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9/26)

2.

맑은 하늘에 투명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소나기 같은 여우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씹….”

사자가 여우한테 장가드나. 서진은 먹던 아이스크림을 한 손으로 가리고서 허둥지둥 처마가 달린 구조물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처마 끝에 매달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흐아… 으, 아으응!”

“…아 …후읏….”

“아아, 쌀 것 같…!”

아니, 이런 생각 말고. 문득 정염과 희뿌연 액으로 뒤덮인 그 날을 떠올린 서진이 괴로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도피 여행 이틀째. 서서히 이성을 되찾으면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그가 자신을 속였다는 것. 사실 그게 전부였다. 아이스크림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있던 녀석이 저를 속였다는 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막심한 배신감을 안겨줬다.

반년도 넘게 스토킹했었다는 사실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철이라니까 왠지 괜찮은 것도 같았다.

딱 한 번을 제외하면 학교에서만이었고, 그 선비 같은 녀석이라면 악의가 있었다거나 나쁜 마음을 품은 건 아니었을 테니. 게다가 가끔 거울로 자신을 볼 때면 철의 마음이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복잡한 머릿속에 그가 다정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등과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했던 말이 맴돌았다.

“서진아 니가 원하는 건 다 해줄께. 다 줄께. 내가 더 잘할께.”

그렇게 진심인 사람을 먹고 버릴 만큼 그의 행동이 잘못됐던 걸까. 그 애가 그렇게까지…… 나빴었나.

“아오, 몰라…!”

원래 고민이 너무 많으면 흰머리가 생기는 법이라 했다.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헝클어뜨리며 몸을 벌떡 일으킨 서진의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전이 땡그랑 굴러떨어졌다.

“어….”

안 돼, 저걸로 양갱 사 먹어야 되는데.

“어어….”

서진은 경사진 길을 따라 또르르 굴러가는 동전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 될 양갱을 떠올리며 굴렁쇠 소년처럼 내리막길을 내달렸다. 내리막길 끝에 가서야 팽이처럼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던 동전이 겨우 바닥에 쓰러지며 멈추었다.

후우. 서진이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굽히는 순간, 옆에서 눈 부신 불빛이 그를 비추더니 끼이익― 타이어가 바닥과 거세게 마찰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긁었다.

‘설마, 나 동전 줍다 차에 치여 뒈지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서진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로막았다.

눈을 질끈 감음과 동시에 빗길에 미끄러지던 자동차는 딱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의 공간을 남겨두고 서진의 앞에 멈춰 섰다. 바로 승용차의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고, 안에서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아이구…! 이걸 어쩐디야.”

차에 부딪히지 않은 서진은 궁둥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남자에게 괜찮다는 의미로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순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살피던 남자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도 …련님…?”

남자가 서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멍하니 중얼거렸다.

“홍 사장님 아드님 아녀라…?”

그 말에 궁둥이를 털던 서진이 눈가를 좁히고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아이구, 이게 뭔 일이당가! 이거, 우리 도련님 아니여?”

“김 기사님?”

찬찬히 남자를 뜯어보던 서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곧 빗속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반가움을 나눴다. 감격적 해후도 잠시, 서진의 차림새를 살펴보는 남자의 눈에 안타까움이 감돈다.

“근디, 꼬라지가 으째…. 비도 오는디 일단 타셔요.”

김 기사가 허겁지겁 뛰어가 자신의 차 뒷문을 열어젖히며 서진을 안내했다. 오랜 습관으로 인해 조수석이 아니라 뒷문을 연 것이다.

남자는 오래전 서울에서 취직했을 때, 서진의 집에서 그가 열 살 때부터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무려 8년이란 세월을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 소식은 들었는디… 여기서 이러고 만날 줄은 몰랐네요.”

백미러로 서진을 흘끔흘끔 살피던 김 기사는 또 “어휴. 꼬라지가 저게 뭐여….”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서진이 시선을 내려 제 상태를 확인하고는 괜히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 상황이 좀 안 좋아서요. 형수님이랑 지혜는 독일에서 잘 지내고 있죠?”

“그라믄요. 다 홍 사장님 덕분이죠.”

“비둘기 아빠 많이 힘드실 텐데.”

“…예에 …뭐…. 여전하시네.”

두 사람은 짧게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김 기사의 집으로 향했다. 서진이 며칠간 지낼 곳이 없다고 하자 그가 선뜻 남는 방을 내어준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붉은 벽돌로 지어진 다세대 주택 앞에 멈춰 섰다. 차에서 내린 서진은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도피라고 해 봤자 그의 집에서 한 시간 거리 내였다. 멀리 나가기 귀찮은 것도 있었지만, 기름값을 아끼려고 멀리 가고 싶어도 멀리 갈 수가 없었다. 철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라 혹시나 그에게 행적을 들킬까 봐 불안해서 주위를 살피게 되었다.

“그라믄 매칠 편하게 지내셔라.”

“고마워요, 김 기사님.”

부엌 옆에 딸린 작은 방으로 서진을 안내한 김 기사가 동정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밖으로 향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대자로 뻗어 누운 서진은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을 발견하고 신이 난 얼굴로 전원을 켰다. 텔레비전도 못 보고 산 지가 얼마더라.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드라마가 한창이었다.

「 “아 저놈이 먹고 튀었다니까요?” 」

국밥집 주인 역으로 추정되는 아주머니가 한 남자를 가리키고 있다. 아주머니의 말을 들은 주변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보탰다.

「 “뭐? 야 인마, 그게 나이 먹고 할 짓이냐?” 」

「 “에라이― 이 쓰레기 같은 놈!” 」

당황한 서진은 헛손질까지 해가며 바로 채널을 돌려버렸다. 바뀐 화면에서는 머리를 산발로 풀어 헤친 웬 여자가 눈물 콧물을 짜며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다.

「 “책임져! 나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

「 “하, 순진하긴…. 그 말을 믿었나?” 」

「 “이 개쓰레기 자식!” 」

“씹…!”

결국 서진은 텔레비전을 켠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꺼버렸다. 그의 손길에 틱 소리를 낸 티비가 까맣게 암전되었다. 무슨 놈의 텔레비전이 쓰레기들만 나와. 도둑놈이 제 발 저린 것처럼 씩씩거리던 그는 짧은 도피 생활로 찌든 몸을 씻고 잠이나 자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 아침, 서진은 근처 공사장에서 근무하는 김 기사님이 휴일을 맞아 근처 마트에 장을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 따라가기로 했다. 자신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연막을 깔긴 했지만, 사실 과자가 목적이었다.

마트에 도착한 즉시 사라졌다가 잠시 후 과자를 잔뜩 들고 나타난 서진을 본 김 기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이고. 어릴 때부터 밥 대신 과자 먹는다고 울고불고 난리였는디.”

