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3)
낙엽이 바닥에 흐를 때가 마지막으로 류제의 활동이 마무리되었다. 담당 배우가 휴식기에 들어가자 쉴 틈 없이 일했던 매니저도 드디어 긴 휴가를 얻었다.
드라마 시청률과 시청자 반응을 살피던 관계자들은 이대로라면 대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설레발을 쳤다.
꽃밭에 멀뚱히 놓인 버려진 신발 같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던 재경은 이런 화려한 세계에 익숙해지는 현실에 쓴웃음이 나왔다.
이번 달에 유닛 싱글을 발표해 폭풍적인 반응을 이끈 걸 그룹 ‘DAYBREAK’ 멤버들과 고등학교를 중퇴한 전직 요리 보조가 친구가 될 줄은 누가 상상했겠느냔 말이다.
한국을 뒤덮는 열기의 주인공이 그가 관리하는 배우라는 것도 믿을 수가 없는데.
처음 만났을 때는 무섭게만 보였던 기획사 대표 포르테 윤도 지금은 깐깐한 아줌마일 뿐이다. 지옥같이 외로웠던 7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흐려졌다. 쓸쓸했던 기억들이 모두 아름답게 포장되다니 행복이란 무섭다.
“류제한테는 절대로 말하지 마.”
“안 해. 나를 뭐로 보고.”
“너 의외로 입 싸잖아. 류제한테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지.”
“승아가 또 날 모함한다. 한 대 때려줘, 나르야.”
티격태격 다툴 때도 있지만 그것을 포함해 어릴 적으로 돌아간 듯 추억에 젖게 된다. 더운 봄날이었던 그때와는 다르게 패딩 코트를 입지 않으면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추운 겨울날이다.
곧 다가올 12월 7일은 류제의 생일이다. 류제가 없는 단톡방에서 일어난 작당에 휘말린 재경은 친구들과 함께 류제의 생일 파티를 계획했다. 한 해를 부지런히 보낸 류제를 위한 축하의 의미도 있었다.
실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서툴렀던 재경은 단독으로 만나 축하해 주고 싶었다.
계획이 불발된 이유는 남사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한 데다 매사에 서투른 그가 혼자서 뭔가를 준비하기에는 하나같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케이크니 선물이니 축하 와인부터 파티 룸 예약까지 연예인들의 생일날이란 재경이 아는 미역국 한 상 올라가는 날과는 달랐다.
아무래도 그보다 류제를 더 오랫동안 봐왔던 친구들이 더 잘 알았다. 특별한 날에 모르는 사람이 끼어드는 것을 싫어하는 류제더러 까탈스럽다고 투덜거린 그녀들은 축하하는 일에 익숙해 보였다. 재경은 그녀들이 부러웠다.
“와!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주인공이 입장하자 샴페인과 폭죽이 터졌다. 파티 계획의 일원이었던 재경도 옆에서 박수를 쳤다.
“생일 축하해, 류제!”
터지는 폭죽과 놀라는 척하는 류제가 작게 미소 지었다. 젊음처럼 타오르는 촛불이 켜진 케이크를 들고 온 미나가 바람 불기를 종용했다.
파티 룸 테이블 한편에는 류제의 지인들을 통해 받은 선물들이 쌓여있었다.
오늘 SNS를 확인해 본 결과 연말과 류제의 생일을 기념하며 팬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 규모는 재경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예계 쪽 지인이나 연줄이 있는 기업가들에게 받는 선물들도 집에 쌓여있는데 그런 선물들은 재경이 부릴 수 있는 하찮은 영향력과 대비되었다.
재경의 축하는 류제의 화려한 인생에 한 톨의 쌀알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축하한다, 짜샤.”
부러움을 꾹 누른 재경은 애써 웃으며 류제의 머리에 붙은 폭죽 조각을 떼어주었다. 기껏 몰래 준비한 깜짝 파티인데 이런 생각에 빠져있기 싫다.
“고마워.”
활동이 끝나고 다시 길기 시작하는 류제의 머리가 눈을 조금 가렸다. 그 사이에서 푸르게 빛나는 눈이 상냥하게 휘었다.
이런 면모를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니 기죽을 것도 없다. 똑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게 아닌 것일 뿐이다.
한때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시하면 곤란했다. 그렇게 타일러도 사랑받을 기회가 지천에 널린 류제와 자신의 간극을 볼 때마다 재경은 제 좁은 인간관계나 지식이 부끄러웠다.
함께 있으면 즐거운 건 사실이다. 과거 돌이킬 수 없었던 실수의 나날들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순간처럼 아름다운 건 인정했다.
“그럼 지금부터 한 곡 뽑겠습니다! 다음엔 재경이 너니까 준비해.”
“엑. 나도?”
“시작은 이번 우리 유닛 싱글 ‘DAY and DAY’로 하자. 노래 알고 있지? 자 다 함께!”
아이돌답게 끼가 많은 그녀들은 블루투스 마이크를 들고 와서 자기들끼리 신나게 노래를 불러 댔다. 재경도 한 곡 불렀더니 속이 후련해졌다.
“잘 부르네.”
“그냥저냥 평범하지.”
자기들 세계에 빠진 그녀들이 노래 부르며 노는 동안 빠져나와 류제 옆에 앉은 재경은 한가득 쌓인 선물을 쳐다도 안 보는 류제를 의식했다.
“개인 조공 금지했으면서 선물은 또 오지게 받았네.”
“팬들이 아니라 방송국 쪽 지인들이 보낸 걸 거야. 드라마 때문에 그러나 봐.”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아서 다행이다. 그 성질머리에 정말로 친구 없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 내 껍데기를 보고 좋아하는 거지.”
“그런 껍데기를 위해 너도 노력하고 있잖아. 그것도 네 자신이야. 무시하지 마.”
매니저 감투를 쓴 재경이 버릇처럼 지적했다. 가면을 쓰고 자신을 부정하려고 하는 건 류제의 몹쓸 심리였다.
그 진실 어딘가가 불편한 건지 류제는 못마땅해 보였지만 재경의 입장에서는 배부른 소리다. 누군들 사랑 안 받고 싶은 줄 아나.
껍데기라도 사랑받을 수 있다면 그건 사랑받는 거다. 그를 주목하는 사람이 늘수록 언젠가는 그를 진정으로 봐주는 사람과도 만날 기회가 느는 것 아닌가.
그러나 류제는 공원 벤치에 앉아 주절거린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나 늘어놓았다.
“피상적인 것보다는 나의 한심함도 봐주기를 바라거든. 근데 사람들은 그런 걸 싫어하잖아.”
“이 한심한 놈아. 인기를 누릴 수 있을 때 얌전히 즐기기나 해. 잘생겼으면 장땡이지 뭔.”
목이 탔던 재경이 찬물을 들이켰다. 그가 볼 때에는 사람들이 그런 한심함을 포함해서 류제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해주는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네가 잘생겼다고 말해주면 기분이 좋아.”
날 놀리는 건가. 재경은 류제의 이런 무신경한 부분이 좋으면서도 싫었다. 봐, 지금도 마찬가지야.
“네 생일은 언제랬지? 재경이 네 생일 때도 다 같이 모여서 놀자.”
재경은 표정을 짓는 방법을 잠시 망각했다. 간신히 입꼬리를 올린 재경은 자신이 잘 웃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럴 수 있으면.”
매니저 계약에 동의한 것은 한순간의 변덕이었으니 내년에는 일이 어떻게 바뀔지는 몰랐다. 그의 생일은 뙤약볕 뜨거워질 무렵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나갔다.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당연했지만 류제의 생일 파티도 아무 말도 없었지만 잘도 축하받았다.
생일날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게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보러 갔었고, 거긴 에어컨이 잘 나와서 시원했다.
“류제! 가만히 있지 말고 빨리 이거 쓰고 노래 불러.”
“윽, 매년 이상한 안경을 잘도 구해오네.”
