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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4) (97/112)

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4)

단칸방처럼 좁디좁은 재경의 머릿속은 물론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설날에 혼자 납골당에서 할머니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후회와 좌절로 심정이 벅차 어울리지 않게 하소연을 하러 갔다가 일이 꼬일 줄은 누가 알았겠냐는 말이다.

실은 재경은 사고를 친 그날 류제가 눈을 뜨기 전부터 깨어있었다.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팠지만 술김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는 똑똑히 기억했다.

혹시 류제가 실수를 직감하고 혼란스러워하면 아무 일도 없는 척하려고 했었는데 류제의 행동이 예상외였다. 자는 척하고 있으려니 류제는 제가 한 짓을 제대로 안다는 양 기분 좋은 티를 냈다.

저를 무슨 애완동물 쓰다듬듯이 살살 머리칼을 헤집는데 이걸 어쩌나 싶어서 눈을 뜨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죽는 줄 알았다. 결국 눈을 떴지만 마주칠 수 없어서 커피나 마시자고 했다.

뜨거운 커피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어색하다. 침묵이 무겁다.

어쩔 줄 몰라 눈동자를 굴리는 류제를 따라 그도 눈동자를 반대로 굴렸다. 죄를 짓는 기분이다.

“이만 갈게.”

“데려다줄게.”

“됐어. 굳이.”

“걱정돼서 그래.”

엉거주춤하게 선 재경은 걸음이 어적어적 이상해서 류제도 그런 말을 했을 거다.

7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없다가 하룻밤 만에 뭐라도 바뀐 양 구는 류제도 이상하고, 그걸 냉큼 허락한 자신도 못마땅하다. 술김에 나와 버린 솔직한 마음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 일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 아니었나?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건가?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다. 분명 류제는 내게―

“멋대로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강요는 말아야지. 민폐거든.”

그가 그런 말을 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는 충분히 들었다. 사생활에 간섭받기 싫어하는 건 그를 무례하게 스쳐 지나간 사람들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경도 헛된 감정을 품어서는 안 되는 여전한 처지였다.

자기가 싫다고 선을 그어놓고는 왜 쉽사리 그걸 넘지? 여지를 준다는 말이 이런 건가?

다른 연예인의 열애설 기사를 본 승아 말로는 연예계는 동물의 왕국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는데 그게 사실인 건가? 연예인 가는 자리에 매니저도 따라가니까 매니저도 마찬가지인 거야?

저런 얼굴에 안 넘어오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류제도 제정신이 아니야. 사생활에 대해서는 윤 대표님 압력도 세니 만만한 나를 골랐다든가.

류제는 남자랑도 할 수 있었지. 어른이 되면서 하룻밤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생각하다 못해 류제가 농락하고 있는 게 아닐까 여긴 재경은 이건 류제가 자신을 시험하고 있는 거라고 납득했다.

좋아하지 말라고 했으니 잘 거부하고 버텨내면 곁에 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 안 받아들이면 되는 거다.

“하아.”

‘류제가 나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라는 생각을 납득할 수 없는 재경의 머릿속을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잠식했다.

과거를 까맣게 잊어버렸으면 잊은 대로 두면 될 것을 머리가 복잡했다.

이 감정을 수용하면 당장이야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다음은? 허무한 끝을 경험했던 재경은 두려움이 더 컸다. 여기서 더 좌절해 버리면 일어서기가 힘들 것 같았다.

안 받아들이기는 무슨. 곁에 있으면 그게 안 될 게 뻔하다. 일을 그만둬야 하겠지. 이 안일한 생활이 좋았던 탓에 지체했는지도 모른다.

어차피 류제의 곁에 있었던 건 당장 돈이 없어서였잖아. 저금도 적당히 했으니 내 길을 걸어야만 해.

오늘은 그걸 위해서 회사에 왔다. 대표와의 문자를 재차 확인한 재경은 불편하게 발을 떨며 과연 이 선택이 맞을 것인가 수많은 갈림길에 서서 고민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다. 인생은 혼자서 사는 거다. 재경은 누구에게도 기댈 마음이 없었다.

“왜 혼자서 밥을 먹어? 류제는?”

고요했던 주변에 소음이 터졌다.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옆자리에 우르르 앉는 친구들을 흘긴 재경은 이제 그녀들의 막무가내에 포기했다. 아무렴 제 코가 석 자인데 다른 걸 신경 쓰기엔 뇌 용량이 부족했다.

“오늘 프리야.”

“헉. 설마 회사에 밥 먹으러 온 거야? 이러다 우리 회사 구내식당 소문난 맛집 되겠네.”

“너희야말로 이 시간에 밥먹냐?”

재경이 심심하면 치근덕거리는 친구들의 질리지도 않는 행태를 흘겼다. 오늘은 솔라가 보이지 않는 데다 복장이 춤출 때 입는 복장이니 연습이 있는 모양이다.

“먹기는 무슨. 냄새라도 맡으려고 온 거지.”

“나 떡볶이 먹고 싶어, 재경아.”

무기력해 보이는 재경을 힐끗거린 세 사람도 힘이 하나 없었다. 듣기로는 곧 ‘DAYBREAK’가 유닛 활동을 끝내고 완전체로 컴백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는 건 그녀들의 식단 조절이 또 시작된다는 말이었다.

“어쩌라고. 안 사줄 거야.”

“치사해.”

일 대 삼 미팅하는 것도 아니고 줄줄이 앉아 재경이 밥을 먹는 모습을 구경하는 그녀들의 시선이 재경의 젓가락으로 향했다. 탐스럽고 오동통한 소시지를 집은 젓가락 끝이 재경의 입에 쏙 들어갔다.