서진의 집에 몇 년간 입주하며 일했기 때문에 그에 관해 모르는 게 없는 김 기사는, 어리고 겁이 많았던 서진과 같이 잠을 자주기도 했을 정도로 유난히 그를 귀여워했다.

“지금도 어리잖아요.”

서진이 최대한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러고 보니까 옛날 생각나네요잉.”

“어떤 거요?”

마트에서 과자를 잔뜩 사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두 사람은 향수에 젖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다 보니 꽤 먼 거리를 걷는데도 지루하지 않았다.

벌써 저 멀리서 붉은 벽돌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진은 김 기사와 담소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집 근처에 서 있는 승용차와 커다란 남자를 보지 못했다.

김 기사가 옛일을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하하. 밤마다 질척질척 했죠잉. 허구헌 날 같이 자자고 바짓가랭이 붙잡고 늘어지고.”

“제가요?”

두 사람을 먼저 발견하고, 조용히 귀를 기울이던 철의 낯빛이 전에 없이 어두워졌다.

“잘 때는 또 얼매나 들러붙는지. 더워가지구 내가….”

“와, 나 되게 귀여웠겠다.”

서진이 눈가를 가늘게 접으며 그의 어깨에 장난스럽게 툭 기댄다.

“홍서진.”

서진은 불시에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놀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차 옆에 서 있는 커다란 남자를 발견한 서진이 사색이 되었다. 이렇게 빨리? 역시 스토커는 다르긴 다르구나…….

“아는… 분이에요?”

김 기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예? 아니, 몰라요. 전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당황한 서진은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는 것도 모자라 팔을 엑스자로 크게 교차하고 그를 부정했다. 행여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두려운 마음이 툭 튀어나온 것이다.

“그라도 이름은 아는 것 같은디….”

“일단 들어갑시다.”

서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김 기사의 등짝을 막무가내로 밀며 현관문 앞에 섰다.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것 같다. 철을 먹고 일단 도망치긴 했지만 뒷일은 딱히 생각하지 않은 탓이다.

김 기사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여는 순간, 다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평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다.

“들가지 말어.”

침을 꿀꺽 삼킨 서진이 의아하게 쳐다보는 김 기사를 대충 집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자신 역시 그 안으로 쏙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철은 단순히 슬퍼하거나 분노하는 것과는 다른 낯빛이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의 표정을 다시금 떠올리자 심장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뚝 떨어졌다. 가슴이 꽉 조여드는 것 같다. 먼저 잘못한 건 그 녀석이라며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잘 되질 않았다.

“…저 사람… 표정이 꼭, 일낼 거 같은디….”

김 기사가 꽉 닫힌 현관문을 돌아보며 영화 속에 나오는 예언자 같은 대사를 중얼거렸다.

“장 본 것부터 정리해야죠.”

현관에 신발을 벗고 들어온 서진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어색한 몸짓으로 부랴부랴 식탁 위에 장 본 것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경험이 없다 보니 이런 건 어떻게 정리하는 건지 잠깐 고민했으나, 대충 냉장고에 들어갈 채소와 냉장 식품들을 빼내 분리하고 자기가 고른 과자는 몰래 방으로 빼돌렸다.

살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서진이 상추와 오이 같은 채소를 차곡차곡 냉동실에 넣고 있는 동안에도 김 기사는 여전히 바깥의 남자에게 정신을 빼앗긴 듯 멍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불안함을 더 증폭시켰다.

“김 기사님, 이거 어디에 둘까요?”

서진은 분위기 전환을 위해 딸기잼을 좌우로 흔들며 그에게 물었다.

“김 기사님?”

“아, 그거는 기냥 선반에….”

끼이이이익.

콰앙―!

집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울린 엄청난 충격음에 두 사람은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행동을 멈추었다. 당연하게도 소리의 진원지는 바깥이었다.

의심 가는 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이게 대체 무슨 소음이란 말인가. 놀란 몸짓으로 먼저 창문으로 다가가 바깥을 확인한 김 기사가 눈을 크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아이구. 저, 저걸 으째…!”

그 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서진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확인하는 순간, 손아귀에 있던 딸기잼이 툭 떨어져 노란 장판 위를 데굴데굴 굴러갔다.

“…처….”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철아―!!”

서진은 힘이 풀려 휘청거리는 다리로 가로등을 들이받아 하얀 연기를 내는 승용차 앞으로 달려갔다. 빈 콜라 캔처럼 찌그러진 보닛이 얼마나 세게 들이받았는지 그 충격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철아, 철아….”

정신을 놓고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딪친 충격에 괴로운 듯 한쪽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눈알을 굴려 서진을 바라보았다.

“…꼭 이래야 아는 척해주냐잉.”

철이 생각보다 초연한 얼굴로 말을 뱉었다.

“너… 괜찮아?”

당연히 괜찮을 리가 없는데, 주둥이에서 멋대로 이상한 질문이 흘러나왔다.

“스펠링 틀렸어야.”

“…어?”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서진이 운전석 쪽으로 귀를 갖다 댔다.

“이트, 스펠링 틀렸다고.”

철이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아귀에 꼭 쥐고 있던 쪽지를 보여 주었다.

EATE AND RUN 凸

씹. EAT 뒤에 E가 또 있나 없나 고민했는데, 없는 게 맞나 보다. 서진은 얼굴이 화르르 달아오르는 민망함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평소에 그렇게 영어를 섞어가며 씨부리 쌌는데 개망신이 아닐 수 없다.

서진이 할 말을 찾느라 머리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때, 철의 곧게 빠진 콧대 밑으로 시뻘건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차 시트 위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를 본 서진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너, 코피… 나는데…? 괜찮아?”

“괘안애.”

급하게 손등으로 코끝을 막은 철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동시에 이번엔 어디서 흐르는 건지 알 수 없는 붉은 액체가 그의 눈썹뼈를 타고 관자놀이 밑으로 조금씩 흘러내렸다.

“…진짜 괜찮아? 또 피… 나는 것 같은데?”

붉은 액체를 발견한 서진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 말에 철이 또 이마를 손으로 쓱 닦아내더니 콧물이라도 닦은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어투로 답했다.

“괘안단께.”

“…괜찮은 게 아닌데? 대가리 깨진 거 아니야?”

서진이 계속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안색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암시롱도 읎어.”

철은 그렇게 말하며 찌그러진 차 안에서 기어코 티슈를 찾아내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것처럼 코피를 대충 닦아내고는 휙 던져버렸다.

과연 시골 사나이는 패기가 다르긴 다르구나. 서진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감탄하고 있을 때 그가 차 문을 열어젖히더니 바깥으로 발을 디뎠다.

“니 이게 뭔 뜻이여?”

철이 구깃구깃한 쪽지를 대뜸 서진에게 내밀며 물었다.

