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트럭의 낡은 엔진 소리가 초가집 앞에서 멈추자, 조심스레 문을 연 서진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발을 디뎠다. 살금살금 걸어 방으로 향하던 중 마루에 앉아 콩나물 대가리를 따고 있던 할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런 옘병할 자슥.”
서진을 발견한 할아버지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싸리 빗자루를 손에 들었다. 며칠만 다녀온다던 녀석이 연락도 없이 일주일 만에 나타났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아 잠깐만, 할아버지! 궁둥이 말고 다른 데! 다른 데로, 네?”
거긴 이미 며칠 동안 다른 몽둥이로 시달린 전적이 있기에 당황한 서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랄.”
“아악!!”
사정을 봐주지 않는 할아버지의 빗자루가 엉덩짝 위에 호되게 떨어지자 서진은 새끼 돼지 같은 비명을 내지르며 방으로 피신해 급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쯧, 기회를 놓친 사냥꾼처럼 걸음을 돌리려던 할아버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방문에 대고 입을 열었다.
“니 애비헌테 연락 왔었다.”
“…예? …무슨 연락이요?”
“뭐긴 뭐여. 쪼깨 기둘리믄 델러 온다 그라제.”
“…….”
멍하니 듣고 있던 서진은 어쩐지 넋이 빠진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무슨 다섯 살짜리 아이를 보육원에 버리고 갈 때 나오는 대사 같았지만, 아버지는 반드시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으니 조금만 기다리면 정말 데리러 올 것이다.
곧 서울에서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 역할을 수행할 날이 머지않았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고 돔 페리뇽을 물처럼 마시며 지폐로 똥을 닦는 영 앤 리치 앤 핸섬가이로.
물론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얄팍한 기억력엔 어느새 왜곡이 생겼다. 그래, 그를 좋아한들 뭘 어쩌겠는가. 결국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을.
다음 날, 커다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오랜만에 고추밭으로 끌려 나온 서진은 어느새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초록색 고추들을 보며 입을 헤 벌렸다.
“고추가 실하네….”
눈을 게슴츠레 뜨고 어쩐지 변태 같은 대사를 읊는 그를 보던 할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뭣 하냐. 싸게싸게 안 허고.”
서진은 할아버지의 호령에 맞춰 모종삽을 이용해 흙 속에 비료를 넣었다. 무럭무럭 자라서 부디 일확천금을 안겨줘. 허튼 생각을 하며 비료를 넣다가도 은근히 주변을 살피는 서진의 눈알이 바삐 굴러다녔다.
‘안 나타날 리가 없는데….’
결국 평화롭게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밤이 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나타날 리가 없는데 안 나타났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다음 날도.
또 다음 날은 밭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 철의 집에 두고 왔던 자신의 캐리어가 휑한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
멍하니 가방을 바라보던 서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샜다. 무슨 말을 해도 절대 안 떨어져 나갈 것처럼 굴길래 쓰레기가 될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이건 쉬워도 너무 쉬운 게 아닌가.
……뭐, 원래 스무 살이란 그런 나이일지도. 처음 관계를 맺은 상대에 미쳐 정신이 회까닥 나갔다가도 금방 콩깍지가 벗겨지는, 그런 나이.
‘젠장. 나도 처음이었는데.’
스스로 자처한 일이라지만 입맛이 쓴 것은 어쩔 수 없다. 서진은 손바닥으로 눈두덩이를 꾸욱 누르며 축축해진 눈시울을 훔쳐내고 가방을 옮겼다.
***
“염병 총각이 철이는 으짜고 혼자 왔당가. 둘이 만날천날 붙어 댕기드만.”
“별로요.”
다음 날, 영옥의 고구마밭 일을 도와주던 서진은 딱딱한 얼굴로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아, 철이 입원했다던디?”
옆에서 일을 돕던 순자가 한마디 던지자 영옥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어메, 으짜다가?”
“나야 모르제. 이장이 그 집에 갔다가 문짝이 열려 있어서 들가본께 고러코롬 됐다는디. 염병 총각은 알어?”
순자의 질문에 서진이 경직된 몸을 흠칫 떨며 대답했다.
“예? 아뇨, 몰라요.”
진짜 몰랐다. 그 건강 빼면 시체일 것 같은 녀석이? 설마 정력 손실 뭐 그런….
차라리 입원해 있다면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이렇게 방치할 리가 없지 않은가.
아마 마당에 가져다 놓은 짐 가방은 고용인을 시킨 모양이지. 걱정되는 마음과 더불어 남몰래 안도하는 치졸한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길래…….’
여우굴에 숨은 여우는 자기를 쫓던 맹수가 조용해지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곤 한다.
밭일은 마친 서진은 여우굴에 숨어든 머저리처럼 자꾸 고개를 내밀어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결국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가서 딱 어디가 얼마나 아픈지만 몰래 확인하고 오자면서.
“10층 1001호로 가시믄 됩니다.”
도착하자마자 안내대에 병실을 물어본 그가 주변을 살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당연히 병실로 직접 들어갈 생각은 없었고, 지나가는 의사를 붙잡아 보호자인 척 상태만 물어볼 작정이었다.
계획은 예상보다 순조롭게 흘러갔다. 지박령처럼 병원 복도를 떠도는 서진을 발견한 옛 담당 의사가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넨 것이다.
“…네??”
얼마간 병원 의자에 앉아 의사의 말을 경청하던 서진이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하이고. 말도 못 했었죠. 뭐, 큰 것만 말하믄 쇄골 골절에 늑골도 네 개나 나가브렀고. 몸살로 열이 거의 40도까지 올랐은께 디질 뻔한거죠잉. 저러고 으째 안 실려 오고 돌아댕겼나….”
“…….”
멍하니 듣고 있던 서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럼 그런 몸 상태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심지어 며칠 밤 내내 그 짓까지 했단 말인가.
‘어쩐지 몸이 뜨끈뜨끈하더라니….’
