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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1) (94/112)

AU 외전. 길고양이 달밤 스포트라이트 (1)

스물네 살.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새파랗게 어린놈이겠지만 나이가 많고 적고는 소속된 집단에 따라 상대적인 편인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성공이 좌지우지되는 연예계는 젊음과 본능에 충실하다. 화려함이 만연하는 꽃들과 필연적으로 경쟁하는 류제에게 있어서 첫 번째 전성기를 누릴 적당한 연령이었다.

한창 생생하게 피어날 젊음의 시간 동안 넘치는 사랑에 겨울 수 있다니 축복일까. 그 사랑의 종류는 잘 모르겠고, 남들과 비교해 다행인 점은 양친을 모르는 고아라서 국방의 의무가 의무이지 않게 된 것이다.

어릴 적에는 외로움에 사무쳤던 값이 커리어를 이어나가게 해주니 미묘한 감정이 복잡하게 엉클어졌다.

부모가 없다고 해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닐 텐데 천사 같은 그의 외견은 살갗이 뽀얗게 빛나 어릴 적부터 도드라졌다.

키 186의 원초적인 수컷의 미를 드러내는 관리한 몸매. 팬들이 어깨로 사람 쓰러뜨리겠다고 자지러지는 혼혈 특유의 동서양이 잘 어우러진 얼굴을 타고난 그는 흔한 출근 전 굴욕 사진도 없었다.

덕분에 중학생 때까지 보육원에서 살던 그가 남부럽지 않은 관심을 받고 살 수 있었다.

외모에 홀려 입양하겠다고 찾아왔다가 부적격 판결을 받은 사람도 꽤 있었다고 했으니까. 그만큼 어디 가서 얼굴 말고 다른 칭찬을 들었던 적이 손에 꼽는 그는 훌륭한 껍데기로 사람을 압도했다.

키즈 모델을 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을 만큼 외견이 미려했으니 그에게 진짜 부모가 있었더라면 보다 어린 나이부터 연예계에 발을 디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뭐 하나. 양육을 포기한 부모에게서 뭘 바라지도 않는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차라리 영영 눈앞에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되짚어 보면 키즈 모델부터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는 미래도 싫었다. 평범한 일상에서 나오는 경험은 남들과 다른 환경에서 자라야만 했던 그가 스크린에 나오는 캐릭터를 분석할 때 중요한 요소였다.

평범함. 누군가는 한 번쯤 경험해 봤을 감정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그 평범함은 하나의 잣대가 되어 연기를 지탱했다.

이토록 평범함을 사랑하는 터라 별들이 빛나는 화려한 세계에 별 미련이 없던 그가 캐스팅을 받아들인 이유는 한순간의 변덕이었다.

돈. 단지 어른이 되었을 때 느낄 막막함이 두려워 돈이 급했다. 별다른 노력 없이 타고난 외견으로 얻는 이득이 달콤했다.

당시 그는 어렸다. 중학생 때 봉사활동을 하다가 중견 소속사 대표의 눈에 든 그는 명함을 넘겨주는 그녀를 수상쩍게 훑어보았다.

모르는 사람 무서워하는 청소년기의 심리를 교묘하게 잘 타이른 대표는 귀찮아하는 그를 구슬려서 비교적 스케줄이 자유로운 모델 활동을 제안했다.

성인이 되면 보육원에서 나가려고 했던 류제는 제법 쏠쏠한 금액을 지원받은 후부터 거부감 없이 모델 일을 시작했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녀가 바로 지금 그가 속한 소속사 대표와 동일한 인물이다. 이탈리아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는데 한국에 돌아와 소속사 사장을 하다니 여러모로 신기한 양반이다.

그녀는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에 결혼을 해서 아들이 하나 있는데 조그마한 게 귀여워서 소속사에 데리고 오면 류제도 이따금 놀아주곤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유명 예술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연예 전문 기획사인 트리카 엔터테인먼트 소속 모델이 된 그는 보육원을 나와 숙소에서 생활했다.

고등학교에는 같은 회사 걸그룹 학생들도 함께해서 그는 계단을 오르듯 손쉽게 학교 카르텔의 최상위에 군림했다.

스타들을 양성하는 그 학교에서도 빼어난 외모와 독특한 눈 색으로 류제는 남들의 시선을 끌어 모았다. 소문을 듣고 온 여학생들이 온갖 학교에서 찾아오는 걸 보면 웬만한 아이돌도 넘볼 수 없는 위상이었다.

배우 대신 아이돌로 데뷔를 했어도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을 만큼 끼도 있었지만 류제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게 성격상 큰 고역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보내는 관심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성격이 못 되었다. 그래서 류제는 연예계에 몸담는다면 진실한 마음은 숨길 수 있는 모델이나 연기자가 되고 싶었다.

대표는 배우는 얼굴로만 될 수 없다고 경고했지만 고집을 부린 결과 류제는 노래 대신 대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조연 엑스트라부터 시작해 스크린에 얼굴을 올렸다.

본격적으로 영상 매체에 뛰어들었던 고등학교 1학년 겨울 방학부터 배우판 팬들에게도 눈도장을 찍은 걸로 기억한다.

승승장구한 건 아니지만 수많은 꽃들이 피어났다 짓밟히고 마는 이 세계에서는 나름대로 평탄한 길이었다.

분별없는 어린 나이이니 소속사의 방침상 개인 SNS는 금지.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연애는 자유지만 뒷말이 나오면 크게 혼났다.

주변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질 않았기에 연애했던 상대방이 두 자리 수를 넘었던 그는 지금까지 사랑다운 사랑은 해보지 못했다. 그런 데다 고등학생 이후 연락을 하게 된 친구들은 죄다 여자뿐이라는 게 그의 특이점이다.

웃기게도 그는 동성 친구가 없었다. 남자가 꼬이기 힘들다나. 데뷔 전 심심풀이로 봤던 사주팔자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남자라고는 한 명도 없는 친구들이 그걸 듣고 웃어댔지만 돌이켜 보면 그의 외모에 여복이 없을 리가 만무했다.

동서양 혼혈인 탓에 푸른 기가 도는 눈동자와 대비되는 새까만 머리칼. 균형 잡힌 몸이 주는 이질적이면서도 오묘한 아름다움.

군중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인상으로는 적절한, 그야말로 연예인이기 위해 태어난 외관이다.

연기에 재능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용모 때문에 연기력이 가려지는 편이었다. 그가 주연으로 나오는 드라마 캐스팅을 본 사람들은 또 아이돌이냐고 백안시할 때도 잦았다.

기사 댓글로 가타부타 싸우는 사람들을 본 류제도 그 단점을 인지했다. 고정 관념을 다양한 배역으로 깨고 싶었지만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런 취급도 3~4년 정도 지나니 슬슬 인정을 받아가고 있고. 독특한 외견 탓에 혈혈단신으로 시작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걷는 듯했다.

귀찮은 걸 싫어하고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삶을 즐기는 그는 가면을 써서 마음껏 자신을 숨겨낼 수만 있다면 이 숨 막히는 세상 속에서 언제든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그가 오늘처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만취되어 입김을 흩날리며 외진 공원 안 가로등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홀로 가로등 밑에 빛나는 배우라니. 어질어질 그릇을 넘어서게 들이켠 알코올은 채 분해되지 못하고 혈관에 흘렀다.

또. 또. 또. 이게 몇 번째냔 말이다. 매니저가 그의 스토커 짓을 하다가 잘리고 말았다. 그녀가 울면서 하는 말, 그가 여지를 줬다나 뭐라나. 분명 서로 마음이 통한 관계인 줄 알았댄다.

이럴 것 같아서 남자 매니저를 구하려고 했는데 결국 사달이 났다. 하. 누군들 흔히 찾는 남자 매니저도 못 구하는 팔자란 건가.

사주팔자에 나왔던 여복이라는 단어가 그를 옭아맸다. 이런 일만 터지다가 섣부르게 외부에 새어나가 평판에 악영향을 끼치면 곤란했다.

그는 억울했다. 여지를 주기는 무슨. 소속사 방침과 교육에 따라 사람들을 대했을 뿐이다.

좁디좁은 이 세계는 한 다리 건너 지인이기 때문에 밉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선배들에게 인사 잘하고, 후배들 챙겨주고, 제작 팀들에게 상냥하게 대하고, 가끔 기부도 한다.

노림수가 잘 통하면 미담으로 점철된 글이 유명 커뮤니티 게시판에 뜰 때도 있다. 입소문이 나면 섭외가 많이 들어온다.

이미지 소모를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섭외를 받지는 않지만 인맥을 유지할 수 있다면 이미지 관리는 마케팅의 중요 일환이었다.

대표님이 하라는 대로만 하면 뒷말 없이 깔끔하게 작품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하아.”

직업 특수성의 일환으로 기본적인 대우를 해주었을 뿐이다. 환상을 파는 직업이라 얻을 수 있는 게 많으니 편리하지 않은가.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어린이 재단에 기부하는 것도 뿌듯했다. 눈에 잘 보이는 편리한 것들만 추출해서 유리하게 이용하는, 보다 효율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데에 일석이조가 아닌가.

