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2)
일적으로 짧게 만나고 헤어지는 인스턴트식 환경에 익숙했던 류제는 손이 닿을 듯 말 듯 한 애매한 관계가 어색했다.
그는 타인이 먼저 다가와 주는 게 당연한 인생을 살았다. 그런 그가 만나버리고 만 재경이란 이질적인 존재는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싱숭생숭한 류제는 여태 고민에 빠졌다.
[(읽음) 그럼 약속은 따로 없는 거지?]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자 류제가 곧바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과연 어떻게 나올까.
숨 막히는 스케줄 때문에 받은 고통을 매니저에게 풀어내는 오만한 사람이야 널리고 널렸지만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류제는 일이 끝나면 매니저도 내버려 두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편이었다.
일 외적으로 연락받는 게 끔찍하게 싫고 귀찮았는데 스케줄이 비는 날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짓거리를 자신이 하고 있다는 걸 소파에 누워있던 류제가 문득 깨달았다.
[(매니저 재경이): 너 그때 스케줄 없지 않나?]
[너 없으면 나도 없는 거니까 시간이야 있지.]
진동이 울리며 두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류제가 금방 답변을 보냈다.
[그러긴 한데.]
이걸로는 부족하고 변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아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따라 엄지손가락을 더듬거리는데 그 전에 메시지가 읽히고 답변이 도착했다.
[(매니저 재경이): 네가 괜찮다면야 ㅇㅇ. 도움 될지는 모르겠지만.]
좋았어. 드디어 넘어왔다. 성취감을 느낀 류제가 눈을 찡긋 감고 히죽거렸다. 붉은 기가 도는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가지런한 이가 보였다.
그 감정을 엄지손가락을 통해 누르니 기쁨이 철철 보이는 문장 하나가 완성되었다.
[나야 당연히 괜찮아.]
다른 친구들에게는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없는데 그토록 원하던 동성 친구라서인가.
아니면 또 매니저를 갈아 치우는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오래 남아 일하기를 바라서일까. 재경에게 이것저것 참견하려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최장 기록이었던 마의 3개월을 넘겨서 기대감이 커진 게 분명하다. 이런 관계가 쭉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런데도 호감이 아닌 돈으로 얽힌 관계라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연예인과 매니저의 관계는 간단하고도 복잡한 것 같았다.
[(매니저 재경이): 그럼 갈게.]
연예인이라는 상품을 잘 닦아주는 게 매니저가 존재하는 이유지만 류제 그도 감정을 가진 사람이니까.
돈을 받으며 하는 일이니 매니저가 담당 배우 편하게 신경을 써주는 게 당연했다. 그걸 알았던 이전 매니저들은 말 안 해도 알아서 이것저것 대령했지.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 내가 재경한테 갑질을 하는 건 아닐까? 사적으로는 연락하지 말라 했던 것도 나였는데. 나 완전 자기 멋대로 살았구나. 매니저의 관심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어.
[(읽음) 그때 다시 이야기할게.]
류제가 보낸 메시지는 몇 분 후에 읽혔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대로 끝인가 허무할 만큼 대화 한번 간결하다. 30분 동안의 밀당 끝에 약속을 얻어낸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아.”
소파에 누워 보낸 문자를 확인하던 류제는 제 행동이 부끄러워졌다. 대본은 안 보고 이게 뭐 하고 있는 건지.
열이 나는지 류제가 손바닥으로 제 이마의 온도를 재보았다. 지금껏 드러나지 못했던 수컷의 DNA에 박힌 사냥 본능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눈을 뜬 것처럼 조바심이 났다.
잠깐. 아니지. 매니저가 사적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약속이지 않았나. 그가 매니저에게 연락하는 것은 사적인 게 아니라 일 아닌가? 감정의 대중성을 위해서라도 배우의 마음에 공감해 줘야지.
그렇다고 쉬는 날 불러내는 것부터 시작하면 언행불일치에 사람이 없어 보였다. 고민하던 끝에 스케줄이 비는 날 연기를 봐달라며 빌미를 잡긴 했는데 어쩐지 마음이 찔렸다.
재경이라면 이성애자에 선을 잘 지키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류제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니지. 이건 명백히 갑질이야. 괜찮은 건 나뿐이고 재경이 싫어하면 어떻게 해. 으으, 억지로 오지 않아도 되는데.
[혹시 오기 싫으면 무리하지 않아도]
잘 써 내려가던 메시지를 다시 지운 류제는 앱을 종료하고 화면을 껐다.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말자.
뭐든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따져보면 같이 일하는 입장에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회식이 여태 괜히 있었겠어.
그런 차원에서 매니저가 숙소로 찾아오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고. 그가 늦잠 자거나 연락이 안 될 때 몇 번 들어와야 할 거고.
약속한 그날이 올 때까지 열정적으로 촬영에 임하는 류제의 얼굴이 활짝 폈다. 종종 촬영장에 오는 팬들에게 인사하는 그의 사진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곧잘 올라왔다.
[와씨, 신리 요즘 왤케 물오름? 표정 진짜 개좋아.]
해변에 널린 모래알처럼 많은 인터넷 글 중에 그런 글이 눈에 들어왔던 류제는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들어와.”
“어어, 고… 고맙다.”
초인종 소리가 들릴 때부터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던 류제가 냉큼 문을 열었다. 매일 주차장에서만 기다리다가 처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재경은 낯선 집 안 전경에 긴장한 듯 보였다.
류제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재경을 겸손한 척 이끌었다. 집은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놔 시원한 데다 정리정돈도 칼 같아서 빈틈없는 성격이 돋보였다.
“별거 없어.”
“별거 없긴. 우리 집은 원룸이구만. 그걸 비교하면 궁궐이지.”
재경은 신식 아파트에 눌리지 않으려 고개에 힘을 주었다. 류제는 익숙했던 집 안이 객관적으로 덧씌워졌다. 남자가 혼자 사는 집인 데다 성격이 이래서인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집들이 선물로 뭘 사 갈까 고민하다가 이거 샀는데 잘했네. 뭐라도 좀 장식해라. 넓은 집 아깝다.”
“나중에 시간 나면. 오, 예쁘네. 선인장이야?”
“관심 덜 주면 잘 자란대서.”
작은 화분 두어 개를 꺼내 아무 데나 둔 재경은 앉아도 되는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한번 와봤으면서 뭘 그리 두리번거려.”
“그때는 문만 열고 던져놔서 몰라. 주정뱅이네 집 둘러보다 도둑으로 몰리기 싫었어.”
부정할 생각은 없었는지 재경은 그때 류제를 집까지 데려다준 장본인이 맞다고 깔끔하게 인정했다.
선물용 선인장은 재경이 원하는 자리에 두었다. 구경 좀 하고 어련히 소파에 앉겠거니 했던 류제는 부엌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뭐 하면서 쉬었어?”
“네가 보라고 한 드라마 봤는데.”
“어쩐지 답변이 늦더라.”
며칠 전부터 재경이 류제가 빌려준 OTT 계정으로 류제 주연의 드라마를 보는 중이라고 말해주었다. 재미 여부에 대해선 딱히 말이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매니징하는 배우가 했던 드라마인데 소감이 영 무덤덤하다. 류제는 엉덩이가 절로 들썩거렸다.
“어땠어? 재미있었어?”
“그냥저냥. 보는 중이라서 몰라.”
아무리 드라마에 관심 없는 남자의 입장이라지만 평가가 박하다. 류제는 풀이 죽었다. 연기가 별로였냐고 곧바로 물어보기에는 성격이 적극적이질 못했다.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싶지만 억지로 드라마를 보게 한 것도 최악인데 사소한 것까지 꼬치꼬치 캐물으면 숙제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점심은 언제 먹었어?”
“열두 시쯤인가 그럴걸.”
“그럼 뭐라도 좀 먹을까?”
“집 안 꼴을 보자니 냉장고 안도 텅텅 비게 생겼구만 먹을 게 있냐.”
