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1화 (8/26)

1.

서진은 지난 시간은 추억에 묻으라는 우울한 노래가 흘러나오는 트럭 라디오 버튼을 눌러 꺼버리고, 삐걱삐걱 손잡이를 돌려 차창을 열었다.

36도를 웃도는 뜨거운 날씨에도 관광객이 몰려 물 반 사람 반인 해운대를 바라보며 셔츠 앞섶에 걸어놓은 선글라스를 콧대에 올렸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를 어떻게 찾으라는 건지 모르겠다.

‘씹. 왈리를 찾아라야 뭐야.’

삐거덕. 낡은 차 문을 열고 내린 서진은 뜨거운 모래사장을 비척비척 걸어가 근처 수퍼에서 하드를 하나 들고 계산대에 섰다. 돈이 간당간당하니 오늘은 이걸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혹시 요 며칠 근처에서 저보다 잘생긴 남자 본 적 없으세요? 키는 한 이 정도 되고. 다른 지역 사투리 쓰고.”

“엄마야. 그런 사람은 못 봤는데예.”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계산을 마치고 나온 그가 기다란 하드를 까먹으며 백사장에 반사되는 뜨거운 햇살에 눈을 찌푸렸다. 신경을 곤두세운 채 대충 스캔해봐도 눈에 띄는 남자는 보이지 않는다. 서진은 유일한 식량을 아작 씹어 삼키며 다음 장소로 향했다.

‘살다 살다 사내놈을 다 찾아다닐 줄이야.’

사라진 철을 찾기 위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알아본 결과 범씨네 별장은 경기도와 부산 해운대, 두 곳에 있었다. 그리고 서진은 망설임 없이 해운대를 택했다. 왜냐, 경기도는 너무 머니까.

할아버지가 이번 주까지 입원해 계실 예정이었고 그 틈을 타 몰래 트럭을 타고 그를 찾아 나선 것이 벌써 사흘째였다.

자신을 안 먹고 튄 그 스토커 새끼를.

빵빵― 빠앙―

“야! 이 씨빨로마! 니 운전을 와 그따구로 하노!!”

“닥쳐 이 개새끼야!”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도로에서 사흘 만에 적자생존의 법칙에 완벽히 적응한 서진이 창문을 열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안 그래도 속에서 분노의 칼춤을 추고 있는 판에 여기저기서 자꾸 시비질이다.

이래서 도시가 싫다니까. 서진은 구시렁거리며 끼익― 넓은 공터에 트럭을 세웠다.

“못 봤심더.”

“음…. 그런 사람은 못 봤지예.”

이리저리 가게를 들쑤시고 다니며 도망친 남자의 행방을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설마 칩거 노인, 뭐 그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별 소득 없이 트럭으로 돌아와 피곤에 찌든 눈꺼풀을 감았다.

처음에는 그랬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고. 1분도 채 넘지 않는 음성 메시지는 하나같이 뒤통수를 프라이팬으로 후려갈기는 주옥같은 이야기들뿐이었으니.

그 스토커 자식이 남긴 자신의 지난 만행과 병적인 집착에 대한 고백에도 그를 찾아 나선 이유는…… 아마 분노. 배신당한 자의 사무치는 분노 때문일 것이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무심코 백미러 속 자신과 눈이 마주친 서진은 제 잘생긴 얼굴에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이거 이거, 내가 모르는 스토커가 또 몇 트럭이나 있으려나.

그렇게 그가 거울을 보며 머리칼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서울 총각?”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서진은 즉시 삐걱삐걱 손잡이를 돌려 차창을 내렸다.

“총각이 말한 머스마 봤다.”

“예?”

“잠깐 스쳤는데 억수로 잘쌩기가. 내 딱 알았제.”

“어디서요?”

트럭 문을 벌컥 열고 내린 서진이 아주머니의 말에 귀 기울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던지다시피 남기고 바로 아주머니가 가리킨 장소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며칠째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그런지 금방 다리가 후들거리고 현기증이 일었다.

“허억… 헉….”

고작 200미터쯤 달렸을까. 서진은 저질스러운 체력의 한계를 온몸으로 느끼며 심장을 고통스럽게 부여잡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넌 잡히면 뒈졌다. 서진은 이를 빠드득 갈며 무거운 다리를 끌고 문제의 장소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평균 신장을 훨씬 웃도는 키와 외모는 어디서든 눈에 띄기 마련인데, 한 시간을 넘게 돌아다녀도 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지쳐갈수록 어쩌면 아주머니가 잘못 봤거나 장난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서진은 피곤함에 찌든 얼굴로 털레털레 다시 트럭으로 돌아와 낡아빠진 시트 위에 몸을 뉘었다. 할아버지 퇴원까지 이제 이틀 남았다. 이틀 안에 검거하지 못하면… 뭐 어쩔 수 없고.

그날도 서진은 피곤한 다리와 배고픔으로 술렁거리는 배를 끌어안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빵빠아앙―

“야, 이 씨….”

“닥쳐!!”

서진은 아침부터 도로에서 다른 운전자가 걸어오는 시비를 반 박자 빠르게 차단하고 근처에서 가장 큰 마트를 찾았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붙잡고 눈에 띄는 철의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이곳저곳 뼈 빠지게 돌아다녔다.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같았다. 못 봤다는 것.

누적된 피로와 배고픔으로 다리 힘이 풀린 서진은 결국 얼마 못 가 나무 벤치 위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머니를 뒤져 주유할 기름값을 빼면 여윳돈이 얼마나 남는지 확인하고 있을 때, 그의 앞으로 시꺼먼 그림자가 졌다.

