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2/26)

5.

수런거리는 작은 소음들이 귓가에 쌓이고 쌓여 점점 선명한 목소리로 바뀌었다. 할아버지, 삼총사 아주머니, 동네 주민들 목소리가 차례로 귓속에 들어왔다가 또 윙윙거리며 머릿속을 두드려 깨우는 것 같았다.

“…깨났나 본디?”

“염병 총각. 내 말 들린당가?”

“아가, 정신이 좀 드냐잉?”

딱 달라붙은 눈꺼풀을 힘겹게 떼어내니 이제는 익숙해진 알코올 냄새와 하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진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끔뻑거리며 구경꾼들 사이를 파헤치고 들어와 제 앞에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여자에게 시선을 맞췄다.

“아따, 환자분 또 오셨네요.”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익숙하게 라이트를 눈에 갖다 대고 막 깨어난 환자의 동공 반응을 확인했다. 서진은 아직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 허공을 부유하는 시선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래에 거의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는 익숙한 병실이다. 분명 산속에 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론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뇌가 셔터를 내린 것처럼 까마득하기만 하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은 그저 버섯을 먹고 일으킨 환영뿐이었다.

그래, 환각일 뿐이다. 그래야만 한다.

서진은 깨어나자마자 어쩐지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기분이었다.

“안색이 쪼까 안 좋은디.”

“……저… 여기 어떻게 온 거예요?”

청진기를 귀에 꽂은 의사를 향해 서진이 간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발, 제발… 구조대원이 발견했다고 해주세요, 제발…….

“음마? 기억 안 나셔라? 친구분이 데려왔죠잉. 거 아직 갈비뼈가 붙지도 않았는디 으째 사람을 들처업고 산을 내려왔능가…. 하여간 둘이 허벌라게 죽고 못 사는 갑네요.”

쿠궁―!

대가리 위로 10톤 트럭만 한 바윗덩이가 떨어지더니 부스스 재가 되어 눈앞에 흩날리는 듯했다. 빠르게 뇌를 스쳐 지나가는 빨간 비디오 같은 장면에 등줄기는 물론 겨드랑이까지 식은땀이 배어들었다.

“좋은 친구 두셨어요.”

청진기를 잡아 뺀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진찰을 마친 의사가 병실을 빠져나가고, 삼삼오오 모인 동네 주민들이 한마디씩 안부 인사를 던지자 커다란 병실 안이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물론 그 안에 그 녀석은 없었다.

‘좋은 친구’라는 단어를 곱씹어보던 서진의 안색이 점점 파리해졌다. 친구끼리 그런 짓을…. 아니, 애당초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던 녀석이 왜 갑자기 오밤중에 미친놈처럼 비 오는 산을 뒤지고 다녔단 말인가.

역시 그 녀석을 만난 것까지만 사실이고 그 후에 일어난 일들은 환시 같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희망에 무게를 실어보기로 했다.

마을 아주머니들이 차례로 걱정과 안도가 섞인 인사들을 건네고, 제일 태연해 보였던 영옥은 남몰래 기쁨의 눈물을 닦아내기도 했다.

어느새 병실에 가득했던 햇빛이 물러나고 바깥에 어둠이 내려앉자 잔치라도 열 것 같던 주민들도 하나둘씩 발걸음을 돌렸다.

“그람 푹 쉬어라. 낼 또 올랑께.”

혼자 병실을 지키던 할아버지마저 내일을 기약하며 집으로 향하자 넓은 공간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어느새 창밖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빗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물어뜯던 서진은 설마…, 하는 생각에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열자 텅 빈 복도 의자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커다란 인영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

“아픈디 왜 나왔냐.”

서진을 향해 고개를 든 철이 푹 잠겨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뭐… 해?”

“나도 몰라.”

당황한 서진의 질문에 철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보니 환자인 서진보다 낯빛이 더 안 좋은 것이, 전보다 훨씬 수척해 보였다.

시끄러운 마음과 달리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불 꺼진 병원 복도에 흐르는 고요한 정적은 평화롭기만 했다. 한참을 말없이 마주 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철이었다.

“…미안해.”

다짜고짜 사과를 건네는 남자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뭐… 가?”

서진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에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겁나 늦게 찾아서….”

“아니, 뭐….”

사과할 게 따로 있지. 서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눈알을 굴렸다.

당연히 구해줘서 고맙다고 인사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확신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사실 정확히 알고 있는데 모르는 척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서진아.”

불안함에 어쩔 줄 모르는 서진과 달리 철이 차분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더니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랑해.”

“…….”

“많이.”