“동영상 찍을 거니까 대충 부르면 안 돼.”
“와악. 노래 시작한다! 빨리, 빨리!”
류제는 금방 승아에게 불려가서 노래를 불렀다. 콧수염이 달린 이상한 안경을 쓰고 어색하게 마이크를 잡은 모습을 미나가 비디오로 찍었다.
솔라는 옆에서 킥킥거리며 웃고 있고, 나르는 승아와 둘이서 류제를 실컷 바보 취급했다.
재경은 준비한 선물을 주머니에서 꺼내지 못했다. 대단한 축하들에 심드렁한 류제의 모습이 거슬린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류제에게 아,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거구나. 좌절감이 든 것 같다.
그래. 류제는 제 성미대로 상냥하게 다가와 주었을 뿐인데 나만 특별하다고 오해한 거지. 지금이라도 멈출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때 같은 환상에 사로잡혀서는.
그들끼리 놀기도 족한데 지인들이 연이어 파티 룸에 도착했다. 누가 연예인 아니랄까 봐 이곳은 금세 배우 강세라를 비롯해 유명인들과 방송국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리저리 처음 보는 사람들을 소개받던 재경은 문득 소외감이 들어 미소짓기가 버거웠다.
“2차 갑시다~ 취한 사람들은 빨리 집으로 보내.”
시끌벅적한 자리가 파할 것 같자 재경은 먼저 자리를 떴다. 누군가 매니저는 끝까지 배우를 챙겨야 한다고 했지만 지금 벗어나지 않으면 심장을 잡아 뜯는 악마의 손에 힘이 들어갈 것 같았다.
나르에게 먼저 가겠다고 언질한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터벅터벅 걸었다.
“하아.”
잘은 한탄의 물방울이 흩어졌다. 밤하늘을 비추는 건 별이 아닌 가로등 불빛. 가짜 스포트라이트가 그가 가는 길을 비췄다. 분위기에 취해 과음한 것 같았는데 걷다 보니 취기가 가셨다.
날은 춥지만 눈시울이 뜨거웠다. 주먹이 벌벌 떨려왔다. 재경은 추워서 그런 거라고 열등감을 달랬다. 실망할 거 알고 있었으면서 제 발로 쥐덫에 걸려서 아파하면 멍청이인 게지.
버스를 타고 돌아와 한참을 걸어 제가 사는 원룸에 도착한 재경은 방금 전 휘황찬란했던 소란스러움이 공허했다. 착각하면 안 된다. 그가 진정으로 소속된 곳은 화려한 꽃들이 아니라 잡초가 무성한 장소였다.
‘다녀왔습니다’라는 말은 잊어버린 지 오래인 거처. 건물 1층 자투리 공간에 억지로 만든 복층 원룸이 그의 공간이다.
찬 바람도 곧잘 들어오는 데다 비가 많이 오면 하수구 냄새가 역하게 올라오지만 돈이 없어서 이사는 엄두도 못 냈다.
낡은 냉장고와 싱크대가 있는 1층은 사람이 한 명 서있기도 벅차고 복층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곳에 기어 올라가면 누울 수 있는 매트리스가 있다.
낡은 패딩을 행거에 걸어놓고 겹겹이 내의를 입은 그는 어디서 구했는지도 모를 전기장판을 틀고 이불 속에 들어갔다. 이 괴로운 현실을 외면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뭐가 나랑 같은 사람이야. 저런 걸 보고 외계인이라고 하는 거지. 여태 행복도 모르고 살던 나와는 다르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반짝반짝 빛나는 너는 그러기에 비로소 스타겠지.
재경은 영영 누군가의 스타로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아파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류제의 생일이 오기를 유쾌하게 기다렸는데.
진심으로 류제가 좋아하길 원했고, 이 생일 파티가 그의 인생에서는 특별하지 않다는 걸 알아도 그의 주변에 좋은 친구들이 남아있다는 게 뿌듯했다. 여기서 이렇게 눈물을 흘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심술이다.
다시 만났을 때도 실은 기뻤다. 옛날 일을 떠올리면 행복감은 헛것이 부리는 손짓처럼 무의미하지만 잘 살고 있는 것만 지켜봐도 말없이 축복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똑같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바다에서 왜 다시 마주하고 말았을까. 하찮은 인생을 살아가는 나를 비웃어 주고 싶었던 거니?
자학을 멈출 수 없었던 재경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평범하게 살겠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와의 약속도 못 지키고 고등학교를 중퇴해 버린 그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마음은 품어서는 안 되는 거다.
다혈질인 데다 배운 게 없어 무식하고 입도 험했던 재경은 친척집에서 가출한 후 주방 아르바이트로 하루 한 끼 간신히 먹고살았다.
손님과 시비가 붙으면 싸우고 잘리고. 그가 느끼기에도 썩 쓰레기 같은 삶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끝까지 거부하는 고집 센 재경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식당 사장이 손님들 상대로 양을 속여먹고 직원 임금까지 잡아떼자 큰소리로 따지다가 잘리고 말았다. 임금은 당연히 못 받았고, 당장 월세도 낼 수 없었다.
싼값에 어렵사리 구한 이 원룸에서도 쫓겨나면 그는 정말 오갈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 악물고 막노동 현장에 뛰어들어 죽기 살기로 일했다.
간신히 기한 내 맞춰 월세를 마련하고 공과금을 내니 주머니에 든 것은 만 원짜리 한 장. 당장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할까 갑갑하다.
네 캔에 만 원 하는 비싼 술을 사 들고 추억이 남은 공원 벤치에 앉아 사치를 부려보던 재경은 자기 신세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필이면 며칠 전, 할머니와 같이 살던 집이 재개발이 되어서 그 일대가 곧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집은 고모 소유가 되었기에 이제 와 재경이 그 집을 어떻게 할 수는 없다.
재경은 그 집을 허탈하게 보내야 하는 현실이 착잡했다.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추억이 잡을 새도 없이 소멸해 버리고 마니 삶의 의욕이 구겨져 쓰레기통에 짓눌렸다.
두 번째 캔을 따서 마시려는데 술이 떡이 되어가지고 비틀거리던 사람이 재경의 옆자리에 앉았다. 멀쩡하게 걸을 것이지 술에 취해가지고 제 몸도 가누지 못했다.
“왜 사람 인생이 마음대로 안 되는지 알아요?”
재경이 하던 생각을 주정뱅이가 똑같이 말했다. 멀리서 봐도 훤칠하니 인상 좋은 양반이다. 이런 사람도 고민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귀찮게 하지 말고 갈 길 가라.”
아무튼 당장 제 일에 숨이 막혔던 재경은 남자의 술주정을 받아줄 정도로 아량이 넓지 못했다.
“말 좀 들어보고나 이야기해 봐요. 제가―”
고주망태가 된 사람은 제 신세 한탄을 시작했다. 매니저가, 감독이, 팬들이.
평범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개소리를 정성스럽게 해대면서 친한 척을 하는데 재경은 귀찮아 죽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울적한데 짜증 나게. 누군들 힘들다는 말 안 하고 싶냐고.
생긴 건 수상쩍어 가지고 한쪽 눈이 안 보일 정도로 앞머리를 길게 길렀다. 재경은 소소한 평화를 방해받아 짜증이 났지만 주정뱅이 상대로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네가 안 꺼지면 내가 꺼진다는 심정으로 재경이 자리를 피하려고 했을 때였다.
“정말… 아무도 진짜 나한테는 관심이 없지.”
술 취한 놈이 혀가 풀려 꿍얼거렸다. 인상을 찌푸린 재경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저대로 놔뒀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볼 게 분명했다.
비실비실 웃어대는 인상에 왜인지 눈이 파란색. 한국말 되게 잘하던데 외국인인가? 벤치를 비추는 새하얀 스포트라이트가 주정뱅이를 비추니 재경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아니다. 그는 이자를 알고 있었다.
“류제?”