저번에 몰래 과자를 사줬다가 데이브레이크 전담 매니저한테 들켜서 대표한테까지 소리 들었다.

하지만 밥심이 제일이라고 하는 할머니 밑에서 자란 재경이 보기에는 하루 밥 한 끼도 제대로 못 먹는 그녀들이 측은했다. 그녀들의 초롱초롱한 애교를 결국 못 본 척할 수 없는 재경은 아양을 받아주었다.

“하나씩만 먹어.”

허락이 떨어지자 그녀들이 냅다 소시지를 집어 먹었다. 걸 그룹이 아니라 걸신 그룹 같네. 고작 소시지 하나도 아껴먹는 그녀들은 보자니 화려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이다 싶었다.

류제 때문에 있는 거지 따지자면 재경에게는 그런 열정까지는 없어 꿈을 위해서라면 굶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친구들이 참 대견했다.

소시지를 준 답례인 건지 그녀들이 재경에게 걱정을 표했다.

“답지 않게 혼자서 청승을 떨기는. 무슨 고민 있어?”

“별일 아냐.”

“무슨 일 있는 거 맞잖아.”

특히나 나르는 류제의 생일날 재경이 류제에게는 말도 없이 사라졌었다는 것을 알고 불길한 낌새를 느낀 듯했다. 몇 번이고 개인적으로 괜찮냐는 메시지를 보냈었으니 걱정을 끼친 것 같다.

“척 보면 척인걸. 바른대로 털어놔.”

이 세계에 굴러먹으면서 키운 눈치가 더럽게 빠르다. 밥을 먹다가 개인 먹방 찍는 사람도 아니고 세 쌍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던 재경은 체할 것 같았다.

혼자서는 도저히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사항이기는 하지. 가만히 우물거리던 재경이 넌지시 물었다.

“류제는 자기 사생활에 간섭하는 걸 얼마큼이나 싫어해?”

“역시 류제 때문이었어.”

“정말 죄 많은 놈이라니까.”

“얼굴만 빼면 솔직히 쓰레기지 암.”

역시 그런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만 건가. 재경이 뜨끔 하는 얼굴을 보고 어림짐작한 그녀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내둘렀다. 친구니까 하는 말이겠지만 그 쓰레기라는 말에 재경은 흠칫했다.

“매니저들한테는 되게 딱딱했어. 업무적으로다가.”

“근데 재경이 넌 친구처럼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미나가 말을 덧붙였다. 그건 맞는 말이다. 동갑내기에 마음 잘 맞는 사이라면 친구라고 할 수 있겠지. 거기까지는 납득이 간다. 하지만 류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영역에 재경을 끌어들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건 왜?”

“아니, 그냥… 안 좋은 사람과 얽힐 것 같은데 말려야 하나 싶어서.”

“또야? 질리지도 않는다. 이번엔 또 누구야.”

말투를 듣자 하니 상대는 궁금하지도 않은 듯했다. 류제 사생활에 이상한 사람이 꼬였는데 그걸 재경이 봤다고 생각한 세 사람은 서로 머리를 싸맸다.

매니저, 혹은 친구로서 말려주는 것도 맞기는 한데 그건 류제의 사생활이니까 매니저 입장인 재경이 뭐라고 해도 류제가 싫어하면 도리가 없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게 나아.”

“나중을 위해서라도 편하지.”

“맞아. 쓸데없이 예민하거든. 대표님이 뭐라 그러면 류제가 고집부렸다고 하면 돼.”

그녀들은 류제의 행태에 도가 튼 듯했다.

“적당히 맞장구나 쳐줘. 힘들어하면 그때 술 한잔이나 하고.”

“어쩌겠니. 사랑을 우습게 보는 애인데. 네가 신경 쓸 필욘 없어.”

“그런 주제에 로맨스 드라마 주인공은 잘도 해요. 뼛속 깊은 돈의 노예라니까.”

그건 재경도 공감한다. 그들에게 조언을 들으니 재경은 더 자신이 없어졌다. 다가와 주며 하던 류제의 말과 행동에 진심이 없다고 생각하자니 씁쓸하다.

그럼 류제가 똥 밟았다는 걸 인지하고 물러설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내가 진짜 똥차처럼 굴어야 한다는 건가.

하아, 류제 이 자식. 진짜 사람 귀찮게 구네. 가만히 있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자기도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왜 이제 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원.

모르는 척하면 내버려 둘 줄 알았더니 늪에 빠졌다. 류제가 저러는 것도 그를 시험하는 거다.

“그런데 재경 군, 왜 류제 군한테 말 안 하는 거야?”

“뭘.”

“고등학생 때 친구였다는 거.”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서 가만히 있었지만 류제는 여태 눈치챌 구석이 없었다. 알게 되면 놀려주려고 오만 가지 계획을 다 세웠는데 시시하다. 별 기대 안 하는 재경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새까맣게 잊어버린 바보한테 말하고 싶지 않고.”

“이상하네. 아무리 그래도 우리도 기억하는 걸 류제가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낸들 알아. 내버려 둬. 어차피 난 그만둘 건데.”

“그만둬?”

다 부질없었던 재경이 손을 내젓다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그만둔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관심 없는 것은 순식간에 제 세계에서 꺼뜨려 버리는 류제의 성격을 아는 재경은 굳이 파헤쳐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자식일 테니 딱히 말하지 않아도 거절한 걸 알아차렸겠지. 그 자식도 그런 식으로 거절했잖아. 그래야만 하는데 이상하게도 류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제도 봐라.

