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13/26)

6.

다행히 산에서 굴렀을 때 뼈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곳은 없었는지 서진이 병원에 입원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사실 바로 퇴원해도 될 만큼 아무렇지 않았지만 하루만 더, 하루만 더, 병원에 있기를 신신당부하는 연인 때문에 꼼짝없이 입원해 있었던 탓이다.

그래, 연인.

분명 연인인데…… 점점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중이었지만.

“철이 니 뭣 하냐?”

“뭣이.”

서진이 병원에서 퇴원한 지 일주일이 흐른 어느 날, 두 사람이 할아버지와 함께 초가집 나무 마루 위에 앉아 아침밥을 먹던 차였다.

참다못한 할아버지의 숟가락이 철의 반듯한 이마 위에 딱 소리 나게 떨어지며 조용한 밥상 위에 말문이 트였다.

“비둘기여 뭐여? 뭘 자꾸 떨어진 걸 줏어 처묵고.”

그도 그럴 것이, 칠칠치 못한 서진의 입에서 밥풀이 떨어지거나 반찬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철이 0.1초 만에 쏙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갔으니.

과장을 조금 보태서, 서진이 흘린 음식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아, 아까운께 그라제.”

철이 벌게진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변명했다.

“쯧, 있는 놈이 더 해브러.”

남의 입속에 들어갔다 나온 쌀 한 톨도 소중히 여기는 농부의 마음을 모르는 할아버지가 다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식사를 시작했다.

좁은 밥상을 가운데 두고 세 남자가 둘러앉아 있는 터라 양반다리로 앉은 서진의 무릎이 자꾸만 철의 허벅지에 닿았다.

그때마다 철은 긴장으로 바짝 조여든 몸을 슬그머니 뒤로 물리고는 했다. 딱히 할아버지의 눈치를 본 건 아니고, 그냥 원래 그랬다.

마치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다고 할까. 예전처럼 새벽부터 반찬을 해다 바치거나 고추밭 농사를 도와주는, 그런 평화로운 날들의 반복이었다.

농사일을 마치고 혼자 방바닥에 드러누운 서진은 답답함에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 씨…. 뭐야 대체…”

정리해 보자면, 천둥 번개가 치던 날 사랑한다는 고백에 이게 내 진심이라며 입술 박치기를 하고…… 끝.

그리고 놀랍도록 아무 일도 없었다. 디 엔드.

“하아….”

한숨을 내쉰 서진은 노란 장판에 뺨을 갖다 붙이고 붕어 입을 한 채 생각에 빠졌다. 연인이 꼭 참모 총장을 모시게 된 이등병처럼 자신을 대하면서, 연애는 고사하고 어쩌다 손끝이 스치기만 해도 화들짝 놀라 피하기 바빴으니….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사귀는 게 맞긴 한 건지 기본적인 의문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서진아.”

바깥에서 논란의 주인공 목소리가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서진이 양손으로 빠르게 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어? 어어….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

서진은 말해놓고 바로 후회스럽게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다가 마치 오랜만에 만난 불편한 동창생처럼 대해버렸다.

“…쪼까 걸을래?”

“어? 어어. 잠깐만, 옷 좀 갈아입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은 서진은 곧장 캐리어를 뒤집어엎고 어지러운 옷더미 속에서 가장 멋진 옷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몸에 대보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꾸민 것 같고, 이건 지난번에 입었고, 이건 좀 유행에 뒤처지지 않나.’

첫 데이트에 맞게 내추럴하면서도 임팩트 있는 게 필요하다. 결국 열 벌도 넘게 옷을 갈아입은 끝에 고른 것은 그냥 원래 입고 있던 옷이었다.

드라이기를 이용해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슬쩍 뒤로 넘기고 립밤을 치덕치덕하게 바르니 만두 한 접시를 처먹은 것처럼 입술이 번들거렸다. 거울을 보는 얼굴에 만족감이 그득하다.

서진이 바깥으로 나온 건 무려 한 시간이 넘게 흐른 뒤였다. 마당에 서서 그를 기다리던 철은 방에서 나오는 서진을 발견하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한 시간 전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눈빛을 전혀 다르게 해석한 서진이 ‘응? 네 애인 잘생겼지?’ 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자.”

