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철이 쌩하니 돌아간 뒤로 어느새 일주일이 넘게 흘렀다.
그사이 고추나무도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 밭에서 굳이 두 사람씩 일할 필요가 없어졌는지 할아버지는 처음으로 서진에게 휴식 시간을 주었다.
오래간만에 생긴 자유에 그는 해가 질 무렵까지 잠을 퍼질러 자거나 산책을 하며 동네에 돌아다니는 똥강아지와 친구를 먹기도 했다.
그렇게 노란 장판 위에서 뒹굴뒹굴하기도 지쳐갈 때 즈음, 서진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똥강아지처럼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는 미친 짓을 하기 시작했다.
불과 한 달 전의 홍서진이라면 ‘너는 대체 누구냐’고 멱살을 잡을 만큼 파격적인 변화다. 그만큼 파격적으로 지루했다는 얘기지만.
“너거들 싸웠냐?”
고구마 모종을 흙 속에 찔러넣던 할아버지가 넌지시 말을 던졌다. 오늘은 이웃인 영옥의 고구마밭 일을 도와주던 참이었다.
“네? 누구랑 누구요?”
마찬가지로 할아버지를 따라 뭔지도 모르는 풀때기를 흙 속에 심고 있던 서진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하게 물었다.
“아니여.”
할아버지는 별일 아닌 것처럼 말을 넘겼다.
“김씨 영감! 염병 총각! 샛거리 드셔라―”
멀리서 영옥이 커다란 쟁반을 머리에 이고 엉덩이를 씰룩이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손을 탈탈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서진은 10년 차 농부처럼 자연스럽게 쟁반 앞으로 걸어가 쭈그리고 앉았다. 쟁반 위엔 각종 나물과 김치, 대접에 담긴 흰쌀밥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비빔밥이에요?”
서진이 숟가락을 들며 물었다.
“와? 또 못 묵겄냐잉?”
영옥이 입꼬리를 장난스레 올리고 비아냥거렸다. 아무래도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서진의 이미지는 이제 뭘 해도 염병인 듯했다.
“아 참. 할배두 봤어라?”
“뭣을?”
“아, 그 왜. 설에서 온 아가씨 있잖애.”
비빔밥을 슥슥 비비던 영옥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서울 싸람이 여이 와써요?”
입 안에 비빔밥을 한가득 욱여넣은 서진이 웅얼거리며 물었다.
“기여. 한 맻칠 돼브렀나. 고와. 겁나 고와.”
영옥이 여자의 외모를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중얼거린다.
“갸는 여 왜 왔디야.”
“아, 나야 모르제. 염병 총각이 아는 여자 아니여?”
영옥의 물음에 서진은 열무김치를 입에 물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한밤중에 도망쳐온 그가 지인들에게 행선지를 알릴 리 만무했다.
그렇게 새참을 나눠 먹은 뒤에도 부지런히 밭에 고구마를 심었다. 서진은 해가 산어귀 아래로 떨어질 무렵이 돼서야 할아버지와 함께 파란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영옥의 밭은 집과 고추밭의 거리보다 더 멀었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먼 길을 달려야 했다.
“철이 아녀?”
할아버지의 말에 서진이 창밖을 두리번거렸다. 철은 왼쪽에 펼쳐진 넓은 밭에서 처음 보는 커다란 농기계로 작업 중이었다. 무려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흙길 위에 트럭을 세운 할아버지가 손잡이를 돌려 창문을 내리고 그를 불렀다.
“야, 철아―!”
파란 트럭을 발견한 철이 시끄러운 농기계를 끄고 짧게 대답했다.
“와요.”
“이번에도 고구마밭 저거 넝쿨만 거시기해불믄 으짜냐잉?”
“그거, 가리 두 개 엽면시비 해불믄 돼야. 일주일에 한두 번씩.”
“기여?”
그의 대답에 할아버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들가소.”
철이 짧게 인사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저런 반응이라면 옆에 있는 저를 못 본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열흘 만에 애타는 짝사랑 상대의 얼굴을 봤는데 저렇게 태연할 리가 없다.
“서진이 니도.”
이어지는 인사말에 서진은 귀를 의심하며 눈을 번쩍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참 내……. 말만 하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것처럼 좋아 죽겠다고 고백할 땐 언제고, 바로 태도를 바꿔 꿔다놓은 보릿자루 취급하고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사랑받는 데 묘한 집착이 있는 서진은 개똥밭에서 앞 구르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당장 뛰어나가서 저놈의 멱살을 잡아 소똥 밭에 처박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체급이 아니라는 점을 떠올리며 간신히 참았다.
