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니 시방 뭐 찾냐잉?”
“네? 뭐가요?”
할아버지의 물음에 서진이 갑자기 삽으로 열심히 흙을 퍼내며 모른 척 되묻는다. 그렇게 한두 번 더 흙을 퍼내는가 싶더니, 금방 또 고개를 들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바빴다.
“아따 정신 사납고로. 그 모가지 가만 못 두냐.”
“뭐가요?”
서진은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급하게 삽질을 시작하며 시치미를 뗐다.
“쓰읍!!”
파블로프의 개처럼 할아버지의 쓰읍에 길들여진 서진이 그제야 허겁지겁 제대로 밭일을 시작했다.
당연히 오늘도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철은 해가 중천에 뜨도록 어디서 뭘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서진은 괜히 죄 없는 땅을 퍽퍽 헤집어댔다.
아침부터 그놈을 어떻게 부려 먹을지만 생각하고 나왔는데 이 얇은 손목때기로 혼자 삽질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한참 소처럼 밭을 갈던 중, 달리는 차 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워지더니 처음 보는 작은 트럭이 근처에 멈춰 섰다. 40대 정도로 보이는 키가 작은 남성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건들거리는 걸음걸이로 밭에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야가 그 조카 손주~?”
“고 씨가 여는 웬일이당가.”
남자의 물음에 할아버지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 씨는 본인이 저지른 여러 가지 나쁜 일로 마을에서 평판이 좋지 않은 남자였다.
“아, 하도 말이 많응께 구경 왔제. 근디 야 가시나여 남정네여~?”
“안녕하세요.”
서진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남자에게 꾸벅 인사했다. 어쩐지 할아버지는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크흠!” 괜히 큰 소리로 목을 가다듬었지만 남자는 신경 쓰지 않고 서진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기여, 니 맻 살이냐잉?”
“스물한 살이요.”
“겁나게 에리구마잉. 니 술은 좀 혀냐?”
“네, 뭐….”
서진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정확한 주량은 몰랐지만, 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다시 삽질을 시작하려는 서진에게 남자가 계속해서 말을 붙였다.
“여 왔으믄 나랑 술 한잔해야제잉.”
“저 소주 같은 건 못 마시는데요.”
서진은 남자에게서 왠지 소주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미리 말해두기로 했다.
“워매, 거시기한 거. 그라믄 뭐, 막걸리?”
“와인이나 샴페인이요.”
“참 내… 옘병은. 기여 기여, 와인이믄 되냐?”
“네… 뭐.”
남자가 불편했던 서진은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따 사람 많네.”
아침부터 서진이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만든 장본인이 드디어 귀하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축 처져 있던 서진의 입꼬리가 씨익 위로 당겨졌다.
“왐마. 철이 니 오랜만이다잉?”
고 씨가 그를 향해 반갑게 인사했지만, 철은 딱딱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기만 할 뿐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민망해진 고 씨는 괜히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서진에게 관심을 돌렸다.
“그 포도주가 와인, 그거 아니여?”
“그렇죠.”
귀찮아진 서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람 가드라고. 한잔 사줄랑께.”
“예? 지금요?”
훤한 대낮부터 무슨 포도주를 드링킹하자는 건지. 당황한 서진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 아재요. 잠깐 나 좀 보소.”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철이 손을 까딱까딱하며 남자를 불렀다.
의아하게 여긴 고 씨가 몇 걸음 걸어 그에게 다가가자, 철은 슬그머니 고 씨의 어깨에 손을 올려 어깨동무를 하더니 서진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고 씨는 어쩐지 다른 사람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한 발짝 옮길 때마다 공기가 차가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
얼떨결에 끌려온 고 씨는 애써 무슨 일이냐는 듯 태연히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딴 눈깔로다가 쟈 쳐다보지 마소.”
“…뭐?”
자기보다 한참 어린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말이 나오자 고 씨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와락 구겨졌다.
“한 번만 더 그딴 식으로 쳐다보믄 눈깔을 싹 뽑아갖고 당구를 쳐불랑께.”
고 씨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냅다 내리꽂는 막말에 직격포를 맞은 듯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뭐? 이…, 이 씨부럴 너, 이 어린노므 시끼가!”
황당함에 목구멍이 꽉 막혀 말도 똑바로 나오지 않는다.
“근께 어린놈한테 디져불기 싫으믄 싸물어 이 씨벌놈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남자의 귓구멍에 욕을 때려 박은 철은 그를 퍽! 소리 나게 앞으로 밀쳐버렸다.
“그라믄 들가소잉.”
마지막 인사는 떨어져 있는 서진에게도 들리게끔 큰 소리로 외쳤다. 빨리 꺼지라는 듯 손까지 흔들어 보이면서.
앞으로 고꾸라진 고 씨가 분노와 수치, 공포가 적절히 섞인 낯으로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혔다. 잠시 후 꾸물꾸물 몸을 일으킨 그는 애꿎은 밭에 대고 욕을 내뱉더니 자신의 트럭에 올라타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뭐야? 간 거야?”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삽에 몸을 지탱하고 두 사람을 지켜보던 서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터덜터덜 걸어 가까이 다가온 철은 먼저 서진의 왼쪽 발부터 살폈다.
“발등 찍어븐 건 괘안애?”
서진은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으며 최대한 연약하고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좀 아픈 것 같은데. 아…, 삽질하기 너무 힘들다.”
한 손으로 이마에 흐르지도 않는 땀을 닦는 척하며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푹 내쉬는 모습이 가련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어서 빼앗아 삽질이나 해보라는 듯 철을 향해 삽을 쭉 내민 채였다.
“여 삽질 다 끝난 거 같은디.”
“…어?”
그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평하던 흙밭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세로로 기다란 언덕들이 질서 정연하게 죽 펼쳐져 있다.
“인자 두둑은 다 끝냈응께 낼 비니루 씌우면 되겠구마잉. 수고했다.”
