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1/26)

4.

“허억. 무…무슨….”

정신을 잃은 사이, 웬 흰색 바탕에 검은 점박이 들고양이 한 마리가 배 위에 똬리를 틀고 포근하게 누워 있었다. 놀란 인간 침대가 움찔하고 움직이자 화가 난 들고양이는 털을 곤두세우며 자그마한 이빨을 드러냈다.

“하악―!”

“허, 귀엽… 아악!”

제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를 발견하고 흥분하여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서진과 달리, 들고양이는 날카롭게 세운 발톱으로 그를 내려찍더니 순식간에 경사가 가파른 산길로 줄행랑쳐 버렸다.

서진은 저 멀리 사라지는 검은색 꼬리를 보며 아쉬움에 입맛을 쩝 다셨다.

“아, 아야….”

몸을 살짝 움직이자마자 퉁퉁 부어오른 양쪽 발목의 통증이 해일처럼 서진을 덮쳤다. 동시에 손바닥과 팔다리에 긁힌 크고 작은 상처들이 콕콕 찌르듯 따가웠다.

다행히 다른 곳은 모두 멀쩡했으니, 산꼭대기 절벽에서 떨어진 것치고 이만하면 천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떨어지는 동안 굵다란 나뭇가지에 한 번, 정체 모를 나무줄기에 또 한 번, 또 자잘한 나뭇가지에 걸리고 또 걸려 결국 마지막은 2층집 옥상에서 떨어진 정도였다고 할까. 그는 원래 이상한 데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머리카락을 데코레이션한 정체 모를 나뭇잎들을 후드득 털어낸 서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파르게 경사진 흙길은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아래로 추락할 게 뻔한 것이, 딱 봐도 사람이 다니는 길은 아니었다.

떨어질 때는 분명 해가 중천이었는데, 기절해 있는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뜨거웠던 태양은 모습을 감추고 어스름하게 남은 빛이 주변을 겨우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 영옥 아줌마―!”

크게 소리를 질러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깊은 산자락에 홀연히 울리는 그의 목소리와 놀란 산짐승이 푸드덕거리며 달아나는 소리뿐이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릴 정도로 소리를 질러대던 서진은 그냥 날이 밝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가 저를 찾으러 온 사람에게 구조되기로 했다. 어차피 다친 발목 때문에 움직이기도 힘든 판국에 괜히 힘 뺄 필요 없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미약하게 비추던 빛도 스러지고, 빼곡하게 자란 나무들 사이로 금방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간간이 먹구름이 낀 하늘에서 얇은 손톱달마저 자취를 감춰버리자 깊은 산골짜기는 까만 먹물이라도 쏟아부은 것처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실바람에 나뭇잎끼리 부딪치고 스치는 스산한 소리와 알 수 없는 산새들과 부엉이가 합창하여 우는 소리뿐이다.

한 마디로 겁나게 무서웠다.

“…흐, 흐흠… 으흐흥….”

당장이라도 졸도할 것 같은 두려움에 억지로 경쾌한 노래를 흥얼거려 보았지만, 더럽게 음정이 안 맞는 노랫소리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워진 서진이 헙, 입을 틀어막았다.

혼자서 납량 특집을 찍고 있는 서진의 등 뒤로 서늘한 식은땀 한 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이대로 잠자기는 글렀다. 이럴 땐 좋은 생각. 귀여운 생각.

“으응, 하…으읏! 응!”

좋은 생각을 하려니까 바로 변태 같은 기억을 떠올린 입꼬리가 음흉하게 올라갔다. 확실히 효과는 있었지만, 계속하면 왠지 아랫도리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쓸데없는 에너지를 소비하면 안 되니 급하게 귀여운 생각으로 방향을 틀었다.

“히….”

눈을 가늘게 접은 서진이 푼수 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냥 얼굴에 붙은 눈썹을 떼어줬을 뿐인데 귓불이랑 목덜미까지 빨개져서 헛기침까지 하던 그 녀석, 엄청 귀여웠는데…….

씹, 왜 자꾸 그놈 생각을. 이제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생사가 걸린 긴박한 상황을 마주하니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놓은 녀석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질척거리게. 이미 자신 같은 쓰레기는 분리수거해 버리고 새로운 만남을 시작한 사람인데.