놀란 것도 잠시, 금세 씨익 미소를 입에 머금은 철은 서진을 데리고 조용한 시골길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없는 길을 말없이 걷는 동안 발밑에 작은 돌멩이들이 밟히는 소리와 풀벌레 찌르르 우는 소리가 귓가를 채웠다.

‘왜 이렇게…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는 거지?’

설마…….

음탕한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려는 찰나, 별안간 철이 서진을 멈춰 세우더니 난데없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 여기서?”

당황한 서진이 두 손으로 제 중요 부위를 살포시 가렸다.

아무리 아무도 없어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뻥 뚫린 길바닥에서…, 이거 완전 변태….

“끈 풀렸는디.”

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더니 바로 고개를 숙이고 서진의 운동화 끈을 나비 모양으로 묶어주었다. 크고 다부진 손과 어울리지 않는 예쁜 모양이다. 괜히 눈알을 도르르 굴린 서진이 어색하게 인사했다.

“어어…. 고맙다.”

아쉽게도 그때는 그가 망설임 없이 흙바닥에 무릎을 꿇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새벽마다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가지고 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몰랐고, 폭우가 내리는 밤에 어떤 마음으로 산을 뒤지고 다녔는지, 무슨 괴력으로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성인 남자를 둘러업고 산에서 내려왔는지도 몰랐다.

그냥 주니까, 받았을 뿐이다.

그렇듯 어린 날의 홍서진은 좀… 씹새끼였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막 뛰었단 말이야. 근데 이따만 해. 진짜 멧돼지가 이따―만 해.”

“아따 겁나게 크고마잉. 그 정도믄 세계 신기록 아니냐.”

서진은 그와 걷는 동안 쓰잘데기없는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들어대며, 멧돼지를 표현하기 위해 양팔을 쫙 펼치고 허공을 크게 갈랐다.

어느덧 하늘 밑에 걸린 석양이 두 남자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뜨거웠던 여름도 끝물인지 시원한 바람에 머리칼이 살랑살랑 흔들거렸다. 붉은 고추를 수확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신나게 떠들던 서진은 문득 이대로 고추를 수확하고, 가을이 와서 뒷산에 단풍이 지고, 또 겨울이 와서 허연 눈으로 촌 동네가 뒤덮일 때까지 여기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봄이 오고, 이듬해 고추를 심을 때까지. 그러면 또 단풍이 지고, 눈이 덮이겠지.

아예 이곳에 평생 눌러앉을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두 개의 손등이 허공에서 살짝 부딪쳤다. 그러자 철이 불에 덴 것처럼 손가락을 황급히 움츠렸다.

그 순간 서진은 ‘이 새끼 뭐지’ 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연애를 하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집에 갈까?”

따가운 시선을 느낀 남자가 서진의 안색을 살피더니 당황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결국 빠른 걸음으로 초가집까지 다시 데려다준 뒤 떠나려는 그를 서진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잠깐 들어올래?”

서진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 불이 꺼진 할아버지 방을 흘끔 살피더니, 자신의 방을 턱짓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방으로 따라 들어온 커다란 남자는 왠지 교무실로 불려온 학생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후우. 참을성이 한계에 다다른 서진은 절대 안 하기로 다짐했던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철아. 우리 무슨 사이야?”

“…….”

“애인 사이 아니야?”

자신이 꺼낸 질문에 소름이 돋아 순간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내리칠 뻔했다. 이건 흡사 육체적인 접촉 후에 관계를 확실히 하지 않는 상대를 떠보는 질문이 아니던가.

그리고 한쪽이 이 질문을 던지면 열이면 열, 질문을 받은 쪽은 마음이 없는 게 맞았더랬다.

“니랑, 나랑…?”

그 말에 철이 황당한 표정으로 서진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이런, 씹.

“…그럼 난 이만.”

낯이 뜨거워지는 쪽팔림에 당장 이 방에서 뛰쳐나가야겠다고 생각한 서진이 몸을 돌리는 순간.

“크헙.”

커다란 남자의 손길에 다시 몸뚱이가 휙 돌아가더니,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머리가 처박혔다.

“…허억. …숨 막….”