번거로움을 감내하면서 배운 대로 대해준 건데 그게 왜 사람을 착각에 빠뜨리느냔 말이다. 내 얼굴만 보고 냅다 환상에 빠지는 것과 뭐가 달라.

자기가 원하는 로맨스 드라마 대본을 스스로 써 내린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새빨간 타인에게 판타지를 기대하지 말란 말이야. 연기도 못 알아보는 바보들 같으니.

배우들이 죄다 성질 나쁘게 히스테리 부리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하게 대했을 뿐인데 그게 잘못했다는 거야? 내 반박은 듣지 않고 하나같이 내가 꼬여낸 거라고 하지. 난 그렇게 여기기 싫어.

진흙탕이다. 스타라는 감투에서 한 발짝 내려와 무대 뒤로 돌아갈수록 진흙탕이다. 연기와 실제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제는 질린다.

무엇을 보고 쉽게 사랑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인가. 마음? 돈? 인성? 외모? 아니면 이 모든 것? 이질적인 인생이 사람들에게 헛된 희망이라도 품게 하는 것인가?

하아, 사랑이 뭐였더라. 가면을 써서 연기할 때 샘솟던 두루뭉술한 열기는 떠오를 듯 말 듯 기억이 애매했다. 쉽사리 사랑에 빠지는 방법은 뭘까.

바다에 풍덩 가라앉는 것처럼 사람의 품에 안기고 싶은 여자들의 판타지가 담긴 드라마를 잘 모르겠다. 그런 건 드라마니까 존재하는 허상이야. 있지도 않는 것에 손을 뻗는 어리석은 짓거리라고.

“그렇게 생각 안 해요?”

혀가 풀린 그가 물었다. 옆자리에 앉아있는 기묘한 친구는 도둑고양이처럼 그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와있던 손님이다.

뭐라고 말했더라?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가 담아두고 있던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늘어놓고 있었던 것은 떠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자랑이냐?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아무 말이나. 그냥 말해봐요.”

“별 게 다 불만이야. 댁 잘났수다.”

유일한 관객이 퉁명스럽게 답했다. 이 영문 모를 사람은 낯선 이에게도 오랜 친구처럼 굴었다. 텔레비전에서 친숙하게 봐온 사람이라서 그럴까.

이상한 선망이 담기지 않은 순수하기만 한 접근이 거리낌이 없어 신선했다.

“나 좋다는데 싫을 건 뭐야. 배부른 소리 하지 말고 감사하게 여겨.”

다른 사람이야 매번 그렇게 말하지. 아무리 사주에 사람을 휘두를 팔자라 적혔다지만 이건 너무하다. 휘둘리는 건 영상 속 배역만으로도 충분했다.

“하하하, 알 바 없는 감정을 강요받는 기분은 당사자가 아니면 모르겠죠. 사회인으로서 대해줬을 뿐인데 오해나 받고. 데이트를 한 것도 아냐, 관심을 보인 것도 아냐. 멋대로 착각해서는 사람 피곤하게. 정말로 귀찮아요.”

술에 취한 그가 본심을 입 밖으로 드러냈다. 소속사 대표가 알았다가는 크게 한 소리 할 것이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관객도 술을 마시고 있고, 그에게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술에 꼴아 마음대로 안도해 버렸다.

“그래도 좋아해 주는 건데 차갑게 굴지는 마. 거절은 거절이겠지만 제대로 설명을 하고 헤어지란 말이지.”

“물론 당사자 앞에서는 이런 말 안 해요. 아니, 원래 이런 말을 입에 안 담아요. 오늘은 특별. 아아, 당신 앞이니까 말하는 거야.”

“영광이네.”

늙지도, 앳되지도 않은 미성이 옆에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의미를 알 수 없다. 감실감실 눈을 뜬 류제는 어느새 손에 든 맥주 캔을 홀짝거렸다. 이 맥주는 어디서 난 거더라. 옆에 앉은 저 사람이 준 것이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진실을 내뱉게 종용하는 독을 온몸에 퍼뜨렸다. 들어가는 술만큼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본심이 튀어나온 그는 술김에 배우로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 입에 담았다.

“멋대로 좋아하는 건 자유지만 강요는 말아야지. 민폐거든.”

하늘을 올려다보니 가로등 스포트라이트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어둑어둑해진 정신 속에 번쩍 그가 눈을 떴다. 그 마법의 문장을 말한 후 현실로 돌아온 것인가. 흐릿한 천장에 박힌 모션 감지용 전등이 그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반짝 불이 켜졌다.

성인이 되어 독립한 류제는 촬영이나 미팅에 용의하게끔 서울 적당한 지역에 있는 적당한 아파트를 구해 숙소를 나왔다.

어린 남자 혼자 살기 적당한 20평대 평수, 보안이 좋은 신축,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어 입주할 때 그대로인 장판과 벽지, 있을 것만 있는 가구.

신발이 난잡하게 늘어진 차가운 현관 바닥. 어리둥절하게도 눈을 떠 보니 익숙한 현관에서 자고 있었다. 침대 삼아 깔고 누워 뭉개진 신발들을 건드리는 와중 개인 핸드폰에서 지잉지잉 울려댔다.

머리는 뒤로 까뒤집어지고 허리는 아프고, 옷도 신발도 입은 그대로다. 뭐더라.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비명을 지른 것 같기도 하다.

아니지. 거기서 집으로 돌아올 때엔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반대로 택시를 탄 것 같은데. 기억이 뒤죽박죽 칡의 뿌리처럼 엉켜서 머리가 아팠다.

주변이 환한 것을 보니 벌써 한낮인 모양이다. 이만큼 과음한 것도 오랜만이다. 저번 드라마 끝나고 난 뒤풀이 때보다 더 숙취가 심하다. 부스스하게 상체를 일으킨 그가 발신자를 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

―빌어먹을 자식아! 어제부터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윽,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그녀가 난데없이 큰소리를 지르는 경우는 달갑지 않은 상대와 스캔들이 터졌을 때나 연락을 제때 받지 않았을 때다. 설마 어제 술 먹고 나쁜 짓이라도 했나? 이상한 주사는 없어서 걱정은 안 든다마는.

“근처 술집에서 혼자서 가볍게 한잔했어요. 별일 없었을 텐데?”

―내가 핸드폰 잘 붙들고 있으라고 했지? 대본 확인하고 오디션 볼 건지 정하라고 했잖아!

“아차.”

반년 전에 했던 드라마의 인기도 수그러들고, 이전 배역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휴식기를 가지던 그에게 새로운 오디션이 잡혔다고 며칠 전 대표가 연락을 했었다.

어제도 일 관련해서 연락을 받았는데 술을 마시는 바람에 깜박하고 말았다.

―내가 몇 번을 허리를 숙여야 만족하겠어? 아직도 고등학생인 줄 알아? 어른이면 적당히 알아서 해야지.

“죄송해요. 매니저 일 때문에 상심한 나머지 주량을 넘어버렸네요.”

―집에도 없던데. 몇 시까지 처마신 거야?

“그게… 기억이 안 나요.”

―뭐라고? 지금 어딘데?

“집이요. 이제 막 깼어요. 현관에서 자고 있더라고요.”

―용케 들어왔다. 사고 친 건 아니지?

“아…하하, 아니길 빌고 있어요.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작품 시작도 전에 터뜨렸다가는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유명 OTT 독점작이라고. 전 세계에 수출될 기회가 쉽게 찾아올 것 같아?

그녀의 날 선 외침에 류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그는 대표에게만큼은 꿈쩍도 못 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던 고아인 류제를 여기까지 이끌어준 은인인 데다 금전적인 지원은 물론 배우로서의 배경을 만들어준 정신적 부모나 다름없었다.

―당분간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지 마. 사생활 특히나 조심하고. 매스컴 타야 정신 차릴래? 안 그래도 김 매니저 안 좋게 그만두게 해서 불편한데 뒷말 나오면 곤란해.

“알았어요. 자제할게요. 아, 그리고 그 드라마 하겠다고 전해주세요.”

어제 모르는 사람 앞에서 제 몹쓸 사정을 술술 불고 연예인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까지 해버렸는데 말이지.

설마 카메라로 찍고 있다거나 녹음해서 협박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그 사람도 술에 취한 데다 인상이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네가 직접 전화해서 답변 늦어서 죄송하다고 사과해!

일이 터지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그로부터 20분가량 대표에게서 잔소리를 들은 류제는 현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배우 일을 시작한 지 7년 가까이 지났다. 외모 덕분에 이성은 많이 꼬이지만 사람 복은 없어서 매니저는 툭하면 사고를 쳤다. 코디네이터는 배우 사생활을 캐서 커뮤니티에 올리다가 걸려서 퇴출당하고. 하아.

그런 와중에 작품은 한결같이 로맨스 드라마만 들어온다. 요즘 같은 멀티 플랫폼 멀티스크린 시대에 TV 드라마가 흥행하는 게 이례적이다.

