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외전. 고양이와 메리 크리스마스
아이러니하게도 평범함을 원했던 재경 덕에 정체불명 오버 테크놀로지 미연시 기반의 독특한 이세계가 생겨나고 말았다.
한때 게임에 불과했던 이 세계는 증오에 사로집한 사악한 자들의 손아귀에 놀아났기에 구원을 염원했던 인간들은 추상적으로 그려낸 신에게 기도하며 보다 안전하고 희망찬 내일을 바랐다.
마족의 증오를 반면교사 삼아 구축된 교리를 따르는 교회는 마족이 사라졌음에도 그 문화를 키아나트리체 곳곳에서 이어나갔다.
특히나 이 나라는 교회와 관련된 이벤트가 많았는데 그중 몇 개를 추려보자면 재경이 살던 세계에 영향을 받아 생겨난 밸런타인데이와 성탄제가 있다.
때는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새롭게 개발된 저장 장치인 카세트테이프와 재생 단말기가 민간에 보급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카페라테 치즈 캣’이라는 전무후무한 어빌리터 인디밴드가 카세트테이프로 앨범을 내서 유명세를 탔던 해의 연말 겨울의 성탄 전야다.
마족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나고 인간의 손에서 탄생했던 재앙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불안감은 사람의 곁에 은은하게 맴돌았다. 새 황제의 근면 성실함으로 상처가 아물고 새살이 돋아가자 안도해도 된다고 마음을 쓰다듬듯 혜성처럼 나타난 밴드의 노래가 키아나트리체에 화제가 되었다.
제립학교를 졸업한 후 본격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작사, 작곡한 노래의 인기가 감당이 안 될 정도일 줄은 밴드 멤버들도 어안이 벙벙했다. 플레이어가 각 집에 하나씩 들어가게 된 것과 겹쳐서인지 아님 시기를 잘 타고난 것인지 독특하고 개성 있으면서 대중성이 높은 노래도 인기에 한몫을 했다.
불티나게 팔린 앨범은 키아나트리체는 물론 타국인 미노타나 알레흐카이잔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특히 3왕자와 키아나트리체 황제의 관계에 열광하는 미노타에서는 제발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이 쇄도할 만큼 위상이 대단해졌다.
전 세계를 목표로 공연하는 게 꿈인 카페라테 치즈 캣도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어빌리터인 그들이 타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절차가 복잡했다. 익명으로 후원해 주던 니냐롯트도 그것만큼은 어떻게 못 해주는 듯하다.
언젠가 어빌리터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 가능하겠지만, 지금은 국내에서만 활동 중인 그들은 외국에서 보내온 팬레터를 받고는 외국어 공부를 진작 해놓을걸 그랬다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그렇게 배우기 싫었던 텐마이어어로 온 팬레터를 받은 재경은 편지에서 알아본 게 하트 표시밖에 없어서 난감했다.
알아보지 못해도 좋다. 생판 모르는 남이 편지를 보내올 만큼 노래가 매력적이라는 것 아니겠나. 길거리에서 시작했던 밴드가 큰 무대로 옮겨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자니 재경은 신이 나서 매일같이 방방 뛰고 싶었다. 하찮던 신재경의 인생에 이런 날이 올 줄은 누가 알았겠냔 말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할 규모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열면 좌석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그를 보러와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면 뛸 듯이 기분이 좋은 걸 보니 의외로 그는 관심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싫어.”
그런 이 현실에 불만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 누구도 아닌 재경의 연인 류제 신리다.
“난 싫다고 말했어.”
넬사 고원에서 공수한 커다란 나무를 광장 가운데에 세우고 광장 전체를 휘감은 작은 전구들이 별빛처럼 아름다운데 그와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구긴 류제가 두 번이나 거듭해서 부정을 표했다.
재경이 이루고자 하는 꿈을 실현하는 것까지는 좋다. 부족했던 사랑을 온 사람들의 관심으로 채우는 것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그게 도를 지나치게 실현이 될 줄은 누가 알았겠냔 말인가.
물론 연습을 열심히 한 결과로써의 보상이겠지. 최근에 와서는 뭔가 깨달은 게 있나 목소리도 기술적으로도 더 완성되었고, 다른 멤버들의 실력도 물론 크게 늘어 제립학교에서 보여주었던 아마추어적인 모습보다 훨씬 세련된 음악을 들려준다. 그런 이유들로 인간들이 좋아해 준다지만 해도 해도 너무 바쁜 것 아닌가.
“이미 잡힌 공연인데 어쩌라고. 애처럼 굴지 마.”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 전년도에도 같이 못 보냈어. 올해는 내가 먼저 찜했잖아. 난 싫어.”
재경의 눈가가 실룩거렸다. 천 살 묵은 할아비 요괴 주제에 다섯 살배기 애처럼 고집부리긴.
“나이만큼 넓은 아량 좀 가져봐라.”
“내 지금 나이는 너랑 동갑이거든? 뭐야, 지금 날더러 잘못했다는 거야?”
재경은 애써 모른 척했다. 눈이 펄펄 내려서 날이 따뜻할 줄 알았는데 드러난 귀가 따갑다. 징징거리며 떨어지지 않는 류제의 장점은 따뜻하다는 것밖에 없다. 내내 저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재경도 나름 연인을 납득시킬 방법을 생각해 봤지만 무슨 말을 해도 받아줄 것 같지가 않았다.
한숨을 내쉰 재경이 냅다 류제의 옆구리 사이에 팔을 집어넣었다. 올가미질을 하듯 목표물을 잡아채니 잡히는 건 류제의 오른팔이다.
“성탄제는 9할 정도가 성탄 전야로 이루어져 있잖아. 그럴 시간에 오늘 나랑 재미있게 놀라고. 불평만 하지 말고.”
뎅, 뎅, 뎅.
12시가 되자 모든 교회에서 일제히 종이 울렸다. 어린아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부리고 거리에 촛불에 밝혔다. 작은 전구들이 빛나며 가장 어두운 밤에 세상은 불빛으로 뒤덮였다.
재경이 저거 보라며 손가락질을 했다. 아름다운 전경이나 구경할 것이지 류제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재경에게만 향해있었다.
“그럼 날더러 내일 혼자 집에 있으라는 거야?”
“공연 보러 오면 되잖아. 넌 항상 안 보러 오더라. 섭섭하게.”
“질투 나는데 어떻게 해.”
길거리에서 공연할 때는 몇 번 보러 오더니 카페라테 치즈 캣이 인기를 끌면서부터는 류제는 공연을 하는 날마다 표정이 안 좋았다. 질투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재경도 어떻게 해줄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매일 왕녀님의 후원으로만 먹고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아. 어쩌겠어. 내일은 다른 사람이랑 놀아. 비키는 어때? 졸업하고 싶다고 비명을 지르긴 하던데.”
“나는 너랑 보내고 싶은 거라고! 그리고 비키도 어차피 유네랑 공연 보러 가잖아.”
팔짱을 낀 팔을 꾹 잡아당기는 류제의 두 눈에 끈덕진 옹고집 영감탱이가 담겼다. 재경은 이 상태가 된 류제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겨울이 올 때부터 올해 성탄제는 꼭 같이 보내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는데 일이 이렇게 꼬일 줄은 재경도 몰랐다.
아무리 귀찮아도 사귀는 사이인데 매몰차게 안 된다고 말하기도 나쁜 짓을 한 것 같다. 약속을 깬 것도 자신이라서 재경은 참 곤란하다.
“왕녀님은 성탄제날 안 바쁘대?”
“…지금 꼬우면 나도 일을 하라는 말이야?”
돌려 말하는 걸 잘 못하는 재경이 자기 무덤에 삽질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찔끔거렸다. 연말에 류제가 휴가를 낸 이유는 재경과 뜨끈한 벽난로 앞에서 알콩달콩 하고팠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바 있었다.
“아니이, 그게 아니라. 내가 없으면 밴드가 안 돌아가잖아. 대타 구할 거야? 사람들이 내 노래 들으러 오는 건데? 공연이 2시간짜리인데 보컬 없이 연주곡만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냐.”
재경이 차근차근 설득하려 들었지만 단단히 삐친 류제는 푸른 눈동자를 일렁거리며 입을 앙다물었다. 동공이 스리슬쩍 붉게 샐쭉해지려는 걸 보니 장난치는 게 아니라 정말 화가 난 것인가. 빈말이 아니라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더 애처럼 군다.
“공연 보러 와. 거기서는 나도 볼 수 있잖아. 내가 좋은 자리로 구해준다는데도.”
어른이 되어서는 먹고사느라 바쁜 친구들도 표를 구해달래서 오랜만에 힘 좀 써줬다. 세라 쌤도 오는 거 같았는데 다 같이 모여서 동창회라도 하면 되는 아닌가.
재경도 공연할 때 익숙한 얼굴이 가까이서 보이면 덜 긴장하고 컨디션도 좋아졌기에 그 정도가 류제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이게 또 류제의 기분을 건드렸나 보다.
“성탄제에 널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라는 거야? 그걸 눈 뜨고 지켜보라고? 잔인한 말을 하네.”
“아 진짜 어쩌라는 거야?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화낸다?”
류제는 곧 죽어도 의견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성탄제 공연을 포기 못 하는 건 재경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얼마가 걸린 공연인지 알고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공연장에 들어갈 수 있는 관객이 무려 3만 명이다, 3만 명! 수익금은 모두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성탄제 기념 왕실 지원 자선행사란 말이다!
“잘못한 건 렌 너인데 왜 나만.”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심통이 났던 류제가 제멋대로 중얼거렸다. 지레 찔린 재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 잃은 사람처럼 굴어도 심기 거스르지 않고 하루 정도 내버려 두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현관 바로 앞에 있는 코트걸이에 목도리와 코트를 던져놓은 재경은 뒤에서 음울한 기운을 뿜어대는 류제를 보지 못한 척 계단을 올랐다. 적어도 해 뜰 때까지는 절대 납득 못하고 저대로일 것 같다. 빨리 식사나 해치우고 잠이나 자야겠다.
“밥을 안 먹으면 힘이 없어서 못 나가겠지.”
약속했던 주제에 두말한 부분에는 반성하고 있던 재경이 침실 문을 열다 말고 움찔거렸다. 눕자마자 질펀하게 한판하고 푹 자려고 했는데 짜식이 아픈 부분을 건드린다. 나쁜 술수를 쓰려는 류제를 참다못해 노려본 재경은 얄미운 류제의 코를 잡고 꾹 조였다.