어느새 다가온 할아버지가 서진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더니 손에 들린 삽을 빼앗아 트럭으로 향했다.
“우와. 이걸 다 내가 한 거야?”
처음으로 느껴보는 육체노동의 뿌듯함에 왠지 알싸한 감동이 가슴께에 퍼지는 것 같았다. 여태껏 식목일에 풀 한 포기도 심어본 적 없는 그였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한 저짝부터 여까지는.”
쓸데없이 사실적인 철의 대답에 서진은 잠시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금세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또 입술을 오므리며 삐져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다.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그런가… 피곤하네.”
“와 잠을 못 자?”
서진의 말에 철이 짙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내 방에 지네 있거든. 대왕 지네. 너 사람 발 크기만 한 지네 본 적 없지?”
“많제. 거는 약으로 조사브러야 하는디.”
“약?”
서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잠시 생각하던 철이 물었다.
“니 읍내 가볼래?”
읍내? 여긴 꼼짝없이 흙이랑 풀밖에 없는 곳인 줄 알았는데 근처에 번화가가 있단 말인가. 머릿속으로 서울의 복잡한 번화가를 떠올린 서진의 눈빛이 이채로 반짝였다. 슬며시 시선을 내려 자신의 상태를 점검한 서진은 한껏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나 옷 좀 갈아입고.”
살면서 가장 많이 신경을 쏟아부은 게 외모뿐인 그는 차마 사람이 많은 번화가에 흙밭에서 구르던 옷을 입고 갈 수 없었다.
철은 왠지 탐탁지 않아 보였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집까지 태워다 주었다.
초가집에 도착하자마자 신이 난 발걸음으로 방에 들어간 서진은 캐리어를 한바탕 뒤집어엎었다. 바로 작은 손거울을 들고 이것저것 옷을 대보기 시작한다. 이것도 어울리고. 저것도 괜찮고. 철이 저놈이랑 다닐 때 안 꿀리려면 좀 더 화려해야 되나.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각도에 따라 반들반들한 빛이 나는 실크 소재 반소매 셔츠를 골랐다. 이번에도 역시 헤어 젤을 손바닥 위에 동전만큼 짜낸 다음 꽤 많이 자란 앞머리를 쓱쓱 쓸어 넘겼다. 이 정도면 철이 저 자식 옆에 있어도 안 꿀리겠지.
히죽 웃으며 화려한 공작새처럼 단장을 끝낸 서진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분명 방에 들어갈 땐 순박한 시골 청년이었는데, 나올 땐 웬 생양아치 한 명이 걸어 나오고 있다.
마당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철이 서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번 슥 훑어보고는 별말 없이 트럭에 올랐다. 서진도 그의 뒤를 따라 쭐레쭐레 조수석에 올라탔다.
너무 멋있다든가, 너무 잘 어울린다든가, 뭐 그런 열렬한 반응을 기대했는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운전만 하는 남자를 보며 기다리다 못한 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뭣이.”
철이 여전히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대꾸했다. 서진은 고개를 쭉 내밀고 사이드미러를 보며 다시 한번 머리칼을 슥슥 정리하고서 물었다.
“좀 멋있냐?”
뭐, 너무 잘생겨서 할 말을 잃었다든가.
그 말에 별소리를 다 듣는다는 것처럼 철의 입가에서 헛웃음이 샜다.
“응?”
어서 칭찬이나 해보라는 듯, 서진은 이미 정해져 있는 답변을 채근했다.
“글쎄. 나는 니가 그지꼬라지로 댕겼으믄 좋겄는디.”
“뭐? 그지꼬라지?”
서진은 생각지 못한 남자의 반응에 순간 눈을 부릅떴다. 그의 따가운 시선에도 철은 뭐가 좋은지 운전하는 내내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두 사람이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를 달리던 차가 허허벌판 같은 주차장에 멈춰 섰다. 창밖을 살피는 서진의 얼굴이 어딘가 어리둥절했다.
“…읍내는?”
“여가 읍내제.”
황당한 대답에 서진의 뒷골이 빠듯하게 당겨왔다. 번화가는커녕 이건 그냥 넓은 간격으로 작은 상가들이 늘어선 한산한 거리가 아닌가.
서울에 있을 땐 바로 집 앞에만 나가도 여기보단 번화한 곳이었다. 실망감에 휩싸인 서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손으로 두 눈두덩을 꾹 눌렀다.
“담엔 큰 시내로 갈란께, 쪼깨 참어.”
그의 어두운 표정을 눈치챈 철이 얼른 말을 덧붙인다.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트럭에서 내려 그와 함께 한산한 읍내를 걷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수퍼마켓, 옷 가게, 미용실, 커피숍부터 프랜차이즈 햄버거 가게까지 있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가장 큰 수퍼로 들어갔다. 철이 지네 잡는 약을 찾는 동안, 서진은 빠르게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것을 잡히는 대로 집어 들었다.
기회다.
샴푸, 린스 같은 목욕용품부터 먹고 싶은 과자와 초콜릿까지 양팔 가득 끌어안은 서진은 흡사 열매를 입 안이 터지도록 쑤셔 넣는 다람쥐와 같은 모습이었다.
서진은 한 손에 지네약을 들고 자신을 찾고 있던 철과 마주치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그에게 우르르 넘겨주며 말했다.
“나 이것도 좀 사주라.”
“니 이런 거 써도 되겄냐. 나가서 좋은 거 사줄란께.”
얼떨결에 양팔 가득 물건을 받아 든 철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괜찮으니까 이거 사줘.”
나중은 무슨. 당장이 비상사태인데.
피식 웃음을 터뜨린 남자가 품에 잔뜩 물건을 안고 걸어가더니 그대로 계산대 위에 쏟아냈다.
“아따, 바깥에 뭐 즌쟁 났어라?”