“그렇죠. 저는 신리가 아니라 류제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잘 구별해야 해요.”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았던 그가 몇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곳에 있었다. 운명처럼 느껴졌다면 심장이 망가진 걸지도 모르겠다.
두근거리는 박동을 억누르고 류제의 옆자리에 앉은 재경은 류제에게 말없이 한 캔 새 맥주를 건넸다.
“그래, 배우라고? 댁은 좋겠네. 날 때부터 잘나서.”
“하하, 근데 전 부모님 얼굴도 몰라요. 날 때부터 잘났을까는 더 몰라. 누가 말해줘요? 그런 거.”
류제. 과연 꿈을 이루었구나. 이게 몇 년 만이더라. 그 이후로 연도를 세지 않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운 기억이라고 치부했다.
술에 취해 이 벤치로 온 건 류제가 약속을 기억하기 때문일까? 재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무엇도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하며 살았다가는 바닥에 금이 간 작은 돛단배 위에 눈을 감고 아웅 하는 꼴이다.
류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는 지금보다 더 비참하고 가시가 돋쳐 있었다.
섬세한 사춘기의 나날. 중학교 마지막 겨울 방학 동안 유일한 보호자였던 할머니를 잃었던 그가 방황 끝에 모르는 친척집으로 들어가야만 했었을 때의 이야기다.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에게 버릇없게 굴고, 열심히 공부하지도 않았던 그는 갑작스레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식이 끝나자 완벽히 고립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가 다닐 고등학교 근처에 살던 친척이 여유가 있어 3년간만 맡아준댔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을 떠나야 하는 재경이 추억을 되새기며 짐을 꾸렸다. 그를 돌봐줄 어른은 이제 할머니가 아니다. 이 집은 고모 소유가 되어서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16년 동안 살았던 집인데 의외로 재경의 짐은 적었다. 중학생 때는 교복만 입어서 그런가, 있던 옷가지도 안 맞아 대부분 버렸다.
추억이 도려내지니 초라한 집 안 그의 존재도 작다. 여실히 할머니의 비호 아래에 있었다는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짐은 골목길까지 간신히 들어온 차 안 트렁크에 실렸다. 그를 데리러 온 사람은 자기를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촌수를 세기도 헷갈리는 먼 친척인 데다 명절날 이 집에 오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그와 가깝겠냐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재경도 이 거리감이 영영 줄어들지 않을 것임을 어린 마음에 알았다.
차 안은 고요했다. 재경은 말없이 창밖을 쳐다보았다. 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진다. 행복했던 기억을 되새겨 보던 재경은 검은 철문을 닫기 전 집 안을 좀 더 새겨볼 걸 그랬다며 한숨 쉬었다.
친척이 사는 집은 중산층 동네의 한 아파트였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한 재경의 삼촌에게는 성질머리가 야박한 아내와 재경과 동갑내기 딸이 하나 있었는데 재경이 오기를 반대했었다.
재경도 이 집안과 가까워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도 현관에 발을 디디기도 전 처음 만난 사람을 불쾌하게 쳐다보는 시선은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처음 보는 시꺼먼 남자가 친척이랍시고 같이 산다는데 싫을 만도 했겠지. 또래 여자와 연이 없던 그는 삼촌의 딸을 외면하기로 했다.
사람들의 시선은 쉽게 안 바뀐다는 걸 뼈저리게 알아서 귀염성 없이 나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썩 재경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면 집을 나갈 거, 살갑게 굴어도 무슨 소용인가 싶다.
고작 먹고 자는 곳을 빌릴 뿐인데 눈칫밥이 얼마나 쓰던지 그 집에 있으면 숨이 다 막혔다. 특히나 딸과 동선이 겹치는 날에는 사춘기가 풀어내는 히스테리가 그에게 돌아와 이따금 악몽을 꿨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는 것도 싫어, 샤워도 같은 곳에서 하는 게 싫어, 빨래도 같이 하기 싫어, 밥도 같이 먹기 싫어. 싫다고만 고집부려도 해결되는 인생이 부럽기도 하다.
재경도 좋아서 함께 사는 게 아니다. 옛날이었다면 참지 못하고 손찌검을 했겠지만 그랬다간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 거다.
그는 집에 사람이 없거나 자는 시간에 들어와 창고로 쓰이던 작은 방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시절의 행복은 다시 없지만 잘 곳이 있고 보호자란에 쓸 이름이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지.
전부터 모으던 저금통과 할머니가 이불에 숨겨두었던 교복비를 확인하던 재경은 할머니와 부모님 사진이 있는 상자 안에 그것을 곱게 보관했다.
3월 봄날의 첫 등교는 중학교 때와 비슷했다. 이제 와 수업을 듣자니 아는 건 하나도 없다.
멍하니 칠판을 흘기던 그는 개 버릇 남 못 주고 피곤해서 엎드려서 잤다. 어차피 그가 다니던 학교는 그런 놈팡이들만 모여있어서 선생들도 굳이 참견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쉬는 시간마다 허구한 날 연예인 이야기니, 옆 동네 예고에 잘생긴 놈이 하나 있다더니 생산성 없는 말만 해댔다.
그나마 중학교보다 나은 점은 지루한 국영수 공부 말고도 칼을 잡고 조리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와 약속한 게 있으니 고등학교는 졸업할 생각이었던 재경은 조리 실습만큼은 제대로 해냈다.
재능이 있어 남들보다 앞서갔지만 당장 급변하는 환경에 허탈함이 컸던 재경은 감정의 수렁에 빠져 헤어 나올 생각을 못 했다. 물론 친구도 없었다.
과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쓰레기지만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제멋대로 굴던 중학생 때와는 달리 쉽사리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 것이다.
새빨간 타인을 돌봐주는 친척을 경찰서로 부르자니 속이 뒤틀리는 데다 고등학교에서는 그를 아는 사람이 없어 딱히 건들지 않았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잠만 자는 재경을 우습게 보고 여태 중학생 티를 벗어나지 못한 옆 반 학생이 시비를 걸어도 재경은 참고 넘어갔다.
혼자 살아가기 위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졸업하고 싶었다. 이런 생활이 평화롭다면 평화롭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 류제와 만났다. 평소처럼 무기력한 나날 속 별것 아닌 변덕이 계기였다.
집에 돌아가기 싫어 하천에 있는 둔덕을 빙 돌아 걷는데 웬 후광이 나는 학생 하나에게 그의 학교 다른 과 놈들이 시비를 걸어댔다.
제 알 바 아니었던 재경은 그냥 지나치려 했지만 류제와 눈이 마주치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재경은 떨떠름했다. 그래도 싸움은 하기 싫었다. 남몰래 다가가 교과서 몇 개가 든 가방을 벗어서 휘두른 재경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류제를 데리고 도망갔다.
구해주고 나니 알았는데 교복이 옆 동네 예고의 것이었다. 연예인들이 많이 다닌다고들 하는 그 학교 말이다.
숨이 턱끝까지 차 숨을 고르는데 서글서글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류제는 당시까지만 해도 재경과 키가 고만고만했다.
솔직히 첫인상을 말하자면 재경은 류제가 신기했다. 생김새도 특출나게 잘생겼지만 눈이 짙은 푸른색이었다.
하지만 배알이 꼴렸던 재경은 류제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기 싫었고, 두루뭉술하게 귀찮아질 것 같아 류제를 내버려 두고 제 갈 길을 떠났다.
그게 그와의 첫 만남이다. 당연히 이다음 만남이 근시일 내로 이루어질 것이라고는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다.
집에 들어가기 싫어 아파트에 딸린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앉아있었을 거다.
깔깔거리며 뛰놀던 어린이들도 제집을 찾아 돌아가고, 땅거미가 진 하늘은 저녁 먹을 시간을 알렸지만 살고 있는 친척집은 맞벌이라 저녁은 알아서 해결해야 했다. 딸은 학원에서 친구들과 먹을 거라고 했다.