“배달시켜야지. 한 시간 정도 걸리니 그동안 봐주면 되겠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거든. 다들 괜찮다고만 하는데 난 좀 아닌 것 같아서 네 눈으로 평가받고 싶어.”
“부담스럽네. 내가 뭐라고.”
“배우 신리의 위대한 매니저님이지.”
탄산수와 선물받은 청으로 얼음을 동동 띄워 에이드를 만든 류제가 재경에게 웰컴 드링크를 건넸다.
여름 뙤약볕에 찔찔 흘린 땀을 에어컨 바람으로 말리며 어색함을 숨기던 재경이 벌컥벌컥 음료수를 들이켰다. 탄산이 목구멍을 찌르자 얼굴이 새빨개진 그가 기침을 한껏 참았다.
“괜찮아?”
“크헥, 켁. 물인 줄 알았어. 요즘엔 정수기에서도 탄산이 나오냐?”
“신기하지? 쓸 만해.”
“별 게 다 나오네.”
입가에 흐른 음료를 손등으로 닦아낸 재경은 류제가 주는 물티슈로 마저 손을 닦아냈다.
“밖에 덥지? 땀이 엄청나네. 그냥 샤워 먼저 할래?”
“됐어. 그 정도는 아냐. 여름이 오기는 오는구나. 좀 걸었더니 땀도 나고.”
가방을 벗어서 옆에 둔 재경이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불편해했다. 들어올 때부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었다.
평범한 사람이 티브이에나 나오는 연예인의 집에 놀러 오는 경우도 드물어서 그런 건가 싶다가도, 애초부터 류제가 배우든가 말든가 관심이 없던 재경이 저러는 이유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낯선 자의 영역에 들어왔을 때 사람은 불편함을 느끼곤 하지. 재경은 이 집에 들어올 만큼 나와 친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 어딜 봐줬으면 한다고?”
이쯤 되면 슬슬 가까워질 법도 한데 말이야.
“이 부분인데.”
연구용 대본을 꺼낸 류제는 다음에 촬영할 신을 보여주었다.
“읽어봐도 돼?”
“지저분할 텐데. 자.”
대본을 넘겨받은 재경이 캐릭터 연구 흔적을 보고 감탄했다. 대사를 하며 느낄 캐릭터의 생각과 눈빛, 화를 낼 때의 버릇 등이 적혀있다.
“설렁설렁하는 것 같았는데. 얼굴만 잘생긴 게 아니네.”
“하하하, 그게 첫 소감이야? 잘생겼다니 새삼 고맙네.”
“난 글만 읽으면 졸려서. 그리고 네가 안 잘생겼으면 누가 잘생긴 거냐? 카메라만 받으면 번쩍번쩍하는 놈이.”
재경이 빼곡하게 메모의 흔적이 남은 대본을 차르르 넘겼다. 아무 인덱스를 붙잡고 류제가 동그라미 친 대사를 몇 흘겨보던 재경이 모르겠다며 대본집을 닫았다.
배우의 대본까지는 그의 흥미의 밖인 듯했다. 일반인이라면 경험할 수 없는 봐서 신기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말할 만큼 반응이 평범했다.
“중학생 때도 국어 시간에 소설은 읽잖아. 상대가 무슨 심정인지 고민하면 재미있지 않아?”
“국어 안 좋아해. 공부하기도 싫었고. 맨날 땡땡이쳐서 졸업도 간신히 했어.”
“그래? 공부가 싫어도 고등학교는 가는 편이 나았을 텐데. 전문계는 바로 취직할 수 있으니.”
“…사정이 생겨서. 나도 입학은 했었어. 근데 지금 그게 중요하냐?”
재경이 말을 돌렸다. 류제가 사적인 일에 개입하지 말라고 했던 것처럼 재경도 사생활에 입을 담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안 간 이유는 말해줘도 되지 않나. 사정을 알면 류제도 어느 정도는 배려해 줄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이었다.
한창 촬영 때라 바빠서 쉴 시간도 부족할 텐데 늘 제시간에서 30분 일찍 와 주차장에서 기다리는 것도 그렇고, 태블릿에 메모해 둔 스케줄 표를 보면 불성실한 건 아닌데.
중졸을 빌미로 타인에게 약점을 잡히는 게 싫은 건가. 내가 그렇게 못 미덥나?
“것보다 어디라고? 모르고 덮어버렸네.”
“아, 이 부분. 여길 잘 보면―”
류제는 대본에 적힌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자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 남자 주인공은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지만 솔직하지 못해 매번 고생한다.
게다가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안다. 쩔쩔매던 남자 주인공이 어떤 계기로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에 하는 대사.
“너라면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마음일 것 같아?”
재경은 옆에 둔 웰컴 드링크의 얼음이 녹아 짤랑거릴 때까지 고민했다.
“이런 말 자체를 못 할 거 같은데. 주인공의 용기가 가상하네.”
“그럼 어떤 용기로 말했을 것 같은데?”
“잘생겼으니까 제 얼굴 믿고 했겠지.”
예상치 못한 답변에 빵 터져버린 류제가 배를 잡고 웃었다.
“그게 뭐야. 넌 내 얼굴인 사람이 고백하면 냉큼 받아줄 거야?”
“여자라면 보통 그러지 않냐? 나 좋다는 사람이 없어서 나도 몰라 짜샤. 네 상대역도 호사네. 그때 봤던 강세라 배우님이지?”
“세라 선배가 호사가 아니라 내가 호사지. 그분 커리어가 대단하시거든.”
류제는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이해가 안 되는 대본을 반복적으로 읽고 있는 재경은 멍청한 고양이처럼 고개를 연달아서 갸웃거리고 있었다. 류제가 설명을 덧붙였다.
“별 마음 없는 사람이 고백하면 싫을 때가 있잖아. 예를 들어… 얼굴만 아는 조연출이 고백을 하면 난감하지.”
“곤란하겠지만 근데 또… 사람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사귀다 보면 좋아질 수도 있고.”
“그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당하면 질려. 좋아하는 감정도 안 생기더라고.”
“와~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배알 꼴리네. 인기남의 고민도 별거 없구만. 그건 짜샤, 너니까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래도 류제가 그런 사람들에게 꼬여 고생깨나 했다는 것을 들었던 재경은 진심으로 타박하지는 않았다. 류제도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는 건 인정했다.
“그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게 기적일 거야.”
그건 동의하는지 재경도 별말이 없었다. 서로 진실한 연애를 해봤어야 말이지. 이거 뭐 바보 둘이서 머리 싸매며 고민하는 것도 아니고. 연기 방향성에 대한 논의는 별 소득이 없었지만 류제는 재경과 고민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사담은 그만하고 진지하게 캐릭터의 심정을 고민하던 두 사람은 대본의 상황을 좁게 가정했다. 대본으로 앞뒤 상황을 파악해 보던 재경이 의외로 정곡을 찔렀다.
“고백하면 여주랑 친구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주인공도 알잖아. 그런데도 고백하는 건 위험을 감수하는 거겠지. 모 아니면 도네. 굳이 관계를 망칠 것까지야 있나.”
“관계를 망쳐서라도 마음을 알리고 싶었다거나, 고백 후 포기하려고 했다거나.”
“자기 마음의 책임을 상대방한테 돌리는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
그것도 맞는 말이다. 과연 남자 주인공은 그런 마음으로 고백한 걸까? 보통 고백은 썸 타는 관계에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알고 있는데 드라마가 늘 그렇듯 대본에 적힌 상황은 평범함과 거리가 좀 있었다.
“그럼 내가 너한테 고백하면 어떤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 것 같아?”
뜬금없는 질문을 던진 건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대본을 지적하던 재경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금세 얼굴을 구기던 재경의 귓불이 살짝 빨개졌다.
“이상한 말 하지 마, 짜샤.”
재경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겨버렸지만 류제는 순간 동했다. 그의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성애자 아니었나 싶다가도 남자가 고백한다는 상상을 하고 불쾌해서 열이 올랐을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되려다가도 말았다. 그런 이유라면 성에 안 찼다.