서진은 커다란 품 안에서 버둥거리며 필사적으로 산소를 들이마셨다. 서진을 매우 소중하게, 그러나 으스러뜨릴 듯이 꽉 껴안은 철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진에 관한 일이라면 자존감이 지하를 뚫고 지구 내핵까지 파고 내려가는 철은 그날 밤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하도 이랬다가 저랬다가 오락가락하는 서진에게 여러 번 당하다 보니 그날의 입맞춤도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까 봐 혼자 속으로 전전긍긍하는 상태였다.

간신히 몸을 떼어내는 데 성공한 서진이 철과 눈을 맞추고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사귀는 거로 안다.”

“…꿈 같애….”

“이번엔 진짜야.”

서진이 입술 끝을 씩 끌어 올리더니 철의 도톰한 입술 위에 쪽,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언제나 그랬듯 가벼운 버드 키스를 시작으로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남자의 위에 올라타 쪽쪽,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물었다가 놓자 철이 뜨거운 혀로 서진의 입술을 갈랐다. 좁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치아를 훑고 혀 밑에 고인 타액을 전부 가져갔다.

혀를 쭉쭉 빨아당기기도 하고, 서진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것처럼 입술을 살짝 깨물기도 했다. 귓불을 쪽 빨고 목덜미를 지분거리며 온몸을 달큼하게 녹여버렸다.

쉴 새 없는 입맞춤 사이사이마다 ‘서진아 내가 더 잘할께’, ‘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줄께’, ‘니가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께’ 등등 온갖 호구 같은 대사로 추임새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느새 철은 서진을 바닥에 눕히고 뒤통수를 커다란 손으로 받친 다음 다시 쪼옥 입술을 맞댔다. 두 사람은 입술이 살짝 떨어지면 웃긴 것도 없는데 마주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알고 보면 첫사랑이야말로 미치광이버섯이다. 미치광이처럼 웃으면서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게 만들고, 환각처럼 상대를 우주에서 가장 예뻐 보이게 만드니까.

“서진아… 나는 니가, 너무….”

내내 눈을 떼지 못하던 그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손끝이 닿는 것조차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봄날에 하프를 연주하던 그 사람과 입을 맞추고 있다.

철은 미치광이버섯에 취한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으짜지.”

거시기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 아쉬워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게 뭐든, 모자랐다.

“나도 내가 좋아.”

서진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철딱서니 없는 소리에도 씩 웃음을 머금은 철은 사랑스러운 어린애를 보는 듯한, 아가페적 사랑이 담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쁜 거.”

쪽, 철은 다시 가볍게 입을 맞추고 커다란 손으로 보드라운 뺨을 쓸어내렸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아무도 보여주기 싫다.”

감히 쳐다보는 놈이 있으면 눈깔을 뽑아 버리겠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했다.

노란 장판이 깔린 좁은 방 안에서 두 사람은 밤새도록 끌어안고 뒹굴었다. 철의 아랫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돌처럼 딱딱하게 부풀어 있었지만, 키스 이상은 조금도 시도하지 않았다.

철은 진도가 너무 빠르면 금방 자신에게 질리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그저 마음이 통하는 입맞춤만으로도 황홀하다.

사랑해. 사랑해, 서진아. 사랑해. 입맞춤만큼 셀 수 없이 많은 고백이 정수리에, 콧잔등에, 목덜미에 뜨겁게 닿았다.

그날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짧고 긴 입맞춤은 밤이 새도록 끊이지 않았다.

까만 하늘에 서서히 동이 트는 것처럼, 한여름 밤의 꿈도 끝나가고 있었다.

짧디짧은 연애가 될 줄도 모르고, 어린 남자는 영원을 약속했다.

***

사귀기 전에 몰랐던 문제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다를 떠다니는 부표처럼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사실 첫 연애로 서진과 같은 사람과 사귀는 건 제 발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응… 으음….”

츕, 추읍, 질척한 소리가 좁은 차 안을 채웠다. 뜨거운 숨소리와 젖은 입술이 끈적이게 마찰하는 소리가 야릇한 라디오 방송처럼 흘러나왔다.

서진은 철의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가며 격렬하게 혀를 얽었다.

“하아… 서진아… 제, 발….”