산처럼 한가득 쌓인 물건을 보던 계산대 직원이 황당한 표정으로 묻는다. 철은 모른 척 눈썹을 들썩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계산하는 동안 바깥으로 나온 서진은 괜히 바닥의 돌멩이를 툭툭 차며 딴청을 피웠다. 원래 이런 식으로 빈대 붙는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긴급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저번에 보니까 집도 잘 사는 것 같고…. 바깥에 멀뚱히 서서 혼자 합리화하고 있을 때, 멀리서 여자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왐마, 놀래라…. 저 양아치 시끼는 뭐여?”
짙은 염색 머리에 번들번들한 실크 셔츠, 반바지 차림은 멀리서 보면 영락없는 강남 오렌지족이었으니.
“…염병 오빠 아니여?”
이어서 아는 목소리도 들렸다. 며칠 전에 한참 동안 함께 수다를 떨었던 재숙의 목소리다.
“저거 염병 오빠구만. 염병 오빠아!”
염병 오빠라는 말에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안타깝게도 분홍색 꽃무늬 옷을 입은 아주머니밖에 보이지 않는다.
“재숙아 안녕. 옆엔 친군가 보네. 친구도 안녕.”
서진은 속으로 ‘참을 인’ 자를 새기며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두 소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셔라….”
귀밑 3센티 단발로 머리를 자른 여자아이가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더니 팔꿈치로 재숙을 툭툭 치며 작게 물었다.
“누구여?”
“염병 오빠. 이 오빠 씨부리는 거 디져불지?”
재숙이 제가 아는 대단한 것을 자랑하듯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앞에 염병만 빼주면 좋으련만.
“친구랑 놀러 왔어? 뭐 하고 놀려고.”
서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느끼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의 시선과 인기에 묘하게 집착해온 그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오메…. 디져브러….”
그의 해사한 미소를 본 단발머리가 눈을 까뒤집고 뒤로 넘어가는 시늉을 하자, 재숙이 깔깔 웃으며 대신 붙잡아 주었다. 소녀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서진이 속으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삼켰다. 그래, 내가 이 맛으로 살았지.
“우린 여 함바그 묵으러 왔어라.”
“햄버거 좋지. 학교는 끝났고?”
서진과 아이들이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계산을 마친 철이 짐이 한가득 담긴 봉지를 들고 터벅터벅 걸어 나왔다.
“철 오빠두 있네?”
양손 가득 든 짐을 발견한 재숙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근디 무슨 즌쟁나브렀나.”
“크흐흠!”
아무리 염치없는 서진이어도 이번엔 조금 민망했다. 그는 크게 헛기침하며 재숙의 말을 끊은 다음 냉큼 화제를 돌렸다.
“이 친구는 이름이 뭐라고?”
“수진이여라.”
“수진이. 난 서진인데. 이름이 비슷하네, 인연인가 봐.”
서진은 느끼한 대사에 맞춰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환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수진이 “오메, 인연….” 하고 중얼거리며 또 뒤로 넘어가는 척 재숙에게 안겼다. 유쾌하고 리액션이 좋은 아이들이다.
그 모습을 별말 없이 바라보고 있던 철은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트럭으로 향했다.
“그럼 난 먼저 갈게. 햄버거 맛있게 먹고.”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던 서진이 급하게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눴다.
“와 벌써 가야.”
서진은 아쉬워하는 재숙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갑게 인사한 뒤, 헐레벌떡 그의 뒤를 쫓았다. 트럭에 미리 짐을 실은 철은 시동을 켜놓고 서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급하게 뛰어와 조수석에 올라탄 서진이 가쁜 숨을 고르자, 철이 말없이 에어컨 버튼을 누르고 부드럽게 액셀을 밟아 차를 몰았다.
“오늘 고마워. 잘 쓸게.”
서진은 조금 전과 똑같이 그를 향해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서비스업 종사자의 영업용 미소처럼. 장기간 누적된 나르시시즘이 본인도 모르는 이상한 습관을 만들어낸 것이다.
철은 “기여.” 하고 대답한 뒤 별다른 말 없이 운전에만 집중했다.
왠지 모르게 공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낀 서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걷히더니 결국 흔들리던 동공이 갈 곳을 잃고 창밖을 향했다. 원래 그는 무거운 분위기에 젬병이었다.
갑자기 심해처럼 가라앉은 공기 때문인지 집으로 향하는 길이 왔을 때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이유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철의 이런 태도가 서운하기까지 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서진의 표정이 착 가라앉았다.
“니 원래 그르냐잉.”
먼저 정적을 깬 것은 철이었다. 딱딱한 분위기와 다르게 화가 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였다.
“뭐가?”
서진이 그대로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원래 딴 사람들한테도 그라고 씨부리싸야.”
“싸긴 뭘 싸. 아무것도 안 쌌거든.”
싼다는 말에 민감한 서진이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인제 그르지 말어. 가시나들이 오해할 수도 있은께.”
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저기 제 매력을 영업하는 장면을 대놓고 들켰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답.”
서진에게서 아무 반응이 없자 철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신경 쓰지 마.”
서진은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내며 팔짱을 끼더니 아예 두 눈을 감아버렸다.
“니 그르다 미친 가시나가 결혼하자고 덤벼불믄 으짤라고.”
“참 내. 대화 좀 했다고 무슨 결혼? 하면 되지.”
“…그라믄 뽀뽀도 하고?”
그의 목소리가 아까와 다르게 조금 가라앉았다.
“어. 혀도 막 넣고.”
서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얄밉게 대꾸한다.
“잠도 자고?”
“정상위부터 시작할….”
끼이이익―!
브레이크를 밟은 트럭이 갑자기 멈춰 서자 서진의 몸이 순간 기우뚱 흔들렸다. 시끄러운 타이어 마찰음에 섞여 작게 시발이라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다.
놀란 서진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급브레이크를 밟아서라기보단, 그사이에 얼핏 들린 것 같은 욕 때문이었다. 이 순둥이 레트리버 같은 녀석이 욕을…….
“미안.”
한 번 숨을 길게 고른 철이 바로 사과를 건네며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서진의 눈동자에 점점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서렸다.