배달 음식이 도착했다. 서로 목이 탄 두 사람은 대본 연구보다는 전날 사둔 술을 초저녁부터 마셨다. 벼르고 있던 양주도 꺼낸 류제는 술김인지 알딸딸하니 재경의 사생활에 관심을 드러냈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검정고시를 봐. 대표님은 사연에 약해서 월급이 오를지도 몰라.”
“머리가 나빠서 안 될걸. 대학도 안 갈 건데 무슨.”
고등학교 중퇴 이야기가 계속 마음에 걸렸던 류제가 약에 쓰래도 없던 간섭을 해댔다.
“나도 대학은 안 나왔지만 고등학교 공부는 중학생 때와는 또 다르거든. 손해 보는 건 없어.”
똑같이 술에 취한 재경은 그걸 진심으로 듣지 않은 것 같지만 류제는 경험 어린 충고였다. 류제의 표정이 진지하자 재경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류제 너만 그런 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뭐가?”
“난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죄다 외계인이라고 생각했어.”
재경이 히죽거리며 시답잖은 말을 하니 류제도 따라서 웃었다.
“하하하, 그래? 나는 외계인처럼 안 보여?”
보통 스크린이나 매체에 노출되는 이미지만 보면 그러겠다. 환상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이니까.
그런 사람들도 친구와 놀고, 영화를 보고, 별 내용 없는 책을 읽는다는 게 와닿지 않겠지만 그들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단지 화려함과 타인의 관심에 중독될 가능성이 높다손 뿐이지.
“잘생긴 괴짜인 건 알겠다. 말하는 건 딱 우리 할머니 같은 게. 으리으리한 궁궐 같은 데에서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평범하고.”
“처음엔 궁궐이라고 말해줬잖아. 너무하네. 뼈 빠지게 일해서 장만한 건데.”
“그건 내 원룸하고 비교했을 때지. 우리 원룸은 딱 누울 데밖에 없거든.”
류제의 아파트는 재경이 언젠가 사려고 정했던 목표치와 흡사했다. 집값이 어림도 없어서 재경의 월급으로는 언제쯤에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평생 원룸 신세일 것 같은데.
“혼자 사는데 이 정도면 충분해. 이 이상은 나도 돈 없어서 못 가.”
“하아, 난 언제 내 집을 가져보려나.”
“넌 부지런하니까 금방 잘될 거야.”
“으하하, 중졸은 안 부지런하면 못 먹고살아. 응원해 줘서 고맙다, 짜샤. 덜 부지런하려면 검정고시를 보긴 해야겠네.”
재경이 이를 보이며 웃는 것을 류제는 지금 처음 보았다. 항상 뚱하게 입술을 내밀곤 했으니.
못마땅하게 미간을 찌푸린 얼굴이 디폴트라 사람들이 오해할 때가 많았는데 평소에도 지금처럼 장난꾸러기처럼 있으면 참 좋겠구나 싶었다.
비실비실 웃던 재경은 젓가락질로 음식을 헤집다가 건질 것이 없자 소스만 쪽 빨아먹었다. 아직 맥주가 남아있다.
“안주가 다 떨어졌네. 더 시킬까?”
류제가 핸드폰 앱을 뒤졌다.
“배달비니 뭐니 돈 아까워. 만들어줄 테니까 말만 해.”
재경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성격이 저래서 칼을 쥘 줄 모르는 줄 알았던 류제가 불안해하며 따라갔다.
“뭐야. 먹을 거 많네.”
재경이 멋대로 남의 집 냉장고를 열었다.
“식단 조절 중이라 날것들만 있어.”
“해먹으면 되지 굳이 배달은 왜 시키냐?”
“네가 오는데 풀떼기만 줄 수는 없잖아.”
“그건 그렇지.”
냉장고에서 아무 재료나 꺼내는 것 같던 재경은 의외로 요리를 잘했다. 재료 손질은 물론 칼을 다루는 법도 알고 불을 잘 썼다. 보육원에 있을 당시 선생님들을 도와 요리를 했었던 류제가 보기에도 제법 능숙했다.
“솜씨가 좋네.”
“얌마, 혼자 살면 다 늘어.”
“혼자 자취한댔지?”
고아인 데다 데뷔를 어린 나이에 했던 류제는 경우가 특별했지만 뒤풀이할 때 조연출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요즘엔 독립을 늦게 하는 추세라고 했다.
원래라면 대학에 다닐 나이에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오다니 가족들과 사이가 안 좋은 걸지도 모르겠다. 중졸로 학력이 끝난 것도 그거랑 연관이 있나?
“나도 혼자 살지만 귀찮아서 시켜 먹게 되던걸.”
“넌 돈 많고 바쁘잖아. 그럼 시켜 먹을 자격이 되지.”
재경이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다. 남의 집 기구를 제 것처럼 쓰는 재경을 류제가 내려다보니 시선을 느낀 재경이 고개를 돌렸다. 생각을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류제와 마주쳤다.
“식당에서 일했으니까 잘하는 거야. 요리 못 한다고 풀 죽지 마라. 짜샤.”
접시에 안주를 담은 재경이 다 쓴 기구를 싱크대 안에 넣고 물을 틀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는 것이 기분이 좋아 보여서 류제도 마음이 풀어졌다.
덕분에 묻지도 않았는데 재경의 과거 이야기를 조금 엿들을 수 있었다.
“막노동했었다며?”
“맨날 했겠냐? 가게에서 쫓겨나서 그랬지.”
“실수라도 한 거야?”
거기까지는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는지 재경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류제가 걱정하는 이유를 착각한 그가 적당히 둘러댔다.
“사고 친 건 아냐. 사장이 돈을 안 주잖아. 신고하겠다고 난리치니까 쫓겨났어.”
“질 나쁜 사람한테 걸렸구나.”
다시 거실로 온 재경은 졸졸 쫓아오는 류제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새 맥주 캔을 뜯었다.
“덕분에 몇 달 치 월급도 못 받았어. 월세도 못 내게 생겨서 급하게 막노동 좀 뛰었지.”
“그럼 막노동만 한 게 아니라 요식업 종사자였네. 그렇게 말하면 대표님도 부드럽게 대해줬을 거야.”
류제가 치켜세워 주자 재경이 술김에라도 긍정할 수 없었는지 고개를 저었다.
“대단한 게 아니니까. 간신히 있는 돈 탈탈 털어서 월세 내고 남은 돈으로 벤치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는데 네가 말을 걸잖아. 뭔 이상한 놈이 신세 한탄을 하는데 털어낼 힘이 있어야지. 참나.”
듣고 보니 재경의 입장에서 고주망태 류제의 행동이 어처구니가 없을 만도 했다. 인생이 더러워서 벤치에 앉아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는데 허우대 멀쩡한 놈이 하찮은 인간관계 고민을 늘어놓고 있더라.
그걸 듣고 재경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류제는 뒤늦게 술이 올랐다.
“그 귀중한 술을 나한테 한 캔 주었단 말이지. 고맙네.”
“구구절절 시끄럽게 구니까 그거 마시면서 닥치라고 한 거였는데 자꾸 떠들더라. 그래도 뭐, 덕분에 부정적인 생각이 싹 가셨어.”
부루퉁하게 볼을 부풀린 재경이 구시렁거리며 변명했다. 당시 재경의 절망적인 상황을 떠올리자니 류제 그의 고민은 너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식당 사장한테서 돈은 받았어?”
“못 받았으니까 여기에 있는 거 아니겠냐.”
“노동청에 신고하면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래? 노동청까지 가야 해?”
“인터넷 접수도 가능할걸.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받을 수 있어. 도와줄까?”
“내가 알아서 할게. 받을 수 있다니 뭐.”
재경은 남의 손을 빌리기를 거부했다. 그런 것까지 참견하기에는 이른 건가. 거리감을 재는 데에 서툰 류제는 아리송한 마음을 뒤로하고 새 맥주 캔을 땄다.
이야기는 금세 다른 곳으로 흘렀다.
“하하하, 그 배우가 진짜 대박이긴 해. 자존심이 세서 보는 나도 기가 빨려.”