“거 아침에 잘쌩긴 남자 물으본 사람, 맞지예?”

“…네. 보셨어요?”

“내 지나오다 본 것 같심더. 쩌기 저짝.”

“감사합니다!”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 서진이 남자가 가리키는 곳으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지나오다 봤다는 표현을 쓸 정도면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열이 아스팔트에 맞닿아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쨍쨍 내리쬐는 햇빛 아래 서진은 신나게 뛰어노는 개처럼 헉헉거리며 행인이 가르쳐 준 장소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이나 눈앞이 빙 돌며 현기증이 일어 멈춰서야 했다.

없다. 이번에도 눈에 띄는 인영은 없었다.

‘지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야 뭐야.’

결국 열이 머리 꼭대기까지 오른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바닥의 돌멩이를 걷어찬 다음 또 아무 소득 없이 몸을 돌렸다.

대신 마트에서 오늘의 식량인 과자와 음료수를 산 뒤 순식간에 입에 털어 넣었다. 에너지를 충전한 서진은 다시 파란 트럭에 올라타 다른 장소로 이동하며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더 같이 있으면 절대 못 놓아줄 것 같아서 안 되겠다고…….

진짜 안 되는 게 뭔지 모르는 어벙한 녀석에게 배신이란 무엇인지 보여줘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서진은 힘 있게 핸들을 꺾으며 차를 세웠다. 과자도 먹었겠다, 힘을 축적한 그가 안먹튀 스토커 수색 작업에 들어갔다.

해운대의 관광 명소부터 유명 맛집, 동네 시장까지 몇 시간을 쥐 잡듯이 뒤져봤지만 끝내 머리카락 한 올 찾아내지 못했다. 서진은 또 길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처량하게 쪼그리고 있는 그의 앞에 어디선가 꼬부랑 할아버지 한 분이 다가와 섰다.

“내 봤다.”

뭐지 이 기시감은. 서진이 약간 떨떠름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디서요?”

“쩌어기 저짝.”

“감사합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가 비척비척 걸어 할아버지가 가리킨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뛰어다닐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설렁설렁 걸으며 미어캣처럼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혹시나는 금세 역시나로 바뀌었다. 쯧, 서진이 짧게 혀를 차며 돌아서는 순간, 번뜩 스치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뭔가 이상하다.

이쯤 되면 한 가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 수밖에 없다. 항상 찾을 땐 없었는데 한 박자 뒤에 봤다고 하는 행인들….

어쩌면 제가 스토커를 스토킹하는 것을 그가 스토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

이중 스파이도 아니고, 이중 스토커는 처음 들어봤지만 개 버릇 소 못 준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상대는 왕복 여덟 시간 거리를 일주일에 몇 번씩 왔다 갔다 한 미친 녀석이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가설에 서진의 입꼬리가 섬뜩하게 씰룩였다. 그렇다면 확인해보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으니.

서진은 바로 트럭에 올라 사람이 최대한 많이 모인 장소로 차를 돌렸다. 해운대 광장. 사람들이 바글바글할 것 같은 장소로 딱 적합해 보이는 이름이다.

그는 도로 위의 표지판을 보며 그곳을 향해 액셀을 밟았다. 낚싯바늘에 미끼를 꿰고 대어를 낚을 준비를 하면서.

잠시 후 광장에 도착한 그는 기다란 구조물에 몸을 기댄 채 적당한 목표물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저기 저 남자? 음… 조폭 같아서 안 되겠다. 알고 보면 등판에 용 한 마리가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 남자? 체격이 너무 튼튼하다. 더 마른 사람으로.

저 사람? 아니, 인상이 너무 더러워.

꽤나 깐깐한 선발 기준은 흡사 미스터 코리아 대회 심사를 방불케 했다.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운 사람들 틈에서 드디어 조건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남자를 찾아낸 서진의 입꼬리가 간사한 각도로 휘었다.

체격 왜소, 인상 적당히 착함. 너로 정했다. 윗입술을 혀로 느긋하게 핥은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건들건들 걸어 남자에게 다가갔다.

어깨빵까지 3초, 2초, 1초.

퍽―!

“아!! 뭐꼬?”

뜬금없이 자해 공갈단처럼 몸을 날린 서진을 보며 남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 뭐! 니 자신 있나? 자신 있나?”

서진은 며칠간 습득한 경상도 사투리를 어설프게 구사하며 턱을 잔뜩 치켜들고 따졌다.

“이, 이, 미친놈 아이가?”

남자는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얼굴로 서진을 훑어봤다.

“때려 봐? 때려 봐? 어? 어? 어?”

서진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뺨을 들이밀었다.

“내 살다 살다… 밸 미친놈을 다 보노.”

“어어…! 어디가. 때려 보라니까!”

당황한 서진이 못 볼 꼴을 봤다는 얼굴로 자리를 피하려는 남자를 급하게 붙잡고 늘어졌다. 젠장. 너무 착한 인상으로 골랐나.

“놔라. 이 미친놈아!”

“슬슬 올라온다 그치? 때려 보래도.”

“이 똘아이 시끼, 이거 놔라 쫌!”

자신을 거세게 뿌리치는 남자에게 매달리던 서진은 결국 급하게 계획을 변경하고 그의 귀에 대고 귓속말했다.

“그냥 살살 한 대만 때려주세요. 때리는 척이라도…. 과자 사드릴게요.”

하지만 의도했던 것과 다르게 서진의 마지막 말에 진짜로 열 받은 남자의 얼굴이 흉악하게 구겨졌다.