뜬금없는 말에 순간 눈이 휘둥그레진 서진은 영혼이 우주 바깥으로 튕겨 나간 듯 멍하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라는 단어가 빙글빙글 돌며 머릿속을 떠돌아다녔다. 꼴도 보기 싫다고 할 땐 언제고….

설마, 그날 밤 동굴에서 자신의 패왕 같은 색기에 다시 반해버린 건가. 그때 선본 여자와 잘 안되는 상황에서 자신과 그런 일이 생긴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동정이었던 남자가 유일한 잠자리 상대에게 집착하는 일을 주변에서 들은 것도 같다. 아무래도 이 순진한 놈이 제 치명적인 요염함에 또 흔들린 것이 틀림없다.

짧디짧은 생각을 마친 서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통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가 저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안 되는 거 알지?”

“응.”

차갑기만 한 말투에도 철은 여전히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면 다행이고…. 나 구해준 건 진짜 고마운데, 아무래도 네가 오해한 것 같다. 그 뭐냐… 그땐 그… 버섯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그니까….”

“알어.”

마치 성가시다는 듯 이어가는 이야기에 그를 올려다보던 철이 애써 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서진은 말이 통해서 다행이란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래서 솔직히 계속 이렇게 마주치는 것도 좀 불편하고, 피차 다신 볼 일 없으면 좋겠는데.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

“그럼 들어가라.”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이 정도로 모질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인간도 아니라며 멱살을 틀어잡을 것이다.

서진은 인간이길 포기하는 마음으로 100년이 지나도 썩어 문드러지지 않을 쓰레기 같은 말을 내뱉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병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탁 닫아버렸다.

후우. 행여 바깥까지 들릴까 작게 내뱉는 호흡이 파르르 떨린다. 다리에 힘이 풀려 커다란 문에 등을 기댄 채 스르륵 주저앉았다.

다행히 따라 들어온다거나,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창밖에 떨어지는 고요한 빗소리만 헛헛한 마음에 스며들었다.

‘계속 마주쳐봐야 정만 들겠지. 아버지가 조금 있으면 데리러 온다고 했으니까…. 앞으로 떠나기 전까지 최대한 피해 다녀야겠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었다. 끝이 훤히 보이는 결말도. 자신이 천하의 찌질한 겁쟁이란 사실도. 모든 상황이 그대로였다.

도드라진 날개뼈에 닿는 차가운 문의 감촉이 그와 저를 갈라놓는 무쇠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폐부를 찔렀다.

짭짤한 눈물이 볼에 둥그런 궤적을 남기며 아래턱을 타고 툭툭 떨어졌다. 항상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 상처를 후벼 팔 때마다 그 아픔은 고스란히 자신에게 돌아왔다. 손쓸 수 없는 무력감이 심장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흡….”

서진은 당장 그에게 가고 싶은 제 두 다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그가 제게 사랑을 고백하든, 꺼지라고 소리치든, 결과는 어차피 정해져 있었으니. 필요하다면 또 몇 번이고 밀어내고, 또 밀어내야 할 것이다.

불을 켜지 않아 껌껌하게 어둠이 내린 병실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처럼 발밑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창밖에서 미약하게 들어오는 불빛은 얇은 커튼에 부딪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창가에서 힘없이 부서졌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아직도 자신은 찌질한 겁쟁이였고, 목구멍을 꽉 막은 덩어리는 영원히 넘어가지 않을 것처럼 여전히 그곳에 걸려 있다. 원래 첫사랑은 누구나 이룰 수 없는 거라고 했으니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그냥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가, 아주 먼 훗날 주말농장으로 만들 해바라기밭처럼 아득한 추억으로 꺼내 보면 그만인 것이다. 보고 싶을 때 머릿속으로 꺼내 보고 마음으로 입 맞추면서.

‘지금쯤 그 녀석도 멀리 사라졌겠지…….’

그 순간 카메라 셔터를 누른 것처럼 밝은 빛에 눈앞이 번쩍, 환하게 밝아졌다.

이어서 1초, 2초, 3초. 꽈아앙!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커다란 굉음이 귓속을 날카롭게 찌른다. 누군가의 마음을 대변하듯이.

“…….”

우르르 쾅. 시끄럽게 내리치는 천둥소리에 마음이 요동쳐 흘러넘친다.

그렇게 삽시간에 휘몰아치기 시작한 천둥 번개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용기를 북돋아 주기에 충분했다.

정당한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같은 곳을 계속 두드리면 기어코 금이 가고 깨지는 것처럼, 마음에도 어느새 균열이 생기고 틈이 갈라져 있던 것뿐이다.