사실 그건 철이 제게 화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먼저 화를 내는 방어 기제와 왠지 모를 서운함에서 비롯된 얄팍한 감정이었다.
잠시 후, 울퉁불퉁한 흙길을 달리던 트럭이 초가집 앞에 멈춰 서자 바로 안전벨트를 푼 서진이 차 문을 벌컥 열었다.
“서진아.”
서진은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방으로 향하다가 순간 멈칫하더니, 백 스텝을 밟으며 돌아와 짐칸에서 장 본 것들을 한가득 꺼내 들었다.
“줘. 내가 들란께.”
뒤따라 내린 철이 냉큼 짐을 빼앗아 들며 말했다.
“내놔.”
서진이 도끼눈을 번뜩이며 다시 봉지를 빼앗았다. 이건 뭐, 뻔뻔하니 아주 날강도가 따로 없다. 철은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는 양쪽 눈썹 뼈를 지그시 누르며 물었다.
“하이고 가시나야. 니 와 씅내냐잉?”
“…….”
서진 본인도 마땅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기에 그냥 그를 무시한 채 소중한 과자들을 품에 가득 안고 방으로 향했다. 그런데 서진이 미처 방문을 닫기 전에 커다란 손이 문을 짚으며 강제로 열어젖히더니, 뒤따라온 철이 방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뭐야, 왜 들어와.”
얼굴 근육에 힘을 준 서진이 날카롭게 물었다. 철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방을 한번 슥 훑어보고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장을 본 봉지에서 약을 찾기 시작했다.
“니는 쪼까 나가 있어 봐야. 지네 약 독하니께.”
아 맞다 지네. 서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의 말을 따라 얌전히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초여름 밤 시원한 바람과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가 마당에 그득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판 밑에 꼼꼼하게 약을 뿌리고 손을 탁탁 털며 방에서 나오던 철은 서진과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터뜨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내 팔자야.”
밖에서 기다리던 서진은 별말 없이 그를 지나쳐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마당에 홀로 남은 철이 꽉 닫힌 방문에 대고 인사를 건넸다.
“서진아. 낼 보자.”
토라진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문턱을 넘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배알도 없는 놈…. 순진하긴. 픽 코웃음 친 서진은 자기니까 과자로 그친 것이지, 서울이었으면 당장에 눈 뜨고 코 베일 호구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겉모습은 세상 날티 나게 생긴 놈이 속은 저렇게 물러 터져서야 앞으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도 조금 됐지만, 쓸데없는 남 걱정은 떨쳐버리고 금세 잠자리에 들었다.
***
지난밤 내린 비에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초록색 잎을 바라보던 서진이 단마디 감탄사를 내뱉었다. 고추 농사를 시작한 지 2주 만에 모종이 꽤 자란 것이다. 이 쪼끄만 초록색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인자 밥 묵으러 가야제잉.”
밀짚모자를 고쳐 쓴 할아버지가 서진을 재촉했다. 오늘이 할아버지 지인인 박씨 영감의 칠순 잔치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한곳에 모이는 날이라고 했던가.
“철이는요?”
한참 이파리를 구경하던 서진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 배알도 없는 놈은 새참을 가져오거나, 서진의 밭일을 도우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얼굴도장을 찍고 있었다.
“뭐, 여 왔다 니 없으믄 알아서 안 찾아오겄냐.”
할아버지의 일리 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진은 그길로 잔치가 열리는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마을 회관은 정말 온 세상 사람이 다 모였는지 안쪽부터 바깥쪽까지 시끌벅적하니 조용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여기저기 구경하기 시작했다.
“어어, 염병 총각! 언능 와 언능.”
멀리 삼총사 아주머니들이 정자에 둘러앉아 서진을 알은체했다.
“여 와 앉어, 앉어.”
영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짓하며 그를 불렀다. 얼떨결에 아주머니들 사이에 앉은 서진이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술을 한 잔씩 걸친 아주머니들은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차려진 잔칫상 가운데 웬 바퀴벌레가 올라가 있는 것을 본 서진은 꽥 괴성을 지르며 펄떡 튀어 올랐다. 아주머니들이 말없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깔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한다.
“아따. 오자마자 염병이구마잉.”
“저, 저, 바퀴벌레는 왜 밥상에 있어요?”
서진이 집게손가락으로 접시에 수북이 쌓인 까만 벌레를 가리켰다.
“요거? 메뚜기 튀긴 그. 한나 묵어봐야. 겁나게 꼬수해브러.”
순자가 메뚜기튀김을 하나 집어 서진에게 내밀었다.
“…토할 것 같아요.”
서진이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리자 영옥이 대신 튀김을 입에 집어넣고 “어메, 꼬소한 거.” 하며 그를 놀리듯 야무지게 씹어 넘겼다. 입을 삐죽 내밀고 다시 자리에 앉은 서진은 나무젓가락을 뜯어 메뚜기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놓인 모시송편을 입에 쏙 넣었다.
“우리 염병 총각두 한잔 받어야제.”
이번엔 순자가 대접에 걸쭉한 동동주를 가득히 따라 서진에게 건넸다.
“…예? 저 막걸리 같은 건 못 마셔요. 불순물이 많아서.”
서진이 입 안 가득 문 송편을 우물거리며 사양했다.
“왐마? 요 막글리 아니구 동동주여. 이 집 할마이가 직접 담근 거. 을매나 맛이 좋은디.”
“…그럼 딱 한 잔만.”
서진은 섭섭해하는 순자의 눈빛에 못 이겨 결국 딱 한 잔만 받기로 했다. 그릇에 담긴 하얀 액체 위에 부서진 밥풀이 동동 떠다녔다. 에라 모르겠다. 단숨에 동동주를 꿀꺽꿀꺽 들이켠 그가 이마를 잔뜩 찌푸리며 감탄사를 내뱉는다.
“크어.”
향이 풍부하고 달곰하니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어때? 맛있제?”
“좀…. 맛있네요.”