“한번 해봐. 누가 이기나 보자. 내가 순순히 질 것 같아?”
고분고분하지 않은 고양이는 자존심도 승부욕도 강해서 웬만한 수로는 굴복하지 않았다. 저 성질머리라면 공연하다가 쓰러져도 그럴 거다.
벌써 몇 년을 함께 있었는데 그 점을 모를 리 없는 류제는 마지막으로 남겨두었던 협박의 원천도 금세 포기했다. 자기가 이렇게 만들어놓고는 그걸 가지고 협박하다니 쓰레기 같지 않은가.
“재, 경, 아!”
“뭐, 인마.”
결국엔 류제가 그를 못 이겨먹는다는 걸 아는 재경은 이래도 그럴 거냐며 지지 않고 입술을 까뒤집었다. 그래도 미안하긴 미안한지 너무 쓴소리는 하지 않았다.
“내년에는 절대 성탄제날 공연 안 잡을게. 올해만 참아.”
“작년에도 그렇게 말했어.”
“그랬었나?”
시치미를 뚝 떼니 훤히 드러난 류제의 잘생긴 얼굴이 부루퉁해졌다. 납득이 안 가는 류제는 고개를 숙여 재경의 머리에 이마를 콩 찧어 마주 보았다. 어리광을 부리는 류제를 달래주며 재경은 검은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었다.
“평생 같이 있을 건데 왜 이리 욕심이 많아. 일주일 동안 출장도 잘 갔다 오면서 성탄제가 뭐 그리 특별하다고. 하루 정도는 사람들한테 좋은 일 하게 해주라.”
“욕심 많은 거 이제 알았어?”
원해서는 안 되는 걸 욕심부리다가 배드 엔딩으로 끝나버릴 뻔한 미래를 떠올린 재경은 졌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저으니 서로 머리카락이 비비적 맞닿았다.
매일같이 붙어있으면서 뭐가 그리 좋다고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어하는 걸까. 성탄절도 그저 지나가는 하루에 불과할 텐데 그거 하나 못 참고.
“넌 인기가 너무 많아.”
길 가다 스쳐 지나가면 잘못 봤나 두어 번 돌아보게 되는 잘난 얼굴로 질투를 해대니 재경은 기가 찼다. 물론 밴드 카페라테 치즈 캣의 영향으로 밴드의 얼굴이자 보컬인 재경은 전례 없는 인기를 누리는 중이기는 했다.
멀리서 보면 알 수 없는 재경의 매력은 원래 류제만 알고 있었다. 오른쪽 눈이 나으며 색소 차이가 생긴 미묘한 오드아이나 마족의 몸이 인간 부분을 침식할수록 옅어진 주근깨가 매력적인 재경을 사람들이 죄다 훑어볼 것 같아서 류제는 그게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이 사람이 누구의 것인지, 누가 이 사람 것인지 인간들에게 확인시켜 주었을 텐데 다들 그걸 몰라서 좋아라 빼앗으려고만 하는 것 같았다.
“누가 할 소리를.”
재경은 외모로 사람을 홀려먹는 할애비 마왕을 쏘아보았다. 왕궁에서 일하는 정보원(보통 비키를 지칭한다)에 따르기로, 니냐롯트의 칙령 일을 하는 류제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면 그 외모에 반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키아나트리체를 찾는 외국 대사들이 류제와 만나게 해주고 싶어 줄줄이 혼기가 찬 자식들을 데리고 온다는데 마왕을 상대로 다들 제정신인가도 싶었다. 이런 중대한 사실을 류제는 재경에게 한 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물론 다른 인간 따위 쥐똥만큼도 관심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만 언젠가 티파티에 초대해 준 니냐롯트가 류제의 맞선을 부탁하는 일이 잦아졌다고 지나가는 말로 해주었을 때 충격이 대단했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건 남자 친구로서 좀 아니지 않은가.
“내일도 함께 있고 싶어.”
그런 류제 신리가 반한 사람은 바로 나란 말이지. 새삼 웃겨서 피식 웃어 보인 재경은 응석을 부리는 류제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했다. 자상한 연인처럼 류제를 가슴팍에 끌어안은 재경이 달래듯이 쓰다듬었다. 침실 방문은 닫힌 상태였다. 어두운 실내에 달빛이 사람의 윤곽을 드러냈다.
“오늘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용서해 줄게.”
그러자 못마땅하게 고개를 든 류제는 약속을 어긴 보복이라도 하듯 잡아먹을 것처럼 한입 키스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예민한 입 안에 침범하는 혀가 남사스럽다며 부끄러워하던 재경도 이제 아무것도 모를 나이는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손잡고 뽀뽀를 하겠다는 순수한 생각보다는 이 키스의 다음에 있을 것들을 원했다.
오늘따라 집요하게 키스하는 류제를 감당하느라 숨이 차진 재경은 침대에 누울 때까지 키스만 해대는 류제가 무슨 속셈을 가졌나 기대 반 두려움 반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동공이 그의 흥분을 드러냈다. 재경의 한쪽 눈동자 속 동공도 상응하듯 붉게 변했다.
“미리 말하는데, 또 못 한다고 도망치지 마.”
“사나이가 두말할쏘냐.”
재경이 자기만 믿으라며 가슴을 쳤다. 그렇게 장담해도 매번 손바닥 뒤집듯이 못한다고 말을 바꾸는 게 재경이다. 오늘만큼은 절대 세이프 워드를 남발해도 들어주지 않을 속셈으로 류제는 앙큼한 볼을 살짝 물었다.
“읏……!”
동시에 재경의 위에 올라타 예고도 없이 긴 손가락이 침입하니 재경의 허리가 비틀렸다. 마족의 몸 때문인지 항상 처음 하는 사람처럼 감각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음란한 짓거리를 한다는 걸 잘도 알아서는 벌어지는 구멍 속에서 진득진득한 기대감이 흘러내렸다.
어렵지 않게 두 번째 손가락을 넣은 류제가 피스톤질을 흉내 냈다. 좋은 곳을 찔러줄 듯 말 듯 거린 그가 재경의 음경을 한입에 담았다. 혀와 입천장으로 귀두를 짓누르고 빨아내는 힘에 움찔한 재경은 앞에 보이는 흥분한 류제의 것을 입에 물었다. 육봉에 뚝뚝 흐르는 타액이 아이스크림 녹은 것처럼 흘러내렸다.
“웬일이야?”
“약속을 어긴 건 사실이니까.”
뚱하게 귓불을 붉히는 재경이 묵묵히 혀를 움직였다. 이런 점은 정말 사나이답단 말이지. 부끄러워하면서도 혀로 간질간질 애무해 주는 기분에 더욱 열과 성을 다해 재경의 것을 빨아주던 류제는 자기를 따라 하는 건지 점점 더 목구멍으로 깊게 들어가는 성기의 쾌감에 이기지 못했다.
“으급!”
각도를 잘 조절해 단번에 제 것을 재경의 목젖 끝까지 박아 넣은 류제는 다리를 모아 비비적거리는 재경의 순수한 음경에서 쿠퍼액이 찔끔찔끔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음란한 전경이 그의 시야를 자극했다.
평소에 했다가는 재경이 도중에 머리통 한 대 때렸을 행위지만 오늘이니까 할 수 있는 거다. 살짝살짝 스치는 이가 적당히 자극된다. 불편한지 혀의 위치를 이리저리 옮기려고 하는 것도 음란하다. 언제 이런 걸 또 궁리했나 싶다.
깊게 쏟아낸 류제는 일순 숨을 멈춘 재경이 목젖을 꿀렁거리며 진득한 액체를 삼키는 것을 느꼈다. 액체가 전부 나온 것 같자 천천히 뺀 류제는 아직 덜 삼켜진 액체가 거꾸로 보이는 재경의 얼굴을 하얀 점액이 흩트려 놓은 걸 보고 또 흥분하고 말았다.
“크헥, 켁. 하… 하아, 하기 전에 마… 말을 하고 하라고!”
혀를 내둘러 그것을 맛있게도 핥아낸 재경이 류제를 노려보지만 그는 모르는 척했다.
“서비스 해주는 거 아니었어?”
“마음의 준비는 필요해.”
침대에 앉아 재경을 마주 보게 끌어안고, 얼굴에 남은 정액을 닦아낸 손가락을 재경의 입에 쑤셔 넣은 류제는 입 안 좋은 부분을 건드려주며 발정하는 재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빨… 빨리. 뭐 하는 거야…….”
아까부터 애무만 하지 본방이 없으니 아랫도리가 불끈불끈하고 구멍이 쑤셔와서 죽을 것 같은데 애가 타게 바깥만 공략하니 참을 수 없다. 재경이 허리를 비비적거려 류제의 복근에 거시기를 문지르는 음란함이 흥분되지만 류제는 참았다. 이건 류제가 주는 나름의 벌이었다.
“사나이답게 제대로 해야지. 입, 집중해.”
“읏, 흐윽……! 으으……!”
류제의 가슴팍을 잡고 젖꼭지를 엄지손가락으로 짓누르듯 굴리고 간사하게 혀를 내밀어 놀리는 것처럼 혀끝을 타액으로 적시니 배고픈 재경은 그거라도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넣어달라고 하면 이제껏 봉사하던 류제가 심술을 부린다. 애가 탔지만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말한 건 재경이었으니 지금 와서 물리기에는 자존심이 상했다.
후배위로 엎드리게 해서 드디어 넣으려나 싶었는데 오돌토돌한 척추를 따라 손가락으로 쓴 류제가 재경의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척추에 키스를 했다. 재경의 혀도 핥아주지 않던 류제의 혀가 살갗 위의 뼈를 희롱하고 엉덩이를 매만지는 손길은 구멍을 만질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엄지손가락으로 구멍을 꾹 누르고는 빙글빙글 돌리다가 음낭을 살짝 쥐고 고양이 턱을 쓰다듬는 것처럼 문지르는데 그 누가 이걸 참을 수 있을쏘냐. 당장 손가락 넣어서 안쪽을 누르란 말이야.
엉덩이를 뒤로 빼서 엄지손가락을 넣게 하려던 재경의 속셈을 파악한 듯 류제는 귀 뒤를 핥으며 숨소리만 낼 뿐 넣어주지 않았다.
“언제, 언제 넣을 건데!”