“와, 바로 앞에 있는 핸드폰도 자기 매니저 시켜서 들게 하다니. 손발이 없나 했다니까. 넌 그런 거 보고 배우면 안 된다.”
“날 그런 눈으로 봤단 말이야?”
주절거리며 농담 따먹기를 하던 류제는 오랜만에 후련하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은 기분이었다.
아이돌인 승아와 나르, 미나, 혹은 모델 솔라와는 스케줄이 안 맞을 때가 많다.
특히 성별이 달라 사소한 공감을 나눌 상대로는 부족했는데 그녀들과 알아온 7년의 세월보다 앞에 있는 이 사람과 훨씬 말이 잘 통했다.
언제 잠이 든 건지 류제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깼다. 숙취 때문에 아픈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일어나니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까지 소파에서 팔자 좋게 누워있었다.
재경은 그게 제 일이라는 것처럼 어질러진 그릇들을 치우고 쓰레기를 비우는 중이었다. 청소기를 돌리려는 참에 소파에서 일어난 류제가 뒤집어진 머리를 긁적거렸다.
“벌써 일어났어? 느긋하게 쉬어도 되는데. 정리는 내가 할게.”
“초대해 줬는데 이런 거라도 해야지. 밥도 얻어먹었고.”
크게 하품을 한 류제도 뒤따라 설거지를 했다. 같이 해장이라도 하면 좋을 것을 재경은 한사코 괜찮다며 오전 중에 비틀비틀 집을 나섰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연습 잘해라. 별 도움은 안 된 거 같은데.”
“아냐, 충분히 도움 됐어. 잘 가. 다음 주에 봐.”
현관문을 닫으니 집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익숙하면서도 재경의 흔적이 남아 어수선했다. 피식 웃은 그가 졸린 눈을 끔벅이며 물을 찾았다.
정수기가 탄산수로 설정된 줄 모르고 따라 마시던 류제가 어제 재경이 그랬던 것처럼 물을 뿜어내고 말았다.
“아하하하.”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던 류제가 못내 웃음을 터뜨렸다.
* * *
류제도 처음에는 중졸에 막노동을 했다는 배경 하나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경의 내면을 훔쳐보다 보면 무식한 걸 부정 못 해도 나쁜 짓을 할 사람은 못 된다는 건 확실했다.
“예, 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수고하세요.”
이제는 돌아오는 인사가 없어도 제작 팀에게 인사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이따금 활짝 웃는 얼굴에도 진심이 담겼다.
생색내기도 바쁠 친절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부분이 귀엽다. 퉁명스럽지만 잘 챙겨주는 재경을 달리 보는 사람도 꽤 생긴 것 같다.
마음이 들뜬 류제는 자꾸만 재경에게 눈길이 갔다. 내 매니저가 실은 꿈에 그리던 좋은 사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주고 싶었다.
부끄러우면 미간을 찌푸리면서 귓불이 빨개지는 게 귀엽다. 지금처럼 나를 발견했을 때 호기심으로 빛나는 고양이 눈을 반짝거리며 친근함을 자랑하면 찡할 듯이 심장이 아팠다.
“안 마셔?”
밤늦게까지 촬영하고 있는 와중에 지친 류제가 헛것을 본 것처럼 재경을 꽉 끌어안았다.
“뭐… 뭐야. 연습하는 거야?”
어리둥절한 재경은 맞춰주려고 한 건지 어색하게 손을 들어 도닥거렸다. 몸이 순간 통제를 벗어나 암전이 되었던 류제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제정신을 차렸어도 이 온기를 놓치기 아쉬웠다. 이내 연기할 때처럼 가면을 쓴 그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기운 좀 얻었어.”
“아까 그 부분 진짜 괜찮았어. 감독님 반응도 좋더라. 좀만 있으면 연습했던 장면인데 힘내라.”
들뜬 재경이 신나게 자랑했다.
“응, 너도 힘내.”
다혈질 기색이 있는 듯했던 재경은 자세히 보면 사람을 잘 챙겨주곤 했다.
이상하게도 류제는 이런 두근거림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을 연기할 때는 이것을 흉내 내며 거짓말했다. 타인을 향한 적당한 상냥함도, 친절함도 모두 그가 알고 있는 이 두근거림에서 하나씩 따왔다.
그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데 뭘까. 망각한 무언가를 향한 갈구는 방향성을 잃었다. 옛날, 기억에서도 흐릿한 학창 시절의 추억 속 스포트라이트가 켜진 벤치 옆에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신리 배우님! 촬영 다시 시작할게요!”
“지금 갈게요.”
재경과는 그때 처음 본 사이다. 게다가 재경은 돈을 벌겠다는 목적만 있을 뿐이다. 매니저라서 챙겨주는 거지 사랑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타인이 귀찮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질려했으면서 반대의 입장이 되어버린 류제는 심정이 복잡했다. 잘난 듯이 말했어도 검정고시를 치라며 사생활에 개입하는 건 류제 그이지 않는가.
“그 사람이 아냐. 내가 보는 건 너야. 그냥… 그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컷!”
사람을 눈앞에 두고 벽에 부딪히는 것 같은 답답한 감정을 류제는 처음 느꼈다. 숨이 막힐 만큼 두렵다. 그 사람에게 거절당하고 지금껏 소중하게 보듬었던 마음이 버려져서 산산조각이 났다.
“이야, 아까 거 좋았어. 생각했던 것보다 표정이 더 풍부해.”
“정말요? 며칠 동안 고민했는데 다행이네요.”
상대역과 고백을 연기할 때 재경을 떠올렸던 류제는 혼란스러웠다.
연예계 판에서는 동성애는 드물지 않다. 누가 그렇다더라 소문도 잦지만 본인이 남자에게 호기심을 보일 것이라고는 류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오래가지 못했지만 지금까지 사귄 사람들은 모두 여자였고, 사귀고 싶게 마음이 동한 것도 여자였으니. 그런데 왜 재경을 보고 있자니 처음 연애할 때처럼 두근거리지?
저 사람만 특별하게 관심이 가고 바라보게 되는 이유가 뭘까? 뭐가 특별해서? 눈매가 매력적일 뿐인 평범한 남자잖아.
참 어렵다. 착각일 뿐이라며 내버려 두자니 어딘가가 걸렸다. 주정뱅이에게 고해성사를 들어도 남에게 말하지 않을 만큼 눈치 있고, 술에 취하면 애교도 있다. 나는 그런 반전 있는 성격에 약한 건가?
더군다나 저 눈. 샐쭉하면서도 또랑또랑한 고양이 같은 눈이 뿌옇게 사라져버린 어떤 기억을 자극했다.
뭐였더라. 누가 있었던 것 같은데. 생각이 날 듯 말 듯 해서 잠시 머리가 아팠다. 요즘에 이런 일이 많은 것 같았다.
“왜? 어디 아프냐?”
오늘도 류제의 집에 놀러 와 제가 좋아하는 요리를 두 접시 해서 거실로 돌아온 재경이 관자놀이를 짓누르는 그에게 물었다.
“아니…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아무것도 아냐.”
“싱겁기는.”
이내 지금이 덮어씌워진 류제는 흐릿한 기억을 떨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했던 드라마의 일부분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기억일 게 뻔했다.
* * *
16부작 드라마 촬영이 4~5개월쯤 걸리고, 봄부터 촬영에 들어갔으니 사상 최악으로 덥다던 여름이 지나갈 무렵 촬영도 후반부에 들어섰다.
흥행은 기대감만큼 뜨거웠다. 며칠 전 예정했던 대로 첫 방영이 이루어졌는데 인터넷 사이트마다 이 드라마 이야기로 달아올라서 류제도 지인에게 조회 수가 높게 나온 기사 몇 개를 받아보았다.
더불어 배우 신리를 향한 열망의 목소리가 모여 하루가 멀다 하고 축하 선물이 도착했다. 소속사를 통해서 들어오는 배우 신리의 선물이 벌써 회사 사무실 두 개를 차지했다.