“…어?”

서진은 부끄러운 마음에 잽싸게 그의 손에 들린 쪽지를 빼앗아 찢어버리기 시작했다. 특히 EATE 부분을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잘게 찢었다. 오케이, 흑역사 증거 인멸.

“말 그대로지. 뭐긴 뭐야.”

서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목을 가다듬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묵다, 뛰댕기다…. 퍼큐?”

철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단어를 하나하나 되짚으며 물었다.

“난 먹고 튄다. 엿 먹….”

후, 한숨을 내쉰 서진이 대신 차분하게 해석을 읊어주는 찰나.

“어휴! 거기 괘안으셔라?”

어느새 집 안에서 후다닥 달려 나온 김 기사가 두 사람을 향해 소리치며 다가왔다. 순간 당황한 서진은 이전처럼 그의 멱살을 살짝 틀어잡았다.

“너, 너 이 자식!”

흘끔 김 기사의 눈치를 살핀 서진이 그대로 열연을 펼치기 시작했다.

“미영이한테 차였다고 니 인생이 끝나?”

뒤에서 멈춰 선 김 기사가 “오메 세상에….” 하고 중얼거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 김 기사님 오셨어요. 사실 제 친구 녀석인데, 지금 여자 친구한테 차여서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아시죠?”

김 기사를 돌아본 서진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작게 “크레이쥐.” 하고 덧붙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 기사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인다. 철은 그런 김 기사를 보면서 당장 경이라도 칠 것처럼 눈빛을 살벌하게 빛냈다.

“대신 견인 연락 좀 부탁드려요. 전 병원 좀 다녀오게요.”

서진이 김 기사에게 부탁하며 철의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오는 길에 응급실이 있는 큰 병원을 보았는데, 여기서 걸어가면 금방이었다.

“뭐 해?”

아무리 잡아당겨도 땅에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철을 보며 왜 이러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괘안은께 짐이나 가지고 나와.”

왠지 평소답지 않은 분위기에 서진이 당황하여 할 말을 잃고 서 있자, 철이 붉은 벽돌집 방향으로 몸을 틀며 말을 내뱉었다.

“그람 내가 가져올란께.”

“어허, 쓰읍! 얘가 왜 이래? 알았어.”

당황한 서진이 똥강아지 다루듯 그를 막아서더니, 하는 수 없이 김 기사를 향해 눈짓하며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도 역시 여자에 미쳤다는 둥 구시렁거리는 건 빼먹지 않았다.

잠시 후 서진은 김 기사에게 삐삐 번호를 남긴 뒤, 캐리어와 과자를 챙겨 낑낑대며 끌고 나왔다. 그 모습을 발견한 철이 냉큼 다가와 짐을 가져가더니 근처에 세워둔 서진의 파란 트럭 짐칸에 실었다.

“그럼 삐삐쳐 주세요.”

서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김 기사에게 인사를 남기고 철과 함께 트럭에 올랐다. 시끄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아차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습관적으로 철에게 운전석을 내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트럭은 병원을 그대로 지나쳐 익숙한 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너 진짜 괜찮아?”

“암시롱도 안 해.”

그래, 아파도 네가 아프지 내가 아프냐. 하는 마음으로 그냥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짧은 도피 생활이 피곤했는지 금세 상모를 돌려대던 서진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정신을 놓고 잠자는 동안 몸이 공중으로 들리는 것이 느껴진 것도 같다. 눈을 떴을 땐 고풍스러운 모양의 조명들이 달린 익숙한 공간에 와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서진이 정신을 차리고 마른세수를 하더니, 거실로 나와 제 짐을 찾아다녔다. 마침 욕실에서 씻고 나오던 철을 발견하고 물었다.

“철아. 내 짐 어딨어?”

“…….”

말없이 다가온 그가 갑자기 서진을 잡아당겨 와락 커다란 품에 안았다. 그냥 껴안았다기보다는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의 온몸이 긴장으로 굳은 채 바르르 떨리고 있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 쪽지 못 알아들었어?”

곧바로 서진이 그를 밀쳐내며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물론 스펠링이 좀 틀리긴 했다만.

“…첨부터 이럴 생각이었냐.”

낮게 읊조리는 남자의 상처받은 눈에 맺힌 물기가 형광등 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 처음부터 먹고 버리려고 했어. 됐냐? 그럼 짐 좀 찾을게.”

표현이 과격하긴 해도 사실이었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그의 얼굴을 더 보고 있기 힘들어 애써 몸을 돌리고 자신의 짐을 찾았다.

왠지 모르게 오래전에 가슴 깊은 곳에 박힌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다시 생생하게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그 가시나끼리 동성애 그거란 말여?”

“암튼 갸도 이라고 소문이 왁자해서 시집은 다 가브렀제.”

섹스 파트너는 무슨.

정신이 회까닥 나가서 미친 짓을 할 뻔했는데 이런 식으로 파국을 맞은 게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걸로 피차 볼 일 없을 거고, 어차피 결국엔 안 될 사이니까. 잠깐은 힘들지 몰라도 그 역시 저 같은 쓰레기는 금방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니가 착각하는 게 있는디.”

뒤에서 들린 철의 목소리에 서진이 멈칫했다.

“그건 묵은 것도 아니여.”

“뭐?”

갑자기 귀를 파고든 뜬금없는 말에 서진이 눈썹을 울컥 찌푸린다.

“내 아다 따묵게 해줄께. 버릴거믄 지대로 따묵고 가든가.”

씹. 그럼 먹지도 않고 먹튀 타령했단 말인가. 그게 섹스가 아니었다는 것보다 저 얼굴 저 몸, 아니 저 고추로 동정이라는 것이 더 믿기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혼란에 빠진 서진을 향해 어느새 슬픈 표정을 갈무리한 철이 물었다.

“…으짤래.”

“…….”

철의 말대로 먹고 버리려면 제대로 먹어야 하지 않을까. 어차피 사내놈들은 한 번 자고 난 상대한테 흥미가 떨어진다는 게 세간에 알려진 뻔한 사실 아닌가.

그의 손길이나 애무가 못내 기분 좋았던 서진은 머리를 굴려 애써 합리화에 들어갔다. 어차피 다 끝난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래. 대신 끝나면 서로 마주쳐도 다신 아는 척 안 하기로 약속하자.”

“…….”

“아니면 그냥 가고.”

서진이 바로 밖으로 나가려는 제스처를 취하자 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야.”

서진은 침실로 향하는 철의 뒤를 쭐레쭐레 쫓아 들어갔다. 침대 앞에서 멈춰 선 남자는 대뜸 윗옷을 휙 벗어 던졌다.

서진은 근육이 탄탄하게 잘 빚어진 그의 등짝을 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잘한 결정인 것 같다.

철이 멍하니 서 있는 서진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벗고 누워.”