“기여 기여. 요것도 함 묵어봐야.”
서진은 아주머니들이 주는 음식을 아기 새처럼 받아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함께 떠들었다.
어느새 중천에 뜬 해는 주황빛 석양으로 바뀌고, 한 잔만 먹는다던 그의 옆엔 동동주 주전자가 수북이 쌓였다. 토할 것 같다던 메뚜기튀김은 취기를 핑계 삼아 입에 대보더니, 메뚜기랑 원수지고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먹어 치웠다.
“이거 더 없어요?”
서진이 텅 빈 접시를 허공에 흔들며 물었다.
“이건 뭐 사람이여 개구락지여….”
한때 메뚜기튀김이 수북했던 빈 접시를 보며 영옥이 황당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술도 한 잔만 묵는다드니.”
“아, 염병 총각이잖애.”
“아! 맞제.”
이제 그들 사이에선 시적 허용처럼 암묵적인 염병 허용이 존재하는 듯했다.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서진은 아쉬운 대로 동동주를 원 샷 했다.
“하이고 잘 묵네.”
불현듯 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익숙한 얼굴이 흐릿하게 눈에 들어왔다.
“왐마, 철이 니도 와 있었냐잉?”
그를 본 영옥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철은 방금 왔다며 대충 대답하고는 다시 서진을 향해 말했다.
“가시나 니 그라고 처마시믄 낼 대가리 깨져브러야.”
서진은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뭐여. 둘이 잘 아는가? 그라믄 우리는 인자 들갈랑께, 철이 니가 야 좀 챙겨봐야.”
이때다 싶은 아주머니들이 냉큼 몸을 일으키더니 관자놀이 근처에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서진을 향해 턱짓했다. 만취했다는 뜻이다. 철은 그를 내려다보며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자 시끌벅적하던 정자가 조금 조용해지고, 여름 방울벌레 소리가 그 빈 자리를 채웠다. 나름대로 운치 있는 분위기가 술맛을 돋운다.
“니 이거 맻 개여.”
철이 서진의 눈앞에 손가락을 딱딱 튕기더니 두 개를 펼쳐 흔들며 물었다. 서진이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가락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호구 왔네.”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린 철이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말했다.
“잘 아는 거 본께 말짱하네.”
서진이 별말 없이 동동주를 입에 털어 넣자 철이 옆에서 젓가락으로 갈비 하나를 집어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안 먹어, 호구야.”
“아따. 까탈스런 거.”
철은 서진의 단호한 거절에 미간을 찌푸리며 갈 곳 잃은 갈비를 대신 자기 입에 넣었다. 서진은 다시 한 잔 따르려는 듯 주전자를 대접에 기울였다가 몇 방울 뱉어내고 끊긴 텅 빈 주전자를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푹 한숨을 내쉰 철이 서진의 양쪽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읏차, 일으키더니 그대로 그를 둘러업고 회관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밭일을 하다가 왔는지 바깥엔 하얀 트럭 대신 붉은 트랙터 한 대가 서 있었다. 서진이 기다렸다는 듯 트레일러에 쌓여 있는 볏짚 위에 대자로 뻗자 트랙터가 구수한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초여름 밤에 부는 바람은 산뜻했고, 풀벌레 시끄럽게 우는소리가 조용한 시골길을 채웠다. 어느새 먹물을 쏟아놓은 듯 새까매진 하늘엔 산발적으로 흩뿌려진 별들이 쏟아질 것처럼 빛나고 있다. 수많은 별이 수놓아진 은하수가 흐르는 시골의 밤하늘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우웁.”
“뭐여.”
운전하던 철은 순간 들려오는 불길한 징조에 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우우으윽.”
반쯤 일어나 앉은 서진이 자기 몸 위로 먹은 것을 죄다 토해내고 있었다. 급하게 트랙터를 세우고 뒤로 달려간 철이 서진을 똑바로 앉히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괘안애?”
등을 토닥이던 철은 더럽지도 않은지 서진의 얼굴과 몸에 묻은 토사물을 계속해서 손으로 닦아주더니, 대충 그것을 자기 옷에 닦고 다시 운전석에 올랐다.
덜덜거리는 트랙터가 도착한 곳은 궐처럼 커다란 한옥이었다. 철의 집이 마을 회관에서 훨씬 가까웠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시끄럽던 트랙터가 멈춰 서자 서진이 눈을 맹하게 끔뻑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가시나 걸을 수 있겄냐잉.”
어느새 다가온 철이 무릎을 굽혀 그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응.”
반쯤 죽은 생선 눈깔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서진을 철이 급하게 부축했다. 그러고는 한참을 걸어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욕실 문 앞에 데려다 놓았다. 둘 다 온몸에 토사물을 묻히고 있어 상태가 영 아니었다.
“씻쳐.”
짧게 한마디 남기고 다른 욕실을 향해 뒤돌아서던 철이 멈칫하더니 다시 물었다.
“니 씻칠 수 있제?”
무슨 과일이라도 씻기라는 듯한 말투에 피식 웃음을 터뜨린 서진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욕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여긴 따뜻한 물이 잘 나와서 좋아. 그런데…… 어떻게 씻는 거더라.’
서진의 입술 사이로 배시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일단 샤워기의 따뜻한 물을 틀긴 틀었는데, 그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욕실 벽에 기댄 몸뚱이가 제멋대로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 상태로 한참 동안 바닥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맞고 있으니 어느 순간 문밖에서 걱정 섞인 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암시롱도 읎제.”
다른 욕실에서 씻고 나온 철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물었다.
암시롱이 뭔지 모르는 서진은 대답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자빠져서 대가리라도 깨진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 같았지만, 술에 취한 주둥이는 쉬이 주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대답해야.”
어떻게든 말을 꺼내려고 숨을 후 들이켠 서진은 그냥 그대로 한숨만 내뱉었다. 대답하고 싶은데, 또 그게 너무 귀찮다.