실은 부부 둘이서 외식을 하는 날이라는 걸 재경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만 동떨어져 있다.
삼촌의 아내는 밥과 반찬이 있으니 그더러 알아서 챙겨 먹으라고 했다. 조리과에 다녀서 요리도 제법 잘하니 키워주는 대신 밥이나 하는 식모 생활을 요구하는 거겠지만 재경은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떠날 거다. 용돈도 저금통에 들어있던 돈 조금씩을 빼내서 썼다. 고등학생이니 여름 방학 때부터는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돈을 벌고 싶다. 어떠한 빚도 만들어두지 않을 테다.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편의점에서 사 온 빵으로 저녁을 때우는데 갑자기 우유 하나가 들이 밀어졌다.
“먹을래? 1+1이라 하나 남아버렸네.”
류제였다. 특이한 이름이라 뇌리에 남았던 재경도 들리는 소문에서 류제를 자주 접했다. 이따금 귀에 들리는 예고의 잘생긴 학생 이야기. 이런 곳에서 다시 마주할 줄은 몰랐다. 그의 손에 우산이 들려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던 건가. 몰랐다. 동정받는 건 싫다. 날 때부터 잘난 놈이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동정 때문이라면 토할 것처럼 메스꺼웠다. 재경은 거부했지만 류제는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가 류제를 기억하듯, 류제도 그를 기억했다. 류제가 그에게 보이는 관심은 호기심이다. 그것 때문인지 재경은 이상하게도 별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말았다.
며칠 후 골목길에서 마주쳤을 때는 정말 이놈과 악연이라도 얽힌 건가 아리송했다. 할 일이 없냐고 따져도 우연이라는 말로 포장해 사람을 꼬여내는, 류제는 날 때부터 탕아였다.
류제가 말하길 혼혈이 맞고 현재 모델 일을 한다고 했다. 부모님이 없어서 용돈도 자기가 벌어서 쓴다니 동질감이 들었다.
차츰차츰 친해지다 핸드폰 번호까지 교환하니 류제는 쓸데없는 일로 재경을 불러 세우곤 했다.
사람의 이목을 모으는 방법을 아는 그는 관심을 피할 방법도 알았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재경에게 늘 새로운 장소를 소개해 주었는데 재경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류제와 얽히다 보니 류제의 친구들, 현재 TE 소속 아이돌인 그녀들과도 몇 번 어울렸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재경을 경계하는 듯했지만 함께 노래방도 가고, 장난삼아 찍은 스티커 사진도 나눠가지다 보니 인상이 좋게 남은 듯하다.
류제와 함께 있다 보면 상실의 슬픔이 무뎌져 갔다. 미래를 조금 더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부지런히 학교 숙제를 하는 류제를 보다 보니 재경도 학교 공부를 나름 하게 되었다. 류제도 혼자 산다고 해서 실습수업에서 만든 음식이 잘 나올 때면 나눠주기도 했다.
조용한 카페에서 낯선 문화를 영위하는 것도 좋았다. 그 기억이 미화되어서 그런 건가 서로의 감정에 다른 뭔가가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 뭔가는 입으로 나와 구현되지 못했지만 뭔가는 있었다.
그야 평범한 친구라면 누구도 볼 수 없는 좁은 골목 안에서 심장을 맞대고 키스는 하지 않잖아.
서로 머쓱해진 그들은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류제는 손을 들어 재경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전해지는 달콤한 감정을 느낀 재경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그런 미묘한 관계였다.
평생 이어질 것 같은 인연은 금세 끊어졌다. 그의 생일인 유월 마지막 날이 오기 바로 전 주였나.
두 사람의 비밀 기지였던 인적 드문 공원 벤치에 앉아 별 시답잖은 대화를 했을 거다. 그러다 어떠한 계기로 놀이공원에 대한 운이 떼졌다. 류제가 물었다.
“가본 적 없어? 진짜?”
“어, 왜?”
혹여 불쌍한 사람 취급할까 했지만 기뻐 보이는 류제는 슬며시 고개를 디밀었다. 입꼬리에서 보이는 상냥함이 재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럼 같이 놀이공원 갈래? 그날.”
“다른 친구들이랑?”
“아니. 단둘이서.”
엉큼한 거미처럼 손가락을 움직인 류제가 재경의 손을 잡았다. 멀리 해가 저물어 가로등 불빛이 깜빡 들어왔다. 세상은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재경은 류제를 향한 감정이 여태 헷갈렸다. 그래도 류제가 놀이공원에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는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이유 없이 서로 입술을 맞닿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결실을 맺으려고 하려는 거겠지.
할머니 말고는 누구도 축하해 주지 않았던 생일날 류제와 단둘이 놀 수 있다는 것도 기쁘다. 배시시 미소 지은 재경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억눌렀다.
평범함에 한 발짝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과 남자끼리라는 배덕감 사이에서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를 어쩌나. 생각해 보니 정작 중요한 돈이 없었다. 놀이공원 입장료는 물론이고 사 먹을 음식에 교통비까지 계산해 보니 돈 십만 원이 우습게 나갔다.
평생 이런 액수를 하루 만에 써본 적이 없던 재경에게는 부담이 컸다.
이제 와 거리를 두던 친척 부부에게 용돈을 달라기도 뭐하다. 그래도 재경은 가고 싶었다. 무슨 수가 없을까.
제 보물이 담긴 상자를 뒤지던 재경이 어른이 되면 쓰려고 했던 봉투 안 돈을 꺼냈다. 액수가 딱 맞았다.
문제는 금액이 아니다. 할머니가 남겨두신 마지막 마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얽혔다.
교복을 아는 사람에게 얻어 온 덕분에 이 돈은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전까지 쓸 수 있는 마지막 비상금이었다. 과연 할머니가 남겨둔 돈을 고작 놀이공원에서 써도 될까?
재경은 몇 날 며칠을 고민했다. 류제 앞에서 돈 없다고 배짱을 부리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근심이 없는 흉내를 내며 류제와 나이 또래처럼 평범하게 놀고 싶었다. 수학여행을 차마 가지 못했던 비참했던 중학생 나날처럼 소외당하기 싫었다.
류제가 하고 싶은 말을 두 귀로 똑똑히 듣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고 싶었다. 생일이잖아. 할머니가 바라던 친구와 노는 거니까 괜찮지?
마음을 크게 먹고 비상금을 뜯은 그는 제법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공원에서 기다렸다. 정각이 되자 참을 수 없이 몸에 피가 돌았다. 단연 즐거운 하루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사지를 찌르는 듯했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다소의 짜증으로 바뀐 그 감정은 이윽고 절망으로 걸러졌다.
그날 류제는 오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부터 기다려도 전화기는 꺼져있고, 언제 올 거냐는 메시지도 답장이 없었다. 벤치 위에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옆자리는 비었다. 그의 최악의 생일은 그렇게 지나갔다.
역시 날 놀린 거였어. 곁에 있으면 너무 즐거워서 혹시 몰래카메라라며 비웃는 것처럼 어렴풋이 그런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긴 했다.
류제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배신감과 치욕으로 점철되어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 분을 풀 데가 없이 돌아온 재경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삼촌의 아내에게 지갑에서 돈을 훔친 게 아니냐며 추문당했다.
비상금 존재를 알았던 손버릇 나쁜 삼촌의 딸이 제가 훔쳐놓고 재경이 훔쳤다 발뺌하는 바람에 범인으로 몰린 것이다.
재경은 이 돈은 자기 것이라 주장했다. 믿어주지 않았지만 용돈 한 푼 주지 않은 책임이라고 친 건지 유야무야 넘어갔다. 이 악몽 같은 날이 빨리 깨어나기를 바랐지만 바로 지금이 꿈에서 깬 순간이 아니었을까.
더 이상 학교가 끝나도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다. 그의 존재는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용기를 쥐어짠 재경은 류제가 다니던 고등학교 정문에서 그를 기다렸다.