게다가 철의 최근 행태를 봤을 때 자신이 산에서 조난한 것을 알아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것이 자명했다.

우연히 만나도 아예 세상에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대로 사라져 버리길 바랄지도 모른다.

‘살아 돌아가서 마주쳤을 때 철이 아쉬워하는 표정이라도 보게 되면 어쩌지….’

생각만으로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아려왔다. 그냥 돌아가면 어떻게든 피해 다녀서 다시는 마주치지 말아야지. 뜨뜻하게 달아오른 눈가를 꾹 누르고 있는데, 근처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한 서진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검은 형태의 덩어리가 저 멀리 수풀 사이로 바스락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은 당연히 아니고, 딱 보아도 네발 달린 짐승 형태였다.

설마 사라졌던 점박이 고양이인가.

“어… 귀여워.”

점점 바스락 소리를 내며 제게 다가오는 검은 덩어리를 보며 서진은 미리 귀여움부터 확신했다. 말은 귀엽다고 주절댔지만, 그 검은 형체가 다가올수록 온몸에 있는 근육에 빼곡하게 힘이 들어갔다.

덩어리는 칭찬에 화답하듯 어느새 형태가 어렴풋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에 와 있었다. 이미 그 크기만으로 고양이가 아니라는 것은 선명하게 보이는 거리다. 굉장히, 크다.

“야옹아…?”

몸에 빠듯하게 힘을 준 서진이 작게 중얼거렸다. 고양이의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족히 넘는 것 같은 덩어리는 크헝, 컹,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익히 돼지 소리라고 알려진 소리다. 들고양이로 위장했던 덩어리는 점점 서진을 향해 사납게 돌진하고 있었다.

“…….”

찍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무래도 멧돼지의 영역을 침범한 모양이었다.

크헝! 크헝! 멧돼지가 성난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순간. 간발의 차로 몸을 움직인 서진이 홱 방향을 틀어 피하고, 바로 미친 듯이 비명을 내지르며 경사진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극한의 상황에 맞닥뜨리니 발목의 아픔은 휘발된 지 오래다. 멧돼지는 왜 그렇게 화가 난 건지 울고불고 도망가는 서진을 향해 계속 달려들었다. 목숨을 건 야밤의 추격전이 시작됐다.

억센 나뭇가지에 쓸리고, 자빠져 구르기도 하면서 정신없이 달려 도착한 곳은 바위 절벽 꼭대기였다.

대신 이번엔 도움닫기를 해서 점프하면 닿을 만한 위치에 다른 산봉우리가 있었다. 서진은 뒤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성난 멧돼지를 뒤로하고, 수뻐마리오의 화려한 스핀 점프를 떠올리며 옆 봉우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쿠당탕―! 하는 충격음과 함께 골이 띵 하고 울리는 통증이 퍼지면서 몸이 데굴데굴 굴러갔다.

얼마간 정신없이 산길을 구르던 몸뚱이는 딱딱한 것에 퍽 부딪힌 뒤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었다.

“…아….”

쏴아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에 눈이 뜨였다. 옅은 신음을 흘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자 시끄러운 빗소리와 다르게 손가락에 걸린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했다.

서진은 흐릿한 시야를 겨우 맞추고, 한바탕 쏟아지고 있는 거센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넘어지면서 작은 동굴로 굴러 들어온 모양이었다.

제대로 맞물리지 않은 바위들이 만들어낸 동굴은 크진 않았지만 비를 피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백야처럼 흐릿한 하늘은 아마 오전, 아니면 오후….

시간 감각은 상실한 지 오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제대로 움직이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혼자 산길을 헤매는 것은 무리였다. 이렇게 비가 내리면 수색이 더뎌질 텐데.

‘할아버지, 많이 걱정하시려나. 아주머니들도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그 녀석은… 내가 없어진 걸 알면 조금이라도 걱정해줄까. 아무리 싫어도 죽으면 장례식에는 와주겠지. 착한 놈이니까.’

떠오르는 울적한 생각에 금방 눈 밑에 퀭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꼬르륵, 얼마나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지독한 배고픔으로 배 속이 술렁거린다. 허튼 생각은 제쳐두고, 일단 구조될 때까지 버티려면 뭐든 입에 집어넣어야 했다. 때마침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피는 눈알에 갈황색 버섯 뭉텅이가 들어왔다.