“가요, 할아버지.”
고개를 팩 돌리는 서진의 이마에 짜증으로 힘줄이 불거졌다.
***
“니 길은 아냐?”
“안다니까요. 고 스트레이트, 턴 레프트.”
다음 날 서진은 할아버지의 트럭에 올라 자신 있게 씩 웃었다. 할아버지에게 용돈도 받았겠다, 길게 자란 머리도 자를 겸 읍내에 나가기로 한 것이다.
기분 전환을 하기 위해 일부러 창문을 열고 산들바람을 맞으며 콧노래까지 불렀다. 잠시 후 도착한 읍내는 역시나 인적이 없어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차에서 내린 서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제일 젊은 사람이 운영하는 미용실이 어디인지 찾아다녔다.
결국 고심해서 고른 곳은 30대 정도의 여성이 하는 ‘새마을미장원’이었다. 딸랑, 문에 달린 종이 울리자 의자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여자가 냉큼 일어나며 인사를 건넨다.
“엄마야. 못 보던 얼굴이네.”
“안녕하세요.”
여자도 이곳 출신은 아닌 듯한 말투였다. 서진이 아주 살짝만 다듬어 달라고 거듭 강조하며 부탁한 결과, 딱 본인만 알 수 있을 만큼 짧아진 머리로 미용실 밖을 나설 수 있었다.
‘좀 있으면 뿌리 염색도 해야 되는데….’
이왕 나온 김에 필요한 것들 좀 사볼까. 트럭으로 향하던 서진은 발걸음을 틀어 수퍼로 향했다. 그의 가벼운 발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선 것은 2층에 커피숍이 있는 건물 앞에서였다.
커피숍의 절반이 투명한 통창 너머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낯익은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것도 긴 생머리의 청초한 미인과 함께였다.
여성은 수줍게 입을 가리고 웃다가 한 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스윽 쓸어넘기기도 했다. 서진도 겪어봐서 잘 아는 제스처들이다.
앞에 앉은 남자가 도대체 얼마나 재밌는 이야기를 씨부리싸고 있는지, 여자의 얼굴에 봄꽃처럼 만개한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다.
눈동자에 불이 붙은 서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더니, 계단을 두 칸씩 성큼성큼 오르기 시작했다. 화산이 폭발하기 전 마그마처럼 들끓는 분노가 희미한 이성을 증발시킨 탓이다.
‘뭐? 사귀면 매일 업고 댕긴다더니.’
저 자식이 여자 친구도 있으면서 자신을 가지고 놀았단 말인가. 대체 어느 쪽이 진심인지 몰라도, 자신과 저 여자를 동시에 기만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좆같은 짓이라는 건 분명하니 이것은 대의명분이 있는 타당한 분노다. 안 그래도 기름을 잔뜩 뿌려놓은 서진의 분노에 명분이라는 불씨가 붙자 분노가 모든 이성을 불 싸지르며 활활 타올랐다.
넌 뒤져브렀다.
지옥의 불구덩이같이 타오르는 서진의 마음속과 달리 딸랑, 맑은 종소리가 나며 의외로 조용히 커피숍 문이 열렸다.
서진은 “어서 오셔라.” 하고 메뉴판을 들고 인사하는 직원을 눈짓으로 가볍게 제지하고 목표물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먼저 서진과 눈이 마주친 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긴 생머리의 여자였다. 누군진 몰라도 오늘 제가 구할 가여운 중생이다.
“범철아….”
갑자기 들려온 생각지 못한 목소리에 눈썹을 찌푸린 철이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내가 잘못했어….”
그에게 다가가 살포시 어깨에 손을 올린 서진이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제 많이 기분 나빴지?”
세 사람 사이에 의아함 섞인 적막이 흐르고, 크응 코를 한 번 들이마신 서진이 뒷짐 진 손에 감추고 있던 치명타를 날렸다.
“니가 나 때리고 구박하는 거… 다 니꺼 제대로 못 빨아준 내 잘못이잖아…. 흐윽.”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얼어 있던 여자의 얼굴이 경악으로 천천히 굳는 것이 느껴졌다.
“흑…. 니가 하라는 대로 방망이가지고 연습도 많이 했어. 이번엔 진짜 잘 빨아볼게. 흐윽…. 오, 오늘은 때리지만 말아줘….”
