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병 총각? 염병 총각!”
귓가에 울리는 영옥의 목소리와 제 입에서 나는 끙끙 앓는 소리에, 물속에 가라앉은 서진의 정신이 뭍으로 꺼내지는 기분이었다.
“으으….”
“정신 쪼까 들어? …으이구. 근께 왜 길바닥에서 처울고 싸질러져서.”
서진은 깨어나자마자 밀물처럼 밀려드는 수치심에 다시 기절하고 싶어졌다. 결국 갈라지는 목소리로 삐져나온 첫마디는 거짓말이었다.
“…안 처울었는데요.”
“하이고오. 이 눈팅이, 이 눈팅이, 봐야.”
영옥은 떨떠름한 얼굴로 혀를 쯧쯧 차며 고개를 저었다. 해바라기밭 앞에서 울다 지쳐 쓰러진 서진을 영옥이 발견해 집으로 데려다 놓고 꼬박 하루 동안 극진히 보살펴준 것이다.
“으윽….”
서진은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준 순간 온몸을 파고드는 알싸한 통증에 입에서 신음이 절로 샜다. 사흘 내내 비를 처맞으며 삽질을 한 탓인지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입고 있는 옷자락까지 쑤시는 느낌이다.
영옥은 서진에게 그냥 누워 있으라고 전한 뒤 그를 남겨둔 채 방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아 작은 방 안을 둘러보니 벽에는 영옥의 딸 재숙의 어릴 적 사진부터 학교에서 받은 자잘한 상장까지, 액자에 고이 담겨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피식 웃음을 머금은 서진의 눈에 또 눈물이 고였다. 나도 엄마 있는데. 엄청 예쁜 우리 엄마….
불시에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던 재숙이 서진을 발견하더니 큰 소리로 소리친다.
“어메? 염병 오빠 또 처우는디?”
“아휴 내비둬야. 맨날 처우는 거.”
뒤에선 부엌일을 하던 영옥이 질렸다는 듯 넌지시 말을 던졌다. 서진은 고자질한 재숙을 지그시 노려보며 급히 눈물을 닦았다.
잠시 후, 영옥은 작은 밥상에 따뜻한 야채죽을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하얀 죽을 보고 있자니 또 누군가가 떠오른 서진의 눈가가 벌게졌다. 그 모습을 보던 영옥은 뭐 이런 황당한 것이 다 있냐는 표정을 짓더니 억지로 숟가락을 그의 손에 쥐여주고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목구멍이 따끔거려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지만 준비해준 영옥을 생각해 겨우 죽을 입에 넘기고 밥상을 내놓기 위해 몸을 일으킨 서진은 숨을 헙! 삼켰다.
“허억.”
제 몸이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뻐근함에 한 번 발을 디딜 때마다 전신이 휘청거렸다. 겨우 방 밖으로 빠져나오자 영옥은 벌써 밭일을 하러 갔는지 작은 집 안에 시계 초침 소리만 달깍거렸다.
결국 혼자 부엌에서 대충 설거지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어어, 염병 총각. 어제 처울다 기절까지 해브렀담서?”
이런, 씹.
현관문을 열자마자 마주친 순자와 정숙이 그를 보더니 아는 체하며 인사를 건넨다. 서진은 걱정스럽게 안부를 묻는 두 사람에게 대충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도망치듯 집으로 향했다.
이놈의 마을 사람들은 사람이 울고 있으면 에헤야디야 잔치를 열어서 구경할 기세였으니.
겨우 조용한 초가집에 도착한 그는 병문안도 가고 겸사겸사 약국에도 들를 겸 할아버지의 트럭을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서진은 잠시 후 도착한 병실 침대 옆에 앉아 할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하는 드라마에 귀를 기울였다.
「 “할아버지 유산, 꿈에도 받을 생각 하지 마.” 」
「 “허. 누가 당신 할아버지야?” 」
멍하니 드라마를 보던 서진은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생각에 할아버지를 향해 대뜸 물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죽으면 꼬추밭 누구 거예요?”
“뭐?”
“그거 저 주세요. 네?”
서진이 간절한 눈빛으로 두 손을 모았다. 거기에 해바라기를 심어야지. 나중에 늙으면 주말농장이나 월말농장처럼 보러오는 거야.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패더니 바로 서진의 머리 위에 딱, 소리 나는 꿀밤이 떨어졌다.
“가져라 가져. 이 느자구 없는 자슥. 아싸리 시방 뒤져불랑께.”
“아, 저 아프단 말이에요!”
서진이 벌게진 이마를 붙잡고 앓는 소리를 냈다.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해가 저물 무렵 서진은 병원 근처 약국에서 진통제와 소염제, 감기약을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그날 밤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모든 약들을 입에 털어 넣고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
“…으윽….”
다음 날 아침. 어찌 된 일인지 서진은 어제보다 더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니,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다. 밭일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온몸을 덮쳤다.
하얀 뺨과 목덜미를 흥건하게 적신 식은땀이 날카로운 턱에 고여 툭 떨어진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을 내쉬던 그가 결국 방문을 열고 나와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끌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영옥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
한참을 걸려 할아버지의 방에 도착한 서진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뒤적거렸다. 자꾸만 눈앞이 흐릿해져 그마저도 한참 걸렸다.
0654-31…….
자꾸만 엇나가는 초점을 억지로 맞추며 수첩에 적힌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꾸욱 누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번호를 누르고 뚜르르르― 울리는 신호를 듣자마자 시야가 까맣게 암전됐다.
콧속을 찌르는 불유쾌한 알코올 냄새에 다시 눈이 뜨였을 땐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초가집의 누런 벽지가 아닌 병실의 하얀 천장이.
근래에만 기절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손가락으로 천천히 꼽아보고 있을 무렵,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환자분. 정신이 쪼깨 드셔라?”
가까이 다가온 의사는 달깍, 라이트를 켜더니 서진의 눈동자에 갖다 대며 반응을 확인했다.
“거 몸살이 심한디 무리하니께 쓰러지죠잉?”
“…….”
“밸 일은 아니고 한 이삼일 정도만 여서 쉬다가 집으로 가시믄 됩니다.”
의사는 정신이 몽롱한 서진을 붙들고 당분간 하면 안 되는 행동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는 멍한 눈으로 머리를 대충 끄덕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머릿속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입원한 곳이 1인실이라는 게 문제였다.
‘젠장, 지금은 과자 사 먹을 돈도 없는데.’
“잠깐만요.”
서진은 설명을 끝내고 뒤돌아 나가려는 의사를 급하게 붙잡고 물었다.
“저… 다른 병실 없어요? 다른 병실로 바꿔주세요.”
“…와요? 여 뭐 문제 있습니까?”
의사가 의아한 얼굴로 되묻는다.
“…그… 문제는 없는데… 당장 돈이 없어서요. 저 6인실이나 8인실도 괜찮은데.”
서진이 머뭇거리며 평생 해보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돈이 없다니. 자기가 말하면서도 위화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러자 여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들고 있던 차트를 슥슥 넘기며 무언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여 이미 수납 끝났다고 쓰여 있는디?”
“예?”
차트를 탁, 소리 나게 덮으며 씨익 미소 지은 의사는 푹 쉬라고 인사한 뒤 병실을 나갔다. 영옥에게 감동한 서진은 주춤주춤 일어나 링거를 끌고 그녀를 찾기 위해 병실을 나섰다.
나중에 아빠한테 말해서 두 배로 갚아야지. 은혜 갚은 비둘기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 구석구석을 찾아다녔지만, 눈에 띄는 영옥의 분홍색 꽃무늬 옷이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나만 입원시켜놓고 밭일하러 갔나. 조금 서운했지만 아쉬운 대로 아래층에 있는 할아버지 병실을 찾아갔다.
“…뭐여!”