그것도 모르고 게임 못한다고 등짝을 철썩철썩 후려쳤으니, 서진은 제 무신경함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 한쪽 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귓가에서 윙윙거리던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참. 범철 씨 이번 주말에 퇴원하믄서 우리 조카랑 선보기로 했는디, 얘기 들었어라?”
“…네?”
“그때 준 번호로 하두 연락이 안 와서 다시 물어본께 주말에 보자고 하든디.”
서진은 머리 위로 쟁반이 댕그랑 떨어진 듯한 충격으로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로봇처럼 ‘네? 네??’만 반복하는 서진에게 충격적인 정보를 던져 놓은 의사는 가벼운 인사를 끝으로 다시 총총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1001호의 문이 미끄러지더니 시끄러운 소리가 나며 서진 또래의 남자애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을 배웅하러 따라 나온 익숙한 남자와 함께.
“그 주둥아리 그치고 가라잉.”
시시덕대며 웃고 떠드는 친구들을 보며 눈썹을 찌푸린 철이 시끄럽다는 듯 한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 말에 은근히 조용해진 대여섯 명의 남자아이들은 덩치도 크고 성숙한 철이랑 같이 있으니 10대 소년처럼 어려 보였다.
그들을 배웅하러 복도로 나온 철과 눈이 마주칠 뻔한 찰나, 서진은 지나가던 아저씨 뒤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그러고는 바닥을 보며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는 다시 병실로 들어가는 커다란 발을 확인한 뒤에야 저를 미친놈 보듯 노려보는 아저씨를 놓아주었다.
그 후에도 1001호엔 문턱이 닳도록 많은 사람이 드나들었다. 마을 이장이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는 바람에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왔는데 아주 병원에서 잔치라도 열 기세였다.
‘인간관계라고는 나밖에 없는 척은 다 해놓고.’
정체 모를 배신감을 느낀 서진의 아랫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사실은 철이 걱정했던 것보다 멀쩡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제 그의 상태도 알았으니 그만 돌아가야 하는데, 무겁게 가라앉은 발이 천근만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서진은 밤늦도록 병실 앞을 서성이다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드르륵―
“흐억!”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서진이 다급하게 의자 밑으로 몸을 숨기다가 기둥에 머리를 쿵, 부딪쳤다.
“아, 씹!”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그가 짧게 욕설을 뱉었다.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의자에 머리를 박는 남자라니. 오히려 여길 좀 봐달라는 꼴이 아닌가.
서진은 결국 병실 문을 연 커다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조용한 복도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흐른다.
한겨울처럼 싸늘한 눈빛으로 서진을 내려다보던 철은, 놀라울 만큼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시선을 거둔 다음 그를 스쳐 지나갔다.
“…….”
서진은 맹한 얼굴로 입을 떡 벌린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흡사 투명 인간 내지는 길가에 싸질러진 돌멩이가 된 기분이랄까.
다신 아는 척하지 말자고 으름장을 놓은 주제에 서운함 따위의 이중적인 마음이 꿈틀거렸다.
‘나 없으면 못 산다고 울고불고 매달릴 것처럼 굴 땐 언제고….’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병원 밖으로 뛰쳐나온 서진은 급히 트럭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화가 난 사람처럼 세게 액셀을 밟았다. 괜찮은 걸 확인했으니 됐다고 생각하면서.
***
“왐마. 또 오셨네요.”
“…네, 안녕하세요….”
다음 날. 병원 복도에서 의사와 마주친 서진이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왜냐, 혹시 철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기억 상실증이라도 걸린 게 아닌가 의심됐기 때문에.
기억 상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어제 밤새도록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제 저를 그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거였다.
기억 상실증은 미디어에서도 자주 나오는 소재가 아니던가. 지난번에 봤던 영화 주인공도 교통사고로 기억 상실증에 걸렸더랬다.
복도 의자에 앉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서진은 병실로 저녁 식사를 끌고 가는 간호사를 보고 냉큼 뛰어들어 카트에 손을 얹었다.
“제가, 제가 가져다줄게요!”
“예?”
서진은 특유의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를 안심시키고 카트를 넘겨받았다.
드르륵―
병실 문을 열자 넓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그림 같은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간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카트를 끌고 다가가는 동안에도 남자는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밥….”
눈치를 살피며 한마디 건네자 그제야 철은 서진을 한번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음보다 차갑게. 얼른 알아서 밥이나 차리라는 도련님처럼.
기억 상실증이다. 이건 기억 상실증이 아니고서야….
드라마와 영화를 너무 많이 본 서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삼켰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책장을 넘기는 남자를 보며 당황한 서진은 일단 테이블을 펼친 다음, 가져온 식사부터 대충 꺼내놓기로 했다.
한정식집이야 뭐야. 놓아도 놓아도 끝이 안 보이는 반찬은 가짓수가 더럽게도 많았다.
그렇게 그릇을 올려놓으며 그를 흘끔 쳐다보는 순간 짙은 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 닿았다.
“…엇.”
당황한 서진의 손에서 뜨거운 국그릇이 미끄러졌다. 국그릇은 중력의 법칙대로 철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내용물을 쏟아낸 다음 그대로 굴러떨어져 바닥에서 와장창! 깨어졌다.
“…….”
“미, 미안…. 아니 죄송, 아니 미안….”
뜨거운 것에 데었을 것이 분명한 다리를 보며 공황 상태에 빠진 서진이 허둥지둥 손으로라도 털어내기 시작했다.
“손 치워.”
그 염병에 이골이라도 난 건지, 철이 미간을 찌푸리고 잘생긴 얼굴을 구겼다. 탁 소리가 나게 서진의 손을 쳐낸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나가.”
명백한 반말이다. 그럼 기억 상실증이 아니라는….
“…네? 아니… 어?”
서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가라고.”
귀찮은 모기를 쫓아내는 것처럼 노려보는 눈빛이 매정하다.
얼떨결에 바깥으로 쫓겨난 서진은 문밖에 서서 멍청한 얼굴로 눈꺼풀을 끔뻑였다. 안에서 호출을 눌렀는지 간호사가 급하게 달려와 그를 밀쳐내고 병실로 들어갔다.