나날이 늘어가는 선물들 좀 집에 가져가라며 윤 대표가 바쁜 류제를 굳이 불러 말했다.
“그냥 여기 두면 안 돼요?”
“감당 못 해. 이게 다 저번 주부터 오늘까지 도착한 거야.”
방에 한가득 쌓인 택배들은 류제가 어쩌지도 못하는 것들로 추정된다.
요즘엔 조공이라고 현장에 밥차나 도시락 등을 지원해 주는 게 대세인데 이번 드라마로 다양한 연령대에서 인기를 얻다 보니 물류 창고도 아니고 소속사를 통해서 별별 것들이 다 들어왔다.
“많기도 하네요.”
“제발 네가 알아서 처리하고, 회사에다가 쌓아놓지 마.”
제 것 아니라는 양 건방지게 구는 류제의 태도가 거슬리는지 포르테가 못마땅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제발 마카롱 같은 건 좀 그만 보내라고 해라. 자기 좋아하는 배우를 뭐 그렇게 살찌우고 싶어서 난리야?”
“직원분들 주라고 그러는 거예요. 나눠주는 게 어때요? 기왕이면 저 가방들도…….”
“너 진짜 어지간하다.”
류제는 포르테의 핀잔이 더 어지간했다.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지만 받는 것도 받는 사람 마음 아닌가. 그러니 마음만 받겠다는데 그게 뭐.
제 것이 아닌 물건은 집에 들이지 않는 이상한 결벽증이 있는 류제는 필요도 없는 물건들로 방을 장식하는 것이 제일 끔찍했다.
집에서는 배우 신리가 아닌 류제로 있으면 안 되는 건가. 할 수만 있다면 플라나리아처럼 싹둑 잘라서 분리했으면 좋겠다.
“뭐든 팬들은 모르게 해. 이미지로 먹고사는 놈이 자가당착에 빠졌다는 소리 들을까 봐 무섭다.”
“그럴까 봐 SNS도 안 하잖아요.”
“남들 입에서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러니까 대표님 앞에서만 하는 거 아니겠어요? 개인 조공은 금지한다고 진작 공지했어야 했는데.”
그의 실체를 알면서도 데뷔를 시켰던 포르테는 저놈의 망할 성질머리가 언제쯤 정신을 차리려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만한 애처럼 굴면 업계에서 오래 못 살아남는다고 잔소리했던 게 바로 엊그제다.
뭘 해도 그의 외모가 알아서 그를 먹여 살릴 테지만 요즘에는 흠 하나 잡히면 죽을 때까지 물어뜯기는 경우가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윤 대표는 류제가 개인 SNS를 안 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안 그랬으면 저 천하의 재수 없는 주둥아리가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날 뻔했으니.
“팬들의 관심과 사랑을 진지하게 여겨주진 못하더라도 무시는 하지 마.”
“무시 안 해요. 시시해서 그래요.”
“그러다 너 좋아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무시당해야 정신 차리지.”
“그런가요?”
그건 좀 싫을 것 같다. 하지만 너무 쉽게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이 지루한 걸 어쩐단 말이냐. 아무리 잘 포장해도 연예인이란 대중들의 피로를 풀기 위해 존재하는 광대에 불과한데.
일상의 쳇바퀴 속에서 몰아치는 지독한 관심은 그의 존재를 대단한 무엇인가라고 매일같이 주장하는 듯해서 싫었다.
그래서 연기가 좋다. 아무래도 좋은 타인들에게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되어서 행복하다. 진짜 나를 아는 사람은 나와 주변 사람으로도 족하다.
고급스러운 포장지에 쌓여있으면 그거로도 충분한 거 아닌가. 그 안이 진짜 명품인지는 확인해서 뭐 하게. 아니, 알 바도 아니겠지.
“촬영도 덜 끝났는데 벌써 역할놀이에 질린 건 아니겠지? 게스트 섭외서가 산처럼 쌓였으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으악, 진짜 싫다.”
배우면 배우답게 연기만 하면 될 것이지 예능에 나가서 사람들 웃음거리가 될 이유가 뭐가 있나. 예능 스튜디오에서는 캐릭터를 구축하기 힘드니까 지양하고 싶은데 그놈의 계약이 발목을 잡았다.
“빨리 활동 끝나고 칩거나 했으면 좋겠네요.”
“아무렴 활동만 끝나면 내가 뭐라고 하겠니. 너 정말 밖에 돌아다니는 거 안 좋아하는구나. 혼자 있으면 무슨 재미로 살아?”
“귀찮잖아요. 내 일상을 다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도 싫고.”
“꼴에 또 내향성 흉내나 내지. 사람들하고 잘만 어울려 다니면서. 얼마 안 있다 지루하다며 칭얼거릴 게 눈에 뻔히 보인다.”
“판타지 드라마 배역에 진지하게 몰입한 걸 빼내려면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적어도 6개월은 쉴 거니까 스케줄 잘 잡아줘요.”
어릴 적에는 그래도 연예계 생활을 위한 꿈과 열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연기하는 게 일상에 지나지 않은 류제를 보며 포르테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싫어? 그래도 그게 먹히니까 너도 먹고사는 거잖아. 통장 잔고 보고 성질머리 고쳐먹어.”
“팬들의 사랑은 좋아요. 드라마의 오글거리는 설정이 싫은 거지 연기도 좋고. 다만 그런 남자 주인공은 드라마에만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거죠. 현실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런 걸 원한다고 생각하면 좀 깨서.”
“판타지는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평생 안 온다. 운명도 결국 자기 나름이거든. 좀 더 세상 경험을 쌓는 게 어떠니. 네게도 판타지가 와야지 그 단단한 껍데기를 깰 수 있겠지.”
류제는 답하지 않았다. 말 안 해도 포르테는 최근 그에게 찾아온 새 운명을 알고 있었다.
“네 매니저는 어때. 이제는 좀 얌전해진 것 같아?”
인복이 더럽게 없는 류제의 매니저로 3개월을 넘기다니 최장 기록이었다. 남에게 관심 없는 류제는 까탈스러울 것도 없고 제 사생활만 간섭 안 하면 크게 터치 안 하는 편이었다.
관리하기 쉬워서 그런가 이상하게 별 희한한 놈들이 꼬인다. 이번 놈도 그런 놈이라고 생각했더니 오래 버텼다.
“그 어떤 매니저보다 편해요.”
“좋은 소식이네. 잠깐 할 이야기 있다고 올라오라고 해.”
책상에 앉은 포르테는 드라마가 끝날 무렵 류제가 나갈 유명 예능 리스트들을 추렸다. 끔찍한 리스트들을 흘긴 그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일정 끝나면 예고한 대로 몇 달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어야겠다.
번아웃이 아슬아슬한 류제는 연이은 촬영으로 누적된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어제도 밤샘 촬영으로 신체 시계가 박살 난 것 같은데 피곤해서 운동도 못 했다.
뭐든 드라마의 열기가 빨리 식고 다음 작품 선정할 때까지 평화를 영위하길 바랐다.
이런 건방진 마음으로 살아온 게 당연했던 류제는 일순 머뭇거렸다. 일이 끝나면 스케줄도 없으니 재경과도 잘 만날 수 없는 거 아닌가.
지금은 배우라는 직업을 심층적으로 알아보라며 드라마 연구를 핑계로 집에 들여서 자게 하거나 늦은 촬영이 끝난 후 술을 먹여서 자고 가게 하는 눈에 뻔히 보이는 수작질이 통하는데 그런 것도 어려워지지 않을까.
아냐, 지금은 집에 자주 들어올 만큼 친해졌잖아. 저번에 검정고시 보는 걸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고 했으니까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구슬리면 되겠다.
“재경이는 단순하니까.”
사람을 꾀려면 이 정도 정성은 들여야지. 제가 싫어하던 짓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짓거리를 하며 싱글벙글 엘리베이터를 탄 류제가 3층으로 내려왔다.
문이 열리니 점심때가 아니라서 사람이 별로 없는 사내 식당이 보였다. TE 소속사의 사내 식당은 싸고 맛있기로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했다.