끈질긴 애무를 참지 못한 재경이 숨을 헐떡이며 류제를 넘어뜨렸다.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언제까지 예고편만 할 것인가. 이러다 본전도 못 찾고 해가 뜨게 생겼다. 기대감에 절어있던 엉덩이가 시큰거린 재경은 류제를 깔고 앉아 그의 성기를 찾아 잡았다.
적극적인 재경을 보는 것은 좋지만 오늘은 벌을 주려고 한 거다. 어지간히 쾌감에 약한 재경을 올려다본 류제는 건방지게 웃어 보이며 재경의 뜨거운 볼을 쓰다듬었다.
“벌써 항복이야?”
“닥치고 빨리 넣어!”
애무가 기대치를 넘어 정신이 회까닥하기 전에 거시기를 안에 꾹 맞춘 재경이 패기 있게 외쳤다. 하지만 역시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넣자니 어디 잘못 찌를까 무서웠던 재경은 쉽사리 주저앉지 못했다.
용기가 가상했던 류제는 재경의 골반을 붙잡고 제 허리 짓과 동시에 꾹 눌러 끝까지 닿게 했다.
“아, 으…으으으!”
내장부터 시작하는 전율이 피부에 으스스 드러나는 것을 류제도 느꼈다. 뒤가 잡힌 고양이처럼 손가락과 발가락을 바싹 폈던 재경은 류제가 빠르게 피스톤질을 시작하자 도리질을 치며 버둥거렸다.
“좀, 좀 천천히! 오늘 진짜 왜 이래?”
“오늘은 내 페이스대로 할 거니까. 원래 더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빨리 하라니 바람대로 해줘야지.”
멋대로 하랬다고 진짜 멋대로 하기는. 아무것도 몰랐던 처음 말고는 매일 자기 페이스대로만 섹스했던 재경은 주도권을 잡은 류제가 얄미워서 죽을 것 같았다.
항상 이겨왔다가 상황이 역전되어서 지고 있다고 생각해 봐라. 배알이 꼴린다. 상대가 늘 봐주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짜증이 툭 치밀었다.
그런데도 몸은 좋다고 난리를 치니 평소보다 쾌감이 도를 넘어섰다. 전신이 얼굴이 시뻘게져서 부들부들 떠는 재경은 류제의 피스톤질에 얼마 가지 않고 가버리고 말았다.
“흐, 으… 아읏……!”
재경이 좁은 곳에 들어간 것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천장을 올려다보자 류제는 꽉 조여대는 구멍에 눈을 질끈 감았다. 벌은 이대로 끝난 게 아니다. 자세를 바꾼 류제가 또 발길질하려는 재경의 다리를 들고 퍽, 쳐 넣었다.
“아… 안 돼. 가… 갔다고! 좀! 막… 막 갔는데 좀!”
“정신 차리고 빨리 흔들어. 자, 자. 사나이는 잘 할 수 있잖아.”
찰싹 엉덩이를 때린 류제는 허리의 움직임을 점점 더 빨리 했다. 손잡이라도 잡듯 재경의 음경을 붙잡고 귀두를 문질러대니 도를 넘어서는 쾌감에 재경은 그만 자지러지고 말았다.
“읏, 후우.”
그러다가도 기운과 포만감을 주는 체액이 내부에 뿌려지니 기분이 좋아서 움찔움찔 떨게 된다. 입에서 분비되는 타액과는 질적으로도 차원이 다르다.
류제도 애무하는 동안 애가 탔던 것인지 두 번째인데도 사정 시간이 길었다. 에너지가 충분히 안쪽으로 스며든 것 같자 조심스레 뽑아낸 류제는 성욕과 식욕이 동시에 충족되어 도를 넘어서 행복해하는 재경을 툭툭 깨웠다.
“벌써 뻗으면 어떻게 해. 밤은 아직 길어.”
“지금 시간이 몇 시야. 오늘은 그만 자자. 나 내일 공연하는 거 알잖아…….”
“또 너만 만족하고 끝내겠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말한 사나이는 어디의 누구더라?”
상냥하게 웃는데 전혀 상냥하지 않았다. 사나이의 자존심이 흔들리는 재경은 세이프 워드를 남발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정구지, 정구지, 정구지!”
“어딜 도망가려고?”
재경의 허리를 붙잡은 류제가 이를 보이며 자상하게 웃었다. 앞머리 안에 그늘진 음영이 무섭다. 슬쩍 뜨인 눈에서는 여태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샐쭉한 붉은 동공이 스산하게 빛났다.
털이 삐죽 선 재경은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이걸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로 입가를 까딱거렸다.
* * *
“으엑.”
고집을 안 꺾는 나쁜 버전 류제가 워낙 귀하기도 했고, 잘못한 건 자신이었으니 화를 누그러뜨려 줄 겸 원하는 대로 당해주던 재경은 탐닉의 시간이 끝나자 배가 터질 것처럼 속이 매슥거렸다.
해가 뜰 때까지 재경에게 벌을 준 류제는 만족해서 난장판인 침대 위에 느긋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 괘씸하다.
“내가 건강해서 망정이지. 아이고, 배야.”
과식해서 속이 더부룩하다. 한 숨도 못 잤는데 해가 떠버렸다. 졸린 눈을 비비적거리며 크게 하품한 재경이 몸을 일으켰다. 어젯밤의 흔적으로 더러워진 이불을 빨 생각을 하니 괜히 성가시다.
“왜 벌써 일어나.”
기척을 느낀 류제가 꾸물꾸물 움직이며 재경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계속 깨어있었는데 일어나긴 무슨.”
“침대에서 일어났다는 의미였어.”
“아주 그냥 탈나서 공연하지 말라고 고사를 지내라.”
인간과 달리 지치지 않았고 에너지원은 충분히 섭취했으니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짐승도 아니고 사람이 루틴이란 게 있다. 공연 전날에는 푹 자서 긴장을 풀고 싶었는데 쑤시지도 않은 몸이 근육통으로 쑤시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런 상태로 3만 명 앞에서 공연을 해야 하다니 재경은 조금 질려버렸다.
“챙겨야 하는데 너 때문에 만사가 귀찮아졌어.”
현자 타임이 길어져서 그런 건가 나른하다. 재경이 다시 침대에 누워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창문 밖에서 겨울 철새가 후두둑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던 평화로운 그때, 창문에 빼꼼 비친 고양이귀가 훌쩍 솟아올랐다.
“안냥.”
“흐아악!”
둘밖에 없는 방에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자지러지게 놀란 재경이 류제에게서 이불을 빼앗아 들고 침대 아래로 우당탕 나뒹굴었다.
“좋은 아침이냥.”
평화로운 아침은 아니다. 재경이 혼자만 대피하는 바람에 팽이처럼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진 류제는 나신으로 당당하게 일어나며 방해꾼을 핀잔했다.
“아침 일찍부터 이게 몇 번째야, 이 섬세하지 못한 불법침입자야.”
“옷 입어냥. 고개를 들고 싶냥.”
부끄러움은 아는 건지 고개를 숙인 고양이녀가 창문에 매달려서 말했다. 삐죽 나온 고양이귀가 파르르 떨렸다. 근방에 있던 드라코니스 입자로 섬유를 만들어낸 류제는 키아나트리체 왕실 근무용 옷을 적당히 자아냈다.
완벽한 근육으로 뒤덮인 살갗이 천으로 가려지자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든 냥냥이가 창문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썩 유쾌하지 못한 냄새구냥. 솔로로서 배가 아프냥.”
“멋대로 들어온 주제에 집주인한테 불평하지 마. 왜 벌써 온 거야? 아직 여유 있는데.”
이불을 똘똘 뭉친 재경이 애벌레처럼 일어났다가 천을 잘못 밟고 휘청거렸다. 뭐든 자기랑 상관없던 냥냥이는 고양이 귀를 파닥거리며 기지개를 폈다.
“다름 아니라 이벤트를 해볼까 어젯밤에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냥. 한시라도 빨리 알려주고 싶었냥.”
“이벤트? 모금 활동 때 할 거?”
“그렇다냥. 자선 행사에서 마스코트는 중요하지 않냥. 귀여운 고양이 귀가 있다면 돈이 더 모일 거라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냥.”
“어디서 그런 끔찍한 생각이 나온 거지. 불길한데.”
“설마, 그때처럼?”
마스코트에 얽혀 좋은 기억이 없는 재경이 질색하는 가운데 류제가 맞장구를 쳤다. 재경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학창 시절 냥냥이의 어빌리티에 당한 재경은 고양이 귀와 꼬리가 솟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숙녀들의 화장이라는 마법과 메이드복까지 입고 공연장에 서있어서 효과가 발군이었다. 홍보 효과가 대단해서 덕분에 그 이래로 제립학교에서 밴드부를 모르는 학생이 없었다.
“류제 네 생각은 어떠냥?”
“나한테 묻는 거야?”
류제는 어리둥절하게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냥냥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자로서 동의를 구하는 거냥. 물론 사진도 잔뜩 찍을 거냥. 류제 너한테는 공짜로 나눠주겠냥.”
류제야 귀여운 재경의 모습을 보는 건 나쁘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이려다가도 그 모습을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것에 대해서는 영 탐탁지가 않았다. 그래도 고양이 모습을 한 재경의 사진을 태워서 가지고 있는 게 없는 터라 솔깃했다.
“생각 좀 해보자. 수지 타산을 고려해 봐야겠어.”
“왜 류제한테만 물어봐. 공연하는 건 우리잖아. 당사자인 나한테 물어보라고.”
“넌 맨날 반대만 하잖냥.”
“그래서 내 의견은 무시한다는 거냐?”
일단 다른 방으로 꾸물꾸물 기어가서 옷을 걸치고 나온 재경이 투덜거렸다. 뭐든 류제의 동의에 상관없이 일단 일을 시행할 생각이었는지 히죽 웃은 냥냥이가 외쳤다.
“하기야 보컬이 가장 중요하냥. 붙잡아냥!”
“으라차!”
재경이 방심하는 순간 냥냥이의 신호와 동시에 침실로 연결되는 모든 문에서 카페라테 치즈 캣의 멤버들이 달려들었다.
당황한 재경은 뭔가 일어날 분위기상 잽싸게 도주로를 찾았다. 하지만 워낙 습격이 급작스러워 마족이라는 이름이 아깝게 신체 부위가 잡혀 눌리고 말았다.