마침내 재회한 류제는 재경을 모르는 척했다. 눈빛도 한번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허탈해진 재경은 그 후로 류제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에게 사정을 물어볼까 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재경은 의욕을 잃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류제가 끌어내 주고 있었던 것처럼 방향을 잃고 헛돌기 시작했다.
쌓여왔던 짜증이 곪아 터진 재경은 시비를 걸곤 했던 옆 반 학생에게 의자를 던져 기절할 때까지 때렸다. 경찰이 오고,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다 귀찮아서 그날부로 학교도 관둔 재경은 친척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 사람들도 재경이 아무래도 좋았는지 실종 신고가 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누군가와 어울려 살 정신머리가 못 되었던 거다. 그렇게 그는 제 발로 보금자리를 찾아 떠났다.
항상 소중함을 깨닫기 전에 사람들이 멀어진다. 부모님, 할머니, 하나뿐이었던 친구. 재경은 류제와 재회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에서 상실은 동반자였으니까.
그러나 그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류제와 재회했다. 그 벤치, 가로등의 스포트라이트가 비추는 늦은 밤에 류제는 이곳에 있었다. 슬픔마저 추억이 되어버렸던 지금 와서.
“멋대로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강요는 말아야지. 민폐거든.”
혼자서 웅얼거리던 류제가 말하는 소리에 재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신감은 반가움에 벅차 잊고 말았다. 상실이 속삭였다. 몇 번이고 반복해 왔던 지겨운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그는 또 망각할 뻔했다.
이제 그들도 어린애가 아니다. 어린 날의 치기는 없던 일이어야 했다.
그래도 다시 만났으니 되었다. 어릴 적 추억에 그만 붙잡혀 있자는 심정으로 재경은 술 취해 잠이 든 류제를 끌어다가 택시를 태우고 집을 물었다.
류제를 현관에 아무렇게나 던진 재경은 문을 꾹꾹 닫았다. 도망치듯 엘리베이터에 탄 그는 문득 시선이 가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못 먹어서 허옇게 질린 얼굴하며 염색했다가 망해서 칙칙한 머리카락이 꼴도 보기 싫다. 손은 흉터투성이에 요즘엔 얼굴에 기미까지 껴서 영 못썼다.
입가는 건조해 각질이 일어나 볼썽사납다. 눈매도 더럽다. 고집스러운 입매가 꼴통처럼 무슨 짓을 해도 못났다.
사랑할 수 없다. 이런 나를.
새벽 늦은 밤, 재경은 집으로 돌아갔다. 감상에 젖기에는 그는 당장 먹고살 생활이 궁핍했다.
사회생활을 빨리 시작했으니 나름 다 컸다고 생각했는데 급여를 떼어먹을 줄은 누가 알았겠냐고.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배고파 죽겠는데 내일은 어디서 일을 하게 될까. 그런 생각으로 머리를 채웠다.
“그때 그 사람 맞죠?”
그랬는데 우리는 다시 만났다. 그때 일을 사과하고 싶은 걸까. 처음엔 제 형편에 좋게 생각했지만 류제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다.
뭘 기대했던 걸까. 나는 혼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녀석이 질려 다시 나를 잊고 멀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줄 셈이었다.
“7년이라니 질긴 인연이지.”
재경은 핸드폰 뒤 커버를 벗겨 친구들과 함께 찍었던 스티커 사진을 쓰다듬었다. 테이프로 소중하게 감싸두어 바래지 않은 생생한 빛깔.
이때는 분명 함께 있었는데 너는 훌훌 떨쳐버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는구나. 지금은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도 싶다.
모든 열등감이 그를 휩쌌다. 이 7년 동안 그는 이루어낸 게 하나도 없다. 류제를 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승승장구하며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그 사랑을 걸러내려고까지 하는―
너무 평범한, 평범하면서 특별한 사랑을 나 없이도 잘 받고 있잖아.
재경은 짜증이 나서 목 막힌 비명을 베개로 입을 막으며 냈다. 노래방에서처럼 시원하게 소리 지르고 싶다. 그러면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류제와 연락할 수 있을 것 같다.
허망하기도 하지. 한번 눈물을 쏟아냈더니 후련해진 재경이 불을 끄고 잠을 청하려는 때 초인종이 울렸다.
“뭐야?”
옆집 사람이 또 취해서 잘못 들어오려는 건가 싶던 재경이 초인종 소리를 무시했다. 그를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이 망할 옆집 사람은 질리지도 않고 초인종을 눌러 댔다. 새벽에 질리지도 않고 꾹꾹 눌러 대는 데 악의마저 느껴졌다. 이만하면 착각했다는 걸 깨닫고 돌아갈 법도 한데 너무한 거 아닌가.
울음이 쏙 들어간 그가 짜증스럽게 문을 열었다.
“아, 진짜! 작작 좀―”
헤어지기 전에 봤던 바로 그 복장 그대로 제법 덩치가 큰 남자가 문 앞에 있었다. 재경은 짙은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하아, 하, 다행이다. 불이 꺼져있기에 혹시나 했는데.”
류제가 재경을 끌어안았다. 패딩 사이로 새파랗게 질린 손이 벌벌 떨어댔다.
“다행이다. 진짜 무슨 일 난 줄 알았잖아. 전화도 안 받고.”
“왜 온 거야? 2차 간 줄 알았는데.”
“네가 안 보이는데 어떻게 그래. 다른 사람과 시비라도 걸린 줄 알고 진짜…….”
전화는 귀찮아서 꺼놨다. 내일은 쉬는 날이기도 하고. 나르한테 말해두었으니 어련히 알겠거니 했는데 굳이 찾아올 것까지는 뭐람. 생일이면 즐겁게 놀면 될 것을.
“이 꼭두새벽에 별 난리를. 난 무사하니까 돌아가.”
“하아, 안도가 되었더니 취기가 확 올라오네.”
취하면 자는 버릇이 있는 류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미적미적 재경의 집으로 쳐들어왔다.
“야, 야! 멋대로 들어오지 마!”
“너 찾는다고 이 새벽에 진을 다 뺐단 말이야. 집은 또 왜 이렇게 추워?”
안 그래도 좁아 죽겠는데 두 사람이 들어오니 원룸이 숨이 막혀 터질 것 같다. 그러거나 말거나 패딩을 벗은 류제가 제멋대로 계단을 타고 복층 매트리스로 향했다.
“으으, 드디어 살겠네.”
전기장판에 누워 꾸물거리던 류제가 어처구니없어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재경더러 들어오라고 이불을 들췄다. 요망한 자식. 한 사람도 겨우 눕는 곳에 두 사람이서 어떻게 자라고.
“진짜 너…….”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가. 1층에는 사람 앉을 곳도 마땅치 않기에 재경은 별수 없이 그의 품으로 들어갔다. 찰싹 달라붙은 기분이 오묘했다.
“이건 뭐야. 내 선물이야?”
불을 끄기 전, 류제가 선물을 멋대로 꺼내 들었다. 포장 좀 되어있다고 자기 거라고 생각하는 게 더럽게 낙천적이다.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정말 내 거야? 왜 아까 안 줬어?”
“여기서 열어보지 마!”
남들과 비교될까 봐 결국 주지 못한 선물이 결국 류제의 손에 들어갔다. 재경이 줄 수 없는 수많은 선물을 받았겠지만 그는 기뻐 보였다. 알겠다고 한 류제는 제 패딩 안에 선물을 꼭꼭 숨겨두었다.
“남자 둘이서 무슨 꼴이냐고. 짜증 나게.”
“어허, 누구 때문에 내가 이 추위에 떨었는데.”
“난 나르한테 돌아간다고 말했어. 네가 못 들은 거지.”
매트리스가 좁아 껴안은 꼴이 되었지만 재경은 싫지 않았다. 류제가 얼음장처럼 식은 손을 재경의 배 안에 집어넣었다.
“나 졸려, 재경아.”