그것 탓인지 지금껏 주연을 맡은 드라마 흥행은 평범한 축이라 커리어에 초대박을 터뜨린 경력이 부족했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이번 작품의 성공 여부가 류제나 TE에겐 대단히 중요했다.

캐스팅이 들어온 작품은 감독이나 대본을 보면 성공할 확률이 높은데 안타깝게도 이번에도 판타지 로맨스 드라마다.

역량이 부족한지 데뷔할 때부터 로맨스 장르만 배역이 들어와서 질려버렸다.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순정 만화 이미지를 덧씌워 그를 오해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왜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에 죽고 못 사는 걸까. 허무할 뿐인데.

노력하다 보면 존경하는 감독님 눈에 띄게 되는 날이 올까. 지금은 이런 곳에서라도 자리를 잡아야지. 류제는 한숨을 내쉬고 신발을 벗었다.

* * *

이질적이면서도 수려한 외모 덕에 드라마 제작 초기부터 제작진에게 점 찍혔던 류제는 무난하게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주인공이 결정되고 연이어 들리는 캐스팅 소식을 전해 듣자니 다른 주연급 역을 맡은 배우들의 위상이 대단했다.

캐스팅이 끝나고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인 동료들과 웃으면서 악수를 나눈 류제는 이 드라마가 지금껏 했던 것 중에 가장 큰 규모라는 것을 새삼 체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감독이 지시했다. 주조연을 막론한 배우들이 서로 인사하던 소리가 수그러들었다.

촬영 전 첫 대본 리딩. 서로 마주 볼 수 있게 만든 테이블에 둘러앉은 배우들 사이에서 긴장감이 맴돌았다. 앞에서는 차마 고개도 못 드는 대선배부터 주가가 좋은 동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대본을 넘겼다.

매니저들이 담당하는 배우의 리딩 장면을 핸드폰으로 담았다. 캐스팅 리스트로 짐작은 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역시 달랐다.

주인공이라 대사도 많고 분석해야 할 캐릭터 특징이 자잘했던 류제는 요 며칠간 집에 틀어박혀 대본 연구만 한 탓에 수더분하고 꾸밈없는 차림새였다.

다들 연기에 진심을 담은 사람들인 데다 공개 현장이 아니다 보니 동료들도 스크린과는 제각기 다른 꼴이다. 그 사람들에게 밀려 사라지고 싶지 않았던 류제도 대본이 헐어있었다.

차례가 오자 류제가 전혀 다른 성격을 연기하며 대사를 내뱉었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그라도 좋아하는 것에 한해서는 최선을 다한다.

외모가 아닌 연기력을 인정받아 연로한 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었다. 그 노력 덕분에 우렁찬 발성으로 나오는 선배들의 연기 속에서도 기가 죽지 않고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것이겠지.

“나는 못 해요. 하려면 당신이 알아서 해!”

“나 혼자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지 말고 제발 날 좀 도와줘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류제가 상대방과 눈빛 연기를 나누었다. 이 신은 이대로 페이드아웃이다.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이 지나갔지만 감독에게서 별다른 지적이 없자 류제는 이번 해석은 괜찮은 것인가 안도했다.

찍어주는 매니저가 있으면 편할 텐데. 류제는 활성화된 녹음 버튼을 눌러 정지했다.

이번 작품은 시작부터 좋다. 드라마 홍보도 순조롭다고 들었다. 술김에 일반인에게 털어놓은 사설이 발목 잡으면 어쩌나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잠잠하다.

의외로 그 사람이 밤눈이 어두워 그를 못 알아봤거나 어린놈의 투정을 귀엽게 받아주는 대인배라서 다행이었다.

뭐, 사고를 치더라도 대표님만 모르고 넘어간다면 장땡 아닌가. 윤 대표님한테 들켰으면 음주 금지 1년이 우스웠다. 십 년을 감수했다.

식은땀이 흐를 만큼 집중하다 보니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이 지나갔다. 목마른지도 모르고 대사를 읊던 사이 적당한 시간에 스태프가 흐름을 끊었다.

“한 시간만 쉬었다가 갈게요.”

“아이고야, 언제 끝나나 했다. 엉덩이가 아파서 원.”

“당이 땡긴다. 막내야, 과자 어디 있냐.”

“지금 챙겨 올 거예요. 여러분, 커피 드시면서 하세요~”

날이 섰던 기운이 말소리와 함께 흐트러졌다. 집중하느라 진이 빠진 배우들을 위해 주전부리가 마련되었다.

엑스트라들도 대본을 들고 자기 차례를 기다리느라 내내 지친 표정이었다. 그들을 위해 간단한 다과가 마련되었는데 제작 팀 막내의 실수로 아이스커피가 몇 개 누락되고 말았다.

커피를 받다가 흘려버리는 바람에 손을 씻고 나왔던 류제가 마침 그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제작 팀 막내를 감싸주었다.

“제가 금방 사 올게요. 건너편에도 카페가 하나 있던데.”

첫 미팅인 만큼 대본 리딩 현장은 사람이 꽉 차서 정신이 없었다. 좋은 핑계를 대고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던지라 류제는 냉큼 선의를 베풀었다.

“아녜요, 신리 배우님. 제 실수인데 그러실 필요 없어요.”

“밖에서 살 게 있었거든요. 겸사겸사 다녀올게요.”

저도 모르게 나오는 상냥함에 류제가 놀라 움찔했다. 불길하게도 상대방의 눈이 기대감으로 흔들렸다.

“저도 같이 갈게요.”

“혼자 갈게요. 바람도 쐴 겸. 바쁘실 텐데 여기 계세요. 열 개 정도 사 오면 되겠죠?”

또 저번처럼 여지를 줬다며 난리 나기 전에 철벽을 두른 류제는 그녀의 설레발을 저지했다.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배역에 찌들어 있다 보니 본래 성격도 가식적으로 바뀌는 건가 그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디 보자.”

현장을 나선 류제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아침에 메시지를 보냈으니 지금쯤 답변이 왔을까 했는데 대표가 또 읽고 씹었다.

누락된 커피는 배달시킬 수도 있겠지마는 굳이 나가서 사는 이유도 다름 아닌 이것 때문이다. 매니저 문제로 그도 머리가 복잡했다.

모든 배우들이 개성이 뚜렷하다지만 그는 작품을 시작할 때 방해받기 싫어하는 독립적인 편이었다.

그래서인가 소속사 대표는 곧 컴백하는 걸 그룹에게만 온 신경이 가 배우의 매니저 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매니저와 코디를 틈만 나면 갈아 치우니까 네 알아서 하라고 투덜거리긴 했었다.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사람에게서 받은 답변에 화면이 반짝 빛났다.

[(대표님): 몰라. 네 알아서 해. 나 바빠.]

류제가 작게 혀를 찼다. 윤 대표님도 너무하지. 나는 뭐 내놓은 자식인가. 하도 오래 치대다 보니 가족처럼 되어버렸지만 나도 아무것도 모르던 꼬맹이가 아니라 규모 큰 드라마 주연이라고.

[자꾸 그러시면 진짜 제 마음대로 할 거예요?]

마음대로 할 사람도 없으면서 류제가 괜히 심술을 부렸다. 바쁜데 이런 취급을 당하니 부릴 만도 했다.

외워야 할 대본은 산더미고 캐릭터 분석이 덜 끝났다. 출근 전 대본 볼 시간에 운전해야 했던 류제는 스케줄 관리를 도와줄 현장 매니저의 도움이 절실했다.

완벽한 노멀에 사람의 사생활을 파헤치지 않는, 일적인 관계로 충분한 남자 매니저를 구하면 되는 것 아닌가.

감정을 강요받는 일은 피하고 싶은 류제는 오만한 생각을 품었다. 이 바닥에 그런 사람이야 흔하다. 이상하게도 류제가 그런 타입의 사람과 얽히지 않는다는 게 결점이었지.

“날씨는 좋기만 하네.”

모자에 마스크에 점퍼로 무장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기지개를 쭉 켰다. 꽃샘추위에 찬 바람이 불어오던 하늘에 오늘따라 따스한 햇볕이 감돌아 기분을 좋게 환기해 주었다.

대본 리딩 현장은 장소가 공개되지 않아 팬들도 없고 평일이라서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이런 한적함이 좋다.

걷다 보면 가끔 알아보는 사람이 있기는 한데 도심 한복판에 선 아이돌도 아니니 커피 정도야 혼자서 구매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이번 드라마 응원할게요!”

“네, 고마워요. 장사 대박 나세요.”

다시는 들르는 일 없을 카페에서 테이크아웃 커피를 주문한 그는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사인을 나눠주고 인증 사진을 찍어준 후 양손 가득 커피 트레이와 서비스로 받은 과자들을 들고 횡단보도에 섰다.

연예인 오라를 빛내는 거대한 그를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어르신들이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공기는 차가운데 따스한 전경이 이질적이다. 차로에는 갈 길이 바빠 속력을 내는 차량이 있는 편이다.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그는 느긋하게 하품을 했다. 파란불로 바뀌자 망설임 없이 걸음을 걸으려는데 누군가 그의 등을 세게 끌어당겼다.