뭐… 어차피 섹스할 거니까.

서진은 그 자리에서 하나둘 옷을 벗었다. 그러고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다음 어디 해 보라는 듯이 그에게 알량한 시선을 던졌다.

아직 윗옷만 벗고 있던 철은 잠시 멈춰 서서 그를 내려다보더니, 바로 위에 자리를 잡고 서진의 부드러운 머리칼부터 뺨까지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철이 얼굴을 가까이 대는 순간 서진이 고개를 휙 피하며 시트에 뺨을 묻은 채로 말을 뱉었다.

“그런 건 하지 마. 나 애무 싫어해.”

사실 겁나 좋았다. 좋아 뒈졌다. 키스만으로도 금방 쌀 것 같았다. 한 번 싸면 섹스가 끝나니까 완급 조절을 하겠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려 철의 시선을 피했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철의 턱 근육이 도드라졌다. 이윽고 몸을 반 정도 일으킨 그가 손을 뻗어 서랍을 열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통과 콘돔을 꺼내 든다.

‘지난번엔 준비물이 없다더니 생겼네. 근데 콘돔은… 왜?’라는 생각을 하며 서진이 눈가를 좁히는 찰나, 그의 손에 의해 별안간 몸이 공중으로 들리더니 뒤로 훌렁 뒤집혔다.

“무…!”

당황하여 말을 끝맺기도 전에 차가운 액체가 엉덩이골 사이로 후드득 떨어졌다. 생경한 감각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앗, 차가워!”

섹스하려는데 이게 무슨….

서진은 잘 자다가 얼굴에 찬물이라도 끼얹어져 깨어난 사람 같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따지고 들었다.

남자가 아무 말 없이 뽀얗게 살이 오른 엉덩이 골에 뿌려진 윤활제를 손으로 쓸어내리더니, 가운데 위치한 구멍에서 멈추어 부드럽게 어루만진다.

“아… 씹, 왜 자꾸…!”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각과 함께 수치심이 파도처럼 밀려든 서진이 놀란 닭처럼 퍼드덕거렸다. 짧게 한숨을 내쉰 철이 그의 몸을 옆으로 획 돌리더니 몸을 딱 붙이고 단단한 팔로 꽉 끌어안았다.

딱히 향수를 쓰는 것 같진 않은데, 철에게서 나는 니치 향수처럼 은은한 숲 내음이 코를 자극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쉬이… 괘안애.”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 안심시키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힌다. 그 목소리에 진정 효과라도 있는 것처럼, 힘이 조금 빠진 서진의 뒤를 지분거리던 손가락이 좁은 구멍을 벌리며 조금씩 파고들었다.

“으읏! 뭐…!”

대체 어디를……. 화들짝 놀란 서진이 몸을 푸드덕거리며 그의 품을 벗어나려고 하자, 더 움직이지 못하도록 꽈악 끌어안는 단단한 팔뚝에 핏줄이 불거졌다.

뒤늦게 동성 섹스에 대해 어렴풋이 떠올린 서진의 머릿속에 설마… 설마…, 하는 생각이 스친다.

서진을 꼭 껴안은 남자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긴 손가락이 어느새 한 마디 넘게 안으로 파고들더니, 순간 좁은 내벽 안에 끝까지 푹 박혔다.

“…윽…!”

생경함에 놀란 서진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을 토해냈다. 느닷없이 제 몸에 들어온 이물감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 딱딱한 것이 안쪽을 문지르며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흐, 윽…!”

꼬리뼈를 타고 올라오는 이상한 감각에 정수리까지 털이 쭈뼛 섰다. 당황한 서진의 모습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있던 철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뒤로 빼내고 다시 밀어 넣으며 어딘가에 있을 그의 쾌감을 찾아 살살 내벽을 긁기 시작했다.

긴 손가락이 여성의 생식기를 애무하는 것처럼 구멍 안을 드나들며 야릇하게 움직인다. 윤활제와 액이 섞여 찔꺽거리는 소리가 노골적이다.

“으응…! 뭐… 하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손길이 수치심과 새로운 감각을 동시에 자극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안쪽에 닿을 때마다 퍼지는 찌릿한 느낌에 어쩐지 온몸에 힘이 빠져나갔다.

이물감이 생각지 못한 곳을 빠듯하게 채우고 긁어대니 아랫배에 은근한 간지러움이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자신을 끌어안은 단단한 팔에 매달린 서진의 발가락이 안쪽으로 굽었다.

“아흐윽…! 잠, 깐…!”

이럴 리가 없는데… 어떻게 이런….

묘한 쾌감에 당황한 서진이 팔을 돌려 제 뒤를 쑤시는 철의 손목을 유약한 힘으로 붙들어 봤지만, 오히려 그 손길이 불을 붙인 듯 손가락은 더 세차게 구멍 안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간질간질한 부위를 문지르는 손에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결국 시트에 얼굴을 묻은 서진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야릇한 신음을 삼켰다.

“으, 으응…하읏…!”

“…후우….”

어느새 발기한 좆은 철의 손이 안을 쑤시고 빠질 때마다 허공에서 끄떡였다. 방 안은 순식간에 이성은 휘발되고 열락만 남은 두 사람의 낮은 신음과 뒤를 찔꺽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제 팔에 매달려 몸을 잘게 떠는 서진을 욕정에 빠진 눈으로 바라보는 철은 속으로 수십 번은 욕을 삼켜야 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 전립선을 구태여 찾을 필요도 없이 내벽이 전부 성감대라도 되는 것처럼 잘 느끼는 야한 몸이다. 만지면 만지는 대로 반응을 보여주는 서진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철은 이성을 잃기 일보 직전인 벼랑 끝에서, 이성의 끈을 간신히 붙들고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하으…응…! 아…!”

뒤를 철퍽대는 젖은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어느새 두 개에서 세 개로 늘어난 손가락이 내벽을 세게 긁고 왕복하며 산발적으로 터지는 쾌감을 안겨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몸의 어느 부분에서 느껴지는 쾌락에 머리가 하얘지고 오로지 정염만 남았다.

자위로 사정하는 것과 달리 억지로 쥐어짜이듯 정액이 자지 끝에서 픽, 픽 조금씩 흘러내렸다.

서진의 뒤에서 젖은 손가락을 주르륵 빼낸 철이 정제되지 않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급하게 콘돔을 찾았다. 그는 열에 들떠 거듭 헛손질하느라 포장지를 제대로 뜯지 못해 콘돔 몇 개를 침대 위에 떨어뜨렸다.

“…허억… 헉… 아니, 지…?”

아직 쾌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서진이 달뜬 숨을 몰아쉬며 몸을 똑바로 돌아누웠다. 서서히 몰려드는 공포감에, 제 뒤를 사수하기 위함이다.