서진은 바로 엉금엉금 기다시피 다가가 바닥에 떨어진 버섯 다발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영옥이 위험한 독버섯이라고 알려준 것은 대부분 빨간 버섯, 하얀 버섯이거나 생김새가 조금 화려한 편이었는데 이건 처음 보는 갈황색에 아주 수수한 생김새다.

잠시 고민에 빠진 서진의 목울대가 일렁이며 침이 꼴깍 넘어갔다. 갈색 버섯은 괜찮겠지. 뭐든 먹어야 힘이 나서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그래도 정체 모를 버섯은 너무 위험하지 않나.

배고픔과 이성이 작은 버섯을 두고 치열한 공방을 펼쳤다. 에라, 모르겠다. 서진은 오랜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렸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백야 같던 하늘도 어두워지고, 서진은 여전히 조난한 채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인지 구조대가 자신을 찾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늘로 이틀째인가, 얼마나 정신을 잃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날짜 감각도 무뎌졌다.

입가에서 모든 것을 달관한 것 같은 허탈한 웃음이 하하 새어 나와 동굴 안을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을 때 저 멀리 반대편 산봉우리에서 자신을 쫓아냈던 멧돼지가 눈에 들어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가늘게 좁힌 서진이 눈가를 쓱쓱 비비적거렸다. 하늘을 나는 돼지라니.

‘돼지가…… 원래 저런 동물이었나?’

여러 번 눈을 끔뻑거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어보아도 여전히 뚱뚱한 돼지는 등에 달린 하얀 날개를 펼친 채 하늘을 날고 있었다.

서진과 눈이 마주친 천사 돼지가 요사스럽게 한쪽 눈을 깜빡이며 미소 지었다.

푸흡! 참을 수 없는 웃음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이윽고 자지러지는 남자의 웃음소리가 동굴 안을 섬뜩하게 울렸다.

서진이 배꼽을 잡고 뒹구는 사이 바닥에서 하나둘씩 꽃이 피어났다. 자연스럽게 서진의 시선이 색색의 꽃을 따라 동굴 한구석으로 향했다.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갈황색 버섯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배고픔의 승리로 조금 전에 뜯어먹은 버섯이다.

‘씹… 버섯…….’

그 순간, 조금 잦아든 빗소리를 뚫고 익숙한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메아리쳤다.

‘환각도 모자라 환청까지….’

애타는 목소리는 한시도 쉬지 않고 빗속에서 서진의 이름을 불러댔다. 어찌나 절박한지 듣는 사람이 눈물이 날 지경이다.

심지어 시간이 갈수록 가까워지는 것처럼 선명해졌다. 점점 목이 쉬는 것 같은 느낌까지 나름대로 생동감 있었다.

“나 여기 있어….”

바닥에 누운 서진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꽃밭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을 부르는 철의 목소리가 너무 슬프게 들려서 심장이 바싹 죄어드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환청이라 해도 듣기 괴로울 정도다.

그가 자신을 이렇게 애타게 찾을 리가 없는데…….

불현듯, 어디선가 새까만 어둠을 가르는 밝은 불빛이 동굴 근처를 비추더니 급박하게 여기저기를 훑어내렸다.

그 밝은 빛이 서진의 얼굴을 비춘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동시에, 미친 듯이 서진의 이름을 부르던 환청이 멎었다.

***

알록달록 예쁜 꽃과 나비가 눈앞에 나타나고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토할 것같이 어지러운 상태로 기억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처음에 비 맞은 생쥐 꼴로 나타난 철의 환영을 마주했을 땐 고개를 뒤로 젖히고 끅끅 웃어댔던 것도 같다.

왜 이런 환각을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자신만큼 눈깔이 돌아 있었기 때문에.

두 정신병자의 조우였다고 할까. 철은 바로 무너지듯 무릎을 꿇고 앉아 서진을 미친 듯이 꽉 껴안고, 머리통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었다.

서진이 정말로 실존하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커다란 손으로 자꾸 만져 확인하고, 여기저기 더듬어보는 손길이 절박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진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조금 의아하게 여긴 철이 몸을 살짝 떼어내더니, 주변을 둘러보다 갈황색 버섯을 발견했다.