“셋 샐 때까지 대답 없으믄 들가븐다.”
셋, 둘, 한나.
잠기지 않은 욕실 문이 벌컥 열리고, 어느새 샤워를 마치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철이 경악하며 뛰어 들어와 서진의 몸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젖은 머리카락까지 꼼꼼하게 들춰가면서 한참을 살펴보던 남자는 서진이 그냥 욕실 바닥에 앉아 있었음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씻기 귀찮아….”
서진이 시선을 내리깔고 흐리멍덩하게 중얼거렸다. 눈가를 찌푸리고 한숨을 내뱉은 철이 서진의 토사물이 묻은 윗옷을 잡아당겼다.
“…씻쳐 줄께, 팔 들어봐야.”
서진이 꼼짝도 하지 않자, 철은 그냥 한 손으로 그의 양 손목을 잡고 그대로 옷을 벗겨 구석으로 휙 던져버렸다. 바지를 벗길 때도 서진이 엉덩이를 들지 않아 한쪽 팔로 끌어안고 일으켜 세운 뒤, 바지와 속옷을 모두 벗겨낸 다음 한곳으로 던져놓았다.
물에 젖어 질척거리던 옷이 벗겨지고 따뜻한 물이 맨살에 쏟아져 내리자 기분 좋은 듯 서진이 입꼬리를 살살 올렸다.
이어서 욕실에 울리던 물소리가 멈추고, 향긋한 비누 냄새와 함께 목부터 쇄골, 어깨, 날개뼈까지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스쳤다. 왠지 뼛속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이다.
“철이야. 너 손 기분 좋다.”
“…….”
들릴 듯 말 듯 작게 중얼거린 서진이 눈을 감은 채 그에게 몸을 기댔다.
철은 아무 말 없이 착실히 그의 몸을 씻기는 것에만 집중했다.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이 서진의 가슴께를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복근을 문지르며 등허리로 움직였다.
술기운도 오른 데다가 눈까지 감고 있으니 서진은 자꾸 저를 만지는 감각에 충실해졌다.
다정한 손길엔 딱히 성적인 느낌이 담겨 있지 않았지만, 그의 손가락이 유두를 살짝 스칠 때마다 아래가 조금씩 반응했다. 딱히 야릇한 생각이 든 것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반응에 가까웠다.
서진을 씻기는 그도 분명 아랫도리 사정을 보았을 텐데, 같은 남자로서 모른 척해주기로 한 것인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허리부터 하체까지 부드럽게 비누칠하며 내려간 손은 절대 중심부를 건드리지 않은 채 종아리에서 발가락까지 꼼꼼하게 비누칠을 끝냈다.
바로 쏴― 쏟아지는 따뜻한 물살이 몸의 굴곡을 따라 비눗물을 씻겨내며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벌써 끝났나….’
아쉬움에 눈을 게슴츠레 뜬 서진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만져주던 손길을 찾았다.
“물 딲고 나와.”
사실 철은 그의 옷을 벗겨줄 때부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할 일을 마친 그가 급하게 말을 건네며 욕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픽 웃음을 머금은 서진이 돌아서는 그의 커다란 손을 잡아당기더니 자신의 반쯤 선 살덩이 위로 끌고 왔다.
“여기도 씻겨줘.”
“…….”
거나한 술기운과 그의 호의를 권리로 아는 마음이 복합적으로 섞여서 나온 저급한 행동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철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손에 힘을 주어 그의 손이 자신의 것을 쥐게 만든 다음 이렇게 해달라고 알려주듯이 쓱쓱 위아래로 흔들었다.
“응?”
서진이 옅게 쌍꺼풀진 눈을 치켜뜨며 그를 보채는 동안, 속눈썹에 방울방울 매달린 물방울이 눈물처럼 흘러내리며 더 애달파 보이는 효과를 냈다.
“…….”
하지만 여전히 돌처럼 굳은 남자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빨리.”
머리끝까지 차오른 성욕을 풀지 못해 답답해진 서진이 살짝 짜증 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결국 그 보챔에 넘어간 철이 나머지 한쪽 팔로 서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힘에 서진은 거의 중심을 잃다시피 했지만, 단단한 몸이 그를 편하게 받쳐주었다.
서진을 뒤에서 끌어안은 남자가 앞쪽으로 뻗은 커다란 손으로 매우 소중한 것을 만지듯 살덩이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쓰윽 쓰윽, 서진은 느릿하게 훑는 그의 손길에 다리 힘이 풀려 사르르 녹아내렸다. 흥분한 귀두 끝에서 쿠퍼액이 찔끔 새어 나온다.
흐릿해진 시선을 내리자 제 은밀한 부위가 남의 손에 놀아나는 음란한 광경이 펼쳐졌다.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치는 남자의 심장 박동과 더불어 바지 속에서 부풀어 오른 거대한 성기의 윤곽 또한 적나라하게 하체에 닿았다.
철이 성기를 쥔 손의 악력을 세게 하고 점점 속도를 높일수록 쿠퍼액과 커다란 손이 마찰하며 찌걱거리는 소리가 욕실에 크게 울렸다.
서진은 술에 취해 정신이 몽롱했음에도, 자신이 만질 때와는 확연히 다른 손길과 악력에 터질 듯한 사정감이 빠르게 올라왔다.
“…아읏….”
“하….”
둘 중 누가 수음을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오히려 서진보다 더 흥분한 남자가 달뜬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귀에 닿아 간지러웠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는 찰나, 결국 서진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의 손에서 파정하고 말았다.
철은 그의 사정이 끝난 뒤에도 꼭 껴안은 채로 풀이 죽은 살덩이를 쓰다듬다가 그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뭉근하게 돌리며 매만졌다.
서진은 다 끝났는데도 아직까지 제 것을 조몰락거리는 커다란 손을 찰싹! 때려 치워낸 다음 먼저 입을 열고 말했다.
“미안.”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철이 멈칫했다. 서진은 술기운이 가시며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발음과 목소리가 전보다 선명해져 있었다. 그리고.