그냥 자지를 넣어도 까무러칠 판에 저놈의 것은 사람의 자지가 아니다. 저런 걸 몸에 넣으면 사망이나 최소 기절이다.

“…궁둥이 들어.”

어느새 무릎을 꿇고 짐승 같은 자지에 콘돔을 씌운 철이 입을 열었다.

엉덩이도 아니고 궁둥이를 들라니. 실없는 웃음이 터지려는 찰나 남자의 한 손에 하체가 쑤욱 들어 올려졌다. 그가 둔덕 사이에 드러난 작은 구멍에 뭉뚝한 좆대가리를 맞추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서진의 웃음기가 쏙 들어갔다.

“뭐… 뭐 하는….”

서진은 경악하는 눈으로 제 구멍에 진입을 시도하는 흉흉한 것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설마 아니겠지, 하는 희망이 완전히 휘발된 것은 아니었다.

“…꼬추 넣을라고.”

철이 너무 정직하게 자신이 하는 일을 알려주는 탓에 오히려 허무맹랑한 장난처럼 들렸다. 저렇게 커다란 게 뒷구멍에 들어갈 리가 없다. 아니, 어디에도 들어갈 리 없다.

철은 흉포한 본능을 인내하듯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자지 끝으로 미끄러운 구멍의 입구를 문지르며 조금씩 찔러넣었다.

“아, 안 들어가… 절…대, 아윽…!”

남자가 거대한 귀두를 입구에 맞추고 살살 허리 짓을 하자, 예상과 달리 그 흉악한 것이 점점 좁은 구멍 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서진은 아래가 강제로 열리고 찢기는 것 같은 고통에 급히 숨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이건 뭐 섹스 한번 해 보려다 뒈져버리겠다는 생각에 서진은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팡팡 내려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으윽, 으아아!”

“…아… 미안…. 쪼매만 더… 후윽….”

진입하기엔 너무 좁은 구멍이 고통스러운지 그 역시 잔뜩 상기된 얼굴을 구기고 제 밑에서 난리 블루스를 추는 서진을 살피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구멍이 미친 듯이 오물거리며 간신히 물고 있는 기둥을 더 자극해댔으니.

너무 아파해서 그만두고 싶은데 이미 귀두를 삼킨 내벽은 딱 달라붙어 서진이 버둥거릴 때마다 오히려 자지를 점점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아아…! 사람 살…. 으응…!”

“…윽…!”

어느새 거대한 자지가 좁은 내벽을 가르고 장기들을 밀어내더니 그 안으로 반 정도 모습을 감추었다.

철은 반밖에 넣지 않았음에도 빠듯하게 몰려오는 사정감에 눈을 질끈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생전 처음 해 보는 정사는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아아, 으흐윽… 먹고… 튈, 거야….”

서진은 느껴본 적 없는 극심한 고통에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사실 하도 먹튀 먹튀 하다 보니 그냥 무의식중에 새어 나온 말이다.

순간, 커다랗고 단단한 몸이 서진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더니 허리를 세게 추어올렸다. 쑤욱― 구멍 안으로 거대한 좆이 뿌리 끝까지 처박혔다.

“아으아아!!”

“크읏…!”

서진이 몸이 쪼개지는 것 같은 고통에 온몸을 바들바들 떨자 커다란 좆을 품은 뜨거운 내벽까지 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철은 이를 악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치도록 사랑해 마지않는 상대의 안에 제 욕망을 밀어 넣는 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황홀한 느낌이었다. 폭죽처럼 터지는 쾌감으로 눈앞이 흐릿해지고 정신이 멍했다.

언감생심. 서진과의 섹스는 감히 꿈으로도 품은 적 없는 일이었다. 그저 멀리서만 볼 수 있어도 족했다. 그런데 지금 평생 손끝조차 닿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가 눈앞에 있었다.

그 사람과 부드러운 살결을 가까이 붙이는 것도 모자라 은밀한 부위를 맞대고 있다. 첫 경험이라는 것보다 상대가 서진이라는 사실에 미칠 것 같았다.

당연하지만, 아무리 발악해도 아직 어린 남자는 사정을 참을 수 없었다.

여린 몸을 부술 것처럼 꽉 껴안고, 터질 듯한 성기를 깊이 처박은 채 전에 없이 오랜 사정을 했다. 콘돔을 꽉 채우고도 계속 터져 나오는 정액은 그칠 줄 몰랐다.

“하으으… 으흐윽….”

영문을 알 리 없는 서진은 그저 왠지 모를 서러움에 흐느끼며 가쁜 숨을 터뜨렸다. 설마 바로 쌀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하아… 미안…. 나 첨이라….”

서진을 꼭 껴안고 미친 듯이 입을 맞추고 싶은 욕망을 가까스로 인내한 철이 몸을 떼어내자 아직 꼿꼿한 성기가 주르륵 빠져나왔다.

정액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보통보다 큰 사이즈 콘돔이 하얀 액체로 가득 찬 물풍선처럼 보였다. 남자는 그것을 대충 묶어 던져버린 뒤 바로 새 콘돔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흐아… 하아…, 너 조루…냐?”

아파서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그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한 서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중얼거렸다.

“…몰라. 참아 볼께.”

철이 새로 뜯은 콘돔을 조금도 식지 않고 빳빳하게 서 있는 자지 위에 씌우며 대답했다. 이어서 그는 힘이 빠져 누워 있는 서진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 아직 다물리지 않아 벌름거리는 구멍에 제 것을 쑤욱, 쑥 밀어 넣었다.

“아아, 아흐으윽…!”

“…읏….”

뿌리까지 단번에 밀어 넣은 철은 속으로 살벌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말 조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진의 안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서진이 조금씩 버둥거릴 때마다 부드러운 점막이 자지를 조이며 꽉 물어댔다. 겨우 사정감을 참은 철은 어금니를 세게 물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아… 아, 아, 으응…!”

철이 살살 허리 짓을 할 때마다 팔뚝만 한 자지가 좁은 구멍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가 다시 흉흉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움직임에 맞춰 서진의 벌어진 입술 틈새로 애처로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느릿하게 허리 짓을 하는데도 좆이 들어올 때마다 퉁, 배 속을 때리다 못해 심장까지 울리는 느낌이었다. 짐승처럼 커다란 것이 서진의 구멍 안을 드나들 때마다 불쑥불쑥 좆 모양대로 아랫배가 튀어나왔다가 꺼지길 반복했다.

철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으읏, 하아….”

“아읏… 흐윽… 아, 잠깐…!”

그가 서진의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며 좆을 뿌리 끝까지 깊게 박아 넣었다. 두꺼운 기둥을 작은 구멍에 전부 쑤셔 넣은 상태로 퍼억, 퍽,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온몸을 가득 채운 생경한 느낌에 서진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이 바르르 떨렸다. 손가락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커다란 살덩이가 몸 안쪽을 긁어대니 아픈 것보단 묘한 쾌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 아읏… 아… 으응… 흐읏!”