“하, 이걸 확!”

그가 높이 손을 치켜드는 순간.

“미안합니다.”

귀에 익은 저음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생각보다 빠른 반응에 되레 놀란 건 서진이었다.

원래 계획과는 아주 달랐지만, 어쨌든 미끼를 문 철이 그의 손목을 낚아채 제지하더니 대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여태까지 진짜 스토킹하는 걸 스토킹하고 있었단 말인가.

“내가 사과할란께. 기냥 가소.”

그 말과 동시에 서진이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남자의 잘생긴 낯짝을 노려보았다. 잡았다 요놈.

***

이래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분노에 휩싸여 음성 메시지를 끝까지 듣지 않고 삭제 버튼을 누른 건 일생일대의 미친 짓이었다. 이 친절한 스토커는 혹시라도 서진이 찾아올까 싶어 메시지 끝에 자신이 지낼 곳의 주소까지 남겨놓았기 때문에.

그런데도 서진은 부산 일대를 대가리 없는 낙지처럼 빨빨거리고 돌아다니고 있었으니…. 이것이 두 사람이 서로의 뒤를 밟으며 뺑이를 친 사건의 전말이었다. 마치 성난 똥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잡으려고 빙글빙글 도는 것과 비슷했달까. 이쯤 되면 철이 먼저 서진을 발견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도주 나흘 만에 그를 검거해 조수석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철은 무슨 이유에선지 사소한 것 하나에도 그답지 않게 허둥거리고 긴장했다.

존재감도 없는 작은 돌부리에 걸려 커다란 몸을 휘청한다든가, 긴 다리를 두기 좁은 좌석을 뒤로 민다는 것이 앞으로 드르륵 당긴 다음 당황한 나머지 아예 눕혀 버린다든가, 안전벨트도 제대로 매지 못하고 놓쳐서 몇 번이나 벨트에 따귀를 맞는 등 이상한 실수를 연발했다.

그를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던 서진마저 쯧, 짧게 혀를 찰 정도였으니. 남의 염병을 보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어느덧 뜨거웠던 태양이 산 끝자락에 걸리고, 주홍빛 석양으로 물든 도로 위를 달달 소리 내며 달리던 파란 트럭은 공교롭게도 에어컨이 철처럼 고장 나버렸다.

불쾌한 더위로 짜증이 머리 꼭대기에 올라와 있을 때, 불현듯 뒤에서 빠아앙― 시끄러운 클랙슨이 울렸다. 바로 옆으로 따라붙은 검은 승용차의 창문이 내려가더니 안에서 웬 조폭 같은 놈이 트럭 운전석을 향해 소리쳤다.

“얌마!! 니 운전 똑띠 안 하나?!”

“저 씁….”

철이 인상을 구기며 입을 뗐으나 서진이 한발 더 빨랐다.

‘열여덟’으로 시작해 약 30초가량 이어진 욕설은, 서울 욕은 억양이 약해서 찰지지 않다는 사람들의 편견에 싸대기를 날릴 만큼 찰졌다.

“퉤! 좆같은 문신 돼지 새끼.”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한 서진은 예민한 개복치 같은 상태였다. 도망치듯 멀어지는 승용차를 향해 침을 뱉는 것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한 서진이 조수석을 흘끔 쳐다보더니 당당하게 덧붙였다.

“뭐. 원래 여기선 다 이래.”

그 말에 철은 조용히 “야물딱진 거.” 하고 칭찬한 뒤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황혼의 석양마저 완전히 저물고, 미약한 헤드라이트에 의지해 익숙한 시골 풍경을 달리는 동안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트럭이 끼익, 하는 마찰음을 내며 커다란 한옥 앞에 멈춰서자 서진이 먼저 재빠르게 안전벨트를 풀고 트럭에서 내렸다.

“대문짝 좀 열어줄래?”

마치 자기 집인 양 대문 앞에 선 서진이 씨익 웃으며 말을 건넸다.

“서진아.”

그를 따라 차에서 내린 철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내 말 못 들었냐. 나 니랑 같이 못….”

“아오, 씹!”

철썩!

서진이 뜬금없이 그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치며 말을 잘랐다. 물론 도망친 이유는 이미 들었다. 너무 많이 좋아해서. 더 같이 있으면 절대 못 놓아줄 것 같아서.

“모스키토가 있어서.”

서진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흠칫 놀란 철에게 유명을 달리한 모기를 보여준 다음 탁탁 털어내고 말했다.

“얼른 문이나 열어봐.”

그의 재촉에 결국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철이 커다란 대문을 여는 순간, 서진이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트럭 짐칸에서 캐리어를 꺼내 오더니 열린 대문 안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망설임 없이 방 하나를 고르고 바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짐을 풀어헤치기 시작한다.

“뭐여…?”

뒤늦게 그를 따라 들어온 철이 상황을 파악하려 물었다. 이 와중에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가방 안에서 쓸데없는 미용 기기들만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나 당분간 여기서 살려고. 할아버지한테 말씀드리고.”

왼손에는 고데기를, 오른손에는 드라이기를 꺼내 든 서진이 그것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주변을 물색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쉰 철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막무가내로 들어앉은 서진을 조용히 타일렀다.

“…나랑 같이 있으믄 니한테 좋을 것 없어.”

그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춘 서진이 짐짓 가녀린 표정을 지으며 속눈썹을 내리깔고 운을 뗐다.

“철수야…. 내가 너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여러 가지로 실수했던 것 같아….”

“…….”

“그래서 너랑 다시 잘해보려고.”