“차가워! 아, 진짜!”
소스라치게 놀란 재경이 펄떡거리다 뒷발질로 류제를 찼다. 류제의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났다. 그때처럼 고주망태가 되어서 한탄하면 어쩌나 싶은데 눈이 감실감실 감기고 있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따뜻하다.”
뒤에 있는 류제의 얼굴을 상상해 보면 달콤하고 아늑하게,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이 사랑을 할 때처럼 녹아내릴 것 같다.
기억을 못 하면 어떠랴. 착각이라면 어떠랴. 혼자만의 상상을 뭐라고 할 사람은 없겠지. 재경은 눈을 감았다. 그는 현실에 만족했다.
* * *
다음 드라마가 결정될 때까지 마땅한 일이 없는 재경은 긴 연차를 받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부터 죽어라 일만 하던 재경은 한가해진 틈에 제 미래를 한번 고민해 봤다.
저번처럼 손 놓고 있다 허망하게 세월을 보내는 것보단 살길을 먼저 찾아놓겠다는 다부진 생각이 들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류제의 마음에 넋 놓다가 당하는 건 어릴 때로 족했다.
본업인 요식업으로 돌아가든, 연예계에 남아있든, 공장에 취직하든 우습게 보이지 않으려면 중졸 학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설득에는 슬슬 절박감이 들었던 재경은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새해가 되면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들뜨는 힘을 이용해 여윳돈으로 책을 샀던 재경은 호기롭게 펼쳤다가 외계어들이 난무하는 통에 정신이 멍해졌다.
세상이 좋아져서 무료 강의가 차고 넘치는 데다 회사용 태블릿도 있으니 접근성이 좋았지만 영 머리 쓰는 게 쥐약이었던 재경은 토대를 쌓는 과정이 무척이나 고단했다.
저번에 공부를 도와주겠다 류제가 말한 적이 있던지라 재경은 그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래서인가 분명 담당 배우가 휴식기에 들어가 스케줄이 비었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져도 전혀 나쁠 것 없는 기간인데도 류제의 집에서 공부를 하는 이상한 상황이 되었다.
회사 차 말고는 오갈 수 있는 수단이 대중교통뿐이라 왔다 갔다 시간이 걸렸지만 쉬는 동안에도 월급을 받는 게 거슬렸던 재경은 차라리 류제의 집에 출퇴근을 하는 게 마음 편했다.
짬을 내서 복습을 하거나 류제가 내준 숙제를 하는 동안에도 매니저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드라마 촬영이 없는 거지, 라디오 게스트로 초청될 때도 있고 잡지 인터뷰도 있으니까.
스케줄 확인차 회사로 출근하면 어김없이 승아를 비롯한 친구들이 카페테리아에서 그를 기다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일만 있다 하면 ‘오늘 온다며?’라고 톡으로 확인 사살을 날렸다. 몰래 빠져나갈 틈도 안 준다.
귀찮아 죽겠는데 굳이 자기네 연습실로 데려가더니 핸드폰을 들이대는 것도 고역이다. 모자를 대충 눌러써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생중계가 된다는 핸드폰 카메라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 말고 너네 매니저 가지고 놀아.”
“너랑 노는 게 더 재미있단 말이야.”
“자, 자. 노래 시작한다!”
또 그 블루투스 마이크를 냅다 들이댄다. 보니 커스텀이 되어있다. 저번 류제 생일 때 부른 걸 올렸더니 팬들이 선물해 준 거라고 한다.
“야, 오나르! 찍지 말고 네가 춰!”
“에이 잘한다! 파이팅!”
비키, 유네, 미나로 이루어진 ‘DAYBREAK’ 유닛 ‘VICTORY!’의 SNS 라이브가 시작되자 사람들이 들어와 채팅이 우수수 올라갔다.
전면 카메라로 영상을 찍는 나르 대신 춤을 추던 재경은 저 외간 남자는 뭐냐며 악플 달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반응이 생각보다 괜찮았다.
“이번 라이브 대박감이야.”
“협조 땡큐배리감사~ 나중에 밥 한번 살게.”
“망할 자식들아. 사람을 뭐로 보는 거야?”
재경의 불평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 그녀들은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렸다. 재미 삼아 켰던 30분간의 짧은 라이브라 재경도 뭐 별일은 없겠지 싶었다.
평소처럼 잠깐 혹했다 내려갈 것 같았는데 재경은 며칠 후 승아에게서 링크를 하나 받았다. 저번에 찍었던 라이브가 팬덤 사이에서 꽤 화제가 되어 유명 커뮤니티에서 올라왔다고 한다.
억지로 춘 건데 사람들이 댓글로 매니저 물 만났다, 부럽다고 했다. 재경은 난생 처음 우월감에 뿌듯해졌다.
TV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유명해져서 류제 못지않은 인기를 끌면 어쩌나 김칫국부터 벌컥 들이켰던 재경은 관심에 맛이 들려 인터넷에 검색까지 하며 반응을 찾아보았다.
곧 재경이 TE 소속 어떤 배우의 매니저라는 사실까지 신상정보가 드러났다.
재경은 오싹하면서 싱숭생숭했다. 항상 모래 깊은 곳에 가려져… 아니 모래 그 자체였던 그의 존재를 딱 집어 발굴된 기분이 생소한 건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리 대단한 인물도 아닌데 인터넷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는 건 과연 행운일까.
그 영상 때문인지는 몰라도 배우와 매니저가 함께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예능 PD가 게스트 확정을 해달라고 닦달을 했다.
그렇게 된다면 매니저인 재경도 덩달아 TV에 나오게 된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어서 한때 포르테가 예능 출현을 제안했을 때 알겠다고 했던 재경은 부담감에 잠을 설쳤다.
그래도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을 거다.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사람들이 박수를 쳐준다고 했었지. 떼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 걱정하지 말고 적당히 즐기면 돼. 그 집을 사기 위해서잖아.
최종적으로 예능에 나가는 방면으로 마음을 굳혔던 재경은 며칠 후 출연하기로 했던 예능에 나온 매니저가 학교 폭력 문제에 연루되어 고정 멤버였던 유명 아이돌이 하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재경은 그게 멀지 않은 자신의 미래라 확신할 수 있었다. 한순간의 야욕을 위해 쌓아 올렸던 것들이 과욕 때문에 사라지길 원하지 않았다.
역시 그 불안감이 맞았다. 유명해지는 건 무서운 일이다. 꽁꽁 숨겨둔 사람의 치부 또한 손쉽게 드러나는 무서운 곳이 바로 이 연예계다. 그렇다면 차라리 언제나처럼 그림자 뒤에서 지켜보는 게 나았다.
“안 할게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며.”
재경은 답하지 않았다.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점철된 시시콜콜한 까닭을 늘어놓을 만큼 말재간이 좋지도 못했고, 이제야 그를 잘 봐주던 대표가 과거를 알고 실망하지 않았으면 했다.
“너한테도 좋은 기회일 텐데. 강요는 안 해.”
류제의 매니저가 계속 바뀐다는 지라시를 잠재울 겸사겸사 재경을 활용하려고 했던 포르테는 내심 아쉬웠다.
그래도 재경이 고집을 꺾지 않자 그녀가 알겠다며 들어가 보라 손짓했다. 싫다는데 강요하는 건 그녀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설 잘 보내고. 마음 바뀌면 최대한 빨리 연락해.”
“감사합니다.”
한숨을 내쉰 재경이 대표실에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포르테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그로부터 며칠 후, 연휴가 시작되는 날에 포르테가 문득 류제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어, 류제. 나야. 바빠?
최근에는 재경을 통해서 스케줄을 지시하던 포르테가 직접 전화를 건 것은 오랜만이다. 새 드라마를 시작할 때도 아니고 사고를 치지도 않았는데 웬일인가 싶다.
설날 기념해서 부모나 다름없는 그녀에게 인사차 찾아가려고 했던 류제는 마침 차 시동을 켜는 중이었다.