쓸데없이 밖에 싸돌아다녀서 구설수 오르지 말고 회사에나 짱박혀 있으라는 대표 포르테 윤의 지침에 관계없이 TE 소속 연예인들은 보통 여기서 식사를 해결했다.
외식 또한 팬서비스이니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나오는 것보다는 배는 낫다는 것에 류제도 찬성했다.
재경도 바깥보다는 회사 안에서 조용히 식사하는 걸 선호했고 아까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어디 보자, 밑에서 기다린다고 했는데.
눈에 잘 보였던 칙칙한 황토색 머리카락을 최근에 까맣게 염색해서 존재감이 사라졌다. 사내 식당 옆에 있는 카페까지 온 류제가 제 친구들이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진짜 그랬구나. 혹시나 했어.”
“나도 그거 그때 다이어리에 붙어있을 거야. 나중에 찾아봐야지.”
“아직도 그걸 가지고 있었구나. 어디에 뒀더라 기억이 안 나네.”
“뭐… 남들이랑 같이 노래방 간 적은 그때가 처음이라서.”
언제 친해진 건지 제 동갑내기 다섯이서 옹기종기 모여 떠들어댔다.
처음 회사에 들어왔을 때는 여자들은 잘 몰라서 불편하다고 했던 재경은 류제와 친한 아이돌 ‘DAYBREAK’ 멤버 몇 명과 TE 소속 모델 솔라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랑하고 있었다.
여자 앞에서 히죽대는 게 어쩐지 불쾌했다.
“뭐 해?”
재경의 개인 핸드폰은 배터리 탈부착이 가능한데 어쩐지 전화를 안 받더니 핸드폰 뒤판을 분리시켜 놓고 있었다. 배터리 분리형 스마트폰은 오랜만에 본 류제가 기웃거리니 재경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아악! 류제 너 왔으면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했잖아. 뭐 하냐고.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나도 끼려고 했더니 서운하게 왜 조용해?”
핸드폰을 집은 재경이 허둥지둥 숨기는 것을 본 류제는 아리송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봐서 사진 같은 게 붙어있었던 것 같다.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대표님이 올라오래.”
“지금?”
“응, 가봐야 할 것 같아.”
회사에 쌓이고 있는 선물은 물론이고 드라마 홍보 겸 예능 출연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다며 류제를 불렀다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던 윤 대표가 재경에게도 전달 사항이 있는 모양이었다.
“왜 부르지… 또 뭐 잘못했나.”
재경은 알겠다며 자리를 비켰다. 허둥지둥 태블릿 PC를 들고 사라지는 재경을 보던 류제가 그들의 친구들에게 물었다.
“처음엔 못마땅해하더니 언제 친해진 거야?”
류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재경과 사이가 좋아진 친구들을 보며 피식 미소 지었다.
활동이 끝나서 1~2개월 휴식기를 누리는 중인 아이돌이 털털하게 앉아 디저트를 먹어대는 게 친근하다. 빡센 식단 조절에서 벗어난 그녀들의 얼굴에 혈색이 돌았다.
“저번에 너네 매니저 대신 재경이가 대타 뛰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미나, 몸은 괜찮아?”
“부끄럽게도 컨디션 조절 못 한 내 잘못이지. 쉬었더니 훨씬 나아.”
“그런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내는 사람이 많으면 얼마나 많다고.”
윤 대표도 소속 아이돌을 돈벌이 기계처럼 굴리는 타입은 아니지만 스케줄을 이행하다 보면 며칠 무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컴백과 겹쳐 정신적으로 몰렸던 미나가 건강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활동이 끝나기 직전까지 몰린 행사로 쓰러진 미나를 병원에 데려다줘야 했던 담당 매니저 대신 재경이 행사 리허설 장소까지 그녀들을 데려다주었다고 했다.
그때 동갑내기 다섯 명이 있는 단톡방에 병원 인증 샷도 보내고, 운전하는 재경의 모습도 올려줬었지. 새벽 내내 운전하느라 무대 옆에서 졸고 있는 재경이한테 장난치는 사진도 있었고.
남의 매니저 놀리는 게 뭐 그리 재미있을까. 또 자기들끼리 멋대로 매니저의 기량을 시험하는 건가 했더니 마음에 들었나 보다.
“나쁜 애는 아니더라고.”
“미나 대신 리허설도 해줬는데 그게 대박이었지.”
“나한테는 그런 말 안 했는데.”
“하하하, 영상 보여주니까 엄청 부끄러워하기는 하더라.”
“의외로 박자가 딱 맞아서~ 노래도 잘 부르니 대역에는 제격이지.”
“그래?”
몇 번 ‘DAYBREAK’의 안무 연습을 구경한 적 있는 재경이 이번 컴백곡을 열심히 듣나 했더니 그런 재주까지 부렸을 줄은 몰랐다.
재경을 경계했던 건 까맣게 잊었는지 헤실헤실 웃어댄 그녀들이 앞 다투어 경쟁하듯 자랑했다.
“재경 군, 아니 재경이가 베이킹 지도도 해줬어. 그거 알아? 한식이랑 일식 양식 중식 자격증 다 있대! 일식 부탁해 볼까.”
“진짜? 전에 식당에서 일했다고는 하던데.”
“그야 고등학교를 그런 과로 갔으니까 그렇겠지.”
승아가 옆에서 아는 척을 해댔다. 류제는 잠시 미간을 움찔했다. 재경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잠깐 친해졌다고 그새 다 떠벌린 건가. 설마 걸 그룹이라고 차별하는 거야?
“어째 나보다 너희들이 더 잘 아는 것 같다?”
“잘 아는 게 뭐 어때서.”
“모르는 게 바보 아냐?”
그러면서 그녀들은 뭔가 류제를 이상한 눈으로 훑었다. 설마 매니저에게 엄한 마음을 품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게 아닐까 뜨끔한 류제가 시선을 회피했다. 모르는 게 이상하다니. 그거야말로 말이 이상하다.
“신기해서 그러지. 나한테 여자는 좀 어렵다고 했거든.”
“신기할 게 뭐 있어. 친구인데. 너야말로 사생활 간섭하는 매니저 싫다고 했으면서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한다.”
사람을 앞에 두고 히죽거리는 게 영 불안하다. 수상함을 느낀 류제가 이번에는 솔라를 쳐다보았지만 그녀 또한 별말 없이 책만 읽었다.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친 것을 보니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데. 중요한 건 말하지 않고 저들끼리 소곤소곤 사람을 따돌려 댄다.
“정말로 모르나 봐!”
그 말은 용케 들은 류제가 못마땅하게 투덜거렸다.
“모르긴 뭘 몰라?”
서로 눈치를 보던 그녀들은 장난꾸러기처럼 굴 뿐 입을 열지 않았다.
“그 매니저랑은 오래오래 가길 빈다. 네 박복한 인복에 얼마 없을 사람이니 실수하더라도 잘 봐주고.”
이상한 사람일 거라고 저주했던 주제에 자기네들이 추천이라도 한 것처럼 아양을 떠는 건 또 뭐야.
“싫다 할 때는 언제고 응원은 무슨.”
“그때는 그때지.”
“됐고, 오랜만에 모였으니까 기념 사진 간다. 치즈~”
이유는 몰라도 대충 웃어넘기는 그녀들은 류제와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느라 삼매경이었다.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던 류제의 표정이 빠르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도대체 뭐지? 수상쩍은 기류를 풀어내고 싶은데 당사자들이 죄다 입을 다물어서 풀어낼 길이 없었다.
사생활에 간섭하는 매니저는 싫다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는데 이제 와 궁금하다고 치근덕거리는 걸 인정하긴 또 자존심이 상했다.
치사하기는. 본인에게 물으면 된다.
“야, 류제. 뭐 해. 출발하자.”
“대표님이 왜 부르신 거야?”
“상의할 게 있어서.”
“아까 걔네들이랑은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세상 사는 이야기.”
볼일을 보고 돌아온 당사자에게 꼬치꼬치 캐묻는데 재경은 한사코 대답을 회피했다.