무려 이름 자체도 ‘미치광이버섯’인 마약류 버섯이다.

사람을 죽이는 독이 있거나 위험한 것은 아니었지만, 섭취하면 미친 듯이 웃게 돼서 미치광이버섯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환각 작용이 매우 강한 버섯이었다.

“…니 설마… 묵었냐.”

“흐흣, 흐흐….”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묻는 물음에도 서진은 바람 빠지는 웃음만 실실 흘려댈 뿐이었다.

“…토하자 서진아.”

“흐유! 왜이애!”

급하게 그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토악질을 유도하자, 서진이 경기를 일으키며 제 입에 들어온 긴 손가락을 있는 힘껏 깨물고 마구 저항하기 시작했다.

“으읍! 우으응!”

“아따, 가만히 쫌!”

당황한 철이 버둥거리는 그를 부드럽게 제압했지만, 너무 심하게 반항하는 바람에 다친 몸이 상할까 싶어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몇 시간만 기다리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

저를 괴롭히던 손가락이 입에서 빠져나가자 또 실실 웃음을 흘리기 시작한 서진이 게슴츠레 뜬 눈으로 철을 바라보더니 한 손으로 그의 잘생긴 얼굴을 툭툭 치며 말을 건넸다.

“쓰읍…. 허상 주제에…. 키스나 해봐.”

“…뭐??”

“닥치고 뽀뽀나 해 보라고.”

황당한 눈으로 자신을 멀뚱멀뚱 바라보는 철의 얼굴을 보던 서진이 답답한지 “에이씨…!” 하고 중얼거리며 비에 젖어 축축한 그의 몸을 껴안고 대뜸 입술을 갖다 박았다.

흠뻑 젖은 얇은 천이 단단한 근육에 달라붙어 뜨끈뜨끈한 체온이 바로 느껴졌다.

서진은 그렇게 몸을 섞고도 또 첫 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굳어 있는 철의 목에 팔을 휘감고 츕, 추릅, 소리를 내며 도톰한 입술을 물고 혀로 빨아당겼다.

오랜만에 느끼는 익숙한 체취와 따뜻한 온기에 못내 기분이 좋아졌다.

분명히 환각인데……. 그의 입속에 혀를 집어넣으면 느껴지는 부드럽고 뜨거운 감촉과 코를 파고드는 향긋한 체향은 진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서진은 어느새 자신을 으스러뜨릴 듯이 꽉 껴안은 남자의 품에 안겨 정신없이 입을 맞췄다. 목구멍까지 넘어올 듯이 깊게 들어온 혀가 난잡하고 다급하게 서진의 입 안을 훑었다.

정신 나간 입맞춤에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아래턱을 타고 뚝뚝 흐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철은 목마른 사람처럼 서진이 흘리는 타액을 쭙쭙 빨아 마셨다.

아름답기보단 난잡하고, 엉망진창인 입맞춤이었다.

맞붙은 입술 사이로 “응. 좋아, 좋아….” 중얼거리던 서진이 별안간 그를 확! 밀쳐내더니 어지러움에 헛손질까지 해가며 제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씹…. 나 그냥 섹스할래….”

“…….”

“빨리… 섹스할래….”

“…시방? 여서?”

서진은 세상 희한한 광경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철을 무시한 채 계속 바지를 벗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저 이 허상이 없어지기 전에 빨리 일을 치러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급했다.

환각에 취해 있어도 그가 제 안에 들어왔을 때 느낀 황홀한 기억은 선명했으니.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섹스하겠는가.

“아… 쓋…. 왜 안 풀려….”

“…잠깐, 잠깐만, 서진아. 내려가서. 니 다친 데 낫고.”

“닥치고 너도 벗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철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사실 철 역시 들끓는 흥분으로 아래에 피가 빠듯하게 몰렸지만, 그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상황에서 마냥 쌍수 들고 환영하며 제 욕심을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몸도 성치 않은 데다가 이런 곳에서, 게다가 시작하면 한 번으로 끝낼 자신도 없다. 서진을 조금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그였다.

아직 자기 바지도 벗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던 서진은 결국 계획을 변경했는지 갑자기 성난 황소처럼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철의 젖은 옷을 잡아당기고 벗기려 들었다.

“아따…! 이, 러지 말…어!”