“쉬고 있는데 바쁠 리가요. 대표님이 무슨 일이세요?”
―네 매니저 혹시 설득할 수 있으면 해보라고.
“무슨 일 있어요? 그만둔다고 그래요?”
예상치 못한 일에 류제는 당혹스러웠다. 최근까지도 아무 일 없이 같이 잘 일하고 있었고, 어제도 검정고시 공부를 같이했다. 이제 곧 있으면 일한 지 1년 차가 되는데 아깝게 놓치기 싫었다.
―그게 아니라 네가 출연하기로 했던 ‘참견자들’에 안 나가겠다고 마음을 바꿨더라고.
제의가 들어와서 류제도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었던 예능이었다. 류제의 매니저 편력에 관해 말을 잠재울 수단으로도 좋다고 포르테가 설득하기도 했다.
―일반인이 티브이에 나온다는 게 어려운 선택이긴 하지. 그래도 처음엔 의욕이 있었으니 말이나 해봐. 데이브레이크 얘들이랑 라이브할 때도 호응이 괜찮아서 아쉽거든.
“이따 전화해 볼게요. 대표님은 오늘 바쁘세요?”
―남편이랑 애 데리고 고향에나 가야지. 지금 챙기고 있어. 너는 또 집에 있을 거냐?
오늘은 그녀도 회사 일은 잠시 덜어두고 진짜 가족과 함께 있을 모양이다. 안전벨트를 매던 류제는 포르테를 찾아갈 예정을 냉큼 지웠다.
“그래야죠.”
―나중에 저녁이나 같이해.
“대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네. 아이 뭐, 고생은 대표님이 하셨지. 다음에 봬요.”
류제가 전화를 끊었다. 차 시동이 걸렸는데 목적지가 사라졌다. 가족이 없다는 건 이따금 외롭다. 혼자 사는 건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한숨을 내쉰 류제는 오늘은 뭘 하고 시간을 보낼까 심심해졌다. 다른 때는 집에서 쉬면 되는데 명절만 되면 싱숭생숭해서 가만히 붙어있질 못하겠다.
텔레비전에도 죄다 가족 이야기만 늘어놓을 테지. 기왕 이렇게 된 거 드라이브나 갈까 싶던 그가 핸들을 돌리며 액셀을 밟았다.
재경은 뭘 하고 있을까. 추석 때도 본가로 돌아가지 않은 것 같으니 설에는 갈 거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잠깐 나가는 것 말고는 별일 없다고 했던가. 저녁에 재경과 만나 식사나 할까 싶다.
대형 마트에 들어가기 전 갓길에 잠시 주차를 한 류제가 재경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데 양반은 못 되는지 멀리 본인이 도보를 걸어갔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운명적인 만남이 마냥 신기한 건 그의 마음이 들떴기 때문이다.
경적을 울리려던 그는 재경이 들어가는 건물이 납골당임을 발견하고 머뭇거렸다. 일행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설에 홀로 이곳을 찾는 그도 집안사정이 썩 좋지는 않은 듯하다. 이런 날에는 재경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겠지.
의욕이 사라진 류제는 조용히 갈 길을 스쳐 지나갔다. 말하지 않은 걸 굳이 파헤쳐서 사람을 힘들게 할 필요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류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청소를 시작했다. 소파 쿠션부터 각을 맞춰서 배열하고 재경이 집들이 선물로 줬던 선인장도 방향에 맞춰 정렬하다가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가시 돋친 주제에 귀엽게 생긴 게 재경 같다. 궁금해하면 바로 선을 그어버릴까. 그래도 알고 싶은데.
손님이 올 일이 없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물걸레를 곱게 접은 류제가 월패드를 확인했다. 재경이었다. 시간을 보아하니 납골당을 들렀다가 바로 이곳에 온 듯했다.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놀라 현관문을 열어주니 재경이 말없이 검은 봉지를 흔들었다. 묵직한 원통형이 여러 개 쌓인 것을 보아하니 캔 맥주였다.
“너무 난데없나? 바쁘면 그냥 갈게.”
“아냐, 괜찮아. 들어와. 같이 저녁 먹을까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아직 각이 덜 잡힌 곳이 눈에 밟혔지만 어차피 재경이 있으면 흐트러질 거고, 청소야 나중에 해도 상관없다. 요는 별다른 약속도 없는데 재경이 몸소 찾아와 줬다는 거다. 그건 재경이 그를 믿고 따른다는 의미이길 바랐다.
마침 물어볼 것도 있었다. 물걸레를 세탁실에 던져놓은 류제가 다용도실 문을 닫으며 말했다.
“예능 거절했다며. 대표님이 아쉬워하시던데.”
“벌써 네 귀에 들어갔냐? 하여튼 빠르다.”
“내 귀에 안 들어오면 어떻게 해. 나랑 내 매니저 일인데.”
재경은 그렇긴 하다며 실없이 웃었다. 썩 좋은 이유로 거절한 게 아닌 듯해서 류제는 조금 염려스러웠다.
“부담스러워? 승아랑 같이 라이브도 했다며.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해.”
“걔네랑 하는 건 얼굴이 안 나오잖아.”
안주는 아무래도 좋은지 바닥에 앉아 소파에 기댄 재경이 먼저 캔을 깠다. 집에 먹을 게 있나 뒤지던 류제는 재경이 만들어두었던 멸치볶음을 소분해서 접시에 담아주었다.
“얼굴 나오는 게 싫어? 저번에도 영상에 찍힌 게 싫다고 했었지.”
“평범하게 살지 않은 걸 누가 알아보는 게 싫어.”
“따지면 내 인생도 평범한 건 아니지. 관심을 먹고 자라는 배우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 매일같이 하는 나도 잘만 카메라 앞에 서잖아. 다 연기야.”
“난 너처럼 잘나지 않아서. 꼬투리 잡힐 거야. 분명.”
중학생 때 선생님이고 같은 반 놈들이고 불쌍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게 싫어서 비뚤어졌더니 업보가 이런 식으로 돌아왔다.
괴물처럼 질척질척 발목을 잡고 늘어진 과거 주제에 똑같은 괴물인 류제가 천사처럼 보이다니 웃기다.
“중학생 땐 실컷 싸우고 다녔으니까 나한테 맞은 놈도 아직 앙심을 품고 있을걸.”
재경이 쓰게 웃었다. 짭짤한 멸치볶음을 질겅질겅 씹어대니 별것 아닌 것처럼 들려도 류제는 처음 듣는 과거였다.
“설마, 학교 폭력에 가담이라도 했다는 의미야?”
“그렇게 거창하지도 않고, 시비 거는 놈들만 후려쳤어. 가만히 있으면 쥐 좆으로 보는 개 같은 새끼들 많았거든.”
“약한 사람을 괴롭힌 게 아니면 나쁠 게 뭐 있어.”
“남들 눈에는 모르지. 어쨌든 썩 당당한 건 아니니까 별로.”
그렇지 않느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이 류제에게 향했다. 하기야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까지 할 정도였다면 나쁜 의미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낸 건 당연했다.
그런 색안경을 쓰기 싫어서 부정하고 있었지만 한때의 재경은 비뚤어졌던 적이 있던 모양이다.
“경찰서도 자주 다녔어. 기소된 적은 없지만. 실망했냐? 간신히 구한 매니저가 싹수 노란 사람이라.”
비식거리며 웃은 재경은 벌써 한 캔을 다 비웠다. 맞은편에 앉아 캔을 하나 딴 류제가 첫 모금을 들이켰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첫 마디를 꺼냈다.
“부모님이 뭐라고 안 해?”
“할머니랑 둘이서만 살았거든. 못 배워먹어서 생각이 어렸던 거지.”
“고등학교 중퇴한 것도 폭력 사건 때문이었어?”
“…그건 내 발로 알아서 나온 거야.”