단단한 것이 퍼억, 안에 처박힐 때마다 싸하게 퍼지는 전율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빨간 비디오에 나오던 것과 비슷한 야릇한 목소리가 멋대로 흘러나왔다.

서진은 남자의 몸으로 이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혼자 자위할 때는 절대 느껴볼 수 없던 기묘한 쾌감이다.

손으로 만질 때랑은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의 늪에 빠져 눈앞이 어지러웠다. 철이 제 것을 힘껏 짓쳐 넣을 때마다 발기한 서진의 자지가 반동으로 꺼떡거렸다.

“하아… 서진아….”

철은 극한의 환희와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눈물이 촉촉하게 고인 눈으로 서진을 내려다보며 허리를 세게 추켜올렸다.

“아흐읏!”

찌르고 쑤시는 대로 반응하고 조여오는 몸은 말 그대로 남자를 환장하게 했다. 안에 삽입한 채 가만히만 있어도 종일 미친 듯이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진은 착실하게 느끼고, 반응하고, 사랑스러운 신음까지 흘렸다.

쫀쫀한 구멍은 자지를 박으면 부드러운 점막이 달라붙어 꽉 조여대고 뒤로 물리면 제 안에서 나가는 것을 아쉬워하듯 꽉 잡고 늘어졌다.

퍽, 퍽, 처박을 때마다 방 안에 울리는 서진의 야릇한 신음을 들으며 남자의 이성이 점차 흐려졌다.

철은 어쩌면 현실이 아니라 뒤져서 천국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며 서진을 품에 껴안은 채 추삽질의 속도를 높였다.

더 깊이, 조금만 더 깊이…. 어떻게든 그 안에 깊이 들어가고 싶어 애가 닳는다. 절대 달아날 수 없게 이대로 영원히 이어지고 싶은 심정이다.

“으응, 아응…! 아아, 철… 아읏… 천천, 히…!”

“허억, 흐읏….”

“아으윽, 앗, 흐으, 나올 것…같…!”

철퍽철퍽, 색정적인 소리와 함께 단단한 살덩이가 좁은 구멍 안을 점점 빠르게 드나들며 쾌감을 억지로 끌어냈다.

퍽퍽…! 이성을 한 꺼풀 내려놓은 무자비한 추삽질이었다.

서진의 여린 몸을 자꾸만 밑으로 누르고 끌어당기는 철의 팔뚝에 거친 근육이 불거졌다. 철이 바싹 끌어당길수록 기다란 자지가 서진의 몸속에 한계까지 짓쳐들어와 극도로 예민한 어느 부분을 잘게 찧고 문질러댔다.

“아응! 응! 흐으읏…!”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좆 기둥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으면 빠르게 다시 구멍 안에 처박힌다. 마치 안에 철근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딱딱한 자지가 부드러운 속살을 뚫고 또 뚫었다.

주먹만 한 귀두가 배 속 깊은 곳을 짓이기듯 쿵쿵 찍어댔다. 그럴 때마다 자지에 딱 달라붙어 씹어먹을 듯이 꽉꽉 조여대는 내벽이 끔찍할 정도로 극도의 쾌감을 선사했다.

“아! 아! 아읏! 흐으, 아아!”

서진은 철의 등을 구명줄처럼 끌어안고 목이 쉴 정도로 자지러지게 신음을 내질렀다. 어느새 자기도 모르게 사정까지 해버렸는지, 몸에는 하얀 정액이 범벅이었다. 분명히 어설픈 첫 정사일 텐데도 두 사람은 정신이 나갈 만큼 강한 쾌락에 빠져 숨쉬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후우, 아… 서진아….”

꼭 끌어안은 몸을 조금 떼어낸 철이 서진과 눈을 맞추며 젖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순간 그의 눈가에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뜨거운 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밤새 서진의 온몸 구석구석을 물고 빨고 싶었다.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끝까지도 모자라 몸속까지. 사랑을 나누는 건 불가능해도 이 순간만은 제 사랑의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쏟아붓고 싶었다.

철은 아래로 여전히 느릿하게 구멍 사이를 드나들며 말을 이었다.

“하아… 입 맞추게, 해줘… 제발….”

그가 절박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정말이지, 답답하게도 처음에 애무하지 말라고 한 걸 여태껏 지키고 있던 모양이다.

“씹…. 해, 그냥… 닥치고… 해.”

서진이 이제 와서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미간을 구기자마자 부드러운 혀가 입 안을 파고들어 와, 어느 때보다 뜨겁게 안을 훑고 고여 있는 타액을 맛있는 꿀처럼 빨아 마셨다.

춥, 추읍. 혀를 섞으며 철퍽대는 허리 짓이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하, 응!! 아으, 흑…!”

퍽퍽퍼억, 철퍽철퍽…….

서진의 입술을 미친 듯이 빨던 철은 입술을 미끄러트려 뽀얀 목덜미를 애타게 빨고 귓바퀴를 진득하게 핥아 올렸다. 그는 서진의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씹어먹지 못해 안달이 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놓아줄 수 있을까.

철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서진을 놓지 못할 것이란 걸 직감했다. 도망가면 다리를 부러트려서라도 그의 안에 제 욕망을 집어넣고 평생 옆에 묶어둔 다음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해 주고 싶은, 절대 가져서는 안 될 폭력적인 욕구마저 느껴졌다.

“앗, 아으응, 아, 하아아…!”

제 안에 뜨거운 살덩이를 박아 넣는 남자가 어떤 생각을 품는지도 모르고, 서진은 그저 그에게 매달려 한순간의 쾌락에만 집중해 정신을 놓고 즐기기 바빴다.

원래부터 그의 인생 모토는 ‘라이프 이즈 쏘 쿨, 암 쏘 쿨’이었으므로.

그렇게 정신을 놓아버린 미친 첫 정사는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이제 보니 조루는 철이 아니라 서진이었다.

몇 번이고 사정한 끝에 정액도 아닌 투명한 액체를 힘없이 싸댈 때도 서진의 안을 드나드는 추삽질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꽉 찬 콘돔이 방 안에 하나둘 늘어갔다. 서진이 끝내 졸음인지 견딜 수 없는 쾌락인지에 취해 점점 정신이 점멸하는 동안에도 가랑이 사이의 이물감은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아, 진짜로 먹었으면 튀는 건 불가능했구나…….’

그것이 서진이 정신을 완전히 놓기 직전 마지막으로 한 생각이었다.

***

“홀리… 쓋…!”

정신이 들자마자 하반신에 느껴지는 엄청난 이물감에 욕이 절로 샜다. 눈을 게슴츠레 뜬 서진이 설마 하고 시선을 내리니 여전히 불룩하게 굴곡진 아랫배가 눈에 들어왔다.