식겁한 재경이 탈탈 그녀들을 털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들도 한때 전투 수업을 들었던 퇴역 군인이다. 어림도 없이 햄버거 게임하듯 가장 밑에 깔린 재경이 음침하게 다가오는 고양이녀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으아악! 도대체 왜? 뭘 하려는 속셈이야?”
“후후후. 아프지 않을 거냥. 얌전히 있어냥.”
“재채기하지 마! 날 붙잡고 있는 애들까지 고양이로 만들 셈이야?”
“재채기는 안 하냥. 날 뭘로 보는 거양.”
고양이녀는 고된 훈련 끝에 이제 재채기 말고도 제 능력껏 사람을 고양이 수인으로 바꿀 수 있는 괴이한 어빌리터로 거듭나고 말았다. 고양이녀의 손이 접근하자 재경이 그를 억누르는 친구들을 간신히 뿌리치고 일어섰다.
“으앗! 렌 이 자식, 기어코 도망쳤다 이거지. 힘만 드럽게 세가지고.”
“놓치지 마. 역시 하찮은 렌 지미라도 마족은 마족이야.”
“도망치지 못하게 해, 류제! 렌을 잡아!”
역시 뭔지는 모르겠지만 렌을 잡으라는 말에 조건반사적으로 재경을 잡은 류제는 발버둥을 치는 재경의 힘에 버티기 위해 뒤로 우당탕쿵탕 굴렀다. 그 틈에 술수를 부리려는 고양이가 펄쩍 뛰어 달려들었다.
“잡았냥!”
“저리 꺼져!”
재경은 고양이가 다가오기 전에 류제를 반대편으로 훌쩍 던져버렸다. 덕분에 류제에게 정면으로 얻어맞고 핀볼처럼 튕겨나간 고양이녀가 비명을 질렀다.
“후냐앙!”
혹시라도 소중한 집이 부서질까 봐 힘을 최대한 아끼고 있던 류제는 어쩔 수 없이 고양이녀를 받아내며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정신이 없던 고양이녀가 뭐든 잡겠다며 류제의 얼굴을 반죽하듯 잡아 쥐었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 안이 연기로 자욱해졌다.
“냐앙?!”
놀란 고양이녀의 온 털이 솟아올랐다. 커다란 덩치의 기척이 훅 주저앉았다. 설마 했던 고양이녀는 저질렀다는 생각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사고를 친 고양이녀는 이마를 치며 눈을 둘 곳을 몰랐다. 목표물이었던 렌 지미는 평소와 다름없는데 연기는 다른 곳에서 났다. 그녀의 괴상한 능력을 잘 알고 있다 자부하는 밴드부원들도 걱정스레 다가왔다.
“설마. 냥냥이 너…….”
“일 치렀냥.”
제가 깔고 누운 류제가 움찔거리며 움직이자 새파랗게 질린 고양이녀가 스샤삭 뒤로 물러섰다. 망했다냥. 류제 신리가 엄청나게 화를 낼 거냥. 어떻게 변명한담.
“괜찮아? 내가 너무 세게 던졌나?”
류제와 한두 해 같이 사는 게 아닌 재경이 연기 안에서 느껴지는 인영에게 겁도 없이 다가갔다. 메케한 연기를 손을 저어 흐트러뜨린 그는 어째 몸을 일으키는 인영의 몸이 조그마한 것 같아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발꿈치로 서있는 조그마한 발이 보였다. 창문에서 바람이 불어 연기가 가시는데 아래서부터 훑듯 고개를 들어 올리던 재경은 처음 아세미를 만났을 때 나이대로 보이는 새까만 머리칼의 고양이귀 소년이 저를 쳐다보자 말문을 잃었다.
생각이 잠시 멈췄던 재경은 재부팅 후 다시 생각을 해보았다. 푸른 눈동자를 가진 사람 중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었다.
“엥? 류… 류제?”
그러자 그에 응답하듯 류제가 달려들어 재경을 꽉 껴안았다. 스스로가 고양이 수인이 된 적이 있었지만 남이 변한 건 처음 봤던 재경은 식겁해서 고양이녀를 타박했다.
“뭐 하는 짓이야? 죄 없는 류제를 왜 저 모양으로 바꾼 겨?!”
“마왕인 류제한테는 안 통하는 줄 알았냥! 떨어지려면 착지하려는 게 고양이의 본능인데 어쩌라는 거냥?! 렌, 네가 가만히 있었으면 되는 거 아니냥!”
“아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냐?”
“내버려 둬. 냥냥이도 혼란스러워서 그래.”
명색에 어빌리터보다 한 단계 더 높다는 용인, 마왕인데 애들 장난 같은 어빌리티 술수에 걸릴 줄은 누가 알았겠냔 말인가. 마족에게도 고양이 수인화 능력이 통했으니 그 연장선인가 납득할 수 있지만 마왕을 대상으로는 생각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보통 인간이라면 고양이귀가 조금 생기고 말 정도로 조절했는데 마왕을 상대로는 능력이 다르게 적용되는 모양이다. 덕분에 어린 고양이 수인이 되어버린 류제는 못난 열 살배기 애처럼 좋아하는 사람에게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 기회에 렌도 빨리 바꾸자.”
류제는 아무래도 좋고 열렬한 성의를 보이는 드럼의 ‘가시’ 어빌리터가 신이 나서 콧김을 뿜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사고는 밴드부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렌까지 고양이로 만들면 류제는 누가 통제해?”
“동감이야. 렌만 컨트롤하는 거랑 류제를 컨트롤하는 건 또 다르지.”
“렌 건들지 마!”
으리으리한 기운이 고양이 류제에게 쏠리는 것 같더니 본래 류제 목소리보다 가늘고 앳된 목소리가 들렸다. 샐쭉하게 조여진 붉은 동공이며 머리 위로 솟아난 고양이 귀와 꼬리가 불만스레 삐죽거렸다.
그러자 장난기가 돈 키보드의 ‘투시’ 어빌리터가 재경의 볼을 꾹 눌렀다. 류제의 털이 밤 껍질처럼 솟아올랐다. 손가락을 떼니 다시 가라앉고, 다시 찌르니까 다시 솟아올랐다. 그걸 계속 반복하자니 참지 못한 류제가 발톱을 세웠다.
“손대지 마!”
재경을 꽉 끌어안은 류제가 소유욕을 과시했다. 게으름이 내재된 무사태평한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에 재미를 붙인 그녀들이 그럼에도 음흉하게 다가왔다. 재경의 몸을 타고 올라가 목말로 어깨에 앉은 류제가 죄 없는 재경의 얼굴을 꽉 끌어안았다.
“손대지 말라고. 내 거야!”
“우아악, 류제, 앞이 안 보여!”
“야단났네. 안 떨어지는 건 아니겠지?”
“저래가지고 공연은 어떻게 해?”
“보지만 말고 좀 도와줘!”
눈에 뵈는 게 없어진 재경이 잠결에 일어난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찍찍이처럼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류제 때문에 숨 쉬기가 힘든 데다 몸을 자꾸 흔들려서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어려진 류제는 목청도 그 배였다.
“시러어!”
“알았어, 알았다고! 나잇값 좀 해, 이 할아방탱아!”
“마왕이라고 해도 저런 꼴이 되어버리면 다 바보가 되나 봐. 정말 엄청난 능력이야.”
베이스의 ‘마비’ 어빌리터가 혀를 찼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고양이녀는 자신의 힘이 이토록 두려운 것인지 이제 알았다며 제 손을 내려다보느라 사건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 힘으로 마왕까지 고양이로 봉인하고 말았던 것이냥……! 나… 나는… 어쩜 이리 잘난 고양이가 돼버리고 말았냥. 알라마니 기술관에서 또 공지문이 날아오겠냥. 하지만 나는 당하지 않을 거냥.”
감동하고 있는 냥냥이를 뒤로한 재경은 몸도 생각도 어려진 류제를 달래느라 죽을 맛이었다.
“데꼬 가지 마! 내 거야. 내 거라고!”
“귀찮은데 ‘마비’로 기절시킨 다음 침대에 묶어놓자. 그 후에 몰래 나가는 거지.”
“얌마, 죄 없는 류제한테 너무하는 거 아니냐?”
힘이 엄청나서 류제가 고집을 부릴 때마다 절로 휘청휘청하는 재경은 친구들에게 불평할 거리가 잔뜩 있었지만 일단 떼를 쓰는 류제를 떼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라고 마왕인 류제가 마음먹고 고집을 부리니 재경의 힘으로는 떨어지지 않았다.
“괜찮아. 안 내려놓을게. 류제야, 제발 착하지? 나 숨 막혀 죽겠어.”
“갈 거자나! 나만 내버려 두고 가버릴 거지?”
“데리고 가면 될 거 아냐!”
방법이 없던 재경은 이런 식으로 류제를 살살 꼬드기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할 거야?”
“진짜 약속할게.”
“맨날 거짓말만 치면서.”
“이런 일로 거짓말을 왜 해?”
그러자 재경을 붙잡은 류제의 힘이 약해졌다. 어른스러운 류제가 애처럼 구는 것도 오랜만이라 기분은 좋다만 이것도 금방 질릴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던 렌도 이런 고충을 겪으며 살고 있었구나.”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기는 했어.”
“류제 팬한테는 비싸게 먹힐 정보겠다.”
밴드 멤버들도 렌에게서 류제가 성탄절인 오늘 잡힌 카페라테 치즈 캣의 자선공연에 불만을 품고 있다 전해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간신히 류제를 목에서 내린 재경이 칭얼거리는 류제를 들썩거렸다. 키가 이만한 유네의 어린 동생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어린아이 다루는 것에 익숙해진 게 다행이다. 숨을 헥헥 내쉬던 재경이 망할 도움 하나 안 되는 친구들을 타박했다.
“이 망할 자식들아. 어제 내가 완벽하게 류제를 납득시키느라 무슨 개고생을 했는지 알아?”
일을 작당했던 밴드 멤버들은 시치미를 떼며 휘파람을 불었다.
“우린 그냥 보컬에게 약간의 애교와 귀여움을 첨가해 주려고 했지. 자선행사니까 나쁠 건 없잖아.”
“너희들끼리 하라고 그런 건!”
“우리들도 하려고 했어. 일단 너부터 시킨 다음에.”
“아아. 귀여운 고양이귀 대작전이 이렇게 실패할 줄이야.”
“류제를 마스코트로 세우는 건 어때?”