서진은 터덜터덜…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와 트럭에 올라탔다. 왠지 목구멍이 턱 막힌 것 같은 느낌에 손으로 가슴께를 짚어보았다.
‘물론 내가 먼저 아는 척하지 말자고 하긴 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며칠 만에 너무 손바닥 뒤집듯이 변한 게 아닌가. 뭔가 잘못 본 게 아닐까. 말을 잘못 들었다거나. 아무튼 착오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에이씨.”
‘한 번만 더 확인해볼까.’
서진은 도로 트럭에서 내려 비장한 걸음으로 철의 병실로 향했다.
드르륵. 망설임 없이 1001호 문을 열어젖히자 철이 있어야 할 곳에 빈 침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갔어.
서진은 눈에 불을 켜고 병실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가 이불을 휙 들춰보더니 기어코 바닥에 엎드려 침대 밑까지 확인했다.
그때 불현듯 뒤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병실의 주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옅은 담배 냄새가 공기 중에 희미하게 번진다.
“…어….”
어두운 병실 안, 남자와 마주친 서진의 입에서 바보 같은 탄식이 샜다. 무계획으로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서진답게 머릿속으론 뒤늦게 할 말을 고르고 있었다.
“…아까 동전… 흘리고 간 것 같아서…. 맞다. 그 뭐냐, 너 선… 본다며? 맞아?”
무의식중에 가장 신경 쓰였던 것이 입 밖으로 대뜸 튀어나왔다.
“어.”
철은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그를 지나쳐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어, 그래? 잘 해봐.”
“기여.”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남자를 보며 할 말을 잃은 서진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던 민망함에 속이 쓰렸다.
“뭐야 그… 이쁘냐? …사진도 봤어?”
서진은 괜히 시선을 떨구고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서진아.”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바닥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니 와 분위기를 못 알아 처묵냐.”
서늘한 눈빛으로 말을 뱉는 철의 차가운 태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수가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
서진은 그의 입에서 나온 이질적인 대사에 현실감을 잃고 눈을 깜빡거렸다.
“인간이 앵간치 눈치가 읎어야제.”
“…응…?”
“니한테 볼일 없다고.”
마치 옆집 감나무에서 감이라도 따 먹고 나서 입을 싹 닦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어투다.
“……뭐?”
서진의 동공이 당황으로 불안하게 흔들렸다.
“뭐 생각보다 별거 읎대.”
“…….”
“인자 쫑알쫑알 씨부리싸는 것도 시끄럽고 그 얼굴 꼴도 보기 싫은께.”
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차분하게 비소 섞인 말을 내뱉었다.
“끄져.”
세상 하찮은 존재를 상대한 것처럼 냉랭한 시선을 던진 남자가 바로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닫아버렸다.
그 자리에 망부석이라도 된 것처럼 굳어버린 서진은 잠시 후 잊고 있었던 숨을 한 번에 터뜨렸다.
“…허.”
꺼져도 아니고 끄지라니. 귀에 차지게 달라붙는 것이 왠지 더 미천한 존재가 된 느낌이다.
하긴, 먼저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말자고 해놓고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멍청한 얼굴로 멈춰 서 있던 그는 고장 난 로봇처럼 삐거덕거리며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여멀건 낯짝에 시원한 밤공기가 닿으니 간신히 잃었던 현실감을 되찾을 수 있었다.
제대로 본 것도, 들은 것도 맞았구나. 아무 문제 없이 깔끔하게 끝나서 다행이다. 근데 나랑 잔 게 그렇게까지 별로였나. 온갖 상념이 뒤엉켜 머릿속을 점령했다.
발을 뗄 때마다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서진은 끝내 스르륵 아스팔트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조금 전에 들었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참 나. 생각보다 별거 없었으면서 며칠 동안 그렇게 환장을…….’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인지 날숨인지 모를 것이 바람 빠지듯 흘러나왔다. 어쨌든 결과적으론 바라던 대로 된 것이 아닌가.
마음가짐과 달리 점점 코끝이 시큰시큰해지는 감각에 냉큼 몸을 일으키고 차에 올라탔다. 시동을 거는 손이 자꾸만 미끄러져 허공에 헛손질을 하다가 결국 핸들에 머리를 처박았다.
목구멍에 가시라도 걸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다. 코끝에 뭉쳐 있던 시큰함이 눈으로 번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자신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았을 뿐인데,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우는 것도 우스웠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어차피 악당은 울 자격도 없다.
이런 결말이 해피엔딩인 것을.
서진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짓이기며 눈물을 참아봤지만, 결국 눈가에 맺힌 물이 뺨을 타고 허벅지 위로 방울방울 떨어져 바지를 적셨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어린아이 같은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눈물방울에 섞여 불온한 감정이 다 빠져나가길 바라는 바람과 달리 마음은 찌꺼기처럼 남아 허공을 부유했다. 첫사랑이라는 애틋한 이름으로.
특별히 억울할 건 없었다. 원래 풋내기 첫사랑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 이룰 수 없는 것이었기에.
***
“아, 안 인나고 뭣 허냐. 오늘 산으로 갈랑께.”
아침마다 어김없이 울리는 할아버지 알람에 이불 안에서 바르작거리던 서진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
“…할아버지…. 저 아파요….”
“으디?”
“마음이 아파….”
“지랄허지 말고 싸게 나와.”
씹. 이번엔 진짠데….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거, 서진은 몸을 벌떡 일으켜 할아버지를 따라 인근에 있는 수렵 채집이 가능한 큰 산에 올랐다.
원래 이 촌구석은 사람이 슬퍼하면 에헤라 디야 자진 방아를 돌리며 구경하는 곳이었으니. 노루궁뎅이 버섯인지 빵댕이 버섯인지를 캔다며 몰려온 마을 사람들도 함께였다.
깊은 산속, 서진의 손에 들린 호미가 흙바닥에 힘없이 푹, 박히며 작은 돌멩이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오메오메, 염병 총각! 누구 암살할 일 있당가?”
“…네?”