분명 시작할 땐 저녁이었는데 그사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건지 쨍한 채광이 방 안에 가득하다. 아래는 여전히 연결된 채였다. 안 죽고 깨어난 게 용할 지경이다.

밝은 햇빛이 여기저기 널브러진 콘돔과 하얗게 말라붙은 정액을 비추며 정신 줄 놓은 광란의 밤을 상기시켜 주었다.

처음 해 본 정사가 도대체 얼마나 기꺼웠던 건지….

배 속에 아직도 꼿꼿하게 서 있는 자지를 몸을 움직여 조금씩 빼내자, 뒤에 있던 남자가 단단한 팔로 끌어안으며 다시 끝까지 퍽, 박아 넣었다.

“으갹―!”

예고 없는 움직임에 놀란 서진의 입에서 알 수 없는 괴성이 샜다.

“…후우….”

이젠 고통인지 쾌감인지도 구분이 안 되는 서진과 달리 아직 황홀경에 젖어 있는 듯한 날숨을 내쉰 철은 쪽, 쪽, 그의 목덜미와 머리통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며 뭉근하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당, 쁘, 쓰으… 앗…!”

‘당장 빼, 이 씹….’이라는 대사는 다시 시작된 그의 허리 짓에 알 수 없는 신음으로 바뀌었다.

***

“허억… 허억….”

빈 콘돔 박스를 거꾸로 흔들어 확인하고 짧게 혀를 찬 철이 박스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어느새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어둑어둑 저물고 있었다. 이건 어제 저녁에 시작해서 오늘 저녁에 끝났단 얘기다. 첫날밤이 아니라 그냥 첫날이다. 짐승 같은 정사는 무려 하루 동안 이어졌다.

흡사 순둥순둥한 골든레트리버인 줄 알고 주워 왔는데, 미쳐 날뛰는 맹수에게 뼛속까지 발려 잡아먹힌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이 이럴 수 있는 건가.

침대 위에 널브러져 숨을 헉헉대는 서진의 옆에 그 짐승이 자리를 잡고 눕더니 어울리지 않는 애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전쟁통보다 더 심한 난리통에도 흐트러짐 없는 수려한 얼굴이 서진을 열받게 했다.

“…미친놈….”

서진이 제 옆에 누운 남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며 중얼거리자, 그가 상처받은 듯 울적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저 순진한 얼굴에 속지 않으리. 뭐, 어차피 이제 볼 일도 없을 텐데 마지막으로 미친 짓 했다고 치자.

짧게 한숨을 내쉰 서진이 일단 씻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

“오, 쓋…!”

서진은 하체에 퍼지는 통증에 중심을 잃고 기우뚱하며, 같이 몸을 일으킨 철의 짧은 머리카락을 지지대 삼아 콱― 잡아당겼다.

“아…! 따…. 가만있어. 씻겨 줄께.”

생전 처음 남에게 머리채를 잡힌 철이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결국 서진이 침대에 널브러져 쉬는 동안 욕조에 따뜻한 물은 받은 철은 말랑한 떡처럼 푹 뻗어 있는 그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

“어으. 시원하다―”

욕조에 들어간 서진은 목욕탕에 온 아저씨 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담갔다. 욕조에 앉은 그의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샴푸해주던 철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서진이 니 한약 같은 거는 몸에 받냐.”

“어. 왜?”

머리에 하얀 거품을 묻힌 서진이 고개를 홱 꺾어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철은 첫날밤을 지낸 새색시처럼 어색하게 뺨을 붉히며 눈을 피하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기냥… 싸는 게 쪼까 매가리가 없는 것이 으디 아픈….”

“…이 …씹! …나가!”

순식간에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서진이 팔다리를 마구 흔들어 물장구를 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다. 저놈의 정력이 비정상적인 거지 절대 자신이 부족한 게 아닌 것을.

어차피 저놈도 나중에 다른 사람이랑 할 때 오늘의 제가 얼마나 대단한 정력의 소유자였는지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랑…… 그게 현실이다. 잘생겨, 돈 많아, 밤일까지 실한데, 뭐 언젠가 장가는 들지 않겠는가.

욕조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 서진은 대충 샤워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왔다. 어기적어기적 걷는 걸음으로 제 짐을 찾아 집 안을 뒤지던 중, 코를 찌르는 맛있는 냄새에 홀려 다이닝룸으로 향했다.

“우와….”

기다란 목재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산해진미가 배고픈 그를 끌어당겼다. 뜨거운 불 앞에서 부지런히 요리 중이던 철이 뒤를 돌아보더니 급하게 말을 건넸다.

“거 쪼까 앉아 있어. 금방 다 되니께.”

마지막으로 딱 밥만 먹고 갈까…. 마침 뱃가죽이 등에 붙어가던 참이라 서진은 괜히 딴청을 피우며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채끝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던 서진 앞에 철이 웬 와인 한 병을 들고 나타났다.

“…와인?”

화이트 와인이라면 껌뻑 죽는 서진이 포크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그가 들고 온 와인은 한 병에 몇백이 넘는 샤르도네 중 하나였다.

“으어, 배부르다”

결국 와인 한 병을 거나하게 걸치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서진이 끅, 짧게 딸꾹질했다.

“오늘은 운전 못 하겄는디…. 기냥 자고 가야.”

웨이터처럼 테이블에 놓인 빈 접시를 치우던 철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안 그래도 술기운과 피곤함으로 기절하기 직전이던 서진은 어차피 밤도 늦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가면 어떠냐는 마음으로 빈방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서진은 눈을 뜨자마자 침대 밑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씨바! 깜짝이야!”

흠칫 놀란 서진이 경기를 일으키자 민망했는지 바로 몸을 일으킨 철이 변명하듯이 입을 열었다.

“…하두 오래 자서 디져븐 줄 알고. 인나서 밥 묵어.”

그 말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두 시가 지났다. 숙취에 머리를 짚은 서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오자, 자는 동안 장을 보고 왔는지 어제보다 더한 진수성찬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서진은 마지막으로 딱 이것만 먹고 가자는 생각으로 또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이것만 먹고 진짜 집에 가야지….

잠시 후 식사가 끝나고 짐을 찾기 위해 거실로 나오니, 뿅뿅― 띠요옹― 익숙한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겁나게 어려븐 거.”

철이 소파에 앉아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는 게임 패드를 들고 부술 듯이 때려대고 있었다.

“어? 수뻐마리오?”

텔레비전 화면을 확인한 서진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서진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홀린 듯이 걸어가 철의 옆자리에 앉은 다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구경했다.

불도저처럼 모든 장애물을 무시하고 달리는 마리오를 보던 그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진짜 더럽게도 못한다.