갑자기 환자복에 링거를 끌고 나타난 서진을 발견한 할아버지가 아연실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이.”
서진은 할아버지에게 어리광을 잔뜩 부리며 죽을 뻔했다는 둥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다는 둥 조금의 과장을 보태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결국 밭일 일주일 휴가를 받아낸 뒤 다시 자신의 병실로 향하는 서진의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병실 침대에 앉자마자 간호사가 무언가 드르륵 끌고 들어오며 말을 건넸다.
“환자분 식사 드셔라.”
침대 위 넓은 상에 하나둘 펼쳐놓는 음식들은 병원 밥처럼 식판에 나오는 게 아니라 한정식집 10첩 반상 같았다.
“와! 병원 밥이 이렇게 잘 나와요?”
정갈하게 놓인 음식들을 바라보던 서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간호사를 향해 묻는다.
“특식인께 그라죠.”
간호사는 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웃음을 머금은 말투로 정답을 일러주었다. 아무래도 그냥 1인실이 아니라 특실이었나보다.
영옥 아줌마…….
한 번 더 영옥에게 감동한 서진은 감사한 마음으로 밥을 야무지게 씹어 삼켰다. 잠시 후, 식사가 끝나자마자 다시 들어온 간호사가 그의 엉덩이에 따끔한 감기 주사를 놓았다.
몽롱한 약 기운에 취해 까무룩 잠이 든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숲 내음 같은 익숙한 향기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는 다정한 손길이 따뜻해서 그 커다란 손에 마냥 기대고 싶었다.
꿈에서 깨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어느새 촉촉해진 속눈썹을 파르르 떤 서진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던 손길이 멈칫하고 멎는다. 게슴츠레 눈을 뜬 서진은 대략 열 갈래 정도로 갈라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수야.”
이런 걸 님부스라고 하나.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어두운 와중에도 광채가 비치는 것 같았다. 서진은 몽롱하게 도는 약 기운 때문에 실제인지 꿈인지 분간이 가지 않아 젖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서진이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으로 이불을 조금씩 끌어 올려 머리 꼭대기까지 덮어버렸다. 저더러 눈에 띄지 말라고 했던 것이 은연중에 떠올라서였다.
이불은 남자에 의해 바로 아래로 걷혔다. 갑자기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와 함께 시야가 조금 더 또렷해지면서 서진은 이것이 꿈이라는 걸 확신하게 됐다.
꿈속의 철은 현실과 다르게 처음 보는 슬픈 얼굴을 하고 눈동자에는 촉촉한 눈물이 그득했다. 어쩌면 몇 방울 떨구었을지도 모른다.
“…나 아팠어. …어깨 빠지는 줄 알았어….”
꿈이라는 확신이 들자 약에 취한 서진의 주둥이에서는 쉴 새 없이 어리광이 쏟아져 나왔다.
“혼자 겁나게 삽질했다고….”
자기가 할 일을 자기가 한 것뿐인데 마치 그를 원망하고 탓하는 듯한 말투다.
“미안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하는 철의 잠긴 목소리에 온갖 질척한 감정이 엉겨 있었다. 그 한마디와 동시에 서진의 손등 위로 따뜻한 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똥… 쌀… 거야…. 니 밭에….”
어차피 꿈이니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 서진이 개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그 말에 슬픈 표정을 짓던 철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니네 집 거실에도….”
서진이 그를 원망스럽게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니 똥오줌도 좋은디 으짜냐.”
피식 웃던 철이 사뭇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호모….”
정신이 몽롱한 서진은 남자를 올려다보며 아무 말이나 생각나는 대로 계속 반복해댔다.
“호모호모…. 호―모…. 호오…….”
“쓰읍.”
철이 가볍게 그를 제지하자, 뭐가 서러웠는지 서진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고였다.
“…호모 하지 마, 철아….”
그 말에 잠시 멈춰 있던 철은 커다란 손으로 다시 조심스럽게 서진의 머리칼을 쓰다듬다가 세상에서 제일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여. 니가 하지 말라는 건 안 할란께.”
서진이 머리를 살짝 움직여 그의 손길을 피하더니 작게 중얼거린다.
“목말라….”
바로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킨 철이 곧 머그잔에 따뜻한 물 한 잔을 담아 들고 나타났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서진은 침대에 그대로 누워서 아― 입만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나야제.”
철이 그의 뒤통수를 손으로 받치며 일으키려 하자 서진이 목에 힘을 준 채 입을 벌리고 보챘다.
“그냥 줘.”
조금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철이 하는 수 없이 아기 새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서진에게 조르륵 물을 떨어뜨렸다.
“크허억!”
입 안에 물이 들어오자마자 코로 물이 넘어간 서진이 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콜록거리기 시작한다.
“아따 근께… 괘안애?”
그 모습에 당황한 철이 일어났다 앉았다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커…흑…. 입으로 줘.”
괴롭게 기침을 토하던 서진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
“입으로 달라고…. 마우스. 립스.”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서진은 라임 있게 영어까지 섞어가며 원하는 것을 설명했다. 어차피 꿈이니까 괜찮아.
퓨즈가 끊긴 것처럼 멈춰서 멍하니 있던 남자는 천천히 머그잔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서진의 입술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대로 가만히 눈을 맞추는가 싶더니,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도톰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서진의 붉은 입술 위에 꾹 눌렀다.
키스라기보단 접촉이란 단어에 가까운 행위였다.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는 철의 입술에서 따뜻한 물이 새어 나와 서진의 입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바로 감았던 눈꺼풀을 뜬 철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떼어냈다.
“…더 줘.”
서진이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얼거렸다. 다시 머그잔의 물을 입에 머금은 철이 바로 입술을 포개고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하아. 더 줘….”
또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서진은 끊임없이 “더”, “더 줘”라고 말하며 그를 보챘다. 어느새 물잔의 물이 없어진 것을 발견한 철이 잠시 멈칫했다.
“더… 더 줘.”
서진이 가만히 있는 그를 바라보며 급하다는 듯이 칭얼거린다.
철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시선을 교환하는 두 사람의 뜨거운 숨결이 닿더니, 곧이어 입술이 포개지며 철의 따뜻한 혀가 서진의 보드라운 입술을 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는 서진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받치고 더 깊숙이 혀를 집어넣어 입 안 곳곳을 진득하게 훑기 시작했다. 나머지 한쪽 손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의 손에 꽉 손깍지를 잡아 꼈다.
철은 이미 이성이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듯 서진의 입술이 산소마스크라도 되는 것처럼 떨어질 줄 모르고 계속 다급하게 갈구했다.
꿈이지만 생각보다 실감 나고 느낌이 좋다는 생각에 눈을 게슴츠레 뜬 서진은 정염에 빠진 잘생긴 남자의 얼굴을 천천히 감상했다.
뜨거운 혀와 혀가 끊임없이 얽히고. 숨이 막힐 것 같은 키스에 조금 겁이 나서 입술을 살짝 떼어내면, 바로 쫓아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철은 어쩔 줄 몰라 애간장이 타는 것처럼 보였다.
서진은 가만히 눈을 뜨고 자신에게 욕정 하는 꿈속의 철을 감상하며 보드라운 혀를 섞었다.
옅은 담배 향이 나는 것 같은데, 그게 불쾌하다기보다 오히려 기분 좋은 맛처럼 느껴졌다. 꿈이 묘하게 현실감 있는 것이 이래서 사람들이 잠자는 걸 좋아하는구나 싶기도 했다.
“…담배… 피웠어?”
두 입술 새로 축축한 타액이 실처럼 늘어진다. 겨우 입술을 조금 떼어내는 데 성공한 서진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이제 안 피울께.”
철은 갑자기 호흡기를 빼앗겨 숨을 쉴 수 없게 된 사람처럼 애타는 눈빛으로 간절하게 대답했다.
