 구멍에 맞추고 쑤욱 밀어 넣었다.

“응…! 아응! 아! 흐윽…!”

밤이 샐 때까지 커다란 살덩이는 한 번도 서진의 안에서 빠져나가지 않았다. 몇 번이고 뿜어져 나온 뜨거운 물이 안을 가득 채우고 하얀 거품이 되어 흘러넘칠 때까지.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땐 이미 중천에 뜬 밝은 햇빛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는 동안 철이 몸을 깨끗이 씻겨 주었는지 하반신이 몽둥이에 맞은 것처럼 찌뿌둥한 것만 빼면 나름 상쾌한 기분이다.

고개를 돌리면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잠든 잘생긴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철의 잠든 얼굴을 입술 끝으로 살살 간지럽혀 보았다.

“…….”

그 장난질에 부스스 눈을 뜬 철이 서진을 보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에 화답하듯 씨익 입꼬리를 올린 서진이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웠다.

“철아… 철아, 일어나봐.”

“…응?”

남자는 이미 일어났다는 듯 짙은 눈썹을 위로 들썩였다.

“배고파.”

“뭐 묵을까?”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지은 철이 눈앞에 보이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으며 묻는다.

“해운대에, 그 줄 서서 먹는다는 만두 있잖아. 전부터 그거 먹고 싶었거든. 지금 사다 주라… 빨리.”

서진은 어제 부산에서 도망쳐 온 남자에게 일어나자마자 부산까지 가서 먹을 것을 사 오라는 느자구 없는 소리를 뱉었다. 집 앞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다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처럼 씩 웃은 남자가 바로 몸을 일으키더니 옷을 걸쳐 입었다.

“금방 갔다 올란께.”

여전히 이불 속에 누워 있는 서진의 이마에 버드 키스를 쪽 남기고 한마디 남긴 철은 급한 일이 생긴 사람처럼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방에 가만히 앉아 바깥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서진은 잠시 후 차가 멀리 사라지는 소리를 듣자마자 미친 듯이 캐리어 안에 짐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 만에 짐을 정리하고, 종이와 펜을 찾아 삐뚜름한 글씨체로 쪽지를 남긴다.

집에 가서 음성 메시지 들어

서진이 말하는 음성 메시지는 어제 공중전화기로 미리 남긴 것이었다. 그 안엔 온갖 쓰레기 같은 내용으로 가득했다.

집에서 정해준 집안 아가씨와 선을 보고 결혼하기로 했으니 자신은 그만 잊어달라거나, 호모라는 게 들킬까 봐 찝찝해서 못 만나겠다거나, 사랑하면 그냥 보내달라거나…….

여태껏 평소에 그에게 얼마나 이기적으로 굴었던지, 사이코 같은 말을 늘어놓는데도 이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어쩌면 다행이었다.

고개를 들고 마지막으로 조그만 방을 한 번 둘러본 서진은 마음속으로 인사말을 삼켰다. 할아버지도, 마을 아줌마 아저씨들도, 안녕히 계세요….

서진은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캐리어를 끌고 바깥으로 나갔다.

그다음엔 차를 타고 시내로 빠져나와 어제 약속했던 장소에서 철의 어머니를 만났다.

앞으로 아드님이랑 만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고, 돈은 그거랑 별개로 빌려 달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갚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눈물을 머금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어머니는 혹시 몰라 준비했다며 서진의 손에 뻔한 미국행 비행기 표까지 쥐여주었다.

그 후에는 빚쟁이에게 빚을 갚고, 그의 어머니가 준 비행기 표로 한국을 떠나 잠시 여행을 했다.

비록 호텔 방에 처박혀 울기만 하는 날들을 보냈지만, 어쨌든 미국의 럭셔리한 호텔 방에서 울었다. 매일 보내지 못할 편지 위에 눈물 콧물을 뚝뚝 흘려가며 울었다.

짭조름한 물방울이 아직 마르지 않은 잉크 위에 뚝뚝 떨어져 글씨가 희미하게 번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볼 일 없는 쓰레기에 불과했으니.

그에게 진짜 편지를 보낸 건 3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조아상사 출장으로 방문한 하와이에서 찍은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였다. 결국 몇 달을 손에 쥐고 고민하다가 사진 뒷면에 쓰레기 같은 인사말을 적어 보냈다.

잘 지내지?

하와이로 신혼여행 왔는데 정말 좋더라.

너도 나중에 결혼하면 꼭 가 봐.

물론 보내고 나서 바로 후회하긴 했지만.

그해 여름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 비록 치기 어리고, 이기적일지언정 순수한 마음만으로 벅찼던 시간.

어쩌면 미숙했던 첫사랑이었기에 회한이 깊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순 거짓말로 가득한 글자 속, 첫마디 짧은 문장에 몇 년간 쌓이고 쌓인 모든 인사를 담아 보냈다.

‘잘 지내지?’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3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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