멍한 표정으로 흐르는 콧물을 있는 힘껏 크응, 빨아들인 서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꽉 닫혀 있는 병실문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천둥 번개가 번쩍거리는 불 꺼진 병원 복도는 로맨스보단 호러 영화에 어울릴 법한 모습이었다.

“…철아….”

조용하게 읊조리는 이름이 텅 빈 공간에 나직하게 울렸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안 보이는 복도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진짜 가버렸나.’

그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동안 쏟아지는 비만큼 흘러넘치는 감정이 발걸음을 조급하게 재촉했다.

밤이라 운행을 중단한 엘리베이터를 확인하자마자 아픈 발목을 끌고 바로 계단으로 내달렸다. 난간을 붙잡고 한 번에 두 칸씩 급하게 계단을 뛰어내렸다.

1층 로비를 빠르게 훑고 결국 바깥까지 나온 서진은 자꾸만 빗소리에 묻히는 목소리를 더 크게 키웠다.

“철아, 철아!!”

세차게 내리는 빗물이 자꾸 눈으로 들어가서 제대로 앞을 볼 수 없었다. 서진은 그 덕분에 흐르는 콧물도 비에 씻겨 내려가니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철아―!!”

커다란 인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가버린 거냐고, 허탈한 질문을 던지는 마음속에 염치도 없이 서운한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솔직히 아직 떠나지 않았을 거라고 기대했던 것 같다. 해를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아무리 밀어내도 항상 자신을 향해 있을 거라고.

웃기는 일이다. 그 해바라기도 결국 빗물에 쓸려 뒈져 버렸는데.

“으억!”

발밑을 제대로 보지 않은 서진은 결국 철퍼덕 소리를 내며 더러운 기름 웅덩이 위에 꼴사납게 자빠졌다.

검은 구정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꼬락서니가 처량했다. 그는 넘어질 때 콘크리트 바닥을 짚느라 쓸린 손바닥을 보며 얼굴을 빈 깡통처럼 찌푸렸다.

사실은 이 야밤에 혼자 염병 블루스를 출 게 아니라 내일 찾아가서 얘기해도 되는 일이었지만, 천둥 번개가 그친 내일은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지금이 아니면…….

“서진아!!”

한발 늦은 목소리는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서진을 발견한 커다란 남자가 저 멀리 병원 건물 안에서 뛰쳐나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역시 그가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서진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위로 솟았다.

“철아….”

“니 이게 무슨….”

순식간에 서진의 앞에 당도한 남자는 난데없이 빗속에 자빠져 미친놈처럼 미소 짓고 있는 그를 보며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너한테 거짓말했어, 흐윽… 아까 그거 다 개뻥이라고…. 가지 마, 철아.”

빗물인지 눈물 콧물이 흐르는 건지 모를 얼굴로 두서없는 말을 중얼거린 서진은 대뜸 팔을 뻗어 철의 멱살을 틀어잡더니 자신의 코앞까지 그를 끌어당겼다.

“이게 진짜 내 진심이야.”

차가운 빗물 속에 따뜻한 두 입술이 퍽! 소리를 내며 박치기하듯 포개졌다.

힘 조절을 잘못하는 바람에 입술이 치아에 부딪쳐 쌉싸름한 피 맛이 혀끝에 퍼졌다. 짭조름한 콧물 맛이 조금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가장 달콤한 입맞춤이었노라고.

남몰래 꺼내어 보는 어린 날의 풋풋한 추억이었다.

2000年 (1)

6년 후 2000년 서울, 겨울.

- 야, 진짜 잘할 수 있지? 괜히 또 실수하지 말고.

“아, 새끼 거참. 걱정 말고 다녀와. 느이 싸장님 아주 잘 모실 테니까.”

핸드폰을 든 곽서진은 실실 웃음을 흘리며 능청스럽게 너스레를 떨었다. 급한 사정이 생긴 친구 대신 잠시 맡게 된 일자리는 어느 회사 사장의 운전사 일이었다.

그 회사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에 곽서진도 취업을 희망하고 있었을 정도로 월급도, 복지도 업계 최고 수준인 이 시대 청년들의 꿈의 직장이었다. 게다가 이 일은 그 회사 사장을 다이렉트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어쩌면 오늘 그의 눈에 들어 그토록 선망하던 회사에 정식으로 취직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넘실거렸다.

그 순간, 기다리고 있던 커다란 집 대문이 열리고 일전에 신문에서 본 사진보다 더 비현실적인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야, 저기 온다. 끊어.”