막 건너려던 참인데 귀찮게 또 뭐야. 사진 찍어달라는 건가? 진작 말 좀 하지. 사람의 실루엣만 보고도 잘도 알아본다니―

불이 바뀌었는데도 청색 용달 트럭이 도로를 내달렸다.

얼굴을 스치며 가버리는 트럭에 닿기 전 아슬아슬하게 멈춘 류제는 놀라 손에 든 커피를 깜빡 놓칠 뻔했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 달려오는 차를 못 보고 말았다.

“술에 취하나 깨나 병신 같은 건 똑같네.”

철렁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려니 옆에는 뚱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는 어떤 남자가 있었다.

“당신은……?”

제 목적을 이룬 남자는 퉁명스럽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낯설지 않은 그자가 류제를 멈춰주지 않았으면 드라마 진행에 큰 차질이 생겼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 바 없어 보인다.

대본 리딩이 다시 시작할 텐데 길을 건널 생각도 못 한 류제는 얼이 빠졌다.

후드와 청바지 차림이야 흔하다 치더라도 염색에 실패해서 붕 뜬 금색도 갈색도 아닌 이상한 황토색 머리가 눈에 익었다. 뿌리 염색을 하지 않아 정수리에 다갈색 심지도 어디선가 본 듯하다.

하늘을 담은 류제의 눈이 점점 커졌다. 최근 저것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본 적이 있었다. 알코올에 홀려 비몽사몽이었던 그가 벤치에 앉아 한탄하던 상대의 흐릿한 옆얼굴이 기억에 스쳐 지나갔다.

“잠깐만요!”

술에 취해 흐릿해진 기억이 단번에 상기된 류제가 이끌리듯이 그를 붙잡았다. 잘 가다가 팔이 잡히자 깜짝 놀란 이방인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망설임 없이 물었다.

“그때 그 사람 맞죠?”

술에 취하면 집으로 돌아가는 버릇이 있는 류제는 어렴풋한 기억을 짐작했다. 그 공원은 고등학생 때 자주 가던 곳이지만 현재 집에서는 꽤 거리가 있었다.

필름이 끊기면 자버리는 게 그의 주사인지라 혼자서 집까지 돌아오진 못했을 거다. 카드 내역을 보니 택시를 탔던 것 같은데 돈을 낸 기억이나 문을 연 기억이 없으니 저자가 도와준 것이 분명했다.

“댁은 좋겠네. 날 때부터 잘나서.”

헛소리를 하는 그에게 차갑게 대꾸하던 남자. 무시할 법도 한데 주정뱅이의 고민 상담을 진중하게 들어준 기억이 난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 여간 친절하지 않은가. 특히나 조그마한 일도 거품처럼 부풀려져 기사가 나는 위태로운 자리에 있는 그로서는 독특한 무관심이 상쾌했다.

“뭐야?”

지금도 마찬가지로. 무슨 문제 있나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는 부러 센 척을 하는 듯이 털을 세우는 것 같았다.

“저 기억 안 나요? 그때 새벽에 공원에서.”

류제가 마스크와 모자를 벗고 제 얼굴을 확인시켰다. 드라마 시작 전이라서 머리를 기르고 있어 수더분하지만 그의 독특한 외견은 흔하지 않을 테니 인상에 깊게 남았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억이야…….”

그자가 머뭇거렸다. 흔들리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당연히 기억할 것이다. 인상만큼은 류제는 자신 있었다. 아무리 눈이 어두운 사람이라도 그의 이국적인 푸른색 눈동자는 잊는 것이 불가능했다.

촬영하지 않는 날에는 렌즈를 끼지 않아 신비로운 눈동자가 그자를 응시했다. 난감한 듯 보이는 그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류제의 팔을 붙잡았다.

“뭐든 인도에서 말해.”

횡단보도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진 재회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가. 파란불이 깜박거리자 낯선 이는 류제를 붙잡고 건너편 인도로 향했다. 역시나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어 류제가 주절주절 반가움을 표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괜한 소리를 했던 것 같은데 감사하다는 말도 못 해서요.”

“몰라, 새꺄. 빚졌으면 돈이나 내놔.”

“시간 있죠? 보답을 하고 싶은데 저 좀 따라와 줄 수 있나요?”

평일 이 시간에 당연하게도 시간이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도 무례하다. 그러나 지금 헤어지면 다시는 저자와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직장에 다니는 건 아닌 것 같고. 프리랜서라고 치기에는 인상이 달랐다.

[(대표님): 그래, 네 마음대로 해. 난 이제 모르겠다. 어차피 오래 버텨도 3개월이잖아.]

화면을 확인한 류제는 옆에 있는 남자를 힐끗거렸다.

이상하게도 도와달라는 말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사이좋게 테이크아웃 된 커피와 과자 봉지를 들고 돌아온 그들은 대본 리딩이 시작되기 10분 전쯤에 사람들에게 커피를 나누어줄 수 있었다.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몰래 구경해도 되고.”

“아니 그러니까 여기서 뭐 하는 건데? 다단계냐?”

“대본 리딩이요. 금방 끝나요.”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라도 부탁대로 구석진 좌석에 앉아 얌전히 기다려주는 남자는 말은 험해도 영 순박한 사람임에 틀림없었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던 그의 진심을 들은 유일한 관객과 마주했기 때문인 건가, 리딩 중 류제는 선배들에게 고양된 감정을 지적받았다.

유명 배우가 지나가도 관심 없는 얼굴로 삐딱하게 앉은 그자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류제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스태프가 조연인 줄 알고 건넨 빵을 받고 얌전히 우물거리기도 한다. 목이 막혀 우유를 마시니 문득 그쪽으로 눈길이 간 류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테스트 촬영 때 봅시다.”

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후배들을 돌려보낸 류제는 제작진들과 가볍게 이야기를 나눈 후 구석으로 향했다. 세상에 찌든 눈을 하던 그자는 돌연 신기한 세계에 떨어져 이 어수선한 분위기도 좋다며 눈을 말똥거렸다.

“놀랐죠? 설명도 없이 끌고 와서 미안해요.”

“아니… 그… 티브이 나오는 사람인 건 알았지만…….”

대뜸 친한 척을 한 류제의 신분을 실감한 건지 그자가 주춤거렸다. 그를 올려다보는 저 어디선가 익숙한 날 선 눈매 때문인가 길들여지지 않은 고양이 같다.

눈은 크지만 눈동자가 작아 삼백안이 돋보이는 그자는 밝은 빛 아래에서 본다면 피곤에 찌들었을 뿐인 극히 평범한 남성이었다.

“기다리라고 한 이유가 뭐야?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해.”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나갔다가 들어왔다가 귀찮은 양반이네.”

굳이 이 사람이어야 한다는 이유가 있었을까? 가로등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주정뱅이 둘뿐이었던 것도 우연에 불과한데 스쳐 지나가면 그만일 사람을 이 정도로 챙겨주다니 그의 귀차니즘 가득한 성격과는 맞지 않았다.

나 몰라라 하는 윤 대표에게 부리는 심술이기도 했지만 애써 변명하자면 저런 사람이라면 사랑이니 뭐니 성가시게 굴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타요.”

조수석을 친히 열어주자 남자는 머뭇거리다가 올라탔다. 아무리 그가 이름이 알려진 배우일지라도 낯선 이를 억지로 끌고 가다니 경찰을 불러도 이상하지 않다.

그럼에도 그자는 류제의 외모가 주는 설득력에 홀리듯이 이끌려 버린 것처럼 보였다. 여간 휩쓸리기 쉬운 성격인지 안전벨트를 맨 그자는 문득 실수한 것처럼 불안했다.

“운전은 할 줄 알아요? 군대는 다녀왔고?”

시동을 켜고 액셀을 밟은 류제가 지체 없이 물었다.

“뭐… 대충. 운전병이었고.”

“나이는 어떻게 되는데요? 직장은 있어요?”

호구 조사를 하는 류제를 수상쩍게 흘긴 그자는 고개를 젓다가 마지못해 나이를 말했다.

같은 연도의 6월 출생. 류제와 동갑이었다. 어쩐지 초면에 반말을 한다 싶었더니 술주정을 하면서 자기소개를 했던 건가 류제는 기억이 아리송했다.

“이렇게 안 해도 떠벌리고 다닐 생각 없어.”

영 못마땅해 보이는 그자는 브레이크가 밟히자 안전벨트를 꾹 붙잡았다.

류제도 의심은 안 했다. 차림새나 인상을 보면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게 생겼지만 태도 자체는 썩 순진했으니까. 연기로 먹고사는 그가 봤을 때 그건 연기라고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업이다 보니. 몇 번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혀서 아프더라고.”

손을 움찔거린 그자가 류제를 흘겼다. 그나저나 통성명도 전이다. 운전을 하던 류제가 신호에 맞춰 액셀을 밟았다. 막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뀌었다.

“김류제, 배우명은 ‘신리’지만 친한 사람들은 이름으로 불러. 나도 동갑인데 말 놓을게. 그편이 일하는 데 서로 편할 테니까.”