분위기를 타서 류제가 또 기어올랐다. 재경은 안 된다며 밀쳐냈다. 이러다가 그만 건너면 안 되는 강을 건너 또 몇 년간 혼자 속병을 앓을 것 같았다. 하지만 류제는 거절도 거절로 들어먹지를 않았다.

“기분 좋았잖아.”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자신감은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재경은 저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싫은 건 아니었으나 죄책감이 마음에 걸렸다.

“싫다고 거절 안 하는 걸 보면 너도 나 좋아하지?”

“네가 막무가내로 구니까 그러지!”

“그래서 싫었어?”

류제가 손바닥에 키스했다. 요망한 얼굴이 재경을 훑어보며 사랑을 탐했다. 거절을 말로 하든, 아니면 그대로 입 다물고 있든 알아서 하라며 저돌적이게 굴었다.

단순해서 좋겠다.

“싫으면 거절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비취색 눈이 욕망에 담겼다. 재경은 아무래도 저 얼굴에 약했다.

저 눈동자만 보면 옛날 생각이 떠올라서, 그때 그 좁은 골목에 둘이 숨어 끌어안고 있던 그때의 기억이 나서, 키스할 듯이 마주 보던 그때로 돌아가 심장이 터질 듯해서 늘 거절할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재경은 정면 돌파하는 류제를 어떻게 말려야 하나 골머리가 썩었다. 누가 자기 이름을 부르면서 사랑해 주는 것도 근질근질거리고 주제도 모르게 기쁘다.

아직도 포기가 안 된 건지 혼자 고등학생 그 시절 머물러 있는 케케묵은 오래된 감정이 밝게 피어나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라면 그런 거겠지. 항상 그의 인생 어딘가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류제가 눈앞에 있었다. 지독한 짝사랑이 7년이다. 이 감정은 정말로 묵혀두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신재경은 뼛속 깊은 겁쟁이였다. 받아들인다고 해서 류제를 책임질 방법도 몰랐다. 어울리지 않는 것 같고, 비정상이란 걸 아니까 마음이 불편하다.

“우리 말 무시하지 말고 대답해! 야 신재경. 너 진짜 그만두는 거야?”

“왜 그만두는 건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그래. 이따 대표님 만난 후에 결정할 거야.”

“류제 때문이야?”

그녀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재경은 검정고시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서 일을 그만두겠다는 변명을 미리 생각해 두었다.

그러는 편이 죄책감이 덜하고 류제에게 미안하지 않다. 원래 그가 가려던 꿈은 요식업계였으니까. 안일한 마음으로 류제 곁에 있다가는 재경만 상처받을 것 같았다.

“시간 됐다. 갈게.”

“류제는 신경 쓰지 마. 기왕이면 조금만 더 같이 일해줘.”

“안 쓸 수 있다면 말이지.”

제 고민의 원천이 류제 그놈인데. 그래도 함께 있어줘서 고마운 친구들에게 그가 손을 흔들었다. 식판을 정리하고 힘없이 떠나는 재경의 뒷모습을 보던 그들은 솔라가 오자 손을 흔들며 환영했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해?”

“류제가 또 사고를 칠 것 같다는 이야기.”

“재경이가 매니저 그만둘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솔라도 단번에 감이 왔는지 감탄사를 흘리고는 그녀들을 위해 사 온 아메리카노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류제가 사고 치는 거야 흔하지만 그만둔다니 아쉬울 것 같다.

“왜 류제가 재경이만 기억 못 하는 걸까?”

재경은 당시 류제가 처음으로 소개해 준 동성 친구였다. 소문이 나쁜 옆 동네 전문고 학생이라서 걱정했는데 입만 까칠하지 나쁜 애는 아니라서 신기했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런데 가장 친했을 류제만 잊어버렸다니 괘씸하다.

“그때, 그것 때문 아냐?”

“어떤 거?”

솔라가 한 가지 그녀들이 깜박하고 있던 이야기를 꺼냈다.

“지하철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지. 뇌진탕인가, 스트레스 때문인가. 병원에서 깨어났더니 기억이 날아갔다가 며칠 후에 돌아왔었던 것 같은데.”

“아 맞다!”

그 일로 구급차에 실려 갔던 류제가 근 한 달 동안의 기억을 잊어버린 적이 있었다.

지식이 아니라 사람에 관한 기억을 잊어버려서 일상으로 복귀가 가능해질 때까지 병원에 다닌다고 고생을 했었다.

놀라 병원에 달려갔더니 아무렇지 않게 굴어서 그런가 보다 넘어갔었는데.

“재경이도 그때쯤에 만났었지. 완전 잊고 있었어.”

그때 재경을 잊어버리고 만 것인가. 재경은 류제가 아팠다는 사실을 몰랐다.

과연 이걸 말해줘도 될까. 류제에게? 아니면 재경에게? 그녀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친구들이었다. 승아가 일단 핸드폰을 들었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가려운 귀가 좀처럼 긁히지 않는 류제가 면봉으로 푹푹 쑤셔댔다. 다음 작품을 고르는 중이라 대본을 읽고 있던 중에 귀가 너무 가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혹시 재경이 그의 흉을 보고 있는 거라면 기분이 좋았다.

놓치고 싶지 않아서 최선을 다해 들이대고 있는데 도통 넘어올 기색이 없으니 조급해져 손이 뻗쳤다. 조금만 상냥하게 굴어도 넘어오는 사람이 천지였던 류제는 좋아하는 사람을 꼬드기는 법에는 무지했다.