현실이라면 저 꽉 막힌 녀석이 담배 같은 걸 피울 리가 없는데 꿈이라 그런지 설정이 조금 이상하다 싶어 웃음이 나왔다.
“오히려 좋아.”
서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며 대답하자 다시 그의 입술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한밤중에 시작된 입맞춤은 어렴풋이 동이 틀 때까지도 영원할 것처럼 계속됐다.
결국 병실의 하얀 커튼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스며들 때쯤 서진은 약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흐아아암.”
얇은 커튼 사이로 환하게 부서지는 햇빛이 눈가를 간지럽혔다. 막 잠에서 깬 서진은 입을 쩍 벌리고 나른하게 기지개를 켰다.
좋은 꿈이었다.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히죽 올리며 배시시 웃은 그가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가벼워진 몸을 일으켰다. 진통제가 좋긴 좋은지, 그렇게 쑤시고 저리던 몸이 하루아침에 가뿐해졌다.
좋은 꿈을 꿔서 그런가. 복권이라도 사볼까, 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켜서 아래층으로 향했다.
일단, 복권을 사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아침 인사를 할 겸 먼저 병실에 들르기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니 입설 와 그러냐잉?”
“네?”
서진을 마주한 할아버지가 걱정스럽다는 듯 질문을 던진다. 그 말에 서진이 의아한 얼굴로 제 아랫입술 위에 손가락을 얹고 살짝 쓸어보았다. 어쩐지 정말 평소보다 부어 있는 느낌이다.
“쯧…. 짠한그. 을매나 피곤했으믄….”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하는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잠시 할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다가 병실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근처의 복권판매점을 찾았다.
숫자가 적힌 복권을 손에 쥔 것만으로도 당첨될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피식피식 웃음을 참지 못하며 다시 천천히 병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방정맞았다.
‘일단 우리 집 빚을 다 갚고, 할아버지도 집 하나 해드리자. 아 맞다, 은혜 갚은 비둘기. 영옥이 아주머니도 금두꺼비 하나 해드려야지.’
그런 허튼 생각을 하며 드르륵― 병실 문을 여는 순간, 멈칫한 서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복권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
병실에 앉아 있는 커다란 남자를 발견한 서진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니 으디 갔다 오냐.”
의자에 앉아 있던 철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건넸다.
‘저놈이 왜 여기에……?’
정수리 위로 얼음물이 쏟아진 듯 골이 띵하다. 서진의 고동색 동공이 강도 높은 대지진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뇌와 함께 모든 활동을 멈춘 서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석상이 되었다.
“아픈 몸으로 싸돌아댕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어온 철은 마치 서진이 국보로 지정된 도자기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부축해 침대에 눕히더니, 그 위로 포근한 이불을 덮어주었다.
얼떨결에 침대에 몸을 눕힌 서진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럼어젯밤일이꿈이아니라진짜였다는건가니네집에똥싸겠다고한것도워터를핑계로입술을훔친것도그럼이자식은왜그렇게키스를잘하는거야…….’
강물처럼 흐르는 의식을 따라가다 갑작스레 분노로 생각을 마무리한 서진이 천천히 눈알을 굴려 옆에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슬쩍 떠보는 질문을 건넸다.
“니가 여긴 무슨 일로….”
그와 시선이 마주친 철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슨 일은.”
“…….”
서진이 아무 말 없이 무슨 얘긴지 모르겠다는 듯 순수한 표정으로 답하자,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유한 말투로 물었다.
“니 또 기억 안 나냐잉.”
“…무슨 기억?”
서진은 어깨를 들썩이며 일단 오리발부터 내밀었다. 가만히 서진을 바라보던 철이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꺾더니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진짜로 입을 맞추려는 건 아닌 듯 도중에 멈춰 섰으나, 화들짝 놀란 서진은 당황으로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그때 갑자기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환자분 몸은 쪼까….”
“너, 너 이 자식!”
철―썩.
삑사리 난 서진의 목소리와 그의 손바닥이 철의 뺨에 차지게 떨어지는 소리가 병실 안에 울려 퍼진다. 이어서 철의 멱살을 틀어잡은 서진이 의사의 눈치를 흘끔 살피더니 큰 소리로 소리쳤다.
“하여간 친구 병문안 와서도 여자, 여자. 이 여자에 환장한 놈.”
서진은 자연스럽게 남자의 멱살을 쥔 채 앞뒤로 마구 흔들어댔다. 느닷없이 싸대기를 처맞고, 멱살을 잡힌 철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고 그냥 서진이 흔드는 대로 정처 없이 흔들거릴 뿐이다.
“괘안아 보이시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의사가 차트를 꼭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아! 선생님 오셨구나. 글쎄 친구 녀석이 여자 좀 소개해 달라고 하도 귀찮게 굴어서. 완전 여자에 미쳤다니까요?”
어느새 손을 놓은 서진이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크레이쥐” 하고 덧붙이더니 진정성을 보여주려는 듯 눈알을 위로 까뒤집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 모습에 조금 당황한 듯한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예에…. 뭐 그럴 나이긴 하죠잉. 그람 이따 간호사 오믄 주사 한 대 맞고 푹 쉬셔라.”
“네.”
서진이 경쾌하게 고개를 주억거리자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돌아서던 그녀가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근디 참말로 잘쌩겼네. 우리 조카가 참하니 괘안은디. 으째, 소개 한번 받아 보겄어라잉.”
“이야― 정말요? 축하해!”
의사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진은 철의 너른 등짝을 철썩철썩 내리치며 호탕하게 웃어젖혔다. 씨익 미소 지은 그녀는 바로 차트를 북 찢어 펜으로 전화번호를 적은 뒤 연락 달라며 철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서진은 “자식, 입이 귀에 걸렸네.”, “국수 한번 먹어보자.” 따위의 추임새를 넣으며 난리를 쳤다.
드르륵― 탁. 의사가 밖으로 나가고 문이 닫히자 자연스레 두 사람만 남은 넓은 병실엔 한차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고요한 정적이 흐른다.
철은 가만히 시선을 내리깔고 손안에 있는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잘생긴 얼굴에 벌건 손자국이 아직 선명하게 남은 채로.
“…국수.”
철은 한참 동안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멍하니 들여다보며 서진이 말한 단어를 곱씹었다. 난데없이 귀싸대기를 맞았음에도 화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젯밤 꿈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서진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찾느라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내가 오해할 뻔했네.”
낮게 가라앉은 말을 흘린 철이 종이를 구깃구깃 구겨서 가볍게 쓰레기통에 던지더니, 몸을 일으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달은 서진이 당황하여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사과해야 하는데. 때린 것도 크레이쥐 가이로 만든 것도, 어젯밤 일도…….’
변명을 생각하기 전에 상식적으로 사과가 먼저였다. 자신의 이기심을 뒤늦게 깨닫고 몸을 일으킨 서진이 부랴부랴 링거를 끌고 바깥으로 향했다.
“철아…, 철아.”
차마 큰 소리는 내지 못하고 작게나마 그의 이름을 부르며 병원 복도를 뒤지고 다녔다. 얼마간 돌아다녀도 남자가 보이지 않자,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다시 비척비척 병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서진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아 불안한 소동물처럼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진짜 엄청 화났겠지…? 나중에 사과 편지라도 써서 보내볼까.’
그렇게 고민하는 동안 시간이 흘러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고개를 숙이고, 커튼을 뚫고 들어온 주홍빛 석양이 병실 안을 가득 채웠다.
서진이 여전히 침대에 멍하니 앉아 편지의 내용을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병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더니 한참을 찾아다닌 남자가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뭐 그라고 놀라냐.”
씩 미소 지은 철이 별스럽지 않게 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건넸다.
쇼핑백 안에는 갑자기 입원한 서진을 위한 여러 가지 물건과 간식거리, 심심할 때 읽을 만화책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어? 어….”