아주 그냥 사람을 실험대로 생각하는 정신머리는 학창시절 때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 못마땅하게 그녀들을 훑은 재경이 엎드려서 스스로의 능력에 경배하는 냥냥이의 등을 발로 툭 찼다.
“절하지 말고 빨리 원상 복귀시켜.”
“시간이 지나면 돌아올 거냥. 귀엽잖냥. 이 순간을 만끽해냥.”
귀엽다는 말에 당황해서 류제를 제대로 못 본 재경이 제가 둥개둥개 안고 있는 류제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미소년이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 티끌 없는 예쁜 얼굴에 새까만 긴 속눈썹, 눈을 커다랗게 채운 푸른 눈동자는 천사의 용모였다. 게다가 그 새까만 머리색과 같은 색의 고양이 귀가 앙증맞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재경이 넘어가지 않겠다며 외쳤다.
“이 자리에서 당장 돌아오게 해.”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지 않았냥. 아무리 만능이라도 그런 건 못하냥.”
“그럼 류제를 이대로 둬야 한단 말이야?”
“뭐… 두고 가면 일을 치를 것 같긴 하네. 애초부터 떨어지지 않을 것 같고.”
자기를 두고 간다는 말이 나돌자 류제의 눈이 이글이글 빛났다. 초커가 깜박거렸다. 냥냥이의 술수에 고양이가 된다고 해서 어빌리티를 쓰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니 류제도 마법을 못 쓰는 건 아닐 것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반쯤 고양이, 거의 본능만 있는 어린애가 되어버려 제멋대로 굴다가 마법을 난사하게 되면 고양이녀는 연초까지 알라마니 기술관 연구원들에게 시달리며 살지도 몰랐다. 기타리스트가 없어진 밴드는 재경도 바라지 않았다.
“마스코트 아이디어는 누구 입에서 제일 먼저 나왔냐?”
재경이 이를 악물고 물으니 밴드 멤버들이 하나같이 고양이녀를 가리켰다. 안 그래도 달래주느라 밤을 꼬박 새워 하는 바람에 속 매스꺼워 죽겠구만 재경이 고양이녀를 사정없이 노려보았다. 그녀도 짧게 반성했는지 귀가 축 처졌다.
“재미있을 줄 알았냥.”
“다음부터는 말을 하고 저질러라.”
“말하면 들어줄 거야?”
“사람의 의사를 존중하라는 말이라고, 이 자식들아! 아침부터 쳐들어오기나 하고!”
빌어먹을 자식들 같으니. 공연 준비는 리허설부터 메이크업까지 할 것들이 태산인데 이래서야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도 까마득했다.
욕이라도 한사바리 해주려고 했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서 기다리던 숙녀들이 소란을 듣고 위로 올라와서 그들을 독촉했다.
“우리들의 귀여운 스타들~ 소동은 벌써 끝난 거야?”
“어라, 뭐야. 아직 렌이 아니… 어머머!”
노렸던 렌 지미 대신 류제의 귀에 고양이 귀가 솟고 외관도 어려졌다. 숙녀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자기들끼리 등짝을 퍽퍽 쳐대며 좋아했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귀여운 것에 환장하는 숙녀들의 입이 찢어졌다.
“후우. 또 홀리고 말았구나. 류제 신리, 어쩜 이리 죄 많은 남자인지.”
“누나들은 왜 또 온 건데요?”
“슬슬 출발하지 않으면 늦을 거라고, 소년.”
이제 더 이상 소년도 아니지만 매번 소년이라고 부르는 숙녀들은 시간을 재차 확인했다. 온갖 늑장을 부리느라 늦어진 시간에 재경은 이마를 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류제는 어쩌지? 혼자 두면 백 퍼센트 일을 저지를 것 같은데.”
“오늘만 맡아줄 사람은 없어?”
“비키나 유네가 오늘 공연 보러 온다고 했어.”
“그럼 공연장까지는 데리고 가야겠네.”
“시러, 시러, 시러!”
류제가 재경의 머리통을 으스러뜨릴 것처럼 껴안았다. 또 휘청휘청하며 류제를 달래주는 재경은 그의 고집에 두 손 두 발 들었다.
꼬라지가 잔뜩 난 고양이를 어쩌면 좋을까. 재경이 고양이가 되는 사고가 날 때마다 류제가 느끼던 절망감을 느끼던 재경은 하필이면 이럴 때 사고를 친 멤버들이 너무했다.
“내 고생은 뭐였냔 말이지.”
울적하게 중얼거린 말을 못 들은 척한 냥냥이는 이 모든 사건의 원흉인 주제에 태평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이미 표도 다 팔았는데 고양이 류제 때문에 공연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예상치 못한 고양이 류제의 등장은 연출 팀은 물론 모든 관계자들에게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이번 공연의 마스코트냐는 질문도 나왔다. 그러고 싶을 만큼 고양이 류제는 심장을 덜컥거리게 하는 귀여움이 있었다.
“너무 귀엽잖아요. 진짜 미쳤다.”
“기타리스트분의 동생이라고요? 진짜 하나도 안 닮았는데.”
“아… 하하.”
변명하기 애매하니 고양이녀의 동생이라고 대충 얼버무리기는 했는데 역시 아무도 안 믿을 만큼 얼굴이 너무 다르게 생겼다.
심각하게 귀여운 외모를 보고 있자면 사람들은 얼굴에 피가 몰려 어지러움을 호소했다. 리허설을 못하게 자꾸 렌을 귀찮게 굴었고, 사람들이 홀려서 일을 하지 않으니 결국 도움을 요청한 재경은 친구에게 망할 말썽꾸러기를 부탁했다.
“헛것이 보이네.”
잠시 안경을 벗은 비키가 눈과 눈 사이를 누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환상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건 진짜였다.
별일이 다 있다며 옆에 있던 유네가 중얼거렸는데 비키는 그 말에 적극 동감했다. 갑자기 빨리 와달라고 급하게 연락하기에 뭔 일이 났나 했더니 들을수록 기가 막히다.
“이 괴물 고양이를 돌보면 되는 거지?”
“괴물 고양이라고 하지 마. 쉬러 왔을 텐데 진짜 미안. 비키, 유네.”
재경은 성탄제날 가족들과 함께 공연을 보러 온다고 했던 친구들에게 짐 덩어리를 맡기자니 괜히 미안했다. 착하게도 그녀들은 재경의 부탁이라면 최대한 들어주었다.
“괜찮아, 렌 군.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류제의 한심한 모습을 봐놔야 나중에 비웃어줄 수 있으니 나쁠 건 없지.”
비키가 재경의 뒤에 숨어있던 류제를 흘겼다. 애처럼 조그마한 게 고양이 귀가 삐죽 나와서는 재경과 대화 중인 비키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사악한 속 알맹이는 몰라도 겉모습은 하찮기 짝이 없었다.
“류제 군도 이럴 때가 있어야지. 가끔 생각나는데 그때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던 느낌이 들거든.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기만 해서 즐거웠지.”
재경의 공연 사진을 찍기 위해 가져온 즉석카메라로 류제를 찍은 유네가 팔랑팔랑 사진을 흔들었다. 반짝거리는 게 흔들거리자 류제의 고양이 눈동자가 번뜩였다.
팍! 하고 손을 뻗은 고양이 류제는 저걸 붙잡으러 갔다가는 재경과 멀어지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제자리에서 몸만 이리저리 들썩거렸다.
“와, 이게 안 통하네.”
“하아. 그렇다니까. 류제. 잠깐 친구들한테 가있어. 알았지?”
“시러, 시러!”
재경이 류제를 꾹 밀자 류제가 고개를 저으며 더욱 강하게 매달렸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 사고 친 고양이녀를 비롯해서 다른 밴드 멤버들은 개인 악기로 손을 풀고 있는데 관객 호응 유도는 물론 멘트도 쳐야 하는 재경은 대본도 덜 외워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 목 풀고 동선을 확인해야 할 시간도 다가오는데 정말 도움 하나 안 되었다.
“류우제! 어제 나랑 약속했지?”
“같이 있을 거야. 안 갈 거야!”
“하아. 망할 냥냥이 같으니. 언제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야.”
골치가 아팠던 재경이 류제의 머리칼을 헤집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수인이 되어버렸을 때는 1주일이나 걸렸고, 렌 군한테 고양이귀가 나왔을 때는 얼마 안 가서 돌아왔었는데 류제 군은 어느 정도려나.”
“나? 내가 언제 고양이귀가 나왔어?”
“그야―”
아차. 입을 막은 유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고양이녀의 행태에 질려버린 렌에게 말했다가는 카페라테 치즈 캣이 해체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무시 못했다.
“뭐야. 말을 하다 말아.”
“으으응. 착각했어. 하하하. 자, 류제 군. 이리 와.”
“가만히 기다리면 렌이 좋은 걸 준대.”
싫다는 류제를 붙잡고 억지로 떨쳐낸 재경이 문제의 고양이를 비키에게 넘겼다.
버둥거리는 류제의 시야를 방해하며 관객석에 앉히느라 비키는 공연도 보기 전에 진이 다 빠졌다. 논문 쓴다고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러 왔더니 스트레스가 더 안 풀리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자~ 류제 군~ 개다래나무야~”
미리 준비해 왔던 개다래나무 조각이 든 주머니를 꺼낸 유네가 흔들흔들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던 고양이 류제가 코를 킁킁거렸다. 제아무리 속 알맹이 더러운 대마왕이라고 해도 고양이라면 이걸 이길 수는 없을 거다.
“렌은?”
이 좋은 걸 렌에게 주고 싶었던 류제가 개다래나무 주머니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아까까지만 했던 렌이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도망간 재경은 머리털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볼일 있어서 어디 갔어.”
“어디 갔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올 거야.”
올망졸망한 이목구비하며 눈물이 가득 번들거리는 푸른 눈동자나 가련한 속눈썹, 진한 눈썹이 죄책감을 자극했다. 축 늘어진 귀는 안쓰러움을 더해서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마다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렌 언제 와?”
“한 시간만 기다리면 저기서 류제 군 보러 나올 거야.”
유네가 앞에 보이는 무대를 가리켰다. 렌이 온다는 말에 류제의 귀가 다시 팍 섰다. 꼬리가 휘적휘적하더니 비키더러 목말을 태워달라고 징징거렸다. 비키는 예쁘게 세팅한 머리가 망가져서 요청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무슨 힘이 이렇게 센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직 나오려면 멀었어! 내려가 이 망할 변태야.”
“태워줘! 태워달라고! 렌 볼 거야!”