이론은 없고 마음만 앞서니 오기가 생겨 이래도 반하지 않을 거냐는 심보로 마음을 드러냈지만 흔들리지 않은 심지가 굳건해서 까마득하던 찰나다.

그런데도 막상 만지면 거절하지 않잖아. 하물며 남자끼리인데 거기서 거부감을 느꼈으면 일을 그만두고도 남았겠지. 아니면 고소를 한다고 하거나, 기자에게 제보를 한다거나.

애정 표현에 서툰 건가 싶어도 잘 모르겠다. 다음 날이 되면 없었던 일 취급하는 재경은 자기 할 일만 했다. 심경이 복잡해진 류제는 암만 노력해도 재경과 사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괜히 그런 말을 해서 더 의식하지 않는 게 아닐까. 류제는 쓸데없는 부분을 콕 짚어 후회했다.

[(승아): 야. 바빠?]

핸드폰에 진동이 울리자 냅다 확인한 류제는 제 친구들이 있는 단톡방임을 확인하고 짜게 식었다.

[왜?]

[(승아): 안 바쁘면 우리랑 좀 이야기해.]

[재경이 데리고 놀아.]

[(미나): 재경이 대표님 만나러 올라갔어.]

[(나르): 매니저 그만둔다는 거 사실이야?]

“어?”

대본을 내던진 류제가 메시지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전혀 들은 바가 없었던 류제는 황급히 톡을 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어디야?]

[(미나): 어디긴. 회사지. 저녁 연습 있어서 기다리는 중.]

그럼 재경은 회사에 출근한 건가? 류제는 홀린 사람처럼 겉옷을 걸쳐 입고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다급해진 그는 차의 시동을 걸고 타이어를 미끄러뜨리며 핸들을 돌렸다.

그만둔다는 말은 못 들었다. 앞에서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 공부를 가르쳐준다고 해도 온갖 핑계를 다 대며 도망치려던 재경에게서 느낀 불안감의 정체가 이거였다.

실은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었는데 눈이 먼 내가 무시하고 만 거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재경에게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욕심이 화를 불렀다. 설날 때 사고를 친 이후에 느꼈던 감각대로 그 사건을 덮어두었어야 했다. 모르는 척했더라면 재경은 떠날 마음을 품지 않았을 거야.

아냐. 재경은 언젠가 지금처럼 말도 없이 그만둔다고 통보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이래서 계약서상으로 얽혀있는 관계가 싫다. 한순간에 증발해 버리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알면서도 포기할 수가 없다.

하지만 놓치기 싫었어. 손 한번 뻗어보지도 못하고 잃으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물론 옛날의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경이 매몰차게 거절해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싫어. 나는 한 번도, 한 마디도 제대로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는걸.

“재경아!”

카페로 들어온 류제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르가 손을 번쩍 들어 류제를 불렀다. 곧바로 달려온 류제가 그를 찾았다.

“와, 빠르다.”

“재경이는? 그만둔다니 무슨 소리야. 누가 그래?”

숨을 헐떡거린 류제가 주변을 먼저 둘러보았다. 재경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만둔다고 하는지는 들었어? 무슨 사고 쳤대?”

사고는 류제 네가 친 거지. 그녀들의 시선이 사나워졌다. 류제는 저들끼리 똘똘 뭉친 그녀들을 보며 ‘또 왜?’라고 항변했다.

“류제 군, 혹시 재경이 보면 옛날 생각 안 나?”

“옛날 생각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설마 재경이 친구들에게 나와의 일을 말한 것인가. 그러면 뭐 어쩔 건가. 기정사실이 되는 거면 재경이 자기 발목 자기가 잡는 거지. 아니, 내가 발목을 잡는다는 건 아니고.

“같이 노래방 간 거라든가 있잖아.”

“노래방은 같이 간 기억 없는데. 노래를 잘하긴 했지.”

영 감을 잡지 못하는 류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재경이는 어디 있냐니까?”

“대표실에. 진짜 기억 안 나?”

“아까부터 진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재경과 함께 일하게 된 지는 이제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연예계가 바뀌는 속도가 빠르다지만 1년이면 옛날이라 부를 것도 못 하는 시기 아닌가.

친구들에게서 영문을 모를 말을 들은 류제가 감을 못 잡자 미나가 기가 차서 숨을 들이켰다.

“어떻게 알긴. 고등학생 때 같이 놀았으니까 그렇지. 역시 잊어버렸던 거구나.”

“잊어버려? 내가?”

“너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학교 근처 전문고에 다니던 애랑 잠깐 어울렸잖아. 우리 소개시켜 준다고 같이 노래방도 가고. 사진도 찍고.”

미나가 그때 함께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가운데에 있는 사람은 류제 그와 재경이었다.

“말도 안 돼.”

류제의 눈이 점점 커졌다. 흐릿하게만 느껴지던 첫사랑의 감각이 그의 얼굴 위에 덧씌워지며 선명해졌다.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 앳되지만 사랑스러운 그런 모습이 왜 낯설지 않나 했더니. 설마 재경은 알면서도 가만히 있었던 것인가.

당장 재경을 찾아야 했던 류제는 답하지 않고 뛰었다. 짐작 가는 때가 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이유를 모를 뇌진탕으로 지하철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는데 지하철을 타고 있던 이유나 몇 가지 사소한 기억을 잃은 것 말고는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어서 그만 잊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붙들고 대표실까지 달려가니 윤 대표와 재경이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장 말리기 위해 문고리를 잡는데 마침 윤 대표가 말했다.