“고마워.”
이어진 서진의 말은 뜨거웠던 머릿속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말이었다.
***
“아, 씹…팔….”
두개골을 뿅망치 열 개로 강타하는 듯한 성가신 아픔에 욕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은 서진은 인상을 팍 구긴 채 허공에 마구 발길질을 했다.
그의 발길질에 부드러운 차렵이불이 침대에서 툭 떨어진다. 어제 토한 이불과 같은 색의 새 이불이었다.
좆됐다.
남들은 술 마시면 기억이 안 난다고 하던데 서진은 어떻게 된 일인지 평소보다 더 선명한 기억이 머릿속에서 비디오처럼 재생됐다. 시작은 빨간 비디오였다.
철의 손에 제 자지를 쥐여주고 대신 흔들어 달라고 한 것도 쓰레기 같은데,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으니.
그 와중에 예의를 차린답시고 고맙다고 인사한 다음 바로 우웩, 아마 그의 몸 위에 거하게 토했었다지. 손에는 제 정액이, 몸에는 제 토사물이 범벅된 채 자신을 보던 철의 황당한 표정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다시 씻고 나온 그가 서진을 안방의 침대에 눕히는 순간 또 다시 우욱. 그가 더러워진 침대 시트와 이불을 치우는 사이 앉혀놓은 소파에서도 우으윽.
사람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까지 많은 구토를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오, 씹….”
겨우 정신을 차린 그가 두 손으로 얼굴을 박박 문지르며 마른세수를 했다. 당장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기절이라도 하고 싶다.
순간,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서진은 배터리가 다 된 인형처럼 갑자기 침대 위에 고꾸라졌다.
터벅터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맞춰 눈을 꾸욱 감고 입은 헤 벌린 채 열연을 펼쳤다. 이어서 익숙한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염병 깨구락지.”
깨구락지? 뜬금없는 단어에 서진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니 무슨 메뚜기 씨를 말려브렀…….”
“흐아암.”
하필이면 토한 것이 메뚜기튀김인 건 또 뭐란 말인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에 서진이 급하게 그의 말을 끊고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눈을 끔뻑이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중얼거린다.
“여기가 어디지?”
기억이 안 나는 척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던 철이 간단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으디긴. 인났으믄 나와.”
“내가 왜 여기….”
뒷말은 듣지도 않고 바로 걸음을 옮기는 철을 보며 서진이 허겁지겁 침대에서 일어났다.
쭐레쭐레 그를 따라 도착한 곳엔 오래된 나무로 만든 넓은 식탁 위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어제 그 지랄을 받아주느라 잠도 거의 못 잤을 녀석한테 아침상까지 받아먹으려니 얄팍한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 같다.
“우와, 우와.”
서진은 괜히 호들갑을 떨며 의자 위에 궁둥이를 붙였다. 식탁엔 여러 가지 밑반찬들과 함께 전복이 들어간 바지락 해장국과 굴비구이가 차려져 있었다.
“잘 먹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인사한 뒤 가장 당기는 바지락 해장국의 국물부터 한 모금 떠 마셨다. 그리고 숟가락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을 올린 다음 젓가락으로 노릇하게 구워진 굴비를 한 점 떠서 입에 넣었다. 전부터 느낀 거지만 철은 요리도 곧잘 했다.
하지만 정작 식탁에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남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진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다.
“넌 왜 안 먹어?”
서진이 뜨끈뜨끈한 국물을 한 번 더 떠 마시며 물었다.
“글쎄. 밥풀때기 씹어 삼킬 기분이 아닌가 보제.”
철의 언짢은 기색이 섞인 목소리에 양심이 푹 찔린 서진이 갑자기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이마를 짚었다.
“…아! 머리야.”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 아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아. 난 항상 술 마시면 다음 날 기억이…. 문제야 문제.”
그 상태로 눈알만 살짝 굴려 철의 눈치를 살폈다. 제발 어제 일은 없던 일로 해줘.
“설에서도 술 처묵고 그라고 댕겼나 보네.”
한층 어두워진 표정의 철이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며 말을 뱉었다.
“아니? 아닐걸?”
서진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단언컨대 살면서 술에 취해 그런 추태를 부린 건 어제가 처음이었으니까.
“으찌 알겄냐. 기억 안 난담서.”
“…….”
“니 진짜 암껏도 기억 안 나냐잉.”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던 철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어. 아무것도 기억 안 나.”
그의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뚝 뗀 서진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컵에 담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라믄 니가 어제 꼬추 빨아달라고 매달려서 내가 빨아준 것도 기억 모다겄…….”
“푸흡―!”
서진이 내뿜은 물이 어찌나 멀리 튀었는지, 맞은편에 앉은 철의 얼굴이 방금 세수하고 나온 사람처럼 흥건하게 젖었다.
“내가 언제 빨아달라고 매달렸어!”
당황한 서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거세게 항의했다.
“기억 잘하네.”
철이 얼굴에 흥건히 묻은 물을 한 손으로 털어내며 말을 뱉었다. 할 말이 없어진 서진은 몇 번 눈을 깜빡인 뒤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저 자식은 어제 일을 없던 일로 해주지 않을 모양인 것 같으니.
“서진아.”
그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서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저놈도 나한테 질릴 대로 질렸을 텐데 설마 성추행으로 신고한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그렇게 억지로 시켰었나? 아니, 싫으면 안 했으면 될 거 아니냐고. 그것도 아니면 토한 이불 값을 물어내라든가…….’
짧은 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랑 사귀자.”
불현듯,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서진이 고개를 들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쳐다보았다.
“니 땜에 불안해서 돌아불겠은께. 나랑 연애하자.”
철은 고백이 아니라 협박을 하는 것 같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뭐?”
서진이 눈을 치켜떴다.
“…내가 진짜 잘해줄께. 니가 해달라는 건 다 해줘불고 니가 하지 말라는 건 다 안 할께. 맨날 니 업고 댕길께.”