아무리 좋아해도 망정이지 옆 사람 진절머리 나게 한다. 매일같이 얼굴 보는 사이에 생이별한 사람처럼 필사적이다. 미치고 팔짝 뛸 만큼 렌을 좋아하는구나. 서로 얼굴을 마주 본 그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오래 알아온 사이답게 노련하게 류제를 달랜 두 사람은 무대 위에서 리허설 하는 밴드 멤버들을 가리키며 류제의 관심을 끌었다. 반응이 좋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두 사람은 한시라도 빨리 공연이 시작하기를 기도했다.
리허설도 끝나고 공연 시간이 다가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거꾸로 앉은 류제가 귀를 쫑긋거리며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머야? 왜 인간들이 오는 거야?”
“렌을 보려고.”
“왜 보려고 하는 건데? 렌은 내 건데.”
뚱한 얼굴로 사람들을 노려보는 그 시선은 과거에 마왕이 인간들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불쾌한 시선과 오 퍼센트 정도 비슷했다.
렌 왈, 류제가 밴드 일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불평했을 때는 그런가 보다 넘겼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좌석을 점점 채워가는 사람들을 보며 으르렁거리던 류제를 진정시키기 위해 개다래나무를 흔들면서 시선을 돌리는데 누군가가 그들에게 알은척을 했다.
“어머. 그 아이는 누구인가요?”
“누구… 세라 선생님!”
하찮은 고양이 류제의 불쾌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던 세라는 까만 고양이 귀를 보고 처음엔 밴드의 기타리스트인 냥냥이의 동생인가 했다.
자세히 보니 류제와 닮은 듯하다. 하지만 류제에게는 혈육이 없다. 그녀의 짐작이 확실한 듯 비키와 유네 두 사람이 렌에게 전해들은 오늘 아침의 사건을 말했다.
놀란 세라가 입을 가리며 탄식했다.
“네에? 정말 류제인 건가요?”
“아침에 한바탕 소란이 있었나 봐요. 하아.”
“소란이라니 그야말로 렌과 어울리는 단어기는 한데 어쩜… 귀엽네요.”
쭈쭈쭈 혀를 차며 류제를 쓰다듬어 준 세라는 점점 허리가 수그러졌다. 류제가 세라를 빤히 쳐다보자 바닥에 쭈그려 앉은 그녀가 헤실헤실 웃어댔다.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서 귀여운 아이는 벗어날 수 없는 덫이었다.
오밀조밀하고 찰떡같은 피부는 물론이고 봉숭아물 들인 것 같은 입술은 잡아서 쭉쭉 괴롭히고 싶다. 커다란 푸른 눈에 고양이처럼 샐쭉한 동공이 세라를 경계하듯 훑고 짐승 귀가 쫑긋 섰다.
“뭘 꾸물거리는 거야. 네 좌석은 거기가 아니잖아.”
먼저 자리에 가있다가 세라가 오지 않자 찾아 나온 네네 슈만이 세라를 발견하고 눈썹을 까딱거렸다. 꾸준한 치료 덕분에 전쟁 때 다쳤던 눈이 나아서 안대를 푼 그녀는 제대하고 나서부터는 오렌지빛 머리를 길어서 생전의 포르테 들라크루아처럼 느슨하게 묶었다.
“오랜만이에요, 슈만 소령님. 잘 지내셨어요?”
“제대한 지가 언젠데 소령 타령이야.”
“죄송해요. 입에 붙어서.”
FM에 원리원칙주의자라 평생 군에서 썩을 것 같던 네네 슈만도 나라의 정책이 바뀜에 따라 강제로 자기 인생을 살게 되었다. 지금은 아가타에서 루비니 아로즈네그와 함께 일반인들을 상대로 트레이닝하는 일을 맡았다고만 들었다.
“어디서 고양이 냄새가 나는가 했더니 이거 무슨 일입니까.”
제대하고도 여태 네네 슈만의 부하 노릇을 하는 루비니 아로즈네그도 함께 공연을 보러 왔다. 양손 가득 잡다한 먹을거리를 들고 오던 루비니가 류제를 발견하자 꼬리를 흔들었다.
“이야. 그 사악한 마왕이 맞는 겁니까? 그 고양이녀는 앙큼한 짓을 잘도 하는군요.”
“역시 내 생각이 맞지? 기술 관장이 환장하겠군. 연말 선물인가 하겠어.”
“너무 귀엽지 않나요?”
노련한 어빌리터인 세 사람도 마왕의 고양이 수인화가 신기했는지 제자리로 돌아갈 생각을 않았다.
“귀엽긴 하네.”
그 네네 슈만조차 머리를 쓰다듬고 싶어 할 만큼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는 대단한 힘을 가졌다.
“귀엽네요.”
“와, 진짜 귀엽다. 어빌리터인가? 누구 애예요?”
고양이귀가 쫑긋거리는 머리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고 싶은 손길들이 점차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만지는 건 상관없고 렌이 나온다는 무대가 보이지 않았던 류제는 이리저리 비켜가며 고개를 내뺐다. 고양이 렌과 달리 사람을 상대로는 얌전해서 다행이었다.
“소란스럽군.”
오랜만에 신하들 몰래 나들이를 나온 왕족 두 사람은 손에 팝콘과 음료수를 한가득 안고 있었다. 곧 있으면 시작할 공연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데 그들의 옆자리가 번잡해서 사고가 난 것 같았다.
류제를 보겠다고 우글우글 모여있는 사람들은 남몰래 공연을 보러 온 니냐롯트와 미노타의 왕자 하늘바람의 자리까지 방해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네 이놈들, 썩 비키거라! 여기가 누구의 자리인 줄 알고!”
“루이나. 괜한 말 말거라. 더 시끄러워졌다간 공연이… 으음?”
선글라스와 가발을 쓴 셀러브리티들은 어리둥절하다가 군중들의 가운데에 있는 고양이 류제를 발견하고 기함을 토했다.
무대가 보이지 않으니 부들부들 떨며 불쾌감을 표하는 고양이 류제와 그런 그를 둘러싸서 귀엽다고 난리가 난 사람들. 인간들과의 협의 사항으로 류제가 항상 차고 다니는 초커에서 경계를 넘어선 마기를 감지하고 아슬아슬한 수치까지 올라온 붉은빛이 깜빡거렸다.
“렌은… 렌은 언제 와.”
난동을 부리면 쫓겨날 수 있다고 비키가 겁을 줘서 꾹 참고 있는데 성질만 건드려대는 인간들이 시야를 방해하는 데다 중요한 렌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을성이 없어진 류제의 목에서 경고음이 나니 고양이 류제를 설득한 자신이 없는 비키는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공연이 10분 내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자리에 앉아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지금 온대.”
류제가 폭발하기 전 아슬아슬한 찰나에 방송이 울려 퍼졌다.
“다른 사람들도 빨리 자리로 가세요. 아하하!”
세라는 물론 사람들은 사뭇 아쉬워하다가도 작별인사를 고하고 끝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을 상대로 마기를 쓰면 어쩌나 했는데 앞이 보이자 류제의 상태가 괜찮아져서 비키와 유네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했다.
“렌 오는 거야?”
“곧 올 거야. 잘 참았어.”
“렌 군이 대견하다고 말해줄걸?”
헤헤 웃은 유네가 류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람에 가려져서 못 봤는데 옆 좌석을 보자니 선글라스를 낀 두 남녀 무리와 변장을 하지 않은 루이나가 유네와 눈이 마주쳤다. 니냐롯트가 얌전히 손을 흔들었다.
“으앗!”
유네가 비명을 지르니 비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왕족 두 사람이 비키에게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폐… 폐……!”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비키가 간신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하? 이런 곳에는 무슨 일로…….”
“후원자로서 시간을 내봤다.”
“왕실에서 주최하는 자선행사기도 하니까요. 루이나 님도 납득해 주셔서 함께했습니다.”
하기야 셀로니아 가문 대표로 나온 비키는 VVVIP 좌석에 앉아있었고, 그 옆 좌석이라는 건 카페라테 치즈 캣의 후원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유네야 비키의 도움으로 이곳에 있지만 셀로니아가의 도움 말고도 니냐롯트 덕분에 좋은 연습실을 구했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그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무리 봐도 류제 신리처럼 보이는데.”
니냐롯트는 연말 휴가를 떠났던 류제의 상태를 조심스레 지적했다. 공연장에서 만난 것이야 충분히 설명이 가는데 이것 하나만큼은 지적하지 않으면 꺼림칙했다.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옷매무새와 머리칼이 엉망이 된 류제는 모르는 사람 보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침에 사고가 좀 일어났나 봐요.”
“렌 지미는 무사한가? 항상 이런 사고에 말려들었지 않은가.”
“덕분에 괜찮다고 합니다.”
류제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니냐롯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건방지고 게으르고 능글맞은 눈빛이 아니라 순수하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자니 니냐롯드도 그가 썩 귀엽다고 생각했다.
눈을 끔벅이며 선글라스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던 류제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비키의 옷을 잡아당기며 징징거렸다.
“렌은 언제 와? 왜 안 와?”
“그러니까 좀만 기다리면 온다고! 몇 번을 말해야 만족하는 거야?!”
비키가 확 짜증을 내는 걸 보니 저런 말만 죽어라 되풀이했다는 걸 쉽게 짐작한 니냐롯트는 말썽 없이 공연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았지만 말이다.
해가 지자 조명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했다. 무대에 설치된 장치로 아래에서 위로 올라와 등장한 다섯 밴드 멤버들이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가족과 함께 즐거운 성탄제 보내고 계십니까!”
“카페라테 치즈 캣,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렌, 레엔!”
항상 보던 친구들인데 공연장에서 보니 숙녀들에게 메이크업을 받고 올라온 그녀들은 썩 연예인 같았다. 렌도 마찬가지다. 류제는 렌에게 가겠다고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렌은 류제를 보지도 않고 더 먼 곳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소개는 또 나중에 하도록 하고, 시원하게 첫 곡 먼저 뽑아봅시다!”
드럼 카운트와 함께 두 번째 앨범에 들어간 고양이녀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연주되었다. 이펙터를 탁탁 밟은 고양이녀가 피크를 드높게 들었다가 좡좡거리는 음을 치자 사람들이 환호했다. 스피커에서 펑 터진 소리에 놀라 자지러진 류제가 털이 솟구친 상태로 얼음이 되어서 나뒹굴었다.