가만히 철의 눈치를 살피던 서진이 짐을 정리하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넸다.
“미… 안.”
“뭣이.”
철이 그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른다는 얼굴이다.
“여러 가지로….”
서진은 어젯밤 일을 언급하기 껄끄러운 나머지 대충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뭔가 생각났는지 다시 고개를 들고 조금 따지듯이 입을 열었다.
“근데 다시 눈에 띄지 말라고 하지 않았었나. 엄청나게 화난 얼굴로.”
그 말에 하던 행동을 멈춘 철이 놀란 표정으로 서진을 돌아보더니 가까이 다가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니 그거 때문에 속상했냐. 그거는 씅낸 게 아니고 자꾸 눈에 보이믄 내가….”
……하아. 더 말을 잇지 못하고 한숨으로 삼킨 뒷말이 오히려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니한테 와 씅을 내. 그럴 일 읎어.”
손을 허공으로 치켜든 철이 서진의 머리를 쓰다듬는 제스처를 취하며 다정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그렇지. 철딱서니 없는 서진은 미소를 숨기려 입술을 지그시 감쳐물었다.
어느새 자연스럽게 침대 옆에 앉은 철은 당분간 의사 선생님의 말을 잘 들으라며 어른처럼 시시한 잔소리를 건네다가, 다정한 목소리로 시골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하나둘씩 일러주기 시작했다.
조심해야 하는 벌레라든가, 밭일할 때 마스크와 장갑을 잘 껴야 하는 이유라든가, 영감님이 아시면 끝나겠지만 일단 당분간은 고추밭에 사람을 보냈으니 나갈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이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근데 왜 어디 가는 사람처럼 말을 해?”
서진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대답을 조금 망설이던 철이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딴 데서 맻 달만 지낼라고.”
서진은 또다시 머리 꼭대기에 찬물을 끼얹은 듯 멍해졌다. 몇 달이면 자신은 서울로 돌아갈 텐데….
“왜? 왜 갑자기…. 밭은 어쩌고?”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니 놔줘야제.”
철이 무슨 제철 생선 이야기라도 하듯 희한한 답을 내놓았다.
“서진아.”
철은 이미 여러 번 연습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처럼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인제 디져도 여한이 없은께. 니도 여서 잘 지내다 잘 돌아가. 나중에는 장가도 잘 가고.”
“…….”
“국수는 묵으러 안 갈께.”
유언이야 뭐야.
서진이 멍청한 얼굴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커다란 몸을 곧바로 일으킨 철이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한마디 더 남겼다.
“이번엔 까묵지 말어.”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바로 병실을 빠져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서진은 문이 닫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참았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
머릿속엔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며 심장이 100미터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쿵쾅거렸다.
‘무슨 사내자식이 키스 한 번으로 뒈져도 여한이 없어. 덩치랑 안 맞게 포부가 작아도 너무 작은 거 아니냐고. 만약 방에 지네라도 또 나오면 어떡하라고, 어? 과자는 누가 사 주고 더우면 누가 부채질해 주고 밭은 누가 갈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언젠가 보았던 드라마 주인공처럼 손등에 꽂힌 링거 주사기를 거칠게 빼냈다.
“아오! 씹!”
드라마와 달리 아픈 손등을 붙잡고 콩콩 제자리 뛰기를 하던 그는 옆에 놓인 티슈를 뽑아 바늘이 뽑힌 자리를 꾹 누르며 일단 가만히 앉아 지혈부터 하기로 했다.
잠깐, 알코올 솜으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서진은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차분하게 지혈을 마친 뒤, 뒤늦게 병실 문을 열고 나와 다시 또 커다란 남자를 찾아 병원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병원 복도부터 주차장까지 이곳저곳 그를 찾아 뛰어다녔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몇십 분을 뛰어다니며 남들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큰 남자를 계속 찾아 헤맸다.
없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서진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스팔트 위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한기로 온몸을 부르르 떨며 부실한 팔뚝을 쓸어내렸다. 아직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고장 난 텔레비전처럼 시야가 일그러지면서 현기증이 일었다.
없다.
정말 가버렸다.
이미 버스는 떠난 것이다….
……버스가 떠나?
씹, 그런 게 어딨어. 떠난 버스는 다시 잡아서 멈추게 하면 그만 아닌가.
오뚝이처럼 벌떡 몸을 일으킨 서진은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돈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지체할 것 없이 병원 앞 도로까지 달려 나가 대기 중인 택시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범철이네 아세요?”
“…잉? 하이고. 이 동네서 범 씨네 모르는 사람이 어딨당가.”
조수석에 올라탄 서진이 기사에게 혹시나 해서 건넨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대답은 작은 시골 사회를 새삼 실감하게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서진은 괜한 의심이라도 받을까 하는 걱정에 택시를 타고 그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굳이 교우 관계를 밝혔다.
“기여, 드가. 철이 친구.”
“감사합니다.”
어느새 대궐 같은 집 앞에 택시가 멈춰서고, 차에서 내린 서진이 차 문을 닫기 전에 기사를 향해 꾸벅 인사했다.
혹시라도 철이 근처에 있는 건 아닌지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그는 주저 없이 커다란 대문 옆에 있는 초인종을 찾아 눌렀다.
띵동.
“철아― 범철―”
조용한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다.
“…….”
설마 벌써 떠난 건 아니겠지. 불안해진 서진이 손가락을 곧게 세우고 엄청난 속도로 초인종을 마구 눌러대기 시작한다.
띵동띵동띵동띵동띵― 얼마 지나지 않아 쉴 새 없이 울리던 초인종은 결국 장렬히 전사하며 그 본분을 잊고 하나의 고철 덩어리로 전락해 버렸다.
뭐가 이렇게 약해. 미간을 찡그린 그가 이번엔 고개를 들어 높은 돌담을 쳐다보더니 후우, 심호흡했다.
사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병원까지 돌아갈 택시비가 없었다. 철이 집에 없으면 아쉬운 대로 안에서 딱 택시비라도 빌려 가자는 치졸한 계획이었다.
바로 도움닫기를 한 서진은 벽을 몇 번 딛고 짙은 색 기왓장 위에 두 손을 걸치는 데 성공했다.
“으헉!”
문제는 그다음이다. 몸을 더 끌어 올릴 힘은 없고 아래를 보자니 떨어질까 무섭고. 좆됐다. 얌전히 병원에 있다 말고 남의 집 담벼락에 매달려서 이게 무슨 미친 짓이란 말인가.
남의 집 기왓장에 매달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대고 있는 제 모습이 우습고 처량했다. 그 순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애타게 찾던 남자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서진아―!”
서진을 발견한 철이 혼비백산하여 달려오더니, 순식간에 서진을 끌어 내려 땅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주었다. 조금 전까지 병실에 있다가 갑자기 자기 집 담벼락에 매달려 버둥거리는 모습이라니.
“니 위험하게 뭣 하냐?”
철이 황당함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물었다. 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한 서진은 대가리가 텅 비어버렸다.
사실 처음부터 어떻게 하자는 계획은 없었으니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고 아무 생각도 없었다. 뭐라고 말하지?
너희 집 초인종 고장 냈어. 니 거실에 똥 쌀 거라고 했잖아. 미안한데 택시비 좀 빌려줄래? 무슨 사내놈이 키스 한 번 했다고 죽어도 여한이 없냐…….
수십 수백 개의 온갖 대사들이 머릿속에 두서없이 엉키며 맴도는 가운데 입 밖으로 튀어나온 건 그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대사였다.
“너…. 나랑 잘래?”
서진은 제 주둥이에서 나온 말이 말 같지도 않아 저도 모르게 입술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환자복을 입은 채 담벼락에 매달려 있다가 내려와서 하기에 적합한 말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도망 나온 병원이 정신병원이면 몰라도.