- 참, 이동할 때 정신 사나운 거 싫….

남자의 얼굴에 정신을 빼앗긴 곽서진은 탁 소리와 함께 폴더폰을 급하게 닫으며 친구의 뒷말을 잘라먹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달려가 세단의 뒷문을 열어젖힌 다음 가볍게 묵례했다.

자신보다 어린 남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이 남자라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숙일 수 있었다.

고작 스물세 살에 혈혈단신으로 시작한 작은 회사가 지금은 창립 3년 만에 수많은 직원을 거느린 연 매출 수천 억대의 알짜 회사로 성장한 것은 물론, 최근엔 코스피 상장까지 일사천리로 해내는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영어로는 ‘골드 스푼’이라고 하던가. 자수성가라고 하기엔 기본적으로 타고난 자본금이 뒷받침해주긴 했지만.

남자는 고집스럽게 정석대로 사업하면서도 하이에나처럼 영악했고, 부드럽고 따뜻한 회사 이미지와 다르게 뒤로는 동종 업계를 초토화시킬 만큼 무자비했다.

한마디로, 그냥 타고났다.

“안녕하세요! 며칠간 영철이 대신 수행할, 곽서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차에 오른 곽서진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에서 무심하게 서류를 넘기는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밝고 정중하게 인사했다.

“예.”

그 말에 뒷자리에 앉은 남자가 흘끔, 백미러를 쳐다보더니 가볍게 눈인사를 던졌다.

영 앤 리치 앤 핸섬. 삼박자를 갖춘 남자는 예의가 없거나 재수 없게 뻗대는 성격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곽서진은 모든 것을 갖춘 남자에게 속으로 경의를 표하며 짧은 시간에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이야. 신문에서도 사진 보고 놀랐었는데 실물은 훨씬 더 잘생기셨습니다.”

“…….”

“얼마 전에 실업 청년들이 가장 취업하고 싶은 회사 설문조사 1위 하신 거 알고 계십니까?”

부터 시작해서 곽서진은 정말 쉴 새 없이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원래 서진이란 이름이 공통적으로 눈치가 좀 없는 건지, 곽서진 역시 친구들 사이에서 눈치가 사망한 걸로 유명한 편이었다.

“사장님은 핑클 안 좋아하세요?”

급기야 라디오를 틀고 고개까지 까딱거리며 인기 아이돌 ‘핑클’의 노래를 듣던 곽서진이 백미러에 비친 남자에게 답변을 채근했다.

“그게 뭔디요.”

어느새 미간을 구기고 짧게 한숨을 쉰 남자가 서류를 넘기며 대충 대답했다.

“에이. 농담이시죠? 얼마나 인기인데. 하긴, 사장님 같은 분이면… 핑클이 더 만나고 싶어 할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하고 덧붙이는 멍청한 웃음소리가 차 안에 허망하게 울렸다.

좋아하는 가수 얘기에 신이 난 곽서진은 그 후로 몇 번 더 핑클에 관한 쓸데없는 질문을 건넸지만, 더 이상 뒷자리 남자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저는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좋더라고요.”

그렇게 한참을 혼자 떠들어대던 중 드디어 라디오에서 가장 좋아하는 발라드곡인 핑클의 〈루비〉가 흘러나오자 한 층 더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심지어 발매된 지 1년이 지난 노래다.

“날 위해 널 붙잡아두지 않고, 상대방을 위해서 결국 자신이 떠나겠다는 가사가 너무 슬프지 않습니까?”

동의를 구하는 곽서진의 간절한 눈빛이 백미러에 닿았다.

역시나. 이번에도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그제야 ‘내가 너무 시끄러웠나’ 하는 아주 기본적인 생각을 떠올린 그가 입을 다무는 순간.

“옘병.”

낮은 목소리가 곽서진의 귓가에 울렸다.

“…예…??”

당황한 그가 남자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랄 옘병이라고요.”

백미러를 통해 형형하게 빛나는 서늘한 눈빛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뭔가 실수한 것 같다.

***

그해 여름보다 피부가 조금 더 허연 스물일곱 살의 홍서진은, 작은 경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핑클의 〈루비〉 후렴구에 필사적으로 코러스를 넣으며 고개를 흔들어댔다.

“아 진짜, 홍 팀장님. 핑클 노래 제발 그만. 아니면 그 주둥이라도 좀 어떻게 안 될까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 대리가 신경질적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 왜애. 이효리 너무 예쁘잖아.”

리드미컬하게 핸들을 두드리던 서진이 용서를 구하듯 애교 섞인 말투로 칭얼거렸다.