“그럼 다음 달까지만 하는 걸로 알고 있을게.”

“죄송합니다.”

“아냐, 나도 3개월 정도만 생각했는데 오래해 줘서 고맙지. 그래도 아쉽네. 공부 열심히 해.”

주저 없이 문을 젖히고 들어간 류제가 당장 재경에게 다가가 손목을 낚아챘다.

“잠깐만요, 대표님. 재경이 안 그만둘 거예요.”

“뭐? 갑자기 왜―”

“안 그만둬요. 나한테는 그런 이야기 한 마디도 안 했어. 그만두면 나 다음 작품 안 할 거야.”

고집을 부리는 류제가 애꿎은 포르테를 노려보았다. 난감해진 포르테가 재경에게 물었다.

“상의된 게 아니었어?”

재경은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거짓말이 들통난 사람처럼 입을 다문 그에게 포르테는 사직서를 돌려주었다.

“하아, 일에 순서라는 게 있지, 먼저 담당 배우에게 말을 했어야지. 이건 그 후에 받을게.”

“하… 하지만 대표님……!”

“잠깐 따라와.”

반항하는 재경을 붙잡은 류제가 대표실을 나섰다. 그들이 들어간 곳은 처음 재경이 계약서를 작성하던 빈 사무실이었다.

숨이 차오른 류제가 말도 없이 그만두려고 한 재경을 노려보았다. 그만큼 싫었던 건가 떠올리면 미안해서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었다.

“나 때문이야?”

류제가 물었다. 입을 다물던 재경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네가 상관할 건 아니야.”

재경은 냉정했다. 류제는 냉정해지고 싶지가 않았다. 재경이 보이는 건 같잖은 연기다. 붉어진 귓불이나 떨리는 목소리는 당당하지가 못했다.

숨을 들이켠 류제가 그 점을 지적하기 위해 입을 여는데 재경이 가로챘다.

“뭐… 덕분에 다시 일어날 용기도 생겼으니 감사하다고는 생각해. 근데 나보다 좋은 매니저는 많을 거 아냐. 여기까지만 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불편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만할게. 그러니까 그만두지 마.”

그것이 류제의 최후의 방법이었다. 싫었더라면 진작 밀쳐냈었어야지. 류제는 재경과 마음이 달랐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받아들이는 재경의 교태를 보자면 서로 통한 것이 확실했다. 그런 달콤함에 속아 넘어간 게 죄라면 류제는 죄를 지었다.

끝까지 모르는 척할 셈인지 재경은 류제를 밀쳐냈다.

“당장 그만두는 건 아냐.”

“계속 일해주면 안 돼? 응?”

물러서지 않은 류제가 재경의 양 손목을 잡고 매달렸다. 좋아한다며 귀찮게 굴었던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해서 포기가 안 되었다.

류제는 무례했던 그녀들이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도 바뀌지 않는 사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용기를 낸 게 아닌가.

“내가 그렇게 싫었던 거야?”

남에게 거절당하는 것이 이렇게 마음이 아플 줄은 몰랐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포기해야 한다는 현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혹여 나를 돌아봐 줄지도 모른다는 어렴풋한 희망이 사람을 붙잡고 심정을 뒤흔들었다.

다 자기 탓으로 돌리려는 류제가 미웠던 재경은 참지 못하고 외쳤다. 이 이상 재경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널 좋아하면 안 된다고 말했잖아!”

울부짖는 재경의 귀가 새빨개졌다. 재경도 최선을 다해서 류제의 곁에 있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었더라면 곁에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재경은 이 이상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랬으면서 전부터 나를 시험하려고 하고. 기억도 못 하는 주제에 놀리기나 하지. 내 쪽에서 떠나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어차피 넌… 넌 또 나 같은 건 새빨갛게 잊어버릴 텐데!”

화를 내는 재경에게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류제는 친구들이 전해준 말을 떠올렸다. 잊어버렸다니. 정말로 이 사람과 함께했던 과거를 잊어버렸던 건가. 분명 지금처럼 좋아했을 것이 뻔한 이 사람을.

“재경아.”

미간이 찌푸려지며 흐릿한 기억이 순간 선명해졌다. 녹음이 스며든 나뭇잎이 저 머리칼 위를 스치며 벤치에 떨어졌다.

너무너무 좋아해서 고집을 부리며 함께 있으려고 했겠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서로 부끄러워서 어쩌질 못했을 그도 역시 류제를 좋아했던 게 틀림없었다.

지금 맞닥뜨린 이 순간이 그가 부정하던 운명의 한 순간일까. 송곳으로 정수리를 찌르는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이 고통은 익숙했다.

드디어 기억이 났다. 참을 수 없이 어지러워진 류제가 비틀거렸다. 재경에게 손을 뻗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를 걱정하는 재경의 얼굴이 멀어져 갔다.

누군가가 울부짖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망가졌던 기억이 조금씩 수복되었다. 누락된 기억이 이어 붙여졌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소문이 어떻게 난 건지 주변은 물론이고 학교 내에서도 류제의 존재로 소란이 일었다.

연기자가 되기 전 모델 일부터 시작했던 그는 5월쯤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학교생활에 질려가고 있었다.

사근사근한 척 연기하고 좋은 사람인 양 웃어주면 인생에 트러블이랄 것이 없던 그는 하루하루가 따분했다. 수많은 만남과 관심과 떠들썩함은 그의 존재를 파묻어 버리는 것 같았다.