“…뭐…?”

서진은 그를 향해 자애로운 미소를 씩 지어 보이며 덧붙였다.

“한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멍하니 듣고 있던 철의 수척한 얼굴에 점차 생기가 돌더니,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눈가에 살짝 구김이 졌다.

왜, 너무 좋아서 할 말이라도 잃었나 싶을 때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거는 안될 것 같다.”

예상치 못한 철의 반응에 서진은 댕그랑, 쟁반으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그가 제안을 거절한다는 것은 애초에 계획에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가 회유하듯이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뱉었다.

“나한테 해코지하고 싶으믄 얼마든지 해도 되는디…. 인자 그런 건 못해.”

“어, 어디가.”

바로 걸음을 옮기는 철을 향해 서진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물었다.

“니는 여서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되니께.”

그를 따라 벌떡 몸을 일으킨 서진은 재빨리 방문을 골키퍼처럼 막고 섰다.

“가긴 어딜 가!”

이러다간 안먹튀범을 먹튀하겠다는 완벽한 복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후우… 서진아.”

“일주일! 딱 일주일만 여기 있어. 아니, 3일. 3일만.”

생각해보니 제 치명적인 매력으로 저 순진한 놈을 먹고 튀는 데 사흘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하면 오늘 밤, 끝.

힘겨워 보이는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철이 촉촉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물었다.

“…기여. 3일 있으믄 되냐.”

“그다음엔 가든지 말든지. 니 맘대로.”

서진이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차피 자고 나면 제가 먼저 없어질 건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 나는 먼저 씻고 올게.”

문을 막고 서 있던 서진은 경쾌하게 철의 한쪽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욕실로 직행했다. 어쩌면 오늘 바로 일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니까.

서진은 해바라기 샤워기를 틀어놓고 머리 꼭대기부터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생각에 잠겼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저 심약한 녀석을 어르고 달랜 다음 먹고 튈 생각이었지만, 사흘이면 이야기가 조금 달랐다. 시간이 없으니 초장부터 강하게 나가야 한다.

‘……그럼 로션 플랜부터 시작해볼까.’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오랜 시간 동안 뽀드득 소리가 나게 씻고 나온 서진은 아랫도리에 수건만 걸친 채로 보디로션을 손에 들고 철의 방으로 향했다.

철은 어느새 짐 정리를 마치고 침대에서 농사에 관한 책을 보며 쉬고 있었다. 그를 발견한 서진은 방문을 똑똑 두드려 제 존재감을 과시하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서진은 매끈하게 빠진 다리를 그의 침대 위에 턱, 올리고 젖은 머리칼을 이리저리 쓸어 넘겼다.

“아― 시원해.”

“…뭐여?”

철은 조금 당혹스러운 얼굴로 난데없이 헐벗고 나타난 그를 올려다봤다.

“요새 삽질하느라 피부가 좀 거칠어졌나 봐. 철이야, 나 로션 좀 발라줄래?”

서진은 한쪽 손에 들고 있는 로션 통을 살살 흔들며 곰살가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 짧게 한숨을 내쉰 철이 하는 수 없이 책을 내려놓자, 신난 서진이 바로 침대에 벌러덩 엎드려 누웠다.

사실 지나치게 몸이 좋은 철과 비교해 주눅이 드는 것이지, 서진도 나름 잔근육이 예쁘게 잡혀 있어 몸매엔 자신 있는 편이었다.

바로 커다란 손에 로션을 짜낸 철은 지체할 것 없이 서진의 하얀 등 위에 차가운 로션을 쓱쓱 발라주었다.

말 그대로 정말 로션만을 바르기 위한, 성적인 느낌이 전혀 없는 그의 손짓에 당황한 서진은 작전을 조금 심화하기로 했다.

“아 잘 좀 발라봐. 거기 허벅지, 허벅지 안쪽도 좀 바르고.”

“거는 니가 할 수 있지 않냐.”

서진의 이상한 요구에 손을 멈칫한 철이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아, 그냥 이렇게, 이렇게, 좀 쓰다듬듯이 해봐.”

“아따, 참말로.”

고개를 돌린 서진이 손을 뻗어 철의 단단한 팔뚝을 요사스럽게 쓰다듬으며 예시를 보여주었다.

“더 부드럽게, 어어… 그렇게….”

서진은 드디어 부드러운 손길로 다리를 만지며 로션을 치덕치덕 바르는 철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더 야릇한 상황을 만들어 그의 흥분을 돋우기 위해 미국 포르노 비디오에서 봤던 대사를 응용해 보기로 했다.

“아, 좋아… 더 세게, 하더 하더…! 하더…. 뭔지 알지?”

“…….”

“아아, 좋아 그렇게… 쎄마네임, 쎄마네임… 쎄마네임 뭔지 알지?”

“…가지가지 하는구만.”

혹시 저 꽉 막힌 녀석이 포르노 대사도 모를까 봐 한마디 할 때마다 계속 뒤를 돌아보며 ‘알지? 알지?’ 확인하는 서진 때문에 분위기가 야릇하기는커녕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끝.”

결국 철이 때밀이를 끝낸 세신사처럼 그의 등을 두드리는 것으로 로션 작전은 허무하게 엔딩을 맞았다.

“…어 그래. 고맙다.”

떨떠름한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난 서진은 뾰로통하게 로션통을 만지작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누가 꽉 막힌 놈 아니랄까 봐. 그는 뒤돌아서 코웃음 치며 다음 플랜을 위해 시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밤이 깊어지기를 기다렸다.