강력 접착제처럼 딱 붙은 입술을 살짝 떼어내자, 은사 같은 침이 두 입술 새로 죽 늘어지며 애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가?”

“약속하란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 서진에게 애원하는 눈빛이 간절하다.

“약속할게.”

“그짓말.”

누가 들어도 성의 없는 대답이었지만 두 사람은 뭐가 좋은지 큭큭 웃으며 다시 축축한 입술을 맞댔다.

철은 생각보다 질투가 많았다. 사실, 질투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세상 모든 남자가 자신처럼 서진을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던가.

아마 서진이 조금이라도 웃어주면 전부 그의 스토커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정도에 가까웠다.

철은 다른 남자가 서진을 쳐다보면 칼같이 그 시선을 차단한 다음 죽일 듯이 노려보았고, 여자에게 잘해주는 게 몸에 밴 서진에게 다음부턴 그러지 않겠다는 허울뿐인 약속이라도 받아내려고 애걸복걸이었다.

가시나들이 오해한다면서.

물론, 약속이 지켜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고, 서진의 불만은 전혀 다른 데 있었다.

“읏… 서진아.”

“으응… 좋아…?”

서진은 일부러 그의 위에 올라타 목에 매달린 자세로 제 허벅지를 이용해 돌덩이처럼 딱딱한 자지를 마구 비비적거렸다. 이래도 안 넘어올 거냐면서.

“잠깐, 아….”

“응?”

철의 목 근처에 머리를 박고 있던 서진이 그의 귓바퀴를 혀로 할짝대며 속삭였다. 움찔움찔 떨리는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다.

“하… 그, 만…!”

순간 철에 의해 서진의 몸이 휙 떨어져 나갔다. 가쁜 호흡을 내쉬던 그가 서진을 가볍게 들어 조수석으로 옮기더니 뜬금없이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차 안에 혼자 남겨진 서진은 썩은 감 씹은 표정으로 바깥에서 숨을 고르는 남자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차를 세워놔서 망정이지, 100m 밖에서도 보일듯한 말자지가 빳빳하게 서 있는 채였다.

그러면 무얼 하나. 철은 사귄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키스 이상의 진도를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진도는커녕 틈만 나면 끌어안고 너무 소중하다는 개소리만 해대고는 했다.

‘인제 그만 소중했으면 좋겠는데….’

물고 빨고 할 거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또 숫총각인 척 구는 걸 보니, 어쩌면 처음이라고 했던 것도 거짓말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생길 판이었다.

부드럽게 온몸을 만지는 손길과 쪽쪽 빨아대는 혀, 무엇보다 꽉 막힌 천장에서 밤새도록 은하수 별천지를 보게 한 허리 짓은 분명…….

여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서진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에 올라탄 그를 오뉴월의 서리가 내릴 것 같은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그 표정에 당황한 듯 서진의 안색을 살피던 철이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와 또 씅났어.”

눈부시게 해사한 얼굴에 오뉴월 서리도 사르르 녹아내린다. 미치광이버섯에 취한 것처럼 킥킥 웃음을 교환한 두 사람은 자석처럼 꼭 끌어안고 또 입을 맞췄다.

섹스가 없으면 뭐 어떤가. 이렇게 좋은데.

만나면 반갑다고 뽀뽀한다더니. 하여간 만나기만 하면 온종일 입술이 퉁퉁 부르틀 때까지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지금처럼 차 안에서, 아무도 없는 뒷산에서, 버려진 곳간에서, 할아버지가 잠든 초가집에서, 그의 집에서…. 어디든 사람만 없으면 꼭 끌어안고 쪽쪽거리기 바빴다.

그러다 보니 벌써 두어 번 정도 위기가 찾아온 적도 있었다.

“너거들 여서 뭣….”

“이, 이 나쁜 자식아!!”

뒷산에서, 평소처럼 그의 위에 올라타 입을 맞추던 서진이 예고 없이 등장한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미약한 주먹을 퍽 날렸다.

그러고는 익숙하게 철의 멱살을 틀어잡은 다음 앞뒤로 흔들며 소리쳤다.

“뭐? 애인이 있는 여자를 뺏겠다고?”