“벗어… 벗어!”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그의 손목을 붙들고 말리는 철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고, 그의 옷을 찢을 듯이 잡아당기는 서진은 흡사 깊은 산속에서 마주친 순진한 처녀를 겁탈하려는 산적과 같은 모습이었다.

안타깝지만 철이 딱히 힘을 쓰지 않아도 서진은 그를 이길 수 없었다. 가볍게 제지당하고 만 서진은 분노에 차 씩씩거리는 숨을 내쉬다가 급기야 차가운 동굴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기 시작했다.

“아, 왜 섹스 못 하는데. 왜.”, “내 건데 왜 내 맘대로 못 해, 왜”, “섹스, 섹스.” 따위를 외치며 억울함이 덕지덕지 묻은 몸짓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억울해서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벗으라면 벗을 것이지, 자신이 만들어낸 환각 속 인물 주제에 진짜처럼 비싸게 구는 건 또 어떻고.

“아, 그냥 해! 섹스!”

바닥을 나뒹구는 서진을 내려다보던 철이 결국 백기를 들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바닥에 깔 것이 없는지 찾느라 눈을 바삐 움직였다.

동굴에 내려놓은 램프 빛에 의지해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을 모으고 아쉬운 대로 젖은 윗옷을 벗어 바닥에 깐 다음, 그 위를 푹신하게 마른 나뭇잎으로 덮었다.

“할 거야?”

서진은 자신을 끌어안아 넓게 깔린 나뭇잎 더미 위에 눕히는 철을 보며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누워 있는 서진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춘 남자가 조금 경직된 몸짓으로 그의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리더니 허벅지에 걸쳐두었다.

“빨아줄께.”

차분한 목소리가 할 일을 예고했다. 같은 사내의 욕망을 잘 알기에, 급한 대로 한 발 빼준 다음 그의 정신이 돌아올 때까지 천천히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커다란 손이 눈앞에 드러난 짙은 남색 브리프로 향했다.

손가락을 허리 밴드에 걸쳐 밑으로 살짝 끌어당기자 예쁘게 자란 음모와 섹스, 섹스 노래 불렀던 것과 달리 조금도 발기하지 않아 말랑한 살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굶어 죽기 직전의 비렁뱅이가 눈앞의 진수성찬을 마다하는 것처럼 만고의 인내를 참아내는 손이 파르르 떨린다.

오히려 밑이 터질 것같이 부풀어 오른 건 철이었기에, 더 주저할 것 없이 고개를 숙여 한 손으로 물컹한 살덩이를 잡아 제 입 안에 넣었다.

뜨거운 혀로 성기를 질척하게 감싸고 기둥을 부드럽게 돌리며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듯이 핥아댔다.

쭙, 쭈읍, 아래에서 위로 빨아당기는 압력에 서진이 옅은 신음을 흘리며 제 밑에 고개를 숙인 남자의 짧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걸고 만지작거렸다.

질척거리는 타액으로 범벅이 된 성기를 빠는 소리와 “으응, 좋아, 응, 더….” 취한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깊은 산중 으슥한 동굴 안에 울려 퍼진다.

서진은 자꾸만 뿌예지는 초점을 억지로 맞추며 아래에서 열심히 제 것을 애무하는 철의 환영을 내려다보았다. 며칠 씻지도 못한 자지가 더럽지도 않은지 맛있는 사탕처럼 빨고 있었다.

그의 머리가 위아래로 조금씩 들썩일 때마다 희미한 램프 불빛에 잘생긴 뺨이 좆 기둥 모양대로 불쑥, 튀어나왔다가 다시 홀쭉해지는 게 보기 좋았다.

서진은 왠지 약에 취한 것처럼 평소보다 사정감이 무디게 올라와 허리를 살짝 움직여 보기도 했다. 정작 펠라를 받는 건 자신인데, 철은 자기가 더 흥분한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어느새 그가 한쪽 손으로 서진의 속옷을 완전히 끌어 내려 허벅지에 걸쳐두더니 타액을 일부러 뱉어내듯 밑으로 흘려보냈다.

아흐으…. 서진이 야릇한 감각에 고개를 도리질했다. 축축한 타액이 음경을 지나 회음부까지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윽고 따뜻한 손가락이 동그란 구멍의 주름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타액을 꼼꼼히 바르듯이 지분거렸다.