그 계기는 틀리지 않았던지라 재경은 입을 다물었다. 자랑거리도 아닌 과거를 남에게 털어놓는 것이 처음이었다.
“난 지금이 좋아. 그냥… 아무것도 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도 않아. 제발 아무 일도 안 일어나게 내버려 둬 줘. 부탁이야.”
제 추악한 과거가 담긴 상자를 절대 열지 말아달라는 간곡한 부탁에 류제는 씁쓸해졌다.
혼자서 간신히 노력해 일어서려고 하는 사람을 매몰차게 거절하기에는 양심에 찔렸다. 류제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재경의 과거를 알게 된 값으로는 나쁘지는 않았다.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어?”
알코올이 돌 무렵 류제가 물었다.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사 온 맥주도 다 마셔버리고 홀짝홀짝 도수 높은 양주를 들이켜던 재경이 고개를 저었다.
“할머니 보러 갔다 왔어.”
“건강하셔?”
“중학생 때 돌아가셔서 납골당에 모셨어. 옆자리에 부모님도 있으니 설날이라고 다 같이 모였겠지 뭐.”
자기만 빼놓고 다 같이 모여 놀고 있을 거라 생각한 재경은 상상만 해도 행복하면서도 슬퍼서 눈가가 시큰거렸다.
용케 부모님도 같은 납골당에 모셨다는 말을 알아먹은 류제는 재경도 처지가 저 못지않다는 사실에 동질감이 들었다.
“부모님은 어쩌다 돌아가신 거야?”
“세 사람 다 교통사고. 세상에서 차가 제일 싫은데 차 운전으로 먹고살게 될 줄은 몰랐네.”
설날이라 그런가 재경도 류제처럼 싱숭생숭했던 듯하다. 잘되는 것처럼 보였던 일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는 기분인 걸까. 류제는 조심스레 짐작해 보았다.
“돌아오면서 어렸을 적 할머니랑 살았던 터에 가봤는데 아파트가 들어섰더라고. 분양가를 봤는데 엄두가 안 나더라. 알고는 있었는데 그냥 멍청해져서. 혼자 있는 게 싫었어. 그렇다고 고모한테 찾아가기는 죽어도 싫고.”
연거푸 술을 마신 재경은 짧은 시간 동안 제 주량을 한껏 넘어서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말도 횡설수설하고 헛소리를 하던 그는 아무렇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지 못한 건지 눈물을 지었다. 재경이 자책했다.
“난… 난 할머니와의 추억도 제대로 못 지켰어.”
“울지 마. 사람은 다 실수하면서 자라는 거잖아.”
“다 망쳤어. 고등학교는 졸업하겠다는 마지막 약속도 결국엔 이 꼴이지. 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남들은 다 앞서 나가는데 질척질척한 진흙 바닥에 발이 묶인 그는 아무리 기어도 제자리걸음만 걷는다.
평생을 벌어도 못 살 곳이니 할머니와의 추억도 손쓸 새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아무것도 몰랐던 어린애였던 그에게 그곳을 지킬 방법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다 허망해서. 아무것도 잡아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과거란 놈은 언제든 제 뒤통수를 후려쳐 미래를 앗아가려 도사리고, 재회한 류제와의 관계는 막 삶아낸 명주실처럼 힘이 없다.
열등감, 슬픔, 억울함, 후회. 하필이면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류제 앞에서 약해져 버리고 만다. 다 빌어먹을 기억 때문이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이 술에 취해 서럽게 우는데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을쏘냐. 하물며 마음이 강철처럼 단단한 것 같았던 재경이 우는 것을 처음 본 류제는 따뜻하게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그의 과거의 자세한 내막이나 상처는 모르겠지만 하잘것없는 사춘기 소년의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평생 타인의 감정에 무관심하게 살았던 류제는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주는 법도 몰랐다. 다만 류제는 재경이 조금만 더 자기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내게도 기대주었으면 좋겠어. 외로움을 채워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어떤 드라마의 대사였던가. 지금껏 외웠던 수많은 대사 중에 저런 말이 문득 떠올랐다. 거짓된 가면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진심을 표현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류제는 재경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입술을 서로 맞댔다. 키스는 짰다. 서러움을 모두 마셔버리려는 듯 류제는 버드 키스를 쪽쪽거리며 점차 재경을 아래로 눕혔다.
어안이 벙벙해 보이는 재경은 술기운 때문에 영문을 몰라 훌쩍거렸다. 조금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취한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못된 짓거리다. 하지만 여기서 그가 먼저 선을 넘지 않는다면 재경은 영원히 선의 바깥에 머물며 외로워할 것만 같았다.
“재경아.”
어느새 바스락거리는 침대 이불 위에 누운 그의 옷을 벗긴 류제는 작게 눈웃음을 지었다.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짓거리인 건지 재경은 류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읏, 왜……!”
“어쩔 수 없는 감정은 쏟아내야 편해져.”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좋다. 감정을 한 데로 집중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그의 외로움이 조금은 사라질까.
류제는 욕심을 부렸다. 걱정했는데 딱딱하게 닿는 것이 제대로 흥분했다. 타인의 손길이 어색해서 금방 달아오른 듯했다.
“우아앗, 윽, 흐윽! 왜 나……!”
그의 것을 꾹 밀어 넣는 격통에서 술이 깬 건지 후배위에서 고개가 침대에 처박혔던 재경은 어리둥절했다. 꽉 조이는 감각에 류제는 금방 다다를 뻔했다.
저 좋다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한때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류제는 스쳐 지나간 수많은 연인들 앞에 서있으면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막막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다.
이 사람과 이런 행위를 집중하고 싶지 않을 만큼의 혼란스러움이 닥치지만 당장 앞에 있던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분위기에 휩쓸려 첫 여자 친구와 관계를 맺었던 류제는 정신과 몸의 괴리감에 토할 것 같았다. 이런 게 아니다. 이런 건 사랑이 아닌 것 같아. 그럼 사랑이 뭐였더라?
새까만 밤, 하얀 가로등 아래에서 입을 틀어막은 그는 어질어질한 기운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고쳐지지 않은 줄 알았다.
풀리지 않는 성욕도 비틀려 가니 점점 더 사랑이라는 감정을 모르게 되고 있는데 지금은 아니다.
“하아, 재경아……!”
“처… 천천히! 무… 뭔지는 모르겠지만 좀……!”
뒤늦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심장이 벌컥벌컥 뛰어댔다. 상기된 볼을 쓰다듬는 류제의 손이 벌벌 떨려왔다. 이만큼 그가 절제가 없었던가?
질펀하게 교환하는 사랑의 감정에는 거부가 없었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재경도 적극적으로 몸을 탐했던 것 같다.
벌게진 얼굴을 쓰다듬으니 엄지손가락을 앙큼하게 깨무는 그의 눈이 사랑스럽다.
아침에 잠에서 깬 류제는 재경이 옆에서 자고 있는 걸 보고 드디어 새로운 관계가 시작하는 것인가 두근거렸다. 새집이 된 머리를 귀엽게도 쓰다듬자니 재경도 눈을 떴다. 그가 처음 한 말은 조금 어이없는 농담이었다.
“엉덩이 두 짝으로 갈라지겠네.”
“그건 원래 두 짝이야.”
재경의 상태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어제 있었던 사고 아닌 사고에 대한 감정이나 일말의 후회도 없이 평소와 같았다. 불안해진 류제가 입을 열었다.
“재경아, 어제―”
“커피 마실래?”
의도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끊고 크게 하품한 재경이 옷을 미적미적 갈아입었다. 매끈한 등을 보니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 태연함은 뭘까.
“안 마시려면 말고.”
“한 잔 부탁해.”
보통 여기까지 왔으면 상대도 무언가 변해야 하는 게 아닌가. 설마 거절한 건가? 이런 것까지는 생각지 못한 류제는 막막했다.
뭐가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도통 짐작할 수 없다. 불안해서 말이 안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어제 일을 입에 담았다가는 재경은 정말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