주먹 하나로 저보다 한 뼘이나 큰, 190이 넘는 거구를 쓰러뜨린 듯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아따, 철이 니 고로코롬 안 봤는디.”

인상을 팍 찌푸린 할아버지가 중얼거리며 혀를 내둘렀다.

또 한 번은 버려진 곳간에서. 그날도 정신없이 뒤엉켜서 축축한 입술을 맞대고 있을 때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철이랑 옘병 총각 여서 뭣….”

“야 이 자식아!!”

야릇한 소리는 금세 서진이 제 손바닥을 철의 뺨에 대고 철썩! 내려치는 소리로 탈바꿈했다.

“오메 놀래라.”

마침 농기구를 찾으러 왔던 영옥이 놀란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미영이는 이제 결혼한 유부녀라고! 정신 차려!”

“왐마? 그것은 겁나게 거시기해불제. 기여, 철이 니 증신 차려라잉.”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린 영옥은 행여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그를 타일렀다.

덕분에 마을에서 철의 이미지는 어느덧 임자 있는 여자만 밝히는 호색한으로 바뀌어 가는 것 같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좋아도 너무 좋았다.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은 뒤로하고 입가에 봄날의 벚꽃 같은 미소가 만연했다.

밭일을 일찍 마친 날에는 시내로 나가 평범한 연인들처럼 데이트를 즐기기도 했다. 비록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고, 팔짱을 낄 수도 없었지만,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는 어떤 연인보다 뜨거웠다.

말 그대로 예뻐 죽었다. 상대가 너무 예뻐서 어떻게 할 줄 몰라 안달이 났다.

한번은 텅 빈 영화관의 맨 뒷자리에 앉아 또 몰래 입을 맞추기도 했다.

“시방 누가 자꾸 쪽쪽거려싸?”

앞자리에 혼자 앉아 있던 여성이 번뜩이는 눈으로 범인 물색에 나서자, 놀란 서진이 철을 끌고 빛의 속도로 영화관에서 도망쳐 나왔다.

키스 귀신이라도 붙은 것 같은 나날이었다. 키스를 못 하면 죽는 병에라도 걸렸거나.

알고 보니 철은 10시간을 1분으로 바꾸는 마법을 부릴 수 있었다. 아침 해가 뜨자마자 만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늘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시내에서 짧은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느덧 짧아진 노을이 차 안을 붉게 물들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은 해가 지고 나면 금세 가을 날씨처럼 쌀쌀해졌다.

다음 주부터는 새빨갛게 잘 영근 고추도 차례대로 수확해야 한다.

진짜로 고추를 수확할 때까지 여기 있게 될 줄은 몰랐지만 지금은 이듬해도, 그다음 해도, 앞으로 50년 동안 먹을 고추를 수확할 때까지 무기한으로 이곳에 머물 생각을 하면 히죽 행복한 웃음이 나왔다.

“단 거 자꾸 먹지 말어. 몸에도 안 좋은 거.”

조수석에 앉아 하드를 쫍쫍 거리며 빨고 있는 서진을 보던 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마디 던졌다.

“너도 먹을래?”

서진이 운전하는 그를 향해 하드를 내밀었다.

끼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춰선다. 철은 상체를 숙이고 서진의 입술을 혀로 가르더니, 입 안을 샅샅이 훑어 달큼한 아이스크림 잔해를 넘겨받았다.

“겁나 맛있네.”

맛을 음미하듯 윗입술을 슥 핥은 철이 눈가를 가늘게 접었다.

두 사람은 하드 하나가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야무지게 나누어 먹은 뒤, 늘 그랬듯 마지막엔 철의 집에서 그가 차려주는 진수성찬으로 배를 채웠다.

밥을 먹고 나면 소파에 앉아 같이 게임을 하고, 그러다 또 소파에 누워 격렬하게 키스했다.

모든 것이 차고 넘치도록 행복하고, 풍족하다. 완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인제야 몸소 실감한다.

“서진아.”

꼭 끌어안은 자세로 서진의 눈가를 찌르는 머리카락을 살살 넘겨주던 철이 입을 열었다.

“나랑 살자.”

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마에 도톰한 입술이 닿았다.

“내가 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줄께.”