연락처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하루가 멀다고 메시지와 전화가 쏟아졌고, SNS에서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눈을 빛내 숨이 막혔다.

숨을 곳이 없었다.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던 류제는 태생부터 지금까지 평범했던 적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떠올리자 깊게 상심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생활하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외모로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 점은 사춘기의 섬세한 마음을 망가뜨렸다.

하물며 동성 친구와 평범하게 어울려 다니며 또래처럼 스트레스를 푸는 여건도 되지 않았다.

그의 겉모습이 노출되는 곳은 매체와 인터넷이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쏟아지는 원초적인 관심과 표현은 정신을 병들게 했다.

과연 이 길이 맞는 건가 싶던 류제는 졸졸 흐르는 개천을 보며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 문득 사람이 없는 곳까지 와버린 것 같다. 우르르 몰려 나쁜 짓을 하고 있던 다른 고등학교 학생과 시비가 붙어서 곤란했던 차였다.

귀찮아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류제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둔덕 위에 있던 어떤 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것도 잠시, 앞에 있던 학생들이 류제를 밀치며 금전을 요구했다. 그냥 주고 가면 끝나는 건가. 지갑을 꺼내려던 류제는 눈앞의 사람이 흉곽을 걷어차이자 놀라 말을 잃었다.

“뛰어!”

그의 손목을 강하게 쥔 뜨거운 손길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시비를 건 것도 이 근방에서 질이 안 좋은 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생이었고, 구해준 것도 같은 학교 학생인 듯 교복이 같았다.

햇빛을 받으면 밝게 변하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딘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고. 독한 커피라도 마신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다.

뒤에서 달려오는 아무래도 좋은 놈들은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앞에 있는 자는 분명 그와 눈이 마주쳤던 그 학생이었다.

정신없이 뛰다가 육교에서 지쳐 나가떨어진 그들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차 소리가 시끄러운 가운데 숨이 차는지도 몰랐던 류제는 그때서야 콜록거리며 심장 소리에 먹혔던 주변 소음이 들렸다.

진정이 되자 벗어놓았던 가방을 다시 걸친 학생은 더웠는지 조끼를 벗어 가방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박았다. 그는 앉아서 쉬고 있던 류제에게 가만히 경고했다.

“그땐 무시하고 사람 많은 데로 가. 쫄보 새끼들은 우르르 몰려다니면 자기들이 뭐라도 되는 줄 알거든.”

퉁명스럽게 말한 그는 류제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더니 더 이상 볼일 없다는 듯 그대로 떠났다. 도움을 받았으니 통성명이라도 하려고 했던 류제는 무관심을 표하는 사람 때문에 어안이 벙벙했다.

평소와 다른 날에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집에 와보니 렌즈 한쪽이 빠져있었다. 도수가 없어서 없어졌는지도 몰랐다. 류제는 그제야 왜 그 학생이 그를 별난 놈으로 보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 애의 이름표를 제대로 볼 걸 그랬다. 강력했던 기억은 시끄러운 폭포 속에 잠겨 산만했던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그와 다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학교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그 학생이 입었던 것과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은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지만 그 학생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날을 계기로 뭔가 바뀔 것 같았던 류제는 내심 아쉬웠다.

그로부터 며칠 후였나. 소나기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이었다.

윤 대표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잠시 저녁을 함께 먹었던 류제는 숙소로 돌아가려다 우연찮게 그 학생을 발견했다. 그는 쏟아지는 비를 피할 생각도 없이 그네에 앉아 빵을 먹고 있었다.

말을 걸려고 했으나 슬퍼 보여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불이 켜진 아파트 안에서 아른아른 움직이는 인영들이었다.

첫 만남도 지금도 스쳐 지나가는 우연이었을 뿐이니 그대로 가버리면 될 것을, 류제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면 류제도 숙소에 혼자 남아 똑같은 내일을 기다려야 했다. 매니저라는 사람이 이따금 찾아오지만 그 사람은 무서운 데다 미성년자라고 사람을 얕봐서 싫었다.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바에는 한번 용기를 내 보는 게 어떨까.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지도 모르지. 다리가 저절로 움직인 류제는 그에게 말을 걸기 위해 변명거리가 하나 필요했다.

“먹을래? 1+1이라 하나 남아버렸네.”

근처 편의점에서 우유를 두 개 산 그는 선의의 거짓말로 입을 열었다.

“뭐야?”

햇빛 냄새가 날 것 같은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 눈물을 쏟아냈다. 불쾌해 보이는 그는 류제를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이 외모로 사람들의 기억에 잘 남지 않은 적이 없었던 류제는 상대가 남자라서 그런 건가 짧게 미소 지었다. 그만큼 관심에 질려있던 주제에 저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실망하다니 웃기지도 않았다.

아니면 그의 또래인 이 학생은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을 만큼 낙심한 것일지도 몰랐다.

“여기서 뭐 해?”

“그냥 있는데.”

“안 추워?”

“몰라.”

옆에 있던 빈 그네에 앉은 류제도 금세 젖은 꼴이 되었다. 시답잖은 대화를 하다 보니 그의 이름이 재경이며, 이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류제는 그가 아파트로 돌아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해가 진 어두운 밤에 비가 그쳤다. 우산을 탈탈 턴 류제는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는 것을 잊어버렸다며 다음을 기약했다.

우연을 가장한 그는 재경과 여러 번 만남을 이루어냈다. 찾고자 마음을 먹으면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친구가 없어 보이는 그는 혼자 다니기를 좋아했는데 그렇다고 왕따를 당하는 건 또 아니었다.