‘오늘 밤 안에 먹고 만다.’

방에서 비장한 자세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꾸벅꾸벅 졸던 서진은 불현듯 고개를 쳐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됐지. 두 볼을 가볍게 두드려 정신을 차린 다음 허겁지겁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다시 철의 방으로 향했다.

한밤중에 갑자기 끼익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리자 침대에 누워 있던 철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철이야. 같이 자자.”

열린 방문 사이로 서진이 고개를 쏙 내밀더니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뭐?”

“나 귀신 봤어. 니 방에서 같이 자야 돼.”

서진은 귀신도 도망치게 할 것 같은 음흉한 얼굴을 하고 막무가내로 침대에 몸을 던진 다음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순간 당황한 철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와락! 그의 목에 팔을 걸고 침대로 끌어당겼다.

“…….”

“같이 자자, 응?”

“…알았은께.”

함부로 서진을 떼어내지도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남자는 하는 수 없이 커다란 몸을 다시 자리에 눕혔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은 씩 입꼬리를 당기며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더니 은근슬쩍 철의 중심부를 비비적거리기 시작했다.

남의 몸을 만지는 것과 자기 몸에 닿는 직접적인 자극은 하늘과 땅 차이렷다. 쓱쓱 문지르고 자극하자 금세 그의 세 번째 다리가 바지 안에서 터질 듯이 열렬한 반응을 보이며 서진을 흡족하게 했다.

“아… 철아… 너한테 좋은 향기나…. 너무 좋다.”

서진은 딱딱하게 선 그것을 계속 허벅지로 문질러대며 그의 목에 코를 갖다 박은 채 중얼거렸다.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나는 건 사실이었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시원한 숲 내음 같은…….

“진짜 좋다….”

서진이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거기도 딱딱했지만, 몸도 딱딱하게 굳은 철은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천장을 보며 어색한 숨만 내쉬었다. 그가 몸에 있는 모든 근육에 꽉 힘을 주는 바람에 서진은 사람을 안고 있는 건지 돌덩이를 안고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후우……, 그가 만고의 인내가 담긴 숨을 내쉬는 동안 서진은 꼭 달라붙어 온몸을 비비적거리는 노골적인 유혹을 이어갔다.

자지도 계속 서 있으면 아픈데……. 그런 생각을 끝으로 잠기운을 이기지 못한 서진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던 철은 잠이 든 서진을 살짝 떼어내더니 옆으로 돌아 얼굴을 마주하고 누웠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달빛에 의지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을 구경하면서.

긴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칼을 가만가만 쓰다듬던 철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서진아.”

이미 깊게 잠든 서진은 옅은 코 피리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사랑스러운 대답에 남자가 천천히 눈을 감고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에 얼굴을 가져다 댔지만, 결국 입술 대신 따뜻한 숨결만 남기고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

***

씹. 못 먹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부스스 눈을 뜬 서진이 차갑게 식어 있는 옆자리를 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며칠간 트럭에서 먹고 잔 탓인지 피로가 쌓여 꼴까닥 기절해버린 것이다.

거의 다 먹은 건데….

뒤늦게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서진은 먹잇감을 찾는 하이에나처럼 넓은 집 안을 뒤지고 다니기 시작했다.

“철아― 철이야―?”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그를 찾던 서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파 밑이나 옷장까지 열어보았다. 무슨 놈의 스토커가 자꾸 도망쳐.

여기저기 뒤져보던 와중에 우연히 열린 서랍 구석에 놓인 하얀 약 봉투가 그의 눈에 띄었다.

‘김철수 정신과 의원’

꼭 병원 이름도 자기 같은… 이라는 생각을 하고 고개를 돌리던 찰나, 정신과라는 단어에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봉투를 집었다.

‘범철 님, 하루 두 번’

처방 날짜를 보니 몇 주 전. 딱 헤어졌을 무렵이다.

사실 철은 서진과 헤어진 후 말 그대로 죽을 만큼 괴로워했다.

연인이라고는 보기 힘든 일방적인 관계였고, 잠자리는 고사하고 손도 못 잡아 봤을 만큼 깊은 사이도 아니였지만 이별의 상처는 가혹했다. 철은 자신이 정상적이지 않음을 깨닫고 어떻게든 서진과 멀어지기 위해서 병원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효과를 볼 수는 없었지만.

대가리가 꽃밭인 서진은 그런 철의 사연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약 봉투를 내려놓았다. 돈 많고 잘생긴 놈이 무슨… 조증, 뭐 그런 건가.

“김철수? 철수야―?”

공사다망하신 스토커는 식탁 위에 수라상을 차려놓고 밭일이라도 나간 모양이다. 식탁에 앉아 차려진 밥상 위에 숟가락을 얹은 서진은 문득 오늘이 할아버지의 퇴원 날이란 것을 떠올렸다. 깜짝 놀라 벌떡 몸을 일으킨 서진은 그길로 부리나케 병원으로 달려갔다.

“기여. 기냥 거 가서 살어.”

“에이, 딱 며칠만 있는다니까요. 밭일은 그때부터 나갈게요.”

요 며칠 병원에 못 들른 데다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은근히 섭섭해했다. 서진은 금방 돌아오겠다고 너스레를 떨며 할아버지를 집까지 모셔다드렸다.

대충 거울을 보고 매무새를 가다듬은 서진은 철을 찾으러 갈 요량으로 할아버지의 트럭을 빌려 초가집을 나섰다.

다행히 이번엔 해운대가 아닌 근처 밭에서 커다란 트랙터에 앉아 밭일을 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케이, 작전 개시.