“일? 뭐어… 그… 그래.”

어깨를 움츠린 그자는 전방을 주시하는 류제를 경계했다. 류제도 슬쩍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소개는 했지만 어째 상대방이 자기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도 기왕 인연이 닿은 것, 제멋대로 굴기로 한 류제는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핸들이 커브를 꺾었다.

“그러니까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참다못해 물은 그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비게이션을 본 류제는 목적지가 근접한 것을 확인했다.

“우리 회사.”

“그니까 왜 내가 네 회사에 가는 거냐고.”

“따라와 보면 알아. 나쁜 건 없어.”

사실대로 말하면 싫다고 내뺄 것 같으니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은 류제는 소속사 주차장에 차를 댔다. 어디 도망갈세라 그자를 붙잡은 류제가 꼭대기 층 대표를 찾았다.

“대표님, 이야기 좀 해요.”

무턱대고 사무실에 쳐들어와 사람을 대령한 류제를 제정신이냐며 바라보는 소속사 대표의 책상에 이름패가 놓여있었다.

[대표 이사 포르테 윤]

전화를 하던 중 들어온 류제를 노려보던 대표가 말을 줄였다. 그녀가 점차 미간을 구겼다.

“이따가 통화할게.”

그녀가 큰 한숨을 내쉬었다. 한 기획사 대표의 체면상 손님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다. 책상 연필꽂이 옆에 있던 명함 케이스를 뒤지던 그녀가 손님에게 손짓을 했다.

“명함이나 받아요.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주겠어.”

쓸데없이 몇백 장씩 인쇄해 쌓아놓은 명함을 연예계와 하등 관계없어 보이는 남자에게 넘겨준 그녀의 심정은 썩 좋지는 않아 보였다.

떨떠름하게 명함을 받은 그자는 무덤덤하게 내용을 읽었다. 대표의 본명은 윤홍도. 조선 시대 화가 이름인 주제에 연예 기획사 대표인 그녀는 40대치고는 젊은 인상이었다.

“또 사고 쳤냐?”

“또라뇨. 제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저는 항상 사고를 당하는 쪽이지 않나요?”

“그럼 그 사람은 누구야?”

“제 다음 매니저요.”

두 사람 다 잘못 들은 것처럼 고개를 팩 돌렸다.

“뭐라고? 내가? 언제부터?”

“아는 사람 맞아?”

“저번에 같이 술 먹다가 친해졌어요. 괜찮은 사람 같아서요.”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네. 반응을 보자니 저 사람도 모르는 이야기 같은데.”

류제가 답하기도 전에 그자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류제의 막무가내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으면 꾹 붙은 입이 헤 벌어질 정도였다.

“실례지만 뭐 하시던 분인지 물을 수 있습니까?”

“…막노동했는데요.”

심지어 공사판에서 굴러먹던 놈이다. 류제도 썩 별난 놈이었지만 사리를 분별하는 머리는 모자라지 않아 막무가내로 일을 벌이지는 않기에 믿고 내버려 두는 편인데 이건 또 무슨 경우란 말인가.

윤 대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는?”

“고등학교 중퇴했는데요.”

맙소사. 일반화하는 시선을 숨기지 않은 그녀가 손님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필이면 막노동하다 온 중졸 놈이야.

“알아서 하라고 했다고 내 성질머리를 쑤셔 박는 거지?”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에요.”

“너는 항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잖아. 어디서 만났는데?”

“말했잖아요. 저번에 술 마시다가.”

“미치고 팔짝 뛰겠네.”

“이 사람으로 해줘요. 난 이 사람이랑 일하고 싶어.”

배우는 저마다 고집하는 게 있어서 그 부분이 충족이 안 되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건 류제도 마찬가지였다. 골치가 아파 눈을 질끈 감은 대표가 머리를 싸맸다.

최근 있었던 수라장 때문에 류제의 현장 매니저가 급한 건 사실이다.

류제의 매니저는 귀하다는 여자 매니저들만 들어오는데 죄다 담당 배우와 안 좋게 얽혀서 잘렸다. 남자 매니저를 원했긴 했어도 신분 모를 사람은 아니지 않나.

“막노동을 했다니 체력은 좋겠네. 하필이면 왜? 매니저 일은 해봤대?”

“딱히 남의 사생활에 관심 없는 사람일 것 같아서요.”

“말고 저 사람 사생활이 중요하지. 뒷말 나올 만하면 곤란해.”

눈앞에서 흉을 보았어도 그자는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울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참은 것을 보면 그런 취급이 익숙한 듯했다.

“말했죠?”

주머니를 뒤지던 류제는 그녀와 나누었던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는 그녀의 심기를 쿡쿡 쑤시며 실컷 마음대로 해대는 중이었다.

“바쁜 일 끝나면 제대로 구해줄 생각이었어, 난.”

“알아요. 제가 급하니까 그렇지.”

류제가 처음 만난 사람을 이 정도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경우가 드문지라 속는 셈 친 포르테가 류제의 의견을 수용했다. 어차피 3개월도 못 버틸 테니 그동안 제대로 된 매니저를 구해주기로 속으로 타협한 듯했다.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얼렁뚱땅 계약서가 인쇄되었다. 대표의 도장이 찍힌 계약서를 들고 나온 류제는 빈 사무실에 그자를 데리고 앉혔다.

마음이 복잡해 보이는 그자는 글자가 가득한 계약서를 대충 훑더니 류제가 보내는 시선을 외면했다. 이제 와 설득할 생각으로 싱글싱글 웃는 류제는 그와 일할 때 좋은 점을 태평하게 나열했다.

“최저 시급보다 조금 더 쳐줄게. 바쁠 때만 바쁘고 안 바쁠 때는 여유로워서 자유 시간도 많아. 연예인들도 볼 수 있고. 괜찮지?”

“내 의견은 한 톨도 안 듣더니 이제 와서 무슨. 내 사정은 신경도 안 쓰냐?”

“그래서 지금 묻고 있잖아. 다니는 직장이 있어?”

“없긴 한데. 사람을 너무 믿지 마라. 우리 이제 두 번째 만난 거거든?”

하기야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계약서에 사인을 종용하는 것도 웃기다.

물론 매니저란 직업이 시급도 짜고 막일이 대부분인 데다 연예인의 스케줄에 맞춰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일이 몰리면 힘들지만 배우 매니저는 초심자에게도 쉬운 편이었다. 류제는 그 점을 피력했다.

“술 취했을 때 사정 들어준 게 고마워서 그래. 너처럼 입 무거운 사람도 좋고.”

“아니 그건 내 알 바가 아니니까 그런 거지. 매니저나 코디나 죄다 너한테 반해버려서 진흙탕 싸움 여파로 일손이 부족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은 건 역시 류제 그가 특출나게 잘생겼기 때문이다. 눈이 돌아갈 만큼 잘생겼다는 건 인정하는지 그자가 짜게 웃었다.

“나야 뭐 돈만 벌 수 있으면 상관없는 인생이지만 나중에 뒷말하지 마. 난 네가 일하라고 해서 일한 거니까.”

“몸을 많이 쓰는 직종이라 감만 좋으면 잘 해낼 거야. 운전이나 내 스케줄 관리 위주로 움직이면 돼. 다른 사람 말 들을 필요도 없고.”

하도 고된 직종이다 보니 3개월 이상 버틴 매니저도 드물다. 연기자 중에서도 풍문을 곧잘 일으키는 류제는 포르테의 생각처럼 어차피 이 사람도 그 정도 버티고 나가겠지 싶었다.

일은 내일부터 수습 기간을 거칠 것이다. 여러 장의 계약서에 사인하던 그자가 의심스럽게 물었다.

“나 진짜 이런 일 해본 적 없다? 두말하기 없기다?”

“지켜야 할 것만 잘 지키면 감정 상할 일 없을 거야. 물론 그건…….”

류제가 뜸을 들이자 마지막 계약서에 사인을 하기 전 그자가 고개를 들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게 뭔데.”

“별거 없어. 내 사생활에 참견만 안 하면 돼.”

“말은 똑바로 해라. 너랑 사귀겠다고 혼자 지랄하다가 잘린 전 매니저처럼 굴지 말라는 거 아냐.”

“잘 아네.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자르고 싶지 않거든. 미안하기도 하고.”

류제가 씁쓸하게 말했다. 그건 진심이었다. 타인의 감정을 멋대로 밟을 위치는 아니겠지만 받아줄 수 없는 감정을 강요받는 것은 지쳐버렸다. 그런 것은 가상의 드라마 배역에게만 해줬으면 한다.

“어처구니가 없네. 난 남자야, 이 멍청아. 먹고살기도 힘든데 남의 사생활은 또 알 게 뭐야. 돈 떼어먹지나 마.”

“의외로 못 지키는 사람들이 많더라고.”

반응을 보니 사람을 제대로 찾은 것 같다. 류제는 계약서에 써져 있는 이름을 기억하며 손을 내밀었다.