“차암내…. 근데… 그렇게 맨날 핑클만 보고 있으면 와이프분이 화 안 내요? 결혼반지도 맨날 안 끼고 다니시고…. 저번에 보니까 엄청 미인이시던데.”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박 대리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야속한 눈빛을 보냈다. 그 말에 리듬 타던 손가락을 멈칫한 서진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우린 헐뤼우드 스타일이거든.”

어깨를 들썩이며 얄밉게 내뱉는 어투에 박 대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에휴…. 우리 팀장님은 그 주둥아리만 꽉 다물고 있으면 진짜 그림 같은데. 언제 한번 날 잡아서 꿰매야겠어요.”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얀색 경차가 허름한 건물 앞에 멈춰 서자, 그녀가 무릎에 올려 두었던 서류를 세워 탁탁 정리하며 차에서 내릴 준비를 마쳤다.

곧바로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낡은 건물의 3층에 있는 ‘조아상사’로 들어섰다.

“팀장님! 동영물산 상담 우찌 됐습니까?”

입사한 지 세 달 된 새내기 신입 사원 최종팔이 사무실에 들어서는 서진을 발견하곤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후다닥 달려 나와 물었다.

종팔은 부산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투에 사투리가 섞여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늘 서울말을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 재미있었다.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운 막내 사원은 얼마 전부터 서진의 장난 타깃이 되었다.

“…하아…. 말도 마. 그쪽 사장이 생각보다 깐깐하더라고….”

짙은 한숨을 내쉰 서진이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미간을 짚었다. 은근히 귀를 기울이던 팀원들 모두가 또 시작이네, 하며 관심을 끄고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종팔에겐 똑같은 장난을 여러 번 해도 도무지 들키는 일이 없었다.

“…아….”

이번에도 여지없이 속아 넘어간 종팔은 안타까운 탄성을 터뜨리며 급격하게 어두워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후우…. 그래서….”

서진이 또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며 퀭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속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안 하는지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다.

“단가 7% 더 깎아버렸지! 럭키 쎄븐!”

늘 그랬듯이 따란! 하는 제스처와 함께 손으로 칠 자를 만들며 해맑게 웃는 모습이 아직도 장난꾸러기 10대 소년 같았다.

“아, 식겁이야! 팀장니임…!”

팀원들은 몸뚱이까지 탈탈 털어가며 후한 리액션을 보여주는 종팔을 보면서, 문득 저 영악한 녀석이 사장 아들 눈에 잘 보여서 이 회사를 차지하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도 최근 경영난을 겪고 있는 이 조그만 회사가 없어지지 않아야 가능한 얘기지만.

몇 년 전 서진의 아버지가 빚을 청산하고 새롭게 차린 무역 회사 ‘조아상사’는 처음엔 차근차근 몸집을 키워 나갔지만, 지난 IMF로 사정이 어려워진 탓에 1년 전부터는 직원들의 월급만 겨우 맞춰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절반 정도의 인원이 구조 조정으로 댕강 잘려 나가고, 지금은 열댓 명 정도만 남아 오손도손한 분위기로 단합하여 간신히 버티고 있는 처지다.

서진이 맡은 팀장이란 직책도 허울뿐인 데다가, 사장 아들이라는 권위도 개나 줘버린 지 오래였다.

팀에서 그를 상사 취급해주고 어려워하는 사람은 오로지 막내 종팔뿐이었으니.

오랜만에 일을 성공시킨 서진은 기분이 좋았는지 콧노래를 가볍게 흥얼거리며 자신의 자리 근처 창가에 놓인 화분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안경 닦는 부드러운 천을 꺼내 조심스럽게 초록색 잎을 닦기 시작했다.

“그, 보통은… 난… 같은 걸 닦는다 아닙니까?”

매우 소중하다는 듯이 초록 잎을 닦고 있는 서진을 보며 종팔이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다른 팀원에게 물었다.

“아니. 우리 팀장은 고춧잎을 닦아.”

팀원은 뭐 당연한 걸 묻냐는 것처럼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 너 혹시라도 저 고추 따 먹으면 난리 난다.”

얼굴을 구긴 팀원은 “작년에 한 번 누가 따 먹었다가 이틀 동안 삐져서… 하여튼 안 건드리는 게 나아.” 하고 구시렁거리며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어느덧 시간이 빠르게 흘러 퇴근할 무렵이 되었다. 다들 시계를 확인하며 퇴근만 기다리던 그때, 급한 전화 한 통을 받은 사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어, 가족이 쓰러졌다는 급한 연락이 와서요. 이따 정진물산이랑 미팅 못 갈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사무실이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더니, 당황한 사원들이 서로 눈을 피하면서 갑자기 일을 시작하거나 울리지도 않은 전화를 받으며 언성을 높였다.