한층 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은 서진은 곁눈질로 여자의 반응을 흘끔흘끔 살피더니 마지막엔 손으로 머리를 막는 제스처까지 취해 보였다.
“…이게 …무슨….”
앞에 앉은 여자가 하얗게 사색이 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울 말투? 그때 서진의 머릿속에 어제 영옥이 말한 서울 아가씨가 뇌리를 스쳤다.
‘그래, 서울 여자란 말이지. 어째 취향 한번 대쪽 같구나.’
그런데 정작 아무 말 없이 서진을 올려다보는 철의 표정은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다. 아니, 덤덤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좋아 보이는 것도 같다.
철이 어깨를 살짝 움직이는 순간, 서진이 기겁하며 또 손으로 머리를 막은 다음 몸을 움츠리고 울부짖었다.
“아흑, 잘못했어, 제발 폭력만은…!!”
그 모습에 철은 피식 웃음까지 터뜨렸다. 웃어? 이 뻔뻔한 쓰레기 자식 같으니라고.
“서진아.”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진을 부르더니 말을 이었다.
“기여. 연습 좀 했냐.”
그 말에 되레 당황한 건 서진이었다.
“어? 어어….”
서진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철이 바로 앞에 앉은 여자를 향해 딱딱하게 말을 뱉었다.
“암튼 박 교수님한테 그래 전해주소잉.”
스치듯 들어도 여자 친구를 대하는 말투는 아니다. 설마…. 분노로 불타던 서진의 심장이 서서히 차갑게 식으며 이성이란 것이 느지막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네…. 그렇게 얘기… 전할게요….”
여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자의 사무적인 말투가 마지막으로 서진의 심장에 쐐기를 박는 듯했다.
“잠깐! 제가 말한 건 빨래예요, 빨래!”
자리에서 일어난 철은 뒤늦게 수습에 들어간 서진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방망이로 빨래 연습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딸랑, 맑은 종소리와 함께 커피숍 문이 닫혔다. 눈 깜짝할 새에 건물 계단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머리 깎았네.”
철이 먼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응….”
서진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따라와야.”
먼저 걸음을 옮기는 남자를 보며 서진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어디?”
“연습했담서.”
철이 장난스러운 어투로 픽 웃었다. 서진은 대역 죄인이라도 된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어금니를 아득 깨물었다.
사실, 죄인이 된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죄인이나 다름없다. 사람이 한사람 앞에서 얼마나 많은 염병을 떨 수 있는지 기네스북에 등재할 수 있다면 자신이 1등이 아닐까.
“차 어디 세웠냐.”
“…저기 주차장 …이요.”
서진은 정신 줄을 붙잡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해 버렸다. 그 말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철은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 주차장으로 향했다.
서진은 당장 아무 데나 머리를 처박고 죽고 싶다는 심정으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먼저 도착한 철이 파란 트럭 앞에 서 있자, 서진이 백화점 도어맨처럼 달려가 얼른 열쇠로 문을 열어주었다. 먼저 운전석에 오른 철을 위해 차 문을 닫아준 뒤 조수석에 올라타 후우, 심호흡을 크게 했다.
‘그래. 어차피 각오했던 일 빨리 해치워 버리자.’
그리고 바로 철의 사타구니 쪽으로 몸을 숙여 그대로 그의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어허.”
흠칫 놀란 철이 단마디 탄식을 내뱉으며 서진의 어깨를 잡아 저지하고 물었다.
“뭐여?”
“……아니야…?”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서진의 눈가가 촉촉하다.
“…돌아블겄구만.”
깊은 한숨을 내쉰 철이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선 아닌가 보다….
서진은 자연스럽게 다시 버클을 채워준 뒤 얌전히 자세를 바로 했다. 잠시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철은 별말 없이 핸들을 돌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집으로 가는 줄 알았던 차는 어느새 처음 보는 길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색다른 풍경이 나오기 시작한다. 터미널이 보이고 꽤 빽빽하게 늘어선 상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빠르게 달리던 차가 멈춰 선 곳은 근처에서 가장 큰 시내였다.
“내려.”
차를 세운 철이 안전벨트를 풀며 말했다. 고개를 쭉 내밀고 주변을 둘러보던 서진은 허둥지둥 그를 따라 트럭에서 내렸다.
호텔… 같은 곳으로 가는 건가? 아무래도 집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찝찝했나 보다. 머릿속에 오로지 고추를 빨 생각만 가득 찬 상태로 그의 뒤를 따라 뭔지 모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 안에는 동그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은 철에게 다가간 서진은 대뜸 바닥에 꿇어앉더니 또 그의 바지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
“에헤이! 참말로.”