“나한테도 말해줘.”
보라는 대본은 안 보고 조수석에 앉아서는 의처증 걸린 사람처럼 물어대는 류제가 성가셨는지 시동을 켜고 백미러를 펴던 재경이 입을 한 바가지 내밀었다.
“알아서 뭐 하게? 잡담도 못 하냐? 진짜 별나다, 너.”
류제는 머쓱해졌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떻게 하나. 스케줄이 없을 때에도 재경과 연락이 안 되면 불안해져서 계속 톡을 보내는데 그만 소외되다니 배알이 꼴렸다.
틈이 날 때 몰래 재경과 친구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아도 자기들끼리만 깔깔거리며 놀 뿐 가닥이 잡히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 의문은 시간이 가도 풀리지 못했다.
수수께끼를 고민하는 류제는 이성애적 면모를 보이는 재경의 모습에 여간 실망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러라고 뽑아온 것인데 네 매니저는 나란 말이지. 재경아.
“그럼 그런 식으로 가도록 해요.”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세라 선배.”
“저야말로요.”
상대역인 세라와 함께 다음 신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류제는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재경이 아닌 척 고개를 돌려 스케줄을 확인하는 척했다. 아까부터 계속 눈이 마주치는 것 같은데. 성큼성큼 다가온 류제가 물었다.
“뭘 그렇게 봐?”
“그냥.”
운전석 창문에 팔을 뺀 채 멍청하게 밖을 쳐다보던 재경이 시치미를 뗐다. 류제가 확인해 보니 재경이 보던 곳에는 깔깔거리며 노는 고등학생들이 있었다.
걸쭉하게 욕을 하며 또래끼리 쓰는 용어를 내뱉는 그들은 촬영 현장을 구경하다가 학원 시간에 늦었다며 후다닥 달려 사라졌다.
“생각 중이었어.”
“무슨 생각?”
재경의 변명을 추궁하던 류제는 실수를 직감했다. 재경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기 때문이다.
“궁금한 것도 많다. 네 팬이 보내준 선물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중.”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가는 수제 선물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기에 류제가 창고로 쓰는 작은 방에 넣어놓으려고 하는데 그곳도 물건들로 넘쳐서 류제가 최근 재경에게 정리를 맡겼다.
회사에서 관리 중인 SNS도 대표가 재경에게 인수인계를 해주었는데 이제 슬슬 팬들에게 받은 선물을 인증해야 하는 때라고 한다.
더 이상 개인 조공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문도 올려야 했다. 그전까지 받았던 명품들은 팔아서 기부하겠다고 전에 뜻을 밝힌 적이 있어서 팬들도 어느 정도 짐작했을 거다.
그걸 마음 안 상하게 쓰는 것도 일이지. 회사를 통해 검수하겠지만 글재주가 없는 재경은 그것 때문에 고민이 많은 듯하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학생들을 구경한 건 아닐 것 같다.
“어려졌네.”
재경이 교복을 입고 있는 류제를 샅샅이 훑었다. 오늘은 드라마의 마지막 촬영 날로 류제가 맡은 배역의 고등학생 시절을 찍기로 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교복답게 일상생활을 하기 불편하지만 멋들어졌다.
“어울려?”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던 옛날 생각이 난 류제가 교복을 자랑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어리게 화장한 류제는 침묵한 재경의 시선에 쑥스러워졌다. 재경도 부끄러운지 귓바퀴를 붉히며 괜히 미간을 구겼다.
“웃겨.”
잠시 옆자리를 뒤지던 재경이 찰칵, 태블릿으로 사진을 찍었다. SNS용으로 올릴 사진인가 보다.
“그 교복은 나중에 돌려줘야 하는 거지?”
“빌린 거니까 촬영장 나갈 때 벗어야지. 올릴 거면 지금 실컷 찍어둬. 아니면 너도 입어볼래?”
그 말에 교복 착용한 모습을 상상한 건지 재경이 뜸을 들였다.
“됐어. 이 나이 먹고 무슨.”
말은 저래도 미련이 있어 보였다. 유독 교복 차림을 신기해하는 것 같다. 학창시절이 짧아서 그런가.
“예고 나왔다며? 거기 교복은 멋지더라만.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하겠네.”
“고등학생 때부터 일해서 딱히 이렇다 할 학창 시절 추억은 없어.”
“그래? 하나도?”
“그냥 평범하지.”
“안타깝네.”
마음에 걸려할까 봐 일부러 과장하지 않았는데 대리 만족을 하려고 한 건가 재경은 실망하는 눈치였다. 혹시 중퇴하게 된 이유가 안 좋은 사건과 얽혔나?
남자를 좋아해서 생긴 사건이라든가. 제길. 나도 나 좋다는 대로 생각하고 있구만.
저번에 내가 고백하면 어떠냐고 했을 때 반응이 떠올라서 마음에 걸린다. 들어보면 여자 친구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는데. 아,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
하지만 사생활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한 건 그고, 꼬치꼬치 캐물었다가는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행위였다.
“촬영이나 잘해. 나도 이거 올리고 이따가 보러 갈 테니까 나 없다고 쩔쩔매지 말고.”
“안 쩔쩔맬 거야. 너도 수고해.”
남의 사랑을 시원찮다고 무시했던 류제는 막상 사람을 좋아해 보니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자 답답했다.
민폐일 게 뻔할 감정을 품어버린 류제는 술에 취해 떠벌린 대사를 지워 모두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안 되는 상대인 걸 안다면 포기해야 하는 것이 정답일 텐데 무슨 변명을 대서라도 그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래도 나는 성급하게 굴지 않아.
난 달라. 나는 재경이 도망가지 않게끔 오랜 시간을 들여서 고백할 자신이 있어. 언젠가 한번 더 선을 넘게 된다면 그때를 노려야지.
류제는 말없이 그 욕망을 마음속에 품었다.
“하아.”
의식하지 못하는지 재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류제는 다른 배우들의 고등학교 교복 차림을 흘겨보는 재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교복을 입은 재경이 보고 싶었다.
* * *
감독의 역량과 대본의 충실함, 다른 배우들의 열연 덕분에 류제 주연의 OTT 독점 드라마는 성공의 왕도를 걸었다.
주연의 연기력이 늘었다는 평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그보다는 외모를 평하는 비중이 커서 어떤 사이트를 막론하고 찬양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촬영 스케줄이 끝났어도 드라마는 현재 진행형으로 방영 중이라 류제는 예능과 CF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마지막 촬영 뒤풀이도 시원하게 했겠다, 드라마가 끝나면 한가해진다고 했는데 더 바빠진 것 같아서 류제는 재경에게 괜히 미안했다.
내색하지 않아도 피곤해했지. 윤 대표님이 인센티브를 고려 중이라고 했으니 그걸로 마음이 풀리기를 바란다.
이번 일이 끝나면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약속했었으니 공부에 질색하는 재경은 어쩌면 계속 바쁘기만을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일어나! 언제까지 잘 거야?”
커피와 하품을 달고 살아도 맡은 일에는 책임감을 가지는 재경은 여태 베개에 머리를 처박고 비비는 류제를 시끄럽게 타박했다.
“으으, 어제 밤을 새워버렸어. 5분만 더 잘게.”
졸려서 눈이 떠지질 않는 류제는 더듬거리던 손으로 이불을 짚어 머리끝까지 푹 눌러썼다. 이제는 별다른 허락 없이도 류제의 집에 들어오는 게 익숙해진 재경이 이불을 벗겨낸 다음 응석 부리는 류제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촬영 있으니까 바로 자라고 했잖아. 컨디션 망치면 그게 프로냐? 일어나서 커피나 한 사바리 해. 어서, 자.”
정말 사발에다 커피를 타온 재경이 사약을 먹이듯 억지로 마시게 했다.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었지만 커피가 들어가니 정신이 차려졌다.
류제는 이게 꿈인 건가 눈을 끔벅거렸다. 실은 며칠 전에 결혼한 게 아닐까.