철은 맹세코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너무 잘 느끼는 서진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쉴 새 없이 살덩이를 빨아올리면서 일부러 침을 뱉고, 입구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으로 천천히 안을 파고들었다.

번들번들 젖은 손가락이 앞뒤로 부드럽게 왕복하며 두 마디까지 들어간 순간, 아으읏…! 서진의 입에서 터져 나온 신음이 작은 동굴 안에 메아리쳐 울렸다.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철이 달뜬 숨을 터뜨리며 손가락을 한층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찔꺽찔꺽, 흠뻑 젖은 소리가 흥분을 돋웠다.

좁은 구멍을 파고든 것이 뒤로 나갔다가 다시 미끄러져 들어올 때마다 부드러운 내벽에 푹푹 처박혔다.

“응, 거기, 좋아…!”

서진이 몸을 바르르 떨며 눈을 지그시 감는다.

철은 계속 그의 뒤를 들쑤시며 나머지 한 손으로 자신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리더니, 이미 오래전부터 한계까지 발기해 좆물을 질질 흘리고 있는 제 성기를 해방했다.

여전히 오른손은 구멍을 철퍽거리면서 왼손으로 제 묵직한 좆 기둥을 감싸 쥐었다. 하아…. 자꾸만 끊어지려는 이성의 끈을 억지로 붙들고 탁탁, 두꺼운 기둥을 쥔 손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평소에도 수음을 잘 안 하는 편이었지만 서진을 알고 나서는 정말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자위를 하면 무조건 그의 얼굴을, 그 순진한 미소를 떠올릴 것 같아서, 상상으로라도 밀물처럼 밀려드는 죄책감에 감히 할 수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야심한 밤, 깊은 산속 동굴에 발정 난 두 남자의 음란한 소리가 가득 찼다. 찰박찰박, 탁탁…. 젖은 소리와 ‘응, 으응’, 야릇한 신음이 섞여 더할 나위 없이 색정적이다.

철은 야들야들한 내벽 안을 휘젓는 손가락이 자지라도 되는 것처럼 흥분했다.

머리 꼭대기까지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욕망을 꾹 참으며 제 성기를 괴롭히다시피 세게 쥐고 탁탁 쓸어내렸다. 동시에 갈고리처럼 휜 손가락으로 서진이 자지러지는 내벽 안을 살살 긁어주었다.

몽롱하게 취한 서진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신음을 마음껏 내지르며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아…, 버섯 최고…!” 따위의 말을 중얼거린 것 같기도 하다.

작은 동굴이 금세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서진의 구멍을 손가락으로 쑤시며 제 것을 흔드는 철의 손길이 점점 다급해졌다. 아흐, 아아! 서진이 사정이 가까워졌는지 몸을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도리질하기 시작했다.

곁눈질로 끊임없이 그의 얼굴을 훔쳐보던 철이 작은 구멍을 더 세게 몰아붙이며 쾌락을 끌어냈다.

아으윽! 마침내 단마디 비명과 함께 서진의 귀두 끝에서 비릿한 정액이 터져 나왔다.

철은 그 맛을 음미라도 하는 것처럼 목울대를 움직이며 입 안에서 터져 나오는 정액을 꿀꺽꿀꺽 기껍게 받아 삼켰다.

동시에 손으로 쓸어내리던 거대한 자지 끝에서 흰색 액체가 주욱, 쭉 쏟아져 나왔다.

항상 그렇듯 거의 동시에 시작한 사정이지만 서진의 사정이 끝난 후에도 계속 뿜어져 나오는 그의 정액은 바닥에 뿌연 웅덩이가 생길 만큼 양이 많았다.

“하으…. 하아….”

“허억, 허억….”

사정을 막 끝낸 두 남자의 거친 숨이 사방에 흩어졌다. 여전히 애욕에 빠져 있는 철이 정신없이 서진의 이름을 부르며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오는 순간.

“…버섯 최고….”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린 말을 끝으로 서진의 시야가 셔터를 내리듯 암전되었다.

모든 게 참인지 거짓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 같았고, 또 가짜 같은 기억이라고 생각하면서.

창문에 뿌옇게 낀 성에처럼 흐릿하게 떠오르는 끔찍한 장면들은 딱 여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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