“자, 자. 류제. 렌이 노래한다. 저거 봐!”
“렌, 렌!”
스피커 소리에도 지지 않은 류제가 기어코 비키를 타고 올라갔다. 이 노래는 비키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였다. 휴일에 쉬려고 왔는데 팔자에도 없이 애랑 놀아주는 꼴이 되어버린 그녀는 나중에 돌아오면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렌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비키의 목에 앉은 류제가 좋다고 손을 흔들었다.
“뒷사람한테 민폐야! 류제! 내 목에서 내려와!”
“렌, 렌! 렌!!”
“류제 군, 착하지? 뒷사람이 안 보인대.”
함성 소리가 시끄러워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렌의 시선은 좀처럼 류제에게 닿지 못했다. 초커에 표기되는 인디케이터의 수치가 점점 상승했다. 저 무대에서 빛나며 활기차게 웃는 렌이 자신을 보지 않자 류제는 점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나 여기에 있다고!”
고양이 류제가 빼액 소리쳤다. 그 소리는 고양이녀의 날 선 기타 소리에 묻혔다. 본능적으로 날개를 꺼내 든 류제가 식식거리니 동공이 붉게 변했다. 초커에서 시끄럽게 알람이 울려대고, 근방에 있는 어빌리터들에게 슬렉터로 알람이 갔다.
“나, 여기에, 있다고!”
“와악. 류제 군! 빨리 그거 집어넣어!”
류제의 동공이 붉게 변화하고 고양이 귀가 달린 머리에 덤으로 뿔이 돋아났다. 유네는 직감적으로 더 이상 못 말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반이 흔들리고 새까만 그림자가 재경에게 달려들었다.
“날 봐!”
비키는 황급히 류제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고양이 수인의 꼴로 드래곤의 날개를 펼친 류제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고양이가 되어버린 류제는 합리적인 판단을 할 능력이 떨어졌다. 이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마왕의 공격은 다분히 경계할 만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세상에 새로 나타난 마족이 고양이 수인이라니, 이런 우스운 꼴을 3만 명이나 보고 있는 앞에서 드러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분장이라고 웃어넘기더라도 숨기지 않으면 곤란하다.
“야단났다.”
“저거 저거, 사고 칠 줄 알았어.”
“하아. 류제 제발.”
“이 곡 끝날 때까지만 가만히 있기를 바란 것도 사치였구만.”
귀에 꽂은 통신기기로 신호를 주고받던 카페라테 치즈 캣 멤버들이 서로 눈짓했다. 노래를 멈출 수는 없던 재경이 후렴구에 ‘다 함께’를 외치며 사람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이걸 어쩐다.”
“멈춰?”
“계속해. 절대 멈추지 마. 왕녀님이 보고 있는데 첫 곡을 망칠 수는 없지.”
간주 부분에 잠시 마이크를 끈 재경이 지시했다. 그는 저에게 날아오는 류제 신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레엔, 레에엔! 레에에엔!”
“비키여, 엄호 부탁한다.”
주저하지 않고 날아오른 니냐롯트가 기간트리카를 장갑했다. 그 지시를 들은 비키도 머뭇거림 없이 자리를 박찼다.
“알겠습니다, 폐하.”
멀리서 말썽을 부리는 류제를 지켜보던 세라도 통신으로 참전을 표했다.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네네 슈만이 그걸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세라 네가 뭘 어쩌겠다고! 넌 가만히 앉아있어.”
“하하하. 고양이 꼬마는 항상 말썽을 피우는군요.”
네네 슈만이 날아오르자 신이 난 루비니 아로즈네그가 짐승 특유의 힘찬 발짓으로 뛰어올랐다. 그 모든 모습을 보고 있던 유네는 울상이 되었다가 에라 모르겠다 그들과 함께했다.
“류제 군, 제발 돌아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있어서 부끄럽단 말이야.”
기간트리카로 멋지게 날아오른 건 좋다. 사정없이 꽂히는 사람들의 시선에 유네는 헬멧으로 얼굴이 가려지는데도 다 그녀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말썽을 피우는 류제를 저지하기 위해 사방에서 기간트리카를 장갑한 어빌리터들이 돌진하고 있지만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관객들은 저게 뭔 일이야 싶다가도 태연한 밴드 멤버들의 몸짓에 이벤트 같은 것인가 눈만 멀뚱멀뚱 떴다.
드러머 ‘가시’ 어빌리터가 무대 관계자에게 지시하자 마지막에 쓰려고 했던 꽃가루가 펑! 하고 터져 나왔다. 류제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유네의 바람이 차르르 관객석까지 그것을 배달했다. 그 틈을 타 류제의 검은 마기를 흩트려 놓은 비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환호성을 받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다. 곡예를 하는 것처럼 팬서비스를 한 비키는 사람들의 눈을 돌리도록 약한 불꽃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데웠다. 상승기류가 발생하여 꽃잎이 한번 더 퍼져나갔다.
시야를 가리는 틈을 타 재경이 류제를 향해 손을 뻗으니 마침내 류제는 재경의 품에 안길 수 있었다.
“렌!”
“어이쿠.”
악마의 날개를 숨기기 위해 친구들이 무슨 지랄을 떠는 중인지도 모르고 그저 좋다고 웃는데 재경은 헛웃음이 다 나왔다.
“내가 공연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빨리 다 집어넣어.”
인이어를 통해 보컬의 입장이 들려오자 연주를 계속하던 멤버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렌의 시선이 드디어 자신을 향하자 류제가 배시시 웃어서 정말 귀여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밑에 앉아서 손 흔드는 거 다 봤어. 그러니까 빨리 날개 집어넣어.”
“진짜 봤어?”
“눈에 제일 잘 띄는데 안 보이겠냐?”
말 잘 듣는 류제는 얌전히 용인의 모습을 봉인했다. 그러자 귀여운 고양이 수인 모습만 남았다.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재경이 류제를 높게 들자 그 귀여움에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여러분, 이번 행사의 마스코트를 소개합니다!”
에라 모르겠다 내지른 재경은 류제가 어리둥절해하든가 말든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곡이 끝나면 류제를 다시 관객석에 돌려놓아야 하는데 또 사고를 칠지도 모르니 걱정이다.
“그러니까 내가 마비시켜 놓자고 했는데. 진작 이랬으면 얼마나 편해.”
베이스가 페이드아웃 되는 타이밍을 봐서 ‘마비’ 어빌리터가 다가와 류제를 건네받았다. 지직, 뭔가 감전되는 것처럼 털이 솟아오른 류제는 마왕일 때와 달리 그대로 어빌리티에 당해 굳어버렸다. 드럼 소리가 이어지다가 펑 터지는 부분에 냥냥이가 이펙터를 바꿔 밟고 코드를 갈겼다.
“바로 솔로 부분으로 넘어가냥. 뭐든 좋으니 수습 멘트 좀 쳐냥!”
“카페라테 치즈 캣의 자선공연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성탄제를 기념하여 무대를 축하해 주러 온 친구들도 박수로 환영해 주세요!”
말했다시피 ‘카페라테 치즈 캣’은 유일무이, 전무후무한 어빌리터로 이루어진 밴드이다. 그들에게 어빌리터 친구들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는 걸 팬들도 인지했다. 성탄제를 기념하여 기간트리카 공연을 펼쳤다는 억지는 의외로 납득하기가 쉬웠다.
관객들이 하나둘 일어나 환호하고 박수를 쳤다. 오프닝 무대로는 딱 아닌가. 여러 대의 기간트리카가 무대를 둥글게 감싸며 관객들에게 각기 인사했다.
온몸이 마비되어서 꼼짝도 못하는 류제를 옆구리에 끼고 손을 흔든 재경은 식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든 수습이 된 듯하다.
“레에엔…….”
온몸이 지릿지릿하는 와중에도 렌을 부르는 류제를 흘긴 재경은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첫 곡이 끝났다.
몸이 굳은 류제를 데리고 무대로 내려간 비키는 바들바들 떨면서도 렌을 보겠다고 눈을 치켜뜨는 류제가 불쌍해서 대신 손을 들고 흔들어주었다.
혹시나 또 류제가 사고를 칠세라 공연을 즐기는 게 아니었던 재경과 친구들은 민폐를 끼친 류제를 탓할 수도 없었다.
“류제 신리, 진짜 나중에 두고 보자.”
논문이 잘 안 풀려서 스트레스를 풀러 왔던 비키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한 움큼 빠진 것 같았다.
간신히 성탄제 기념 공연을 마친 후 수습을 도와준 친구들에게 한정판 음반이라도 보내주겠다고 약조한 재경은 내년이 되어서야 볼 친구들과 세라에게 양팔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녀들이 류제를 귀여워해 줘서 한시름 놓았다.
“무사히 끝났구나.”
“처음만 요란했지 류제도 얌전하게 있어줘서 다행이야.”
고생했을 친구들을 배웅하고 대기실로 돌아온 재경은 떨어지지 않는 류제를 다독이며 아무 곳에나 걸터앉았다. 예정에 없던 기간트리카 난입 덕분에 모금이 엄청나게 모였다고 한다. 되도록 마스코트의 캐릭터 굿즈도 내달라고 하는데 여기가 CCC의 공연인지, 고양이 류제의 팬 미팅인지 곤란할 정도다.
“죽겠다. 다시는 못 해.”
재경은 바보라서 생각이 멀티로 안 돌아가는데 류제도 신경 써야 하고, 동선에 멘트에 가사까지 떠올리느라 머릿속이 터지는 줄 알았다. 자선행사라서 대충 즐기고 내려오면 되는데 이만큼 피곤한 공연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공연 때마다 이러면 아무리 마족의 몸이라도 못 버텼다.
“이 사건의 시발점으로서 뭔가 말 좀 해봐라, 냥냥아. 네 입장문 좀 들어보자.”
“하하하. 나는 그저 웃기냥.”
제 악기를 닦다 말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 고양이녀가 킬킬거렸다. 괘씸해진 재경이 그녀에게 남은 피크를 하나 던졌다. 조그마한 조각이 냥냥이의 머리에 툭 맞고 튕겨져 나갔다.
“웃음이 나오냐? 진짜 망할 뻔했구만. 후원해 준 왕녀님 보기가 미안해 죽을 뻔했다고.”
“네가 고양이가 되었을 때가 생각나서 말이냥. 그때도 난리가 아니었냥.”