“철아―!”

서진은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정체를 알 수 없는 풀밭으로 성큼성큼 뛰어 들어갔다.

서진을 발견한 철이 바로 트랙터의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가까이서 보니 뒷바퀴의 높이가 서진의 키보다 클 정도로 크기가 엄청났다.

“집에 있지 왜 나왔냐.”

철이 급하게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멋쩍어했다. 서진은 눈을 가늘게 접어 웃으며 대답했다.

“왜 나오긴. 너 보러 왔지.”

“…….”

“땀 맺힌 것 봐.”

콧잔등을 찌푸린 서진이 살갑게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자, 어쩔 줄 몰라 하며 헛기침을 흘린 철이 “드릅게.”라고 중얼거리며 가지고 있던 수건으로 다시 서진의 손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나 이거 타봐도 돼?”

자고로 남자란 자기 일에 관심을 갖고 칭찬해주면 껌뻑 죽는 법.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삐죽 올린 서진이 뒤에 있는 트랙터를 가리켰다. 생긴 게 꼭 어릴 때 가지고 놀던 장난감 포클레인 같다. 그 포클레인에 마론인형을 태우고 놀긴 했다만.

“기여.”

서진을 번쩍 들어 올려 트렉터에 태워 준 철은 좁은 공간에서 옆에 앉아 그를 도와주었다. 막상 운전석에 앉아 내부를 보니 우주선처럼 많은 버튼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건 무슨 버튼이야?”

“유압 장치.”

“아아, 유압 장치.”

서진은 ‘어, 그게 뭔지 몰라.’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고 계속 “아아―” 소리를 내며 대단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괜히 관심 있는 척 이것저것 눌러대고 물어보면서 알고 보면 페라리보다 비싼 트랙터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이쯤 하면 됐겠지.

“나 너무 더운데…. 이제 집에 가자.”

그는 은근한 손길로 옆에 앉은 철의 단단한 허벅지를 쓸어내리며 보채듯 은근히 꼬드겼다.

“기여. 델따줄께.”

용수철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남자가 트랙터에서 쏜살같이 뛰어내려 서진을 부축했다.

근처에 세워둔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서진은 날씨가 너무 덥지 않냐며 바짓단을 있는 대로 치켜올려 제 잘빠진 다리를 과시하거나, 철의 얼굴에 먼지가 붙었다며 귓가에 바람을 부는 등 한시도 쉬지 않고 그를 유혹했다.

떼놓고 보면 유혹적일 수 있는 행동도 휘몰아치듯 해대니 그냥 정신만 사나울 뿐이었다.

“어디가. 너도 씻고 쉬어야지.”

서진은 집에 데려다주자마자 다시 밭으로 나가려는 철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온 다음, 바로 욕실로 직행하여 빠르게 샤워에 들어갔다. 저 순진한 놈의 흔들리는 동공을 봤을 때 오늘은 무조건이다.

미리 준비한 향긋한 로션을 꼼꼼히 몸에 바른 뒤 서진은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았다. 본연의 살냄새인 척하려면 너무 많이 발라도 안되는 법이다.

마지막으로 앞머리를 뒤로 넘겨 잘생긴 이마를 드러낸 서진은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제 얼굴을 비춰 보고는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응, 게임 오버.

흐흥. 콧노래를 부르면서 달그락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보니 철이 아침을 먹었던 그릇을 부지런히 설거지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서진은 아차 싶은 마음에 그에게 다가가 변명하듯 말문을 열었다.

“밥 먹다가 갑자기 할아버지 생각이 나서….”

“…누가 니한테 설거지시키냐. 니는 이런 거 하지 말어.”

어느새 설거지를 다 끝낸 철이 별 희한한 소리를 한다는 듯 서진을 타이르고는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그 순수한 미소가 가슴 한구석에 모래알만큼 남은 양심을 푹 찌르는 것 같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렷다. 서진은 이내 약해진 마음을 다잡으며 복수심으로 홧홧하게 달아오른 눈빛을 빛냈다. 오늘이야말로 먹고 튄다.

“흐아암.”

어색하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켠 서진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물었다.

“철아… 졸리지 않아? 그만 자자 우리.”

“시방 네 시밖에 안 됐는디.”

시계를 확인한 철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심지어 뜨거운 여름 해는 아직 중천이다.

“뭐 어때. 졸리면 자는 거지. 이리와 빨리.”

막무가내로 남자의 태평양 같은 등짝을 밀어대며 기어코 방까지 끌고 간 서진은 그의 오금을 자연스럽게 퍽 걷어차 널찍한 침대 위에 내동댕이쳤다.

“빨리 자자.”

그 한마디와 함께 무거운 짐짝처럼 나동그라진 남자에게 하얀 이불을 정수리 꼭대기까지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자신도 그 안에 쏙 들어가 철의 가슴팍에 코를 박고 꼭 끌어안았다. 일순 철이 움찔하며 온몸의 근육이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따뜻해….”

서진이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추우믄 에어컨 꺼줄까?”

조용히 속삭이는 철의 말에 얼굴을 젖혀 눈을 맞춘 서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어컨을 끄다니.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서진과 시선을 마주한 철은 긴장으로 숨 쉬는 것마저 잊은 채였다. 안 그래도 순진한 척하는 모습이 고까웠던 서진이 속으로 픽 코웃음을 쳤다. 태평하게 에어컨 따위를 나불거리는 입과 달리 눈치 빠른 그의 아래가 점점 커지고 딱딱하게 굳는 것이 느껴진 탓이다.

“그냥 자고 싶어…. 너랑.”