함께 다니다 보니 아무도 곁을 허락하지 않았던 들고양이가 손길을 허락했다.

왜 하필이면 재경이었냐는 물음에 류제는 답할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순간 꽂혀버린 듯 볼 때마다 신선했다.

아무에게도 알려주고 싶지 않았던 생각도 재경에게는 말할 수 있었다. 그 대가를 바라듯 류제도 재경의 마음을 알기 원했다.

언젠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재경을 보았던 류제는 아이돌을 준비하던 제 친구들을 소개해 함께 노래방도 갔다.

줄곧 수업을 땡땡이쳐 학교에서 도망가던 재경도 류제를 만난답시고 등교하게 되었다. 조금씩 웃게 되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재경이 웃으면 류제도 행복했다. 그 마음은 점차 첫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박혔고, 작은 골목에 숨어 입술을 맞대 서로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 또한 확인했다.

어린 날의 치기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 나이대 고등학생처럼 보이다가도 문득 멀리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재경을 단단히 붙잡아 두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세월이 지난 후에도 지금처럼 서로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존재로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가본 적 없어? 진짜?”

“어, 왜?”

6월 말에 재경의 생일이 있다고 했다. 놀이공원을 가본 적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무슨 사정이 있었던 건지 궁금했던 류제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뜸을 들이던 류제가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럼 같이 놀이공원 갈래? 그날.”

류제가 그의 손을 살짝 잡았다. 재경은 놀라 귓불을 붉히며 움찔했지만 손을 떨쳐내지 못했다. 조금 긴장한 듯한 그가 류제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다른 친구들이랑?”

“아니, 단둘이서.”

그러자 안도하는 모습에 심장이 뛰었다. 저 시선, 앳된 얼굴과 서툰 감정 표현이 사랑스럽다. 고양이 같은 눈매에 눈보다 작은 눈동자로 인한 장난꾸러기 인상이 심장을 잡아먹었다.

“그때…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답답한 치기를 참지 못한 류제가 제 욕심을 표했다. 이 소중한 마음을 말하고 싶었다. 재경도 충분히 같은 마음일 거라 확신했지만 떨린다. 재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제는 붕 뜬 재경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이 손에 감겼다. 그날에는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란다.

하늘이 맑았다. 손에 꼽으며 기다려왔던 날이다. 잠을 설친 류제가 며칠 동안 연습했던 머리 손질을 마쳤다.

거울을 살핀 그는 오늘만큼은 외견에 빈틈없이 신경을 썼다. 남들처럼 재경이 이 얼굴을 좋아하기를 바랐다.

“완벽해.”

만반의 준비를 마친 그가 집을 나섰다. 그러다가 뭐였더라. 불현듯 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큰 충격이 그를 때렸다.

무언가로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던 그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비틀거리며 넘어진 그를 사람들이 놀라 쳐다보았지만 류제는 어지러운 정신을 물리치며 지하철을 탔다. 간신히 자리에 앉은 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약속 시간의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는데 재경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그도 지금쯤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을까, 기대감에 잠을 설쳤을까 궁금하다.

공원이 있을 지하철역까지 다다르려면 거쳐 지나가야 할 역들이 남았다. 아까 그 이상한 충격이 가시질 않았는지 이명이 들렸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제 것이 아닌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와 사람을 괴롭혔다.

“저기, 괜찮아요?”

잠시 멍청해진 그는 올라오는 두통을 참을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과호흡으로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소리가 두 개로 중첩되어 귓가에 웅웅거렸다.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지하철을 왜 타야 했더라.

생각이 멈추는 것 같았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련한 외침 속에서 그는 이 감정을 잊어버렸다.

류제는 알 수 없는 기억에 집어삼켜졌다. 울부짖는 사람은… 그였다. 피 냄새가 나는 듯하고 이상한 주문 같은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속삭임은 류제에게 저주를 내뱉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너는 죽는다. 네가 없으면 존재하지 못할 하찮은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너와 내가 만난 이 세상은 사라져버리고 만다.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된 길로 가서 그런 거야. 사라지지 말아줘. 분해되어 사라지는 세계 속에서 홀로 발버둥 쳐보아도 닿을 수 없다. 가지 마. 렌, 렌.

환상 속의 그는 욕심이 많았다. 외롭고 싶지 않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었다.

가져서는 안 되는 것에 탐이 났던 그는 용서할 수 없는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방해되는 사람을 모두 죽여버리면 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그래서 그는 소중한 친구들을 죽였다. 속이 다 시원했다. 겁에 질린 눈앞의 소년은 누군가 닮았다. 재경… 재경아? 재경이 누구였더라. 렌 이거 봐. 난 성공했어. 드디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다고.

“너는 틀렸어.”

류제는 기뻐서 웃었지만 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은 그를 혐오스럽게 쳐다보았다. 류제는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틀리지 않았다. 마침내 옳은 선택을 했다. 방해되는 모든 것을 없애면 단둘이 지낼 수 있었는데 그게 왜 틀린 선택이란 말인가.

귀에는 어떠한 비난도 들어오지 않았다. 성공한 것은 그다. 상대의 눈동자에서 적의가 담겨도 상관하지 않았다. 렌이 절망해도 소용없다. 그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중요했다.

“내가 이겼어. 이겼다고, 로라 하놋!”

렌에게 외쳤다. 왜 그를 로라 하놋이라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뭐든 그는 승리했다. 증오스러운 인간들은 모두 죽였으니 이 세계는 그의 것이다. 영영. 영원히.

“미안해, 류제.”