사발을 건네받은 류제는 숭늉 마시듯 커피를 들이켜다 핸드폰 시간을 확인했다. 전화가 열 통이 넘게 오고 알람이 몇 번이나 울렸는데 듣지 못했다.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촬영 시간에 늦을 것 같다.
“빨리 처먹고 씻어.”
독촉하는 재경은 짜증스러운 말투로 류제의 환상을 와장창 깨트렸다.
로맨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앞치마 두른 남자가 깨워주는 아침은 거짓말임을 주장하듯 재경은 밥을 먹는 것도 일처럼 사무적이었다.
잠에서 깨 현실을 본 류제는 크게 하품하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요즘 심신이 편해서 안일해지는 것 같다.
“으하암, 더 자고 굶어도 괜찮은데.”
“굶는 건 절대 안 돼. 건강 해쳐. 승아가 그 예능은 기본 다섯 시간 촬영이라고 했단 말이야. 빈속에 갔다가 과자 주워 먹지 말고 먹기나 해.”
“언제 또 말해줬대. 나 빼고 잘 놀러 다니나 봐? 아주.”
시답잖은 질투가 표출된 류제는 명절 할머니 밥상처럼 줄지어진 고봉밥과 반찬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드라마 촬영이 끝났다고 해도 라디오나 예능 등 홍보 목적의 스케줄이 남아있어서 식단을 놓을 수 없다.
그래도 무려 요식업 종사자였던 신재경이 해준 음식이다. 말은 안 해도 반찬들 하나하나 직접 만든 것 같은데 입을 안 대기도 미안하다.
맛있다고 하면 좋아라 해서 기분 좋고. 냉장고에 하나둘 쌓인 반찬도 아까웠다.
“여기 물이랑 오늘 치 영양제.”
아픈 사람도 이 정도로는 안 먹겠다 싶을 만큼 팬들이 챙겨준 영양제는 찬장에 추수 날 곳간처럼 가득했다. 서로 교미를 하는 건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영양 과다는 물론 오늘도 적정 칼로리를 넘어 과식해 버린 류제는 자기 전에 맨몸 운동을 30분 더 하자며 꾸역꾸역 차려준 밥을 다 먹었다.
“주차장에 내려가 있을 테니까 씻고 나와.”
“여기서 기다리면 안 돼?”
“뭐 하러?”
“같이 내려가면 좋잖아. 뭐라도 보면서 기다려. 금방 나올 거야.”
류제가 응석을 부리자 재경은 말없이 소파에 앉아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류제가 화장실로 들어가 샤워기 물을 틀었다.
잘난 듯이 사람을 통제하에 두고 길들이려는 행위는 몇 번이고 당한 적이 있었다. 저저번 매니저도 비슷한 짓을 하려다가 빈축을 샀었다. 재경에게만 그게 허락된다는 건 그가 마음을 많이 내주었기 때문이다.
씻고 나온 그에게 스타일리스트에게서 받아온 옷들을 건넨 재경은 묵묵히 류제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기다렸다.
활동하기 편한 캐주얼 복장이 제 나이에 어울린다. 어떠냐고 물어봐도 재경은 멋지다고 사무적으로만 말할 뿐이다.
헤어스타일링을 받기 위해 전담 숍에 예약했던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오늘도 보조석에 올라탄 류제가 시동을 켜는 재경에게 잘 부탁한다 가볍게 인사했다.
“나 저번 예능에서 무슨 콘셉트였더라.”
“연상 누님의 피를 자극하는 순진한 대학생.”
“이렇게 된 김에 그 캐릭터를 연구해 봐야겠어.”
드라마와는 다른 반전 매력을 원하는 PD가 사전 미팅에서 까칠하고 신경질적인 남자 주인공 말고 친근한 느낌을 원한다고 요구했다.
저번에 출연했던 예능에서 보인 모습을 참고했다고 했지. PD가 준 대본을 훑어보던 류제는 게스트로서 잘 어울리는 적당한 성격을 구상했다.
사거리에서 빨간불이 되자 차가 멈췄다. 류제는 백미러를 통해 살짝 재경과 눈이 마주쳤다. 눈 깜짝할 새 정면을 응시하는 재경이 최근 추가된 스케줄을 입에 담았다.
“다음번에 있는 K방송국 예능은 E놀이공원에서 찍는대. 그 캐릭터에 딱 맞겠네.”
“정말? 사람 많은 곳은 번잡해서 안 가는데 웬일이야.”
“놀이공원에 성인이 가는 건 좀 웃긴가?”
“웃길 게 뭐 있어. 연예인이니까 자제하는 거지. 사람이 몰려서 민폐를 끼치면 안 좋은 말이 뒤따르거든.”
따지자면 재경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못 갔지만 중고등학생 때는 놀이공원에 자주 갔었다. 수능 끝나고 친구들과 갔던 게 마지막이었나.
지금은 공인이 되어버렸으니 인파가 많은 곳에 휩쓸리면 피곤한 일들이 생겨서 꺼려졌지만 좋은 추억이었다.
“너도 다른 매니저들이랑 놀이 기구 타면서 놀아.”
“그래도 된다고 하면.”
“재경이 넌 놀이공원 몇 번 가봤어?”
“그야―”
답해주려던 재경은 입을 다물었다. 미간이 구겨진 것을 보니 불쾌해진 듯했다. 어떤 말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딱딱한 말투로 핀잔했다.
“네가 알 바 없지 않냐? 안 가봤으면 뭐 하게?”
“그냥 궁금해서. 나도 몇 번 안 가봤어.”
류제가 뒤늦게 수습해도 말이 없어진 재경은 운전대만 잡았다. 침묵이 서렸다. 잘 나가다가도 과거에 대해서 물으면 이런 식으로 벽을 친다.
술이 들어가면 솔직해지던데. 고등학교를 중퇴하는 과정이 썩 자랑스럽지 않은 게 분명했다. 놀이공원을 못 갈 정도로 형편이 나빴다거나.
차에 블루투스를 연결해 노래를 들어 답답함을 날린 류제는 언제쯤 재경이 선을 넘을 자신이 생길까 마음을 졸였다. 이 정도면 넘을 만도 한데. 이보다 더 가까웠던 사람이 없었지 않나.
매니저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배우의 사생활에 깊게 얽히는 터라 류제가 처음 했던 경고가 궤도를 달리할 수 있었던 것은 계획대로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건 남자인 재경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류제만 속이 탄다. 하물며 친구로서 고민을 나누는 것도 좋은데.
억울한 건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선이 류제 그에게만 분명하다는 것이다. 이따금 친구들과 재경이 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 재경이 자신을 드러내기에 스스럼이 없어서 불안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패널과 함께 웃으며 풋풋한 청년인 척 연기하던 류제는 그 점이 불쾌해서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만 없는 동갑내기 단톡방을 발견했을 때는 머리가 다 아팠다.
휴일에는 무조건 집에서 휴식하는 류제와 다르게 파티 룸을 빌려 재경과 노는 그녀들의 사진을 발견했을 때는 배신감에 천불이 다 났다. 그걸 따지니 당연한 말이 돌아왔다.
“나는 뭐 친구도 못 만드냐? 휴일에 노는 것도 안 돼? 내가 네 소유물도 아니고.”
“그런 건 아니라도…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걔네가 억지로 만든 거야. 톡 안 한다고. 노는 것도 저번이 처음이었어.”
그러면 뭐 하나. 그건 다 재경의 사생활인데. 일 없는 매니저를 독점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서운해진 류제는 속으로 분을 풀어냈다. 이러다가는 빼앗기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류제를 잠식했다. 그때처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릴 거야. 망가져서 수습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와서 멍하니―
“야, 아직도 삐졌냐?”
순간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과 새까만 기억이 스쳐 지나갔던 류제는 되찾을 수 없는 그를 원망하고 사랑하며 울부짖었던 감정의 파도에 집어삼켜졌다.
찰나의 감정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안 삐졌어.”
그렇게 말하는 류제는 재경의 뒷모습을 붙잡고 싶어졌다. 가지 마.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 이유 모를 처연한 감정이 류제의 마음속에 의문으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