하나같이 제가 저지른 일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면서 고양이녀가 잘도 파하하 폭소하니 재경은 어이가 없었다.
“나는 왜 끌어들여. 평범했던 거 아니었어?”
“평범? 그 렌 지미가 평범하다고?”
“그 대단했던 고양이 수인 사건 중 곤란하기론 그 다섯 명 중 렌 네가 제일이었어.”
다른 멤버들도 치를 떨며 손을 내저었다. 당시 고양이가 되어버린 비키를 담당했던 그녀들은 곁에서 고생하는 류제를 지켜보았는데 물론 공연장에 난입하는 류제도 버겁지만 고양이가 된 렌과는 비교 불가였다.
“덕분에 8반의 분위기가 뜨거웠지.”
“우리는 고작 하루 반 정도지만 류제는 무려 일주일인걸.”
“하기야. 고생은 류제가 더 했었지.”
다들 공감하며 맞장구를 치지만 재경은 공감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류제는 그때 이야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악기를 담고 있던 그녀들은 그때 사건의 산증인이지. 클렌징 티슈로 대충 얼굴을 지우고 있던 재경이 엉망이 된 티슈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물었다.
“내가 어땠는데 그래? 갑자기 궁금해지네.”
“새삼스레.”
“뭐 어때. 말해 봐.”
재경이 고개를 까딱하니 ‘마비’ 어빌리터가 소파 옆에 걸터앉아 먼저 말을 꺼냈다.
“사람이 싫다고 질색하는 고양이였지. 친구들은 네가 귀엽다고 만지려고 하고, 넌 도망치고. 류제가 엄청 스트레스 받았어.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건 좀 힘들었을 거야.”
“다가오는 사람이 싫다고 찡찡거리고, 만지지 말라고 발톱으로 할퀴고.”
“우리가 담당했던 비키 님과는 틈만 나면 싸우고.”
“친구 볼에 크게 상처도 냈었냥.”
공연도 무사히 끝난 겸, 매니저인 숙녀들이 공연 관계자들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은 김에 친구들이 과거 이야기를 늘어놓는데 그 내용이 제법 신랄했다.
“은근슬쩍 디스받는 기분이네.”
“디스 맞아.”
재경은 뚱하게 볼을 부풀었다. 고양이 사건 후에는 친구들하고 이상하게 흐트러져서 그런 말을 들을 새도 없었다. 다들 쉬쉬했던 것 같다. 지금 듣자하니 사고를 많이 친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재경이 움츠려들자 이제와 렌을 비난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던 밴드 멤버들은 그보다는 그때 있었던 렌 지미의 기막힌 행태를 들먹이며 웃어댔다.
“그런데 너는 류제가 나타나면 하트를 붙여가며 갸르릉거렸거든. 그지 냥냥아.”
“그렇냥. 내가 고양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걸 알 때부터 아주 자랑을 늘어놓았냥.”
“류제랑 네가 사귄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감이 확 왔잖아.”
“렌 너 이 자식, 진짜 류제를 좋아하는구나.”
낄낄거리는 걸 보자니 믿음이 안 갔다. 또 놀리는 줄 안 재경이 저를 끌어안고 있는 류제를 쓰다듬으며 버럭했다. 기껏 열심히 수습해 줬더니 저들끼리 이상한 모함이나 한다.
“왜곡하지 마! 그런 적 없어!”
고로롱거리며 잠든 류제는 고양이귀를 펄럭거렸다. 밴드 멤버들이 정색하며 혀를 찼다.
“진짜야. 뭐 하려고 거짓말을 해?”
“믿게 하려면 평소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든가.”
“믿든가 말든가냥. 류제가 너무 좋다면서 얼마나 자랑을 하더냥. 그걸 말한 건 렌 너인데 왜 내가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하는 거냥. 후우, 나는 너무 대단해서 탈이냥.”
고양이녀가 자기애를 표하며 스스로를 끌어안았다. 기억은 하나도 안 나지만 류제가 제립학교 1학년 초부터 짝사랑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나도 지금 어린애처럼 되어버린 류제가 걱정되어서 죽을 것 같은데 류제라고 다를까.
“난 안 믿어!”
“네, 그렇다고 칩시다.”
“아니 진짜로 그런 적 없다고!”
“예, 예. 렌 지미의 말을 믿는 사람?”
“저요!”
“다 믿는대~”
“안 믿고 있는 거 알거든?”
그녀들의 놀림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옛날의 재경이라면 속아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빽 소리친 재경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그녀들을 타박했다.
귓불이 새빨개진 재경은 제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밴드 멤버들의 설득을 포기하고 한숨을 쉬었다. 부끄러워서 일단 부정하고 보긴 했지만 어느 정도는 믿었다. 이것보다 더 말을 안 들었을 나를 류제가 일주일 동안 돌봐줬었다니.
재경은 류제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야 참아줄 수 있다며 못난 류제를 쓰다듬었다. 그르릉거리며 손길을 만끽하는 류제가 재경의 배에 코를 처박고 꼬리를 휘적거렸다.
* * *
“기분 나빠.”
아름다운 성탄절의 밤에 눈을 뜬 류제가 중얼거렸다. 귓가에 시끄럽게 울리던 그룹사운드 소리가 가실 무렵 새까만 하늘, 머리가 아파서 질끈 관자놀이를 누른 류제는 제 모든 기억이 거짓말이기를 바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는 드라코니스 입자에 당해서 생각이 바보 같아지니 몸이 통제가 안 되는 게 얼마나 짜증 났는지 모른다.
거기에 눈에 띄는 짓을 저지르는 걸 싫어하는 류제는 도대체 그 많은 인간들 앞에서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정신이 절로 까마득했다.
“바보가 되어서는 원래대로 돌아올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끔찍한 저주였어.”
재경에게 한 말이었지만 재경은 침실에 없었다. 제 손을 확인하던 류제가 멀리 보이는 거울로 얼굴을 확인했다. 그의 몸에 침입했던 냥냥이가 다루는 드라코니스 입자가 물러나서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왔다. 류제가 남의 통제에 있던 찌뿌둥한 몸을 두들겼다.
마침 샤워를 하고 나온 재경이 머리를 말리다 말고 물었다.
“정신이 들어?”
“엄청나게 부끄러워.”
“기억이 있나 보네. 난 하나도 기억 안 나던데.”
정신을 잃었던 아침의 도돌이표처럼 침대에 누운 류제는 재경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별말 없이 따라준 재경이 곁에 걸터앉으니 류제가 허리를 꼭 붙잡았다. 머리가 축축한 걸 본 류제가 손가락으로 헤집어 수분을 날려주었다.
수건을 멀찌감치 던진 재경이 침대에 풀썩 누워 류제를 올려다보았다.
“성탄제 내내 같이 있자는 소원을 이뤄서 좋겠네. 사악한 마왕의 소원을 이루어주다니 이 동네 신은 무슨 정신머리야.”
결국 제 고집을 이룬 류제를 핀잔한 재경이 쯧쯔 혀를 찼다. 류제는 그런 재경에게 가볍게 키스하며 응석을 부렸다.
“세상을 만들 사람을 신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너지 재경아.”
재경이 반박할 수 없는 말을 내뱉은 류제는 드문드문 떠오르는 미친 행동들에 열이 올라 침대에 엎드려 절규했다. 류제는 마왕이라서 재경과 달리 고양이었을 때의 기억이 모두 나는 모양이다.
“진짜 내일 알라마니 기술 관장한테 뭐라고 말하지.”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쓴 건 물론이고 냥냥이의 어빌리티에 당하기까지 했다. 귀찮아질 것 같아 머리가 돌겠다. 냥냥이는 이대로 도망칠 것 같고, 수습은 류제가 하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나간 일, 어쩌겠어.”
재경은 절망하는 류제를 달랬다. 재경은 질투 때문에 하루를 망친 류제가 얄미운 한편 좋았다. 뭐든 류제가 과거 비뚤어졌던 그를 위해 한 고생을 실감하니 류제의 고집을 무시하는 게 좀 미안했다. 고양이가 되어버린 사건에 한에서는 류제는 죄가 없지 않은가.
“자, 이 울보야.”
전부터 준비했던 것을 류제가 자는 동안 꺼내온 재경이 휙 던져주었다. 포장된 조그마한 물건이었다. 그걸 뜯어보던 류제는 내용물을 확인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그것은 한때 재경이 류제에게 주려고 했던 꾸물꾸물 시리즈의 캐릭터 검은 표범이었다. 류제가 변했던 고양이와 조금 닮은 것 같다. 천년이 넘는 기억 때문에 간간히 인간일 때의 기억을 망각하는 류제는 문득 재경의 과거를 엿보았을 때 보았던 그 심정을 떠올렸다.
이건 그때, 유네가 납치당했던 그날의 성탄제 때 재경이 차마 주지 못한 선물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류제의 생각을 짐작한 재경이 살짝 미소 지었다. 그건 재경의 세상에 있던 연말 성탄제와 비슷한 연휴에 하는 인사말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재경아.”
류제의 화는 당연히 스르르 풀렸다. 남들과는 다를지라도 제 방식대로 열심히 그를 좋아해 주는 노력이 장했다. 그리 표현하는 타입이 아니니까 이따금 불안해질 때 소소한 관심을 주어 감동하고 만다. 재경에게 쪽쪽 키스한 류제가 정말로 상냥하게 말했다.
“오늘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재경아.”
“오늘은 안 해도 돼. 배부르거든.”
묘한 분위기라서 잘 넘어갈 줄 알았는데 단번에 거절당한 류제는 머릿속에 데엥, 종이 쳤다. 하루 종일 시달린다고 피곤했던 재경은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베개 위에 머리를 안착하자마자 재경은 침을 질질 흘리며 꿈나라로 향했다.
“재… 재경아?”
답이 조용하다. 손이 갈 곳을 잃었다. 단호한 등짝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 류제가 무릎걸음으로 기어서 재경을 살살 흔들었다.
“재경아, 진짜 그냥 잘 거야?”
안타깝게 물어도 돌아오는 건 코를 고는 소리다. 이렇게 인과가 돌아올 줄은 몰랐던 류제는 크게 좌절해서 어쩌지도 못했다.
하루가 넘어갔다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입을 벌려 쿨쿨대다가 류제 몰래 미소 지은 재경은 자는 척 한쪽 눈동자를 뜨고 징징거리는 연인을 흘겨보았다.
다음 성탄절을 기대하라고, 류제.
(기간트리카 데이브레이크!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