결국 서진은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철의 너른 등짝을 철썩철썩 내리치며 소리쳤다.

“아, 씹… 쩜푸, 스핀 쩜푸! 밟아 죽여! 엑스자를 누르라고, 이 멍청아!”

“…서진이 니가 쫌 해주믄 안 되냐.”

“아, 답답해. 내놔 이씨.”

철의 손에서 패드를 빼앗듯이 가져간 서진이 현란한 손놀림으로 스핀 점프를 하며 고슴도치 위를 통통 튀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따 잘 뛰댕기네.”

“이렇게, 십자 버튼! 어? 이렇게!”

“오메 거복이 다 조사브렀구만. 니 프로 선수 아니냐.”

옆에서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 더 신이 난 서진은 거북이를 한 번에 밟아 없애며 스테이지 끝에 있는 성을 향해 갔다.

게임에 푹 빠진 서진을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던 철은 “이쁜 거.” 하며 머리통에 쪽, 입을 맞추더니 저녁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어? 이렇게.”

그런 줄도 모르고 서진은 계속해서 혼잣말하며 과시하듯 쓸데없이 현란한 스핀 점프를 보여주었다.

어느새 늦은 밤이 되도록 밥도 안 먹고 게임에 빠진 서진을 보며 철이 하는 수 없이 김밥을 말아 틈이 날 때마다 하나씩 입에 넣어주었다. 기어코 빨대를 꽂은 한약을 먹이는 데도 성공했다.

결국 서진은 그날도 밤이 늦고 나서야 내일 아침 떠날 것을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엔 꼭…….

조용한 새벽, 불현듯 누군가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서진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침대 밑에 앉아 잠든 그를 바라보다 들킨 커다란 남자는 입술을 몇 번 열었다 닫으며 달싹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 줄까?”

“…줘.”

진짜로 목이 말라서 물을 달라고 했을 뿐인데, 어떤 신호로 잘못 알아들은 건지 철이 다급하게 입을 맞추며 헐렁한 티셔츠 안에 손을 넣고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아니으읍….”

진짜 물 달라니까, 씹.

하지만 서진은 원래 눈앞의 쾌락에 약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커다란 방망이에 몸이 꿰뚫린 채 철의 탄탄한 등짝을 붙잡고 정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느새 찰박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방 안에 그득하다. 그 소리에 맞춰 비명 같은 신음이 코러스처럼 터져 나왔다.

“으응, 하, 으읏! 하으윽…!”

“하아… 좋아…. 읏, 서진아….”

어깻죽지를 손톱으로 긁어대는 게 아프지도 않은지, 남자는 열에 들뜬 얼굴로 서진의 이름을 부르며 아침이 오도록 허리 짓을 쉬지 않았다.

아무래도 장 본 것 중엔 콘돔도 있었나 보다.

결국 녹초가 되어 늦게 일어난 그다음 날에도 낮에는 뿅뿅― 띠요옹―, 진수성찬, 밤에는 아으응…의 연속이었다.

[I'm the Great Wart! Hahaha!]

“…….”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모든 것이 마리오의 꿈이었다는 엔딩으로 최종 보스를 깬 서진이 게임 패드를 툭 떨어뜨렸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감금이다. 아니 감금 아니다. 근데 감금이다.

“아따, 솔찬하네. 그라믄 서진이 니 눈덩이 굴리는 것도 할 줄 아냐.”

서진은 옆에서 급하게 새로운 게임을 트는 철을 말없이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 집착광녀….”

쾅―!

벌떡 일어나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그를 철이 다급하게 뒤쫓았다.

“서진아!!”

서진은 자신을 따라오는 남자를 돌아보더니 조금씩 걸음을 빨리하다 이내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오지 마!”

장거리는 몰라도 단거리 달리기는 빠른 편인 서진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속력으로 달려 나갔다. 계획은 없었고, 일단은 이 ‘해피해피 파라다이스’ 같은 감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기달려 봐야.”

대낮의 평화로운 시골길에 난데없는 두 남자의 추격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철은 긴 다리로 가볍게 서진의 뒤를 쫓아 점점 간격을 줄였다.

멀리서 경운기를 타고 지나가던 아주머니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더니 푸흡! 웃음을 터뜨렸다.

“왐마. 다 큰 아들이 아직도 저러코롬 순박하구마잉.”

“하이고오, 나이가 맻 살인디 술래잡기를 하고 논당가. 염병 총각― 철아― 재밌냐잉.”

아주머니 한 분이 머리 위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으나,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죽기 살기로 달리던 서진은 얼마 못 가 커다란 남자에게 꼬리가 잡히고 말았다. 순식간에 서진을 둘러업은 철은 그에게 머리끄덩이를 잡히면서도 꿋꿋하게 집으로 향했다.

“그라고 뛰쳐서 으딜 갈라고.”

다시 집에 들어온 철이 서진을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더니 부드럽게 눈을 맞추고 물었다.

“집에 간다, 아니 서울 간다, 아니 장가간다. 왜!”

“…….”

서진이 턱을 치켜든 채 당당하게 소리치자 할 말을 잃은 철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사실은 철이 좋았다.

그냥 잠깐 좋은 게 아니라 그의 인생을 걱정할 만큼.

완벽한 그의 인생에 투척 된 오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 철은 분명 결혼하면 아내한테도 잘할 테고, 자식을 낳는다면 좋은 아빠가 될, 그런 완벽한 삶이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고작 자신 같은 놈 하나 때문에 누군가의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감히 손가락질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자신과의 관계는 무덤까지 갖고 갈 비밀이자 한순간의 일탈로 끝내야 했다.

“너 아다 따먹고 나면 우리 다시 아는 척 안 하기로 약속한 거 잊었냐?”

서진이 싸늘한 얼굴로 따지듯이 물었다. 어차피 자신 같은 쓰레기를 잊는 데 아무리 길어도 몇 달이면 충분할 테니.

“……그라믄 뭐 설 가서 참말로 장가라도 가겠다는 거여 뭐여?”

상상하기도 싫은 일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어지럽고 오장육부가 뒤집혀 속이 울렁거렸다.

“어. 여자 만나서 장가도 가고 자식도 낳을 거야. 너도 그럴 거고.”

서진이 여전히 차가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순간 철은 머리를 강타하는 두통에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윽….”

정신이 아득해진 그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샜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데 장기는 뒤틀리는 것 같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차 키 내놔.”

“…하…. 토할 것 같….”

고통으로 눈을 질끈 감은 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깄네.”

그러거나 말거나 원래 눈치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스타일인 서진은 차 키를 챙겨 들더니 현관문을 나서기 전, 철을 돌아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간다. 약속 지켜라.”

쾅―!

굳게 닫힌 현관문을 멍하니 바라보던 철은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웠다. 결국 투명한 위액만 계속 토해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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