듣도 보도 못한 상황에 철은 오히려 알아듣지 못하는 최신 유행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아리송한 표정으로 눈썹을 긁적였다.
“그니까 내 말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수습에 들어간 서진의 뽀얀 뺨 위로 빗방울이 하나둘 툭툭 떨어졌다. 동시에 하늘이 거세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한쪽 눈을 살짝 찌푸리고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 철이 대문을 열며 말을 건넸다.
“일단 들어와야.”
총총걸음으로 비를 피해 익숙한 집으로 들어선 서진은 일단 비에 젖은 몸부터 대충 씻기로 했다. 욕실로 들어간 그는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뜨뜻한 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미쳤나, 왜 갑자기 그런 말을. 일단 나가면 그 말부터 수습해야겠다.’
서진은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오랜만에 방문한 집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거실 한구석에 못 보던 은색 알루미늄 캐리어가 하나 놓여 있다.
캐리어를 노려보던 그는 철이 진짜로 자신을 두고 떠나려고 했다는 것이 새삼 피부에 와닿아 이루 말할 수 없이 조악한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당장 저 캐리어를 뒤집어엎고 싶다는 충동이 든 순간, 옆에서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 대체 여서 뭣 하고 있었냐.”
“…어? 어….”
“근디 아까 그건 뭔 소리여?”
욕실에서 나온 철이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의 물기를 털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마 은근히 그 말이 계속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여전히 은색 캐리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서진이 또 무언가에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너 나랑 잘래?”
철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말에 잠시 물기를 털던 손을 멈추고 후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서진의 옆으로 다가와 소파에 걸터앉았다. 저 쬐깐한 대가리에 대체 뭐가 들었는지 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기여. 자자.”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서진을 바라보며 다소 무감정한 눈빛과 말투로 질문에 답했다.
반응이 왜 이래. 일이 어떻게 됐든 철의 시큰둥한 반응은 서진의 예상에 없던 것이다.
“대신 이유 말해봐야.”
남자가 답안지에 쓴 답의 풀이 과정을 묻는 수학 선생님 같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자고 싶으니까.”
“와?”
철이 눈썹을 산처럼 휘며 대답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다. 정작 말을 꺼낸 장본인도 왜 이런 말을 꺼냈는지 이해가 안 갔으니 당연한 일이다.
“…성욕이 쌓여서?”
그가 아무 데도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까이 닿고 싶다. 하지만 진짜 연인은 될 수 없으니 성욕이라 정의하기로 방금 정했다.
“그게 나로 되겄냐. 니는 호모도 아닌디.”
한쪽 얼굴을 느릿하게 쓸어내린 철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서진은 머릿속으로 지난번에 봤던 커다란 자지를 떠올리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되고말고.
“…뭐… 아쉬운 대로… 그러니까 그냥 딴 데 가지 말고 나 서울 갈 때까지만…. 그 뭐냐, 섹… 스 파트너… 알지? 미국에서는 엄청 흔하고 되게 유행인 거. 알지?”
서진이 목을 가다듬고는 전문성 있게 해외 사례까지 들먹이며 말을 늘어놓았다. 저질러놓고 보니 정작 남자끼리 하는 법을 모른다는 게 문제였지만.
빨간 비디오는 어릴 때부터 많이 봤어도 남자 둘만, 혹은 그 이상 나오는 비디오는 본 적이 없다. 당연히 동성끼리 섹스하는 법에 대한 성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뒤늦게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자잘한 문제는 각설하고 일단 베테랑인 척 그를 설득하기로 했다. 어차피 여자의 그것이 없으니 기껏해야 같이 흔들거나 서로 빨아주는 것 정도 아니겠는가.
“나 성욕 풀고, 너도 풀고. 누나 좋고 매형 좋고. 알지? 윈윈. 윈윈 뭔지 알지?”
서진은 자기도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는 주제에 그가 대신 알아주길 바라며 ‘알지? 알지?’를 남발했다.
꽤 솔깃한 제안일 텐데도 철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왠지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 급발진한 서진이 소파에 앉아 있는 그의 허벅지 위에 냉큼 올라타 마주 보고 앉았다.
“알았으면 지금 한다?”
그의 위에 올라앉으니 다행히 무뚝뚝한 얼굴과 달리 열렬히 달아오르는 아랫도리를 느낄 수 있었다. 서진의 상했던 자존심이 단단한 자지로 다시 세워진 기분이었다.
조금 오버를 보태면, 그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건지 자지 위에 앉아 있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철은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했는지 서진에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침을 꿀꺽 넘겼다.
“…시방 준비물이 없는디.”
남자는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말에 서진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런 게 뭐 필요해?”
“괘안겠냐.”
“아, 괜찮지 그럼.”
서진은 호기롭게 대답하며 픽 코웃음을 쳤다. 손이랑 입만 있으면 되는 걸 준비물이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니 머시마끼리 어떻게 하는 건지는 아냐.”
어쩐지 미심쩍다는 듯 미간을 좁힌 철이 나직하게 물었다.
“아 당연하지. 서울에서 해봤어.”
계속 이러다간 동트겠다. 서론이 길다는 생각에 슬슬 짜증이 올라온 서진이 다짜고짜 그의 목에 팔을 걸친 다음, 도톰한 입술을 냅다 덮쳐버렸다.
가볍게 보드라운 아랫입술을 빨다가 쪼옥,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살짝 떼어내니 바로 뜨거운 숨결과 짙은 색 눈동자가 마주 닿았다.
“…….”
잠시 당황했나 싶었지만, 한순간에 그 서투른 도발에 넘어간 남자가 천천히 서진의 허리에 손을 두르더니 금방 떨어진 것이 아쉽다는 듯 다시 급하게 입술을 머금었다.
뜨거운 혀가 입 안을 파고들어 입천장과 치열을 훑고 점점 더 깊숙이 들어왔다. 맞물린 입술 틈새로 타액에 젖은 숨이 새어 나온다.
여태 어떻게 무덤덤한 척했나 싶을 정도로 갈급한 입맞춤이다. 아무 말도 없이 쪽, 쪼옥, 혀가 섞이고 입술이 맞닿는 외설스러운 소리가 넓은 거실을 채우기 시작했다.
철은 진짜로 서진의 입술을 먹어 치우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애타게 빨고 혀로 핥으며 잘근거렸다.
서진은 자신의 입술을 맛있는 사탕이라도 되는 것처럼 쪽쪽 빨아먹는 그를 밀어내 간격을 조금 벌렸다. 열받지만 그는 키스도 곧잘 했기 때문에 여기서 조금만 더 만지면 키스만으로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완급 조절을 위해 철을 떼어내자, 그는 바로 서진의 아래턱으로 입술을 옮겨 턱선을 부드럽게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이 어느새 널찍한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와 보드라운 피부를 더듬거리고, 긴 손가락이 등허리 가운데 옴폭 파인 골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으응….”
철의 손길이 닿는 부분마다 뜨거운 열감이 퍼지는 것 같다. 입에서 제 것이 아닌 것 같은 신음이 새고 몸이 절로 들썩였다.
철은 커다란 손으로 옷 안쪽을 부드럽게 더듬으며 입술로는 턱선을 타고 목덜미까지 내려가 끊임없이 여린 피부를 혀로 굴리고 입 안으로 빨아당겨 애무했다.
아래에 서로 맞붙은 하체에선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내 몸이 이 정도로 좋은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니. 이제야 알게 된 게 억울할 정도였다.
서진은 몰래 실눈을 뜬 채로 자제력을 잃고 정욕에 빠진 남자를 감상하면서, 그를 부추기듯 바투 끌어안았다. 그 포옹에 화답하듯 철의 뜨거운 혀가 서진의 귓속으로 파고들자 입에서 멋대로 옅은 신음이 샜다.