“어? 그거 내가 갈게요.”

짙은 색 겨울 코트를 챙기며 칼퇴근을 준비하던 서진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던졌다.

“예? 홍 팀장님이요?”

눈을 휘둥그레 뜬 김 대리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약속 장소 어딘지 주소 문자로 보내줘요.”

“네… 그럼….”

어딘가 석연찮은 얼굴을 한 김 대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황 부장을 팀장님한테 맡겨도 되려나 모르겠네….”

다시 자리에 앉으며 혼자 중얼거리는 김 대리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은 신입 사원 종팔이 제 의자를 끌어당겨 옆으로 다가왔다.

“왜요?”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진물산 부장, 성격 장난 아니게 더럽거든. 아마 오늘도 업소에서 보자고 할….”

“어, 팀장님! 그거 제가 갈랍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종팔이 소리쳤다.

“…니가? 됐습니다요. 수당 챙겨줄 돈 없으니까 집에서 푹 쉬세요.”

마지막으로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서던 서진이 뒤돌아서서 그를 훑어보더니 피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정진물산 황 부장이 어떤 진상인데, 저런 애송이한테 떠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깥으로 나오니 추운 겨울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새어 나온 입김이 허공에 허옇게 흩어졌다. 총총걸음으로 하얀색 경차에 올라타 문자로 주소를 확인한 서진은 결국 얼굴을 감싼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남구 압구정동 271-2

이미 일 때문에 한 번 가본 적 있는, 흔히 요정이라 불리는 유흥업소 주소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가 바로 시동을 걸었다.

퇴근 시간 강남 쪽은 항상 차가 막히니 지금 출발하면 얼추 약속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는 길엔 어김없이 핑클 노래를 틀어놓고 착 가라앉은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애썼다.

잠시 후 도착한 ‘희’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고급스러운 한옥 모양의 한정식집은, 사실 무늬만 식당이지 한복을 입은 여성 종업원들이 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는 곳이었다.

“어어? 이거 홍 팀장 아니야? 아주 몰라보게 더 이뻐졌네.”

일찌감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술을 걸치고 있던 황 부장이 문을 열고 들어온 서진을 발견하더니 인사를 건넸다.

남자란 자고로 자기처럼 우락부락 못생겨야 한다는 괴상한 철칙을 가진 황 부장은 칭찬을 한 게 아니라 서진의 미소년 같은 외모를 비꼰 것뿐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황 부장님, 늦었습니다.”

“그래. 앉아, 앉으라고.”

이미 양옆에 제 딸뻘 되는 어린 여성을 끼고 앉은 황 부장은 두꺼비처럼 음흉하게 웃으며 서진을 맞은편 자리에 앉혔다.

서진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대충 장단을 맞춰주다가, 마지막에 술값이나 계산하면 계약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일이었다. 나 죽었다 생각하고 몇 시간만 버티면 되는 것이다.

황 부장은 그가 자리에 앉자마자 남의 외모 지적부터 시작해서, 옆에 앉은 아가씨들의 몸매를 평가하거나 더러운 이야기를 입에 담으며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다.

시간이 흘러 꼰대 같은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자 한숨 돌린 서진이 열심히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나 때는 말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서진은 황 부장의 말이 시작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했다.

“어? 요새 것들은 위아래가 없어요, 위아래가. 안 그런가, 홍 팀장?”

“맞습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서진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며 또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 부장은 자신의 힘들었던 유년 시절부터 시작해서 지금의 미약한 성공을 이루기까지, 구구절절 그 누구도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나노 단위로 풀었다.

그런 다음에는 조아상사의 방향성과 서진의 미래에 대해 쓸데없는 참견까지 늘어놓았다. 그는 마치 최악의 꼰대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아예 작정한 사람 같았다.

“참… 볼수록 묘하게 생겼단 말이지.”

“맞습니다.”

황 부장은 어느 순간부터 거의 맥이는 수준으로 영혼 없이 대답 중인 서진을 눈치도 못 챌 만큼 취해 있었다.

“아니, 그 진짜…. 홍 팀장 얼굴 보다가, 요 년들 얼굴 보면 술맛이 확 떨어지는 것 같다니까?”

“아주 못 하는 말이 없으십니다.”

거나하게 취한 황 부장은 마치 칭찬하는 듯한 서진의 말투에 속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하하 웃어젖혔다.