“당분간 잘 부탁해요, 신재경 씨. 스케줄은 이따가 보내줄 테니까 숙지하고.”

“어어… 뭐, 나도 잘 부탁해.”

두 사람이 손을 마주 잡았다. 류제는 다년간 받은 로맨스 드라마의 주역으로 만들어진 상냥함을 마음껏 드러내며 재경을 환영했다. 미소를 받아주는 재경은 복잡 미묘한 안색을 한숨과 함께 숨겼다.

* * *

돌연 등장한 신재경이라는 독특한 인물은 류제가 원하는 인간상에 맞게 선을 잘 지켰다.

제 개인적인 사정을 떠벌리며 관심과 동정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초반에는 모르는 게 많아 실수가 잦았어도 자기 선에서 해결하고 업무가 아니면 귀찮게 연락하지 않았다.

식사도 웬만하면 따로 먹으려고 해서 동갑내기 동성 친구가 드문 류제가 서운할 정도였다. 오늘도 업무상 회사에 와있던 재경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한 사람도 류제였다.

[점심 어떻게 할 거야?]

[(신재경 매니저): 회사 식당]

[같이 먹자. 바로 출발하게.]

[(신재경 매니저): ㅇㅇ]

답도 간단하다. 스케줄 전달도 이만큼 깔끔했다. 업계가 돌아가는 흐름을 하나도 모를 만큼 배우 일에 관심이 없는데 월급쟁이는 좋다며 시키는 대로 잘 해냈다.

똑똑한 건 모르겠지만 몸 쓰는 건 잘해서 걸 그룹의 안무를 한 번 보고 대강 외우니 천직인가도 싶다.

그도 재경도 서로 지켜야 할 선만 넘지 않으면 불행해지지 않았다. 또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회인으로서 타인에게 취해야 할 적절한 거리감이 아닌가.

드디어 쓸 만한 매니저가 생겨서 숨통이 트이는 류제는 직업 본연의 일인 연기에 충실했다.

반면 하나부터 열까지 배울 게 천지인 재경은 스케줄 숙지는 물론 유동적으로 변하는 일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느라 지쳐 보였다.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할 텐데도 불평 없이 묵묵한 모습은 의외다. 보기와는 달리 인내심이 큰 걸까. 일주일도 못 채우고 때려치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정말 저 사람이 네 새 매니저라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또 이상한 사람이 걸린 걸지도 몰라. 당분간 조심해.”

“괜찮은 사람이야. 아마도.”

류제와 같은 소속사이자 걸 그룹 ‘DAYBREAK’ 출신인 우승아, 아이돌명 ‘비키’는 고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절친한 친구 중 한 명이다.

1학년 때부터 류제의 불행을 눈 뜨고 지켜보았던 그녀는 새 매니저가 영 탐탁지 않은 듯하다.

“중졸이 괜히 중졸이겠어? 범죄자라면 어쩌려고 그래? 나중에 매스컴 타면 귀찮아져.”

“인상은 저래도 보기보다 얌전하니 좋은 사람이야.”

“그건 네 생각이지. 말투나 행동거지가 험해 보이는 것에 동의해.”

무뚝뚝한 표정에 류제처럼 외국 혼혈이라 자연 금발을 가진 모델 니냐(본명 강솔라)도 동조했다.

길쭉길쭉한 다리게 길게 뻗고 새하얀 피부나 오뚝한 콧날이 아름다운 그녀는 고귀한 옆선을 그리면서 덤덤하게 책을 읽었다.

“나도. 특히 류제 넌 사람 보는 눈이 없잖아.”

이곳에 모인 네 사람 모두 류제가 말하는 ‘좋은 사람’을 믿지 못했다. 누군들 믿을쏘냐. 당한 것들이 많기에 류제도 그녀들의 걱정을 십분 이해했다.

“이상하게 류제 군의 매니저만 별별 사람이 다 얽히더라. 저저번에 간신히 구했던 남자 매니저는 조폭 출신에 대표님 협박까지 했잖아. 문신도 무섭고 간도 컸어. 그건 예사고 좋게 나간 매니저가 한 명도 없지.”

귀엽지만 성격이 우유부단한 오나르, 아이돌명 ‘유네’는 재일 교포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한국에서 살아서 한국말을 잘했다.

어릴 적 버릇 탓에 항상 이름 뒤에 호칭을 붙였는데 나름 콘셉트랍시고 지금껏 고치지 않았다. 이쯤 되면 그녀도 즐기고 있는 듯하다.

“3개월에 한 번씩 매니저가 바뀌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지. 소문이 이상하게 돌걸. 따지고 보면 류제가 잘못한 건 없는데.”

“맞아. 기자들은 그런 걸 맛있게 본다고. 이번 매니저도 터지면 왕! 물어뜯길지도 몰라.”

컴백 곡에서 소악마 역할을 맡은 미나도 카메라 앞에서만 하는 사자 흉내를 내며 경고했다. 별걱정이 많은 그녀도 썩 저 매니저와의 미래를 좋게 보지 않았다.

“순진한 척하면서 SNS에 별별 루머를 다 뿌리는 사람이면 대표님이 또 고소 준비해야 한다고 욕할걸.”

TE 소속 매니저들도 배우 사생활을 SNS에 상의 없이 쓰는 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조항을 무시하는 사람을 고려해 법의 심판이 내릴 거라 겁을 주지만 이따금 스릴과 관심을 즐기는 사람이 있었다. 류제의 새 매니저는 이런 부분에서 또한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정말 괜찮다는데도.”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었나? 나중에 또 술 마시자면서 징징거리지 마. 우리 지금 그럴 때 아니니까.”

“안 그래. 언제 징징거렸다고 그래?”

“매니저 그만둘 때마다 징징거렸어. 그렇지?”

“똑똑히 기억나는데.”

류제는 그렇지 않다며 한사코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증거 메시지들과 동영상이 연이어 디밀어지자 입을 다물었다.

그녀들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한 걸 보니 놀리는 건 아니다.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싶은 만큼 상처를 많이 받았던 류제의 성격을 알아서 그녀들도 예의주시하려는 모양이다.

그녀들이라도 있어서 마음이 놓이는 한편 동성 친구였다면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을 거라 못내 아쉽다. 먹이를 사냥하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집에 초대하는 것도 어려워서 최근에는 같이 놀지 못했다.

“그래도 한창 바쁠 때 매니저가 있어서 다행이다. 드라마 이제부터 촬영이라며? 힘들겠네. 우리도 식단 조절 중이라 죽겠어.”

“배고파. 고기 마음껏 먹고 싶다. 마카롱 먹고 싶다.”

“인기를 위해서잖아. 요즘 잘나가니 통장 잔고 보면 스트레스가 싸악 내려가겠네.”

며칠 전 유명 동영상 사이트에 ‘DAYBREAK’의 컴백 티저 영상이 올라왔는데 저번 앨범보다 반응이 뜨거웠다.

요즘엔 외국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길이 잘 열려있어 국내외적으로 승승장구하는 중이지만 센터인 비키는 영 못마땅해 보였다.

“난 그냥 그래.”

“넌 1등 못 하면 항상 그냥 그렇다고 하잖아.”

“사람들은 원래 1등만 기억해. 신인들은 매년 폭풍같이 들어오고, 요즘 사람들은 아이돌보다는 다른 걸 더 좋아하고. 이런 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1등이 아니면 안 돼.”

비키의 1등론을 잘 듣던 미나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게 싫으면 악착같이 돈 벌고 빨리 떠야지 뭐.”

“류제 닮아가지 마. 미나 너 그거 다른 사람 앞에서 말하면 큰일 난다.”

“안 해. 난 누구처럼 막 떠벌리고 다니지는 않거든.”

옛날처럼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는 가수는 나오기 힘들다지만 이미지로 먹고사는 직종의 특성상 컴백 반응 댓글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진이 빠졌다.

스케줄은 또 어떤가. 인기 예능에, 음악 방송에, 라디오에, 지방 공연에, 대학교 축제에.

온갖 곳에 불려나갈 미래가 벌써부터 까마득했다. 노래와 춤만으로 성공하기엔 바닷물이 참 빨갛다. 차라리 모델인 솔라의 입장이 나았다.

“대표님은 그런 거 싫어해서 다행이지만 매니저 언니들이 그러는데 또 스폰 제의 들어왔대. 으으, 진짜 왜 그러는가 몰라.”

“윤 대표님 무서운 줄 몰라서 그러지. 시대가 어느 땐데. 언제쯤 그런 게 없어지려나.”

특히나 나르는 심약해서 업계에 몸담을 때 필연적으로 겪어야 하는 일들을 버티기 힘들어했다.

방송국 높으신 분들의 압박이나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악플을 다른 멤버보다 크게 느껴서 연예계에서 빨리 발을 뺄 거라고 매일같이 투덜거렸다.

“힘내, 나르야. 개인 카페 차린다는 건 잘되고 있어?”

“아빠가 도와주고 있어. 활동 끝나면 카페 브이로그를 올려볼 거야.”