먹고 튀고 싶어.

“…니가 이러믄 못 자.”

서로의 떨리는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자려고 노력해 봐.”

“…미안.”

결국 참다못한 철이 안겨 있는 서진을 밀어내며 침대에서 커다란 몸을 일으켰다. 이런 벽창호 같은…….

“아오, 좀 같이 자자니까!”

갑작스레 몸이 밀려나자 급발진한 서진이 거센 콧김을 내뿜으며 그를 향해 달려들더니, 코알라처럼 딱 달라붙어 매달리기를 시전했다. 제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넘어오면 이 철옹성은 진짜 가망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아… 서진아.”

깊은 한숨을 내쉰 철이 달라붙은 서진을 가뿐하게 들어 올려 침대에 내려놓고는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니는 나 안 좋아하는디.”

남자는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자꾸 이러믄 내가 오해하니께.”

그가 간절하게 부탁하며 눈가를 촉촉하게 적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서진의 머릿속에는 당장 그를 먹고 튈 생각밖에 없었으니.

“오해는 무슨. 좋아해.”

“…….”

누가 들어도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의 말투는 아니었지만, 그 말에 퓨즈가 끊긴 것처럼 굳어버린 철은 멍한 얼굴로 서진을 바라보았다.

“됐지. 빨리 누워.”

오로지 목적에만 눈이 먼 서진은 아무 말이나 둘러대며 돌처럼 굳은 남자를 침대로 끌어당겼다. 그러나 남자는 아무리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겨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참 실랑이하던 서진은 결국 그의 귓구멍에 고백을 쑤셔 넣기에 이르렀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말없이 서진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불그스름한 눈가와 짙은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냐.”

한참 후 철이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으니까 자자.”

서진은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그래그래, 대충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책임진다고 했다.”

“일단 빨리 눕….”

‘눕자’라는 뒷말은 철의 부드러운 입술이 갑작스레 부딪치면서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넘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철의 심장 박동이 거세게 쿵쿵거렸다.

맞붙은 입술을 부드럽게 달싹거리다가, 자연스레 입술을 벌리고 혀를 집어넣어 입 안을 훑었다. 그대로 서진을 침대에 눕힌 철은 그가 도망가지 못하게 뒷덜미를 붙잡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읍… 응….”

급작스러운 행동에 조금 당황했지만, 금세 적응한 서진 역시 남자의 목에 살포시 팔을 걸쳤다. 철은 계속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가며 쪼옥, 쪽, 입을 맞추고 나머지 한 손을 티셔츠 안에 넣어 갈급한 손짓으로 살결을 더듬었다.

뜨거운 혀로 여린 입 안을 마음껏 탐닉하고, 그 안에 고인 타액까지 갈증 난 사람처럼 전부 쭈웁 빨아먹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철은 부족한 숨을 들이쉬기 위해 달아나는 서진을 집요하게 따라가 끈질기게 혀와 입술을 먹어 치웠다. 누가 누굴 먹는다는 건지. 먹고 튀기는커녕 순진한 척하던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기분이다.

맞물린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 나는 질척이는 소리가 말소리 대신 적적한 방을 채웠다.

선정적인 입맞춤에 흥분한 서진의 아랫도리가 남자의 허벅지에 짓눌리고 문질러지면서 등줄기에 찌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철의 하체가 자꾸 다리 사이를 비벼대며 자극하니 어쩔 수 없이 중심부에 피가 몰렸다.

“…으응….”

축축하게 젖은 두 입술 사이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젖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느새 머릿속은 텅 비어버리고, 터질 듯한 흥분에 잠식된 서진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그에게 매달리며 얇은 옷자락을 사이에 두고 자신의 것을 마구잡이로 문질러댔다. 그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서진이 달아오른 아래를 계속 비벼대자,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떼어내고 쪽쪽, 짧게 입맞춤하던 철이 물었다.

“…하아 …서진아, 어떻게 해줄까?”

철은 가만히 눈을 맞춘 채 서진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떼어주며 덧붙였다.

“니가 말해봐야.”

서진은 한 손으로 코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의 뺨을 그러쥐고 계획대로 입을 열었다.

“…좆 만져줘….”

갑자기 자극이 사라진 게 아쉬운 것처럼 보채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잡고 흔들어줘. 네 좆에 비비고 네 손에서 싸게 해줘….”

서로의 것을 문지르고 사정하는 것. 그것이 서진이 생각해낸 동성 섹스였다. 안타깝게도 그 이상은 생각하지 못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 철이 다급한 손짓으로 서진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급함에 옷을 끝까지 벗기지도 못하고 무릎 근처에 걸쳐둔 다음 바로 중심부로 손을 옮겼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이 반 정도 발기한 성기를 급하게 감싸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기둥을 세게 주무르다가 예민한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둥글게 문질렀다.

“아, 잠…. 으응….”

맨정신으로는 타인의 손이 한 번도 닿지 않았던 곳에 그의 손이 닿자 생각보다 강한 자극에 서진이 몸을 잘게 떨었다. 솔직히 말하면 흥분됐고, 떨렸고, 좋았다.

철은 흥분한 서진의 모습을 멍하니 내려다보면서 한 손으로 자신의 바지 속에서 이미 흉흉하게 발기해 액을 줄줄 흘리는 성기를 꺼냈다. 꼿꼿하게 서 있는 팔뚝만 한 좆은 지나치게 커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

“으읏….”