“읏.”
동시에 커다란 손이 허리선을 따라 자연스레 바지 속, 정확히는 속옷 안쪽으로 들어와 엉치뼈 부근을 살살 매만지기 시작했다. 타인의 손이 닿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곳이라 당황한 서진을 눈치채지 못한 철은 그를 집요하게 애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철의 손이 볼기 사이에 갈라진 골을 쓸어내리더니 조심스럽게 가운데 위치한 구멍에 닿았다.
……그러더니 그 구멍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는 것이 아닌가.
퍼억! 순간 깜짝 놀란 서진이 철의 단단한 가슴팍을 주먹으로 쳐 밀어내며 뜨거웠던 열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사실 너무 놀라서 튀어나온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아, 씹….”
가벼운 욕설을 내뱉으며 얼굴을 구긴 서진은 즐거운 유흥거리를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해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 따져 물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거길 왜 만져?”
잠시 들뜬 숨을 내쉬며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듯 멈춰 있던 철은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결국 너털웃음을 지었다. 꼭 이럴 줄 알았다는 헛웃음 같았다.
“……내가 뭔 짓을.”
그가 들릴 듯 말 듯 자조적인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뭐?”
여전히 놀람이 가시지 않아 심장이 쿵쾅거리는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서진아…. 가시나야.”
철이 그를 다시 부드럽게 끌어안더니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말을 이었다.
“오메. 순진한 거…. 미안. 내가 디질 놈이여.”
뒈질 놈이고 나발이고 빨리 하던 거나 이어서 하고 싶은 서진이 조급함에 입만 살아 나불거렸다.
“시끄럽고. 마저 하자.”
보수적인 몸뚱이와 진보적인 주둥이의 컬래버레이션을 보는 것 같았다.
“니 아픈 거 다 나으믄. 퇴원하고.”
철이 기대고 있던 고개를 떼어내 그와 눈을 맞추며 자상하게 말했다.
이런 벽창호 같은 놈. 씩씩거리던 서진은 잠깐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또 음흉한 입꼬리가 위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그 말은 즉, 아무 데도 안 간다는 것 아닌가. 역시 위급할 땐 육탄 공격이 제일이라더니. 좋아해 마지않는 상대가 섹스 파트너를 하자는데 마다하고 떠날 사내는 세상에 없는 것이다. 역시 삼십육계 중 최고 전략은 미인계라는 게 틀린 말이 아니다.
차 키를 챙겨 든 철은 서진을 다시 병원까지 데려다주었다. 눈 깜짝할 새 도착한 병원에서 새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 침대에 앉은 서진은 신난 기분을 표현하듯 다리를 방정맞게 흔들어대며 말했다.
“퇴원하는 날 하는 거다.”
“기여.”
그 순간 서진이 거울을 봤다면 순진한 처녀를 살살 구슬리는 호색한과 같은 제 표정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서진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남은 기간은 단언컨대 살면서 가장 평화롭고 편안한 사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입원 기간 동안 철은 최소한으로만 집에 다녀오며 병실 간이 의자에 딱 붙어 호위 무사처럼 서진의 곁을 지켜주었다.
밤에 잠에서 깨어 뒤척일 때면 어떻게 알았는지 옆으로 다가와 불편한 게 있는지 물었고, 뭐가 필요하다고 하면 쏜살같이 튀어 나가 그 물건을 가져왔다.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해주는 탓에 간식을 먹고 싶을 때마저 손가락을 까딱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서진이 입만 벌리면 맛있는 과자를 넣어주었다.
결국 나중에는 만화책을 들고 보는 것도 귀찮아 그에게 읽어달라고 했다. 철이 침대 옆에 앉아 유치한 만화책 대사에 서툰 연기를 더해 나름대로 실감 나게 읽어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일부러 자꾸 시켜댔다. 어쩌면 평생이라도 이렇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나날들이었다.
퇴원하는 날 아침이 되자마자 바로 마음을 바꿔 먹었지만.
평생은 무슨. 섹스해야지. 아침부터 불경한 생각에 히죽, 변태 같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킨 서진이 고개를 돌려 병실 안에 있는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화장실이라도 갔나.
잠시 후,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병실로 들어온 간호사가 축하한다며 말을 건넸다.
“홍서진 님. 인제 집에 가시믄 됩니다.”
“네.”
서진은 당장 환자복에서 일상복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며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따, 기분 좋아 보이시네요.”
“그래요?”
“…아, 참! 그 친구분이 퇴원하시기 전에 쪼까 전해달람서.”
“…예?”
아침부터 비어 있던 의자.
서진은 금세 기분이 착 가라앉아 떨떠름한 얼굴로 간호사가 건네준 쪽지를 받아 들었다. 펼쳐본 쪽지에는 정갈하고 단정한 글씨체로 병실에 있는 전화기의 음성 메시지를 확인해 보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설마.’
서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흡 참으며 작은 협탁 위에 놓인 전화기 앞으로 걸어가 수화기를 들고 천천히 버튼을 눌렀다. 뚜뚜― 경쾌한 기계음이 들리고, 차가운 수화기에서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자그마치 1년 전,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로 충격적인 고백이 담긴 메시지의 길이는 채 1분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서진은 그 짧은 메시지가 다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시… 발….”
1993년
1993년
처음 그를 만난 건 지난봄.
매섭게 기승을 부리던 추위가 한 발짝 물러나고, 살랑살랑 따스한 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불며 초록색 새순이 돋아날 무렵이었다.
농약에 관해 쓴 글을 우연히 읽은 박 교수는 글의 저자인 소년을 찾아 매일같이 연락해 귀찮은 제안을 했다. 교수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기 위해 소년이 찾아온 서울의 대학교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곳이었다.
“여 농업생물과학과가 으디여라?”
“…네? 아마 저기 저 오른쪽 건물….”
인사말 대신 꾸벅 고개를 숙인 소년을 보는 여학생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느지막이 옮기는 소년의 발걸음 사이로 플루트와 바이올린, 통통 튀는 하프 소리가 봄바람을 타고 그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세상에 이런 연주도 다 있나.
고상한 어머니의 취향 덕분에 어릴 때부터 클래식을 자주 접한 그의 귀에 들려온 해괴한 불협화음이 오히려 발길을 붙잡았다.
그중에서도 하프는 아주 가관이다. 손가락은 자꾸 미끄러지지, 페달은 엉망으로 밟아대지. 딱 어느 돈 많은 집 자제가 대학에 오기 위해 급하게 연습한 하프겠거니 싶었더랬다.
순전히 호기심으로 들어선 강당은 음악 소리보다 청중들의 웅성거리는 대화 소리가 더 크게 울리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진짜 잘생겼다.”
“저 하프? 안 그래도 여자애들 난리더라.”
“이름이… 홍서진이랬나. 무슨 사람이 똥도 안 쌀 것처럼 생겼냐.”
옆에서 떠드는 소리가 음악 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시선이 무대 위의 누군가에게 꽂힌 건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나 보다. 강당 안의 학생들 대부분이, 아니 어쩌면 모두 그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커다란 금색 그랜드 하프를 품에 안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는 그 사람을.
파헬벨 캐논 D 장조. 하프에게는 같은 음을 반복하는 부분이 많아 난이도가 높은 곡은 아니었다. 저 곡을 가지고 어떻게 저런 연주를…. 신선한 충격 탓인지 그 자리에서 굳은 것처럼 소년의 발걸음이 뚝 멈췄다.
너무나도 괴이한 연주에 심장까지 쿵쿵 요동치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는 목울대가 크게 들썩거렸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돌던 피가 멈춘 것처럼 전신이 싸하다. 별안간 목이 졸리는 것처럼 숨이 막히고, 주먹을 쥔 손바닥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같았다.