또 쪼옥, 콧잔등에 부드러운 입맞춤이 떨어졌다.

“평생 니 모시고 살께….”

철없는 한낱 어린애의 치기 어린 말들도, 이 남자가 하면 속이 투명하게 비치는 맑은 물처럼 진실하게 느껴졌다.

픽 웃음을 터뜨린 서진은 냉큼 그의 위에 올라타 똑같이 이마에, 콧잔등에 입을 맞추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너랑 살래.”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안락한 안정감을 주는 커다란 품에 꽉 끌어안긴다.

그때 불현듯 저 멀리서, 아무도 건드릴 일 없는 현관문이 달그락거리는 차가운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2000年 (2)

“……올 3분기 연결 기준 영업 이익은 302.7% 증가해서 사상 최대 실적입니다. 대전 지점도 출점 두 달 만에 매출 목표 50%를 초과 달성했고요.”

“수고하셨습니다.”

“참, 사장님. 오늘 오후 1시에 ‘서울 파션쓰’랑 미팅 잡혀 있습니다.”

“예.”

보고가 끝났으면 어서 가보라는 듯,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남자의 얼굴에 성가신 기색이 역력했다.

대개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넘기고 있으면 직원들은 더 이상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으니.

철은 괜히 흰 종이에 빼곡하게 타이핑된 글자들을 읽는 척하며 팔랑팔랑 종이를 넘겼다. 솔직히 이 망할 놈의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든 먼지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잠시 후. 대충 시간에 맞춰 나온 철이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 시끄러운 엔진 배기음이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뭔 빠션쓰인지 빤쓰인지 거시기 회사의 유상증자에 참여하기로 한 것 같긴 한데, 사실 아무 생각이 없다.

그가 떠나던 날 순수한 사랑과 함께 철의 영혼도 까만 심연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날 이후로 3년을 병신처럼 살았다. 아니, 살았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하루하루 ‘차라리 죽이고 가지.’라는 원망이 썰물처럼 불어났다. 그가 떠밀고 간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숨 쉴 때마다 파고드는 새까만 잿더미 같은 감정들에 잠식되었다.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데 깨어나면 병실 천장이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아직 실낱같은 무언가를 놓지 못한 건지, 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3년 만에 그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유행하는 캐릭터 스티커로 마무리한 예쁜 봉투 안엔 뒷면에 짤막한 인사말이 쓰인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발신지가 엉망으로 적혀 있어 어디서 보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봉투에 붙인 특이한 우표를 알아보니 서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날은 사진 속 남자를 보며 밤새도록 수음했다.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그 얼굴을 제 정액으로 더럽히고 싶어서 투명한 비닐을 깔아놓고 몇 번이고 희뿌연 액을 뿌려댔다. 말 그대로, 별짓을 다 했다.

다음 날 철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서울에 있다는 보장도, 아무 계획도, 목표도 없었다.

될 놈은 뭘 해도 된다고 하던가.

무엇이든 정신을 조금이라도 빼놓기 위해 시작한 유통 회사는, 2년 만에 업계 1위를 갈아치우더니 필요 이상으로 몸집이 커져버렸다.

아무거나 집중할 것을 찾아 온종일 일만 하고 있으니 사업만 점점 더 번창하게 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최근 1년은 그냥 직원들에게 수고했다는 말만 했을 뿐인데 회사가 알아서 척척 돌아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직원들은 소처럼 일만 하는 사장을 우러러보며 ‘나도 사장님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돼야지.’ 하는 애사심을 가슴 깊이 새겼다.

사실 철은 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여전히 6년 전 그 여름에 갇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하루하루 불구덩이 속에서 타 죽어갔다.

아니, 불구덩이보단 돈 구덩이 속에 파묻혀 질식해 갔다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수고했다는 말만 건넸을 뿐인데 전 분기 대비 영업 이익이 300%나 증가했다는 게 뭔 개소리인가.

철은 사랑한다는 말을 썼다 지운다는 가사의 애달픈 노래가 나오는 차 라디오를 바로 탁 소리 나게 꺼버렸다. 그러고는 오른손으로 클랙슨을 빠앙― 눌렀다.