두 개의 자지는 당연히 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남자가 되는대로 커다란 손에 그러모아 한꺼번에 훑어내리고 허리를 조금씩 치대자, 울컥 터져 나오는 쿠퍼액이 기둥을 타고 흘러 서로 마찰하고 비벼질 때마다 찔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흐으, 그, 잠깐… 응….!”

서진은 혼자서 만지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각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맞닿은 자지는 살덩이가 아니라 철근이라도 들어 있는 것처럼 딱딱해서 제 여린 자지 껍질이 몽둥이 같은 것에 쓸리는 느낌도 들었다.

무아지경으로 애욕에 빠진 남자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두 성기를 흔들고 문지르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하으… 아앗…!”

커다란 손이 기둥을 세게 주무르며 훑을 때마다 얇은 표피가 위아래로 함께 움직이는 것이 눈앞에 적나라하게 보였다.

“아아, 으응… 쌀 것…같, 아….”

서진은 어느새 정신을 놓고 허리를 마구 치대는 그의 밑에서 어쩔 줄 모르고 다리를 비틀어댔다.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먹튀고 나발이고 처음 느껴보는 쾌감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결국 서진은 바들바들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생명 줄처럼 감싸 안고 매달리며 애처롭게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좆을 훑어내리는 남자의 손과 허리 짓이 더없이 거칠고 빨라졌다.

“흐아… 으, 아흐, 응…!”

“…후읏….”

“아, 아아…!”

서진의 사정이 가까워진 것을 눈치챈 철이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그의 것을 집중적으로 훑어내렸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의 핏줄이 불거지고, 찔꺽거리는 소리는 방 안에 점점 더 크게 울렸다.

“아, 아, 그, 그만… 으응! 아!”

좆물로 질척거리는 감촉과 함께 맞붙은 하체가 뜨거웠다. 괴로울 정도의 쾌감에 몸부림치는 서진을 보며, 철이 다른 쪽 손으로 아래의 음탕한 열기와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서진은 그저 눈앞이 번쩍번쩍 튀는 쾌락에 잠겨 버둥거릴 뿐이었다.

“아으읏!!”

순간, 서진이 야릇한 신음을 내지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서진의 자지 끝에서 먼저 하얀 액체가 왈칵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남자도 기다렸다는 듯이 참고 있던 정액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두 성기에서 동시에 뿜어져 나온 희멀건 액이 침대 시트 위로 후드득 쏟아져 내렸다. 서진의 사정이 먼저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쏟아지는 그의 정액은 포르노에서 본 것보다도 훨씬 양이 많았다.

“헉… 허억….”

어느새 터질 듯한 흥분을 가라앉힌 서진은 달뜬 숨을 내뱉으며 진귀한 광경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평소에는 아예 안 빼고 사는 건지, 살면서 이렇게 많은 정액은 처음 보았다.

긴 사정 끝에 두 사람은 온몸에 엉망으로 정액을 묻히고 가쁜 숨을 골랐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철은 서진을 바투 끌어안더니 눈에 코에 뺨에 귓불에,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미친 듯이 입맞춤을 퍼부어댔다.

그는 그렇게 입을 맞추다가도 ‘서진아 니가 원하는 건 다 해줄께.’, ‘내가 진짜로 잘해줄께.’라며 한 번 잤다고 간과 쓸개라도 빼줄 듯이 호구 같은 소리를 해대기도 했다.

이제 튀어야 되는데…….

서진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철은 그를 애틋하게 끌어안고 여기저기 키스하며 길고 끈질긴 후희를 즐겼다. 그는 딴생각에 빠진 서진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마와 콧잔등, 목덜미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입 맞추는 행동을 반복했다.

“…나 좀 씻을게. 너도 씻어.”

서진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간신히 그를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씻겨줄께.”

철이 서진을 따라서 벌떡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무슨 아기도 아니고. 각자 씻자.”

당황한 서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극구 사양했다. 결국, 기어코 욕실까지 따라붙는 철의 앞에서 문을 쾅! 닫아 버리기까지 했다. 바로 숨을 크게 들이쉰 서진의 입술 끄트머리가 비스듬한 각도로 휘었다.

드디어 먹었다.

곧바로 그는 해바라기 샤워기를 틀어 놓고 미친 듯이 비누칠을 하며 전에 없던 속도로 빠르게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빨리빨리….’

약 1분 만에 욕실에서 후다닥 튀어나온 서진은 철이 다른 욕실에서 씻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 미리 싸놓은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며칠 전에 준비해둔 쪽지를 꺼내 아무 데나 던져 놓고 냅다 대문 밖으로 내달렸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파란 트럭에 짐을 던져 놓고 운전석에 올라타 시동을 거는 그의 손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빨리빨리…….’

왠지 전에도 이런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인가. 서진은 시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시동이 걸리자마자 주저 없이 액셀을 밟았다.

애초에 며칠 여행처럼 떠나 있을 생각이었다. 할아버지에게 다른 곳에서 지내고 온다고 말해놓기도 했고. 그런 쪽지를 남겨두고 며칠 떠나 있는다면 충분히 먹고 튄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자신은 그저 저를 속인 녀석에게 똑같은 배신감을 돌려줬을 뿐. 계획대로 성공했으니 후련하고 속 시원한 감상이 머릿속에 떠올라야 하는데 왠지 떨떠름한 감상이 몸 곳곳에 얼기설기 달라붙어 있는 느낌이다.

서진은 백미러에 비친 어색한 제 표정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씨익 끌어 올렸다.

그것은 철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밀어내고 다시 받아들인 건지 알았다면 감히 하지 못할, 소위 말하는 사탄도 한 수 접고 갈 만한 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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