다급하게 달려온 영옥이 서진의 손에 들린 버섯을 툭 쳐서 떨어뜨렸다.
“그거 묵으믄, 꽥― 응? 깨꼬닥― 알제?”
영옥이 서진의 바구니 안을 가리키더니 손으로 제 모가지를 찍 긋고 눈알을 까뒤집는 제스처를 취했다. 어찌 된 게 죄다 독버섯이나 마약류 버섯만 골라 담은 것이 흡사 암살자의 바구니다.
“으째 저런 거만 골라 담는 것도 능력이구마잉….”
결국 바구니를 뒤집자 후드득 쏟아지는 독버섯을 바라보던 영옥의 딸, 재숙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옆에서 영옥이 뭔가 생각난 듯 말문을 열었다.
“참, 재숙이 니 주말에 영화 보러 갈 사람 없담서. 거 염병 총각이랑 댕겨와야.”
“…씁…. 염병 오빠는 쪼까 그런디…. 영화 보다가 또 처우는 거 아니여?”
재숙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은 서진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처울긴 누가 울어. 누가 누가!”
서진은 들고 있던 바구니를 집어 던지며 성난 원시인처럼 목에 핏대를 세웠다. 안 그래도 눈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들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판에 재숙이 기름을 부었다.
결국 독기가 오른 그는 재숙과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주말 영화 약속을 받아내고 나서야 구겨진 얼굴을 펼 수 있었다.
***
주말이 가까워질수록 서진의 기분은 바닥을 치다 못해 지하 암반수를 마실 수 있을 만큼 파고 내려갔다.
‘선보는 여자, 얼마나 예쁘려나. 이왕 쪽팔린 김에 사진이라도 보여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따 뭔 준비를 요로코롬 오래 하고 자빠졌디야. 아 언능 처나오랑께!”
아까부터 밖에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던 재숙이 방문에 대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거의 다 됐어.”
서진은 그 목소리에 급하게 드라이기를 켜고 롤 빗으로 머리칼을 정리했다.
“무슨 머시마가 준비를 30분씩이나 처하는….”
“오래 기다렸지?”
끼익, 낡은 방문이 열리고 안에서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미남이 걸어 나왔다.
마당에서 짜증을 내던 재숙은 깔끔하게 차려입은 서진을 보자 금세 얼굴이 환해지더니 “기다릴 만허네….” 하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서진은 재숙을 트럭 조수석에 태우고 시내로 출발했다. 가는 동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음악에 맞춰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하지만 기분이 좋아지긴커녕 풋풋한 사랑 노래 가사에 점점 기분이 개똥 같아졌다. 서진은 언제 신나게 노래를 불렀냐는 듯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눌러 라디오를 꺼버렸다.
“지킬 앤드 하이드여 뭐여….”
혼자 노래를 불렀다가 화를 냈다가 염병을 떠는 서진을 보던 재숙이 중얼거렸다.
잠시 후 도착한 시내 영화관은 또다시 누군가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대신 이번엔 삼류 에로 영화가 아닌 〈프리 월리〉라는 범고래와 소년의 우정을 담은 감동적인 영화라는 점이 달랐지만.
“흑… 오메 짠한그… 크흥…!”
“누가 울보야? 어? 누가 울보야?”
서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에 젖어 눈물을 흘리는 재숙을 보며 기회라도 잡았다는 듯이 신나게 놀려댔다.
“난 안 우는데. 내 눈 봐봐. 되게 메말랐지?”
“…….”
눈꺼풀을 손가락으로 벌리며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는 서진의 유치한 행동에 재숙의 눈물이 쏙 들어갔다. 물론, 서진으로서는 달래주려는 의도가 조금도 없었다.
영화 관람을 마친 두 사람이 거리로 나오고, 인제야 미안함을 느낀 서진이 괜히 과장되게 행동하며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우리 재숙이 먹고 싶은 거 말만 해. 용돈 받은 거로 맛있는 거 사줄게.”
할아버지에게 용돈을 많이 받아 주머니도 꽤 두둑하다.
재숙이 고심해서 고른 경양식집에서 돈가스를 먹는 동안 뮤직박스의 DJ가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며 사랑 노래를 틀어주었다.
하필이면 노래 가사가 소개로 처음 만난 남녀의 설레는 사랑 이야기였다. 결국 서진은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재숙이 포크를 내려놓기 무섭게 밖으로 나와 근처의 고급스러운 외관의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외관만큼 잘 꾸며놓은 내부는 넓은 간격으로 고풍스러운 테이블과 가죽 소파가 놓여 있어 제법 서울 호텔 라운지 느낌이 났다.
“두 분이세요? 이짝으로.”
어색한 말투를 구사하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두 사람은 옆에 인테리어용 자작나무가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 쪼까 비싸 보이는디….”
주변을 둘러보며 작게 속삭이는 재숙을 향해 아무거나 시키라며 여유를 부리던 서진은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눈에 들어온 헉 소리 나는 가격에 눈을 비비적거렸다.
‘젠장, 용돈 다 털리게 생겼네.’
당황한 심경이 표정에 그대로 표가 난 모양인지, 서진의 눈치를 살피던 재숙은 가장 저렴한 블랙커피를 시켰다. 서진은 그보다 먼저 블랙커피를 먹겠다고 말해둔 상태였다.
블랙커피를 홀짝거리며 마신 재숙은 생전 처음 맛보는 쓴맛에 인상을 팍 찌푸리고 커피크리머를 찾았다.
“오메. 사약이여? 나 죽이려고.”
“재숙이 아직 아기네, 아기. 인생의 쓴맛을 몰라.”
피식 웃음을 머금은 서진은 보란 듯이 커피잔을 들고 입술에 가져다 댔다. 그사이 뒤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던 재숙이 중얼거린다.
“어…? 철이 오빠 아니여?”
“푸흡!”
동시에 서진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물이 테이블 위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에 “웩, 염병.” 하고 얼굴을 찡그린 재숙이 여전히 서진의 뒤편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따… 여자랑 선보는 갑네.”