순간 기겁한 철이 서진의 손을 다급하게 제지하더니 지퍼를 냉큼 올려버렸다.
“……아니야…?”
서진은 또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며 물었다.
“가시나야. 여가 으디라고.”
빨끈 미간을 구긴 철이 작은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가 양손으로 서진을 일으켜 세우는 순간, 문이 열리며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들어와 고급스러운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런, 씹.’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밖에 없던 서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텔이 아니라 중식당인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쌍욕을 삼켰다. 아무래도 자신은 염병도 모자라 꼭 천병까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나 보다.
잠시 후 흰 그릇에 담긴 전가복, 칠리소스 바닷가재, 북경 오리 등 여러 가지 요리들이 둥그런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라 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서진이 음식을 보며 멀뚱멀뚱 가만히 앉아 있자 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니 입맛엔 못해도 여는 이런 데밖에 읎어.”
그 말에 서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잘 먹을게.”
서울에 있는 호텔 중식당만큼은 아니어도 이 정도면 나름 고급스럽게 잘 나오는 편이었다. 게살수프부터 입에 넣은 서진은 생각보다 입에 딱 맞는 맛에 정신을 놓고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난 듯 멈칫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맞다. 아까 그 여성분 삐삐 번호라도 알려줄래?”
“…와?”
서진의 질문에 철이 순식간에 표정을 굳혔다.
“그냥 친구한테 장난친 거라고… 오해하지 말라고 설명해볼게.”
서진은 눈을 내리깔고 부고 소식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최대한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은께 신경 꺼야.”
정말 변태 쓰레기 새끼로 낙인찍힌 것쯤은 상관 안 한다는 듯 무심한 말투다. 결국 어영부영 식사를 마친 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시내를 걸었다. 사실 서진은 처벌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냥 그를 졸졸 따라다닐 뿐이었지만.
복잡한 거리를 조금 걸어 도착한 곳은 ‘제일극장’이라는 영화 상영관이었다. 각양각색의 그림 포스터들이 즐비한 곳에 멈춰 선 철이 서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뭐 볼래?”
“…응?”
생각지 못한 질문에 고개를 든 서진이 눈앞의 포스터들을 바라봤다.
‘뭐야 이거. 왜 제목이 다 한자야.’
하필 상영 중인 게 대부분 중국 영화였는지 한자와 담을 쌓은 서진이 제목을 읽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고민하던 그는 그나마 한글이 가장 많이 들어간 영화 제목을 가리켰다.
〈그 사랑 色이 되어〉
그 사랑이 대체 뭐가 된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사랑이 들어가니 로맨스 영화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철이 고개를 돌려 어쩐지 떨떠름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로맨스 영화 싫어하나….
잠시 후, 창구에서 표를 끊은 두 사람은 어두운 상영관으로 들어가 앉았다. 주말이 아니라 그런지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조용한 영화관 내부를 바라보던 서진의 머릿속에 순간 벼락같은 생각이 스친다.
어둡고… 아무도 없다…. 설마…… 여기서, 여기서 해달라는 건가? 고민하던 서진의 손이 조심스레 옆에 앉은 남자의 고간으로 향했다.
“아따, 참말로.”
그곳에 닿기 전에 그의 손을 제지한 철이 성가시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야…?”
서진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촉촉한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철은 대답 대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망해진 서진은 괜히 목을 가다듬은 뒤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 “아흣. 이러지 마세요!” 」
「 “오래전부터 널 원했어. 너도 날 원하잖아.” 」
「 “으읍…! 아흐응… 앗!” 」
「 “아 미숙이! 최고야!” 」
그리고 시작된 〈그 사랑 色이 되어〉라는 영화는 러닝타임 10분 만에 아찔한 교성과 살색의 향연이 펼쳐졌다.
서진은 오랜만에 접하는 빨간 비디오에 입을 쩍 벌린 채 스크린에 빨려 들어갈 듯 빠져들었다. 그냥 로맨스 영화인 줄 알았는데. 이게 웬 떡이야.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쉰 철은 스크린에 영혼을 빼앗긴 서진을 한 번 쳐다보더니, 표정을 굳히고 바로 몸을 일으켜 그를 바깥으로 끌고 나왔다.