뻣뻣하게 굳은 소년은 결국 여러 곡의 연주가 끝나고 무대의 막이 내릴 때까지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그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열이 오른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맥이 풀린 다리를 바깥으로 옮길 수 있었다.
너무 엉망진창인 음악을 듣게 되면 원래 이런 건가…….
홍서진, 홍서진, 홍서진…….
그런데 남자였나, 여자였나.
그날 밤 소년은 침대 위에서 커다란 몸을 뒤척이다가 고장 난 테이프처럼 그 이름을 되뇌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프를 연주하던 그는 달리면서 봐도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봐도 남자였지만, 소년은 괜히 확인하고 싶어졌다.
딱 한 번만 더 보러 가볼까.
결국 어스름한 동이 틀 때까지 잠들지 못한 그는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바로 서울로 향했다. 산뜻한 봄바람과 따뜻한 날씨마저 마음을 붕 뜨게 했다.
소년은 들뜬 마음으로 도착한 음대 캠퍼스 안을 서성이며 몇 시간이고 어제 그 사람을 기다렸다.
“…….”
그날 그는 해가 주황빛 노을이 되어 까맣게 땅에 떨어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서울까지 네 시간이 넘는 거리를 달려온 소년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란 말인가. 다시 해선 안 되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털레털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하지만 다음 날, 결심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고 또 먼 거리를 달려온 소년은 음대 캠퍼스 안을 맴돌며 한 사람을 곁눈질했다.
어제가 휴강이었는지, 오늘은 음대에서 그 사람을 찾는 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엔 항상 소란스러운 소리가 난다거나, 이상한 사건 사고가 따라다녔기 때문에.
뭐랄까, 사람이 ‘적당히’라는 걸 모르고 묘하게…… 염병스러웠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염병 말고 다른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혼자서 얼마나 염병 블루스를 춰대는지,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염병을 딱 하루만 더, 한 번만 더 보러 가자는 것이 쌓이고 쌓여 소년의 일상이 되었다.
커다란 덩치 탓인지 갈 때마다 자꾸 주변 학생들의 시선이 쏠려 결국엔 스토커처럼 검은 모자까지 푹 눌러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토커였다. 달리 무슨 말이 있겠는가.
수요일은 쉬고, 목요일은 저쪽 건물.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이곳에. 소년이 어김없이 눈동자를 굴려 그를 찾았다.
“야, 종팔아―!”
뒤통수를 철썩 때리는 유약한 힘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커다란 소년은 놀란 심장을 부여잡고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허억. 죄송합니다. 김종팔이인 줄 알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고개를 숙이는 익숙한 뒤통수는, 홍서진이다. 염병을 하다 하다, 할 사람이 부족해 드디어 소년의 차례까지 온 것이다.
소년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음처럼 얼어붙었다. 고개 숙인 서진의 가느다란 목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억겁 같은 몇 초가 흘렀다. 반응이 없는 소년이 이상했는지 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소년은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절벽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것처럼 심장이 내려앉는다. 흐르는 공기와 시간마저 멈춘다. 서진이 눈썹을 치켜뜨는 순간, 겨우 정신을 차린 소년이 다급하게 말을 건넸다.
“괘안….”
“홍시! 빨리 이리 와봐!”
갑자기 달려온 마귀 같은 여자가 빨리 와보라면서 모처럼 찾아온 소년의 기회를 싹둑 잘라버렸다. 어금니를 빠득 깨문 소년의 턱 근육이 씰룩거린다. 그를 끌고 가는 여자를 보며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박탈감에 고개를 떨궜다.
처음으로 말을 걸어줬는데….
너무 아쉬웠던 나머지 그날 밤 꿈에선 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두 사람은 푸른 잔디밭에 앉아 오랫동안 천천히 대화를 나누었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그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살랑거렸다. 간간이 웃음을 터뜨리고, 조금 어깨가 스치기도 하면서.
그리고 다음 날. 축축하게 젖은 침대 위에서 희뿌연 액체를 발견한 소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욕을 짓씹었다.
“…씨이벌.”
이 나이 먹고 말 한마디 섞을 뻔한 일로 몽정을 하는 건 사람으로서 할 짓이 아니다. 변태 쓰레기도 이런 변태 쓰레기가 없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덮쳐 두 뺨을 철썩철썩 후려치는 것 같았다. 인제 그만둬야 한다. 아무것도 모를 순수한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그만둬야 했다.
하지만.
늑대 새끼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서 이런 연정을 품은 게 과연 저 혼자만일까…….
소년은 평생 그 사람을 품에 안고 세상 누구보다 귀하게 아끼며 어떤 풍파도 겪지 않게 지켜줄 자신이 있었다. 그를 높은 하늘에 뜬 고고한 달과 태양처럼 떠받들고 섬기며 숭배하겠다고 맹세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람을 어둠을 밝히는 하얀 달처럼 우러러보는 자신과 달리 머릿속으로 더러운 상상을 하며 그를 먹던 밥에 반찬 삼다가 끝내 실행에 옮기려는 변태 새끼가 있다면? 김종팔이가 그런 새끼라면? 소년은 얼굴도 모르는 그놈에게 살해 욕구가 치밀어올라 흐르는 피까지 서늘해졌다.
이번엔 진짜 그 사람을 보러 가는 게 아니라 주변에 변태 같은 마음을 품은 새끼가 있는지 보러 가는 거야. 소년이야말로 그런 음습한 변태 같은 마음을 품은 채 마지막으로 서울로 향했다.
대학교 안에서만 하기로 정해두었던 스토킹은 어쩔 수 없이 서진이 강의를 마치고 여러 명의 남녀 친구들과 함께 근처 술집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됐다.
소년은 오늘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원래 남녀 사이든 남남 사이든 술이 들어가면 위험해지는 법이다. 큰 덩치에 성숙한 외모 덕분인지 직원은 그가 미성년자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자연스레 메뉴판을 건넸다. 그는 근처 테이블에 앉아 아무거나 주문한 뒤 서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왕 뽑은 사람 누구야?”
“나, 나, 나!!”
이런 씨벌. 으디 저딴 게임이 다 있단가. 저놈들로 젓갈을 담가브러야 저 짓거리를 멈출라나. 소년은 살벌한 생각을 하며 용암처럼 들끓는 속에 냉수를 들이부었다.
서진의 무리는 작은 종이에 적힌 번호를 나눠 갖고 왕이라고 적힌 종이를 뽑은 사람이 아무 번호나 불러 사람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한마디로 자유 민주주의인 이 나라에서 히틀러의 독재 정치 같은 쓰레기 짓을 하고 있었다.
“2번 6번 일어나서…… 뽀뽀해!!”
히틀러로 추정되는 새끼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웬 쓰레기 같은 명령을 했다.
“뽀뽀! 뽀뽀! 누구, 누구야!”
“나 6번….”
웬 쭉정이 같은 새끼가 은근히 뺨따귀를 붉히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2번, 2번은 누구!”
“나.”
천사처럼 아름다운 남자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더니 눈썹을 긁적였다. 그와 동시에 소년이 저도 모르게 테이블을 내려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저것들을 그냥. 그가 이성을 잃어버리려는 찰나, 서진이 가운데 놓인 폭탄주 잔으로 손을 옮기더니 그대로 단숨에 잔을 비워냈다.
“에이― 홍시 뭐야아.”
“어우, 재미없어.”
느자구 없는 놈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서진이 장난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혀를 내밀었다.
“…….”
정조 관념까지 완벽한 그에게 감동한 소년은 멍한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감히 닿을 수 없을 만큼 높은 곳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달이요, 더러운 진흙 속에 홀로 핀 연꽃이다.