“…여자 얼굴 보여? 어? 예뻐? 누구 닮았어? 탤런트로 말해봐.”
바로 허겁지겁 입 주변을 닦은 서진이 폭풍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기에 재숙에게도 잘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
“응? 심은하? 고소영?”
“뒤통수밖에 안 보여라. 누군지 몰라도 겁나게 땡잡았구마잉. 철이 오빠 잡으믄 복권 당첨 되는 건디.”
“…왜…?”
“아, 왜는 무슨. 범씨네가 여서는 최고 부자인디. 하긴 복권이 다 뭐여, 설 강남에 가도 큰 건물 몇 채는 사고도 남제.”
“…….”
“글고 철 오빠는 이 얼굴도 얼굴인디, 몸이….”
“심하게 좋지.”
서진은 재숙과 함께 고개를 주억거리며 ‘벗으면 더 좋아.’라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왜, 옷으로 감추려야 감출 수 없는 몸이 있지 않은가. 마님들이 왜 돌쇠에게 고봉밥을 주었는지 알게 되는, 그런 몸 말이다.
“오메… 복 받은 가시나.”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신 재숙이 프림 넣은 커피를 홀짝거렸다.
서진은 그냥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당장 가서 이 결혼 무효라고 깽판 치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내느라 달달 떨리는 손으로 커피잔을 들었다.
미친 듯이 뒤돌아보고 싶다. 궁금해서 뒈져버릴 것 같다.
결국 쓴 커피가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도 모르게 원샷을 때린 서진이 화장실에 가기 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실 소변보다 눈물이 급했다.
철이 선을 본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직접 마주하게 되니 충격으로 골이 띵하게 울리는 것 같았다. 또 눈시울이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괜찮아 짝, 괜찮아 짝……. 서진은 스스로 세뇌하듯이 속으로 손뼉을 쳐댔다.
괜찮기는 개뿔.
한국이 총기 소지가 불법이라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그 자리에서 난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좀비처럼 비척비척 걸어가 커다란 화장실 문을 열었다.
“…….”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솨― 울리는 세면대 물소리가 들리며 손을 씻고 있는 익숙한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진짜 따라 들어온 거 아닌데.
당황한 서진은 세면대 앞에 서 있는 철을 보고 허둥대다가, 이곳이 화장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삐거덕거리며 소변기 앞으로 향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탓인지 당당하게 꺼낸 그것 끝에선 아무 소식이 없다. 나와야 할 곳은 따로 있는데 등 뒤로 식은땀이 나오는 것 같았다.
마렵지도 않으면서 이유 없이 고추를 꺼내놓고 서 있는 남자라니. 이대로라면 바바리맨과 다를 게 뭔가.
서진은 속으로 욕을 삼키고 다시 그것을 안으로 집어넣으며 옷을 정리했다. 급한 마음에 엉성하게 움직이는 손 때문에 결국 속옷이 바지 지퍼에 끼이고 말았다.
“씹, 이게 왜 안 잠….”
당혹스러움에 욕을 짓씹으며 부드러운 천에 끼인 지퍼를 끌어 올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혼자 지퍼를 잡고 짧게 점프를 뛰었다가 상체를 푹 숙이고 힘을 줬다가 난리도 아니다. 그사이 손을 다 씻었는지 세면대에서 흐르던 물소리가 뚝 멈췄다.
‘좆됐다. 쪽팔려.’
터벅터벅 발걸음 소리가 울리더니 서진을 지나친 커다란 남자가 그대로 화장실 문 쪽으로 향했다.
“야.”
극도의 쪽팔림에 남아 있는 이성을 상실해버린 서진이 기어코 그를 불러세웠다. 어차피 좆된 거 더 체면을 차릴 필요도 없었다.
“어때, 잘 될 것 같아? 마음에 드냐?”
남대문을 당당하게 열어놓은 채 대놓고 제일 궁금했던 질문부터 던졌다.
“기여.”
문 앞에서 멈춰서 뒤돌아본 철이 귀찮다는 듯 단조로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잘됐네. 역시 그 뭐냐… 지푸라기도 제 짝이 있다더니.”
당장 뒷목 잡고 쓰러질 것 같았지만, 서진은 기지를 발휘해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할 말이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고개를 돌리는 철의 뒤통수에 대고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그 목소리에 뒤돌아본 철이 여전히 서늘한 눈매로 차가운 시선을 던진다.
시선을 맞닥뜨리자 심장이 쿵쿵 뛰며 요동쳤다. 괜히 가느다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힘겹게 입을 떼는데, 긴장한 목소리가 묘하게 흔들렸다.
“뭐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진짜 나랑 한 게 그 정도로… 별로였냐?”
“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돌아온 대답에 쿵쾅대던 심장이 구렁텅이로 쿵 내려앉는다.
또 제 무덤을 스스로 판 것이다. 서진은 괜히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울적해진 얼굴을 감춘 채 중얼거렸다.
“…그래…. 얼마나 싫으면 병원에 있는데 짐을 그렇게 급하게 돌려주고…. 그니까 바로 여자까지 소개받았겠지.”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꺼낸 이야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찌르는 말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더니,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 서진의 앞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다.
“그래도 덕분에 마음에 드는 여자 만났….”
시선을 내리깐 서진이 아무 말이나 내뱉는 순간.
쾅!
큰 충격음이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서진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자, 그의 다부진 팔뚝이 벽을 향해 뻗어 있었다.
“니가 뭘 알어…?”
철이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물음을 던졌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그의 상태를 살피며 저 주먹이 꽂힌 곳이 제 얼굴이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다 침을 꼴깍 삼켰다. 무조건 기절이다.
“…….”
서진이 공포로 얼어붙은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마주 본 두 사람 사이에 숨 막히는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철이 먼저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활짝 열린 지퍼를 빤히 쳐다보았다. 빤쓰가 검은색인 점이 그나마 다행이랄까.
“흡.”
순간 철의 팔이 움직이자, 흠칫 놀란 서진이 숨을 들이켰다.
저 주먹에 맞으면 죽는다.