“…야. 너희들 잠깐 나가봐라.”

그가 제 옆에 앉은 두 아가씨를 툭툭 치며 문을 가리키더니 바깥으로 내쫓아 버렸다.

“씁. 오늘 여기 에이쓰가 출근을 안 했는지 애들 물이 안 좋아. 그냥 홍 팀장이 옆에서 한 잔 따라봐.”

“옙.”

그다지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에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서진이 그의 옆에 앉아 술잔에 술을 기울였다.

“진짜 묘하단 말이야….”

대체 뭐가 그렇게 묘하다는 건지. 조르륵, 잔에 술을 채워주는 서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황 부장이 술기운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이밀며 중얼거렸다.

“이거 진짜 자지 달린 거 맞아?”

“옙.”

영혼을 저 멀리 우주 밖으로 탈주시킨 서진이 허공을 부유하는 시선으로 대답했다.

“아닌 거 같은데?”

“옙.”

“쓰읍. 달렸다는 거야 안 달렸다는 거야. …아아, 한번 까보라고…?”

“헛소리도 참 잘하십니다.”

말인지 방귀인지 구분 안 되는 소리를 듣는 서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지만, 가까스로 썩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치켜세우는 말투를 유지했다.

“어디 한번 고추 달린 거 맞나, 까볼까?”

여전히 그의 말의 진의를 눈치채지 못한 황 부장이 서진의 허벅지에 손을 올리더니 느릿하게 쓸어올렸다.

머리끝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은 서진은 뭐 이딴 게 다 있냐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윽고 따가운 시선을 느낀 황 부장이 호탕하게 웃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진다.

“뭔, 농담도 못 하나. 뭘 그렇게 째려봐? 누굴 더러운 호모 새끼로 알고.”

미친 듯이 웃어젖히던 그가 술잔으로 손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더러운 호모 새끼들은 인간 말종이야, 인간 말종. 어? 그런 정신병자들은 나라에서 책임지고 잡아다가 두들겨 패야 된다고.”

원래 황 부장은 성차별부터 시작해서 인종 차별까지 편견으로 똘똘 뭉친 인간이라 만날 때마다 이런 개소릴 왈왈 짖었다. 그래서 몇 시간째 그의 이런 궤변을 듣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 자식이 비역질하면 당장 끌고 가서 한강에 던져버렸어. 자식을 그딴 쓰레기로 낳은 애미도 잘못이라니까. 쓰레기들이랑 그 애미 년이랑 싹 다 잡아서 정신 병원에 처넣고 사회를 깨끗하게 만들어야지. 안 그래, 홍 팀장?”

그가 두꺼비 같은 눈을 번뜩이며 서진에게 동의를 구했다.

정말이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맞장구쳐 주면 그만이다.

“…그것보단 입으로 똥을 싸는 놈들을 잡아넣는 게 더 깨끗해지겠죠.”

하지만 멋대로 움직이는 입술은 뇌가 시키는 것과 전혀 다른 소리를 뱉어냈다.

“…뭐어…?”

갑자기 차가워진 말투에 술이 조금 깬 듯한 황 부장이 눈을 끔뻑거리며 물었다.

“…왜애, 늙으니까 귓구멍까지 좆밥으로 막혔냐?”

결국 참다못한 서진이 다짜고짜 황 부장의 두툼한 귓불을 잡아당기며 되물었다. 난데없이 한참 어린 남자에게 귓불을 잡힌 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아아악! 뭐, 머머뭐…??”

“머뭐, 뭐요. 성인이면 말을 똑바로 해야지. 아니면 벌써 치매라도 오셨나.”

“이, 이, 이이이…!!”

“이이, 뭐? 내가 너였으면 그냥 지금 당장 똥통에 머리 처박고 뒈졌어. 니네 마누라랑 자식만 불쌍하다. 좆같은 대머리 새끼, 퉤엣!”

피날레로 서진의 입에서 튀어나온 투명한 침이 황 부장의 빛나는 대머리 위에 탁! 떨어지더니 미간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다음은…….

화가 난 황 부장이 괴성과 함께 미친 듯이 달려들어 술잔과 음식이 허공을 날아다니는 난장판이었다.

그가 던진 술잔과 그릇들이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지고, 사방으로 튄 파편이 기어코 서진의 왼쪽 뺨에 생채기를 냈다.

남에게 절대 지지 않는 서진 역시 파전, 야채전을 닌자 표창처럼 던져대고, 황 부장의 깐 달걀 같은 머리 위에 머리카락 대신 쓰라며 수삼냉채를 얹어주었다.