“아 왜, 잘 보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끌려 나온 서진이 아쉽다는 듯 칭얼거렸다. 아무 말 없이 그를 끌고 나온 철은 서진을 차에 태운 다음 영화관으로부터 도망치듯 바로 시동을 걸었다.
“인자 저런 거 보지 말어.”
남자가 핸들을 꺾으며 입을 열었다.
“왜?”
“책임지지도 못 할 짓 하는 게 사람 새끼냐잉.”
서진의 물음에 철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소린가 생각해보니 영화의 내용을 말하는 듯했다. 남자 주인공이 아내를 내버려 두고 옆집 유부녀와 바람이 난 내용이었으니. 좀 배덕하긴 해도 원래 에로 영화란 그런 거였다.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서진이 킥킥 웃으며 중얼거리자 철의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니도 그럴 수 있냐.”
세상 날티 나는 얼굴로 하는 말마다 은근 보수적인 것이 언밸런스해 서진은 웃음이 터졌다. 이 순진한 시골 청년을 보면 자꾸 놀려주고 싶어 장난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뭐. 서울에선 다 그러고 바람피우지.”
서진이 입술을 비죽 내밀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바람은 개뿔. 연애 경험도 한 번 없었지만, 아까부터 자신에게 무안을 준 녀석을 조금이라도 놀려주고 싶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철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람 의미 없겄네.”
“뭐가?”
서진이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아까 나온 그런 짓들.”
“뭐… 한다고 닳냐? 너 요즘 시대에 너무 보수적이어도 인기 없다.”
서진이 장난스럽게 눈을 반달처럼 휘고 철의 어깨를 툭 치며 반응을 살폈다. 정작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조선 시대 선비야 뭐야. 하여간 꽉 막힌 놈.
결국 숨 막히는 정적 속에 트럭이 익숙한 길로 들어섰다. 서진의 초가집 방향은 아니었고, 커다란 한옥 앞에 차가 부드럽게 정차했다.
철이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열고 내리자 어리둥절한 서진이 마찬가지로 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던 철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욕실로 들어가며 한마디 남겼다.
“니도 씻칠라믄 씻쳐.”
“…어어?”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서진은 잠시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설마 지금? 지금이구나……. 준비는 아까 전부터 끝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니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후우, 하아. 서진은 천천히 심호흡하며 쿵쿵 뛰는 심장을 가라앉혔다. 어차피 한 번 해버리자고 마음먹었던 일이다. 남자답게 시원하게 끝내버리고 이 무거운 짐을 훌훌 털어내자.
거실에서 서진이 한참 마음의 준비를 하는 동안 샤워를 끝낸 남자가 아래에 수건만 걸친 채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처음 보는 그의 탈의한 모습에 무의식적으로 눈이 돌아갔다.
옷을 입고 있을 때도 느꼈었지만, 탄탄하게 올라붙은 복근과 적당한 어깨 근육부터 이어지는 가슴근육이 근사했다. 일부러 조각을 빚어도 저렇게 빚긴 힘들겠다 싶다.
속으로 부러움을 삼킨 서진의 시선이 마지막엔 그의 중심부로 향했다. 침이 목구멍 뒤로 꿀꺽 넘어갔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반쯤 서서 수건 밖으로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자지는 도저히 입에 들어갈 크기로 보이지 않았다.
뭐 어떻게든 쑤셔 넣고 손으로 대충 끝내버리면 되겠지. 서진은 머릿속으로 다시 한번 얕은 전술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후우….”
그가 한창 시뮬레이션을 떠올리며 심호흡을 하는 동안 소파에 앉은 철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잠시 후, 모든 준비를 마친 서진이 자세를 한껏 낮추고 철에게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다….”
서진은 거대한 목표물에 눈을 맞춘 채 대단한 일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해 봐.”
남자가 어디 한번 해보라는 듯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뒤뚱뒤뚱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은 서진이 조심스럽게 수건을 걷어내자,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은 팔뚝만 한 자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두꺼운 선단에서는 이미 투명한 액까지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서진은 왠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감에 못 본 척 눈을 질끈 감고 대충 손으로 기둥을 감싸 쥐었다.
선명한 핏줄과 두근거리는 맥박이 지나칠 정도로 실감 나게 느껴져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서진이 손을 대자마자 더 빠르게 두근거리며 조금 더 크기를 키운 자지는 이미 살짝 젖어 있던 선단에서 끈적한 쿠퍼액을 한 번 더 토해냈다.