눈을 질끈 감은 서진의 키에 맞춰 자세를 조금 낮춘 철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속옷에 끼인 지퍼를 빼내기 시작했다. 한쪽 손등에 붉은 피가 묻어 있는 채로.
“하…, 이게 으짜다가….”
정말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작게 중얼거리며 부드러운 천을 당겨 분리하는 데 성공한 그가 경쾌한 찌익― 소리와 함께 지퍼를 올려주었다.
“…….”
철은 망부석처럼 굳은 서진을 아무렇지 않게 지나쳐 페이퍼 타월로 손등을 대충 닦아낸 다음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전 애인과의 마지막 추억이 남대문을 잠가주는 거라니. 하마터면 프리킥에 대비하는 축구 선수처럼 중요 부위를 가리고 다닐 뻔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건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땐, 철과 선보던 여자는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겼는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
대가리 속 꽃밭에 나비가 날아다니는 서진답게 실연의 아픔은 생각보다 늘어지지 않았다.
우울감이 그를 덮치려고 할 때마다 할아버지가 싸리 빗자루로 궁둥짝을 때려대거나 끌려 나가 소처럼 밭을 갈아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서진은 그 후로도 마을에서 두어 번 철을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에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공기 취급을 당했다.
바로 지금처럼.
“기여. 고맙다잉.”
“예.”
집에 돌아가는 길에 밭에서 일하던 철과 마주친 할아버지가 그에게 농사에 관한 질문을 하는 동안 바로 옆에 있었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오기가 생겨 옆에서 괜히 혀를 내빼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놀려도 봤지만, 그는 서진이 투명 인간이라도 된다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뭐, 아마 그 여자랑 잘돼가고 있는 모양이지. 이제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그러든지 말든지.
“다덜 와서 샛거리 드셔라.”
“오메. 굶어 디질 뻔했는디.”
“염병 총각도 거 쓰잘데기 읎는 짓 고만하고 언능 와서 처묵어.”
작은 호미로 멀쩡한 흙을 찍어대던 서진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철에게 무시당한 다음 날, 마을 사람들과 함께 버섯을 캐기 위해 인근에 있는 가장 큰 산에 올라온 참이었다.
커다란 소쿠리를 중심으로 삼삼오오 둘러앉은 아주머니들과 아저씨들이 떡을 집어 먹으며 떠들어 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래떡이에요? 난 꿀떡이 좋은데.”
어느새 소쿠리 앞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은 서진이 툴툴거렸다.
“저래 놓구 젤 잘 묵제잉.”
“하이고, 말해 뭐 한디야.”
불평하는 게 늘 있는 일이라는 듯, 다들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무시하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런 취급이 익숙해진 서진도 아무렇지 않게 가래떡 한 줄을 입에 물고서 우물거렸다.
새참을 먹던 중 옆에 있던 영옥이 뭔가 떠올랐는지 조용히 서진을 불러내더니 바구니에 가득 담긴 털북숭이들을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자자, 요로코롬 노루 궁둥이맹키로 생긴 거. 요게 한나에 만 원이여, 만 원.”
“하나에 만… 원이요…?”
비싼 가격에 놀란 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일확천금의 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털북숭이 100개면… 100만 원? 고추밭이 아니라 버섯밭을 했어야 하는데.
“기여. 인자 알았제? 긍께 자꾸 흙만 파지 말구 나무 같은 데 잘 찾아봐야.”
영옥이 조심스레 바구니를 덮으며 일급 기밀을 전달하는 첩보 요원처럼 속삭였다. 비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남은 가래떡을 잽싸게 입 안에 욱여넣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노루궁뎅이 하나에 만 원….’
서진은 눈에 보이는 모든 나무를 샅샅이 살피며 하얀 토끼 엉덩이 같은 모습으로 둔갑한 만 원짜리 버섯을 찾아다녔다.
일단 노루궁뎅이인지 엉덩이인지를 몇 개 캔 다음, 밭에 심어서 재배해야지. 근데 버섯은 어떻게 자라는 거더라.
버섯을 땅에 씨앗처럼 심어서 고추처럼 재배하겠다는 헛된 망상을 하며 걷는 발걸음엔 기대가 가득했다.
“어…! 앗싸.”
어지럽게 엉킨 잡초 사이로 쓰러진 커다란 나무 밑에서 털이 복슬복슬한 흰 버섯을 발견한 서진이 냉큼 다가가 그것을 쑥, 땄다.
물이 주르륵 흐르는 이상한 감촉에 얼굴을 찌푸린 것도 잠시, 바로 눈앞에 보이는 나무 꼭대기 위에 있는 버섯을 발견한 그가 주저 없이 나무 위에 올랐다.
“야 이 눔아― 조심혀!”
멀리서 지켜보던 할아버지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가 산자락을 울렸다.
“걱정 마세요―!”
해맑게 대꾸한 서진이 꼭대기에 걸린 세종대왕을 향해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어릴 때 집 정원에 있는 소나무를 타고 놀았던 버릇이 나와 꽤 안정적인 자세였다.
서진은 결국 보송보송한 버섯을 따 손에 들고 땅에 착지한 다음, 계속해서 바구니를 채워나갔다. 이 좋은 걸 진즉에 알지 못한 게 한이라면 한이다.
산삼을 캐는 심마니처럼 무아지경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바구니 안이 수북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산속 깊은 곳까지 들어와 버렸는지 마을 사람들과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조난되기 전에 돌아가야겠다고 뒤로 돈 순간. 눈앞의 절벽에 걸린 커다란 나무에 하얗게 핀 버섯이 무려 네 개, 사만 원이 매달려 있었다.
심봤다.
침을 꼴깍 삼킨 서진이 조심스럽게 나무 가까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양팔로 다 끌어안기 힘들 정도로 두꺼운 나무 기둥은 성인 남자의 몸무게를 충분히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서진은 절벽 근처에 가로로 자라난 나무에 매달리듯이 올라앉아 슬금슬금 이동하며 가까운 것부터 따기 시작했다.