마지막으로 밖에 날씨가 추우니 온천이라도 즐겨보라며 따뜻한 궁중 신선로를 황 부장의 두툼한 몸에 붓고 있을 때, 소란을 듣고 달려온 직원들에 의해 바깥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어? 오늘부로 홍서진, 이 쌍놈 새끼 때문에 조아상사랑은 끝인 줄 알라고!”

서진과 함께 밖으로 쫓겨난 황 부장이 온몸에 음식물을 뒤집어쓰고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씩씩거리며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도 서진은 세 번째 손가락을 치켜들고 혀를 쭈욱 내밀어 보였다.

잠시 후, 황 부장이 대리 기사와 함께 차를 타고 시야에서 사라지자 혼자 차가운 길바닥에 남은 서진이 푸욱 한숨을 쉬며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좆됐다.

내일 회사 가서 뭐라고 하지…….

“하…. 그거를 못 참고….”

통탄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린 서진이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었다.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빌런에게 일격을 가했을 때 사이다를 마신 것 같은 통쾌함을 주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뿐이다. 현실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정진물산은 조아상사의 가장 큰 거래처로 회사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심지어 조아상사는 당장 다음 달 직원 월급도 조달이 힘들 만큼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번 계약 파기로 회사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얘기다.

“조금만 참을걸….”

그 순간 붉은 액체가 뺨을 타고 바닥에 뚝 떨어졌다. 그제야 아픔을 느낀 서진이 왼쪽 뺨을 쓸어내렸다.

“아… 씹….”

이러다 상처 남으면 레이저 해야 되는데. 서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찡그리다가 문득 예전에 알았던 한 사람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행인하고 조금만 시비가 걸려도 어디선가 불쑥 튀어나오고, 자신의 몸에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염병 블루스를 추던 사람이…….

서진은 곧바로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벌써 6년이란 시간이 흘렀건만….

그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감히 보고 싶다는 마음을 갖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졌다.

***

깔끔하게 차려입고 사장실 문 앞에 선 여자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가 다시 급하게 내렸다. 은근슬쩍 화장품을 꺼내 이빨에 고춧가루가 끼진 않았는지 확인하는 김에 분칠까지 더하며 생각에 빠졌다.

이 회사에, 아니 이 세상에 사장님을 마음에 품지 않을 수 있는 여자가 있을까.

빚어놓은 듯한 얼굴이나 다부진 몸매는 말할 것도 없는 데다가 부드러우면서도 강단 있고, 특히 여색을 전혀 밝히지 않는다는 점은 모든 미혼 여성 사원들의 마음을 강도 9.9 정도의 대지진으로 흔들어 놓았다.

구수한 사투리도 이 남자가 쓰면 신선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크흠흠, 목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크게 한 여자가 입가에 살가운 미소를 띤 채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

“……정책 문제로 대구 지점은 매출이 하락하는 추세입니다.”

“그 짝은 조사브렀네요.”

“…예? …네, 조사버린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잠시 후.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를 마친 여자는 한참 동안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남자의 명화 같은 얼굴을 감상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사장 범 철’이라는 명패를 바라보며 어쩜 이름도 저렇게 멋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할 일을 마친 여자가 계속 멀뚱멀뚱 서 있자 의아하게 여긴 철이 다시 한번 인사를 건넸다.

“수고했습니다.”

사장은 원래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사원들과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일도 일절 없는 철옹성 같은 사람이었다.

민망함을 느낀 여자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돌아서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발길을 잡았다.

“아, 낼부터 나오지 말라 하세요잉.”

의자에 앉아 서류를 확인하며 대수롭지 않게 건넨 말이었지만, 사장과 한마디라도 더 나눌 수 있으면 뭐가 됐든 좋은 여자는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네? 누구 말씀이신지….”

여자는 곧바로 뒤돌아서서 눈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곽서진 씨.”

“……예?”

“오늘 박 비서님 대신 나온.”

…곽서진? 곽서진……? 빠릿빠릿하게 돌아가던 여자의 머릿속에 오늘 박 비서님 대신 나왔다던, 잠깐 봐도 눈치가 사망한 것 같은 남자가 어렴풋이 스쳤다.

“아아, 네…. 뭐가 마음에 안 드셨나 봐요.”

왠지 이유는 알 것 같았지만, 사장이 오늘 처음 만난 일개 사원의 이름까지 기억해 가면서 지적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라 궁금증이 일었다.

“예.”

대답과 함께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칫하더니 낯빛이 미세하게 싸늘해졌다.

“그 이름을 싫어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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