신호가 바뀌어도 한참을 출발하지 않던 앞차가 인제야 시동을 걸고 엉금엉금 출발하기 시작했다.

왕복 10차선인 테헤란로는 점심시간에도 차로 붐비어 어지럽게 복작거린다.

겨울의 찬 바람이 부는 회색빛 도시는 모든 것이 느긋한 시골과 달리 24시간이 바쁘게 흘러갔다. 양복을 차려입은 직장인들이 저마다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신호에 걸려 잠시 차창 너머를 바라보던 까만 눈동자가 돌연 한 곳에서 멈췄다.

그리고 세상이 슬로 모션처럼 바뀐 건 순간이었다.

그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헛것인가.

동공이 크게 확장된다. 심장이 멎는다.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다. 클랙슨 소리가 시끄럽게 울리던 도로가 물속에 잠긴 듯 고요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그 사람의 얼굴밖에.

다른 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헛것을 많이 보긴 했지만 이번엔 느낌이 달랐다.

매일 보던 허상은 항상 사진 속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지금은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왼쪽 귀에 항상 하고 다니던 피어스도 없었다.

6년간 0.1초도 잊은 적이 없는 얼굴이다. 홍서진은 겨울의 눈 부신 햇살 아래서 한 번도 슬퍼한 적 없는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옛날 자신에게 그랬듯이 미성의 목소리로 조잘조잘 떠들고, 소리 내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걷고 있다.

순간 사나운 감정이 올라와 피가 들끓는다. 온몸의 세포가 뒤집혀 날뛰는 것처럼 속이 어지럽다. 무너지려는 정신을 겨우 차렸을 땐, 이미 그는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빵빠아앙―! 빠아아아앙!

“야 이 미친 새끼야!!”

망설일 것 없이 차에서 뛰어내려 5차선 도로를 가로지르자, 시끄러운 클랙슨 소리에 어우러진 살벌한 욕설이 귓전을 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눈으로 좇으며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을 뿐이다. 정확하진 않았지만 왠지 길 중앙에 있는 정체 모를 계단으로 내려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철은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을 휘청거리고 넘어질 뻔하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던 인파에 부딪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쌍욕을 처먹으면서 무작정 그를 쫓았다.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채로 저절로 움직이는 몸이 그를 이끌었다.

내려온 곳이 지하철역이었는지 두 방향으로 갈라지는 개찰구가 나왔다. 그는 마약 탐지견이라도 되는 것처럼 코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씨벌.”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순간 욕을 뱉은 철은 그냥 아무 방향으로 몸을 틀고 지하철 개찰구를 훌쩍 뛰어넘었다.

삑삐익!

역무원이 목에 걸린 호루라기를 불며 급하게 그의 뒤를 쫓는다.

무슨 놈의 계단이 이렇게 많은지, 흐릿한 눈앞에 또 한 번 계단이 튀어나왔다.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평일 점심인데도 불구하고 역 안은 많은 사람으로 복작복작했다. 철은 거친 숨을 내쉬며 수많은 사람들 틈에서 한 사람을 찾아 눈동자를 바쁘게 움직였다.

서진… 서진아…….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머릿속으로 수억 번 다시 만나는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를 만나서 어떻게 하려고 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아마 죽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감정은 틀림없이 시뻘겋다 못해 새까맣게 타오르는 분노였으니까.

왜 나를 살려 두었냐고, 그 가느다란 목을 조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머리가 뒤죽박죽으로 엉켜서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이젠 자신이 누군지도 모를 만큼 모든 게 까마득했다.

점점 숨통이 조여들어 눈앞이 흐려지는 찰나.

“이봐요!”

뒤따라온 역무원에 의해 힘이 빠진 몸이 홱 돌아갔다.

“하아… 허억….”

철은 불에 타는 것 같은 가슴을 고통스럽게 부여잡고 숨을 골랐다. 숨을 내쉴 때마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과 눈물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뭐, 뭐야…. 괘, 괜찮아요?”

좀비라도 본 것처럼 당황한 역무원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그리고…… 그 후론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렸을 땐 띡― 띡―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심전도 기계음이 가장 먼저 귀를 파고들었다. 깨질 않길 바랐는데.