무슨 방문 판매원이 화장품 팔듯이 이어지는 철의 고백에 서진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남자는 그것만으로는 영업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꼬추도 맨날 빨아주고.”
이게 누굴 변태 쓰레기로 알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서진은 그의 마지막 한마디에 뒷골이 확 당겨왔다. 어제는 분명 변태 쓰레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아닐 거고.
한숨을 푹 내쉰 서진이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입을 열었다.
“…철이야.”
“그라고 내 이름 철이가 아니고 외자여. 성은 범. 범, 철.”
“…….”
대딸까지 시켜 놓고 이름도 처음 알았다니. 여태껏 이름도 한 번 제대로 물어보지 않은 것이다. 민망함에 몇 번 헛기침을 뱉은 서진이 다시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크흠. 아무튼 범철아…, 나 남자야.”
그 말에 오히려 철이 별 희한한 소리를 듣는다는 듯 눈가를 찌푸렸다.
“근께 내가 꼬추 빨아준다고 안 했냐.”
“아 씨, 그놈의 꼬추 꼬추!”
결국 수치심이 끓어 넘친 서진이 평정심을 잃고 소리쳤다. 설마 어제 그 지랄을 보고도 아직까지 마음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고백까지 할 줄이야.
원래 서진은 남의 성적 취향에 관심없어 동성애에 편견이 없긴 하지만, 자신이 남자와 연애하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와 사귀어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만인의 연인으로서 두루두루 사랑 받으며 어장 관리를 즐긴 지난 세월이 떠올랐다. 인기를 즐기다 고백하면 거절한다. 그게 인기 유지의 비결이었으므로.
“음, 미안…. 아무튼 난 누굴 만날 준비가 안 됐어.”
아무래도 동성애 차별적인 발언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의례적인 거절 멘트를 날렸다. 최대한 미안한 듯 가녀린 표정은 덤이었다.
“준비가 안 된 놈이 그런 짓을 하고 댕기냐.”
“…….”
그런 짓은 한 번밖에 안 했지만, 양심을 후벼파는 철의 말에 결국 서진이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하아. …니를 으째쓰까잉.”
그는 뭐가 괴로운지 한 손으로 두 눈두덩을 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젯밤 자신의 만행이 떠오른 서진이 몸을 배배 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고추 한번 만졌다고 연애까지 하냐.”
“…아따 겁나게 진보적이시네.”
서진의 말에 철이 비아냥거렸다.
“나도 한 번 빼… 줄게.”
“뭐?”
철이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미간을 구긴다.
“나도 한 번 빼준다고!”
결국 서진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조금 전보다 큰 소리를 냈다. 하, 코웃음 치는 철의 표정이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럼 됐지?”
대단한 협상이라도 하듯 서진이 의기양양하게 코를 들었다. 철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결국 숨 막히는 정적 속에 서진이 흘리는 헛기침만이 어색한 공기를 갈랐다.
“…기여.”
동시에 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그라믄 내 껀 빨아줘야.”
느자구없는 말에 서진이 펄쩍 뛰었다.
“야! 이 양아치…. 그런 게 어딨어!”
“여 있는디.”
남자가 잘생긴 눈썹을 능청스럽게 들썩였다. 무의식중에 지난번에 본 흉흉한 것을 떠올린 서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한 손에 다 잡기도 힘든 걸 어떻게 입에 넣는단 말인가.
“니도 한 번 빨아주면 없던 일로 해줄란께.”
“…….”
“아, 어깨야. 어젯밤에 뒤지게 빨래해브렀더니….”
철이 고개를 꺾고 한쪽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는 제스처를 취하자, 토사물이 범벅된 이불보와 소파가 눈앞에 아른거린 서진이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딱 한 번만…. 그리고 너 이거 소문내면 진짜 죽인다.”
“…….”
제안을 수락했음에도 철의 낯빛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냉랭해진 것 같았다.
“지금 해주면 돼?”
서진이 그의 사타구니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비장하게 침을 꿀꺽 삼키자, 철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됐은께 기냥 밥이나 처묵어.”
지가 시켜놓고 한심해하는 듯한 그의 말투에 서진은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그럼 하고 싶을 때 얘기해.”
뭐 고추 빨아주는 것쯤은 별일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뱉은 뒤 다시 흰쌀밥을 크게 떠 한입에 넣었다.
사실 밥알이 콧구멍으로 넘어가는지 귓구멍으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별일이었다. 그걸 티 내면 어제 자신이 철에게 한 짓도 유의미한 일이 될까 봐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평정심을 유지하기로 했을 뿐.
서진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린 후 평소처럼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 철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차가 초가집 앞에 멈춰 서고, 어색한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철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쉬어.”
아까부터 내내 머릿속에 고추 생각밖에 없던 서진은 초조함을 숨기고 역시 대수롭지 않은 척 먼저 물어보기로 했다. 원래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은 거라고.
“그냥 지금 빨리하고 끝낼래?”
“…….”
“…아님 언제 하게?”
“…후우.”
핸들에 몸을 기대고 진득하게 한숨을 내쉰 철이 까만 동공을 옆으로 움직여 서진과 눈을 맞추었다.
서진은 왠지 모를 서늘함에 온몸의 털이 쭈뼛 서면서 저도 모르게 입 안에 고인 침이 목구멍 뒤로 넘어갔다.
“서진아.”
그가 조수석 쪽으로 팔을 쭉 뻗더니 뜬금없이 차 문을 툭 열어주었다. 서진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자 그가 한마디 덧붙인다.
“가.”
뭐지. 이 귀찮은 똥개 쫓아내는 듯한 말투는.
빨아달라고 한 건 저놈인데 마치 자신이 싫다는 사람 걸 빨고 싶어서 안달 난 변태가 된 더러운 기분이다.
얼떨결에 열린 문을 통해 차에서 내린 서진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하는 트럭의 뒷모습을 처량한 개처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날 이후로 철은 서진을 찾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