버섯에 정신이 팔린 사이 미끌, 몸뚱이가 휘청이며 까마득한 아래로 작은 돌멩이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후우….”
뒈질 뻔했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 순간.
“까악―!”
“아!”
하필 둥지가 그곳에 있었는지, 화난 까마귀가 세찬 날갯짓으로 서진의 머리를 강타했다. 서진은 한순간 몸의 중심을 잃고 기우뚱 기울었다.
심장이 철렁하며 시야가 순식간에 뒤바뀌더니 보여서는 안 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뺨을 스치는 바람과 함께 몸이 공중에 붕 뜨는, 느껴져서는 안 될 감각이 느껴진다.
“아 좆됐….”
아련하게 완성되지 못한 ‘좆됐….’을 마지막 대사로 서진은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서 저를 끌어당기는 중력을 고스란히 느끼며 한여름 산들바람에 몸을 맡겼다.
몸의 모든 감각과 공기의 흐름마저 느릿하게 느껴졌다.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는 대신 유독 아쉬운 한 사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메롱은 하지 말걸.’
서진은 상당히 하찮은 아쉬움을 흩날리듯 허공에 남기고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 나름 괜찮은 죽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것도 같다. 그 짧은 순간에 열반이라도 한 것처럼 모든 세상사가 의미 없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점점 아래로, 더 아래로 추락하는 가련한 몸뚱이가 시원한 바람을 갈랐다.
희미하게 떠올린 사람마저 뿌옇게 흐려지는 찰나, 서진은 감았던 눈을 다시 번쩍 떴다.
‘죽긴 누가 죽어, 씹.’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그 선보는 자리도 수정 씨 때처럼 잘 빨아 주겠다고 깽판 치는 건데. 그것도 아니면 확 그냥 그 녀석을 덮쳐…….
쿵―!
죽기 전에 떠올리는 것치고 상당히 철없고 불경스러운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아무도 듣지 못한 미약한 충격음이 깊은 산복에 메아리치듯 울려 퍼졌다.
***
붙잡을 새도 없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던 철은 미친 듯이 뒤집히는 속을 전부 게워냈다. 우윽, 헛구역질할 때마다 투명한 위액이 후드득 쏟아져 나왔다.
가지 말라고 말 한마디 못 꺼내는 자신은 항상 서진과의 관계에서 길바닥에 엎드려 구걸하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모든 걸 가진 왕처럼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데, 자신은 구질구질한 거렁뱅이처럼 작은 것 하나에도 눈치를 보고 그의 기분을 살피느라 안달이 나니까.
사실은 그 사람이 떠난다는 생각만으로도 두개골이 산산이 조각나는 것처럼 아팠다. 온몸의 세포가, 흐르는 피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것 같다. 물 밖으로 꺼내져 파닥거리는 생선처럼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우윽….”
어쩌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사람에게 그런 더러운 제안을 했을까. 결국 제 기이한 집착만 더 악화되어 모든 걸 망쳐버릴 게 뻔한데.
그 사랑스럽고 부드러운 몸 안에 주체할 수 없는 욕망을 밀어 넣고 미친 듯이 사랑을 쏟아부었다.
그가 받아주지 않아 튕겨 나오는 감정이 쓰레기통에 나뒹굴어도 좋았다. 정신이 나갈 정도로 행복했다. 그냥 정신이 나간 게 맞을 것이다. 이제 자신은 완전히 고장 나버렸으니.
그에게 제 생명 줄을 쥐여 주었는데,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놀다가 구렁텅이에 내던져 버렸다.
비정상이라는 것을 알지만, 끝없는 눈밭을 눈덩이가 굴러가듯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자신이 어장 안의 생선이라면 그는 물이었다. 모든 것이었다. 그 사람이 없는 삶은 필요 없다고 몸에 흐르는 피와 살점이, 뼈마디 하나하나가 외치는 것 같았다.
아드레날린 효과라고 하던가. 솔직히 얼마 전에 제 손으로 차를 갖다 박았을 땐 대가리가 깨진 줄 알았다. 심하게 다친 데다 거의 40도에 육박하는 고열이 났지만, 서진과 같이 있는 동안 분비되는 정체 모를 호르몬 같은 것은 통증을 느끼는 감각마저 무디게 했다.
“하, 윽….”
하지만 이제 그 효과도 끝이었다. 가슴 부근을 세게 부여잡고 힘겨운 숨을 크게 들이쉰 철은 고통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다행히 그날 저녁, 우연히 집으로 찾아온 마을 이장이 쓰러진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 주었다.
철이 정신을 차린 건 그 후로 무려 이틀이나 지난 뒤였다. 어두운 병실 창밖으로 가느다란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빙글빙글 돌아버린 미친놈답게 눈꺼풀이 뜨이자마자 한 사람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찼다.
어디 갔지.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당장 보고 싶다….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몸이 여러 조각으로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에 괴로운 신음이 흘렀다.
“오메 환자분! 시방 움직이시믄 안 되는디!”
링거를 갈기 위해 들어온 간호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넓은 병실을 울렸다. 그를 무시하고 바깥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다급하다.
환자복을 축축하게 적시는 비를 맞으며 병원 앞에 서 있는 야간 택시의 운전석 문을 대뜸 열어젖혔다.
“…뭐여! 철이 아니냐잉?”
“차 좀 빌려주소.”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린 기사 아저씨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평소 그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긴말하지 않고 차를 내주었다.
물론 철이 서진을 알기 전까지의 성정이었지만.
운전석에 오른 그는 빗길을 미끄러지듯이 달려 곧바로 초가집으로 향했다. 지금 당장 그 얼굴을 봐야겠다.
순수함이 투명하게 비치는 고동색 눈동자를, 웃을 때 살짝 찡그리는 사랑스러운 콧잔등을, 입을 맞추면 달큼한 맛이 나는 보드라운 입술을.
진흙 길을 미끄러지던 타이어가 익숙한 초가집 앞에서 끼익 마찰하며 멈춰 섰다. 서진이 이곳에 온 후로 잠 못 이루는 밤마다 몇 번이고 찾아왔다가 다시 발길을 돌렸던 그곳이었다.