아기자기한 걸 좋아하는 나르는 차라리 그런 걸 잘할 듯하다. 본가가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애초부터 등 떠밀려 아이돌이 된 거라 동기가 부족한 나르는 성공을 위한 절박함이 덜했다.

반면 승아는 몇 년째 독기가 차서는 여전히 세계 무대를 노렸다. 말은 안 하지만 부모님 두 분 다 원로 가수라고 알고 있다.

남매들은 다른 길을 걸었지만 비키는 부모님을 존경해서 아이돌로 데뷔했는데 나중에는 꼭 솔로로 성공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류제 너도 힘내. 이번 드라마 기대치가 높던데. 해외에서도 반응이 뜨거워. 우리 팬들도 너 이야기 많이 하더라.”

“나도 잘되면 좋기는 한데 내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많지.”

“세라 선배님이랑 같이 하는 거지?”

“어.”

배우 강세라는 트리카 엔터테인먼트에 와서 알게 된 사이로, 류제와는 작품을 자주 함께 했던 선배였다.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 역인데 류제는 세라의 강렬하고 매력적인 연기에 눌리지 않고 잘 이끌어나갈 엄두가 안 났다. 주연의 자리는 무겁기만 했다.

“이번 작품 끝날 때까지는 매니저가 남기를 바라야지.”

[(신재경 매니저): 끝났음. ㅇㄷ?]

진동이 오자 류제가 바로 메시지를 읽었다. 그녀들은 복귀 때문에 식단을 검사받는 중이라 당분간 함께 식사를 못 했다. 그래서 오늘은 매니저와 사내 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후 스케줄대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럼 난 밥 먹으러 갈게. 수고해.”

“나중에 봐.”

“활동 끝나면 같이 술이나 해. 술 마시는 이유가 부디 좋은 일이길 빌게.”

류제는 걱정해 주는 그녀들에게 짧게 웃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질긴 인연으로 이어진 사이이니 잠깐 하는 작별 인사도 각별하지 않다.

성급하게 뜀박질하는 류제가 어떤 남자 앞에 멈춰 섰다. 칙칙한 황토색 머리를 보아하니 문제의 매니저다.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류제의 새로운 매니저를 살피던 나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부터 느꼈던 건데 저 사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머리색은 다르겠지만 날카로운 눈매라든가 못마땅한 표정이 눈에 익었다. 최근에 본 사람은 아닌데. 뭐지?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나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가수였었나?”

“아냐, 가수 중에는 저런 사람 없어. 나쁜 의미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들 모두의 기억에 남은 사람이라면 연예계 관계자일 가능성이 큰데 류제 말로는 새 매니저는 이쪽 일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대표님이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또 징징거리면서 연락 안 왔으면 좋겠네.”

“우악! 안무가 쌤한테 전화 왔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어.”

“혼나기 전에 빨리 가자. 그럼 솔라도 내일 봐!”

“촬영 잘해.”

오늘도 맛없는 풀떼기를 다 해치운 그녀들은 부족한 감이 있는 배를 문지르며 연습실로 향했다.

오후에 잡지 촬영이 있던 솔라는 인터뷰할 내용을 생각하다가 류제와 함께 있는 남자를 흘겼다. 다시 눈을 책으로 돌린 그녀는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어린애도 아니고 류제가 알아서 할 일이겠지 싶다.

아침부터 아파트로 출근해 류제를 이곳에 데려다준 후 제 할 일을 하고 돌아온 재경이 태블릿 PC를 안고 걸어왔다. 추가된 스케줄이나 여타 촬영장에서의 주의해야 할 점들을 숙지하고 온 듯하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식권을 사려는데 재경이 류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촬영장에 가기 전 간단히 메이크업을 받은 류제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른 채였다.

“렌즈는 안 끼냐?”

“촬영할 때 렌즈 끼는 건 어떻게 알았어?”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그런 세세한 것까지 지적하니 신기하다. 순간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재경이 뭐 그런 걸 또 물어보냐며 혀를 찼다.

“드라마 홍보 사진하고 다르잖아. 내가 아무리 멍청하기로서니 그것도 못 알아볼 것 같냐?”

“현장에서 낄 거야. 제작진이 드라마에 맞게 지정해 준 렌즈가 있거든.”

“별걸 다 지정하네.”

모델 일을 할 때에는 안 껴도 상관없었는데 눈동자 색이 다르면 이질적인 느낌이 강해서 보통 드라마를 할 때는 검은색 렌즈를 꼈다.

눈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건 싫지만 주인공 눈이 파란색이면 한국인들은 감정 이입이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다.

“촬영이 세 시부터랬는데.”

“그럼 빨리 먹고 이 닦고 출발하면 얼추 맞겠네.”

배식을 받고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수저를 들었다. 평소 재경은 식성이 좋아서 뭐든 잘 해치웠지만 오늘은 몇 술 들다 말고 머뭇거렸다.

“맛없어? 우리 사내 식당 꽤 괜찮은 편인데.”

“맛이야 있지. 겁나 싸서 좋긴 한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첫 촬영인데 안 떨리냐? 연기 안 하는 나도 긴장돼서 죽겠구만.”

어제는 멀쩡해 보이더니 좀 전에 대표에게 불려가 강하게 경고를 받은 듯하다.

재경의 행동거지나 말본새는 원초적인 편이라서 안 그래도 요 며칠 경고를 받았다고 했다. 촬영장은 특히나 사람이 많이 찾아오니 가만히 닥치고 있으라고 마스크까지 줬댄다.

“대표님이 괜히 겁주는 거지. 매니저는 현장에서 할 거 별로 없어. 내 마실 물 좀 챙겨주고, 연기 괜찮나 봐주고. 내 컨디션만 봐.”

“연기를 봐야 한다고? 내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자연스러우면 돼.”

“나 연기는 진짜 모르는데. 집에 티브이 없어서 드라마도 못 보고.”

거기에 핸드폰까지 구닥다리라 드라마 한 편 보려다 속 터져서 뒷목 잡고 먼저 쓰러질지도 몰랐다. 젊은 세대라 스마트폰에 익숙할 법도 한데 재경은 의외로 기계치였다.

요즘 세상에서 드물게도 흔히 쓰는 메신저 아이디도 없었다. 연락 대부분은 SMS나 전화로 한다는데 핸드폰 기종이 오래되어서 인터넷 쓸 때마다 5초를 기다려야 하는 것은 예사였다.

원활한 일정 관리를 위해 회사 차원에서 펜을 쓸 수 있는 태블릿 PC를 지원해 줘서 요즘에는 그걸 가지고 이리저리 노는 것 같던데. 처음에는 헤매나 했더니 지금은 태블릿에 익숙한 앱들이 여러 개 깔려있었다.

“드라마는 안 보는 사람은 안 보긴 하지. 이번 기회에 한번 봐. 기왕이면 내가 나온 걸로.”

“괜찮겠냐?”

“왜?”

“난 남들이 내가 나온 동영상 보면 쪽팔리던데.”

“그래? 독특하네.”

“몰라. 그냥… 별로 그런 거 안 좋아해. 아는 사람이 나온 것도 잘 못 보겠어.”

“보통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곤……. 아, SNS 안 한댔지.”

“신상 정보를 대놓고 자랑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그건 나도 동감이야. 그래도 연기는 좀 봐줘. 매니저잖아.”

어쩐지 관심을 구걸하는 것 같다. 이전 매니저는 당연하게 해주던 것인데 상황이 역전된 것 같아 류제는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사람은 또 처음이다. 일만 아니면 하등 관계없다는 저 태도 좀 봐. 좋기는 한데 자존심이 상했다.

“너 대본 읽는 거 구경하는 거로도 충분해.”

“카메라에 담기는 건 대본 읽는 거랑은 다르지.”

격식이 없는 말투 탓인가 거리감이 이상하다. 동갑에 동성이라서인가 같이 일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몇 년은 알았던 것처럼 친근해서 정이 금방 생겼다.

사생활에는 간섭하지 말라고 지적했으면서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어쩐지 막역한 사이를 흉내 내는 것 같다.

“나중에 시간 되면. 지금은 일 배우는 걸로도 벅차.”

“현장에 있으면 보고 싶어질지도 몰라.”

부담이 되었는지 재경은 밥을 먹다 체할 것처럼 물을 마셨다.

식사 후 준비를 마친 그들은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이동했다. 서로 다른 긴장감을 품은 그들이 흔들리는 차체 안에서 침묵했다. 첫 촬영에서 가닥을 잘 잡아야 하는 류제는 눈을 감고 캐릭터에 집중했다.

힐끗, 운전하는 재경을 본 류제는 새 매니저의 운전 실력이 마음에 들었다. 매니저를 상시 모집으로 받다 보면 여러 가지 상황을 고려 못 할 때가 많았다. 그중 하나가 운전 버릇이다.

깜박이를 안 넣는다거나 불이 바뀔 때 질주하는 등 연예인을 태운 차임을 망각한 게 아닐까 할 만큼 운전을 험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다행히 재경은 안전 운전파였다.