어느새 시간이 지나 무르익었던 술자리가 파하고, 바깥으로 나온 서진은 친구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눈 뒤 혼자 위태롭게 거리를 걸었다. 평소에도 서진이 투명한 문에 부딪혀 자빠지거나 작은 돌부리에 걸려 자빠지는 모습을 자주 보았기 때문에 소년은 비틀비틀 걷는 그가 행여 넘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바삐 뒤를 따랐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몸을 휘청하는 서진을 뒤에서 급하게 붙잡은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괘안어라?”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서진에게도 들킬 것 같았다.
“김 기사… 끅, 님…?”
반쯤 감긴 눈으로 뒤를 돌아본 서진은 딸꾹질하며 헛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 김 기사님. 나 와인이랑 샴페인 아니면 끅, 못 마시는 거 알죠….”
“…집 어딘지 말해봐야. 델따 줄란께.”
소년이 그를 안전하게 부축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집까지 찾아가 스토킹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해서 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서진이 미간을 팍 찌푸리며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씨이… 왜 김 기사님이 우리 집을 몰라…. 너 누구야악―!!”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탓에 깜짝 놀란 소년이 커다란 몸을 흠칫 떨었다. 서진은 캡 모자를 꾹 눌러쓴 그를 손가락질하며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너, 너, 이… 스리랑치기….”
아리랑치기 아닌가. 꿈으로만 마주했던 그 사람은 가까이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염병이었다.
“가만 있어 봐….”
서진은 뭔가 생각난 듯 그를 밀쳐내더니 갑자기 뒷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야, 야. 옜다. 먹고 떨어져.”
바로 명품지갑을 꺼내 영수증 칸에서 하얀 영수증 몇 장을 꺼내 들더니 소년의 탄탄한 몸을 향해 휙휙 집어 던졌다.
“…….”
“왜? 허…. 부족해?”
소년이 제 몸에 맞고 아스팔트에 떨어진 흰 종이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자, 서진은 지갑 안에 있는 나머지 영수증을 모두 꺼내 그의 커다란 손에 꼭 쥐여주며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이거 가지고… 새 출발 하는 거야. 어? 알았지…?”
염병이긴 해도 따뜻한 서진의 마음씨에 소년이 감동하려는 찰나, 바로 정신을 잃고 기우뚱하는 그를 재빠르게 붙잡았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본 소년은 어쩔 수 없이 근처에서 제일 큰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그를 데려가 눕혀 놓기로 했다. 서진에겐 더 호화로운 곳이 어울렸지만, 급한 대로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서진을 커다란 침대에 눕혀 놓은 소년은 방을 나서기 전에 마지막으로 잠자는 숲속의 염병 가시나를 아주 잠시만 감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같이 벅차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을까. 서진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안…녕….”
자신의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을 발견한 서진이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
그러자 그에게 영혼이라도 바칠 듯한 표정의 소년이 꿈결처럼 대답했다.
“…근데 너 누구야?”
“철…. 범, 철.”
“범철.”
“…….”
‘범철’이라고 따라서 이름을 한 번 불러주었을 뿐인데 온몸의 세포가 흥분으로 날뛰고 멈춰 있던 피가 싸하게 도는 느낌이다.
철이 감동으로 말을 잇지 못하든 말든 그는 신경 쓰지 않고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서진은 꿈보다, 아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울 만큼 훨씬 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에이― 한 살 차이면 친구지. 그냥 이름으로 불러.”
그는 미국에서는 열 살 차이 나는 형도 친구라며 편하게 자신을 부르라고 했다. 안타깝게도 푸른 잔디밭이 아니라 스탠드만 은은한 빛을 내는 어두운 호텔 방이었지만, 두 사람은 소년의 꿈에서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간이 웃으며 눈을 맞추기도 하면서.
단언컨대, 가장 행복한 밤이었다. 소년이 이 세상에 자신보다 행복한 사람은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한참 대화를 나누다 다시 잠들어버린 서진의 침대에 기댄 철도 행복에 취해 잠시 눈을 감았다. 일어나면 깨어지는 꿈이 아니길 기도하며.
하지만 쏟아지는 햇살에 눈을 뜨자마자 바라본 침대 위엔 조금의 온기도 없이 잔뜩 흐트러진 이불만 남아 있었다.
“…….”
그래도 그 흐트러진 이불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아 선연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다음 날, 칙칙한 모자를 벗고 멀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철은 조그만 선물까지 품에 들고 다시 서울로 향했다. 부담스러워서 안 받아줄지도 모르지만, 그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전해주지 않고는 참을 수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캠퍼스를 돌아다니는 커다란 남자에게 꽂혔다. 어차피 내년엔 자신도 이곳에 입학해서 서진 옆에 계속 붙어 있을 거라고, 어제 그렇게 정했다.
캠퍼스를 헤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곳에서 어김없이 동그란 뒤통수를 발견한 철이 짧게 심호흡을 했다.
“서진아.”
어제도 편하게 이름을 부르며 대화를 나눴기에 바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뒤돌아본 서진은 휘둥그레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서진은 정말이지, 너무 예뻤다.
“…아는… 사람이야…?”
옆에 있던 친구들이 서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니? 모르는 사람.”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빠른 대답.
“저 아세요?”
서진이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다시 쐐기를 박았다.
“…….”
그와 시선을 마주한 철은 그 자리에 멍하니 굳었다. 저 눈동자를 바라볼 때면 늘 온몸이 오싹해졌다. 차마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말이 입 안을 간질였다.
당연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 할 수도 있다.
한 번 이야기 나눴다고 학교까지 찾아온 것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고, 어쩌면 시골 촌놈을 아는 체하기가 부끄러웠을 수도 있다.
잠시 멈춰 있던 철이 결국 시선을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닙 …니다.”
제 잘못이다.
애초에 손에 넣을 수 없는 걸 탐내니 탈이 나는 것이다. 그냥 지켜보기만 해도 충분한 것을 욕심낸 잘못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에게 깊은 감정은 부담일 뿐일 테니까.
그날 서진의 학교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웬만한 직장인 연봉만큼 비싼 시계는 꽤 오랫동안 화제가 됐다.
사실 그 후로도 철은 서진의 염병을 끊지 못했다. 전처럼 그냥 모자를 푹 눌러쓰고 멀리서 주변을 배회할 뿐.
그리고 소슬바람에 낙엽이 지던 가을의 끝 무렵, 아무리 찾아봐도 서진의 모습이 계속 보이지 않아 휴학이라도 한 건가 싶어 같은 과 학생을 붙잡고 그에 관해 물었다.
“홍서진 얼마 전에 학교 자퇴했는데…. 지금 연락되는 애 아무도 없어요.”
어떻게든 누가 대신 이 짓을 끝내주길 바랐지만…. 막상 이렇게 갑작스럽게 끝이 나니 허무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차라리 잘된 일이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로, 그가 알게 되어 기분 나쁠 일도 없이 끝이 났으니.
먼 길을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를 처음 만났던 건물 앞에서 뚝 멈춰 섰다.
아쉬운 마음에 마지막으로 서진을 처음 봤던 강당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에 들어서니 산뜻한 봄바람과 학생들의 열기로 따뜻했던 그 날과 달리 초겨울의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아무도 없는 텅 빈 강당 안에서 혼자 멀거니 의자에 앉아 그날을 떠올렸다.
앞에 놓인 악보를 보느라 지휘자는 보지도 않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열심히 줄을 튕기며 하프를 연주하던 그 모습을. 가끔은 실수하고, 이상한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던 그를.
여러 장면이 흐릿하게 떠오르다가 또 뿌옇게 흩어져 간다. 여름날, 친구들과 장난칠 때마다 청명한 하늘을 울렸던 웃음소리는 어째서인지 아주 어린 날 보았던 순수한 꼬마 아이의 웃음과 겹쳐지기도 했다.
잠시 후 고개 숙인 남자의 콧잔등에 고인 물 한 방울이 차가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래도 한 번은 더 말 걸어볼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첫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