바로 헤드라이트를 끄고 어두운 차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방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밑에 있는 댓돌에 엉망으로 놓인 익숙한 신발이 보였다. 남몰래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돌아가고는 하던 신발이다. 그 작은 운동화를 보는 것만으로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하아….”
철이 진득하게 한숨을 내쉬며 핸들에 몸을 기댔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 집을 마련하고, 그의 신상을 꾸밀 것이다. 처음 몇 달, 어쩌면 몇 년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하겠지만 익숙해지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 거니까. 평생 그에게 개처럼 엎드리고 귀하게 섬기며 사랑해 줄 거다. 그가 원하면 그 보드라운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영원히 바라만 볼 수도 있다. 자신에게서 도망치는 것 외에는 그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작정이다.
그가 시키면 마더 테레사라도 죽일 수 있고, 제 사지라도 잘라낼 수 있었다. 그 사람만 내 옆에 묶어둘 수만 있다면….
어느새 굵어진 빗줄기 사이로 운전석 문이 벌컥 열렸다. 차에서 내린 환자복을 입은 남자는 어쩌면 일반 병원이 아니라 정신 병원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저벅저벅, 초가집을 향해 다가가는 발걸음이 시끄러운 빗소리에 묻혔다. 어느새 세차게 쏟아지는 비에 흠뻑 젖은 남자가 얇은 한지가 발린 낡은 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철은 눈앞의 얇은 문 너머 그가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쿵쿵 뛰는 흥분에 숨이 가빠졌다.
당장 들어가서 숨이 막히게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다. 그다음 억지로라도 차에 태워서 일단 가둬 놓고, 모든 준비를 마치는 것이다.
불온한 생각으로 거칠어진 호흡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남자는 닫힌 방문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만약….
또 도망가면 어떡하지.
어떻게든 도망쳐서 다른 사람 품에 안겨버리면. 상상만으로 얼굴이 흉포하게 구겨지면서 온몸의 근육이 성난 듯이 조여들었다.
그땐, 그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달아난 발목의 힘줄을 끊고 사지를 묶어서라도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놓을 것이다.
꽁꽁 묶어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두 다리를 벌려 자신을 밀어 넣을 것이다. 그 예쁜 얼굴에, 여린 몸에, 뜨거운 안에 제 욕정을 마음껏 싸지르고 말 것이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낡은 방 문고리를 잡은 남자의 손이 툭,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자신의 병적인 소유욕과 가장 소중한 사람을 향한 더러운 욕구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짐승만도 못한 감정이다. 가져서는 안 될 흉악한 이기심이다.
맥없이 떨군 손끝이 파르르 떨려왔다. 잠시라도 문고리에 닿았던 손끝을 잘라내고 싶었다.
어느 봄, 강당에서 어설프게 하프 줄을 튕기며 열심히 악보를 보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시답잖은 장난을 치며 해맑게 미소 짓던, 순수한 꼬마를 닮은 말간 웃음을.
벌러덩 자빠져도 툭툭 털고 일어나고, 실수해도 기죽지 않고 뻔뻔하게 능청을 떠는, 남몰래 마음에 품고 닳도록 꺼내어 본 사랑하고 사랑했던 모든 순간이 떠올랐다.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야 할 사람이 자신 같은 미친놈 때문에 망가지는 모습을 보느니 어디든 머리를 처박고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철은 자신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주에 가까운 욕을 퍼부어댔다.
서진은 멀리 도망가야 했다. 끔찍한 짐승으로부터. 결국 그의 인생을 망쳐버릴 미친놈으로부터. 자신이 없는 곳만이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곳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자신이 부서지는 한이 있대도 그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다.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서 있던 커다란 남자는 결국 다시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더니 도망치듯 초가집에서 멀어졌다.
철은 속으로는 죽어가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그가 없는 삶을 살아가는 척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며칠 후 마음이 약한 서진이 입원 소식을 듣고 병원에 찾아왔다.
막상 그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주하자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쏟아냈다. 그건 제발 도망치라고 외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어떻게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게 살아졌다. 숨만 붙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느 날은 누군가의 권유로 선을 본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날 화장실에서 그와 마주쳤다는 것 말고는.
그냥 죽어 있는 거나 다름없는 나날들이었다. 그건 삶이 아니라, 어서 제가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 그가 행복해지기만을 바라는 기도였다.
“하이고… 하필이믄 비가 겁나게 와브러서 으째쓰까잉…. 나 환장하겠고마잉.”
“아휴. 나도 걱정이 돼가꼬 어제 한숨도 못 자브렀어야.”
갑자기 이장이 불러서 마을회관에 왔더니, 모여 앉은 아주머니들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한 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신경 쓰지 않고 그들을 지나치던 철의 발길이 멈춘 건 단 한마디 때문이었다.
“김 영감이 야밤에 혼자 찾으러 나간다는 거 겨우 뜯어말렸다는디.”
김 영감이라는 한마디에 저도 모르게 온 신경이 대화에 집중되고 말았다.
“우리 염병 총각 으째…. 아… 나 참말로 눈물 나….”
“아따, 그딴 재섭는 소리 하도 말어. 말짱하게 살아 있을랑께.”
영옥이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는 순자를 정색하며 타일렀다.
그 말을 들은 철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뜻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처럼 문장을 천천히 곱씹어 보았다.
“…시방 뭔 소리여?”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철이 그들을 향해 물었다.
“뭐여…? 철이 니 소식 못 들었냐. 염병 총각 산에서 실종 돼분지 벌써 사흘째여.”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림과 동시에 심장이 일순 싸늘하게 식었다.
이 마을에서 염병 총각이라면 한 사람뿐.
산에서 실종. 사흘.
“하필이믄 비가 겁나게 와브러서 그 뭐여… 수색도 지대로 못 하고 있단께. 이걸 으짜믄 좋냐.”
동시에 머릿속에서 무언가 투둑, 끊어지는 파열음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