여기서 더 커질 수 있다니. 거대한 살덩이를 바라보는 서진은 이제 경이롭다는 느낌이었다. 아무튼 이걸로 모든 빚을 청산하는 거다. 철의 것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서진이 입술을 크게 벌리는 순간.
흥분을 꾹 참는 것처럼 억눌린 숨을 내뱉고 있던 철이 별안간 서진을 확 일으켜 세우더니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서진아.”
자신을 꽉 끌어안은 철이 미세하게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미안…. 이런 거 안 해도 돼.”
이게 무슨 소리야? 순간 뒷골이 확 당겨 서진의 관자놀이 핏줄이 움찔거렸다. 오늘 하루만 몇 번의 마음 준비와 몇 번의 시뮬레이션을 했는데. 이제 와서 이게 뭔 개소리냐고.
“내가 잘못했은께.”
철이 품에 안은 서진을 살짝 떼어내더니 빌어먹게 잘생긴 얼굴을 들이밀며 눈을 맞췄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이용해 급하게 다시 수건을 여민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구 놀리나? 갑자기 눈앞에서 먹을 것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진의 눈에 점점 격한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이… 씹….”
그의 잇새에서 뜬금없이 새어 나오는 욕설에 놀란 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추 내놔.”
서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말을 뱉었다.
“빨 거야.”
정말이지, 그 본인조차 생각지 못한 말이다. 당당하게 자지를 요구한 서진은 황당함에 잠깐 힘이 풀린 그의 품에서 쏙 빠져나와 다짜고짜 아래에 고개를 처박았다.
바로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더니 커다란 귀두를 헙, 입에 쑤셔 넣는다. 좆이 정말 좆같이 컸다.
“…읏….”
갑작스럽게 아래에 뜨거운 입술과 혀가 닿자 철이 목구멍을 긁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고작 귀두만 넣었을 뿐인데 입 안이 벌써 꽉 찼다. 서진은 자지를 입에 더 밀어 넣을 생각은 하지 못하고 대신 손으로 두꺼운 기둥을 잡아 대충 슥슥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 서투르기 짝이 없는 어설픈 행위에도 철은 착실하게 느끼며 벌써 사정을 참는 것처럼 복근을 세게 조였다.
서진은 목구멍이 꽉 차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오로지 악과 깡으로 그의 것을 힘주어 쭈웁, 빨아댔다.
입 안에선 처음 느껴보는 쿠퍼선액의 비릿한 맛이 혀를 감싸고, 위에선 어쩔 줄 모르고 흥분한 남자의 달뜬 숨이 느껴졌다.
잠깐, 내가 뭘 하는 거지? 불현듯 서진의 이성이 돌아오려는 찰나였다.
“윽!”
철이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서진의 입속에서 살덩이를 세게 잡아 빼내더니 한 손으로 귀두 끝을, 한 손으로는 서진의 작은 얼굴을 막았다. 그 서툴기 짝이 없는 행위에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정한 것이다.
자지 끝에서 거세게 뿜어져 나오는 끈적한 액은 보통 사람보다 몇 배로 많아 꼭 하얀 오줌 같기도 했다. 서진의 얼굴과 귀두 끝을 잡고 있던 커다란 손으로도 다 막지 못한 정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미안…. 괘안애?”
가쁘게 숨을 몰아쉰 철이 서진의 얼굴을 가린 손을 슬며시 치우며 그를 확인했다.
“어? …어어.”
그가 사정하는 동안 완전히 이성이 돌아온 서진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미안.”
거듭 사과를 건네며 커다란 수건으로 손과 바닥에 흩뿌려진 정액을 슥슥 닦아내던 남자가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니 여서 쪼깨 기다려봐야. 암 데도 가지 말고.”
“어? 어어.”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멍하니 거실 바닥에 앉아 있던 서진은 그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쏜살같이 일어나 스프링처럼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어어는 무슨 어어. 미친놈. 홍서진, 이 미친놈아.’
서진은 속으로 욕을 곱씹으며 파란 트럭에 올라탄 다음 바로 시동을 걸었다. 자꾸만 손이 미끄러져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 순간에도 다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계속 키를 돌렸다.
“걸려라, 걸려….”
기어코 시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시동이 걸리고, 서진은 바로 액셀을 세게 밟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책임지지도 못 할 짓 하는 게 사람 새끼냐잉. 사람 새끼냐잉. 새끼냐잉…….
아까 들었던 철의 목소리가 어쩐지 머릿속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분명 빨아준 건 자신인데, 꼭 먹튀 하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