운전병 출신이 사실인 듯 운전은 정석이다. 매니저가 과속을 하는 이유는 보통 지각할 것 같아서인데 재경은 항상 스케줄 30분 전부터 주차장에서 대기하는 편이기도 했다.

새내기 효과가 있는 건가 여태 지각한 적은 없다. 막무가내로 시작한 일이라지만 책임감도 있고 보기와는 달리 부지런했다.

주차를 마친 재경이 운전석에서 내리기를 기다려준 류제가 인솔 선생님처럼 그를 이끌었다.

“오늘은 견학이라고 생각해. 대표님 말에 너무 겁먹지 말고.”

류제는 진심으로 이번 매니저가 오래 일하기를 바랐다.

현장이 잘 보이는 곳에 재경을 세운 그가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린 후 옷을 갈아입으러 떠났다. 렌즈를 끼고 배역에 맞는 옷을 입은 류제가 동료들에게 인사를 했다.

조명이 켜지고 곧 촬영이 시작되었다. 플레이트 소리와 함께 몇 대의 카메라가 배우들에게 집중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나가라고 했잖아요!”

“나갈 거예요. 그쪽이 먼저 나가면.”

“항상 그런 식이에요?”

“뭐가.”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냐고. 우리 언니도 그렇게 찼어요?”

드라마 촬영이란 순서가 뒤죽박죽이라 류제는 앞뒤 설명도 없이 상대방에게 화를 냈다. 그런 상황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1분 1초가 아깝게 몰입했다.

물병을 들고 어색하게 서있는 재경이 멀리서 지켜보았다. 카메라 속 류제의 연기가 보일락 말락 한다. 아까 막 웃으면서 인사한 상대역 배우에게 날 서게 말할 수 있는 성질머리가 신기하다.

“엄청나네. 짜식이.”

재경은 아직도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가 이런 화려한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니 운명도 참 웃기다.

“컷.”

감독의 사인이 떨어지자 연기자들에게 매니저들이 쪼르르 달라붙었다. 뜨거운 조명 때문에 여배우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매니저하며 쪽 대본을 주는 사람하며 다양도 하다.

대표의 나대지 말라는 경고를 떠올린 재경이 머뭇거리자 류제가 손짓했다. 재경이 눈치껏 다가와 물병을 주었다.

“어땠어?”

“진짜로 화난 줄 알았어. 갑자기 화를 내다니 상대방도 놀랐겠네.”

물을 마시다 만 류제가 웃겨서 물을 뿜어낼 뻔했다.

“안 좋게 헤어진 전 여친의 여동생과 싸우는 장면이야.”

“막장 아침 드라마냐? 어메이징하네. 우리 할머니가 그런 걸 좋아하긴 하더만.”

새 매니저의 성격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준다. 류제 그처럼 로맨스 드라마를 이해 못 하는 타입인 게 마음에 들었다.

오래도록 배역을 연구하느라 여자들이 원하는 판타지를 외우고 있는 류제가 변명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시나리오에 판타지가 섞여서 그래. 전생에서 안 좋게 헤어진~ 뭐 그런 복선인 거지.”

“오글거려. 잘도 그런 설정을 쓴다.”

“세상엔 운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나 봐.”

“운명이라. 별 무슨…….”

재경은 말을 줄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보였지만 류제는 듣지 못했다.

다른 배우들이 나오는 신을 촬영하는 동안 류제는 재경에게 촬영 현장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제작 팀, 카메라 팀, 오디오 팀, 조명 팀, 분장 팀, 각 배우의 코디네이터들, 재경과 같은 매니저들, 한 장면을 찍는 데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이 담겨있었다.

“요즘엔 많이 바뀌었지만 현장이 가장 힘들어. 최근 CG 넣는 드라마가 많아져서 포스트프로덕션도 꽤 시간이 걸린대. 다른 사람 돈 빨아먹는다고 다들 고생하지.”

“포스트… 어… 그래.”

“촬영을 했으니 편집을 해야 하잖아. 그걸 말하는 거야. 가끔 재녹음할 때도 있으니 기억해 둬.”

“그런 후에 드라마가 방영되는 거야?”

“그렇지. 상상했던 것보다 좋은 장면이 나올 때도 있고 실망스러운 장면도 나오고. 부족하다 느낄 때도 많아. 그래도 다 만들어지면 뿌듯해.”

그렇게 말하는 류제의 얼굴에는 배우로서 자부심이 담겨있었다.

“대단하네. 난 못 견딜 것 같은데.”

“천성이 광대라서 그래. 관심이 돈이라는 걸 알아버리면 싫어도 이렇게 되거든, 하하하.”

“이야, 발언 하나 아슬아슬하네. 대표님한테 혼나도 모른다.”

“네가 비밀로 해주면 되지.”

불평불만으로 시작한 관계라서인가 공인이 거쳐야 하는 필터가 들어있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이 정도로 솔직하게 굴지는 않는데.

제 말을 듣고 짧게 웃는 재경을 보자니 이전 매니저들에게 그렇게 당해놓고도 자제가 안 된다.

“지방 야외 촬영도 늘어나고 날도 더워질 텐데 서로 고생 좀 하자.”

물병을 돌려받은 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노동을 해서 체력은 자신 있다며 어깨를 돌린 그가 단단한 근육을 자랑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촬영이 끝났다. 내내 류제를 서포트한 재경은 수분기 쫙 빠진 꼴뚜기처럼 늘어졌다. 촬영 감독에게 인사를 한 류제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간 후 다음에 있을 촬영 준비를 해야 하는데 혼이 나간 매니저가 여태 정신을 못 차렸다.

“아무래도 첫 촬영은 힘들겠지.”

자신만만해하던 게 몇 시간 전인데. 류제의 점퍼를 거꾸로 입고 꾸벅꾸벅 조는 재경의 손에 물병이 떨어질락 말락 흔들거렸다. 류제가 재경을 깨우려는데 누군가 다가와 인사했다.

“수고했어요.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가 처음 소속사로 들어왔을 때 연기 지도를 해주었던 상대역 강세라다. 역시 오늘도 배울 점이 많았다. 그녀의 연기를 존경하는 류제는 그녀의 커리어처럼 배역을 넓게 소화해 내고 싶었다.

“오늘도 지도 감사드립니다, 세라 선배.”

“지도라니요. 류제 씨도 어엿한 배우잖아요.”

“으헤악!”

낯선 이의 말소리에 꾸벅꾸벅 졸던 재경이 깜짝 놀라 일어났다. 멀뚱히 눈을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털이 쭈뼛 선 고양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다 벌떡 일어나 덩달아 인사를 했다.

“아… 안녕하세요!”

류제의 새 매니저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세라는 웃으면서 자기소개를 했다.

“강세라예요. TE 소속 새 매니저시죠? 나중에 회사에서 또 봐요.”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촬영장을 나서는 세라는 선배다운 우아한 포스로 사라졌다. 잠이 덜 깨서 어안이 벙벙한 재경이 제 손을 들어 보였다. 연예인하고 처음 악수를 해봐서인지 손이 떨렸다.

“우와, 신기하다. 인사를 받아줬어. 엄청 예쁘고 착한 사람이네.”

“하하하, 다른 분들도 인상 하나는 강렬할 텐데?”

“저런 사람을 보고 예쁘다고 하는 거야.”

재경도 류제를 따라 열심히 관계자들과 안면을 트고 다녔지만 9할은 무시당했다.

하도 판이 빠르게 바뀌는 세계라 새내기 매니저의 인사는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인사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아야 하는 세계라니 류제는 문득 씁쓸해졌다.

“바빠서 그렇지 다른 분들도 알고 보면 괜찮아. 요즘엔 인사만 해도 좋게 기억해 주니까 꾸준히 해. 내 얼굴 대신이다 하고. 잘 부탁해.”

드라마 제작 팀은 물론 연기자들 또한 남의 매니저까지 신경 써줄 여력은 없었다. 배우의 매니저가 다른 회사 연기자들까지 챙겨줘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두루뭉술하면서도 나쁘지 않은 굴곡 없는 인간관계를 원하는 류제는 힘내라며 재경의 등을 두드렸다.

“나도 별로 잘리고 싶지 않아.”

달에 받던 돈 중에 제일 많이 벌고 있고. 중얼거리던 재경은 조금 씁쓸해 보였다. 그건 그의 개인적인 사정 때문일까. 뭐라 말해주기 전에 재경은 운전석에 올라탔다.

“뭐라도 먹을래? 재경아, 넌 배 안 고파?”

“난 됐어.”

동성 친구가 없는 류제는 가깝게 지내도 별 탈 없는 남자 매니저와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제가 한 말이 있어 매니저의 사생활에 간섭할 여지가 없던 류제는 이내 한 걸음 물러서며 뒤따라 차에 올라탔다.

“그래, 그럼 집 앞에 내려줘.”

변덕을 부려봤지만 사람이 하도 빨리 바뀌니 함께 지낼 시간은 길어봤자 1년일 거다.

저 사람은 어떤 이유로 나가게 될지 모르겠지만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겠지. 류제는 자기가 했던 결심을 먼저 무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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