그다음엔 또 하얀 병실 천장이 보이고, 익숙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항상 그랬듯 의사에게 의미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질릴 정도로 반복된 일은 이제 평범한 일상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또 헛것을 보았고, 발작을 일으킨 것뿐이다.

물리적으로 아픈 곳을 찾을 수 없었기에 퇴원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도움도 되지 않는 정신과 치료를 권유하는 진단서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다시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고문 같은 삶을 사는 것.

탐내선 안 될 것을 탐냈기에 벌을 받은 걸까.

며칠 만에 회사로 돌아가니 어째서인지 사원들의 존경하는 눈빛이 한층 더 깊어져 있었다.

‘사장님, 일하다가 쌍코피 흘리면서 쓰러지셨대.’, ‘밤새워서 야근하다가 쌍코피 터져서 실려 나갔다는데.’ 등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살을 더하고 몸집을 키우면서 부풀려졌지만, 매번 쌍코피는 빠지지 않았다.

“사장님, 그럼 파션쓰 유증 건은 어떻게 할까요?”

“수고하셨습니다.”

“…예?”

사장실에서 업무를 보고하던 여자의 얼굴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예?”

당연히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 듣고 있지 않던 철은 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파션쓰 유상증자에 관한 건 말씀드렸습니다.”

“고로코롬 하세요.”

“예. 그럼 5% 인수, 발표하겠습니다.”

여자가 군기가 바짝 든 얼굴로 깍듯하게 대답했다.

뭘 그렇게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수고했다는 말과 그렇게 하라는 두 가지 말만 했을 뿐인데, 어느새 다른 회사랑 인수 합병까지 준비하고 있다.

철은 또 눈앞에 놓인 서류를 들더니 대충 미간을 좁혔다. 파션쓰인지 빤쓰인지, 무슨 회사인지조차 개미 먹이만큼도 관심이 없으니 얼른 나가라는 뜻이다.

김 부장이랬나. 이름도 모르는 여자가 사장실을 빠져나가고, 뭔지도 모르는 결재 서류에 기계처럼 사인을 하며 시간을 죽였다.

잠시 후,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는 대충 겉옷을 챙겨 들고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나가는 길엔 항상 영업팀 사무실을 지나쳐야 했다.

아직 일이 한창인지 활기가 넘치는 사무실을 성큼성큼 걸어 빠져나가는데 한 신입 사원의 컴퓨터 화면이 스치듯 눈에 들어왔다.

발걸음을 멈춘 철은 눈가를 가늘게 좁히고 사원의 의자 뒤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신입 사원 바로 옆에 서서, 어느새 컴퓨터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빨려 들어갈 것처럼 화면을 바라보았다.

“…어머 씨바! 깜짝이야!”

뒤늦게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신입 사원이 의자까지 뒤로 자빠뜨리며 경기하듯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갑자기 옆에 나타난 남자가 누군지 알아차리고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사사, 사장님…. 그, 그게 아니고….”

이제 입사한 지 고작 한 달 남짓인데, 망연자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신입 사원의 손끝이 파들파들 떨려왔다.

“이게 뭡니까?”

철이 여전히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그게, 잠깐, 아주 잠! 깐 본….”

“이게 뭣이냐고요잉.”

갑자기 살벌해진 말투에 잔뜩 겁을 집어먹은 사원의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

“예에…? 쎄이… 월드….”

“…쎄이월드? 이 사람 압니까?”

철이 천천히 눈을 옆으로 돌리더니 사원의 얼굴을 뚫을 듯이 노려보며 물었다.

“아, 아니요. 그냥 투멤에 떴길래… 아주 잠깐 본….”

“투멤?”

“미니홈페이지1) 투, 투데이 멤버요. 아마 얼짱 같은….”

“얼짱?”

“죄송합니다!!”

결국 눈물을 가득 머금은 신입 사원은 이마가 정강이에 닿도록 허리를 숙이며 소리쳤다. 철은 다시 홀린 듯이 컴퓨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뜬 작은 창 안에는….

아 야근 시러 -_-+

나 대신 해줄 사람 ~ ? ^0^ ♪

…따위의 느자구 없는 문장 위에.

하얀 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살짝 풀어 헤치고서, 있는 힘껏 얼굴 근육에 힘을 준 그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