그런 류제에게 렌이 숨겨두었던 나이프를 꽂았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위치에 있던 중오의 핵은 단번에 저격당했다. 어째서 그가 그것을 알았을는지는 알 수 없다.

류제는 배신감에 울부짖었다. 무너져 내리는 영혼이 발버둥을 쳤다. 소멸해 가는 그를 보며 렌이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분명 잘 될 거야.”

“하지 마. 그만둬, 렌!”

함께 있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다 자기 탓이라고 절망하는 렌은 그 나이프로 제 목을 찔렀다. 그의 이상으로 이루어진 성이 무너져 간다. 거대한 대리석이 작은 육체를 짓이겼다.

무너져 가는 몸이 세상이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렌이 없는 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원히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정해진 선택지를 따라 끝나고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이런 건 세계가 아니야. 렌을 놓쳐서는 안 돼. 그는 렌의 흔적을 찾아 끊어져 가는 평행 세계를 좇았다. 렌이 없다면 그곳은 진정한 세계가 아니니 필요 없었다.

본래 존재하던 세계의 연결이 끊어져 가기 전에 렌의 흔적을 쫓아 손을 뻗는 그는 마침내 렌의 흔적이 강렬하게 남은 다른 세계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 과정이 과격하고 불결한 탓에 잘못된 선택을 했던 그는 본래 존재하던 세상이 소멸하는 충격 속에서 먼지처럼 사라졌다.

일순 강렬하게 처박혔던 기억이 기화되어 흩어져 갔다. 이곳의 류제는 그로 인한 혼란과 충격으로 소중한 것들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영문을 모르는 이상한 기억들의 난입에 그는 토할 것 같아 식은땀을 흘렸다. 발작하는 것처럼 몸이 떨렸다. 옆에 사람이 119를 불러야 하나 물어보는 것도 들리지 않았다.

“…나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고 어서 돌아가서 쉬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전차가 모르는 역에 도착했다. 수군수군 그를 보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은 이상하다. 여기에 있어서는 안 돼. 여기서 나가서 찾아야 해.

…누구를 찾아야 했더라. 일어서려던 그는 몇 걸음 걸으려다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소리가 멀어져 갔다.

눈을 떠보니 병원이었다. 그를 점철했던 새까만 기억이 썰물처럼 빠지니 그다지도 바랐던 자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류제는 왜인지 울고 있었다. 그가 바라던 것은 이제 없다. 그것은 가짜다. 진짜 그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괜찮아? 아프면 말을 했어야지. 내가 무리시킨 건 아니지?”

그와 함께 일하는 회사의 대표가 깨어난 그를 맞이했다. 왜 병원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던 류제는 긴 꿈을 꾼 것 같았다.

그냥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엇도 그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것 같다는 어렴풋한 기분만 들었다.

이후 병문안을 온 친구들이 구멍 난 기억 속의 일들을 말했지만 류제는 관심이 없었다. 그래 봤자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었다.

또다시 귀찮고 성가시고 지루한 생활이 그를 기다릴 뿐이겠지. 그렇게 하염없이 창밖에서 들어오는 나긋나긋한 해 질 녘 태양을 바라보았다.

* * *

어제와는 다른 태양이 시간을 알려주자 류제가 눈을 떴다. 그걸 왜 잊어버리고 있었더라.

링거가 꽂힌 손을 들어 본 류제가 지푸라기 같은 얇실한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언제 깬 건지 못마땅하게 볼을 부풀린 재경이 베개에 얼굴을 쑤셔 박고 있었다.

“뭘 쳐다봐.”

작게 미소 지은 류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상쾌했다.

결국 그때 지하철에서 겪었던 이상 현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건 그는 하늘이 내리는 천벌처럼 첫사랑을 까맣게 잊어버렸고, 드디어 그 기억이 떠올랐다는 것이다.

“있지, 재경아.”

“왜, 짜샤.”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서 안색이 파리하다. 말다툼하던 상대가 쓰러지면 당황할 법도 하지. 재경의 눈가를 쓰다듬은 류제가 마른입을 열었다.

“같이 놀이공원 갈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눈이 동그래진 재경은 말을 잊지 못했다. 입을 앙다문 재경은 속에서 복받쳐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로 쏟아냈다.

“갑자기 쓰러지질 않나. 일어나자마자 웃기는 소리나 하기는.”

“미안해, 재경아.”

재경을 가슴팍에 끌어안은 류제는 끝내 그때의 약속을 기억해 냈다. 상처받은 재경의 마음을 쓰다듬어준 류제는 머리에 낀 구름이 걷혀갔다.

그때 그 벤치 아래에서 두 사람만을 비추는 스포트라이트를 류제는 똑똑히 떠올렸다.

거짓된 감정을 흉내 냈던 인생에서 없을 거라 불평하던 운명적인 판타지는 곁에 존재했다. 재경을 따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았던 류제는 옛 추억을 울음소리를 따라 명쾌하게 그렸다.

“이번에도 안 오면 진짜 죽여버릴 거야!”

“알았어. 알았어, 재경아.”

불평하는 재경에게 어리광을 부린 류제가 소리 내어 웃었다. 연락을 받은 병원 관계자나 친구들이 곧 병실 안으로 들이닥치겠지만 사랑스러운 재경을 놓지 못한 류제는 그와 다정하게 키스했다.

“그때 그 벤치 앞에서 만나자.”

붙잡은 손을 놓지 않겠노라고 약속하며 그의 첫사랑과 마지막 약속을 했다. 여전히 그와 함께할 나날들이 길다. 그는 드디어 이 허망함을 채울 수 있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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